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옷 벗으세요!
조회 : 1,303 추천 : 2 글자수 : 5,068 자 2022-09-27
“오늘..요?”
커다란 눈으로 석진을 올려다보는 여울은 곤란한 표정이었다. 그런 여울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네. 그럼 회사 끝나고 봬요.”
망설임 끝에 여울은 대답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석진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연락 할게요.”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 여울은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때마침 나연과 이호영 비서가 자료를 들고 들어왔다.
타악-
“고생했어요.”
여울은 많은 자료들 속에서 파일 하나를 펼쳐보이며 아무 일 없는 듯 회의를 시작했다.
.
.
드레스 피팅을 마친 여울은 메이크업 실로 돌아와 시계부터 확인했다.
오후 5시 35분.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여울은 괜히 핸드폰만 만지작 거렸다. 시선은 여전히 시계에 머물렀다. 뚫어지게 시계만 바라보고 있는 여울을 보며 나연이 말을 걸었다.
“실장님, 왜 그렇게 시계를 뚫어지게 봐요? 약속 있어요?”
나연의 말에 흠칫 놀라 대답 대신 고개부터 가로 저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여울을 향해 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흠.. 수상한데.. 실장니임~”
“아니라니까.”
아무일 아니라는 듯 말은 했지만 여울의 시선은 시계를 향해 있었다. 그 순간 핸드폰에 알람이 울렸다.
띠링-
[차석진입니다.]
메시지를 누르자 약속 장소의 주소가 나와있었다. 여울은 자연스럽게 가방을 들고 나연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연씨, 나 먼저 퇴근 할게.”
허둥지둥 나가는 여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연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수상해...”
.
.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고급 레스토랑.
입구에서 직원이 이름을 확인하더니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직원을 따라가다 보니 창가 자리에 앉아있는 석진의 모습이 보였다.
“제가 좀 늦었나요?”
“아닙니다. 앉으세요.”
자리에 앉자 여울은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어색한 분위기. 잠시 뒤 직원이 물을 건네주며 물었다.
“주문 하시겠습니까?”
여울은 메뉴판을 한참 보고 있어도 뭐가 뭔지 몰랐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석진이 말했다.
“여울씨, 괜찮다면 제가 메뉴 추천 해드려도 될까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분위기에 기가 눌렸는데 오히려 석진의 말에 마음이 놓였다.
“네. 그러세요.”
석진은 메뉴판도 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주문을 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여울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 이사장이었지. 이런 곳이 익숙할만한...’
주문을 마치고 다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여울은 레스토랑에 도착 하기 전까지 거절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왔다.
다시는 이상한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그러나 정작 석진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여울씨 솔로죠?”
“일찍 물어보시네요. 네, 지금은요.”
“지금은? 연애 경험이 꽤 많았다는 말로 들리네요.”
순간 석진의 질문에 여울은 갑자기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오호~ 연애 경험이 많고 바람둥이처럼 보이는 사람을 좋아할리 없지! 그렇다면 사랑이나 결혼 따위 얘긴 꺼내지도 않을 거야!’
갑자기 여울의 자세가 달라졌다.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고 대답했다.
“훗. 네. 이런 말을 제 입으로 하긴 뭐하지만.. 제가 좀 연애 경험이 많아요. 아주 많~이.”
달라진 여울의 태도에 석진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아주 많이라.. 그럼 남자에 대해서도 많이 알겠네요?”
“하. 그럼요. 이제껏 만났던 남자들이 제 손바닥 안에서 놀았거든요.”
여울은 자신이 바람둥이라는 거짓말 설정에 메소드 급으로 빠져들어 손바닥까지 쥐었다 폈다했다.
“오호, 대단한데요.”
“네. 좀 그렇죠.”
대답을 하고 보니 어찌 석진의 리액션이 진심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단순히 장단 맞춰주는 정도?
“왜? 못 믿으시겠어요? 제가 직장에서는 단정한 모습이지만 퇴근 후엔 또 다른 모습이 많아요.”
몸을 뒤로 기대며 여울의 행동은 한결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석진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애써 참는 모습이었다.
“내가 들은 얘기랑은 많이 다르네요.”
