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조회 : 870 추천 : 0 글자수 : 4,830 자 2022-12-07
민우는 서준과 헤어진 뒤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와 차를 몰고 성현 호텔로 향했다. 한 손으로 핸들을 쥔 채 운전하던 그의 미간에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삼십 분 정도 달려 도착한 호텔 앞에 차를 세우자 민우의 차를 알아본 직원이 다가왔다. 차에서 내리는 민우의 모습은 주위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한올 한올 곱게 넘긴 머리카락, 흐트러짐없는 옷차림, 흠잡을 곳이 없었다. 직원에게 차키를 건네주고는 회전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또 다른 직원이 다가와 그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이런 상황이 민우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들에게 비친것일테니까.
"이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직원이 안내한 곳은 레스토랑 내 비치되어있는 개인 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차민우의 아버지이자 성현 호텔의 회장인 차도우였다. 떡벌어진 어깨에 군데군데 보이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마치 처음부터 차 회장이 입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몸에 착감기는 슈트는 한층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문을 다시 열 수 있는건 눈앞에 앉아있는 그의 손에 달려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룸 안으로 한걸음 발을 내딛자 무겁게 내려앉는 분위기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늦었구나. 우선 앉거라."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공기를 더욱 묵직하게 가라앉혔다.
"죄송합니다."
민우는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차 회장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자신의 아버지를 볼 때마다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불편함이었다. 언제쯤이면 아무렇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지만 말이다. 민우는 옅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 또 선 자리를 거절했다더구나."
입안의 텁텁함을 지우기 위해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을 집어 들던 민우의 손이 멈칫거렸다. 며칠전 어머니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서준과 만난 그날 밤 선을 마지막으로 모든 선 자리를 거절했다. 평소처럼 나갔다가 거절하면 됐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시간을 빼앗긴다는 사실이 아깝게 느껴졌다. 결국 아버지께 말씀드리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네."
"네가 얼른 자리를 잡아야 이 애비도 마음을 놓고 회사에서 물러나지 않겠느냐."
민우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차 회장의 모습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라는 의심은 금방 확신으로 바뀌었다.
"우성 호텔 회장하고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민우의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새겨졌다. 그도 차 회장 만큼이나 우성 호텔을 잘 알고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호텔업계에서 알아주는 기업 중에 한곳이다. 그러나 업계들 사이에서 들리는 소문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 소문이 차 회장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의 자존심에 미세한 스크레치가 난 만큼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앞으로 나아갈 사람이다. 그게 자신의 자식이라도 말이다. 차 회장은 말을 이었다.
"널 마음에 들어 하더구나."
"아버지."
"너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으니 잘 알 지않느냐. 무엇이 회사를 위한 것인지."
민우가 입술을 달싹이려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서는 우성 호텔 회장과 두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은 먼저 회사에 관해 이야기로 시작했다. 민우는 두 사람의 대화를 그저 묵묵히 지켜보다 한번씩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나중에 차 회장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 모습이 좋게 보였는지 우성 호텔 회장의 칭찬이 이어졌다.
"아드님이 회사를 이으면 든든하시겠습니다."
"하하. 아직 어리숙해서 회사를 어찌 맞길지 걱정스럽습니다."
자연스레 테이블 위로 자신들의 자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주거니 받거니하는 대화를 보고있자니 어이가 없었다. 무슨 웃기지도 않는 개그라도 보고있는 듯 했다.
"무슨 그런말씀을. 딸만 있는 저로서는 부럽습니다. 지금 4학년이면 곧 졸업..."
우성회장의 눈이 민우에게로 향하자 차회장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민우가 국내 대학에 입학한다고 할때부터 그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성현호텔의 아들이 그런 대학을 나왔다고 하면 대체 뭐라고 생각하겠냐며 말이다. 누군가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보든, 민우는 그가 계획해놓은 틀 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흔들지라도. 차회장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민우를 쳐다봤다.
"너 이번에 조기졸업 신청하지 않았느냐?"
