5화 상처 받지 않게 노력해줘서, 고마워요
조회 : 1,234 추천 : 2 글자수 : 4,956 자 2022-09-23
여울의 집요한 질문에 정우림의 눈빛이 사늘해졌다. 그는 여울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대체 뭐가 알고 싶은건데?”
초점없는 눈빛으로 코 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놀라 여울은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여울의 몸에 선반이 부딪치면서 소품으로 있던 촛대가 떨어졌다.
팅그르르르-
촛대가 굴러간 쪽을 바라보자 그 자리에 차석진이 서 있었다.
‘!!!’
차석진을 본 두 사람은 동시에 놀라고 있었다. 오히려 덤덤한 표정의 차석진은 천천히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이거.”
차석진은 촛대를 정우림에게 건넸다. 정우림은 살짝 떨리는 손으로 촛대를 받았다.
“정 작가님. 지수랑 옛 연인이셨다고요?”
“!!!”
“본의 아니게 듣게 됐네요.”
정우림은 차석진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옛 연인 사이였던 것보다 더 두려웠던건 이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수랑 키스 한 것 까지 말이에요.”
‘!!!’
“아.. 이런. 너무 많은 것을 다 듣게 되었네요.”
차석진은 여유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날카로운 질문을 정우림에게 던졌다.
“옛 연인 인건 뭐.. 이해 할 수 있지만. 키스는 왜 한건지.. 송여울 실장처럼 나도 궁금해지네요.”
정우림은 바짝 마른 입술을 힘들게 떼었다.
“실수.. 였습니다. 정말입니다.”
“실수 였다.. 후.. 실수 였다네요. 송여울 실장님. 듣고 싶었던 대답 들은 거 같은데 그만 가죠.”
차석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여울도 아무말 못하고 차석진을 뒤따라 나섰다.
.
.
차석진과 송여울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어쩔 줄 몰라하는 여울과 달리 덤덤해 보이는 차석진은 말했다.
“송여울 실장님.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
차석진을 따라간 곳은 차석진의 사무실 이었다. 여울은 잔뜩 겁을 먹은 아이처럼 주눅들어 있었다. 차석진은 소파에 앉은 후 손을 내밀며 앉으라고 했다.
자리에 앉은 여울은 아무 말 없는 잠깐의 시간도 숨이 막힐 듯 했다.
“난 이제야 의문이 좀 풀리네요.”
차석진의 말에 모르겠다는 듯 여울이 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송여울 실장이 날 보던 눈빛 말이에요. 그 이유를 알았다고.”
차석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차석진은 천천히 설명했다.
“웨딩 촬영 날 왜 날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봤는지, 날 향해 왜 황소처럼 뛰어들었는지. 또.. 내게 전화해서 예정대로 식을 할 거냐는 말도.. 카페에서도 오늘도 계속 죄송하다고 말한 송여울 실장은 다 알고 있어서였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차석진 앞에서 여울은 죄송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차석진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궁금증이 해소된 얼굴로 이야기할 뿐이었다.
“계속 신경이 쓰였거든요. 처음부터. 오늘도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아까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어디론가 가길래 따라가 본 거였어요.”
혼자 속으로 끙끙 앓던 여울은 오히려 알아버렸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조심스러웠다.
“말씀 못 드린 건 정말 죄송합니다.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그래도 섣불리 말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만들까 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는 건.. 뭐죠?”
“이사장님의 마음이요.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크기가 둘 다 똑같진 않잖아요. 어느 한쪽의 마음이 더 큰 경우 상처는 말로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그 모습만은 보게 할 수가 없었어요. 너무 아플까 봐..”
“상처 받을까봐 걱정했군요.”
여울은 그저 미안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신의 손톱을 뜯고 있었다. 벌서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여울이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서 뛰어들었어요? 황소처럼? 훗.”
“너무하세요. 황소라뇨.”
또 황소라는 말에 여울의 입이 한껏 나왔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근데 송여울 실장이 괜한 걱정을 했네요. 우린 마음이 똑같았어요.”
