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조회 : 922 추천 : 0 글자수 : 6,361 자 2022-10-08
토끼 눈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는 현주 모습에 우빈이는 짙어진 눈빛으로 바라봤다.
현주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잠긴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현주 씨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
“그러니까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 줘요.”
“......”
“절대 이상한 짓 안 하고 안고만 있을게요.”
고개를 들고 있는 그녀 뒷덜미를 감싸 자신의 가슴에 묻고 가만히 그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던 현주는 점점 눈이 감겼고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깊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알 수 없었지만, 현주가 깨어났을 땐 자신을 안고 있었던 우빈이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침대에서 나와 방을 나가자 거실 소파에 앉아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우빈이와 눈이 마주쳤다.
“잘 잤어요?”
“.....네.”
“진짜 잘 자던데.”
“.......”
“잘 자서 예쁘다는 말이었어요.”
“이....이제 가요.”
“가긴 어딜 가요, 점심 먹기엔 늦었고 가다가 영화 볼래요?”“대표님.”
“영화 보고 나서 저녁 먹고 들어가면 딱 맞겠네.”
“전 그냥...”
“가요.”
의자에 걸어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고 그녀 팔을 잡아당겨 호텔을 나온 우빈이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영화관으로 데리고 갔다.
영화관에 도착하자 머뭇거리며 그와 조금 떨어져 걷는 현주를 보고 미간을 좁히다가 현주에게 다가가 그녀 허리에 팔을 휘어 감았다.
“대표님!”
“영화 시작할 거 같은데 얼른 가죠.”
“갈 테니까 놔주세요.”
“싫어요.”
“네?”
“이제 현주 씨하고 떨어지기 싫다고 했어요.”
“대표님.”
영화관에 들어올 때부터 그에게 집중된 여자의 시선에 주눅이 든 현주는 고개를 숙이며 그의 뒤를 따라갔지만, 자신에게 다가와 허리에 팔을 감은 그를 밀어내려 힘을 주었다.
“힘으로 날 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놔달라고요.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뭐 어때요, 난 상관없는데.”
힘으로 그를 밀어낼 수 없었던 현주는 포기가 빨랐다.
의자에 앉아 그가 예매한 영화를 보고 나오자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배고프죠?”
“......”
“점심도 안 먹었으니 배고프겠다, 가요.”
“어...어딜...”
“저녁 먹고 집에 데려다줄게요.”
다시 그녀 허리에 팔을 감은 그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그녀와 함께 근사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그녀 접시를 가져와 먹기 좋게 잘라준 뒤 그녀 앞에 놓아주자 머뭇거리며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할 수 있으니까 대표님 드세요.”
“현주 씨는 오늘 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 돼요. 먹어 봐요. 맛있을 거예요.”
“.....잘 먹을게요.”
“많이 먹어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보지 않는 그녀를 보며 그가 상냥한 미소를 짓고 그녀 앞에 좋아하는 음식들을 조금씩 가져다주었다.
식사를 끝내고 디저트와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우빈이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현주 씨.”
“네.”
“난 현주 씨가 좋아요.”
“......”
“관심이 아니라 현주 씨를 좋아해요.”
“죄송하지만 전 대표님 마음 받을 수가...”
“똑같네.”
“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그냥 내 마음을 말하고 싶었어요. 알고 있겠지만.”
“....자꾸 이러시면 전...”
“다 먹은 거 같은데 일어나죠.”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고등학생인 그때보다 어쩌면 더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녀에게 다가갔다가 도로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도망 못 가도록 만들어 놓고 그녀 마음을 제대로 흔들어볼 작정이었다.
‘네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지금은 이런 거로 부족하겠지.’
그녀 집 앞에 차를 세워두고 내리기 전에 그녀 손을 잡으며 손등에 입을 살짝 맞추자 깜짝 놀란 현주가 손을 빼냈다.
“왜 이래요.”
“내가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그거하고 무슨...”
“입에 할 수 없으니까 손에라도 하고 싶어서요.”
“나...난 허락한 적 없다고요!”
벨트를 거칠게 풀고 문을 세게 닫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에 들어가는 현주를 보며 그가 크게 웃었다.
한참 동안 운전대에 얼굴을 기대고 있다가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가자 동생인 도훈이가 환하게 웃으며 현주를 반겨주었다.
“잘 갔다 왔어?”
“대표님하고 언제 얘기한 거야?”
“어제 누나 편의점 일할 때 샵 사장님하고 대표님이 연락 왔었거든.”
