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역사는 만들어지는 것>
조회 : 1,265 추천 : 8 글자수 : 4,384 자 2022-11-19
의거를 하루 앞둔 날 아침, 도하는 양복을 멀끔하게 차려입었다. 모처럼 넥타이도 매고 모던보이처럼 꾸몄다. 새벽에 그 소란을 겪었지만 피곤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저 한껏 신난 20대 청년의 모습이었다.
“역시 비율이 좋아서 그런가, 확실히 무얼 걸쳐도 옷맵시가 죽여주는군.”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자신의 모습에 취해 거울을 요리조리 돌려보던 중, 방에서 세연이 조심스레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자태를 보자 도하는 입을 떡하니 벌리며 감탄사조차 뱉지 못하였다.
“아... 아니 세연 씨...?”
“응? 왜 그러십니까?”
도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세연이 의거를 위해 예쁜 옷을 입고 신분을 위장한 모습은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작정하고 꾸민 적은 없었다. 무릎을 덮고 발목에는 조금 못 미치는 유럽풍의 흰색 드레스, 곱게 묶어 올린 긴 머리칼, 그 위에 올려진 고운 장식, 그리고 분칠을 한 새하얀 그녀의 얼굴과 붉은 입술. 도하가 살면서 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다웠다.
“너무너무 아름답습니다.”
“도하 씨도 참, 부끄럽게 무슨 그런 말을...”
도하는 진심이었다. 그동안 대학 축제를 다니며 수많은 걸그룹과 여배우들을 보았으나 그 누구도 지금 세연의 모습에 미치지 못했다. 마치 거사를 당장 앞둔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이렇게 두 사람이 한껏 꾸민 이유는 거사 전날이었기 때문이다. 거사가 잘못될 수 있으니 마지막일지 모를 하루를 기억에 남도록 보내기 위함이었다.
“오늘 저와 하루를 보내주시겠습니까?”
도하가 마치 서양의 신사처럼 세연을 향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럴 수 있어 영광입니다.”
세연은 빙긋 웃으며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그리고 둘은 손을 잡은 채 경성 거리로 나갔다.
.
.
.
경성에는 볼거리가 아주 많았다.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전차, 활기찬 시장, 뛰어노는 어린아이들, 날이 풀려 나들이를 나온 청춘 남녀들로 가득했다. 봄을 맞아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꽃들과 경성의 풍경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세연 씨, 경성에서 가보고 싶은 곳이 있나요?”
“그럼요. 저는 엘리베이터라는 것을 타보고 싶어요. 에스컬... 뭐라고 하는 움직이는 계단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네? 그런 것이 있나요? 어디에 있죠?”
도하는 일부러 모른 척을 했다. 21세기에 살다 온 도하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아주 익숙했으나 세연은 그렇지 못했다.
“미츠코시 백화점이요!”
“백화점이요? 좋아요. 그럼 그쪽으로 갑시다!”
두 사람은 마치 내일 있을 거사를 잊어버린 양 신나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평화롭게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데이트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차를 타고 백화점에 도착하자 세연은 도하를 끌어당기듯 재촉했다.
“빨리 가봐요! 4층에 가면 맛있는 것들도 잔뜩 판대요!”
“하하, 천천히 가요. 백화점은 도망가지 않는답니다.”
도하는 마치 현실 세계에서 새내기 여대생들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서울에 처음 와본 새내기 후배들이 서울 타워, 더 현대 서울, 낙산공원, 한강공원 같은 서울의 명소에 설레하던 그런 모습. 그러고 보니 세연이 만약 21세기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생기발랄한 모습의 여대생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손에 총과 폭탄 대신 아이패드와 전공 책을 들고,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대신 캠퍼스를 뛰어다니는 그런 평범한 학생.
“뭐해요- 빨리 오라니까요?”
“알겠어요. 같이 가요-”
잠시 상념에 잠겨 걸음을 멈춘 도하를 세연이 재촉했다. 세연에게 백화점은 신세계였다. 처음 보는 물건으로 가득했다. 고급 가구, 전화기, 차, 라디오, TV 등 비싸고 귀한 물건이 널려있었다. 한참 백화점을 구경하고 4층으로 올라가니 세연의 말대로 고급 음식점들이 즐비해 있었다.
“세연 씨, 뭐가 제일 먹고 싶으세요?”
“다요! 음... 차갑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던데, 그거랑... 홍차... 가배(커피)... 그거 말고도 너무 많아요.”
“그럼 방금 말한 것들 다 먹어요. 우리.”
“꺄- 신난다! 그래요!”
