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조회 : 778 추천 : 0 글자수 : 4,757 자 2022-12-21
"같이 쓰고 가요."
서준은 자신의 팔목에 닿은 감촉이 낯설었다. 대체 왜 자꾸 아무렇지 않게 잡는 걸까.
"난 친한 사람하고만 같이 써."
"그럼 저랑 지금부터 친한 사이 하면 되죠."
서준은 도하에게 잡힌 팔목을 빼냈다. 그리고 입술 사이로 내뱉는 한숨사이로 짜승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평소처럼 융통성 있게 넘겼을 상황이 컨디션의 문제였을까. 결국 목소리의 톤이 살짝 높아졌다.
"대체 나하고 뭘 하자는 거야."
도하는 서준의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싱긋 웃어 보였다.
"저 선배한테 관심 있다고 말했었는데. 저랑 만나보지 않을래요?"
서준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도하의 말을 떠올렸다. 관심 있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라 진짜였던 걸까. 그렇다면 지금 녀석이 말하고 있는 건 선후배 관계로써가 아닌 연애를 하자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인데... 사실 딱히 놀랍거나 하지 않았다. 자신의 외모 탓에 고등학생 때도 고백해오는 남자친구들이 한두명 정도는 있었다. 편견이 있지는 않았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었다. 물론 자신이 선배와 사귀는 사이긴 해도 좋아한다는 감정이 배제된 관계. 즉, 자신의 과제를 위한 것이다. 입을 맞춘 것도 목표로 향하는 조건일 뿐. 그리고 서로의 존재도 모른채 지나쳤던 그때로 돌아간다.
'........'
또다. 어젯밤 떠올랐던 그 알 수 없는 감정이 또다시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답도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 근데 진짜 그렇게 되는 걸까. 선배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까. 이어지는 궁금증은 제 이름을 부르는 도하의 목소리에 흩어졌다.
"선배?"
"나한테 그런 감정이 생길 수 있긴 한가."
접전이라곤 고작 같은 지겹교수 수업을 듣는 거였다. 이것도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이 얘기했기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즉. 자신과 얘기를 나눈 거라곤 핸드폰을 건네받을 때와 밥 한 끼 같이 먹을 때뿐이었다. 그것도 선후배의 관계에서 행해진 밥 한 끼라기 보다 그저 고마움의 표현에 가까웠다.
"사람한테 끌리는데 기간이라든지 이유가 필요해요?"
"어."
사실 서준은 도하의 말에 조금은 공감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때는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것 또한 그 사람과 지내오면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감정이 아닐까. 이런 감정이 느껴질 만큼 도하와 시간을 보낸 기억은 없었다. 뭐, 첫눈에 반한다던가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서준은 딱히 믿지 않았다. 그저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하나의 장면의 연출일뿐.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지 의문스러웠다. 어쨌든 도하의 질문에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말을 이었다.
"어쨌든 너랑 만날 마음은 없어. 간다."
"잠깐만요."
자신을 지나치려던 서준을 불렀다. 그리고 이번엔 그의 가슴 쪽으로 가방이 아닌 우산을 내밀었다. 서준의 말에도 도하는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선배 때문에 산 거니까 우산 들고 가세요. 쓰기 싫으면 버려도 되요."
서준이 필요 없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제 할 말을 끝낸 도하는 빗속으로 뛰어갔다. 조금 전 우산을 사러 갈 때처럼 빨랐다. 저 정도 달리기라면 별로 젖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보다 손에 들린 이것을 어찌 처치할 것인가.
'........'
그때 손에 쥐고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힐긋 내려다본 액정화면에 진수의 이름이 떠 있었다.
["어디야?"]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마치 큰소리를 내서는 안 되는 곳에 있기라도 속삭이듯 작았다.
"버스 정류장."
["야! 아직도 왜 거기야. 지금 내가 누굴 봤는지 알아?"]
"누굴 봤는데."
["궁금하지? 빨리와라."]
