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조회 : 891 추천 : 0 글자수 : 6,593 자 2022-10-06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우빈이 몸 위로 겹쳐진 현주는 몸부림치며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끌어안고 있는 우빈이의 힘을 당해내진 못했다.
“대...대표님!”
“민희야.”
“대표님, 전 민희가...”
“민희야,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그러니까 전 민희가 아니라고요. 정신 좀 차려...”
“네가 사라지고 지난 7년 동안 내가 너 없이 얼마나...내가 얼마나...”
“대...대표님, 놔주세요.”
그녀가 몸부림칠수록 더 세게 끌어안으며 괴로운 듯 내뱉는 그의 음성은 힘겨워 보였다.
“그때 널 잡았더라면...”
“......”
“뭣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 해결할게. 그러니까 돌아와 줘.”
“대표님, 전 민희가 아니라 정 현주라고요.”
“무슨 이유로 네가 떠났는지 왜 날 모르는 척하는지 말해 줄 수 없어?”
“.......”
“내가 지켜줄게, 보호해줄게. 내가 다 알아서 도와줄게, 제발 내 옆에만 있어 줘. 민희야...”
“난 민희가 아니라고 몇 번을...”
“제발....나 너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돌아와...”
잠꼬대인지 자신을 민희로 착각해서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지만, 현주는 조금 느슨해진 우빈이 팔을 풀어 외투를 다시 잘 덮어주고 눈을 감고 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프지 말아요, 그리고...”
차마 뒷말을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을 나와 비서실에 앉아 있는 김 비서에게 다가가 인사한 후 샵으로 내려갔다.
기운 없어 보이는 현주 모습에 김 비서는 대표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누워있었던 우빈이가 소파에 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
“대표님?”
“미칠 거 같아.”
“네?”
“내가 민희를 안고 있었어.”
“.......”
“자꾸 아니라고 하지만 민희가 맞는데 이유를 도통 모르겠어, 도와줄테니 말하라고 했는데도 아무 말도 안 해.”
“말 못 할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도와준다고 했다고! 7년 만이야, 7년 만에 민희가 내 품에 있었는데....놔 줄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
목소리를 높이며 힘들어하는 우빈이를 보며 김 비서는 조용히 들어주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마른세수하며 현주가 덮어주고 간 외투를 다시 옷걸이에 걸고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결심한 듯 괴로워했던 표정은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대표님?”
“왜?”
“죄송합니다.”
“뭐가?”
“제가 괜히 정 현주 씨를 불러서...”
“아니, 잘했어.”
“네?”
“덕분에 확실히 알았거든, 정 현주가 박 민희라는 걸.”
“.......”
“조사는 어떻게 됐어?”
“조금 시간이 걸릴 거 같습니다.”
“알았어, 그럼 난 나대로 정 현주를 돌려놔야겠지.”
점점 입가에 호선을 그리는 우빈이를 보며 안심한 김 비서는 결재 서류를 책상에 놓고 대표실을 나갔다.
결재 서류를 넘겨보던 우빈이는 펜을 잡고 있던 손을 멈추고 문뜩 떠오른 기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대하라고, 예전에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받아줬는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좀 달라야겠지.”
민희 학교에 계속 찾아갔다가 민희의 신고로 경찰서까지 가게 되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우빈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꽃다발을 들고 정문에서 민희를 기다렸다.
남녀 공학이었던 민희 학교에서는 이미 우빈이에 대해서 소문이 퍼졌고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려고 할 때 창가에 모여있는 여학생들의 목소리에 민희가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자 정문에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우빈이가 보였다.
“어머~ 또 왔네.”
“누굴까?”
“야, 근데 진짜 멋있다.”
“그치~ 거의 매일 왔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가던데 진짜 누굴까?”
“내가 가서 말이라도 걸어볼까?”
“대체 누구길래 저렇게 멋있는 남자를 기다리게 하는 거야?”