도하는 밝게 웃는 세연의 모습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로 세연은 아이스크림, 초콜릿, 팥빙수, 홍차, 커피를 무려 애피타이저로 먹어치웠다. 식사로는 1930년대 최신 유행 음식인 카레라이스를 골라 먹었다. 디저트로 탄산음료와 바나나, 멜론까지 정복한 후에야 백화점을 벗어났다.
“하 배불러. 배가 터질 것 같아요.”
세연은 모처럼의 호화로운 식사에 기분이 최고조였다. 도하 역시 그런 세연의 모습을 보니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저도요. 입이 즐거웠어요. 예쁜 세연 씨 덕분에 눈도 즐거웠고요... 하하하. 그럼 이제 조금 걸을까요?”
“풉, 그래요. 어디로 갈까요?”
“음, 북촌 거리가 예쁘고 좋아요. 그쪽으로 걸을까요?”
“좋아요!”
1930년대의 북촌은 오늘날처럼 한옥들이 오순도순 모여있는 거리였다. 이 역시 세연에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산들바람에 벚꽃잎이 날아와 두 사람을 반겨주기도 했다.
“이런 예쁜 거리가 있었다니, 상해나 항주보다 훨씬 분위기가 좋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행이에요.”
“도하 씨 덕분에 좋은 구경을 합니다.”
지금껏 둘이 함께한 여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순간들이었다. 적어도 이날만큼은 두 사람이 가는 모든 길이 꽃길이었다. 지극히 행복하고 눈부셨다.
.
.
.
“도하 씨,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어딘가요?”
“한강입니다.”
“한강이라... 조금 오래 걸어야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저녁 공기가 꽤 쌀쌀하기도 하고요.”
“괜찮습니다. 언제 또 둘이 평화롭게 걷겠습니까?”
“그래요. 강으로 갑시다.”
한강은 한 시간 정도 걸어야 했다. 익숙지 않은 구두를 신은 두 사람은 발이 조금은 불편했지만,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 도하에게는 세연이, 세연에게는 도하가 있었다. 그렇게 묵묵히 걷다 보니 어느새 노을을 담은 강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가에 다다른 두 사람은 물결이 잘 보이는 자그마한 돌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강물에 비친 노을이 참으로 아름답네요.”
“정말 그래요.”
세연은 강물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런 세연을 바라보던 도하는 문득 품 안에 있는 노트와 펜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것을 꺼내 들었다.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는 세연의 모습을 노트에 담았다. 글씨를 쓰면 그 글씨를 지우고 대답을 하는 노트가 그림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도하는 어여쁜 세연의 앉은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커다란 눈, 오똑한 콧대, 오밀조밀한 입술, 고운 옷차림, 그리고 발목의 흉터까지 포인트를 집어내어 그렸다.
“다 되었습니다.”
30여 분만에 세연의 모습을 대강 그려낸 그림이 완성되었다. 도하는 노트에서 그림을 뜯어내 세연에게 건넸다.
“제 마지막일지 모르는 선물입니다.”
“어머, 언제 그리셨습니까? 고마워요.”
“아닙니다. 천천히 더 구경하고 가시죠. 구경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세연은 그림을 받아들었다. 화폭에 담긴 자신의 모습과 노을빛 강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하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노트를 다시 펼쳤다. 그리고는 펜을 들어 글씨를 적었다. 내일 있을 거사의 결과를 물어보려는 듯했다.
‘안녕.’
‘너무 오랜만이에요. 제 존재를 잊으신 것은 아닐까 걱정했답니다.’
‘나를 이곳에 보내주어 고마워.’
‘아닙니다. 스스로 선택하신 길인걸요.’
‘그동안 고마웠어.’
‘내일 거사의 결과를 물어보시려고요?’
‘아니. 괜찮아.’
도하는 거사의 결과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그냥 인사를 적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세연 씨. 그거 아십니까?”
“무얼요?”
“역사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말을 마치자 도하는 노트를 오른팔로 힘껏 던졌다. 한강에 풍덩 빠진 노트는 힘없이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아니, 무엇이길래 그렇게 강물에 버리십니까?”
“저의 미련입니다.”
“미련이요? 알아듣게 말씀해주세요.”
“저것이 있으면 거사를 앞둔 제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요.”
“네...?”
“세연 씨, 노을은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지요. 그렇지만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고운 빛깔 때문이 아닙니다. 누가 말하길 노을은 순식간에 지나갈 정도로 짧기에 아름답다고 합니다.”
“...”
“그리고 저도 저 노을처럼 살려고 합니다.”
도하는 스러져가는 노을을 등지며 말했다. 또 속으로는 이렇게 되뇌었다.
‘그리고 노을처럼 살아가는 당신처럼 살려고 합니다.’
복잡한 말의 속뜻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으나 도하의 결연한 의지를 느낀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강바닥에 가라앉은 한국사 노트에는 이렇게 글씨가 적히고 있었다.
