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0. 제발……. 그냥 좀, 있어요
조회 : 1,242 추천 : 0 글자수 : 5,368 자 2022-10-10
Episode 10. 제발……. 그냥 좀, 있어요
‘어색해. 그것도 아주 많이.’
점점 경하의 몸에 밀착해 오는 경호원.
“서 선생님! 혹시 거기 뒤쪽에, 뭐가, 있습니까?”
“……! 뒤쪽에 윽… 뭘? 딸꾹!”
이젠 하다 하다 못해 어깨까지 심하게 들썩이며 딸꾹질해댔다.
딸꾹딸꾹하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불쌍해 보일 정도로 딸꾹질이 멈추지 않는데.
거짓말도 해본 놈이 한다고 그의 거짓말은 너무 티가 났다.
“서 선생님! 뒤쪽에 뭐 숨기는 거 있죠?”
경호원의 질문이 이젠 질문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경하의 어색한 행동과 딸꾹질.
그 모든 게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데, 결론이 이르자 경호원 눈빛이 사나워졌다.
경호원이 강제로라도 뒤쪽을 확인하려 경하 팔을 잡았다.
“끄… 윽… 그…그럴 리가… 윽! 요. 딸꾹!”
*
할머니는 딸꾹질만 연거푸 하는 등짝만 넓은 녀석이 못마땅했다.
이건 뭐 대놓고, ‘나 지금 거짓말하고 있어요!’라고 친절하게 알리는 격이니.
뒤에 있던 그녀가 입술을 비틀며 쓰게 웃었다.
‘내가 대체, 이 인간에게 뭘 기대한 거야? 이렇게 거짓말 못 하기도 어렵겠다. 이런 실력에 누굴 지켜줘? 내가 언제 구해 달라고 했나? 나, 참….’
그녀는 별 도움도 안 되면서, 가던 길 막고 있는 경하가 오히려 짐짝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저리 떨려서,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경하는 왜 저리 나설까?
이 정도면 방해되지 않게 비켜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할머니는 마음 같아선 넓은 등짝을 쑹!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속으론 몇 번이나 ‘야, 짐짝! 썩 꺼져버려!’라고 말하고 싶은 걸, 그녀는 힘겹게 속으로 삼켰다.
하긴 어찌 그런 말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몇 번씩이나 그녀를 돕겠다고 나선 변태 녀석이니.
비록 그가 할머니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고, 웃음을 날렸다 해도 사실 그녀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었다.
도움을 줬으면 줬지.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이곳에 올 때마다 경하를 의식하고 있었더랬다.
그녀가 미처 깨닫진 못했으나, 그에게 별명까지 지어 주지 않았던가.
변태라고. 아, 또 있다. 범생이!
사실 그녀는 경하와 부딪히는 게 몹시도 싫었다.
그러면서도 어제 그가 도와줄 땐 또 싫지 않았다.
그녀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한 자체가 기막혔다.
경하와의 첫 만남을 생각하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처음부터 그들은 많이도 어긋났다.
겨우 이틀 사이,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그랬다.
또다시 그와 부딪히면서 그녀는 그날의 일이 악몽처럼 되새겨졌다.
‘아~, 싫다, 정말. 왜 자꾸 부딪혀? 그리고 남의 일엔 왜 자꾸 나서는데!?’
이런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던 그녀는 방해꾼이 빨리 사라졌으면 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경하가 전혀 달갑지 않아 망설이던 그때, 경호원이 던진 말에 그녀는 결심했다.
*
“서 선생님! 잠시만 이쪽으로 나와주시죠! 확인할 게 있습니다.”
긴장감이 최고조로 달한 순간 경하의 딸꾹질이 뚝! 멈췄다.
경하 앞까지 온 경호원의 눈빛과 그의 눈빛이 공중에서 세게 부딪혔다.
할머니를 바라보던 부드러운 눈빛이 어느새 사라지고.
원래부터 이런 사람처럼 경하는 전사의 기(氣)를 뿜어내고 있었다.
비록 그의 속은 덜덜 떨지언정 겉모습은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아, 미치겠네. 무슨 방법 없나? 안 돼! 내가 물러서면 할머니는….’
불안함에 경하의 심장이 쿵쿵 요동쳤다.
