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돌아오다>
조회 : 1,379 추천 : 7 글자수 : 4,732 자 2022-11-25
긴 꿈을 꾸었다. 너무도 생생한 꿈이었다. 아니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눈을 뜬 도하는 주변을 살폈다. 쾌적한 냄새, 포근한 이불, 이곳은 21세기의 서울에 있는 도하의 방 안이었다.
“뭐지...”
도하는 죽음을 결심하고 자폭했었다. 노트는 강물에 버렸고, 노트가 말하길 역사를 바꾸지 않아야 돌아올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총독과 함께 자폭한 순간 역사를 바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살아있는 감촉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 시원한 산들바람, 창문을 뚫고 오는 햇살까지.
“왜 살아있는 것이지? 정말 다 꿈이었어...?”
그럴 리가 없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한 경험들이었다. 도하는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자신이 두 번째로 현실 세계를 떠났을 때 보다 확실히 지나있었다. 그리고 읽지 않은 알림으로 뜨는 카카오톡 메시지가 한 통 있었다.
’오빠 왜 먼저 갔어요ㅡ.ㅡ‘
메시지를 보낸 이는 아람이었다. 학교 앞 중국집 다래원에서 떠나올 때 도하가 혼자 버려두고 나온 그 후배 말이다. 메시지를 읽자 도하는 자신의 시간여행이 꿈이 아니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미안. 나중에 만나서 말해 줄게ㅠㅠ‘
도하는 우선 대충 둘러댔다. 그런데 무심코 옆을 보니 방바닥에 낯선 무언가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강물에 버려서 한강 바닥을 헤엄치고 있어야 할 한국사 노트였다.
“뭐야?! 이게 왜 여기 있지?”
당황하며 노트를 주워들고 서둘러 펼쳤다. 노트에는 늘 그렇듯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도하는 재빨리 아무 펜이나 쥐어 글씨를 썼다.
‘어떻게 된거야?’
‘저는 물리적으로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지 않아요. 덕분에 한강 구경 잘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서 돌아온 거야? 분명 죽으면 돌아올 수 없다고 했잖아.’
‘그건 당신의 의지를 확인하고자 그냥 한 말입니다.’
‘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약속대로 역사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죽었어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죠.’
‘역사를 바꾸지 않았다니? 나는 분명 우가키 총독을...’
도하는 펜을 멈추고 서둘러 핸드폰을 켜 나X위키에 접속했다. 그리고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이라고 검색했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우가키 총독의 정보는 도하를 경악하게 했다.
우가키 가즈시게는 1956년 사망했다.
이상했다. 자신은 우가키 총독과 함께 자폭했다. 시기는 얼추 1930년대일 것이다. 그런데 나X위키에서 말하길 우가키는 1956년까지 생존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죽인 우가키는 누구인지, 지금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하는 다시 노트에 질문을 적었다.
‘분명 난 놈을 죽였어. 어째서 실제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은 거야?!’
‘안타깝네요.’
‘빨리 바른대로 말해!’
‘당신은 분명 우가키 가즈시게와 자폭을 했죠. 그렇지만 숨이 끊어진 것은 당신이 먼저였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만든 역사는 실제 역사가 되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이게 뭐야...”
도하는 망연자실했다. 자신이 그토록 고생해서 이룬 성과가 그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나는... 왜... 무엇을 위해...”
허탈했다. 더이상 노트를 들고 있어도 의미가 없었다. 또 노트를 사용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도하는 차라리 이것이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노트를 펴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너를 버리고 싶어. 어떻게 해야 너를 버릴 수 있는 거야.’
‘섭섭하네요.’
‘지쳤어. 그만하고 싶다. 빨리 말해줘.’
‘저를 처음 얻은 곳으로 가세요.’
‘노트를 처음 얻은 곳?’
도하가 노트를 받은 곳은 김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노트 역시 김 교수가 건넨 것이었다. 도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옷을 챙겨입었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달려나가 학교로 향했다. 역시나 장장 두 시간이 걸리는 길이었다. 그 먼 거리를 가는 동안 그가 손에 쥔 것은 노트 한 권뿐이었다.
.
.
.
‘똑- 똑-’
“교수님, 저 16학번 황도하입니다.”
“들어오게.”
김 교수의 대답이 들리자마자 도하는 그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그래. 황 조교, 무슨 일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노트, 돌려 드리고 싶습니다.”
“여행은 잘 다녀왔나?”
“처음부터 다 알고 주셨던 것이죠?”
“하하, 당연하지. 그럼 몰랐겠나?”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여기 올려놓고 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도하는 아무 책상에나 노트를 올려두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김 교수가 입을 열었다.