“두 분은 그러셨겠죠. 사랑하는 마음이 서로 같다는 건 다행이네요. 그러니.. 상처가 더 크시겠네요.”
“아뇨.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게 같았다구요. 애초부터 우린 사랑이란 감정으로 결혼을 하는 게 아니였어요.”
그게 가능해? 여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꿈뻑거리며 말했다.
“네? 세상에 그런게 어딨어요? 사랑없는 결혼이라니...”
놀라워하는 여울에 모습이 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석진은 되물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어렵지 않아요. 그냥 결혼식하고 같이 살지만 각자 생활하는 거.”
여울의 표정이 점점 구겨졌다. 입술을 요리 조리 움직이다 그 말을 이해해보려는 듯 입술을 힘껏 다물었다. 석진은 누구에게도 감정을 내비치는 일이 없었다.
특히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그래도 고맙군요. 내가 상처 받지 않게 노력해줘서.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누구보다 상처가 크실텐데. 일단 공지수 신부님 찾으셔서 마음 돌려보세요. 작가님도 실수.. 라고 하셨으니...”
여울은 말하면서도 실수라는 변명으로 덮어질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걸 해결책이라고 말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말끝을 흐렸다.
차석진은 감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이미 마음에 결정은 한 것 같았다.
“글쎄요. 그런 일은 없을 거 같네요.”
차석진이 무심히 핸드폰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지수가 그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였다.
[미안해요. 나.. 이 결혼 못해요.]
.
.
차석진 이사장의 본가_
결혼식이 무산 된 다음 날. 차석진은 본가로 향했다. 어머님은 일어나기 힘들 만큼 충격을 받으셨지만 아들이 온다는 전화를 받고 점심을 준비하고 계셨다. 석진은 무거운 마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저 왔어요.”
주방에 있던 어머니가 먼저 석진을 보고 꼭 안아 주었다. 석진 역시 말없이 어머니를 다독였다. 그때 아버지도 방에서 나와 석진을 맞이했다.
“왔니?”
세 식구가 식탁에 둘러 앉았지만 공기마저 적막했다. 공지수가 증발해버리듯 사라진 뒤 소식이 없으니 아무도 명확한 이유를 모른 채 답답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물어 볼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차석진 뿐이었다.
“공회장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지수는 아직 안들어왔다는구나. 연락도 안되고...”
“석진아, 혹시 결혼식 전에 지수 한테서 이상한거 못 느꼈니? 평소와 다른.. 것들..”
두 분은 조심스럽게 석진에게 물어보지만 그는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지수한테 문자가 왔어요. 결혼 못하겠다고.”
아버지가 놀라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지수한테 연락이 왔어? 왜 그걸 이제 말해?”
“지금 어딨다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대로 질문을 쏟아냈다.
“어딨는지 몰라요. 바로 전화 했는데 안받더라고요.”
공지수가 사라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 결혼이 완전히 끝났다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바닥이 꺼질 듯한 한숨 소리만 들릴 뿐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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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간에 침묵이 흐른 뒤 차석진이 먼저 입을 뗐다.
“아버지.. 걱정마세요. 제가 손주 안겨드릴테니.”
그 말에 놀라 두 분의 시선이 석진에게 고정되며 어머니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석진아, 두 집안에서 결혼 서두르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됐는데 무슨? 오히려 잘 됐어. 난 솔직히 너무 급하게 하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들었으니까.”
어머니의 속마음에 아버지는 적잖이 놀라신 눈치지만 티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 결혼을 서두른 장본인이기도 했으니까.
“크흠.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할 수 없지. 우리와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 건강 때문에 그런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기다리다보면...”
아버지의 말에서 아쉬움이 가득했다. 석진은 부모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었다. 두 분의 바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
.
다음날 아침 노블레스 회사_
아침부터 직원들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주말에 있었던 이사장 신부의 증발 사건으로 사람들은 온갖 추측과 생각으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여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도착 음이 울리고 엘리베이터 타고 있는 동안에도 이사장님의 파혼 이야기로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그거 사실이야? 여자가 도망간 거라며?”
