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조회 : 957 추천 : 0 글자수 : 6,397 자 2022-10-08
그녀 손에 상자를 들려주고 붙잡기도 전에 가게를 나가는 우빈이를 보며 한숨을 쉬다가 테이블에 상자를 내려놓고 뚜껑을 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풉!’
상자 안에는 호신용 스프레이와 경보기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옆에 그가 직접 쓴 편지까지 보였다.
[하루 안에 결정하라고 했지만, 결정 못 할 거 같아서 편의점 일하는 동안 가지고 다녀요. 현주 씨 옆에 붙어서 내가 지켜주고 싶지만 그러면 현주 씨가 날 싫어할 거 같아서 준비했어요, 이것들이 현주 씨를 나 대신 지켜줄 거예요.]
무슨 일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덜컥 허락할 수 없어 거절하려고 했는데 이미 자신 생각을 알아챈 그가 이런 선물까지 할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아....휩쓸리면 안 되는데.....’
7년 전이었다면 그의 사랑을 받고 자신도 그를 마음껏 사랑해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처지가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아빠가 날 사랑하고 예뻐해 줬지만 결국....날 진심으로 사랑해준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어...’
위를 올려다보며 슬픈 표정을 짓던 현주는 상자를 가방에 넣은 뒤 하던 청소를 끝내고 다영이가 올 때까지 샵에 오는 손님을 맞이했다.
대표실에서 김 비서와 얘기를 나누던 우빈이는 인상 쓰며 서류철을 덮고 묻자 김 비서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조사한 건 어떻게 되가?”
“거의 다 되어 갑니다. 그런데.”
“왜? 문제 있어?”
“박 회장님 쪽은 조사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 알아낼 수 있는 만큼만 조사해.”
“알겠습니다.”
박 회장의 재혼녀와 딸 조사는 어렵지 않았지만, 박 회장 조사는 쉽지 않다는 건 우빈이도 잘 알고 있었다.
‘철저하신 분이라 민희에 대해서도 나오지 않는 건가?’
우빈이 아버지인 한 회장 세력이 더 크기는 했지만, 박 회장은 아직 우빈이가 상대하기에는 어려운 상대였다.
민희와 사귀면서 박 회장에게 인사하고 나서 민희와 자신의 사이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면서 약혼까지 시키려고 했었다.
그런 박 회장이 자신 딸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우빈이는 다시 김 비서를 대표실로 불렀다.
“민희가 다니던 학교에도 자료가 없다고 했지?”
“네.”
“그럼 7년 전에 민희 담임선생님하고 당시 학교 교장, 이사장, 학교에 관련된 사람 모두 조사해.”
“네?”
“그럼 하나라도 나오겠지. 민희가 3년을 다녔던 학교야, 아무것도 없다는 게 이상하잖아, 담임이라도 기억할 거 아니야.”
“아...네, 알겠습니다.”
“또 민희와 같은 반이었던 사람들도 찾아봐. 그 애들까지 단속하진 못 했을 거야.”
“네.”
업무가 아닌 다른 일을 지시한 우빈이는 김 비서에게 미안했지만 당장 현주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모든 문제를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지만, 예전 성격이나 지금의 현주는 자신 스스로 해결하거나 어렵게 설득해야만 가능하다는 걸 우빈이는 잘 알고 있다.
“하아....그냥 확 결혼해버려?”
도망가고 싶어도 이제 자신에게서 도망 못 간다는 걸 알기에 자신 생각대로 밀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접어야 했다.
“안 돼, 미움 사고 싶지 않아, 민희 아니 현주가 웃어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짓이야.”
웃어줄 리도 없고 현주에게 미움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성격과 생각을 잘 알고 있었지만, 편의점 일이라도 그만두게 하고 싶어 다른 일을 제안했다.
“그런 놈들이 또 안 온다는 보장도 없어서 일단 호신용품을 주기는 했는데 하고 다닐지 모르겠네.”