“네? 그게 무슨.. 말이죠? 무슨 소릴 들었는데요?”
모태 솔로인 자신의 치부를 들킬까 여울은 급하게 몸을 앞으로 당겼다.
‘들어? 누구한테?’
온갖 머리를 굴려봤지만 석진과 연관관계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스쳐지나가는 얼굴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설마.. 나연씨한테?”
“아, 그 드레스실 직원말인가요?”
석진의 반응을 보니 그것도 아닌 듯 싶었다. 나연이 자신의 연애에 대해 의심은 있었지만 모태솔로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울은 그럴리 없다는 확신의 찬 말투로 이야기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저 정말 연애 경험 많거든요. 연애 상담 전문가라고요. 제가!”
여울은 최대한 당당하게 보이려 가슴을 쫙 폈다.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석진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최근 연애는?”
“아... 2년 전.. 아니. 2개월도 아니고.. 하하하. 너무 많아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하다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석진의 얼굴에 오묘한 미소가 번졌다.
“연애 상담 전문가라면 자신의 많은 경험과 노하우가 쌓여야 되는 거 잖아요. 많은 연애 경험자라면 굉장히 개방적이겠네요.”
개방적이라니? 무슨 뜻일까 생각하다 여울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 쪽 옷매무새를 다잡고 있었다.
“뭐.. 그거야. 연애경험은 많지만 그다지 개방 하지는... 아니 그게 아니라..”
“풉.”
여울이 당황하며 말을 더듬자 석진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 아.. 미안.. 미안합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아.. 그게 아니고. 정말 오랜만이에요.”
“네?”
여울은 기분 나쁘다는 듯 석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석진은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여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소리 내서 웃어본 게 정말 오랜만이에요. 여울씨 참 재미있어요.”
환하게 웃는 석진과 달리 여울은 황당하다는 듯 혼자 읊조렸다.
“진지하게 연애 얘기 했는데.. 뭐가 재밌다는 거야..”
.
.
식사를 마친 뒤 테이블 위에는 커피가 놓여있다. 여울은 자신의 연애 이야기가 통하지 않은 거 같아 뾰루퉁했다.
그러나 여울과 달리 석진의 얼굴에는 생글생글한 미소가 번져있다. 흥미롭다는 듯 이야기를 계속 이어했다.
“여울씨한테 궁금한게 있어요. 그런데 진짜 사랑을 어떻게 구별하죠? 사랑인 척 연기 할 수도 있잖아요.”
“연기 할 수 있죠. 하지만 금방 티가 나요.”
“어떻게요?”
“상대방의 모든 것이 늘 나에게 향해 있거든요. 함께 있을 때 나에게 시선이 향해 있다든지, 나에 대한 궁금증이 끊이지 않는다든지, 제일 중요한 건 내가 함께 있지 않을 때도 상대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죠.”
진짜 연애 상담사처럼 확신에 찬 말투로 이야기하는 여울이 신기했다.
“로맨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네요. 온통 상대의 생각 뿐이라니.. ”
석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여울은 자신이 모태솔로임을 망각하고 진실한 사랑을 믿지 않는 석진이 안쓰럽다는 듯 위로의 말을 건넸다.
“걱정마세요. 자신의 인연은 어딘가에 꼭 있다고 하잖아요. 쉬운 일은 아니죠.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건. 그래서 사랑은 신의 선물이라고 하잖아요.”
“신의 선물이라.. 하하. 그렇다면 신이 왜 나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은걸까요?”
“그건.. 뭐... 어릴 때 착한 아이가 아니였나보죠. 말썽꾸러...”
여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날카로운 소리가 귀에 꽂혔다.
째앵-
소리에 놀라 여울이 고개를 들었을 때 석진의 커피잔이 깨져있었다. 석진의 손은 커피잔을 잡고 있는 자세였고 커피 잔을 놓친 듯 싶었다. 그리고 굳어있는 석진의 표정.
“괘.. 괜찮으세요?”
여울의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대답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석진의 부드러운 미소는 사라지고 경직된 얼굴로 변해 있었다. 쏜살같이 달려온 직원이 석진의 몸부터 살폈다.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금방 치워드리겠습니다.”