“아파서 병원 간 거 아니었어?”
“아니래. 어떤 남자가 신부를 데리고 도망가는 거 경호원이 봤데.”
“헐.. 대박. 혹시 그런 건가? 재벌 집 외동딸이 집안에 반대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헉! 아직도 연락 없다던데 혹시 지금도 그 남자와??”
“꺄아아악-”
소설을 쓰고 있네. 여울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여울도 발걸음을 옮기는 찰나 순간 번뜩였다.
“아! 오늘 소품 택배로 온다고 했는데. 그냥 올라왔네. 이그.”
여울은 내린 자리에서 뒤돌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며 출근 시간을 확인한 여울은 비상계단으로 뛰어갔다.
다닥다닥-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던 중 올라오는 어떤 사람과 마주쳤다.
“어? 차석진 이사장님?”
“송여울 실장님. 마침 잘 됐네요. 만나러 가는 참이었는데.”
“네? 저를요?”
여울은 비상계단에서 차석진을 만난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것이 더 의아해했다.
“그런데 왜 엘리베이터 안 타시고 걸어 올라오세요?”
“전.. 늘 계단으로 다녀요.”
갸우뚱하던 여울은 순간 알아차렸다는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 운동하시는구나. 건강 엄청 신경쓰시나보네요.”
“아.. 뭐. 계속 비상계단에서 이야기 나누긴 뭐하니 사무실로 올라가시죠.”
“죄송하지만 먼저 올라가계세요. 전 1층에 택배 좀 갖고 올라갈게요.”
“그러죠.”
.
.
잠시 뒤 여울은 택배 박스를 들고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갔다. 여울의 사무실은 책상 하나 작은 테이블 하나가 놓여있다.
차석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 밑에 박스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무슨 상자에요?”
여울은 상자를 쳐다보고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아, 웨딩 장식 새로 만들어 보려고요. 이것저것 주문했어요.”
“이번엔 뭘 만들겁니까?”
여울은 대답 대신 박스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한번 보실래요?”
쫘아아악-
박스 테잎을 뜯어 펼친 상자 안에는 베일 소재의 천과 크리스탈 몇 봉지가 전부였다.
“이번에 이 베일 소재를 이용해 보려고요. 이렇게.”
여울은 베일 천을 이리저리 주름을 잡으며 모양을 만들어냈다. 차석진은 신기한 듯 여울이 설명하는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금새 꽃모양의 풍성한 장식을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어때요? 이 위에 이 크리스탈로 장식할 거예요. 그런 다음에 머리 위에 착!”
여울은 자신의 머리 위에 장식을 갖다 대며 생긋 웃으며 차석진을 바라봤다. 평소와는 다른 생글생글한 표정은 여울의 의외의 모습이었다.
대답이 없는 차석진을 보며 뻘쭘해진 여울은 머리에 갖다 댄 장식을 슬그머니 내렸다. 여울은 오므린 입술로 작게 중얼거렸다.
“별..론가?”
차석진은 대답은 생략한 채 여울을 향해 물었다.
“요즘 유행하는 생화를 이용한 머리 장식, 처음 시작이 송여울 실장님이라던데 맞습니까?”
“네.”
“손목 장식이랑 끈을 이용한 헤어장식도 송여울 실장님 아이디어고요?”
“네.”
“드레스 디자인도 많이 참여하신다고 하던데?”
“네. 맞아요.”
“노블레스에서 오래 일하시면서 회사를 위해 기여하실 건가요?”
“네에.. 뭐 직원으로서 당연히.. 근데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지..”
취조하듯 묻는 질문에 대답만 하던 여울은 차석진의 질문 의도가 궁금했다. 큰 눈을 꿈뻑거리는 여울을 보는 차석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여울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충분한거 같군요.”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여울은 덩달아 몸을 가까이 숙이며 되물었다.
“뭐가요?”