“자네,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그 말을 들은 도하는 그대로 선 채 발길을 멈추었다. 도하가 반응을 보이자 가만히 서 있던 김 교수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홀짝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말을 꺼냈다.
“이봉창 의사도, 윤봉길 의사도, 백정기 의사도 구하지 못했겠지. 그리고 혼자서 하려고 했던 거사도 실패했을 것이고 말이야.”
“...”
도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김 교수에게 놀랐으나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역사는 지금도 바뀌고 있어.”
“...”
“자네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모든 사건이,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지. 분명히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잊혀가는 것. 그것이 바로 역사가 바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 교수의 말은 그럴듯했다. 사람들은 갈수록 역사를, 특히 근현대사를 잊어가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있었던 사건을 없었던 일처럼 만드는 것이다. 마치 도하가 백정기와 흑색공포단의 의거를 가상의 사건으로 알고 있던 것처럼.
“...”
“자네가 열심히 노력했겠지만, 역사는 바꾸지 못했을 거야. 왜 그런지 아는가? 역사는 바뀌어서는 아니 되거든.”
“...”
“그래서 역사가 바뀌지 않도록, 많은 사람이 기억할 수 있도록 자네와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거야. 취업도 어려운 이 시대에 역사학을 굳이 전공으로 삼아 가면서.”
“...”
“무언가 느낀 것이 있길 바라네. 내 노트를 받아줘서 고마웠어.”
“네. 교수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도하는 등을 돌린 채 묵묵히 듣다가 연구실을 나왔다. 문을 닫고 나오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나왔다. 역사 속에서 쌓은 추억에 대한 이별의 슬픔인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자책감인지, 아니면 그저 애초에 바꿀 수 없었던 역사에 대한 무력감인지. 오직 도하 자신만이 그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렇게 도하의 잊지 못할 시간여행은 진짜로 끝이 났다.
.
.
.
평생 잊지 못할 1학기가 끝났다. 방학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순식간에 2학기가 찾아왔다. 늦여름의 화창한 햇살과 적당한 바람이 캠퍼스를 찾아왔다. 도하는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평범한 대학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에게 이번 2학기는 대학생으로서 다니는 마지막 학기였다.
“오늘 들을 수업은... 한국 독립운동의 이해? 이거 하나네.”
졸업 학년이지만 교양 수업을 신청한 도하였다. 학교를 어영부영 다니느라 교양 필수 이수 학점을 채우지 못한 탓이었다. 열심히 교양 수업을 들으러 가던 도하는 자신의 신발 끈이 풀린 것을 발견했다. 잠시 허리를 숙여 신발 끈을 묶었다.
“아이 귀찮게.”
그때 도하의 앞으로 한 여학생이 지나쳐갔다. 도하는 고개를 숙인 상태로 우연히 지나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청바지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발목에는 무언가에 긁힌 붉은 흉터가 있었다.
‘다치셨나 보다.’
개의치 않고 신발 끈을 다 묶은 그는 몸을 일으켜 다시 강의실로 향했다. 열심히 걸어 도착한 강의실은 이미 거의 만석이었다. 맨 앞자리 말고는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맨 뒤에 남아있는 자리 하나를 눈썰미 좋게 확인한 도하는 재빨리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앗싸! 오늘 운이 좀 좋네.’
그때 교수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 개강하니까 좋지?”
“...”
첫 수업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너스레를 떠는 교수였다. 학생들은 역시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교수는 그러한 반응이 익숙한 듯 무안해하지 않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자, 출석 부를게. 교양 수업이니까 학번 순 말고 이름순으로 부른다. 강유현.”
“네.”
“고준혁.”
“네.”
“김예진.”
“네.”
“김현진.”
“네.”
하나둘씩 불리던 출석은 어느새 히읗으로 시작하는 성씨까지 왔다. 황 씨인 도하는 느긋하게 마지막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태준.”
“네.”
“한아리.”
“네.”
“현세연.”
“네.”
‘현세연?!’
도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구하고 싶었던, 그리고 사랑했던 이름이었다. 그는 현세연이라는 이름에 대답한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앞에 있기에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옷을 보니 언제 본 것만 같은 옷이었다.
‘어디서 보았지? 아, 아까 강의실에 오다가...’
아까 신발 끈을 묶는 도하를 스쳐 지나간 그 여학생이었다. 발목에 흉터가 있는 그 여학생. 그때 교수가 도하의 이름을 불렀다.
“자, 마지막이네? 황도하.”
도하의 이름이 불리자 현세연이라 불린 여학생도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칠흑 같은 긴 생머리가 휘날렸다. 창문 너머의 햇살과 맞물리며 마치 드라마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그리고 도하와 그녀는 눈이 마주쳤다.