끊긴 음이 귓가를 두드렸다. 그새 또 한 대의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자신처럼 우산을 가지고 오지 못한 학생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중 몇번인가 스쳐지나가다 본 얼굴도 보였다. 버리기도 아깝고. 그렇다고 쓰고 가기도 이상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게 제일 좋을 듯 했다. 우산도 이대로 버려지기엔 자신이 태어난 의무를 한 번쯤은 행하고 돌아가는 게 좋을테니까. 서준은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한 명의 후배에게 우산을 건넸다. 하나뿐인 우산을 주는 게 이해가 안되는 듯 갸웃거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서준은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는 그대로 빗속을 뛰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렇게 뛰어본 적이 있었던가. 후두둑 떨어지는 빗줄기가 정수리 위에 닿았다. 횟수가 겹칠수록 머릿밑이 촉촉하게 젖어 드는 느낌이 들었다. 웅덩이를 피해 뛰었지만 발을 내디딜 때마다 튀는 물방울로 바지 끝단에 물기를 머금자 점점 묵직해졌다. 얼마나 뛰었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가슴도 아프고 바싹 마른 입 안에 고인 타액을 넘기자 저릿한 통증까지 느껴졌다. 평소에 운동이라도 좀 해둘걸하는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하지만 지금 후회해봤자 뭐하겠는가. 다리를 더 빨리 움직이라고 뇌에서 명령을 내려주기를 바랄 뿐. 속도를 늦췄다가는 정말 생쥐 꼴을 면할 수 없을 테니까. 식당 건물이 보이자 마치 결승선을 눈앞에 둔 선수들처럼 발을 서둘렀다. 입구에 발을 딛자 그는 무릎에 양손을 대고 허리를 구부렸다.
"허억! 헉...후...우..."
맺혔던 숨을 쏟아냈다.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너무 열심히 뛴 탓일까. 몸이 후끈하고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뛰어올 거 처음부터 그랬다면 도하와도 만나지 않았을 테고 녀석에게 그런 말을 할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마주칠 일은 딱히...
'아...밥사주기로 했던가.'
"이서준?"
지끈거리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제 이름에 어깨가 움찔거렸다. 신기하게도 목소리의 주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며칠 사이 익숙해져 버린 걸까. 서준이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를 돌렸다. 식당 입구 옆 비가 닿지 않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민우의 모습이 보였다.
"........"
서로의 시선 사이로 느껴지던 아주 잠깐의 공백이 민우의 행동 하나하나에 다시 타이머가 째깍째깍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우는 옆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껐다. 터벅터벅 걷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한적한 복도를 울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서준의 눈동자는 민우로 가득 찼다.
"안녕하세요."
"완전 물에 빠진 생쥔데."
"....우산을 안 들고 와서요."
서준은 머쓱한 듯 목덜미을 쓸었다. 어제 보았던 그 표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해결되신건가.
"선배는 밥 먹으러 오신 거예요?"
"아니. 잠깐 매점에 살 게 있어서. 넌? 이 시간에 강의는 아닐 테고."
"친구가 식당에..."
진수가 봤다는 게 선배를 말하는거라는걸 알수 있었다.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 설렘가득한 목소리였다.
"그 꼴로 밥 먹고 강의 들으려고?"
이 꼴로 먹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뭐가 있단 말인가. 확실히 도하가 준 우산을 쓰고 왔다면 이런 꼴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심도 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하는 행동에 거리를 두는 게 정답일 테니까. 서준은 헤실헤실 웃으며 농담처럼 내뱉었다.
"선배가 셔츠 빌려주시면 되죠."
언제부터일까. 이런 농담까지 할 수 있게 된 건. 불편함과 어색함을 넘나들던 감정보다는 이젠 낯설 만큼 선배의 온기가 편하게 느껴졌다. 뭐, 돌아올 답이 무엇인지 예상이 갈 만큼 정확히 알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민우가 내뱉은 단어는 다섯 글자의 조합이 아닌 세글자였다.