“......”
“이번 주는 내가 있으니까 누나 좀 쉬어.”
“도훈아....”
“나 제대하면 편의점은 그만둬, 알았지?”
“......”
“7년 전에는 내가 어려서 누나를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누나 할 만큼 했어, 그러니까...”
“됐어, 너 학교 복학해야지. 그러려면 일 계속 해야 돼.”
“누나.”
“대학교 졸업해야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잖아, 내 말대로 해. 응?”
도훈이 말을 듣지도 않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 바닥에 몸을 움츠리고 앉아 다시 소리 없이 울었다.
동생의 휴가가 끝나자 다시 현주의 같은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우빈이는 하루에 한 번씩 가게에 들어와 커피를 주문하면서 그녀에게 꽃을 선물하거나 그녀가 필요한 것들을 주고 갔다.
“대표님!”
“신발 다 헐었잖아요, 신고 다녀요.”
“대표...”
그녀 손에 억지로 들려진 쇼핑백 안에는 편안하고 예쁜 플랫 슈즈가 들어있었다.
다영이가 다가와 신발을 꺼내 그녀 앞에 놓아주고 호들갑을 떨며 그녀의 헌 신발을 벗게 했다.
“예쁘네.”
“사장님...”
“그렇다고 새 신발 신고 도망가면 안 돼, 알았지?”
“사장님!”
“같은 여자로서 부러워.”
“전 부담스럽다고요.”
주말은 가게가 쉬는 날이기 때문에 그녀를 만날 수 없었던 우빈이는 편의점 앞에서 기다리다가 그녀가 편의점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 오피스텔로 돌아가곤 했다.
토요일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다가 돌아갔고 일요일 역시 지켜보고 가려는데 불량해 보이는 남자 세 명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우빈이는 미간을 좁히며 차에서 내렸다.
덩치가 좋은 점장이 있었지만 젊은 남자 세 명을 감당하지 못한 점장 옆에 서 있는 현주에게 남자들이 다가가 건드리려고 할 때 남자의 손목이 우드득 꺾이고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악!”
“당신 뭐야!”
“그러는 니들은 뭐냐?”
“우린 손님이지.”
“손님이면 얌전히 물건 사고 가면 될 것이지 왜 일하는 여자를 건드려?”
“우리가 언제 그랬다고.”
“저기 cctv 안 보여? 나도 증인이고 내 블랙박스 영상에 다 찍혔는데, 어떻게 경찰서 갈래, 아니면 조용히 사라질래?”
“이씨!”
남자 세 명은 꽁지 빠지게 편의점에서 도망갔고 현주가 걱정된 우빈이가 현주에게 다가가자 그를 올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괜찮아요?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좀 위험해 보여.”
“......”
“점장님, 괜찮으십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경찰에 신고 안 해도 되겠습니까?”
“그게....”
“괜찮을 거예요. 또 오면 그때 신고하면 되니까.”
점장 대신 현주의 말을 들은 우빈이는 미세하게 떨고 있는 그녀 손를 감싸며 걱정스러운 듯 그녀 머리를 감싸 안아주었다.
“대표님!”
“무서웠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안 해도 돼요.”
“......”
“내가 도와줄게요, 그러니까...”
“오늘은 감사하지만 그 이상은...”
그를 밀어내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후 편의점 밖에 있는 의자에 그와 나란히 앉았다.
“대표님.”
“말해요.”
“주말마다 오시는 거 알아요.”
“아...”
“오지 마세요.”
“내 마음이에요.”
“안 오셨으면 좋겠어요.”
“왜요?”
“네?”
“내가 왜 안 왔으면 좋겠냐고요?”
“그건....”
무릎에 손을 올린 현주는 주먹을 꽉 쥐고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말을 잇지 못하자 그가 다가와 깨물고 있는 아랫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이 버릇 여전하네. 피나잖아.”
“!”
“휴지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요.”
자신의 차로 달려가 피가 나는 그녀 입술을 닦아주고 옆에 앉아 주먹을 쥐고 있는 그녀 손을 잡았다.
“내가 왜 안 왔으면 좋겠냐고 물었는데 대답 못 하겠죠?”
“.......”
“현주 씨도 나 좋아하죠?”
“무...무슨 말도 안...”
“그럼 대답해 봐요, 왜 안 왔으면 좋겠어요?”
“.......”
“내가 대신 대답해 줄까요?”
“.....”
“내가 신경 쓰이죠? 왜 왔나 궁금하기도 하고.”