우빈이를 보고 흥분하며 떠들고 있는 여학생들을 바라보다가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걸으며 정문이 아닌 뒷문으로 나가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거의 열흘이 넘게 민희를 기다렸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우빈이는 그날도 기다리다가 정문에서 나오는 여학생을 붙잡았다.
“저기.”
“네? 왜요?”
붙잡은 우빈이를 보며 여학생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바라봤다.
“3학년 수업 아직도 안 끝났니?”
“제가 3학년인데 수업 다 끝났어요.”
“그래.”
“혹시 누구 기다리시는데요? 제가 도와...”
“괜찮아, 고맙다.”
“네...”
자신의 도움을 거절하자 실망하며 가는 자신을 우빈이가 다시 불러세우자 환하게 웃어 보였다.
“왜요?”
“혹시 여기 말고 학교를 나가는 다른 문도 있니?”
“네, 뒷문 있어요.”
“이런!”
“저기...”
“어디야?”
“네?”
“뒷문이 어디냐고?”
여학생이 알려준 뒷문으로 갔었지만 이미 버스를 타고 간 민희를 만나지 못하고 헛걸음을 해야 했다.
다음 날 정문이 아닌 뒷문에 서 있는 우빈이를 보며 여학생들이 힐끗거리다가 한 여학생이 우빈이에게 다가갔다.
“저기 기다리는 사람 있으세요?”
“어, 그러니까 비켜.”
“계속 만나지 못하고 있는 거 같은데 전 어떠세요?”
“뭐?”
“이 학교에서 제가 제일...”
“비켜, 너 같은 여자애는 내가 다니는 대학교에 널렸어.”
“뭐에요!”
“그러니까 비키라고!”
“!”
아직 교실에서 남아 있는 민희네 반 아이가 뛰어 들어와 뒷문에서 있었던 일을 떠들어대자 그 얘기를 들은 민희는 조용히 가방을 챙기고 정문으로 나가 버스 정류장에 갔다.
‘지치지도 않나?’
정류장에서 버스에 올라가려는 민희를 발견한 우빈이는 재빨리 달려갔지만 이미 버스가 출발하고 난 뒤였다.
“젠장!”
그 뒤로 우빈이는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진 않았고 민희가 타고 가는 버스 정류장에 차를 세워두고 민희를 기다렸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민희를 만날 수도 볼 수도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날도 아무리 기다려도 민희를 만날 수 없던 우빈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교 정문에 가까워질 무렵 몇 명의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민희를 발견했다.
“뭐하는...!”
“비켜!”
“뭐?”
“비키라고!”
항상 침착했고 차분했던 민희 목소리가 자신에게 들릴 만큼 크게 들려오자 우빈이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흥분한 목소리에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점점 많아진 남녀학생들 틈에서 민희가 몇 명의 여학생들을 사납게 노려봤다.
“야! 너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내가 뭘 착각했다고 그래!”
“승호 내 남자친구야.”
“그래서?”
“이게 어디서 남의 남자 친구한테 꼬리 치고 있어!”
“네가 봤어?”
“뭐?”
“봤냐고? 내가 승호한테 꼬리치는 거 봤냐고?”
“너 공부 좀 잘한다고 우쭐 대지 마, 승호가 널 정말 좋아할 거 같아?”
몇 명의 여학생 중에 한 여학생이 민희의 앞에 바짝 다가갔지만, 전혀 기죽지 않은 민희를 우빈이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창피하지 않아?”
“뭐?”
“학교 앞에서 이러는 거 창피하지 않냐고?”
“.......”
“너나 승호나 참 한심하다. 비켜! 나 이럴 시간 없어.”
여학생을 밀치며 지나가려는 민희의 팔을 여학생이 세게 붙잡으며 막아서자 인상 쓰며 노려보려고 할 때 우빈이가 민희 팔을 잡아당겨 어깨를 감쌌다.
“!”
“그만하지.”
갑자기 우빈이의 등장에 놀란 학생들은 눈을 크게 뜨며 바라봤고 민희 역시 놀라며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학교에서 무슨 짓이야?”