직원은 빠르게 깨진 커피잔과 테이블을 정리했다. 테이블을 치우는 동안에도 여울의 시선은 석진을 향해 있었다.
갑자기 달라진 석진의 표정에 여울은 숨죽여 그를 바라 볼 뿐이었다. 석진의 멍한 초점이 다시 돌아왔을 때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그만 일어 날까요?”
“네? 아.. 그러죠.”
.
다급하게 레스토랑을 나온 두사람. 이 분위기가 여울은 궁금하기도 찜찜하기도 했다. 헤어지기 전 석진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사장님, 혹시 제가 실수 한게 있나요?”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라고 하기엔 석진은 말은 너무 차가웠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아.. 네. 이사장님도요.”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뒤돌아섰다. 석진을 등진 채 걸으면서도 찜찜한 느낌은 가시질 않았다.
데려다 줄거라 생각은 안했지만 이렇게 헤어지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석진은 곧장 자신의 차로 향했다. 차에 타자마자 굳어있던 얼굴은 일그러졌다. 고통스럽게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핸들 위로 머리를 숙였다.
“하아..”
괴로움을 참지 못해 내뱉은 짧은 한숨만이 차 안에 가득했다.
.
.
다음날_
출근하는 여울의 표정에 근심이 가득했다. 어제 석진의 행동에 잠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이다. 축 쳐진 어깨에 핸드백을 걸치지 못하고 손에 대롱대롱 들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여울의 어깨를 잡았다.
“실장님!”
퀭한 눈으로 뒤돌아보자 큰 눈을 꿈뻑이고 있는 나연이 보였다.
“어.. 나연씨.”
“어머! 얼굴이 왜 이래요? 다크 써클이 턱 밑까지 내려왔어요!”
“다크 써클 가리려고 컨실러 한통을 다 쓴거 같은데.. 그래도 보여?”
여울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연은 여울의 손을 잡고 사무실이 아닌 회사 옆 카페로 향했다.
타악-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실장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거 마시고 정신 차려요.”
“고마워, 나연씨.”
여울은 멍한 시선으로 단숨에 커피를 빨아들였다. 나연은 여울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화장을 얼마나 두껍게 한 거예요? 가요 무대 올라갈 일 있어요?”
“너무 그러지마. 힝.”
자신도 창피한 듯 여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나연은 캐묻지 않았다. 여울의 등만 토닥여줄 뿐.
토닥토닥-
“자! 이제 들어가요.”
.
.
나연의 위로 덕인지 카페인의 덕인지 몰라도 여울은 기분은 다시 돌아오는 듯 했다. 나연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여울은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 이제 괜찮아졌어. 진짜야. 컨디션 돌아왔다니까.”
여울은 환하게 웃으며 양팔을 벌려 크게 한바퀴 돌았다. 그 모습에 나연도 피식 웃었다. 서로 괜찮다는 미소를 확인하고 여울이 뒤를 도는 순간 무언가에 부딪힌다.
퍼억!!!
“악!”
오른쪽 얼굴을 감싸며 앞을 쳐다봤을 때 여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싸늘한 얼굴의 차석진이었다.
“어머! 죄.. 죄송합니다.”
“즐거워보이네요.”
“아뇨. 그게.. 죄송합니다.”
여울은 차마 고개를 들어 석진을 바라보지 못했다. 옆에 있던 나연이 여울을 쿡쿡 찔렀다. 나연은 눈짓으로 자꾸만 석진을 가리켰다.
“응?”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보니 그의 셔츠에 파운데이션과 립스틱 자국에 선명하게 묻어있었다.
“으아아악!! 이걸 어째..”
여울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석진의 셔츠를 잡아 비볐다.
“하아.. 립스틱 자국은 잘 지워지지도 않는데. 어쩌지..”
여울은 석진의 가슴에 바짝 붙어서 혼자 중얼거렸다.
“계속... 이러고 있을겁니까?”
석진의 낮은 목소리가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고개를 올려다 봤을 때 그의 얼굴이 코 끝에 닿을 듯 가까웠다.
“헉! 죄송합니다.”