"알았어."
"......!!"
서준은 놀란 듯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그저 민우를 바라봤다. 알았다니. 당연히 까불지 말라는 말이 튀어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민우는 흰 반소매위에 걸쳐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서준에게 건넸다. 셔츠 아래 숨겨져 있던 맨살은 울퉁불퉁한 근육이 아닌 밸런스 잡힌 매끈한 근육이 드러났다. 운동이라도 하시는 걸까.
"왜? 빌려달라면서. 필요 없으면 말고"
"아...선배가 빌려주시고 싶으시다면..."
서준은 민우가 건네는 셔츠를 손에 쥐었다. 부드러운 옷감이 손바닥에 닿았다. 설마 줬다가 뺏어 가지는....
"강의 끝나고 그대로 기다리고 있어. 어제 못한 과제까지 할 거니까 각오하고."
서준의 생각과는 달리 민우는 그 말만 남겨둔 채로 식당 건물을 빠져나갔다. 서준은 쏟아지는 빗속으로 우산을 쓰고 멀어지는 민우를 바라봤다. 온통 빗줄기로 가득한 세상에 반딧불처럼 반짝이듯 이내 사라졌다.
"옷...갈아입을까."
서준은 화장실로 걸어가 폭삭 젖은 티셔츠를 벗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공기였지만 살갗에 닿자 저절로 어깨를 움츠리게 했다. 잠시 민우의 셔츠를 보던 서준은 이내 결심이라도 한 듯 옷을 입기 시작했다. 소매는 한 뼘 정도 길고 품도 꽤 넉넉했다. 항상 맡던 부드럽고 상큼한 과일 향 사이로 다른향이 느껴졌다.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겨 코끝에 가져다 댔다.
"담배...향?"
서준은 조금 전 민우의 손에 쥐어져 있던 담배를 떠올렸다. 아마 그때 옷에 베인듯했다. 왠지 냄새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사탕향처럼 달큰하게 느껴졌다.
서준은 자신의 팔목에 닿은 감촉이 낯설었다. 대체 왜 자꾸 아무렇지 않게 잡는 걸까.
"난 친한 사람하고만 같이 써."
"그럼 저랑 지금부터 친한 사이 하면 되죠."
서준은 도하에게 잡힌 팔목을 빼냈다. 그리고 입술 사이로 내뱉는 한숨사이로 짜승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평소처럼 융통성 있게 넘겼을 상황이 컨디션의 문제였을까. 결국 목소리의 톤이 살짝 높아졌다.
"대체 나하고 뭘 하자는 거야."
도하는 서준의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싱긋 웃어 보였다.
"저 선배한테 관심 있다고 말했었는데. 저랑 만나보지 않을래요?"
서준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도하의 말을 떠올렸다. 관심 있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라 진짜였던 걸까. 그렇다면 지금 녀석이 말하고 있는 건 선후배 관계로써가 아닌 연애를 하자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인데... 사실 딱히 놀랍거나 하지 않았다. 자신의 외모 탓에 고등학생 때도 고백해오는 남자친구들이 한두명 정도는 있었다. 편견이 있지는 않았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었다. 물론 자신이 선배와 사귀는 사이긴 해도 좋아한다는 감정이 배제된 관계. 즉, 자신의 과제를 위한 것이다. 입을 맞춘 것도 목표로 향하는 조건일 뿐. 그리고 서로의 존재도 모른채 지나쳤던 그때로 돌아간다.
'........'
또다. 어젯밤 떠올랐던 그 알 수 없는 감정이 또다시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답도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 근데 진짜 그렇게 되는 걸까. 선배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까. 이어지는 궁금증은 제 이름을 부르는 도하의 목소리에 흩어졌다.
"선배?"
"나한테 그런 감정이 생길 수 있긴 한가."