“....누구세요?”
“나?”
“네.”
“글쎄? 여기 박 민희한테 볼 일 있는 사람?”
“......”
“너희들 민희가 공부 잘해서 싫은 거야? 아니면 질투하는 거야?”
“네?”
“본인 남자친구한테 가서 먼저 물어보면 될 걸 왜 민희한테 따지는지 모르겠네.”
“.......”
“그리고 선생님들이 이 모습 보면 좋아하실까?”
“!”
자신과 민희 주위로 많은 남녀 학생들이 모여있다는 것을 눈치챈 여학생은 부끄러운 듯 얼굴이 빨개지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제 서야 학생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우빈이 팔에 감싸진 자신의 어깨을 빼내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겨우 만났네.”
“놔요.”
“싫어, 겨우 잡았는데 또 도망가려고?”
“도망 안 갈 테니까 일단 놔요.”
“좋아, 놔줄 테니까 도망가지 마.”
“알았다고요.”
우빈이 손이 떨어지자 흐트러진 교복을 정리하고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자 당황한 그가 몸을 움찔거렸다.
“감사합니다.”
“어?”
“아까 도와주셔서요.”
“아...그럼 이제 시간 괜찮지?”
“저...”
“일단 나가자, 학교 안이라 말하기가 좀 그렇네.”
도망갈 줄 알았던 민희가 가만히 우빈이를 따라 나오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자신의 차로 데리고 와 문을 열어주었다.
“타.”
“하지만...”
“무서워? 그러면 저기는 어때?”
우빈이가 가리킨 곳에 작은 카페가 보였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민희와 함께 카페로 들어가 음료 두 잔을 주문해 자리에 앉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난 너 놓치기 싫어.”
“......”
“네가 고3인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네가 뭘 걱정하는지도 알아, 방해하지 않을게, 네가 만나고 싶은 날에만 만나주면 돼. 그래도 싫어?”
“.......”
“내가 매일 찾아간 거 알고 있지?”
“네.”
“나 처음이야.”
“네?”
“여자한테 고백한 것도 내가 이렇게 한 여자한테 매달리는 것도 그 모든 게 다 네가 처음이라고.”
“......”
“기다려줄게, 대신 나 말고 다른 남자는 만나지도 말고 절대 좋아하지만 마.”
“풋!”
웃었다.
민희가 자신 앞에서 벽을 허물 듯 경계심 없이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에 우빈이는 덥석 민희 손을 잡았다.
“!”
“아, 미안.”
“.....”
“내 앞에서 웃는 거 처음 봐서 나도 모르게...”
“자주 못 만날지도 몰라요.”
“어?”
“엄마가 많이 편찮으셔서 집에 빨리 들어가야 하는 날이 많아요.”
“아....”
“아직 내가 오빠를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상관없어.”
“그래도 괜찮다면 좋아요.”
“정말?”
너무 예뻤다.
환하게 웃으며 자신이 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민희가 그날 제일 예뻐 보였다.
아픈 엄마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민희 하교 시간에 맞춰 집에 데려다주면서 민희와 많은 얘기를 하며 마음도 조금씩 다가왔다.
자신 생각을 먼저 해주는 우빈이를 보며 민희는 여름 방학이 지나 그와 함께 하루라도 온전히 지내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했다.
“미안해요.”
“응? 뭐가?”
“......”
“괜찮다고 했잖아, 대신 대학교 입학하면 실컷 데이트도 하고 여행도 가자.”
“...네.”
“어머님은 괜찮으셔?”
“아니요, 더 안 좋아지셨어요.”
“그래....”
“이미 가족들 전부 준비하고 있어서 저도...”
또르륵 그녀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벨트를 풀어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민희를 따뜻하게 안아 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걱정하지 마, 괜찮아지실 거야, 이렇게 예쁜 민희를 두고 혼자 가시진 못 할 테니까.”
“흐흑....”