“잘 맞을 거 같아요. 우리 둘.”
뜬금없는 말에 화들짝 놀란 여울은 몸을 뒤로 젖혔다.
“네?”
“대체 뭐가 알고 싶은건데?”
초점없는 눈빛으로 코 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놀라 여울은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여울의 몸에 선반이 부딪치면서 소품으로 있던 촛대가 떨어졌다.
팅그르르르-
촛대가 굴러간 쪽을 바라보자 그 자리에 차석진이 서 있었다.
‘!!!’
차석진을 본 두 사람은 동시에 놀라고 있었다. 오히려 덤덤한 표정의 차석진은 천천히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이거.”
차석진은 촛대를 정우림에게 건넸다. 정우림은 살짝 떨리는 손으로 촛대를 받았다.
“정 작가님. 지수랑 옛 연인이셨다고요?”
“!!!”
“본의 아니게 듣게 됐네요.”
정우림은 차석진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옛 연인 사이였던 것보다 더 두려웠던건 이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수랑 키스 한 것 까지 말이에요.”
‘!!!’
“아.. 이런. 너무 많은 것을 다 듣게 되었네요.”
차석진은 여유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날카로운 질문을 정우림에게 던졌다.
“옛 연인 인건 뭐.. 이해 할 수 있지만. 키스는 왜 한건지.. 송여울 실장처럼 나도 궁금해지네요.”
정우림은 바짝 마른 입술을 힘들게 떼었다.
“실수.. 였습니다. 정말입니다.”
“실수 였다.. 후.. 실수 였다네요. 송여울 실장님. 듣고 싶었던 대답 들은 거 같은데 그만 가죠.”
차석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여울도 아무말 못하고 차석진을 뒤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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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석진과 송여울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어쩔 줄 몰라하는 여울과 달리 덤덤해 보이는 차석진은 말했다.
“송여울 실장님.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
차석진을 따라간 곳은 차석진의 사무실 이었다. 여울은 잔뜩 겁을 먹은 아이처럼 주눅들어 있었다. 차석진은 소파에 앉은 후 손을 내밀며 앉으라고 했다.
자리에 앉은 여울은 아무 말 없는 잠깐의 시간도 숨이 막힐 듯 했다.
“난 이제야 의문이 좀 풀리네요.”
차석진의 말에 모르겠다는 듯 여울이 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송여울 실장이 날 보던 눈빛 말이에요. 그 이유를 알았다고.”
차석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차석진은 천천히 설명했다.
“웨딩 촬영 날 왜 날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봤는지, 날 향해 왜 황소처럼 뛰어들었는지. 또.. 내게 전화해서 예정대로 식을 할 거냐는 말도.. 카페에서도 오늘도 계속 죄송하다고 말한 송여울 실장은 다 알고 있어서였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차석진 앞에서 여울은 죄송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차석진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궁금증이 해소된 얼굴로 이야기할 뿐이었다.
“계속 신경이 쓰였거든요. 처음부터. 오늘도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아까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어디론가 가길래 따라가 본 거였어요.”
혼자 속으로 끙끙 앓던 여울은 오히려 알아버렸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조심스러웠다.
“말씀 못 드린 건 정말 죄송합니다.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그래도 섣불리 말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만들까 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는 건.. 뭐죠?”
“이사장님의 마음이요.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크기가 둘 다 똑같진 않잖아요. 어느 한쪽의 마음이 더 큰 경우 상처는 말로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그 모습만은 보게 할 수가 없었어요. 너무 아플까 봐..”
“상처 받을까봐 걱정했군요.”
여울은 그저 미안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신의 손톱을 뜯고 있었다. 벌서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여울이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서 뛰어들었어요? 황소처럼? 훗.”
“너무하세요. 황소라뇨.”
또 황소라는 말에 여울의 입이 한껏 나왔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근데 송여울 실장이 괜한 걱정을 했네요. 우린 마음이 똑같았어요.”
