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조회 : 776 추천 : 0 글자수 : 4,595 자 2023-01-05
본관으로 향하던 민우의 걸음이 점점 느리게 바뀌었다. 우산을 잡고 있던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손등 위로 옅은 힘줄이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우산 끝에 맺혔던 방울이 똑하고 떨어지자 서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
미세한 움직임에 젖은 앞 머리카락에 매달려있던 물방울이 또르륵하고 떨어졌다. 콧날을 가로질러 목선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무심코 자신의 시선도 같이 흘러내렸다. 비에 젖은 탓일까. 평소와는 다른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투명한 피부에 입술은 더욱 붉어 보였다. 어제 맞닿았던 그 온기가 다시 어지럽게 다가왔다. 봐서는 안될 걸 보고 만 기분이 들었다.
"후우..."
내뱉는 무거운 한숨이 비 사이로 흩어졌다. 입안이 바싹 말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분명 여자들보다 더 예쁜 외모인 건 분명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남자를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까지 여자를 사귀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 녀석에게도 누군가가....
'.......'
뭔지 모를 낯선 감각이 몸 안에 휘몰아쳤다.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는 울렁임이었다. 민우의 머릿속에 스치는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어릴 적 자신이 아끼던 책을 어머니가 버렸던 적이 있었다. 다른 어떤 책보다 애착을 가졌던 책이었기에 마음대로 버렸다는 사실보다 자기 것에 손을 댓다는게 더 화가 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유욕이 강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이건 사람이 아니고 물건이다. 사람에게서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말도 안돼..."
민우의 걸음이 멈췄다. 그런 그가 안타까워 보이기라도 한 걸까. 마치 누군가 자신에게 물어보기라도 하듯 질문을 던졌다. 옷은 왜 준 거지? 비를 맞아도 그냥 지나치면 됐을텐데. 녀석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넘기면 되지 않았어?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는 마치 민우에게 답을 재촉하기라도 하듯 더 강렬해졌다.
.....녀석이 젖은 모습으로 다니는게 싫었으니까.
억지로 붙여놓은 답처럼 어딘가 삐걱거렸다. 민우의 답이 영 못마땅한 듯 우산위에 내리꽂는 빗줄기의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빗소리만 가득한 고요함이 더욱더 정신없게 만드는 기분이 들었다. 민우의 미간에 점점 짙은 주름이 지어졌다.
"하아....."
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구겨진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민.우.선배!"
순간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의 고개가 옆으로 향했다. 곰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핑크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 긴 생머리를 하나로 말끔히 묶은 지현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 다가와도 모를 정도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녀가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를 만큼 녀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과제 때문에 생각할 게 있어서."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잠깐의 습한 공기가 흘렀다. 지현은 양손으로 우산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리곤 머뭇거리던 입술 끝이 이내 결심한 듯 털어냈다.
"선배. 그 후배 과제 언제까지 도와주셔야 해요?"
그 후배?녀석을 말하는건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지만 민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음 주까지인데. 왜?"
"요즘 그 후배 과제 도와준다고 저희랑 전혀 안 어울려주시잖아요. 섭섭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선배 졸업하고 나면 잘 보지도 못할 테고...."
지현은 멈칫하며 끝말을 흐렸다. 확실히 녀석과 과제를 하고부터 항상 어울리던 멤버들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섭섭이라는 단어와 그 공기가 그립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보다 녀석과 같이 있는 시간이 의외로 지루하지 않고 재밌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과제를 제출하고 난 후 그녀석과 어떻게 되는 거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지금은....?
"다음 주엔 수호랑 같이 술 한잔하자."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을 머릿속에 지워버리곤 말했다.
"네! 꼭 이예요."
소희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떠올랐다. 건물입구에서 소희와 헤어진 민우는 걸음을 옮겼다. 강의실로 들어서자 몇명의 학생들만이 자리를 메꾸고 있었다. 아직 수업까지 시간이 남아있었고 비 때문인지 아니면 4학년 수업이라서인지 빠지는 학생도 꽤 있는 듯 보였다. 민우는 창가 근처 제일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아주 잠시 옅은 한숨을 내쉬던 그의 옆으로 의자를 빼내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웬 한숨이야. 옷은 또 뭐고. 비도 와서 꽤 서늘한데."
