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조회 : 867 추천 : 0 글자수 : 4,981 자 2022-12-14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서준의 손이 침대 주위를 더듬거렸다. 뻗은 팔이 마치 습기라도 머금은 듯 무겁게 느껴졌다. 머리가 붕뜨는 기분마저 들었다. 벌써 며칠째 밤마다 얼굴 없는 귀신에게 도망다니다 쌓여버린 수면 부족과 피로가 겹친 탓인지 뼈마디마다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나한테 무슨 원한이 그렇게 깊길래 결석도 안 하는 거지."
왜 쫓아오냐고 이유라도 물어보고 싶은데 막상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본능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위험을 느끼면 발부터 움직인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이 그렇게까지 달리기를 잘하는 인간인 줄 꿈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가기 싫다."
이불속에서 이리저리 뒹굴거리던 서준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서준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어제 하지못한 과제를 오늘은 해야 했기에 서준은 느릿느릿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떠지지 않는 뻑뻑한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몽롱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진수: 언제와?]
"언제 가기는 수업 시간 되면 가지."
문자를 찍던 서준은 귀찮은 듯 침대 위에 핸드폰을 던져놓고 터덜터덜 욕실로 향했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입속에 집어넣었다. 상큼한 민트향이 입안 가득 맺히자 시야가 점점 선명해졌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너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눈 밑에 다크써클. 피부는 푸석푸석. 눈은 퀭한 것이 날밤을 샌운 듯한 남자. 자신의 얼굴이란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게 다 그 얼굴 없는 귀신이 주고 간 흔적인 것.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해야 할 판이다.
"진짜 오늘도 나타나면 도망가나 봐라."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아...귀신이니까 죽었으니 또 죽일순 없나. 어쨌든 착실히 찾아오는 귀신이니 어김없이 나타날 게 분명했다. 서준은 복수의 칼날을 박박 갈아되며 차가운 물에 얼굴을 씻었다. 씻고 보니 조금은 나아 보이니 다행이긴 했다. 욕실을 나온 서준이 어제 벗어둔 바지를 집어들려하자 징징거리는 핸드폰 소리가 들려왔다.
[진수.]
그가 전화를 할 거란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서준은 느긋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곤 스피커로 켜놓고 바지를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너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도 자냐?"
전화기 너머로 투덜거리는 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준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안자."
["어? 안자? 그럼 왜 답장안해?"]
"무슨 일인데."
["뭐, 무슨 일 있는 건 아닌데. 진짜 내가 원래 그런 인간이 아니란 거 알잖아. 얼마나 착실한지.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온 거."]
서준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이 이렇게 온갖 장점 아닌 장점을 붙여가며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걸 보니 무슨 말을 할지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래서 도와달라고?"
["아니. 너 아침 먹기 귀찮잖아. 같이 덕우교수 수업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핫한 모닝을 즐겨보자고."]
"계산은 네가 해라."
["오케이! 학교 식당으로 와라."]
서준은 가방을 챙겨들었다. 나가기전 냉장고 문을 열어 시원한 생수를 꺼내 들이켰다. 칼칼한 입안이 조금은 나아졌지만, 목구멍이 간질간질 거렸다. 웬만해서 감기에 걸리지 않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서준은 알지 못했다. 집을 나서자 하늘엔 물기를 가득 품은 비구름이 가득했다. 우산을 챙겨갈까라도 생각했지만,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것도 귀찮았고 무엇보다 일기예보에서도 가끔 흐릴 뿐 비 소식 얘기는 없었다.
집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3정거장쯤 남았을 때였다. 후두둑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손에 쥔 핸드폰 날씨에는 여전히 구름 표시만 있을 뿐 비표시는 없었다.
'소나기인가.'
달리는 버스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꽤 시끄럽게 들려왔다. 비와 사람들의 체온이 뒤섞이자 공기가 후덥함과 굽굽함에 저절로 눈가가 찌푸려졌다. 하지만 에어컨을 켜주신 덕분에 조금은 누그러졌지만, 창밖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니 걱정스러움은 한층 더했다. 한 정거장씩 줄어들 때마다 어쩐지 비가 더 요란해 보였다. 버스정류장에 발을 내딛자 비릿한 비 냄새와 함께 날카로워진 빗줄기가 땅에 내리꽂혔다. 움푹 파인 곳에는 물웅덩이가 고여있었다.
'망했다.'
