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조회 : 805 추천 : 0 글자수 : 4,892 자 2022-11-28
민우와 헤어진 서준은 곧장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들었다. 한 모금을 마신 뒤 습관처럼 의자에 옷을 걸어놓고는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를 틀자 따뜻한 온수가 몸의 굴곡을 따라 흘렀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혈관들이 부드럽게 온몸을 훑고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단단한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밸런스 잡힌 깨끗한 라인은 여자들보다 선이 더 이뻤다. 뿌옇게 흐려진 거울을 손으로 닦던 서준은 거울에 비친 제 입술에 시선이 머물렀다.
"......"
입술위로 내려앉던 부드러움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럼 한 번 더 할까? 좀 더 진하게?]
좀 더 진하게라니. 입을 맞추는 거와 키스를 하는거랑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민우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그런 말을 꺼냈다는 사실과 그 말에 놀아나고 있다는 건 잘 알고있다. 그런데도 왜 자꾸 지워지지 않고 더욱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까. 짙고 매끄러운 눈동자. 자신을 바라보던 올곧은 시선. 살짝 올라간 입꼬리. 조용하게 울리던 목소리. 입술 끝에 희미하게 남은 온기가 자꾸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
게임의 부작용인가. 너무 집중한 탓에 현실과 가상을 구별을 못하게 됐다라던가. 서준은 조그마한 궁금증이 일었다.
'피하지 않았다면 진짜 하셨을까.'
"우왁. 미친. 뭘 안 피해. 피해야지."
서준은 머리를 휘저으며 재빨리 씻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모두 선배의 장난탓이다.
젖은 머리를 흰 수건으로 털면서 욕실에서 나왔다. 그리곤 식탁에 올려둔 생수를 집어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냉수를 마셨더니 머리가 제정신을 차린 걸까. 조금은 옅어진 그 감촉에 서준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는 핸드폰을 들고 소파로 향했다.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서준의 손가락이 멈췄다.
"재밌는 프로도 없고."
리모컨을 옆에 툭하고 내려놓고는 등을 기댔다. 1년 이상을 같이 지내온 소파의 촉감이 원래 이렇게 불편했던가. 딱딱한거 같기도하고. 그러거보니 선배는 어깨 괜찮으신가. 몇 시간이나 기대고 있었는데. 깨워도 됐을텐데 왜 깨우지 않으셨던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투성이는 옆에서 울려대는 핸드폰 진동소리에 정신이 번뜩였다. 액정화면을 확인하던 서준이 몸을 살짝 일으키곤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이든 형?"
["어. 서준아, 오늘도 학교선배랑 과제해?"]
서준은 민우와의 일을 이든에게 얘기를 한 적 있었다. 사귄다는 조건에 과제를 도와주기로 했다는 말은 생략했지만 말이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선배의 말을 했을 때의 이든형의 표정은 놀라움과 안도감이 함께 섞여 있었다. 그렇게 걱정할 정도였던가 싶었지만 크게 상관없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뇨. 오늘은 일이 있다고 하셔서 지금 집에서 쉬고 있어요."
내일은 괜찮으시려나. 그 전화는 누구였을까.
["너 못한다고 안 가르쳐주겠다고 한 건 아니지."]
"혀엉-"
전화기 너머로 풋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준은 누구보다 이든과 대화할 때가 제일 편하게 느껴졌다. 서준은 말을 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사실 부탁 좀 할까 하고. 6시부터 3시간 정도만 나와줄 수 있을까?"]
할일없이 TV채널만 돌리고 있었던 터라 나가도 상관없었다. 만약 시간이 없다고 해도 서준은 이든에게 도움을 많이 받아왔기에 일에 관해서는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머릿속을 헤집는 감각을 잊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알겠어요. 나중에 뵐게요."
["고마워."]
서준은 의자에 걸어뒀던 옷으로 갈아입고는 현관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이미 서쪽 하늘이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저녁을 안 먹은 터라 살짝 허기가 느껴졌지만 큰 문제는 될 것 같지 않았다. 알바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라면이나 삼각김밥을 사가면 되니까 말이다. 서준은 20분 전에 가게에 도착할수 있었다. 저녁 오픈 준비로 분주한 홀을 지나 탈의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있자 문이 열렸다.
"일찍 왔네. 갑자기 불러서 미안."
"아니예요. 어차피 할 일도 없었는데요."