다시 돌려보낼 줄 알았지만, 오후가 되어도 호신용품이 돌아오지 않자 안심하며 밀린 업무와 결재 서류들을 살펴봤다.
어제 경찰이 데리고 간 남자들이 용서를 구했지만, 용서하지 않았고 현주에게는 알리지 않고 김 비서를 통해 바로 법의 심판을 받게 했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결정하지 못하자 일요일 새벽에 일이 끝나고 나오는 현주 앞을 막아섰다.
“대표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네?”
“편의점 일 그만두고 내가 소개한 일 했으면 좋겠어요.”
“그건....”
“여기서 현주 씨 집까지 가는 길이 너무 위험해요.”
“......”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보다 돈 더 많이 준다는데도 싫은 이유가 뭐예요?”
“그게 어떤 일인지 알려주시지 않았잖아요.”
“!”
현주의 말을 듣고 놀란 우빈이는 눈을 움찔거리며 말을 하지 못하자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먼저 대답해 주세요, 무슨 일이에요?”
“한다고 하면 알려준다고...”
“죄송하지만 무슨 일인지 모르고 덜컥한다고 할 수는 없어요.”
“내가 이상한 일을 소개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좋아요, 말할게요.”
“......”
“오피스텔 청소하는 일이에요.”
“네?”
주말에 청소하는 일이 편의점 한 달 월급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란 현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그 사람이 아무나 맡길 수 없어서 내가 현주 씨를 소개해주려고 하는 거예요.”
“.......”
“어때요? 주말 오전에 와서 청소만 하고 가면 되는 일이에요.”
“오피스텔 청소요?”
“네, 오피스텔 건물 청소 아니고요.”
“오피스텔에 사는 사람이 남자예요? 여자예요?”
“네?”
“남자면 좀....”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현주 씨가 청소하는 동안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하....하루만 더 생각해 볼게요.”
“그냥 해요, 편의점 점장님한테 이번주만 하겠다고 말하고 이번 주 주말부터 하면 될 거 같은데.”
“대표님....”
그녀 등을 편의점으로 떠밀며 들여보내고 점장과 얘기를 마칠 때까지 지켜본 다음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내가 내일 주소 말해줄 테니까 토요일 오전에 편한 시간 청소하면 돼요.”
“대표님...”
“걱정할 거 없어요, 주말엔 오피스텔에 아무도 안 와요.”
“편하게 생각해요.”
“.......”
“그럼 내일 아니 이따가 봐요.”
한숨 쉬며 그녀가 차에서 내려 집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가 그녀가 올 것을 대비해 사진과 물건들을 서재로 옮겨 놓았다.
그녀가 청소할 오피스텔이 바로 자신이 사는 오피스텔이었다.
주말 동안 그녀에게 청소를 시키고 본가를 가거나 차에서 기다리려고 했다.
도우미가 하루에 한 번 청소해주어 청소가 필요 없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중에 들통나더라도 새벽에 일이 끝나는 위험해 보이는 편의점 일보다 나을 거란 생각에 밀고 나간 것이다.
“왠지 떨리는데.”
현주가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에 들어온다는 생각만으로도 기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박 민희 아니 정 현주 너란 여자가 나를 이렇게까지 만드는구나.”
7년 전 민희가 사라지고 난 뒤 사업적으로나 모든 여자에겐 관심이 없었던 우빈이는 냉정했고 차가운 남자라고 알려졌다.
절대 여자에게 웃어주거나 선물뿐만 아니라 꽃 한 송이조차 준 적 없었을뿐더러 사람들은 그가 감정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주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무너지고 감정이 앞서갔다.
웃어주고 싶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자신이 힘이 닿는 데까지 힘들지 않게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아 현주보다 우빈이가 더 애간장이 탔다.
다음 날 아침에 샵에 출근한 현주에게 다가가 의자에 앉히고 그녀 앞에 키와 주소를 적은 메모를 건네주었다.