서둘러 걸어가는 사람들의 찰박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결국 정류장에는 빗소리만 가득할 뿐 고요한 정적이 울렸다. 고작 비 좀 맞는다고 드러누울 정도는 아니겠지만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강의를 듣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설마 하는 기대감을 품고 서준은 진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서준: 우산 없냐.]
답장은 아주 깔끔하고 명료하게 되돌아왔다.
[진수: 없어.]
하아.... 이녀석이 우산을 들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자신이 바보 멍청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진수 인 것을. 하지만 우산을 들고 오지 않은 자신 탓이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던 사이 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우르르 내리는 학생들 틈으로 자신이 아는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넌지시 같이 끼여가려던 계획은 실패인 모양이다. 서준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였다.
"와. 미친.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냐? 어떻게 뛰어가."
"비 좀 맞는다고 안 죽어."
"도하 넌 바로 강의 들어가?"
"아니 도서관에 들렸......"
"........!"
버스에서 내리는 도하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아... 왜 하필 저 녀석인 걸까. 역시 자신에게 뭔가를 한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불편했다. 지금까지 다가오던 후배들과 달라서일까. 물론 그의 태도는 다른 후배들과 달랐다. 그 다름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다름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너희 먼저가."
설마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그저 강의 때나 아니면 한 번쯤은 학교에서 만날테니 그 순간만을 생각했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 도하의 입꼬리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뒤에서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하는 성큼성큼 서준의 곁으로 걸어갔다.
"야. 그냥 가자."
"뭐야? 설마 도하가 얘기하던 그 선배?"
어렴풋이 들려오는 그 선배라는 단어에 서준은 도하 뒤에 서 있던 세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안녕하세요. 선배님."이라는 말만 남기곤 서둘러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을 쳐다보던 서준의 눈앞에 커다란 인영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서준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하는 미소를 흘렸다. 살짝 끌어올려진 입꼬리가 선배와 닮아 보였다. 다만 선배보다는 더 앳되어 보이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누구 기다리고 계신 거예요?"
"아니. 지금 학교 가려고."
서준을 바라보던 도하의 시선이 그의 비어있는 두 손이 눈에 들어왔다. 도하가 말을 이었다.
"우산은요? 비 맞고 가시려고요?"
"어차피 뛰어가도 상관없어. 비 좀 맞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차마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고민에 쌓여있던 자신의 모습은 도하와 마주친 이후로 과거가 되었다.
"오늘 비온다고 못 들으셨어요?"
"어. 핸드폰에 비 표시도 없었고."
"일기예보는 반만 믿으란 말 몰랐어요?"
도하가 싱긋 웃어 보였다. 서준도 그런 말을 안 들어본 건 아니었다. 그래도 요즈음 꽤 정확하게 맞았다. 신뢰도를 회복하기에 적당했다. 그걸 이렇게 한순간에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엄청난 해머로 내리칠 줄은 말이다.
"이젠 안 믿어."
"전 믿어도 돼요. 비 안 맞게 해드릴게요."
비 안 맞게 해준다고? 힐끗 내려다본 도하의 두 손에는 우산으로 생긴 모양체는 없었다. 가방 안에 들어있기라도 한건가. 하지만 날름 우산을 같이 쓰고 갈 마음은 없었다. 불편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지 않았다.
"잠깐 가방 들고 기다리고 계세요."
도하는 어깨에 느슨히 멘 가방을 서준의 가슴 쪽으로 밀었다. 얼떨결에 도하의 가방을 품에 안게 된 서준이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그는 빗속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뛰는 속도가 꽤 빠른 듯 순식간에 작아졌다. 도하의 모습을 바라보던 서준은 언짢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그냥 갈까도 싶었지만. 자신이 들고 있는 가방에 발이 묶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이게 뭐 하는 건지."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도하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우산 하나에 서준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우산을 사러 간 건가. 근데 우산을 샀으면 쓰고 오면 될 것을 왜 저러는 걸까. 녀석이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침밥을 잘못 먹고 온건 아닌지.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도하는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살짝 털어냈다. 마치 목욕한 강아지들이 자신의 몸을 탈수기처럼 털어 재끼는 그 모습과 똑같아 보였다. 서준의 품에 안겨있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는 우산을 폈다.
"이제 가요. 우산이 좀 작긴해도 쓸만할 거예요."
또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서고 말았다. 저 우산 밑으로 들어갈 것인가. 비를 맞고 갈 것인가. 양쪽 어깨에 나타난 천사와 악마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뇌는 몸보다 정직했다. 축축이 젖은 옷과 신발, 머리카락을 선택했다.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이 된 컨디션에 머리를 쓰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혼자가. 난 비 맞고 가도 되니까."