“두 분은 그러셨겠죠. 사랑하는 마음이 서로 같다는 건 다행이네요. 그러니.. 상처가 더 크시겠네요.”
“아뇨.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게 같았다구요. 애초부터 우린 사랑이란 감정으로 결혼을 하는 게 아니였어요.”
그게 가능해? 여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꿈뻑거리며 말했다.
“네? 세상에 그런게 어딨어요? 사랑없는 결혼이라니...”
놀라워하는 여울에 모습이 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석진은 되물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어렵지 않아요. 그냥 결혼식하고 같이 살지만 각자 생활하는 거.”
여울의 표정이 점점 구겨졌다. 입술을 요리 조리 움직이다 그 말을 이해해보려는 듯 입술을 힘껏 다물었다. 석진은 누구에게도 감정을 내비치는 일이 없었다.
특히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그래도 고맙군요. 내가 상처 받지 않게 노력해줘서.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누구보다 상처가 크실텐데. 일단 공지수 신부님 찾으셔서 마음 돌려보세요. 작가님도 실수.. 라고 하셨으니...”
여울은 말하면서도 실수라는 변명으로 덮어질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걸 해결책이라고 말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말끝을 흐렸다.
차석진은 감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이미 마음에 결정은 한 것 같았다.
“글쎄요. 그런 일은 없을 거 같네요.”
차석진이 무심히 핸드폰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지수가 그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였다.
[미안해요. 나.. 이 결혼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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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석진 이사장의 본가_
결혼식이 무산 된 다음 날. 차석진은 본가로 향했다. 어머님은 일어나기 힘들 만큼 충격을 받으셨지만 아들이 온다는 전화를 받고 점심을 준비하고 계셨다. 석진은 무거운 마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저 왔어요.”
주방에 있던 어머니가 먼저 석진을 보고 꼭 안아 주었다. 석진 역시 말없이 어머니를 다독였다. 그때 아버지도 방에서 나와 석진을 맞이했다.
“왔니?”
세 식구가 식탁에 둘러 앉았지만 공기마저 적막했다. 공지수가 증발해버리듯 사라진 뒤 소식이 없으니 아무도 명확한 이유를 모른 채 답답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물어 볼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차석진 뿐이었다.
“공회장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지수는 아직 안들어왔다는구나. 연락도 안되고...”
“석진아, 혹시 결혼식 전에 지수 한테서 이상한거 못 느꼈니? 평소와 다른.. 것들..”
두 분은 조심스럽게 석진에게 물어보지만 그는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지수한테 문자가 왔어요. 결혼 못하겠다고.”
아버지가 놀라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지수한테 연락이 왔어? 왜 그걸 이제 말해?”
“지금 어딨다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대로 질문을 쏟아냈다.
“어딨는지 몰라요. 바로 전화 했는데 안받더라고요.”
공지수가 사라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 결혼이 완전히 끝났다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바닥이 꺼질 듯한 한숨 소리만 들릴 뿐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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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간에 침묵이 흐른 뒤 차석진이 먼저 입을 뗐다.
“아버지.. 걱정마세요. 제가 손주 안겨드릴테니.”
그 말에 놀라 두 분의 시선이 석진에게 고정되며 어머니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석진아, 두 집안에서 결혼 서두르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됐는데 무슨? 오히려 잘 됐어. 난 솔직히 너무 급하게 하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들었으니까.”
어머니의 속마음에 아버지는 적잖이 놀라신 눈치지만 티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 결혼을 서두른 장본인이기도 했으니까.
“크흠.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할 수 없지. 우리와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 건강 때문에 그런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기다리다보면...”
아버지의 말에서 아쉬움이 가득했다. 석진은 부모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었다. 두 분의 바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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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노블레스 회사_
아침부터 직원들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주말에 있었던 이사장 신부의 증발 사건으로 사람들은 온갖 추측과 생각으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여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도착 음이 울리고 엘리베이터 타고 있는 동안에도 이사장님의 파혼 이야기로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그거 사실이야? 여자가 도망간 거라며?”