마주한 서로의 모습은 서로가 기억하는 그 모습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점점 촉촉해졌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세연이 말했다.
“돌아오겠다는 약속... 지키셨네요.”
-끝-
“뭐지...”
도하는 죽음을 결심하고 자폭했었다. 노트는 강물에 버렸고, 노트가 말하길 역사를 바꾸지 않아야 돌아올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총독과 함께 자폭한 순간 역사를 바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살아있는 감촉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 시원한 산들바람, 창문을 뚫고 오는 햇살까지.
“왜 살아있는 것이지? 정말 다 꿈이었어...?”
그럴 리가 없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한 경험들이었다. 도하는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자신이 두 번째로 현실 세계를 떠났을 때 보다 확실히 지나있었다. 그리고 읽지 않은 알림으로 뜨는 카카오톡 메시지가 한 통 있었다.
’오빠 왜 먼저 갔어요ㅡ.ㅡ‘
메시지를 보낸 이는 아람이었다. 학교 앞 중국집 다래원에서 떠나올 때 도하가 혼자 버려두고 나온 그 후배 말이다. 메시지를 읽자 도하는 자신의 시간여행이 꿈이 아니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미안. 나중에 만나서 말해 줄게ㅠㅠ‘
도하는 우선 대충 둘러댔다. 그런데 무심코 옆을 보니 방바닥에 낯선 무언가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강물에 버려서 한강 바닥을 헤엄치고 있어야 할 한국사 노트였다.
“뭐야?! 이게 왜 여기 있지?”
당황하며 노트를 주워들고 서둘러 펼쳤다. 노트에는 늘 그렇듯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도하는 재빨리 아무 펜이나 쥐어 글씨를 썼다.
‘어떻게 된거야?’
‘저는 물리적으로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지 않아요. 덕분에 한강 구경 잘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서 돌아온 거야? 분명 죽으면 돌아올 수 없다고 했잖아.’
‘그건 당신의 의지를 확인하고자 그냥 한 말입니다.’
‘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약속대로 역사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죽었어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죠.’
‘역사를 바꾸지 않았다니? 나는 분명 우가키 총독을...’
도하는 펜을 멈추고 서둘러 핸드폰을 켜 나X위키에 접속했다. 그리고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이라고 검색했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우가키 총독의 정보는 도하를 경악하게 했다.
우가키 가즈시게는 1956년 사망했다.
이상했다. 자신은 우가키 총독과 함께 자폭했다. 시기는 얼추 1930년대일 것이다. 그런데 나X위키에서 말하길 우가키는 1956년까지 생존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죽인 우가키는 누구인지, 지금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하는 다시 노트에 질문을 적었다.
‘분명 난 놈을 죽였어. 어째서 실제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은 거야?!’
‘안타깝네요.’
‘빨리 바른대로 말해!’
‘당신은 분명 우가키 가즈시게와 자폭을 했죠. 그렇지만 숨이 끊어진 것은 당신이 먼저였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만든 역사는 실제 역사가 되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이게 뭐야...”
도하는 망연자실했다. 자신이 그토록 고생해서 이룬 성과가 그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나는... 왜... 무엇을 위해...”
허탈했다. 더이상 노트를 들고 있어도 의미가 없었다. 또 노트를 사용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도하는 차라리 이것이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노트를 펴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너를 버리고 싶어. 어떻게 해야 너를 버릴 수 있는 거야.’
‘섭섭하네요.’
‘지쳤어. 그만하고 싶다. 빨리 말해줘.’
‘저를 처음 얻은 곳으로 가세요.’
‘노트를 처음 얻은 곳?’
도하가 노트를 받은 곳은 김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노트 역시 김 교수가 건넨 것이었다. 도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옷을 챙겨입었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달려나가 학교로 향했다. 역시나 장장 두 시간이 걸리는 길이었다. 그 먼 거리를 가는 동안 그가 손에 쥔 것은 노트 한 권뿐이었다.
.
.
.
‘똑- 똑-’
“교수님, 저 16학번 황도하입니다.”
“들어오게.”
김 교수의 대답이 들리자마자 도하는 그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그래. 황 조교, 무슨 일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노트, 돌려 드리고 싶습니다.”
“여행은 잘 다녀왔나?”
“처음부터 다 알고 주셨던 것이죠?”
“하하, 당연하지. 그럼 몰랐겠나?”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여기 올려놓고 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도하는 아무 책상에나 노트를 올려두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김 교수가 입을 열었다.