‘당신은 살아서 거사의 성공을 볼 수 없을 겁니다.’
“역시 비율이 좋아서 그런가, 확실히 무얼 걸쳐도 옷맵시가 죽여주는군.”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자신의 모습에 취해 거울을 요리조리 돌려보던 중, 방에서 세연이 조심스레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자태를 보자 도하는 입을 떡하니 벌리며 감탄사조차 뱉지 못하였다.
“아... 아니 세연 씨...?”
“응? 왜 그러십니까?”
도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세연이 의거를 위해 예쁜 옷을 입고 신분을 위장한 모습은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작정하고 꾸민 적은 없었다. 무릎을 덮고 발목에는 조금 못 미치는 유럽풍의 흰색 드레스, 곱게 묶어 올린 긴 머리칼, 그 위에 올려진 고운 장식, 그리고 분칠을 한 새하얀 그녀의 얼굴과 붉은 입술. 도하가 살면서 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다웠다.
“너무너무 아름답습니다.”
“도하 씨도 참, 부끄럽게 무슨 그런 말을...”
도하는 진심이었다. 그동안 대학 축제를 다니며 수많은 걸그룹과 여배우들을 보았으나 그 누구도 지금 세연의 모습에 미치지 못했다. 마치 거사를 당장 앞둔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이렇게 두 사람이 한껏 꾸민 이유는 거사 전날이었기 때문이다. 거사가 잘못될 수 있으니 마지막일지 모를 하루를 기억에 남도록 보내기 위함이었다.
“오늘 저와 하루를 보내주시겠습니까?”
도하가 마치 서양의 신사처럼 세연을 향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럴 수 있어 영광입니다.”
세연은 빙긋 웃으며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그리고 둘은 손을 잡은 채 경성 거리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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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는 볼거리가 아주 많았다.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전차, 활기찬 시장, 뛰어노는 어린아이들, 날이 풀려 나들이를 나온 청춘 남녀들로 가득했다. 봄을 맞아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꽃들과 경성의 풍경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세연 씨, 경성에서 가보고 싶은 곳이 있나요?”
“그럼요. 저는 엘리베이터라는 것을 타보고 싶어요. 에스컬... 뭐라고 하는 움직이는 계단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네? 그런 것이 있나요? 어디에 있죠?”
도하는 일부러 모른 척을 했다. 21세기에 살다 온 도하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아주 익숙했으나 세연은 그렇지 못했다.
“미츠코시 백화점이요!”
“백화점이요? 좋아요. 그럼 그쪽으로 갑시다!”
두 사람은 마치 내일 있을 거사를 잊어버린 양 신나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평화롭게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데이트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차를 타고 백화점에 도착하자 세연은 도하를 끌어당기듯 재촉했다.
“빨리 가봐요! 4층에 가면 맛있는 것들도 잔뜩 판대요!”
“하하, 천천히 가요. 백화점은 도망가지 않는답니다.”
도하는 마치 현실 세계에서 새내기 여대생들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서울에 처음 와본 새내기 후배들이 서울 타워, 더 현대 서울, 낙산공원, 한강공원 같은 서울의 명소에 설레하던 그런 모습. 그러고 보니 세연이 만약 21세기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생기발랄한 모습의 여대생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손에 총과 폭탄 대신 아이패드와 전공 책을 들고,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대신 캠퍼스를 뛰어다니는 그런 평범한 학생.
“뭐해요- 빨리 오라니까요?”
“알겠어요. 같이 가요-”
잠시 상념에 잠겨 걸음을 멈춘 도하를 세연이 재촉했다. 세연에게 백화점은 신세계였다. 처음 보는 물건으로 가득했다. 고급 가구, 전화기, 차, 라디오, TV 등 비싸고 귀한 물건이 널려있었다. 한참 백화점을 구경하고 4층으로 올라가니 세연의 말대로 고급 음식점들이 즐비해 있었다.
“세연 씨, 뭐가 제일 먹고 싶으세요?”
“다요! 음... 차갑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던데, 그거랑... 홍차... 가배(커피)... 그거 말고도 너무 많아요.”
“그럼 방금 말한 것들 다 먹어요. 우리.”
“꺄- 신난다! 그래요!”
도하는 밝게 웃는 세연의 모습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로 세연은 아이스크림, 초콜릿, 팥빙수, 홍차, 커피를 무려 애피타이저로 먹어치웠다. 식사로는 1930년대 최신 유행 음식인 카레라이스를 골라 먹었다. 디저트로 탄산음료와 바나나, 멜론까지 정복한 후에야 백화점을 벗어났다.
“하 배불러. 배가 터질 것 같아요.”