“아...아니에요. 그...그냥 이런 곳에 대표님 차 같은 비싼 차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에이~ 그건 현주 씨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요.”
“......”
“이러면 나중에 나한테 미안해질 텐데 그냥 솔직해지는 건 어때요?”
“....아직 일 안 끝나서 들어갈게요.”
“풉!”
그가 웃는 소리에 얼굴이 빨개진 현주는 편의점에 들어가 점장 대신 어지럽혀진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며 밖에 앉아 있는 우빈이를 힐끗 쳐다봤다.
아직 가지 않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획 다른 곳으로 돌려 그가 사라질 때까지 밖을 쳐다보지 않았다.
새벽에 일이 끝난 현주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는 길에 누군가 그녀를 벽에 세게 밀치고 거친 손길로 그녀 턱을 잡았다.
“아!”
“아파?”
“!”
“나도 아까 아팠거든!”
“.....”
“너 때문에 내 손목이 나갈 뻔했는데 네가 보상해 줘야지.”
불량해 보였던 남자들이 현주가 혼자 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그녀 주위를 둘러싸 위협했지만 두 주먹을 꽉 쥐고 남자를 힘껏 노려봤다.
“맘대로 해요.”
“뭐?”
“날 죽이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맘대로 하라고요!”
“신고? 할 수 있으면 해봐 어디!”
“!”
남자의 손이 올라갔지만 두 눈을 부릅뜨며 노려볼 때 남자들의 비명이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질 때쯤 큰 남자 주위로 남자 세 명이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어두워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현주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고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고 할 때 그가 다가와 허리를 받쳐주었다.
“위험했어.”
“......”
“김 비서, 경찰은?”
“금방 온다고 했습니다.”
“일단 내 차로 가요.”
“......”
“김 비서는 경찰 오면 이놈들 다 넘기고 모든 방법 동원해서 절대 그냥 나오지 못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그녀를 부축하고 차에 태운 뒤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 몸 위로 덮어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이제 괜찮아요.”
“어...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집에 가려고 했는데 구석에서 저놈들이 가지 않고 있길래 혹시나 해서 나도 기다렸다가 김 비서하고 잠깐 통화하는 사이에...미안해요.”
“아니에요,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아무 생각하지 말고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
“싫다고 안 하네.”
“오...오늘은 부탁할게요.”
“훗! 매일 부탁해도 돼요.”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폭력이던 다른 무언가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두려웠고 공포를 느꼈지만, 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절로 몸이 떨린 현주는 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싸자 운전하고 있던 우빈이가 집 앞에 차를 멈추고 그녀를 불렀다.
“편의점 그만두는 건 어때요?”
“네?”
“새벽까지 일하는 거 위험해 보여서.”
“그 일을 그만두면 생활할 수가 없어요, 제가 전에 말했잖아요, 하루 번 돈으로도 부족하다고.”
“.......”
“게다가 동생이 제대하면 학비도 줘야 해서 그만둘 수가 없어요.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대표님 덕분에...!”
차에서 내리려는 그녀 손목을 잡아당기자 그와 가까워진 거리에 놀란 현주가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다른 손으로 그녀 얼굴을 감싸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럼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보다 돈을 더 많이 주는 일을 소개해주면 그만둘 생각 있어요?”
“네?”
“대신 평일이 아니라 주말만 일하는 거예요.”
“무슨 일인데 주말만 일하는 건데요?”
“그건 현주 씨가 한다고 하면 말해줄게요.”
“.....생각해 볼게요.”
“하루만 생각해요. 그리고 긍정적인 대답이길 바래요.”
얼굴을 감싸던 그의 손이 떨어지다가 그녀 손을 잡고 손등이 아닌 손가락 사이에 입을 가져다 대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대담한 행동에 놀란 그녀는 손을 빼내고 화끈거리는 얼굴로 집에 들어가 집안일도 잊은 채 방에 들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하아....이러면 안 되는데 나 왜 이래.”
생각과는 다르게 두근대는 심장 때문에 빨개진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방에 앉아 진정시키고 난 다음에서야 남아 있는 집안일을 끝내고 방에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몇 시간도 채 자지도 못한 현주는 한눈에 봐도 지쳐 보였고 퀭한 얼굴로 청소를 하고 있을 때 그녀 앞에 남자 구두가 보였다.
“죄송하지만....”
“잠 못 잤어요?”
“대표님....?”
“혹시 내가 말한 것 때문에 잠 못 잤어요?”