마치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재촉하기라도 하듯 자신을 쳐다보는 차 회장의 시선이 목을 졸라오는듯했다. 사실 민우도 조기졸업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굳이 지루한 대학생활을 졸업까지 이어갈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차라리 목표라도 있는 회사를 잇는 게 덜 지루할 것만 같았다. 분명 이 생각을 며칠 전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서준과 지내온 며칠사이 미묘하게 뭔가가 바뀌고 있었다. 그날 밤 만났던 그 순간부터, 자신과 마주쳤을 때 변하던 순간순간의 표정들이 머릿속 어딘가에 기록이라도 된 듯 자꾸 떠올랐다. 사라질듯하던 흥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지금 놓아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민우는 차회장의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또렷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졸업까지 계속 다닐 생각입니다."
민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얼굴에 언짢음과 짜증스러움이 스며들었다. 그는 앞에 놓인 와인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미세하게 바뀌는 차회장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통쾌함이 밀려올라왔다. 그러나 그를 많이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분위기에 짓눌려 어깨가 움찔거릴지도 모른다. 곁에 앉아있던 우성 회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눈치라도 보듯 와인으로 목을 축이는듯했다. 민우는 말을 덧붙였다.
"교수님들이 저를 좋아해 주셔서 더 많은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민우의 말에 조금은 누그러진듯한 차회장의 표정을 느끼기라도 한 듯 우성회장이 말을 덧붙였다.
"정말 제 사위로 삼고 싶어집니다."
"그럼 날짜를 잡아보는 건 어떻습니까? 저도 전에 따님을 뵈니 참하고 마음에 쏙 들던데."
드디어 두 사람이 원하는 화제에 닿기라도 한듯 서로의 눈빛이 밝아졌다. 민우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쯤 이방에서 나갈 수 있는 걸까. 몸보다 정신이 피곤해짐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아랫입술에 가져다 대던 그의 시선이 잔에 담긴 붉은 색에 시선을 떨궜다. 희미하게 사라졌던 촉감이 다시 입술끝에 생생하게 들러붙었다. 순간 아랫배로 힘이 들어가는 감각에 민우는 서둘러 와인잔을 한모금 마셨다.
'........'
민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거렸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어이없다는듯 몇 모금을더 마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와인잔에서 시선을 뗀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그들의 얼굴은 중요한 서류에 도장이라도 찍은 듯마냥 뿌듯해 보였다.
"그날 뵙도록 하죠."
그날이 언제를 말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아니 관심도 없었다. 어차피 나가도 그 여자와 결혼 할 일도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우성 회장이 차를 타고 떠나자 차 회장도 차에 올랐다. 차에 탄 채로 창문을 열어 민우에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더 이상 실망시키는일이 없도록 하거라."
민우의 대답을 듣기도전에 창문이 올라갔고 그대로 호텔을 빠져나갔다. 자신의 차에 올라탄 민우는 목을 죄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몸을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턱하고 막힌 숨통은 좀처럼 트이지 않았다. 민우는 글로브박스에 넣어둔 담배를 떠올리곤 열어봤지만 보이지않았다. 마치 금단현상이라도 일어난 듯 머리가 지끈거렸다. 민우는 차를 호텔에 세워둔 채로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민우가 편의점 문을 밀고 들어가자 문 끝에 달린 종이 딸랑 거렸다. 냉장고로 걸어간 그는 맥주 한 캔을 꺼내들었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취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알코올과 담배만으로도 썩은 이 기분을 풀기엔 적당하니까 말이다.
"블루도 하나 주세요."
민우는 오른손을 재킷 품속에 집어넣고는 검은색 가죽 반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계산을 끝내고 나온 민우는 편의점 구석 쪽으로 걸어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담배 끝에 발갛게 불빛이 일었다.
"후우...."
숨을 내뱉자 뿌연 연기가 이내 공기 속에 흩어졌다. 입안의 텁텁함은 옅어진 듯 했지만,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무게감은 여전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 더러운 기분을 안고 잠이 들어야하는 모양이다. 민우는 한올 한올 넘긴 머리카락을 흐트렀다. 대충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마치 제자리를 찾아간듯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반쯤 남은 담배를 옆에 놓인 재떨이에 비벼껐다. 호텔로 발길을 돌리던 그의 고개가 가게 앞에 몰려있는 사람들로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
민우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어느 한곳을 바라봤다. 마치 그날 밤처럼 혼잡한 밤거리에 어울리지않는 분위기.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유독 눈에 띄는 외모. 민우는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지금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자신은 어떻게 할까. 마치 자신의 것에 누군가 손을 댔을 때의 그런 짜증스러움이 밀려왔다. 그 기분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건 장난에 빠져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치겠네."