검은색 정장 바지와 조끼, 하얀 셔츠로 갈아입은 서준은 조금 전 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뿜었다. 앳된 얼굴에 성숙함이 묻어나자 거리 광고판을 장식하는 연예인들에게도 뒤쳐지지 않았다. 어두운 색을 입을 탓인지 뽀얀 얼굴은 유독 눈에 띄었다.
"역시, 얼굴로 뽑을만하다니까."
"형 제칠만 해요?"
"키가 좀 모자란데."
짧은 농담을 주고받던 이든은 준비하고 나오라며 탈의실을 나갔다. 누구는 시급이 좋은 알바를 찾아도 고생하는 학생들이 꽤 많았다. 직원들과 마음이 맞지 않거나 텃세를 부린다거나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그중 상사와의 마음이 안 맞았다는 얘기가 제일 많이 들려왔다. 서준은 자신이 얼마나 복을 받은 사람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제 나갈까."
서준은 플로어로 나갔다. 테이블 위에는 예약푯말이 서 너 개정도 세워져 있었다. 오픈 준비를 끝내자마자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빈자리는 보이지 않을 만큼 가득 찼다. 서준은 홀에 서있던 이든에게로 다가갔다.
"매니저님."
평소에는 형이라 불렀지만 일할 때만큼은 매니저라 불렀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이든의 고개가 서준에게로 향했다. 이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시작으로 서준은 일을 시작했다. 점점 플로어는 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손님이 끊이지 않고 들어오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같이 일하는 우현이 서준을 불렀다.
"서준씨, 저쪽 테이블 세팅 좀 해줄래?"
"카운터석 정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건 제가 할게요. 8시에 예약이 들어와서 서둘러야 해요."
서준은 급히 테이블 세팅을 시작했다. 세팅을 끝냈을 무렵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들이 가게로 들어서자 바로 이든이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든형이 직접 안내하는 걸 보니 꽤 중요한 손님인 듯했다. 어디 회사인걸까 서준이 확인하기도 전에 동료가 말을 걸어왔다.
"서준씨 4번 테이블에서 오더 좀 받아주세요."
서준은 플러어 안쪽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여성 두 사람이 메뉴를 보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두번은 꼭 찾아주는 단골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요리 드시기 전에 식전주는 어떻습니까?"
두 사람은 서준의 제안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뒤 물었다.
"추천해주실만한 게 있을까요?"
"여성분께는 로제나 브뤼 샴페인를 글라스로 준비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밖에는 블루하와이언도 권해드리고 있습니다."
잠시 고민에 잠겨있던 여성들은 결정한 듯 서준을 쳐다봤다.
"그럼 브뤼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일을 하던 서준은 왜 이든이 자신을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예약도 많은 편이긴했지만, 유난히 손님이 많았다. 주위에 가게들이 하나씩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난 듯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없이 움직인 탓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손님을 테이블에 안내하고 돌아서던 서준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이든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만 마쳐도 된다는 듯 턱을 끄덕거렸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됫나.'
가게 안에 걸려있던 시계를 바라보자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전히 북적거리는 플로어를 바라봤다. 혼자 빠지려니 영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일손이 부족했다면 이든형이 먼저 말을 걸어왔을 거라며 서준은 탈의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가게를 빠져나오자 밖은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가로등과 간간히 지나가는 차들만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서준은 오른손바닥을 배 위에 가져다 댔다.
"아..진짜 배고프네."
오늘도 어김없이 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 블록을 넘어가자 큰길 따라 늘어선 상점들의 조명, 도롯가를 지나는 많은 차들의 불빛들 때문에 마치 대낮처럼 밝았다. 서준은 도로변에 보이는 편의점들을 지나쳤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은 이미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음식들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집 근처에서 사는 게 선택의 폭이 넓었다. 걸음을 재촉하던 서준의 발걸음이 멈췄다. 맞은편 건물 앞에서 웅성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싸움 난 건가."
사람들 틈 사이로 보이는 그곳에는 두남자 사이로 큰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술에 절여진 이 곳에서는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마치 불어오는 밤 바람사이로 진득한 술냄새가 섞여 있는 듯했다.
"이 새끼가 미쳤나."
덩치 큰 남자의 손이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체격 차이 때문일까 상대편이 조금은 안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그 날밤의 자신처럼.
"......"
문득 서준은 그날 민우의 눈에 자신은 어떻게 비췄을지 궁금해졌다. 저 두 사람을 보는 자신의 눈빛과 비슷했을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니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댔으니 그저 귀찮았을 테고 상관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하실까. 모른척하실까. 아니면 도와주실까.
"......."