“아파서 병원 간 거 아니었어?”
“아니래. 어떤 남자가 신부를 데리고 도망가는 거 경호원이 봤데.”
“헐.. 대박. 혹시 그런 건가? 재벌 집 외동딸이 집안에 반대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헉! 아직도 연락 없다던데 혹시 지금도 그 남자와??”
“꺄아아악-”
소설을 쓰고 있네. 여울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여울도 발걸음을 옮기는 찰나 순간 번뜩였다.
“아! 오늘 소품 택배로 온다고 했는데. 그냥 올라왔네. 이그.”
여울은 내린 자리에서 뒤돌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며 출근 시간을 확인한 여울은 비상계단으로 뛰어갔다.
다닥다닥-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던 중 올라오는 어떤 사람과 마주쳤다.
“어? 차석진 이사장님?”
“송여울 실장님. 마침 잘 됐네요. 만나러 가는 참이었는데.”
“네? 저를요?”
여울은 비상계단에서 차석진을 만난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것이 더 의아해했다.
“그런데 왜 엘리베이터 안 타시고 걸어 올라오세요?”
“전.. 늘 계단으로 다녀요.”
갸우뚱하던 여울은 순간 알아차렸다는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 운동하시는구나. 건강 엄청 신경쓰시나보네요.”
“아.. 뭐. 계속 비상계단에서 이야기 나누긴 뭐하니 사무실로 올라가시죠.”
“죄송하지만 먼저 올라가계세요. 전 1층에 택배 좀 갖고 올라갈게요.”
“그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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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 여울은 택배 박스를 들고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갔다. 여울의 사무실은 책상 하나 작은 테이블 하나가 놓여있다.
차석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 밑에 박스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무슨 상자에요?”
여울은 상자를 쳐다보고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아, 웨딩 장식 새로 만들어 보려고요. 이것저것 주문했어요.”
“이번엔 뭘 만들겁니까?”
여울은 대답 대신 박스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한번 보실래요?”
쫘아아악-
박스 테잎을 뜯어 펼친 상자 안에는 베일 소재의 천과 크리스탈 몇 봉지가 전부였다.
“이번에 이 베일 소재를 이용해 보려고요. 이렇게.”
여울은 베일 천을 이리저리 주름을 잡으며 모양을 만들어냈다. 차석진은 신기한 듯 여울이 설명하는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금새 꽃모양의 풍성한 장식을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어때요? 이 위에 이 크리스탈로 장식할 거예요. 그런 다음에 머리 위에 착!”
여울은 자신의 머리 위에 장식을 갖다 대며 생긋 웃으며 차석진을 바라봤다. 평소와는 다른 생글생글한 표정은 여울의 의외의 모습이었다.
대답이 없는 차석진을 보며 뻘쭘해진 여울은 머리에 갖다 댄 장식을 슬그머니 내렸다. 여울은 오므린 입술로 작게 중얼거렸다.
“별..론가?”
차석진은 대답은 생략한 채 여울을 향해 물었다.
“요즘 유행하는 생화를 이용한 머리 장식, 처음 시작이 송여울 실장님이라던데 맞습니까?”
“네.”
“손목 장식이랑 끈을 이용한 헤어장식도 송여울 실장님 아이디어고요?”
“네.”
“드레스 디자인도 많이 참여하신다고 하던데?”
“네. 맞아요.”
“노블레스에서 오래 일하시면서 회사를 위해 기여하실 건가요?”
“네에.. 뭐 직원으로서 당연히.. 근데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지..”
취조하듯 묻는 질문에 대답만 하던 여울은 차석진의 질문 의도가 궁금했다. 큰 눈을 꿈뻑거리는 여울을 보는 차석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여울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충분한거 같군요.”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여울은 덩달아 몸을 가까이 숙이며 되물었다.
“뭐가요?”
“잘 맞을 거 같아요. 우리 둘.”
뜬금없는 말에 화들짝 놀란 여울은 몸을 뒤로 젖혔다.
“네?”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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