여울은 밀치듯 다급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어쩌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했다. 그러다 여울이 뭔가 생각 났는지 석진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 이사장님, 옷 벗으세요!”
“?!”
커다란 눈으로 석진을 올려다보는 여울은 곤란한 표정이었다. 그런 여울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네. 그럼 회사 끝나고 봬요.”
망설임 끝에 여울은 대답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석진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연락 할게요.”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 여울은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때마침 나연과 이호영 비서가 자료를 들고 들어왔다.
타악-
“고생했어요.”
여울은 많은 자료들 속에서 파일 하나를 펼쳐보이며 아무 일 없는 듯 회의를 시작했다.
.
.
드레스 피팅을 마친 여울은 메이크업 실로 돌아와 시계부터 확인했다.
오후 5시 35분.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여울은 괜히 핸드폰만 만지작 거렸다. 시선은 여전히 시계에 머물렀다. 뚫어지게 시계만 바라보고 있는 여울을 보며 나연이 말을 걸었다.
“실장님, 왜 그렇게 시계를 뚫어지게 봐요? 약속 있어요?”
나연의 말에 흠칫 놀라 대답 대신 고개부터 가로 저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여울을 향해 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흠.. 수상한데.. 실장니임~”
“아니라니까.”
아무일 아니라는 듯 말은 했지만 여울의 시선은 시계를 향해 있었다. 그 순간 핸드폰에 알람이 울렸다.
띠링-
[차석진입니다.]
메시지를 누르자 약속 장소의 주소가 나와있었다. 여울은 자연스럽게 가방을 들고 나연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연씨, 나 먼저 퇴근 할게.”
허둥지둥 나가는 여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연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수상해...”
.
.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고급 레스토랑.
입구에서 직원이 이름을 확인하더니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직원을 따라가다 보니 창가 자리에 앉아있는 석진의 모습이 보였다.
“제가 좀 늦었나요?”
“아닙니다. 앉으세요.”
자리에 앉자 여울은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어색한 분위기. 잠시 뒤 직원이 물을 건네주며 물었다.
“주문 하시겠습니까?”
여울은 메뉴판을 한참 보고 있어도 뭐가 뭔지 몰랐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석진이 말했다.
“여울씨, 괜찮다면 제가 메뉴 추천 해드려도 될까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분위기에 기가 눌렸는데 오히려 석진의 말에 마음이 놓였다.
“네. 그러세요.”
석진은 메뉴판도 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주문을 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여울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 이사장이었지. 이런 곳이 익숙할만한...’
주문을 마치고 다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여울은 레스토랑에 도착 하기 전까지 거절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왔다.
다시는 이상한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그러나 정작 석진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여울씨 솔로죠?”
“일찍 물어보시네요. 네, 지금은요.”
“지금은? 연애 경험이 꽤 많았다는 말로 들리네요.”
순간 석진의 질문에 여울은 갑자기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오호~ 연애 경험이 많고 바람둥이처럼 보이는 사람을 좋아할리 없지! 그렇다면 사랑이나 결혼 따위 얘긴 꺼내지도 않을 거야!’
갑자기 여울의 자세가 달라졌다.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고 대답했다.
“훗. 네. 이런 말을 제 입으로 하긴 뭐하지만.. 제가 좀 연애 경험이 많아요. 아주 많~이.”
달라진 여울의 태도에 석진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아주 많이라.. 그럼 남자에 대해서도 많이 알겠네요?”
“하. 그럼요. 이제껏 만났던 남자들이 제 손바닥 안에서 놀았거든요.”
여울은 자신이 바람둥이라는 거짓말 설정에 메소드 급으로 빠져들어 손바닥까지 쥐었다 폈다했다.
“오호, 대단한데요.”
“네. 좀 그렇죠.”
대답을 하고 보니 어찌 석진의 리액션이 진심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단순히 장단 맞춰주는 정도?
“왜? 못 믿으시겠어요? 제가 직장에서는 단정한 모습이지만 퇴근 후엔 또 다른 모습이 많아요.”
몸을 뒤로 기대며 여울의 행동은 한결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석진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애써 참는 모습이었다.
“내가 들은 얘기랑은 많이 다르네요.”