하지만 민희의 어머니는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났고 힘들고 절망해있을 민희는 우빈이의 위로와 사랑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
서로 사랑하게 된 두 사람은 주말마다 우빈이 대학교 도서관에서 만나 공부하면서 데이트도 즐겼다.
가만히 예전 일을 떠올린 우빈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민희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축제 당일에도 민희는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다만 집에 도착하고 나서 조금 슬픈 표정이 보여서 그때는 자신과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때 붙잡았어야 했는데....”
민희가 자신의 마음을 힘들게 받아준 만큼 서로 사랑하고 나서부터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대학교에서 친구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여자라고 민희를 소개했고 그녀 주위에 남자가 있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을 우빈이 친구들은 싫어했지만, 민희는 오히려 그가 든든하고 좋았다.
“그때는 네가 고등학생이라 조심스러웠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걸 네가 모르는 거 같은데 박 민희, 아니 정 현주.”
사인을 다 마친 결재 서류를 덮고 걸어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어 대표실을 나오자 김 비서가 일어나려고 할 때 우빈이가 팔을 뻗어 막았다.
“됐어, 나 혼자 갔다 올 거야.”
“네?”
“금방 올 거니까 따라올 필요 없어.”
“아...네, 알겠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주가 일하는 샵이 보이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문을 열자 현주보다 먼저 다영이가 우빈이를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어머~ 대표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아프셨다던데 괜찮으세요?”
“네, 현주 씨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아...”
“잠시 현주 씨하고 얘기 좀 하고 와도 될까요?”
“그럼요. 현주 씨.”
“......”
“갔다 와.”
작업대에 멀뚱히 서 있는 현주 등을 떠밀며 우빈이 앞에 데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 손목을 잡고 샵을 나가 건물 안에 있는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우빈이는 그녀를 세워두고 고개를 숙여 현주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들어 올렸다.
“왜....왜 이러세요?”
“잘 들어요.”
“.......”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네?”
“현주 씨가 나한테 올 시간 오래 걸리지 않게 할 거예요, 예전엔 오래 걸렸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이제 상관없다고, 현주 씨가 박 민희인지 아닌지. 내 심장이 현주 씨만 보면 이렇게 되니까.”
“!”
“대...대표님!”
“민희야.”
“대표님, 전 민희가...”
“민희야,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그러니까 전 민희가 아니라고요. 정신 좀 차려...”
“네가 사라지고 지난 7년 동안 내가 너 없이 얼마나...내가 얼마나...”
“대...대표님, 놔주세요.”
그녀가 몸부림칠수록 더 세게 끌어안으며 괴로운 듯 내뱉는 그의 음성은 힘겨워 보였다.
“그때 널 잡았더라면...”
“......”
“뭣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 해결할게. 그러니까 돌아와 줘.”
“대표님, 전 민희가 아니라 정 현주라고요.”
“무슨 이유로 네가 떠났는지 왜 날 모르는 척하는지 말해 줄 수 없어?”
“.......”
“내가 지켜줄게, 보호해줄게. 내가 다 알아서 도와줄게, 제발 내 옆에만 있어 줘. 민희야...”
“난 민희가 아니라고 몇 번을...”
“제발....나 너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돌아와...”
잠꼬대인지 자신을 민희로 착각해서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지만, 현주는 조금 느슨해진 우빈이 팔을 풀어 외투를 다시 잘 덮어주고 눈을 감고 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프지 말아요, 그리고...”
차마 뒷말을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을 나와 비서실에 앉아 있는 김 비서에게 다가가 인사한 후 샵으로 내려갔다.
기운 없어 보이는 현주 모습에 김 비서는 대표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누워있었던 우빈이가 소파에 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
“대표님?”
“미칠 거 같아.”
“네?”
“내가 민희를 안고 있었어.”
“.......”
“자꾸 아니라고 하지만 민희가 맞는데 이유를 도통 모르겠어, 도와줄테니 말하라고 했는데도 아무 말도 안 해.”