접전이라곤 고작 같은 지겹교수 수업을 듣는 거였다. 이것도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이 얘기했기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즉. 자신과 얘기를 나눈 거라곤 핸드폰을 건네받을 때와 밥 한 끼 같이 먹을 때뿐이었다. 그것도 선후배의 관계에서 행해진 밥 한 끼라기 보다 그저 고마움의 표현에 가까웠다.
"사람한테 끌리는데 기간이라든지 이유가 필요해요?"
"어."
사실 서준은 도하의 말에 조금은 공감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때는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것 또한 그 사람과 지내오면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감정이 아닐까. 이런 감정이 느껴질 만큼 도하와 시간을 보낸 기억은 없었다. 뭐, 첫눈에 반한다던가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서준은 딱히 믿지 않았다. 그저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하나의 장면의 연출일뿐.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지 의문스러웠다. 어쨌든 도하의 질문에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말을 이었다.
"어쨌든 너랑 만날 마음은 없어. 간다."
"잠깐만요."
자신을 지나치려던 서준을 불렀다. 그리고 이번엔 그의 가슴 쪽으로 가방이 아닌 우산을 내밀었다. 서준의 말에도 도하는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선배 때문에 산 거니까 우산 들고 가세요. 쓰기 싫으면 버려도 되요."
서준이 필요 없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제 할 말을 끝낸 도하는 빗속으로 뛰어갔다. 조금 전 우산을 사러 갈 때처럼 빨랐다. 저 정도 달리기라면 별로 젖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보다 손에 들린 이것을 어찌 처치할 것인가.
'........'
그때 손에 쥐고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힐긋 내려다본 액정화면에 진수의 이름이 떠 있었다.
["어디야?"]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마치 큰소리를 내서는 안 되는 곳에 있기라도 속삭이듯 작았다.
"버스 정류장."
["야! 아직도 왜 거기야. 지금 내가 누굴 봤는지 알아?"]
"누굴 봤는데."
["궁금하지? 빨리와라."]
끊긴 음이 귓가를 두드렸다. 그새 또 한 대의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자신처럼 우산을 가지고 오지 못한 학생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중 몇번인가 스쳐지나가다 본 얼굴도 보였다. 버리기도 아깝고. 그렇다고 쓰고 가기도 이상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게 제일 좋을 듯 했다. 우산도 이대로 버려지기엔 자신이 태어난 의무를 한 번쯤은 행하고 돌아가는 게 좋을테니까. 서준은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한 명의 후배에게 우산을 건넸다. 하나뿐인 우산을 주는 게 이해가 안되는 듯 갸웃거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서준은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는 그대로 빗속을 뛰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렇게 뛰어본 적이 있었던가. 후두둑 떨어지는 빗줄기가 정수리 위에 닿았다. 횟수가 겹칠수록 머릿밑이 촉촉하게 젖어 드는 느낌이 들었다. 웅덩이를 피해 뛰었지만 발을 내디딜 때마다 튀는 물방울로 바지 끝단에 물기를 머금자 점점 묵직해졌다. 얼마나 뛰었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가슴도 아프고 바싹 마른 입 안에 고인 타액을 넘기자 저릿한 통증까지 느껴졌다. 평소에 운동이라도 좀 해둘걸하는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하지만 지금 후회해봤자 뭐하겠는가. 다리를 더 빨리 움직이라고 뇌에서 명령을 내려주기를 바랄 뿐. 속도를 늦췄다가는 정말 생쥐 꼴을 면할 수 없을 테니까. 식당 건물이 보이자 마치 결승선을 눈앞에 둔 선수들처럼 발을 서둘렀다. 입구에 발을 딛자 그는 무릎에 양손을 대고 허리를 구부렸다.
"허억! 헉...후...우..."
맺혔던 숨을 쏟아냈다.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너무 열심히 뛴 탓일까. 몸이 후끈하고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뛰어올 거 처음부터 그랬다면 도하와도 만나지 않았을 테고 녀석에게 그런 말을 할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마주칠 일은 딱히...