입을 쩌억 벌리며 시원하게 하품을 내쉬던 수호가 물었다. 머리카락 겉표면이 살짝 젖은 걸 보니 누군가와 함께 중간까지 쓰고 온 모양이다. 비릿한 비 냄새가 풍겨오는듯했다. 그 녀석에게서도 났었던가....
"야!"
조용한 공기를 가르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였다.
"오늘 너 좀 이상하다. 평소의 차민우가 아닌데. 설마..."
수호는 상체를 민우 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속삭이듯 내뱉었다.
"쌓였냐?"
"........"
민우의 눈꼬리가 가늘게 구겨졌다. 욕구불만이라니.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예전엔 한번씩 자위를 하기는 했지만 끝난 뒤 몰려드는 여운이 달갑지 않았다. 설마 서준에게 드는 감각들이 예민해지는 건 이 탓인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었는지 헛웃음 새어나왔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오늘 과제 제출하는 건 알지?"
민우의 말에 수호의 입이 살짝 벌어짐과 동시에 눈은 마치 왕눈이처럼 커다래졌다. 저 반응을 보니 과제를 못 했거나 날짜를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수호의 입에서 뱉어지는 말은 민우의 예상에 적중했다.
"오늘이라니? 다음 주 아냐?"
"다음주는 기연 교수님. 오늘은 가연 교수님."
"아...."
수호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도와줄 테니까 대충이라도 해."
수호는 두 손바닥으로 민우의 한 손을 움켜쥐었다. 1학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기에 이런 장난스러운 행동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손을 감싼 촉감이 불편했다. 아무래도 수호가 말한 데로 오늘의 자신은 이상하긴 한건지도 모르겠다.
"손 안 놓으면 안 도와준다."
"네!"
수호는 망설임 없이 민우의 손을 놓았다. 민우의 도움이 있어서일까 다행히 정리가 끝나갈 즈음 강의실 문이 열리며 교수가 들어왔다. 수호는 조용히 엄지를 치켜세웠다. 민우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가방 안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창가에 앉은탓인지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들려왔다. 또또다시 떠오를 듯 흔들거리는 인영에 민우는 책위에 시선을 떨궜다. 딱히 졸업에 문제도 없었기에 수업을 듣는 태도라던가 과제를 내든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눈 앞에 펼쳐진 글자 하나하나에 신경을 쏟았다. 교수의 목소리가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강의실을 울렸다.
".......미디어는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민우는 교수의 말을 노트 위에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그의 노트 한바닥이 가득 찰 무렵 옆에서 엎드려 자던 수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났다는 건 수업이 곧 끝날 때가 되었다는 알림이었다. 무슨 뻐꾹이 알람 시계도 아니고 정확하게 눈을 뜨는 건지 새삼 신기했다. 과제를 제출하고 교수가 강의실을 빠져나간 후에야 수호는 해방감을 만끽하듯 그대로 책상 위에 턱을 가져다 대며 팔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하아... 드디어 끝났다!"
민우는 책상 위에 올려둔 가방에 책을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팔을 수호가 잡아챘다.
"밥먹으러 안 가? 내가 오늘 통 크게 한턱 낼 테니까 가자. 소희도 자리 잡아놓는다고 연락왔고."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너희끼리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누구? 과제 도와준다는 후배?"
"어."
"야. 과제 도와주는 거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너 여자 친구 생긴 줄 알겠다. 교수가 시켜도 대충 알려주면 되지 너무 공들이는 거 아냐?"
"그런거 아냐. 먼저 간다."
민우는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건물을 빠져나오자 항상 학생들로 가득하던 캠퍼스는 인적 하나 느낄 수 없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세상을 적막감 가득한 공간으로 메꿔놓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찰박찰박 하는 소리만이 빗줄기사이로 들릴 뿐이었다.
본관 옆 동에 도착한 민우는 우산을 접었다.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대충 털어내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막 수업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우르르 계단을 내려왔다. 반대로 걸어 올라가던 민우는 입꼬리에 옅은 미소를 매달았다. 자연스레 자신을 향한 흘끔거리는 시선, 반갑게 인사를 걸어오는 사람들을 상대하며 서준이 있을 강의실 앞에 도착했다. 몇 명만이 남은 강의실 앞에서 민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
마치 흐트러졌던 초점이 선명하게 맞춰지듯 자신의 옷을 입고 있는 서준의 모습만이 눈동자에 새겨졌다. 뭔가를 열심히 쓰던 서준의 시선이 들어 올려졌다. 눈이 마주친 건가 싶던 찰나 민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옆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
미세한 움직임에 젖은 앞 머리카락에 매달려있던 물방울이 또르륵하고 떨어졌다. 콧날을 가로질러 목선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무심코 자신의 시선도 같이 흘러내렸다. 비에 젖은 탓일까. 평소와는 다른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투명한 피부에 입술은 더욱 붉어 보였다. 어제 맞닿았던 그 온기가 다시 어지럽게 다가왔다. 봐서는 안될 걸 보고 만 기분이 들었다.