“네? 그게 무슨.. 말이죠? 무슨 소릴 들었는데요?”
모태 솔로인 자신의 치부를 들킬까 여울은 급하게 몸을 앞으로 당겼다.
‘들어? 누구한테?’
온갖 머리를 굴려봤지만 석진과 연관관계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스쳐지나가는 얼굴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설마.. 나연씨한테?”
“아, 그 드레스실 직원말인가요?”
석진의 반응을 보니 그것도 아닌 듯 싶었다. 나연이 자신의 연애에 대해 의심은 있었지만 모태솔로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울은 그럴리 없다는 확신의 찬 말투로 이야기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저 정말 연애 경험 많거든요. 연애 상담 전문가라고요. 제가!”
여울은 최대한 당당하게 보이려 가슴을 쫙 폈다.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석진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최근 연애는?”
“아... 2년 전.. 아니. 2개월도 아니고.. 하하하. 너무 많아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하다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석진의 얼굴에 오묘한 미소가 번졌다.
“연애 상담 전문가라면 자신의 많은 경험과 노하우가 쌓여야 되는 거 잖아요. 많은 연애 경험자라면 굉장히 개방적이겠네요.”
개방적이라니? 무슨 뜻일까 생각하다 여울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 쪽 옷매무새를 다잡고 있었다.
“뭐.. 그거야. 연애경험은 많지만 그다지 개방 하지는... 아니 그게 아니라..”
“풉.”
여울이 당황하며 말을 더듬자 석진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 아.. 미안.. 미안합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아.. 그게 아니고. 정말 오랜만이에요.”
“네?”
여울은 기분 나쁘다는 듯 석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석진은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여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소리 내서 웃어본 게 정말 오랜만이에요. 여울씨 참 재미있어요.”
환하게 웃는 석진과 달리 여울은 황당하다는 듯 혼자 읊조렸다.
“진지하게 연애 얘기 했는데.. 뭐가 재밌다는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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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뒤 테이블 위에는 커피가 놓여있다. 여울은 자신의 연애 이야기가 통하지 않은 거 같아 뾰루퉁했다.
그러나 여울과 달리 석진의 얼굴에는 생글생글한 미소가 번져있다. 흥미롭다는 듯 이야기를 계속 이어했다.
“여울씨한테 궁금한게 있어요. 그런데 진짜 사랑을 어떻게 구별하죠? 사랑인 척 연기 할 수도 있잖아요.”
“연기 할 수 있죠. 하지만 금방 티가 나요.”
“어떻게요?”
“상대방의 모든 것이 늘 나에게 향해 있거든요. 함께 있을 때 나에게 시선이 향해 있다든지, 나에 대한 궁금증이 끊이지 않는다든지, 제일 중요한 건 내가 함께 있지 않을 때도 상대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죠.”
진짜 연애 상담사처럼 확신에 찬 말투로 이야기하는 여울이 신기했다.
“로맨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네요. 온통 상대의 생각 뿐이라니.. ”
석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여울은 자신이 모태솔로임을 망각하고 진실한 사랑을 믿지 않는 석진이 안쓰럽다는 듯 위로의 말을 건넸다.
“걱정마세요. 자신의 인연은 어딘가에 꼭 있다고 하잖아요. 쉬운 일은 아니죠.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건. 그래서 사랑은 신의 선물이라고 하잖아요.”
“신의 선물이라.. 하하. 그렇다면 신이 왜 나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은걸까요?”
“그건.. 뭐... 어릴 때 착한 아이가 아니였나보죠. 말썽꾸러...”
여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날카로운 소리가 귀에 꽂혔다.
째앵-
소리에 놀라 여울이 고개를 들었을 때 석진의 커피잔이 깨져있었다. 석진의 손은 커피잔을 잡고 있는 자세였고 커피 잔을 놓친 듯 싶었다. 그리고 굳어있는 석진의 표정.
“괘.. 괜찮으세요?”
여울의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대답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석진의 부드러운 미소는 사라지고 경직된 얼굴로 변해 있었다. 쏜살같이 달려온 직원이 석진의 몸부터 살폈다.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금방 치워드리겠습니다.”