서준의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자신은 어차피 과제만 완벽하게 제출하면 된다. 그러기엔 선배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고 자신은 그걸 이용하고 있는것뿐...과제가 끝나고 나면 원래대로 서로가 몰랐던 그때로 돌아갈 뿐. 근데 이 이상한 기분은 뭐지. 아쉬운 건가? 뭐가?
"하아...컵라면이나 사러 가자."
"......"
입술위로 내려앉던 부드러움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럼 한 번 더 할까? 좀 더 진하게?]
좀 더 진하게라니. 입을 맞추는 거와 키스를 하는거랑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민우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그런 말을 꺼냈다는 사실과 그 말에 놀아나고 있다는 건 잘 알고있다. 그런데도 왜 자꾸 지워지지 않고 더욱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까. 짙고 매끄러운 눈동자. 자신을 바라보던 올곧은 시선. 살짝 올라간 입꼬리. 조용하게 울리던 목소리. 입술 끝에 희미하게 남은 온기가 자꾸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
게임의 부작용인가. 너무 집중한 탓에 현실과 가상을 구별을 못하게 됐다라던가. 서준은 조그마한 궁금증이 일었다.
'피하지 않았다면 진짜 하셨을까.'
"우왁. 미친. 뭘 안 피해. 피해야지."
서준은 머리를 휘저으며 재빨리 씻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모두 선배의 장난탓이다.
젖은 머리를 흰 수건으로 털면서 욕실에서 나왔다. 그리곤 식탁에 올려둔 생수를 집어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냉수를 마셨더니 머리가 제정신을 차린 걸까. 조금은 옅어진 그 감촉에 서준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는 핸드폰을 들고 소파로 향했다.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서준의 손가락이 멈췄다.
"재밌는 프로도 없고."
리모컨을 옆에 툭하고 내려놓고는 등을 기댔다. 1년 이상을 같이 지내온 소파의 촉감이 원래 이렇게 불편했던가. 딱딱한거 같기도하고. 그러거보니 선배는 어깨 괜찮으신가. 몇 시간이나 기대고 있었는데. 깨워도 됐을텐데 왜 깨우지 않으셨던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투성이는 옆에서 울려대는 핸드폰 진동소리에 정신이 번뜩였다. 액정화면을 확인하던 서준이 몸을 살짝 일으키곤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이든 형?"
["어. 서준아, 오늘도 학교선배랑 과제해?"]
서준은 민우와의 일을 이든에게 얘기를 한 적 있었다. 사귄다는 조건에 과제를 도와주기로 했다는 말은 생략했지만 말이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선배의 말을 했을 때의 이든형의 표정은 놀라움과 안도감이 함께 섞여 있었다. 그렇게 걱정할 정도였던가 싶었지만 크게 상관없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뇨. 오늘은 일이 있다고 하셔서 지금 집에서 쉬고 있어요."
내일은 괜찮으시려나. 그 전화는 누구였을까.
["너 못한다고 안 가르쳐주겠다고 한 건 아니지."]
"혀엉-"
전화기 너머로 풋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준은 누구보다 이든과 대화할 때가 제일 편하게 느껴졌다. 서준은 말을 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사실 부탁 좀 할까 하고. 6시부터 3시간 정도만 나와줄 수 있을까?"]
할일없이 TV채널만 돌리고 있었던 터라 나가도 상관없었다. 만약 시간이 없다고 해도 서준은 이든에게 도움을 많이 받아왔기에 일에 관해서는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머릿속을 헤집는 감각을 잊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알겠어요. 나중에 뵐게요."
["고마워."]
서준은 의자에 걸어뒀던 옷으로 갈아입고는 현관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이미 서쪽 하늘이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저녁을 안 먹은 터라 살짝 허기가 느껴졌지만 큰 문제는 될 것 같지 않았다. 알바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라면이나 삼각김밥을 사가면 되니까 말이다. 서준은 20분 전에 가게에 도착할수 있었다. 저녁 오픈 준비로 분주한 홀을 지나 탈의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있자 문이 열렸다.
"일찍 왔네. 갑자기 불러서 미안."
"아니예요. 어차피 할 일도 없었는데요."
검은색 정장 바지와 조끼, 하얀 셔츠로 갈아입은 서준은 조금 전 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뿜었다. 앳된 얼굴에 성숙함이 묻어나자 거리 광고판을 장식하는 연예인들에게도 뒤쳐지지 않았다. 어두운 색을 입을 탓인지 뽀얀 얼굴은 유독 눈에 띄었다.
"역시, 얼굴로 뽑을만하다니까."
"형 제칠만 해요?"