범생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경호원을 저지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뒤쪽에 있던 작은 손이 그의 옷자락을 당겼다.
“……!”
당황한 경하가 살며시 작은 손을 밀어내며 앞에 선 적을 상대했다.
‘할머니! 가만히 좀 있어요. 그러다 들켜요!’
온 신경이 사나운 기세를 풍기는 적을 상대해도 부족할 텐데, 작은 손까지 신경 쓰려니 경하는 죽을 지경이었다.
“서 선생님! 거기 뒤에 뭔가 있는 거 다 압니다. 이리 나오시죠.”
“……!”
경하는 그의 말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긴장감에 바짝 마른 입을 힘겹게 축이던 순간, 작은 손이 또다시 그의 옷자락을 당겼다.
‘할머니, 제발……. 그냥 좀, 있어요.’
체격이 큰 경하가 뒤에 숨겨둔 할머니를 위해 그답지 않게 경호원과 기(氣) 싸움을 벌였다.
‘아니, 사람이 왜 이렇게 둔해!?’
뒤에 있던 또 다른 이가 그와 달리 답답함에 속 끓였으나 경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녈 지키겠다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할머니, 제발……. 제가 꼭 지켜드릴 테니까 조금만 참아요.’
몇 번이나 그의 옷을 당겨도 아무 반응 없는 둔탱이 때문에 할머니는 열불 터졌다.
참고, 또 참고.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할머니가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했다.
“경하 씨! 나,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뒤에서 들린 토라진 젊은 여자 목소리에 경하는 의아했다.
‘……어, 목소리가… 달라졌다?’
경하는 경호원과 함께 뒤돌아서다가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좀 전까지 그의 몸으로 숨기고 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곤 어디서 나타났는지 젊은 여자가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마법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단 말인가?
게다가 그녀는 경하를 언제 봤다고, 팔짱을 낀 채 새초롬한 눈으로 흘겨봤다.
그리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제껏 본적 없는 해사한 미소로 눈웃음을 날린다.
일순간 경하는 그녀 눈빛에 빨려들었다.
그때처럼!
“자기는 나, 안 보고 싶었어? 난, 많이 보고 싶었는데. 왜 자꾸 딴 델 봐! 자꾸 그러니까, 질투 나잖아.”
“……!”
그를 언제 봤다고, 천연덕스럽게 다가온 손이 그의 팔을 슬며시 잡았다.
그리곤 은근슬쩍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그녀가 그의 옷깃을 만지작대는데.
낯선 손길에 경하는 움찔했다.
그의 행동에도 옷깃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한동안 그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낸 그녀는 경호원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경호원과 눈이 마주치자 눈꼬리를 접어 올렸다.
“저… 죄송한데, 자리 좀, 피해 주실래요? 저희가 정말 오랜만에 만났거든요. 이 사람이 많이, 바빠서 말이죠.”
그녀의 애교 섞인 푸념에 경호원은 그도 모르게 웃었다.
그들을 멀뚱히 넋 놓고 보던 경호원은 문뜩 둘의 데이트를 방해한 것 같아 난처한 표정으로 얼른 뒤로 물러났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도 없이, 두 분의 시간을 방해했네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급히 뒤돌아선 경호원 얼굴이 빨개졌다.
‘와, TV에서 보던 연예인보다 훨씬 예쁘네. 쌩얼 같은데…. 둘이 참 잘 어울린다.’
뒤돌아가던 경호원은 자기 쪽으로 오던 경호원을 보고 멈추라며 손짓했다.
“이쪽은 안 봐도 돼. 내가 지금, 확인했으니까.”
“어, 그래?”
“그러니까 다른 층을 찾아봐.”
그의 말에 동료들이 다른 층으로 달려갔다.
한편 경호원이 사라진 뒤, 두 사람에겐 어색한 공기만 흘렀다.
경하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여전히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이봐요, 이봐!”
‘뭐야, 왜 이래? 괜히 미안해지게. 무슨 사람이 이렇게 간이 작아?’
그녀가 고마움을 표현하려 몇 번을 불러도 그는 아무 반응이 없다.
뭐에 홀린 건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있는 모양새가 영 이상했다.