“아...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
“청소해야 해요, 나가주세요.”
“이거 가지고 다녀요.”
“뭘...!”
현주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잠긴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현주 씨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
“그러니까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 줘요.”
“......”
“절대 이상한 짓 안 하고 안고만 있을게요.”
고개를 들고 있는 그녀 뒷덜미를 감싸 자신의 가슴에 묻고 가만히 그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던 현주는 점점 눈이 감겼고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깊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알 수 없었지만, 현주가 깨어났을 땐 자신을 안고 있었던 우빈이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침대에서 나와 방을 나가자 거실 소파에 앉아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우빈이와 눈이 마주쳤다.
“잘 잤어요?”
“.....네.”
“진짜 잘 자던데.”
“.......”
“잘 자서 예쁘다는 말이었어요.”
“이....이제 가요.”
“가긴 어딜 가요, 점심 먹기엔 늦었고 가다가 영화 볼래요?”“대표님.”
“영화 보고 나서 저녁 먹고 들어가면 딱 맞겠네.”
“전 그냥...”
“가요.”
의자에 걸어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고 그녀 팔을 잡아당겨 호텔을 나온 우빈이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영화관으로 데리고 갔다.
영화관에 도착하자 머뭇거리며 그와 조금 떨어져 걷는 현주를 보고 미간을 좁히다가 현주에게 다가가 그녀 허리에 팔을 휘어 감았다.
“대표님!”
“영화 시작할 거 같은데 얼른 가죠.”
“갈 테니까 놔주세요.”
“싫어요.”
“네?”
“이제 현주 씨하고 떨어지기 싫다고 했어요.”
“대표님.”
영화관에 들어올 때부터 그에게 집중된 여자의 시선에 주눅이 든 현주는 고개를 숙이며 그의 뒤를 따라갔지만, 자신에게 다가와 허리에 팔을 감은 그를 밀어내려 힘을 주었다.
“힘으로 날 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놔달라고요.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뭐 어때요, 난 상관없는데.”
힘으로 그를 밀어낼 수 없었던 현주는 포기가 빨랐다.
의자에 앉아 그가 예매한 영화를 보고 나오자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배고프죠?”
“......”
“점심도 안 먹었으니 배고프겠다, 가요.”
“어...어딜...”
“저녁 먹고 집에 데려다줄게요.”
다시 그녀 허리에 팔을 감은 그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그녀와 함께 근사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그녀 접시를 가져와 먹기 좋게 잘라준 뒤 그녀 앞에 놓아주자 머뭇거리며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할 수 있으니까 대표님 드세요.”
“현주 씨는 오늘 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 돼요. 먹어 봐요. 맛있을 거예요.”
“.....잘 먹을게요.”
“많이 먹어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보지 않는 그녀를 보며 그가 상냥한 미소를 짓고 그녀 앞에 좋아하는 음식들을 조금씩 가져다주었다.
식사를 끝내고 디저트와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우빈이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현주 씨.”
“네.”
“난 현주 씨가 좋아요.”
“......”
“관심이 아니라 현주 씨를 좋아해요.”
“죄송하지만 전 대표님 마음 받을 수가...”
“똑같네.”
“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그냥 내 마음을 말하고 싶었어요. 알고 있겠지만.”
“....자꾸 이러시면 전...”
“다 먹은 거 같은데 일어나죠.”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고등학생인 그때보다 어쩌면 더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녀에게 다가갔다가 도로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도망 못 가도록 만들어 놓고 그녀 마음을 제대로 흔들어볼 작정이었다.
‘네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지금은 이런 거로 부족하겠지.’
그녀 집 앞에 차를 세워두고 내리기 전에 그녀 손을 잡으며 손등에 입을 살짝 맞추자 깜짝 놀란 현주가 손을 빼냈다.
“왜 이래요.”
“내가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그거하고 무슨...”
“입에 할 수 없으니까 손에라도 하고 싶어서요.”
“나...난 허락한 적 없다고요!”
벨트를 거칠게 풀고 문을 세게 닫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에 들어가는 현주를 보며 그가 크게 웃었다.
한참 동안 운전대에 얼굴을 기대고 있다가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가자 동생인 도훈이가 환하게 웃으며 현주를 반겨주었다.
“잘 갔다 왔어?”
“대표님하고 언제 얘기한 거야?”
“어제 누나 편의점 일할 때 샵 사장님하고 대표님이 연락 왔었거든.”
“......”
“이번 주는 내가 있으니까 누나 좀 쉬어.”