민우는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서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직원이 안내한 곳은 레스토랑 내 비치되어있는 개인 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차민우의 아버지이자 성현 호텔의 회장인 차도우였다. 떡벌어진 어깨에 군데군데 보이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마치 처음부터 차 회장이 입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몸에 착감기는 슈트는 한층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문을 다시 열 수 있는건 눈앞에 앉아있는 그의 손에 달려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룸 안으로 한걸음 발을 내딛자 무겁게 내려앉는 분위기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늦었구나. 우선 앉거라."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공기를 더욱 묵직하게 가라앉혔다.
"죄송합니다."
민우는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차 회장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자신의 아버지를 볼 때마다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불편함이었다. 언제쯤이면 아무렇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지만 말이다. 민우는 옅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 또 선 자리를 거절했다더구나."
입안의 텁텁함을 지우기 위해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을 집어 들던 민우의 손이 멈칫거렸다. 며칠전 어머니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서준과 만난 그날 밤 선을 마지막으로 모든 선 자리를 거절했다. 평소처럼 나갔다가 거절하면 됐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시간을 빼앗긴다는 사실이 아깝게 느껴졌다. 결국 아버지께 말씀드리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네."
"네가 얼른 자리를 잡아야 이 애비도 마음을 놓고 회사에서 물러나지 않겠느냐."
민우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차 회장의 모습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라는 의심은 금방 확신으로 바뀌었다.
"우성 호텔 회장하고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민우의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새겨졌다. 그도 차 회장 만큼이나 우성 호텔을 잘 알고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호텔업계에서 알아주는 기업 중에 한곳이다. 그러나 업계들 사이에서 들리는 소문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 소문이 차 회장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의 자존심에 미세한 스크레치가 난 만큼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앞으로 나아갈 사람이다. 그게 자신의 자식이라도 말이다. 차 회장은 말을 이었다.
"널 마음에 들어 하더구나."
"아버지."
"너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으니 잘 알 지않느냐. 무엇이 회사를 위한 것인지."
민우가 입술을 달싹이려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서는 우성 호텔 회장과 두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은 먼저 회사에 관해 이야기로 시작했다. 민우는 두 사람의 대화를 그저 묵묵히 지켜보다 한번씩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나중에 차 회장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 모습이 좋게 보였는지 우성 호텔 회장의 칭찬이 이어졌다.
"아드님이 회사를 이으면 든든하시겠습니다."
"하하. 아직 어리숙해서 회사를 어찌 맞길지 걱정스럽습니다."
자연스레 테이블 위로 자신들의 자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주거니 받거니하는 대화를 보고있자니 어이가 없었다. 무슨 웃기지도 않는 개그라도 보고있는 듯 했다.
"무슨 그런말씀을. 딸만 있는 저로서는 부럽습니다. 지금 4학년이면 곧 졸업..."
우성회장의 눈이 민우에게로 향하자 차회장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민우가 국내 대학에 입학한다고 할때부터 그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성현호텔의 아들이 그런 대학을 나왔다고 하면 대체 뭐라고 생각하겠냐며 말이다. 누군가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보든, 민우는 그가 계획해놓은 틀 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흔들지라도. 차회장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민우를 쳐다봤다.
"너 이번에 조기졸업 신청하지 않았느냐?"
마치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재촉하기라도 하듯 자신을 쳐다보는 차 회장의 시선이 목을 졸라오는듯했다. 사실 민우도 조기졸업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굳이 지루한 대학생활을 졸업까지 이어갈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차라리 목표라도 있는 회사를 잇는 게 덜 지루할 것만 같았다. 분명 이 생각을 며칠 전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서준과 지내온 며칠사이 미묘하게 뭔가가 바뀌고 있었다. 그날 밤 만났던 그 순간부터, 자신과 마주쳤을 때 변하던 순간순간의 표정들이 머릿속 어딘가에 기록이라도 된 듯 자꾸 떠올랐다. 사라질듯하던 흥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지금 놓아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민우는 차회장의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또렷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졸업까지 계속 다닐 생각입니다."