서준이 쏟아지는 빗속으로 뛰어가려고 하자 도하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나한테 무슨 원한이 그렇게 깊길래 결석도 안 하는 거지."
왜 쫓아오냐고 이유라도 물어보고 싶은데 막상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본능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위험을 느끼면 발부터 움직인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이 그렇게까지 달리기를 잘하는 인간인 줄 꿈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가기 싫다."
이불속에서 이리저리 뒹굴거리던 서준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서준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어제 하지못한 과제를 오늘은 해야 했기에 서준은 느릿느릿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떠지지 않는 뻑뻑한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몽롱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진수: 언제와?]
"언제 가기는 수업 시간 되면 가지."
문자를 찍던 서준은 귀찮은 듯 침대 위에 핸드폰을 던져놓고 터덜터덜 욕실로 향했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입속에 집어넣었다. 상큼한 민트향이 입안 가득 맺히자 시야가 점점 선명해졌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너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눈 밑에 다크써클. 피부는 푸석푸석. 눈은 퀭한 것이 날밤을 샌운 듯한 남자. 자신의 얼굴이란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게 다 그 얼굴 없는 귀신이 주고 간 흔적인 것.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해야 할 판이다.
"진짜 오늘도 나타나면 도망가나 봐라."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아...귀신이니까 죽었으니 또 죽일순 없나. 어쨌든 착실히 찾아오는 귀신이니 어김없이 나타날 게 분명했다. 서준은 복수의 칼날을 박박 갈아되며 차가운 물에 얼굴을 씻었다. 씻고 보니 조금은 나아 보이니 다행이긴 했다. 욕실을 나온 서준이 어제 벗어둔 바지를 집어들려하자 징징거리는 핸드폰 소리가 들려왔다.
[진수.]
그가 전화를 할 거란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서준은 느긋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곤 스피커로 켜놓고 바지를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너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도 자냐?"
전화기 너머로 투덜거리는 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준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안자."
["어? 안자? 그럼 왜 답장안해?"]
"무슨 일인데."
["뭐, 무슨 일 있는 건 아닌데. 진짜 내가 원래 그런 인간이 아니란 거 알잖아. 얼마나 착실한지.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온 거."]
서준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이 이렇게 온갖 장점 아닌 장점을 붙여가며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걸 보니 무슨 말을 할지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래서 도와달라고?"
["아니. 너 아침 먹기 귀찮잖아. 같이 덕우교수 수업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핫한 모닝을 즐겨보자고."]
"계산은 네가 해라."
["오케이! 학교 식당으로 와라."]
서준은 가방을 챙겨들었다. 나가기전 냉장고 문을 열어 시원한 생수를 꺼내 들이켰다. 칼칼한 입안이 조금은 나아졌지만, 목구멍이 간질간질 거렸다. 웬만해서 감기에 걸리지 않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서준은 알지 못했다. 집을 나서자 하늘엔 물기를 가득 품은 비구름이 가득했다. 우산을 챙겨갈까라도 생각했지만,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것도 귀찮았고 무엇보다 일기예보에서도 가끔 흐릴 뿐 비 소식 얘기는 없었다.
집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3정거장쯤 남았을 때였다. 후두둑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손에 쥔 핸드폰 날씨에는 여전히 구름 표시만 있을 뿐 비표시는 없었다.
'소나기인가.'
달리는 버스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꽤 시끄럽게 들려왔다. 비와 사람들의 체온이 뒤섞이자 공기가 후덥함과 굽굽함에 저절로 눈가가 찌푸려졌다. 하지만 에어컨을 켜주신 덕분에 조금은 누그러졌지만, 창밖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니 걱정스러움은 한층 더했다. 한 정거장씩 줄어들 때마다 어쩐지 비가 더 요란해 보였다. 버스정류장에 발을 내딛자 비릿한 비 냄새와 함께 날카로워진 빗줄기가 땅에 내리꽂혔다. 움푹 파인 곳에는 물웅덩이가 고여있었다.
'망했다.'
서둘러 걸어가는 사람들의 찰박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결국 정류장에는 빗소리만 가득할 뿐 고요한 정적이 울렸다. 고작 비 좀 맞는다고 드러누울 정도는 아니겠지만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강의를 듣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설마 하는 기대감을 품고 서준은 진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서준: 우산 없냐.]