"키가 좀 모자란데."
짧은 농담을 주고받던 이든은 준비하고 나오라며 탈의실을 나갔다. 누구는 시급이 좋은 알바를 찾아도 고생하는 학생들이 꽤 많았다. 직원들과 마음이 맞지 않거나 텃세를 부린다거나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그중 상사와의 마음이 안 맞았다는 얘기가 제일 많이 들려왔다. 서준은 자신이 얼마나 복을 받은 사람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제 나갈까."
서준은 플로어로 나갔다. 테이블 위에는 예약푯말이 서 너 개정도 세워져 있었다. 오픈 준비를 끝내자마자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빈자리는 보이지 않을 만큼 가득 찼다. 서준은 홀에 서있던 이든에게로 다가갔다.
"매니저님."
평소에는 형이라 불렀지만 일할 때만큼은 매니저라 불렀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이든의 고개가 서준에게로 향했다. 이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시작으로 서준은 일을 시작했다. 점점 플로어는 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손님이 끊이지 않고 들어오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같이 일하는 우현이 서준을 불렀다.
"서준씨, 저쪽 테이블 세팅 좀 해줄래?"
"카운터석 정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건 제가 할게요. 8시에 예약이 들어와서 서둘러야 해요."
서준은 급히 테이블 세팅을 시작했다. 세팅을 끝냈을 무렵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들이 가게로 들어서자 바로 이든이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든형이 직접 안내하는 걸 보니 꽤 중요한 손님인 듯했다. 어디 회사인걸까 서준이 확인하기도 전에 동료가 말을 걸어왔다.
"서준씨 4번 테이블에서 오더 좀 받아주세요."
서준은 플러어 안쪽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여성 두 사람이 메뉴를 보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두번은 꼭 찾아주는 단골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요리 드시기 전에 식전주는 어떻습니까?"
두 사람은 서준의 제안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뒤 물었다.
"추천해주실만한 게 있을까요?"
"여성분께는 로제나 브뤼 샴페인를 글라스로 준비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밖에는 블루하와이언도 권해드리고 있습니다."
잠시 고민에 잠겨있던 여성들은 결정한 듯 서준을 쳐다봤다.
"그럼 브뤼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일을 하던 서준은 왜 이든이 자신을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예약도 많은 편이긴했지만, 유난히 손님이 많았다. 주위에 가게들이 하나씩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난 듯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없이 움직인 탓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손님을 테이블에 안내하고 돌아서던 서준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이든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만 마쳐도 된다는 듯 턱을 끄덕거렸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됫나.'
가게 안에 걸려있던 시계를 바라보자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전히 북적거리는 플로어를 바라봤다. 혼자 빠지려니 영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일손이 부족했다면 이든형이 먼저 말을 걸어왔을 거라며 서준은 탈의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가게를 빠져나오자 밖은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가로등과 간간히 지나가는 차들만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서준은 오른손바닥을 배 위에 가져다 댔다.
"아..진짜 배고프네."
오늘도 어김없이 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 블록을 넘어가자 큰길 따라 늘어선 상점들의 조명, 도롯가를 지나는 많은 차들의 불빛들 때문에 마치 대낮처럼 밝았다. 서준은 도로변에 보이는 편의점들을 지나쳤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은 이미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음식들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집 근처에서 사는 게 선택의 폭이 넓었다. 걸음을 재촉하던 서준의 발걸음이 멈췄다. 맞은편 건물 앞에서 웅성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싸움 난 건가."
사람들 틈 사이로 보이는 그곳에는 두남자 사이로 큰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술에 절여진 이 곳에서는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마치 불어오는 밤 바람사이로 진득한 술냄새가 섞여 있는 듯했다.
"이 새끼가 미쳤나."
덩치 큰 남자의 손이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체격 차이 때문일까 상대편이 조금은 안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그 날밤의 자신처럼.
"......"
문득 서준은 그날 민우의 눈에 자신은 어떻게 비췄을지 궁금해졌다. 저 두 사람을 보는 자신의 눈빛과 비슷했을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니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댔으니 그저 귀찮았을 테고 상관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하실까. 모른척하실까. 아니면 도와주실까.
"......."
서준의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자신은 어차피 과제만 완벽하게 제출하면 된다. 그러기엔 선배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고 자신은 그걸 이용하고 있는것뿐...과제가 끝나고 나면 원래대로 서로가 몰랐던 그때로 돌아갈 뿐. 근데 이 이상한 기분은 뭐지. 아쉬운 건가? 뭐가?
"하아...컵라면이나 사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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