민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얼굴에 언짢음과 짜증스러움이 스며들었다. 그는 앞에 놓인 와인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미세하게 바뀌는 차회장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통쾌함이 밀려올라왔다. 그러나 그를 많이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분위기에 짓눌려 어깨가 움찔거릴지도 모른다. 곁에 앉아있던 우성 회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눈치라도 보듯 와인으로 목을 축이는듯했다. 민우는 말을 덧붙였다.
"교수님들이 저를 좋아해 주셔서 더 많은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민우의 말에 조금은 누그러진듯한 차회장의 표정을 느끼기라도 한 듯 우성회장이 말을 덧붙였다.
"정말 제 사위로 삼고 싶어집니다."
"그럼 날짜를 잡아보는 건 어떻습니까? 저도 전에 따님을 뵈니 참하고 마음에 쏙 들던데."
드디어 두 사람이 원하는 화제에 닿기라도 한듯 서로의 눈빛이 밝아졌다. 민우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쯤 이방에서 나갈 수 있는 걸까. 몸보다 정신이 피곤해짐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아랫입술에 가져다 대던 그의 시선이 잔에 담긴 붉은 색에 시선을 떨궜다. 희미하게 사라졌던 촉감이 다시 입술끝에 생생하게 들러붙었다. 순간 아랫배로 힘이 들어가는 감각에 민우는 서둘러 와인잔을 한모금 마셨다.
'........'
민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거렸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어이없다는듯 몇 모금을더 마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와인잔에서 시선을 뗀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그들의 얼굴은 중요한 서류에 도장이라도 찍은 듯마냥 뿌듯해 보였다.
"그날 뵙도록 하죠."
그날이 언제를 말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아니 관심도 없었다. 어차피 나가도 그 여자와 결혼 할 일도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우성 회장이 차를 타고 떠나자 차 회장도 차에 올랐다. 차에 탄 채로 창문을 열어 민우에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더 이상 실망시키는일이 없도록 하거라."
민우의 대답을 듣기도전에 창문이 올라갔고 그대로 호텔을 빠져나갔다. 자신의 차에 올라탄 민우는 목을 죄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몸을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턱하고 막힌 숨통은 좀처럼 트이지 않았다. 민우는 글로브박스에 넣어둔 담배를 떠올리곤 열어봤지만 보이지않았다. 마치 금단현상이라도 일어난 듯 머리가 지끈거렸다. 민우는 차를 호텔에 세워둔 채로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민우가 편의점 문을 밀고 들어가자 문 끝에 달린 종이 딸랑 거렸다. 냉장고로 걸어간 그는 맥주 한 캔을 꺼내들었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취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알코올과 담배만으로도 썩은 이 기분을 풀기엔 적당하니까 말이다.
"블루도 하나 주세요."
민우는 오른손을 재킷 품속에 집어넣고는 검은색 가죽 반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계산을 끝내고 나온 민우는 편의점 구석 쪽으로 걸어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담배 끝에 발갛게 불빛이 일었다.
"후우...."
숨을 내뱉자 뿌연 연기가 이내 공기 속에 흩어졌다. 입안의 텁텁함은 옅어진 듯 했지만,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무게감은 여전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 더러운 기분을 안고 잠이 들어야하는 모양이다. 민우는 한올 한올 넘긴 머리카락을 흐트렀다. 대충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마치 제자리를 찾아간듯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반쯤 남은 담배를 옆에 놓인 재떨이에 비벼껐다. 호텔로 발길을 돌리던 그의 고개가 가게 앞에 몰려있는 사람들로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
민우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어느 한곳을 바라봤다. 마치 그날 밤처럼 혼잡한 밤거리에 어울리지않는 분위기.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유독 눈에 띄는 외모. 민우는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지금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자신은 어떻게 할까. 마치 자신의 것에 누군가 손을 댔을 때의 그런 짜증스러움이 밀려왔다. 그 기분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건 장난에 빠져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치겠네."
민우는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서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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