“토요일에 오전에 편한 시간에 가면 돼요.”
“그게....”
“하기로 했으니까 잘할 거라고 믿어요.”
“.......”
“딱 하나만 지키면 돼요.”
“뭔데요?”
“서재에는 들어가지 말아요.”
“아....”
“다른 곳은 들어가거나 청소해도 상관없는데 서재는 개인적인 곳이라 들어가지 말라고 하네요.”
“....알았어요.”
“그럼 부탁할게요.”
“네.”
“그리고 다 먹었죠?”
“안 먹어도...”
테이블 위에 새 영양제를 놓고 그녀가 붙잡기도 전에 샵을 나가는 우빈이와 영양제를 번갈아 보며 포기한 듯 한숨을 쉬며 영양제를 가방에 넣었다.
‘여전히 포기할 줄 모르네.’
카페에서 처음 말을 걸어왔을 때 날카롭지만 눈에 띄는 그의 외모에 주눅이 들었다.
아직 고등학생인지 모르고 다가오는 그를 거절했지만, 고등학생인 걸 알고서도 오히려 사귀자고 했어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포기할 줄 모르는 그의 고백에 두 손을 든 현주는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알고 나서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와 헤어져야 하는 현실에 절망했지만 차마 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어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자신이 선택한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날 오후 김 비서는 우빈이 책상 위에 두꺼운 종이봉투를 내려놓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왜 한숨이야?”
“대표님이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자꾸 시키시니까 힘들어서 그럽니다.”
“뭐?”
“아닙니다.”
“이건 뭔데?”
“박 회장님 재혼녀와 그 딸에 대한 자료입니다.”
“그래?”
“보시면 아시겠지만, 박 회장님 본처이신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한 달 뒤에 재혼녀와 딸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
“재혼녀 딸은 당시 박 민희보다 2살 어렸는데 성격이...”
“왜?”
“당시 박 회장님 집에 일하는 도우미 말로는 박 민희를 언니가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이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뭐?”
깜짝 놀란 우빈이는 서둘러 종이봉투를 열어 조사한 자료를 보며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인상 쓰고 있을 때 김 비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고 박 민희가 입었던 옷들과 사용했던 물건들을 전부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민희는 내 앞에서 한 번도 힘든 내색 한 적 없는데....”
“재혼녀때문에 오랫동안 일하는 도우미들은 견디지 못하고 그만둔 도우미가 많았고 재혼녀 딸은 학생 때 사고를 많이 쳐서 박 회장님은 골칫덩어리라고 생각한 거 같습니다.”
“지금 이러고 생활하는데 박 회장님이 그냥 두고만 본다고?”
“네, 대학교 입학도 겨우 박 회장님이 도와줬는데 졸업도 겨우겨우...지금은 클럽에서 놀면서 남자 만나는데도 재혼녀는 자신의 딸을 감싸서 박 회장님도 딱히...”
“박 회장님 본처가 죽고 나서 한 달밖에 안 지났는데 이런 여자하고 재혼했다고? 말이 돼?”
목소리를 높인 우빈이를 보며 김 비서는 재혼녀에 대한 조사한 것을 보여주며 침착하게 말했다.
“재혼녀는 돌아가신 사모님하고 결혼하시기 전에 만났던 여자였습니다.”
“뭐?”
“박 회장님도 부모님 반대로 재혼녀와 헤어지고 돌아가신 사모님과 정략결혼 하셨습니다.”
“그럼 그 딸이 박 회장님 딸이라는 거야?”
“보신 것처럼 재혼녀가 내민 유전자 검사 결과는 그렇게 나왔습니다.”
“재혼녀 딸이 친딸이라고?”
“헤어지고 나서 임신한 걸 알고 혼자서 애를 낳았다는 것이 이상해서 조사했는데...여기.”
“!”
김 비서가 내민 사진 속에 화려하게 치장하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젊은 외국인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얼굴이 구겨져 갔다.