아무리 사람이 놀랐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반응할 리가.
고민 끝에 바닥에 내려둔 흰색 배낭을 챙겨 든 그녀는 경하를 잠시 바라보다가 사라졌다.
경하는 병원에 오기 전에 봤던 배낭을 보곤 눈을 감아버렸다.
일순간 감은 눈 주변으로 핏줄이 도드라지더니, 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경하는 몹시도 기분이 상한 듯 입매를 비틀었다.
그녀가 얼마나 갔을까?
그녀는 채 몇 발짝 디디기 전에, 조금 전 이곳을 지나갔던 경호원이 다시 돌아오는 걸 봤다.
그녀의 미간이 찰나에 구겨졌다.
‘아, 왜 또!? 그냥 가면 의심할 텐데. 아, 진짜!’
다른 곳으로 가려던 그녀는 피할 곳이 없어 급히 경하가 있는 곳으로 다시 왔다.
그는 이제껏 그대로였다.
“미안해요! 잠시만 실례.”
근처로 오는 경호원을 본 그녀가 까치발을 들어 매달리듯 그의 목을 그러안았다.
경하는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이 향이었어. 라벤더 향!
은은한 향이 그의 코끝에 스며들자 소율과의 첫만남을 왜 아직도 잊지 못했는지 기억이 났다.
그는 이 향이 좋았던 거였다.
그 소녀에게서 나는 이 라벤더 향이.
가공하지 않은 자연의 향이 그렇게 좋아 가끔 그 일이 떠올랐을 터였다.
그녀가 경호원이 지나가는지 쳐다보느라, 그의 품에서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이 여잔 이소율이 아니다.’
경하는 소율을 처음 봤을 때, 그녀가 싫었다.
학생답지 않게 젊은 여성들이 뿌릴 법한 향기가 났으니.
물론 그 향이 은은하다곤 해도 좋은 인상일 리가 만무했다. 만약 그녀가 학생이 아니었다면, 무슨 향수를 쓰는지 묻고 싶었다.
그녀와 부딪힌 아주 짧은 순간이 그가 처음으로 향기에 취했던 때였다.
그러다 알았다.
향수 전문점에서도 그 향은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시중에 나온 향이 라벤더 향과 비슷한 건 있어도, 그녀의 그 향은 파는 것과 질적으로 달랐다.
커다란 손이 천천히 움직여 그녀를 떼어내려 했다.
그의 강한 손길에 여자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지도 못한 강한 힘에 그와 눈이 마주친 검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자… 잠시만요. 조금만 이렇게 있어요. 조금만…. 경호원이 지나갈 때까지만. 제발….”
나직이 부탁하던 그녀는 긴장감에 더 세게 그를 안았다.
그녀 말에 손에 힘을 푼 경하의 손이 뚝, 떨어졌다.
경호원이 지나감과 동시에 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던 팔을 풀려 했다.
하지만, 경하가 먼저 그녀를 밀어냈다.
“……!”
‘뭘 그렇게까지 밀어내? 내가 무슨 전염병 보균자도 아니고. 보기보다 성질 엄청 더럽네. 여자면 다 좋아하는 거 아냐? 변태가 언제부터 여자를 가렸어?’
당황한 그녀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음, 실례 많았어요. 그럼.”
급히 그곳을 빠져나오던 그녀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디가 불편한지 경하 손이 닿았던 팔을 문지르며 갔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경하는 반은 정신이 나간 상태로 그곳에 멀뚱히 서 있었다.
*
라라라 라라 ♫
전화벨 울리는 소리에 정신없던 경하가 볼멘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서 선생님! 안 오세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다급한 소리에 경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지금 갑니다.”
이제야 수술 스케줄이 생각난 경하는 급히 흉부외과로 뛰어갔다.
수술이 끝난 경하가 의국에 들어와 잠시 눈 감고 있다.
의자에 앉아 오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한 경하는 마른세수를 연거푸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밖으로 나갔다.
병원 최고 꼭대기에 있는 하늘 정원에 올라온 경하는 어두운 낯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병원 근처를 구석구석 눈으로 훑던 그는 다른 병동 꼭대기에 있는 구조헬기 착륙장에서 시선을 멈췄다.