“도훈아....”
“나 제대하면 편의점은 그만둬, 알았지?”
“......”
“7년 전에는 내가 어려서 누나를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누나 할 만큼 했어, 그러니까...”
“됐어, 너 학교 복학해야지. 그러려면 일 계속 해야 돼.”
“누나.”
“대학교 졸업해야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잖아, 내 말대로 해. 응?”
도훈이 말을 듣지도 않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 바닥에 몸을 움츠리고 앉아 다시 소리 없이 울었다.
동생의 휴가가 끝나자 다시 현주의 같은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우빈이는 하루에 한 번씩 가게에 들어와 커피를 주문하면서 그녀에게 꽃을 선물하거나 그녀가 필요한 것들을 주고 갔다.
“대표님!”
“신발 다 헐었잖아요, 신고 다녀요.”
“대표...”
그녀 손에 억지로 들려진 쇼핑백 안에는 편안하고 예쁜 플랫 슈즈가 들어있었다.
다영이가 다가와 신발을 꺼내 그녀 앞에 놓아주고 호들갑을 떨며 그녀의 헌 신발을 벗게 했다.
“예쁘네.”
“사장님...”
“그렇다고 새 신발 신고 도망가면 안 돼, 알았지?”
“사장님!”
“같은 여자로서 부러워.”
“전 부담스럽다고요.”
주말은 가게가 쉬는 날이기 때문에 그녀를 만날 수 없었던 우빈이는 편의점 앞에서 기다리다가 그녀가 편의점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 오피스텔로 돌아가곤 했다.
토요일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다가 돌아갔고 일요일 역시 지켜보고 가려는데 불량해 보이는 남자 세 명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우빈이는 미간을 좁히며 차에서 내렸다.
덩치가 좋은 점장이 있었지만 젊은 남자 세 명을 감당하지 못한 점장 옆에 서 있는 현주에게 남자들이 다가가 건드리려고 할 때 남자의 손목이 우드득 꺾이고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악!”
“당신 뭐야!”
“그러는 니들은 뭐냐?”
“우린 손님이지.”
“손님이면 얌전히 물건 사고 가면 될 것이지 왜 일하는 여자를 건드려?”
“우리가 언제 그랬다고.”
“저기 cctv 안 보여? 나도 증인이고 내 블랙박스 영상에 다 찍혔는데, 어떻게 경찰서 갈래, 아니면 조용히 사라질래?”
“이씨!”
남자 세 명은 꽁지 빠지게 편의점에서 도망갔고 현주가 걱정된 우빈이가 현주에게 다가가자 그를 올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괜찮아요?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좀 위험해 보여.”
“......”
“점장님, 괜찮으십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경찰에 신고 안 해도 되겠습니까?”
“그게....”
“괜찮을 거예요. 또 오면 그때 신고하면 되니까.”
점장 대신 현주의 말을 들은 우빈이는 미세하게 떨고 있는 그녀 손를 감싸며 걱정스러운 듯 그녀 머리를 감싸 안아주었다.
“대표님!”
“무서웠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안 해도 돼요.”
“......”
“내가 도와줄게요, 그러니까...”
“오늘은 감사하지만 그 이상은...”
그를 밀어내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후 편의점 밖에 있는 의자에 그와 나란히 앉았다.
“대표님.”
“말해요.”
“주말마다 오시는 거 알아요.”
“아...”
“오지 마세요.”
“내 마음이에요.”
“안 오셨으면 좋겠어요.”
“왜요?”
“네?”
“내가 왜 안 왔으면 좋겠냐고요?”
“그건....”
무릎에 손을 올린 현주는 주먹을 꽉 쥐고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말을 잇지 못하자 그가 다가와 깨물고 있는 아랫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이 버릇 여전하네. 피나잖아.”
“!”
“휴지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요.”
자신의 차로 달려가 피가 나는 그녀 입술을 닦아주고 옆에 앉아 주먹을 쥐고 있는 그녀 손을 잡았다.
“내가 왜 안 왔으면 좋겠냐고 물었는데 대답 못 하겠죠?”
“.......”
“현주 씨도 나 좋아하죠?”
“무...무슨 말도 안...”
“그럼 대답해 봐요, 왜 안 왔으면 좋겠어요?”
“.......”
“내가 대신 대답해 줄까요?”
“.....”
“내가 신경 쓰이죠? 왜 왔나 궁금하기도 하고.”
“아...아니에요. 그...그냥 이런 곳에 대표님 차 같은 비싼 차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에이~ 그건 현주 씨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요.”