게다가 여자의 그런 사진들은 한두 장이 아니었다.
“이 여자 누구야?”
“박 회장님 재혼녀입니다.”
“뭐?”
“헤어지고 나서 해외로 가서 사진으로 보는 것처럼 문란한 생활을 하고 나서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며칠 뒤에 한국으로 귀국한 거로 확인했습니다.”
“그럼 그 딸이 박 회장님 딸이 아닐 수도 있지 않아?”
“저도 상황이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게다가 딸 나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맞질 않습니다.”
“....그렇긴 해.”
재혼녀가 데려온 딸의 나이가 현주보다 당시 2살 어리다면 17살이었지만 박 회장과 죽은 아내와 결혼하고 현주가 태어난 건 3년 후였다.
그렇다면 현주보다 어린 것이 아니라 3살 많아야 했다.
박 회장님이 본처가 살아있을 때 몰래 재혼녀와 만났다면 말이 됐지만, 박 회장의 성격으로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우빈이도 잘 알고 있었다.
“철저하신 분인데 의심을 하지 않는 게 이상한데?”
“사랑했던 여자였고 유전자 검사 결과까지 보여주니까 의심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유전자 검사 결과 서류 볼 수 없나?”
“그건 대표님이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그래? 그건 나중에 생각하지. 그럼 나머지도 부탁해.”
“알겠습니다.”
책상에 널려있는 조사한 것들을 보며 한숨 쉰 우빈이는 전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던 현주를 떠올리자 감정을 참지 못하고 재킷을 입고 샵으로 내려갔다.
손님들에게 상냥히 웃으며 주문받고 있는 그녀를 보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웃는 게 저렇게 예쁜데...대체 7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전히 다영이가 먼저 반겨주며 계산대에 있는 현주에게 나오라고 손짓했다.
“어머~ 대표님,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닙니다. 잠깐 현주 씨하고 얘기해도 될까요?”
“그럼요, 현주 씨, 대표님이 할 얘기가 있다는데.”
“네?”
“여기선 그런데 나갈까요?”
‘풉!’
상자 안에는 호신용 스프레이와 경보기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옆에 그가 직접 쓴 편지까지 보였다.
[하루 안에 결정하라고 했지만, 결정 못 할 거 같아서 편의점 일하는 동안 가지고 다녀요. 현주 씨 옆에 붙어서 내가 지켜주고 싶지만 그러면 현주 씨가 날 싫어할 거 같아서 준비했어요, 이것들이 현주 씨를 나 대신 지켜줄 거예요.]
무슨 일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덜컥 허락할 수 없어 거절하려고 했는데 이미 자신 생각을 알아챈 그가 이런 선물까지 할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아....휩쓸리면 안 되는데.....’
7년 전이었다면 그의 사랑을 받고 자신도 그를 마음껏 사랑해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처지가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아빠가 날 사랑하고 예뻐해 줬지만 결국....날 진심으로 사랑해준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어...’
위를 올려다보며 슬픈 표정을 짓던 현주는 상자를 가방에 넣은 뒤 하던 청소를 끝내고 다영이가 올 때까지 샵에 오는 손님을 맞이했다.
대표실에서 김 비서와 얘기를 나누던 우빈이는 인상 쓰며 서류철을 덮고 묻자 김 비서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조사한 건 어떻게 되가?”
“거의 다 되어 갑니다. 그런데.”
“왜? 문제 있어?”
“박 회장님 쪽은 조사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 알아낼 수 있는 만큼만 조사해.”
“알겠습니다.”
박 회장의 재혼녀와 딸 조사는 어렵지 않았지만, 박 회장 조사는 쉽지 않다는 건 우빈이도 잘 알고 있었다.
‘철저하신 분이라 민희에 대해서도 나오지 않는 건가?’
우빈이 아버지인 한 회장 세력이 더 크기는 했지만, 박 회장은 아직 우빈이가 상대하기에는 어려운 상대였다.