“……하-! 내 마음이 그거였어? 내가 아리에게서 걔를….”
‘어색해. 그것도 아주 많이.’
점점 경하의 몸에 밀착해 오는 경호원.
“서 선생님! 혹시 거기 뒤쪽에, 뭐가, 있습니까?”
“……! 뒤쪽에 윽… 뭘? 딸꾹!”
이젠 하다 하다 못해 어깨까지 심하게 들썩이며 딸꾹질해댔다.
딸꾹딸꾹하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불쌍해 보일 정도로 딸꾹질이 멈추지 않는데.
거짓말도 해본 놈이 한다고 그의 거짓말은 너무 티가 났다.
“서 선생님! 뒤쪽에 뭐 숨기는 거 있죠?”
경호원의 질문이 이젠 질문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경하의 어색한 행동과 딸꾹질.
그 모든 게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데, 결론이 이르자 경호원 눈빛이 사나워졌다.
경호원이 강제로라도 뒤쪽을 확인하려 경하 팔을 잡았다.
“끄… 윽… 그…그럴 리가… 윽! 요. 딸꾹!”
*
할머니는 딸꾹질만 연거푸 하는 등짝만 넓은 녀석이 못마땅했다.
이건 뭐 대놓고, ‘나 지금 거짓말하고 있어요!’라고 친절하게 알리는 격이니.
뒤에 있던 그녀가 입술을 비틀며 쓰게 웃었다.
‘내가 대체, 이 인간에게 뭘 기대한 거야? 이렇게 거짓말 못 하기도 어렵겠다. 이런 실력에 누굴 지켜줘? 내가 언제 구해 달라고 했나? 나, 참….’
그녀는 별 도움도 안 되면서, 가던 길 막고 있는 경하가 오히려 짐짝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저리 떨려서,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경하는 왜 저리 나설까?
이 정도면 방해되지 않게 비켜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할머니는 마음 같아선 넓은 등짝을 쑹!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속으론 몇 번이나 ‘야, 짐짝! 썩 꺼져버려!’라고 말하고 싶은 걸, 그녀는 힘겹게 속으로 삼켰다.
하긴 어찌 그런 말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몇 번씩이나 그녀를 돕겠다고 나선 변태 녀석이니.
비록 그가 할머니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고, 웃음을 날렸다 해도 사실 그녀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었다.
도움을 줬으면 줬지.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이곳에 올 때마다 경하를 의식하고 있었더랬다.
그녀가 미처 깨닫진 못했으나, 그에게 별명까지 지어 주지 않았던가.
변태라고. 아, 또 있다. 범생이!
사실 그녀는 경하와 부딪히는 게 몹시도 싫었다.
그러면서도 어제 그가 도와줄 땐 또 싫지 않았다.
그녀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한 자체가 기막혔다.
경하와의 첫 만남을 생각하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처음부터 그들은 많이도 어긋났다.
겨우 이틀 사이,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그랬다.
또다시 그와 부딪히면서 그녀는 그날의 일이 악몽처럼 되새겨졌다.
‘아~, 싫다, 정말. 왜 자꾸 부딪혀? 그리고 남의 일엔 왜 자꾸 나서는데!?’
이런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던 그녀는 방해꾼이 빨리 사라졌으면 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경하가 전혀 달갑지 않아 망설이던 그때, 경호원이 던진 말에 그녀는 결심했다.
*
“서 선생님! 잠시만 이쪽으로 나와주시죠! 확인할 게 있습니다.”
긴장감이 최고조로 달한 순간 경하의 딸꾹질이 뚝! 멈췄다.
경하 앞까지 온 경호원의 눈빛과 그의 눈빛이 공중에서 세게 부딪혔다.
할머니를 바라보던 부드러운 눈빛이 어느새 사라지고.
원래부터 이런 사람처럼 경하는 전사의 기(氣)를 뿜어내고 있었다.
비록 그의 속은 덜덜 떨지언정 겉모습은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아, 미치겠네. 무슨 방법 없나? 안 돼! 내가 물러서면 할머니는….’
불안함에 경하의 심장이 쿵쿵 요동쳤다.
범생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경호원을 저지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뒤쪽에 있던 작은 손이 그의 옷자락을 당겼다.
“……!”