'아...밥사주기로 했던가.'
"이서준?"
지끈거리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제 이름에 어깨가 움찔거렸다. 신기하게도 목소리의 주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며칠 사이 익숙해져 버린 걸까. 서준이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를 돌렸다. 식당 입구 옆 비가 닿지 않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민우의 모습이 보였다.
"........"
서로의 시선 사이로 느껴지던 아주 잠깐의 공백이 민우의 행동 하나하나에 다시 타이머가 째깍째깍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우는 옆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껐다. 터벅터벅 걷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한적한 복도를 울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서준의 눈동자는 민우로 가득 찼다.
"안녕하세요."
"완전 물에 빠진 생쥔데."
"....우산을 안 들고 와서요."
서준은 머쓱한 듯 목덜미을 쓸었다. 어제 보았던 그 표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해결되신건가.
"선배는 밥 먹으러 오신 거예요?"
"아니. 잠깐 매점에 살 게 있어서. 넌? 이 시간에 강의는 아닐 테고."
"친구가 식당에..."
진수가 봤다는 게 선배를 말하는거라는걸 알수 있었다.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 설렘가득한 목소리였다.
"그 꼴로 밥 먹고 강의 들으려고?"
이 꼴로 먹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뭐가 있단 말인가. 확실히 도하가 준 우산을 쓰고 왔다면 이런 꼴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심도 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하는 행동에 거리를 두는 게 정답일 테니까. 서준은 헤실헤실 웃으며 농담처럼 내뱉었다.
"선배가 셔츠 빌려주시면 되죠."
언제부터일까. 이런 농담까지 할 수 있게 된 건. 불편함과 어색함을 넘나들던 감정보다는 이젠 낯설 만큼 선배의 온기가 편하게 느껴졌다. 뭐, 돌아올 답이 무엇인지 예상이 갈 만큼 정확히 알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민우가 내뱉은 단어는 다섯 글자의 조합이 아닌 세글자였다.
"알았어."
"......!!"
서준은 놀란 듯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그저 민우를 바라봤다. 알았다니. 당연히 까불지 말라는 말이 튀어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민우는 흰 반소매위에 걸쳐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서준에게 건넸다. 셔츠 아래 숨겨져 있던 맨살은 울퉁불퉁한 근육이 아닌 밸런스 잡힌 매끈한 근육이 드러났다. 운동이라도 하시는 걸까.
"왜? 빌려달라면서. 필요 없으면 말고"
"아...선배가 빌려주시고 싶으시다면..."
서준은 민우가 건네는 셔츠를 손에 쥐었다. 부드러운 옷감이 손바닥에 닿았다. 설마 줬다가 뺏어 가지는....
"강의 끝나고 그대로 기다리고 있어. 어제 못한 과제까지 할 거니까 각오하고."
서준의 생각과는 달리 민우는 그 말만 남겨둔 채로 식당 건물을 빠져나갔다. 서준은 쏟아지는 빗속으로 우산을 쓰고 멀어지는 민우를 바라봤다. 온통 빗줄기로 가득한 세상에 반딧불처럼 반짝이듯 이내 사라졌다.
"옷...갈아입을까."
서준은 화장실로 걸어가 폭삭 젖은 티셔츠를 벗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공기였지만 살갗에 닿자 저절로 어깨를 움츠리게 했다. 잠시 민우의 셔츠를 보던 서준은 이내 결심이라도 한 듯 옷을 입기 시작했다. 소매는 한 뼘 정도 길고 품도 꽤 넉넉했다. 항상 맡던 부드럽고 상큼한 과일 향 사이로 다른향이 느껴졌다.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겨 코끝에 가져다 댔다.
"담배...향?"
서준은 조금 전 민우의 손에 쥐어져 있던 담배를 떠올렸다. 아마 그때 옷에 베인듯했다. 왠지 냄새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사탕향처럼 달큰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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