직원은 빠르게 깨진 커피잔과 테이블을 정리했다. 테이블을 치우는 동안에도 여울의 시선은 석진을 향해 있었다.
갑자기 달라진 석진의 표정에 여울은 숨죽여 그를 바라 볼 뿐이었다. 석진의 멍한 초점이 다시 돌아왔을 때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그만 일어 날까요?”
“네? 아.. 그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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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하게 레스토랑을 나온 두사람. 이 분위기가 여울은 궁금하기도 찜찜하기도 했다. 헤어지기 전 석진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사장님, 혹시 제가 실수 한게 있나요?”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라고 하기엔 석진은 말은 너무 차가웠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아.. 네. 이사장님도요.”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뒤돌아섰다. 석진을 등진 채 걸으면서도 찜찜한 느낌은 가시질 않았다.
데려다 줄거라 생각은 안했지만 이렇게 헤어지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석진은 곧장 자신의 차로 향했다. 차에 타자마자 굳어있던 얼굴은 일그러졌다. 고통스럽게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핸들 위로 머리를 숙였다.
“하아..”
괴로움을 참지 못해 내뱉은 짧은 한숨만이 차 안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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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_
출근하는 여울의 표정에 근심이 가득했다. 어제 석진의 행동에 잠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이다. 축 쳐진 어깨에 핸드백을 걸치지 못하고 손에 대롱대롱 들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여울의 어깨를 잡았다.
“실장님!”
퀭한 눈으로 뒤돌아보자 큰 눈을 꿈뻑이고 있는 나연이 보였다.
“어.. 나연씨.”
“어머! 얼굴이 왜 이래요? 다크 써클이 턱 밑까지 내려왔어요!”
“다크 써클 가리려고 컨실러 한통을 다 쓴거 같은데.. 그래도 보여?”
여울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연은 여울의 손을 잡고 사무실이 아닌 회사 옆 카페로 향했다.
타악-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실장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거 마시고 정신 차려요.”
“고마워, 나연씨.”
여울은 멍한 시선으로 단숨에 커피를 빨아들였다. 나연은 여울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화장을 얼마나 두껍게 한 거예요? 가요 무대 올라갈 일 있어요?”
“너무 그러지마. 힝.”
자신도 창피한 듯 여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나연은 캐묻지 않았다. 여울의 등만 토닥여줄 뿐.
토닥토닥-
“자! 이제 들어가요.”
.
.
나연의 위로 덕인지 카페인의 덕인지 몰라도 여울은 기분은 다시 돌아오는 듯 했다. 나연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여울은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 이제 괜찮아졌어. 진짜야. 컨디션 돌아왔다니까.”
여울은 환하게 웃으며 양팔을 벌려 크게 한바퀴 돌았다. 그 모습에 나연도 피식 웃었다. 서로 괜찮다는 미소를 확인하고 여울이 뒤를 도는 순간 무언가에 부딪힌다.
퍼억!!!
“악!”
오른쪽 얼굴을 감싸며 앞을 쳐다봤을 때 여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싸늘한 얼굴의 차석진이었다.
“어머! 죄.. 죄송합니다.”
“즐거워보이네요.”
“아뇨. 그게.. 죄송합니다.”
여울은 차마 고개를 들어 석진을 바라보지 못했다. 옆에 있던 나연이 여울을 쿡쿡 찔렀다. 나연은 눈짓으로 자꾸만 석진을 가리켰다.
“응?”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보니 그의 셔츠에 파운데이션과 립스틱 자국에 선명하게 묻어있었다.
“으아아악!! 이걸 어째..”
여울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석진의 셔츠를 잡아 비볐다.
“하아.. 립스틱 자국은 잘 지워지지도 않는데. 어쩌지..”
여울은 석진의 가슴에 바짝 붙어서 혼자 중얼거렸다.
“계속... 이러고 있을겁니까?”
석진의 낮은 목소리가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고개를 올려다 봤을 때 그의 얼굴이 코 끝에 닿을 듯 가까웠다.
“헉! 죄송합니다.”
여울은 밀치듯 다급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어쩌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했다. 그러다 여울이 뭔가 생각 났는지 석진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 이사장님, 옷 벗으세요!”
“?!”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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