당황한 경하가 살며시 작은 손을 밀어내며 앞에 선 적을 상대했다.
‘할머니! 가만히 좀 있어요. 그러다 들켜요!’
온 신경이 사나운 기세를 풍기는 적을 상대해도 부족할 텐데, 작은 손까지 신경 쓰려니 경하는 죽을 지경이었다.
“서 선생님! 거기 뒤에 뭔가 있는 거 다 압니다. 이리 나오시죠.”
“……!”
경하는 그의 말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긴장감에 바짝 마른 입을 힘겹게 축이던 순간, 작은 손이 또다시 그의 옷자락을 당겼다.
‘할머니, 제발……. 그냥 좀, 있어요.’
체격이 큰 경하가 뒤에 숨겨둔 할머니를 위해 그답지 않게 경호원과 기(氣) 싸움을 벌였다.
‘아니, 사람이 왜 이렇게 둔해!?’
뒤에 있던 또 다른 이가 그와 달리 답답함에 속 끓였으나 경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녈 지키겠다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할머니, 제발……. 제가 꼭 지켜드릴 테니까 조금만 참아요.’
몇 번이나 그의 옷을 당겨도 아무 반응 없는 둔탱이 때문에 할머니는 열불 터졌다.
참고, 또 참고.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할머니가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했다.
“경하 씨! 나,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뒤에서 들린 토라진 젊은 여자 목소리에 경하는 의아했다.
‘……어, 목소리가… 달라졌다?’
경하는 경호원과 함께 뒤돌아서다가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좀 전까지 그의 몸으로 숨기고 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곤 어디서 나타났는지 젊은 여자가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마법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단 말인가?
게다가 그녀는 경하를 언제 봤다고, 팔짱을 낀 채 새초롬한 눈으로 흘겨봤다.
그리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제껏 본적 없는 해사한 미소로 눈웃음을 날린다.
일순간 경하는 그녀 눈빛에 빨려들었다.
그때처럼!
“자기는 나, 안 보고 싶었어? 난, 많이 보고 싶었는데. 왜 자꾸 딴 델 봐! 자꾸 그러니까, 질투 나잖아.”
“……!”
그를 언제 봤다고, 천연덕스럽게 다가온 손이 그의 팔을 슬며시 잡았다.
그리곤 은근슬쩍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그녀가 그의 옷깃을 만지작대는데.
낯선 손길에 경하는 움찔했다.
그의 행동에도 옷깃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한동안 그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낸 그녀는 경호원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경호원과 눈이 마주치자 눈꼬리를 접어 올렸다.
“저… 죄송한데, 자리 좀, 피해 주실래요? 저희가 정말 오랜만에 만났거든요. 이 사람이 많이, 바빠서 말이죠.”
그녀의 애교 섞인 푸념에 경호원은 그도 모르게 웃었다.
그들을 멀뚱히 넋 놓고 보던 경호원은 문뜩 둘의 데이트를 방해한 것 같아 난처한 표정으로 얼른 뒤로 물러났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도 없이, 두 분의 시간을 방해했네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급히 뒤돌아선 경호원 얼굴이 빨개졌다.
‘와, TV에서 보던 연예인보다 훨씬 예쁘네. 쌩얼 같은데…. 둘이 참 잘 어울린다.’
뒤돌아가던 경호원은 자기 쪽으로 오던 경호원을 보고 멈추라며 손짓했다.
“이쪽은 안 봐도 돼. 내가 지금, 확인했으니까.”
“어, 그래?”
“그러니까 다른 층을 찾아봐.”
그의 말에 동료들이 다른 층으로 달려갔다.
한편 경호원이 사라진 뒤, 두 사람에겐 어색한 공기만 흘렀다.
경하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여전히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이봐요, 이봐!”
‘뭐야, 왜 이래? 괜히 미안해지게. 무슨 사람이 이렇게 간이 작아?’
그녀가 고마움을 표현하려 몇 번을 불러도 그는 아무 반응이 없다.
뭐에 홀린 건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있는 모양새가 영 이상했다.
아무리 사람이 놀랐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반응할 리가.
고민 끝에 바닥에 내려둔 흰색 배낭을 챙겨 든 그녀는 경하를 잠시 바라보다가 사라졌다.