민희와 사귀면서 박 회장에게 인사하고 나서 민희와 자신의 사이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면서 약혼까지 시키려고 했었다.
그런 박 회장이 자신 딸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우빈이는 다시 김 비서를 대표실로 불렀다.
“민희가 다니던 학교에도 자료가 없다고 했지?”
“네.”
“그럼 7년 전에 민희 담임선생님하고 당시 학교 교장, 이사장, 학교에 관련된 사람 모두 조사해.”
“네?”
“그럼 하나라도 나오겠지. 민희가 3년을 다녔던 학교야, 아무것도 없다는 게 이상하잖아, 담임이라도 기억할 거 아니야.”
“아...네, 알겠습니다.”
“또 민희와 같은 반이었던 사람들도 찾아봐. 그 애들까지 단속하진 못 했을 거야.”
“네.”
업무가 아닌 다른 일을 지시한 우빈이는 김 비서에게 미안했지만 당장 현주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모든 문제를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지만, 예전 성격이나 지금의 현주는 자신 스스로 해결하거나 어렵게 설득해야만 가능하다는 걸 우빈이는 잘 알고 있다.
“하아....그냥 확 결혼해버려?”
도망가고 싶어도 이제 자신에게서 도망 못 간다는 걸 알기에 자신 생각대로 밀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접어야 했다.
“안 돼, 미움 사고 싶지 않아, 민희 아니 현주가 웃어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짓이야.”
웃어줄 리도 없고 현주에게 미움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성격과 생각을 잘 알고 있었지만, 편의점 일이라도 그만두게 하고 싶어 다른 일을 제안했다.
“그런 놈들이 또 안 온다는 보장도 없어서 일단 호신용품을 주기는 했는데 하고 다닐지 모르겠네.”
다시 돌려보낼 줄 알았지만, 오후가 되어도 호신용품이 돌아오지 않자 안심하며 밀린 업무와 결재 서류들을 살펴봤다.
어제 경찰이 데리고 간 남자들이 용서를 구했지만, 용서하지 않았고 현주에게는 알리지 않고 김 비서를 통해 바로 법의 심판을 받게 했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결정하지 못하자 일요일 새벽에 일이 끝나고 나오는 현주 앞을 막아섰다.
“대표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네?”
“편의점 일 그만두고 내가 소개한 일 했으면 좋겠어요.”
“그건....”
“여기서 현주 씨 집까지 가는 길이 너무 위험해요.”
“......”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보다 돈 더 많이 준다는데도 싫은 이유가 뭐예요?”
“그게 어떤 일인지 알려주시지 않았잖아요.”
“!”
현주의 말을 듣고 놀란 우빈이는 눈을 움찔거리며 말을 하지 못하자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먼저 대답해 주세요, 무슨 일이에요?”
“한다고 하면 알려준다고...”
“죄송하지만 무슨 일인지 모르고 덜컥한다고 할 수는 없어요.”
“내가 이상한 일을 소개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좋아요, 말할게요.”
“......”
“오피스텔 청소하는 일이에요.”
“네?”
주말에 청소하는 일이 편의점 한 달 월급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란 현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그 사람이 아무나 맡길 수 없어서 내가 현주 씨를 소개해주려고 하는 거예요.”
“.......”
“어때요? 주말 오전에 와서 청소만 하고 가면 되는 일이에요.”
“오피스텔 청소요?”
“네, 오피스텔 건물 청소 아니고요.”
“오피스텔에 사는 사람이 남자예요? 여자예요?”
“네?”
“남자면 좀....”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현주 씨가 청소하는 동안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하....하루만 더 생각해 볼게요.”
“그냥 해요, 편의점 점장님한테 이번주만 하겠다고 말하고 이번 주 주말부터 하면 될 거 같은데.”
“대표님....”