“말 못 할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도와준다고 했다고! 7년 만이야, 7년 만에 민희가 내 품에 있었는데....놔 줄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
목소리를 높이며 힘들어하는 우빈이를 보며 김 비서는 조용히 들어주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마른세수하며 현주가 덮어주고 간 외투를 다시 옷걸이에 걸고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결심한 듯 괴로워했던 표정은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대표님?”
“왜?”
“죄송합니다.”
“뭐가?”
“제가 괜히 정 현주 씨를 불러서...”
“아니, 잘했어.”
“네?”
“덕분에 확실히 알았거든, 정 현주가 박 민희라는 걸.”
“.......”
“조사는 어떻게 됐어?”
“조금 시간이 걸릴 거 같습니다.”
“알았어, 그럼 난 나대로 정 현주를 돌려놔야겠지.”
점점 입가에 호선을 그리는 우빈이를 보며 안심한 김 비서는 결재 서류를 책상에 놓고 대표실을 나갔다.
결재 서류를 넘겨보던 우빈이는 펜을 잡고 있던 손을 멈추고 문뜩 떠오른 기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대하라고, 예전에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받아줬는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좀 달라야겠지.”
민희 학교에 계속 찾아갔다가 민희의 신고로 경찰서까지 가게 되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우빈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꽃다발을 들고 정문에서 민희를 기다렸다.
남녀 공학이었던 민희 학교에서는 이미 우빈이에 대해서 소문이 퍼졌고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려고 할 때 창가에 모여있는 여학생들의 목소리에 민희가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자 정문에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우빈이가 보였다.
“어머~ 또 왔네.”
“누굴까?”
“야, 근데 진짜 멋있다.”
“그치~ 거의 매일 왔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가던데 진짜 누굴까?”
“내가 가서 말이라도 걸어볼까?”
“대체 누구길래 저렇게 멋있는 남자를 기다리게 하는 거야?”
우빈이를 보고 흥분하며 떠들고 있는 여학생들을 바라보다가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걸으며 정문이 아닌 뒷문으로 나가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거의 열흘이 넘게 민희를 기다렸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우빈이는 그날도 기다리다가 정문에서 나오는 여학생을 붙잡았다.
“저기.”
“네? 왜요?”
붙잡은 우빈이를 보며 여학생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바라봤다.
“3학년 수업 아직도 안 끝났니?”
“제가 3학년인데 수업 다 끝났어요.”
“그래.”
“혹시 누구 기다리시는데요? 제가 도와...”
“괜찮아, 고맙다.”
“네...”
자신의 도움을 거절하자 실망하며 가는 자신을 우빈이가 다시 불러세우자 환하게 웃어 보였다.
“왜요?”
“혹시 여기 말고 학교를 나가는 다른 문도 있니?”
“네, 뒷문 있어요.”
“이런!”
“저기...”
“어디야?”
“네?”
“뒷문이 어디냐고?”
여학생이 알려준 뒷문으로 갔었지만 이미 버스를 타고 간 민희를 만나지 못하고 헛걸음을 해야 했다.
다음 날 정문이 아닌 뒷문에 서 있는 우빈이를 보며 여학생들이 힐끗거리다가 한 여학생이 우빈이에게 다가갔다.
“저기 기다리는 사람 있으세요?”
“어, 그러니까 비켜.”
“계속 만나지 못하고 있는 거 같은데 전 어떠세요?”
“뭐?”
“이 학교에서 제가 제일...”
“비켜, 너 같은 여자애는 내가 다니는 대학교에 널렸어.”
“뭐에요!”
“그러니까 비키라고!”
“!”
아직 교실에서 남아 있는 민희네 반 아이가 뛰어 들어와 뒷문에서 있었던 일을 떠들어대자 그 얘기를 들은 민희는 조용히 가방을 챙기고 정문으로 나가 버스 정류장에 갔다.
‘지치지도 않나?’
정류장에서 버스에 올라가려는 민희를 발견한 우빈이는 재빨리 달려갔지만 이미 버스가 출발하고 난 뒤였다.
“젠장!”