"후우..."
내뱉는 무거운 한숨이 비 사이로 흩어졌다. 입안이 바싹 말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분명 여자들보다 더 예쁜 외모인 건 분명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남자를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까지 여자를 사귀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 녀석에게도 누군가가....
'.......'
뭔지 모를 낯선 감각이 몸 안에 휘몰아쳤다.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는 울렁임이었다. 민우의 머릿속에 스치는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어릴 적 자신이 아끼던 책을 어머니가 버렸던 적이 있었다. 다른 어떤 책보다 애착을 가졌던 책이었기에 마음대로 버렸다는 사실보다 자기 것에 손을 댓다는게 더 화가 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유욕이 강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이건 사람이 아니고 물건이다. 사람에게서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말도 안돼..."
민우의 걸음이 멈췄다. 그런 그가 안타까워 보이기라도 한 걸까. 마치 누군가 자신에게 물어보기라도 하듯 질문을 던졌다. 옷은 왜 준 거지? 비를 맞아도 그냥 지나치면 됐을텐데. 녀석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넘기면 되지 않았어?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는 마치 민우에게 답을 재촉하기라도 하듯 더 강렬해졌다.
.....녀석이 젖은 모습으로 다니는게 싫었으니까.
억지로 붙여놓은 답처럼 어딘가 삐걱거렸다. 민우의 답이 영 못마땅한 듯 우산위에 내리꽂는 빗줄기의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빗소리만 가득한 고요함이 더욱더 정신없게 만드는 기분이 들었다. 민우의 미간에 점점 짙은 주름이 지어졌다.
"하아....."
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구겨진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민.우.선배!"
순간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의 고개가 옆으로 향했다. 곰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핑크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 긴 생머리를 하나로 말끔히 묶은 지현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 다가와도 모를 정도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녀가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를 만큼 녀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과제 때문에 생각할 게 있어서."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잠깐의 습한 공기가 흘렀다. 지현은 양손으로 우산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리곤 머뭇거리던 입술 끝이 이내 결심한 듯 털어냈다.
"선배. 그 후배 과제 언제까지 도와주셔야 해요?"
그 후배?녀석을 말하는건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지만 민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음 주까지인데. 왜?"
"요즘 그 후배 과제 도와준다고 저희랑 전혀 안 어울려주시잖아요. 섭섭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선배 졸업하고 나면 잘 보지도 못할 테고...."
지현은 멈칫하며 끝말을 흐렸다. 확실히 녀석과 과제를 하고부터 항상 어울리던 멤버들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섭섭이라는 단어와 그 공기가 그립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보다 녀석과 같이 있는 시간이 의외로 지루하지 않고 재밌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과제를 제출하고 난 후 그녀석과 어떻게 되는 거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지금은....?
"다음 주엔 수호랑 같이 술 한잔하자."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을 머릿속에 지워버리곤 말했다.
"네! 꼭 이예요."
소희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떠올랐다. 건물입구에서 소희와 헤어진 민우는 걸음을 옮겼다. 강의실로 들어서자 몇명의 학생들만이 자리를 메꾸고 있었다. 아직 수업까지 시간이 남아있었고 비 때문인지 아니면 4학년 수업이라서인지 빠지는 학생도 꽤 있는 듯 보였다. 민우는 창가 근처 제일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아주 잠시 옅은 한숨을 내쉬던 그의 옆으로 의자를 빼내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웬 한숨이야. 옷은 또 뭐고. 비도 와서 꽤 서늘한데."
입을 쩌억 벌리며 시원하게 하품을 내쉬던 수호가 물었다. 머리카락 겉표면이 살짝 젖은 걸 보니 누군가와 함께 중간까지 쓰고 온 모양이다. 비릿한 비 냄새가 풍겨오는듯했다. 그 녀석에게서도 났었던가....