그녀 등을 편의점으로 떠밀며 들여보내고 점장과 얘기를 마칠 때까지 지켜본 다음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내가 내일 주소 말해줄 테니까 토요일 오전에 편한 시간 청소하면 돼요.”
“대표님...”
“걱정할 거 없어요, 주말엔 오피스텔에 아무도 안 와요.”
“편하게 생각해요.”
“.......”
“그럼 내일 아니 이따가 봐요.”
한숨 쉬며 그녀가 차에서 내려 집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가 그녀가 올 것을 대비해 사진과 물건들을 서재로 옮겨 놓았다.
그녀가 청소할 오피스텔이 바로 자신이 사는 오피스텔이었다.
주말 동안 그녀에게 청소를 시키고 본가를 가거나 차에서 기다리려고 했다.
도우미가 하루에 한 번 청소해주어 청소가 필요 없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중에 들통나더라도 새벽에 일이 끝나는 위험해 보이는 편의점 일보다 나을 거란 생각에 밀고 나간 것이다.
“왠지 떨리는데.”
현주가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에 들어온다는 생각만으로도 기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박 민희 아니 정 현주 너란 여자가 나를 이렇게까지 만드는구나.”
7년 전 민희가 사라지고 난 뒤 사업적으로나 모든 여자에겐 관심이 없었던 우빈이는 냉정했고 차가운 남자라고 알려졌다.
절대 여자에게 웃어주거나 선물뿐만 아니라 꽃 한 송이조차 준 적 없었을뿐더러 사람들은 그가 감정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주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무너지고 감정이 앞서갔다.
웃어주고 싶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자신이 힘이 닿는 데까지 힘들지 않게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아 현주보다 우빈이가 더 애간장이 탔다.
다음 날 아침에 샵에 출근한 현주에게 다가가 의자에 앉히고 그녀 앞에 키와 주소를 적은 메모를 건네주었다.
“토요일에 오전에 편한 시간에 가면 돼요.”
“그게....”
“하기로 했으니까 잘할 거라고 믿어요.”
“.......”
“딱 하나만 지키면 돼요.”
“뭔데요?”
“서재에는 들어가지 말아요.”
“아....”
“다른 곳은 들어가거나 청소해도 상관없는데 서재는 개인적인 곳이라 들어가지 말라고 하네요.”
“....알았어요.”
“그럼 부탁할게요.”
“네.”
“그리고 다 먹었죠?”
“안 먹어도...”
테이블 위에 새 영양제를 놓고 그녀가 붙잡기도 전에 샵을 나가는 우빈이와 영양제를 번갈아 보며 포기한 듯 한숨을 쉬며 영양제를 가방에 넣었다.
‘여전히 포기할 줄 모르네.’
카페에서 처음 말을 걸어왔을 때 날카롭지만 눈에 띄는 그의 외모에 주눅이 들었다.
아직 고등학생인지 모르고 다가오는 그를 거절했지만, 고등학생인 걸 알고서도 오히려 사귀자고 했어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포기할 줄 모르는 그의 고백에 두 손을 든 현주는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알고 나서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와 헤어져야 하는 현실에 절망했지만 차마 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어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자신이 선택한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날 오후 김 비서는 우빈이 책상 위에 두꺼운 종이봉투를 내려놓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왜 한숨이야?”
“대표님이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자꾸 시키시니까 힘들어서 그럽니다.”
“뭐?”
“아닙니다.”
“이건 뭔데?”
“박 회장님 재혼녀와 그 딸에 대한 자료입니다.”
“그래?”
“보시면 아시겠지만, 박 회장님 본처이신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한 달 뒤에 재혼녀와 딸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
“재혼녀 딸은 당시 박 민희보다 2살 어렸는데 성격이...”
“왜?”
“당시 박 회장님 집에 일하는 도우미 말로는 박 민희를 언니가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이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뭐?”