경하는 병원에 오기 전에 봤던 배낭을 보곤 눈을 감아버렸다.
일순간 감은 눈 주변으로 핏줄이 도드라지더니, 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경하는 몹시도 기분이 상한 듯 입매를 비틀었다.
그녀가 얼마나 갔을까?
그녀는 채 몇 발짝 디디기 전에, 조금 전 이곳을 지나갔던 경호원이 다시 돌아오는 걸 봤다.
그녀의 미간이 찰나에 구겨졌다.
‘아, 왜 또!? 그냥 가면 의심할 텐데. 아, 진짜!’
다른 곳으로 가려던 그녀는 피할 곳이 없어 급히 경하가 있는 곳으로 다시 왔다.
그는 이제껏 그대로였다.
“미안해요! 잠시만 실례.”
근처로 오는 경호원을 본 그녀가 까치발을 들어 매달리듯 그의 목을 그러안았다.
경하는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이 향이었어. 라벤더 향!
은은한 향이 그의 코끝에 스며들자 소율과의 첫만남을 왜 아직도 잊지 못했는지 기억이 났다.
그는 이 향이 좋았던 거였다.
그 소녀에게서 나는 이 라벤더 향이.
가공하지 않은 자연의 향이 그렇게 좋아 가끔 그 일이 떠올랐을 터였다.
그녀가 경호원이 지나가는지 쳐다보느라, 그의 품에서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이 여잔 이소율이 아니다.’
경하는 소율을 처음 봤을 때, 그녀가 싫었다.
학생답지 않게 젊은 여성들이 뿌릴 법한 향기가 났으니.
물론 그 향이 은은하다곤 해도 좋은 인상일 리가 만무했다. 만약 그녀가 학생이 아니었다면, 무슨 향수를 쓰는지 묻고 싶었다.
그녀와 부딪힌 아주 짧은 순간이 그가 처음으로 향기에 취했던 때였다.
그러다 알았다.
향수 전문점에서도 그 향은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시중에 나온 향이 라벤더 향과 비슷한 건 있어도, 그녀의 그 향은 파는 것과 질적으로 달랐다.
커다란 손이 천천히 움직여 그녀를 떼어내려 했다.
그의 강한 손길에 여자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지도 못한 강한 힘에 그와 눈이 마주친 검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자… 잠시만요. 조금만 이렇게 있어요. 조금만…. 경호원이 지나갈 때까지만. 제발….”
나직이 부탁하던 그녀는 긴장감에 더 세게 그를 안았다.
그녀 말에 손에 힘을 푼 경하의 손이 뚝, 떨어졌다.
경호원이 지나감과 동시에 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던 팔을 풀려 했다.
하지만, 경하가 먼저 그녀를 밀어냈다.
“……!”
‘뭘 그렇게까지 밀어내? 내가 무슨 전염병 보균자도 아니고. 보기보다 성질 엄청 더럽네. 여자면 다 좋아하는 거 아냐? 변태가 언제부터 여자를 가렸어?’
당황한 그녀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음, 실례 많았어요. 그럼.”
급히 그곳을 빠져나오던 그녀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디가 불편한지 경하 손이 닿았던 팔을 문지르며 갔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경하는 반은 정신이 나간 상태로 그곳에 멀뚱히 서 있었다.
*
라라라 라라 ♫
전화벨 울리는 소리에 정신없던 경하가 볼멘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서 선생님! 안 오세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다급한 소리에 경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지금 갑니다.”
이제야 수술 스케줄이 생각난 경하는 급히 흉부외과로 뛰어갔다.
수술이 끝난 경하가 의국에 들어와 잠시 눈 감고 있다.
의자에 앉아 오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한 경하는 마른세수를 연거푸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밖으로 나갔다.
병원 최고 꼭대기에 있는 하늘 정원에 올라온 경하는 어두운 낯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병원 근처를 구석구석 눈으로 훑던 그는 다른 병동 꼭대기에 있는 구조헬기 착륙장에서 시선을 멈췄다.
“……하-! 내 마음이 그거였어? 내가 아리에게서 걔를….”
작가의 말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한 경하. 어긋한 두 사람을 응원해 주세요.
닫기가면 속의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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