그 뒤로 우빈이는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진 않았고 민희가 타고 가는 버스 정류장에 차를 세워두고 민희를 기다렸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민희를 만날 수도 볼 수도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날도 아무리 기다려도 민희를 만날 수 없던 우빈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교 정문에 가까워질 무렵 몇 명의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민희를 발견했다.
“뭐하는...!”
“비켜!”
“뭐?”
“비키라고!”
항상 침착했고 차분했던 민희 목소리가 자신에게 들릴 만큼 크게 들려오자 우빈이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흥분한 목소리에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점점 많아진 남녀학생들 틈에서 민희가 몇 명의 여학생들을 사납게 노려봤다.
“야! 너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내가 뭘 착각했다고 그래!”
“승호 내 남자친구야.”
“그래서?”
“이게 어디서 남의 남자 친구한테 꼬리 치고 있어!”
“네가 봤어?”
“뭐?”
“봤냐고? 내가 승호한테 꼬리치는 거 봤냐고?”
“너 공부 좀 잘한다고 우쭐 대지 마, 승호가 널 정말 좋아할 거 같아?”
몇 명의 여학생 중에 한 여학생이 민희의 앞에 바짝 다가갔지만, 전혀 기죽지 않은 민희를 우빈이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창피하지 않아?”
“뭐?”
“학교 앞에서 이러는 거 창피하지 않냐고?”
“.......”
“너나 승호나 참 한심하다. 비켜! 나 이럴 시간 없어.”
여학생을 밀치며 지나가려는 민희의 팔을 여학생이 세게 붙잡으며 막아서자 인상 쓰며 노려보려고 할 때 우빈이가 민희 팔을 잡아당겨 어깨를 감쌌다.
“!”
“그만하지.”
갑자기 우빈이의 등장에 놀란 학생들은 눈을 크게 뜨며 바라봤고 민희 역시 놀라며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학교에서 무슨 짓이야?”
“....누구세요?”
“나?”
“네.”
“글쎄? 여기 박 민희한테 볼 일 있는 사람?”
“......”
“너희들 민희가 공부 잘해서 싫은 거야? 아니면 질투하는 거야?”
“네?”
“본인 남자친구한테 가서 먼저 물어보면 될 걸 왜 민희한테 따지는지 모르겠네.”
“.......”
“그리고 선생님들이 이 모습 보면 좋아하실까?”
“!”
자신과 민희 주위로 많은 남녀 학생들이 모여있다는 것을 눈치챈 여학생은 부끄러운 듯 얼굴이 빨개지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제 서야 학생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우빈이 팔에 감싸진 자신의 어깨을 빼내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겨우 만났네.”
“놔요.”
“싫어, 겨우 잡았는데 또 도망가려고?”
“도망 안 갈 테니까 일단 놔요.”
“좋아, 놔줄 테니까 도망가지 마.”
“알았다고요.”
우빈이 손이 떨어지자 흐트러진 교복을 정리하고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자 당황한 그가 몸을 움찔거렸다.
“감사합니다.”
“어?”
“아까 도와주셔서요.”
“아...그럼 이제 시간 괜찮지?”
“저...”
“일단 나가자, 학교 안이라 말하기가 좀 그렇네.”
도망갈 줄 알았던 민희가 가만히 우빈이를 따라 나오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자신의 차로 데리고 와 문을 열어주었다.
“타.”
“하지만...”
“무서워? 그러면 저기는 어때?”
우빈이가 가리킨 곳에 작은 카페가 보였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민희와 함께 카페로 들어가 음료 두 잔을 주문해 자리에 앉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난 너 놓치기 싫어.”
“......”
“네가 고3인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네가 뭘 걱정하는지도 알아, 방해하지 않을게, 네가 만나고 싶은 날에만 만나주면 돼. 그래도 싫어?”
“.......”
“내가 매일 찾아간 거 알고 있지?”
“네.”
“나 처음이야.”
“네?”
“여자한테 고백한 것도 내가 이렇게 한 여자한테 매달리는 것도 그 모든 게 다 네가 처음이라고.”