깜짝 놀란 우빈이는 서둘러 종이봉투를 열어 조사한 자료를 보며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인상 쓰고 있을 때 김 비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고 박 민희가 입었던 옷들과 사용했던 물건들을 전부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민희는 내 앞에서 한 번도 힘든 내색 한 적 없는데....”
“재혼녀때문에 오랫동안 일하는 도우미들은 견디지 못하고 그만둔 도우미가 많았고 재혼녀 딸은 학생 때 사고를 많이 쳐서 박 회장님은 골칫덩어리라고 생각한 거 같습니다.”
“지금 이러고 생활하는데 박 회장님이 그냥 두고만 본다고?”
“네, 대학교 입학도 겨우 박 회장님이 도와줬는데 졸업도 겨우겨우...지금은 클럽에서 놀면서 남자 만나는데도 재혼녀는 자신의 딸을 감싸서 박 회장님도 딱히...”
“박 회장님 본처가 죽고 나서 한 달밖에 안 지났는데 이런 여자하고 재혼했다고? 말이 돼?”
목소리를 높인 우빈이를 보며 김 비서는 재혼녀에 대한 조사한 것을 보여주며 침착하게 말했다.
“재혼녀는 돌아가신 사모님하고 결혼하시기 전에 만났던 여자였습니다.”
“뭐?”
“박 회장님도 부모님 반대로 재혼녀와 헤어지고 돌아가신 사모님과 정략결혼 하셨습니다.”
“그럼 그 딸이 박 회장님 딸이라는 거야?”
“보신 것처럼 재혼녀가 내민 유전자 검사 결과는 그렇게 나왔습니다.”
“재혼녀 딸이 친딸이라고?”
“헤어지고 나서 임신한 걸 알고 혼자서 애를 낳았다는 것이 이상해서 조사했는데...여기.”
“!”
김 비서가 내민 사진 속에 화려하게 치장하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젊은 외국인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얼굴이 구겨져 갔다.
게다가 여자의 그런 사진들은 한두 장이 아니었다.
“이 여자 누구야?”
“박 회장님 재혼녀입니다.”
“뭐?”
“헤어지고 나서 해외로 가서 사진으로 보는 것처럼 문란한 생활을 하고 나서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며칠 뒤에 한국으로 귀국한 거로 확인했습니다.”
“그럼 그 딸이 박 회장님 딸이 아닐 수도 있지 않아?”
“저도 상황이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게다가 딸 나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맞질 않습니다.”
“....그렇긴 해.”
재혼녀가 데려온 딸의 나이가 현주보다 당시 2살 어리다면 17살이었지만 박 회장과 죽은 아내와 결혼하고 현주가 태어난 건 3년 후였다.
그렇다면 현주보다 어린 것이 아니라 3살 많아야 했다.
박 회장님이 본처가 살아있을 때 몰래 재혼녀와 만났다면 말이 됐지만, 박 회장의 성격으로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우빈이도 잘 알고 있었다.
“철저하신 분인데 의심을 하지 않는 게 이상한데?”
“사랑했던 여자였고 유전자 검사 결과까지 보여주니까 의심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유전자 검사 결과 서류 볼 수 없나?”
“그건 대표님이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그래? 그건 나중에 생각하지. 그럼 나머지도 부탁해.”
“알겠습니다.”
책상에 널려있는 조사한 것들을 보며 한숨 쉰 우빈이는 전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던 현주를 떠올리자 감정을 참지 못하고 재킷을 입고 샵으로 내려갔다.
손님들에게 상냥히 웃으며 주문받고 있는 그녀를 보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웃는 게 저렇게 예쁜데...대체 7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전히 다영이가 먼저 반겨주며 계산대에 있는 현주에게 나오라고 손짓했다.
“어머~ 대표님,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닙니다. 잠깐 현주 씨하고 얘기해도 될까요?”
“그럼요, 현주 씨, 대표님이 할 얘기가 있다는데.”
“네?”
“여기선 그런데 나갈까요?”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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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거부할 수 없는 아찔한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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