세연은 모처럼의 호화로운 식사에 기분이 최고조였다. 도하 역시 그런 세연의 모습을 보니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저도요. 입이 즐거웠어요. 예쁜 세연 씨 덕분에 눈도 즐거웠고요... 하하하. 그럼 이제 조금 걸을까요?”
“풉, 그래요. 어디로 갈까요?”
“음, 북촌 거리가 예쁘고 좋아요. 그쪽으로 걸을까요?”
“좋아요!”
1930년대의 북촌은 오늘날처럼 한옥들이 오순도순 모여있는 거리였다. 이 역시 세연에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산들바람에 벚꽃잎이 날아와 두 사람을 반겨주기도 했다.
“이런 예쁜 거리가 있었다니, 상해나 항주보다 훨씬 분위기가 좋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행이에요.”
“도하 씨 덕분에 좋은 구경을 합니다.”
지금껏 둘이 함께한 여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순간들이었다. 적어도 이날만큼은 두 사람이 가는 모든 길이 꽃길이었다. 지극히 행복하고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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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씨,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어딘가요?”
“한강입니다.”
“한강이라... 조금 오래 걸어야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저녁 공기가 꽤 쌀쌀하기도 하고요.”
“괜찮습니다. 언제 또 둘이 평화롭게 걷겠습니까?”
“그래요. 강으로 갑시다.”
한강은 한 시간 정도 걸어야 했다. 익숙지 않은 구두를 신은 두 사람은 발이 조금은 불편했지만,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 도하에게는 세연이, 세연에게는 도하가 있었다. 그렇게 묵묵히 걷다 보니 어느새 노을을 담은 강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가에 다다른 두 사람은 물결이 잘 보이는 자그마한 돌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강물에 비친 노을이 참으로 아름답네요.”
“정말 그래요.”
세연은 강물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런 세연을 바라보던 도하는 문득 품 안에 있는 노트와 펜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것을 꺼내 들었다.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는 세연의 모습을 노트에 담았다. 글씨를 쓰면 그 글씨를 지우고 대답을 하는 노트가 그림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도하는 어여쁜 세연의 앉은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커다란 눈, 오똑한 콧대, 오밀조밀한 입술, 고운 옷차림, 그리고 발목의 흉터까지 포인트를 집어내어 그렸다.
“다 되었습니다.”
30여 분만에 세연의 모습을 대강 그려낸 그림이 완성되었다. 도하는 노트에서 그림을 뜯어내 세연에게 건넸다.
“제 마지막일지 모르는 선물입니다.”
“어머, 언제 그리셨습니까? 고마워요.”
“아닙니다. 천천히 더 구경하고 가시죠. 구경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세연은 그림을 받아들었다. 화폭에 담긴 자신의 모습과 노을빛 강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하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노트를 다시 펼쳤다. 그리고는 펜을 들어 글씨를 적었다. 내일 있을 거사의 결과를 물어보려는 듯했다.
‘안녕.’
‘너무 오랜만이에요. 제 존재를 잊으신 것은 아닐까 걱정했답니다.’
‘나를 이곳에 보내주어 고마워.’
‘아닙니다. 스스로 선택하신 길인걸요.’
‘그동안 고마웠어.’
‘내일 거사의 결과를 물어보시려고요?’
‘아니. 괜찮아.’
도하는 거사의 결과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그냥 인사를 적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세연 씨. 그거 아십니까?”
“무얼요?”
“역사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말을 마치자 도하는 노트를 오른팔로 힘껏 던졌다. 한강에 풍덩 빠진 노트는 힘없이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아니, 무엇이길래 그렇게 강물에 버리십니까?”
“저의 미련입니다.”
“미련이요? 알아듣게 말씀해주세요.”
“저것이 있으면 거사를 앞둔 제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요.”
“네...?”
“세연 씨, 노을은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지요. 그렇지만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고운 빛깔 때문이 아닙니다. 누가 말하길 노을은 순식간에 지나갈 정도로 짧기에 아름답다고 합니다.”
“...”
“그리고 저도 저 노을처럼 살려고 합니다.”
도하는 스러져가는 노을을 등지며 말했다. 또 속으로는 이렇게 되뇌었다.
‘그리고 노을처럼 살아가는 당신처럼 살려고 합니다.’
복잡한 말의 속뜻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으나 도하의 결연한 의지를 느낀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강바닥에 가라앉은 한국사 노트에는 이렇게 글씨가 적히고 있었다.
‘당신은 살아서 거사의 성공을 볼 수 없을 겁니다.’
작가의 말
현생이 바빠지다 보니 날짜를 헷갈렸습니다ㅠㅠ원래 저녁 시간대에 올려야 했으나 늦어진 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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