“......”
“기다려줄게, 대신 나 말고 다른 남자는 만나지도 말고 절대 좋아하지만 마.”
“풋!”
웃었다.
민희가 자신 앞에서 벽을 허물 듯 경계심 없이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에 우빈이는 덥석 민희 손을 잡았다.
“!”
“아, 미안.”
“.....”
“내 앞에서 웃는 거 처음 봐서 나도 모르게...”
“자주 못 만날지도 몰라요.”
“어?”
“엄마가 많이 편찮으셔서 집에 빨리 들어가야 하는 날이 많아요.”
“아....”
“아직 내가 오빠를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상관없어.”
“그래도 괜찮다면 좋아요.”
“정말?”
너무 예뻤다.
환하게 웃으며 자신이 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민희가 그날 제일 예뻐 보였다.
아픈 엄마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민희 하교 시간에 맞춰 집에 데려다주면서 민희와 많은 얘기를 하며 마음도 조금씩 다가왔다.
자신 생각을 먼저 해주는 우빈이를 보며 민희는 여름 방학이 지나 그와 함께 하루라도 온전히 지내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했다.
“미안해요.”
“응? 뭐가?”
“......”
“괜찮다고 했잖아, 대신 대학교 입학하면 실컷 데이트도 하고 여행도 가자.”
“...네.”
“어머님은 괜찮으셔?”
“아니요, 더 안 좋아지셨어요.”
“그래....”
“이미 가족들 전부 준비하고 있어서 저도...”
또르륵 그녀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벨트를 풀어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민희를 따뜻하게 안아 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걱정하지 마, 괜찮아지실 거야, 이렇게 예쁜 민희를 두고 혼자 가시진 못 할 테니까.”
“흐흑....”
하지만 민희의 어머니는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났고 힘들고 절망해있을 민희는 우빈이의 위로와 사랑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
서로 사랑하게 된 두 사람은 주말마다 우빈이 대학교 도서관에서 만나 공부하면서 데이트도 즐겼다.
가만히 예전 일을 떠올린 우빈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민희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축제 당일에도 민희는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다만 집에 도착하고 나서 조금 슬픈 표정이 보여서 그때는 자신과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때 붙잡았어야 했는데....”
민희가 자신의 마음을 힘들게 받아준 만큼 서로 사랑하고 나서부터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대학교에서 친구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여자라고 민희를 소개했고 그녀 주위에 남자가 있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을 우빈이 친구들은 싫어했지만, 민희는 오히려 그가 든든하고 좋았다.
“그때는 네가 고등학생이라 조심스러웠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걸 네가 모르는 거 같은데 박 민희, 아니 정 현주.”
사인을 다 마친 결재 서류를 덮고 걸어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어 대표실을 나오자 김 비서가 일어나려고 할 때 우빈이가 팔을 뻗어 막았다.
“됐어, 나 혼자 갔다 올 거야.”
“네?”
“금방 올 거니까 따라올 필요 없어.”
“아...네, 알겠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주가 일하는 샵이 보이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문을 열자 현주보다 먼저 다영이가 우빈이를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어머~ 대표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아프셨다던데 괜찮으세요?”
“네, 현주 씨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아...”
“잠시 현주 씨하고 얘기 좀 하고 와도 될까요?”
“그럼요. 현주 씨.”
“......”
“갔다 와.”
작업대에 멀뚱히 서 있는 현주 등을 떠밀며 우빈이 앞에 데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 손목을 잡고 샵을 나가 건물 안에 있는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우빈이는 그녀를 세워두고 고개를 숙여 현주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들어 올렸다.
“왜....왜 이러세요?”
“잘 들어요.”
“.......”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네?”
“현주 씨가 나한테 올 시간 오래 걸리지 않게 할 거예요, 예전엔 오래 걸렸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이제 상관없다고, 현주 씨가 박 민희인지 아닌지. 내 심장이 현주 씨만 보면 이렇게 되니까.”
“!”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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