"야!"
조용한 공기를 가르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였다.
"오늘 너 좀 이상하다. 평소의 차민우가 아닌데. 설마..."
수호는 상체를 민우 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속삭이듯 내뱉었다.
"쌓였냐?"
"........"
민우의 눈꼬리가 가늘게 구겨졌다. 욕구불만이라니.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예전엔 한번씩 자위를 하기는 했지만 끝난 뒤 몰려드는 여운이 달갑지 않았다. 설마 서준에게 드는 감각들이 예민해지는 건 이 탓인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었는지 헛웃음 새어나왔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오늘 과제 제출하는 건 알지?"
민우의 말에 수호의 입이 살짝 벌어짐과 동시에 눈은 마치 왕눈이처럼 커다래졌다. 저 반응을 보니 과제를 못 했거나 날짜를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수호의 입에서 뱉어지는 말은 민우의 예상에 적중했다.
"오늘이라니? 다음 주 아냐?"
"다음주는 기연 교수님. 오늘은 가연 교수님."
"아...."
수호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도와줄 테니까 대충이라도 해."
수호는 두 손바닥으로 민우의 한 손을 움켜쥐었다. 1학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기에 이런 장난스러운 행동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손을 감싼 촉감이 불편했다. 아무래도 수호가 말한 데로 오늘의 자신은 이상하긴 한건지도 모르겠다.
"손 안 놓으면 안 도와준다."
"네!"
수호는 망설임 없이 민우의 손을 놓았다. 민우의 도움이 있어서일까 다행히 정리가 끝나갈 즈음 강의실 문이 열리며 교수가 들어왔다. 수호는 조용히 엄지를 치켜세웠다. 민우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가방 안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창가에 앉은탓인지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들려왔다. 또또다시 떠오를 듯 흔들거리는 인영에 민우는 책위에 시선을 떨궜다. 딱히 졸업에 문제도 없었기에 수업을 듣는 태도라던가 과제를 내든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눈 앞에 펼쳐진 글자 하나하나에 신경을 쏟았다. 교수의 목소리가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강의실을 울렸다.
".......미디어는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민우는 교수의 말을 노트 위에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그의 노트 한바닥이 가득 찰 무렵 옆에서 엎드려 자던 수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났다는 건 수업이 곧 끝날 때가 되었다는 알림이었다. 무슨 뻐꾹이 알람 시계도 아니고 정확하게 눈을 뜨는 건지 새삼 신기했다. 과제를 제출하고 교수가 강의실을 빠져나간 후에야 수호는 해방감을 만끽하듯 그대로 책상 위에 턱을 가져다 대며 팔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하아... 드디어 끝났다!"
민우는 책상 위에 올려둔 가방에 책을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팔을 수호가 잡아챘다.
"밥먹으러 안 가? 내가 오늘 통 크게 한턱 낼 테니까 가자. 소희도 자리 잡아놓는다고 연락왔고."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너희끼리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누구? 과제 도와준다는 후배?"
"어."
"야. 과제 도와주는 거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너 여자 친구 생긴 줄 알겠다. 교수가 시켜도 대충 알려주면 되지 너무 공들이는 거 아냐?"
"그런거 아냐. 먼저 간다."
민우는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건물을 빠져나오자 항상 학생들로 가득하던 캠퍼스는 인적 하나 느낄 수 없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세상을 적막감 가득한 공간으로 메꿔놓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찰박찰박 하는 소리만이 빗줄기사이로 들릴 뿐이었다.
본관 옆 동에 도착한 민우는 우산을 접었다.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대충 털어내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막 수업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우르르 계단을 내려왔다. 반대로 걸어 올라가던 민우는 입꼬리에 옅은 미소를 매달았다. 자연스레 자신을 향한 흘끔거리는 시선, 반갑게 인사를 걸어오는 사람들을 상대하며 서준이 있을 강의실 앞에 도착했다. 몇 명만이 남은 강의실 앞에서 민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
마치 흐트러졌던 초점이 선명하게 맞춰지듯 자신의 옷을 입고 있는 서준의 모습만이 눈동자에 새겨졌다. 뭔가를 열심히 쓰던 서준의 시선이 들어 올려졌다. 눈이 마주친 건가 싶던 찰나 민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옆으로 고개가 돌려졌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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