답장은 아주 깔끔하고 명료하게 되돌아왔다.
[진수: 없어.]
하아.... 이녀석이 우산을 들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자신이 바보 멍청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진수 인 것을. 하지만 우산을 들고 오지 않은 자신 탓이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던 사이 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우르르 내리는 학생들 틈으로 자신이 아는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넌지시 같이 끼여가려던 계획은 실패인 모양이다. 서준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였다.
"와. 미친.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냐? 어떻게 뛰어가."
"비 좀 맞는다고 안 죽어."
"도하 넌 바로 강의 들어가?"
"아니 도서관에 들렸......"
"........!"
버스에서 내리는 도하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아... 왜 하필 저 녀석인 걸까. 역시 자신에게 뭔가를 한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불편했다. 지금까지 다가오던 후배들과 달라서일까. 물론 그의 태도는 다른 후배들과 달랐다. 그 다름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다름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너희 먼저가."
설마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그저 강의 때나 아니면 한 번쯤은 학교에서 만날테니 그 순간만을 생각했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 도하의 입꼬리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뒤에서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하는 성큼성큼 서준의 곁으로 걸어갔다.
"야. 그냥 가자."
"뭐야? 설마 도하가 얘기하던 그 선배?"
어렴풋이 들려오는 그 선배라는 단어에 서준은 도하 뒤에 서 있던 세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안녕하세요. 선배님."이라는 말만 남기곤 서둘러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을 쳐다보던 서준의 눈앞에 커다란 인영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서준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하는 미소를 흘렸다. 살짝 끌어올려진 입꼬리가 선배와 닮아 보였다. 다만 선배보다는 더 앳되어 보이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누구 기다리고 계신 거예요?"
"아니. 지금 학교 가려고."
서준을 바라보던 도하의 시선이 그의 비어있는 두 손이 눈에 들어왔다. 도하가 말을 이었다.
"우산은요? 비 맞고 가시려고요?"
"어차피 뛰어가도 상관없어. 비 좀 맞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차마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고민에 쌓여있던 자신의 모습은 도하와 마주친 이후로 과거가 되었다.
"오늘 비온다고 못 들으셨어요?"
"어. 핸드폰에 비 표시도 없었고."
"일기예보는 반만 믿으란 말 몰랐어요?"
도하가 싱긋 웃어 보였다. 서준도 그런 말을 안 들어본 건 아니었다. 그래도 요즈음 꽤 정확하게 맞았다. 신뢰도를 회복하기에 적당했다. 그걸 이렇게 한순간에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엄청난 해머로 내리칠 줄은 말이다.
"이젠 안 믿어."
"전 믿어도 돼요. 비 안 맞게 해드릴게요."
비 안 맞게 해준다고? 힐끗 내려다본 도하의 두 손에는 우산으로 생긴 모양체는 없었다. 가방 안에 들어있기라도 한건가. 하지만 날름 우산을 같이 쓰고 갈 마음은 없었다. 불편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지 않았다.
"잠깐 가방 들고 기다리고 계세요."
도하는 어깨에 느슨히 멘 가방을 서준의 가슴 쪽으로 밀었다. 얼떨결에 도하의 가방을 품에 안게 된 서준이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그는 빗속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뛰는 속도가 꽤 빠른 듯 순식간에 작아졌다. 도하의 모습을 바라보던 서준은 언짢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그냥 갈까도 싶었지만. 자신이 들고 있는 가방에 발이 묶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이게 뭐 하는 건지."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도하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우산 하나에 서준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우산을 사러 간 건가. 근데 우산을 샀으면 쓰고 오면 될 것을 왜 저러는 걸까. 녀석이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침밥을 잘못 먹고 온건 아닌지.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도하는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살짝 털어냈다. 마치 목욕한 강아지들이 자신의 몸을 탈수기처럼 털어 재끼는 그 모습과 똑같아 보였다. 서준의 품에 안겨있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는 우산을 폈다.
"이제 가요. 우산이 좀 작긴해도 쓸만할 거예요."
또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서고 말았다. 저 우산 밑으로 들어갈 것인가. 비를 맞고 갈 것인가. 양쪽 어깨에 나타난 천사와 악마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뇌는 몸보다 정직했다. 축축이 젖은 옷과 신발, 머리카락을 선택했다.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이 된 컨디션에 머리를 쓰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혼자가. 난 비 맞고 가도 되니까."
서준이 쏟아지는 빗속으로 뛰어가려고 하자 도하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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