“자네,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그 말을 들은 도하는 그대로 선 채 발길을 멈추었다. 도하가 반응을 보이자 가만히 서 있던 김 교수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홀짝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말을 꺼냈다.
“이봉창 의사도, 윤봉길 의사도, 백정기 의사도 구하지 못했겠지. 그리고 혼자서 하려고 했던 거사도 실패했을 것이고 말이야.”
“...”
도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김 교수에게 놀랐으나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역사는 지금도 바뀌고 있어.”
“...”
“자네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모든 사건이,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지. 분명히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잊혀가는 것. 그것이 바로 역사가 바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 교수의 말은 그럴듯했다. 사람들은 갈수록 역사를, 특히 근현대사를 잊어가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있었던 사건을 없었던 일처럼 만드는 것이다. 마치 도하가 백정기와 흑색공포단의 의거를 가상의 사건으로 알고 있던 것처럼.
“...”
“자네가 열심히 노력했겠지만, 역사는 바꾸지 못했을 거야. 왜 그런지 아는가? 역사는 바뀌어서는 아니 되거든.”
“...”
“그래서 역사가 바뀌지 않도록, 많은 사람이 기억할 수 있도록 자네와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거야. 취업도 어려운 이 시대에 역사학을 굳이 전공으로 삼아 가면서.”
“...”
“무언가 느낀 것이 있길 바라네. 내 노트를 받아줘서 고마웠어.”
“네. 교수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도하는 등을 돌린 채 묵묵히 듣다가 연구실을 나왔다. 문을 닫고 나오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나왔다. 역사 속에서 쌓은 추억에 대한 이별의 슬픔인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자책감인지, 아니면 그저 애초에 바꿀 수 없었던 역사에 대한 무력감인지. 오직 도하 자신만이 그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렇게 도하의 잊지 못할 시간여행은 진짜로 끝이 났다.
.
.
.
평생 잊지 못할 1학기가 끝났다. 방학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순식간에 2학기가 찾아왔다. 늦여름의 화창한 햇살과 적당한 바람이 캠퍼스를 찾아왔다. 도하는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평범한 대학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에게 이번 2학기는 대학생으로서 다니는 마지막 학기였다.
“오늘 들을 수업은... 한국 독립운동의 이해? 이거 하나네.”
졸업 학년이지만 교양 수업을 신청한 도하였다. 학교를 어영부영 다니느라 교양 필수 이수 학점을 채우지 못한 탓이었다. 열심히 교양 수업을 들으러 가던 도하는 자신의 신발 끈이 풀린 것을 발견했다. 잠시 허리를 숙여 신발 끈을 묶었다.
“아이 귀찮게.”
그때 도하의 앞으로 한 여학생이 지나쳐갔다. 도하는 고개를 숙인 상태로 우연히 지나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청바지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발목에는 무언가에 긁힌 붉은 흉터가 있었다.
‘다치셨나 보다.’
개의치 않고 신발 끈을 다 묶은 그는 몸을 일으켜 다시 강의실로 향했다. 열심히 걸어 도착한 강의실은 이미 거의 만석이었다. 맨 앞자리 말고는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맨 뒤에 남아있는 자리 하나를 눈썰미 좋게 확인한 도하는 재빨리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앗싸! 오늘 운이 좀 좋네.’
그때 교수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 개강하니까 좋지?”
“...”
첫 수업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너스레를 떠는 교수였다. 학생들은 역시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교수는 그러한 반응이 익숙한 듯 무안해하지 않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자, 출석 부를게. 교양 수업이니까 학번 순 말고 이름순으로 부른다. 강유현.”
“네.”
“고준혁.”
“네.”
“김예진.”
“네.”
“김현진.”
“네.”
하나둘씩 불리던 출석은 어느새 히읗으로 시작하는 성씨까지 왔다. 황 씨인 도하는 느긋하게 마지막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태준.”
“네.”
“한아리.”
“네.”
“현세연.”
“네.”
‘현세연?!’
도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구하고 싶었던, 그리고 사랑했던 이름이었다. 그는 현세연이라는 이름에 대답한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앞에 있기에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옷을 보니 언제 본 것만 같은 옷이었다.
‘어디서 보았지? 아, 아까 강의실에 오다가...’
아까 신발 끈을 묶는 도하를 스쳐 지나간 그 여학생이었다. 발목에 흉터가 있는 그 여학생. 그때 교수가 도하의 이름을 불렀다.
“자, 마지막이네? 황도하.”
도하의 이름이 불리자 현세연이라 불린 여학생도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칠흑 같은 긴 생머리가 휘날렸다. 창문 너머의 햇살과 맞물리며 마치 드라마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그리고 도하와 그녀는 눈이 마주쳤다.