“......”
“이러면 나중에 나한테 미안해질 텐데 그냥 솔직해지는 건 어때요?”
“....아직 일 안 끝나서 들어갈게요.”
“풉!”
그가 웃는 소리에 얼굴이 빨개진 현주는 편의점에 들어가 점장 대신 어지럽혀진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며 밖에 앉아 있는 우빈이를 힐끗 쳐다봤다.
아직 가지 않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획 다른 곳으로 돌려 그가 사라질 때까지 밖을 쳐다보지 않았다.
새벽에 일이 끝난 현주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는 길에 누군가 그녀를 벽에 세게 밀치고 거친 손길로 그녀 턱을 잡았다.
“아!”
“아파?”
“!”
“나도 아까 아팠거든!”
“.....”
“너 때문에 내 손목이 나갈 뻔했는데 네가 보상해 줘야지.”
불량해 보였던 남자들이 현주가 혼자 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그녀 주위를 둘러싸 위협했지만 두 주먹을 꽉 쥐고 남자를 힘껏 노려봤다.
“맘대로 해요.”
“뭐?”
“날 죽이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맘대로 하라고요!”
“신고? 할 수 있으면 해봐 어디!”
“!”
남자의 손이 올라갔지만 두 눈을 부릅뜨며 노려볼 때 남자들의 비명이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질 때쯤 큰 남자 주위로 남자 세 명이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어두워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현주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고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고 할 때 그가 다가와 허리를 받쳐주었다.
“위험했어.”
“......”
“김 비서, 경찰은?”
“금방 온다고 했습니다.”
“일단 내 차로 가요.”
“......”
“김 비서는 경찰 오면 이놈들 다 넘기고 모든 방법 동원해서 절대 그냥 나오지 못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그녀를 부축하고 차에 태운 뒤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 몸 위로 덮어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이제 괜찮아요.”
“어...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집에 가려고 했는데 구석에서 저놈들이 가지 않고 있길래 혹시나 해서 나도 기다렸다가 김 비서하고 잠깐 통화하는 사이에...미안해요.”
“아니에요,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아무 생각하지 말고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
“싫다고 안 하네.”
“오...오늘은 부탁할게요.”
“훗! 매일 부탁해도 돼요.”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폭력이던 다른 무언가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두려웠고 공포를 느꼈지만, 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절로 몸이 떨린 현주는 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싸자 운전하고 있던 우빈이가 집 앞에 차를 멈추고 그녀를 불렀다.
“편의점 그만두는 건 어때요?”
“네?”
“새벽까지 일하는 거 위험해 보여서.”
“그 일을 그만두면 생활할 수가 없어요, 제가 전에 말했잖아요, 하루 번 돈으로도 부족하다고.”
“.......”
“게다가 동생이 제대하면 학비도 줘야 해서 그만둘 수가 없어요.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대표님 덕분에...!”
차에서 내리려는 그녀 손목을 잡아당기자 그와 가까워진 거리에 놀란 현주가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다른 손으로 그녀 얼굴을 감싸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럼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보다 돈을 더 많이 주는 일을 소개해주면 그만둘 생각 있어요?”
“네?”
“대신 평일이 아니라 주말만 일하는 거예요.”
“무슨 일인데 주말만 일하는 건데요?”
“그건 현주 씨가 한다고 하면 말해줄게요.”
“.....생각해 볼게요.”
“하루만 생각해요. 그리고 긍정적인 대답이길 바래요.”
얼굴을 감싸던 그의 손이 떨어지다가 그녀 손을 잡고 손등이 아닌 손가락 사이에 입을 가져다 대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대담한 행동에 놀란 그녀는 손을 빼내고 화끈거리는 얼굴로 집에 들어가 집안일도 잊은 채 방에 들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하아....이러면 안 되는데 나 왜 이래.”
생각과는 다르게 두근대는 심장 때문에 빨개진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방에 앉아 진정시키고 난 다음에서야 남아 있는 집안일을 끝내고 방에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몇 시간도 채 자지도 못한 현주는 한눈에 봐도 지쳐 보였고 퀭한 얼굴로 청소를 하고 있을 때 그녀 앞에 남자 구두가 보였다.
“죄송하지만....”
“잠 못 잤어요?”
“대표님....?”
“혹시 내가 말한 것 때문에 잠 못 잤어요?”
“아...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
“청소해야 해요, 나가주세요.”
“이거 가지고 다녀요.”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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