마주한 서로의 모습은 서로가 기억하는 그 모습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점점 촉촉해졌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세연이 말했다.
“돌아오겠다는 약속... 지키셨네요.”
-끝-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한국사 노트 독자 여러분.
오늘 35화를 끝으로 연재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관심과 응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일 모레 연재 후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닫기한국사 노트 - 독립운동가 구하기
36.연재 후기조회 : 1,581 추천 : 5 댓글 : 1 글자 : 2,332 35.<35화. 돌아오다>조회 : 1,381 추천 : 7 댓글 : 0 글자 : 4,732 34.<34화. 마지막 의거 2>조회 : 1,224 추천 : 5 댓글 : 0 글자 : 4,513 33.<33화. 마지막 의거>조회 : 1,203 추천 : 7 댓글 : 0 글자 : 4,549 32.<32화. 역사는 만들어지는 것>조회 : 1,238 추천 : 8 댓글 : 0 글자 : 4,384 31.<31화. 독립군 구출 작전 2>조회 : 1,314 추천 : 8 댓글 : 0 글자 : 4,415 30.<30화. 독립군 구출 작전>조회 : 1,245 추천 : 7 댓글 : 0 글자 : 4,457 29.<29화. 기차에서 생긴 일>조회 : 1,480 추천 : 7 댓글 : 0 글자 : 4,728 28.<28화. 조선을 향하여>조회 : 265 추천 : 5 댓글 : 0 글자 : 4,432 27.<27화. 새로운 계획>조회 : 359 추천 : 5 댓글 : 0 글자 : 5,072 26.<26화. 재회>조회 : 292 추천 : 4 댓글 : 0 글자 : 4,431 25.<25화. 한밤중의 소동>조회 : 354 추천 : 5 댓글 : 0 글자 : 4,431 24.<24화. 다시>조회 : 333 추천 : 3 댓글 : 0 글자 : 4,465 23.<23화. 포기>조회 : 644 추천 : 4 댓글 : 0 글자 : 4,586 22.<22화. 육삼정의 함정>조회 : 324 추천 : 4 댓글 : 0 글자 : 4,296 21.<21화. 잠시만 안녕>조회 : 361 추천 : 4 댓글 : 0 글자 : 4,366 20.<20화. 일본 공사 암살 모의>조회 : 381 추천 : 4 댓글 : 0 글자 : 4,274 19.<19화. 아나키스트들을 만나다>조회 : 293 추천 : 5 댓글 : 0 글자 : 4,279 18.<18화. 돌아온 상해>조회 : 337 추천 : 6 댓글 : 0 글자 : 4,107 17.<17화. 약속>조회 : 301 추천 : 7 댓글 : 2 글자 : 4,241 16.<16화. 이별>조회 : 299 추천 : 6 댓글 : 0 글자 : 4,562 15.<15화. 사형장에 울린 총성>조회 : 369 추천 : 6 댓글 : 0 글자 : 4,721 14.<14화. 거짓 정보>조회 : 334 추천 : 7 댓글 : 0 글자 : 4,235 13.<13화. 훙커우 공원 의거>조회 : 817 추천 : 5 댓글 : 0 글자 : 4,853 12.<12화. 최후의 대화>조회 : 309 추천 : 6 댓글 : 0 글자 : 4,344 11.<11화. 도피>조회 : 563 추천 : 6 댓글 : 0 글자 : 4,440 10.<10화. 잘생긴 청년>조회 : 591 추천 : 8 댓글 : 0 글자 : 4,152 9.<9화. 동경 탈출>조회 : 437 추천 : 7 댓글 : 0 글자 : 4,716 8.<8화. 잔인한 밤>조회 : 506 추천 : 9 댓글 : 0 글자 : 4,354 7.<7화. 천운>조회 : 853 추천 : 11 댓글 : 0 글자 : 4,259 6.<6화. 동경으로 가는 길>조회 : 584 추천 : 10 댓글 : 0 글자 : 4,955 5.<5화. 봉창과의 하루>조회 : 872 추천 : 9 댓글 : 0 글자 : 4,523 4.<4화. 여행 준비>조회 : 995 추천 : 11 댓글 : 0 글자 : 4,385 3.<3화. 일왕 암살 계획>조회 : 875 추천 : 11 댓글 : 0 글자 : 4,517 2.<2화. 상해에서의 첫날 밤>조회 : 1,307 추천 : 12 댓글 : 0 글자 : 5,940 1.<1화. 역사를 바꾸고 싶은 남자>조회 : 4,245 추천 : 13 댓글 : 3 글자 : 4,5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