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 아스퍼거 증후군
조회 : 1,992 추천 : 0 글자수 : 5,579 자 2022-10-13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꿈나무 어린이집.
"필승아, 엄마 오셨다."
"엄마?"
선생님이 필승을 안으며 혜린을 가리키자 필승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오늘 필승이가 가위바위보 대회에서 1등 했어요."
"와, 정말요? 우리 필승이 1등 했어?"
"나 가위바위보 잘한다."
"그래? 나중에 엄마랑도 해보자."
필승이 혜린의 품 안에서 가위바위보 하는 시늉을 하자 혜린은 아들을 내리며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선생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혜린이 선생님께 인사를 하자 필승도 허리를 90도로 굽혀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필승이, 잘 가요. 우리 내일 또 봐요. 안녕!"
선생님이 손을 흔들자 필승은 승용차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머니."
"네, 안녕히 계세요."
----------------------------------------------------
잠시 후 승용차 안.
"우리 아들, 오늘도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냈지?"
"나 가위바위보 잘한다."
"오늘 1등 했어?"
"......"
"오늘 점심은 뭐 먹었어?"
"차조밥, 달래된장국, 미트볼케찹조림, 김자반, 김치, 현미밥, 소고기미역국, 새우살콩나물찜, 멸치볶음 ,김치, 보리밥, 도토리묵국, 오리훈제, 양파부추무침, 깍두기..."
"우와, 맛있었어요?"
"현미찰밥, 돼지고기 김치찌개, 감자치즈구이, 명엽채볶음, 깍두기, 잡곡밥, 소고기무국, 낙지떡볶음, 콩나물무침, 배추김치..."
혜린은 아들이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필승이 아스퍼거 장애 진단을 받은 건 1년 전.
※ 아스퍼거 장애 (Asperger障礙) - (의학) 사회적 상호 작용을 하는 데 장애가 있어서 사회적ㆍ직업적 기능에 문제를 일으키는 병. 행동이나 관심 분야가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전반적 발달 장애.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유난히 단어 습득 능력이 좋아 처음에는 자신의 아들이 신동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이집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상담을 요청하면서 필승의 행동과 언어습관에 관해 말해주었는데 요점은 필승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혜린은 선생님에게 크게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며칠 후 큰 대학병원에서 MRI 검사 결과가 나오고 담당 의사가 최종적으로 진단을 내렸을 때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 부부는 며칠간의 긴 대화와 깊은 고민 끝에 서울을 떠나 조용한 곳으로 이사를 해서 아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해 주자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 시청 공무원이었던 용진은 같은 대학 선배 상사의 도움으로 울릉군청의 과장직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는데 직급으로 따지면 영전이다.
그들은 결국 서울을 떠나 울릉군으로 이사를 오게되는데 울릉도는 그들에게 특이한 사연과 추억이 있는 곳이다.
5년전 여름휴가철을 맞은 이들 부부는 울릉도로 크루즈 여행을 오게 되었는데 약 30분간 머무를 수 있는 독도에서 혜린에게 갑작스런 진통이 찾아왔었다.
당시 임신 28주차 였던 혜린은 그곳에서 조산을 하게 되었는데 독도 주민들의 도움으로 극적인 자연분만을 했다.
필승의 고향은 독도가 된 셈이다.
이러한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자 당시 지역 신문에 보도가 되는 등 한동안 큰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세 식구는 이사 온 첫날 다시 독도를 찾아 '이곳에서 태어난 아들이 앞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소망을 빌었고 혜린은 에메랄드빛 바다를 바라보며 이제 더이상 자식을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
울릉도의 유일한 어린이집인 '꿈나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필승은 원장님과 담당 선생님의 도움으로 현재까지 아무 탈 없이 어린이집 생활을 하고 있다.
혜린이 필승의 손을 잡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 순간 용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나 지금 엘리베이터 타. 좀 있다 할게."
그때 머리가 희끗한 노부부가 아파트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로 다가오자 필승은 열림 버튼을 꾹 누르면서 그들을 기다려줬다.
"어이구, 필승이 착하네. 필승이가 할머니, 할아버지 기다려 준 거야?"
할머니가 필승의 머리를 곱게 쓰다듬어 주자 그는 그제서야 7층 버튼을 눌렀다.
"이제부터 우리 집으로 높이 올라갑니다."
이들 노부부는 7층 옆 호에 사는 이웃이다.
그들은 필승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항상 그를 귀여워 해 주었는데 혜린은 그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7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필승은 다시 열림 버튼을 꾹 누르면서 노부부가 완전히 내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혜린이 딱 한 번 교육시킨 것을 필승은 한 번도 잊지 않고 주민들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배운 대로 행동하고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해야지."
"필승이, 나중에 또 보자."
노부부가 집으로 들어가자 혜린은 스마트폰의 통화 버튼 누르며 필승이가 현관 도어락 번호를 누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비밀번호는 네자리 숫자이지만 필승은 숫자들을 마구잡이로 마구 계속 누르다가 마지막에 네 개의 번호를 누르고 우물정(井)을 눌렀다.
앞에 누른 숫자는 차례대로 아빠의 전화번호와 엄마의 전화번호, 그리고 자신이 집까지 타고 온 SUV 차량 번호다.
----------------------------------------------------
그날 밤.
"안 돼. 필승이는 어떡해?"
"희정이 불러서 좀 봐달라고 하면 되잖아."
"또 부탁해?"
군청에서 이번 주 일요일에 부부 동반 성인봉 등반 일정이 잡혔다. 군수까지 참가한다니 도저히 빠질 수가 없다.
울진에 사는 여동생의 딸(조카)인 희정에게 아들을 좀 봐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다.
"괜찮아. 희정이도 여기 놀러 오는 거 좋아하잖아."
"고모가 추석 때 희정이한테 소리 지르는 거 안 봤어?"
얼마 전 추석을 맞아 시댁 식구들이 다 모였을 때 시누이는 시험이 며칠 안 남았다며 이제 중2인 희정을 다그치며 혼자 방에 가둬 공부를 시켰었다.
어른들이 추석 명절에 뭐 하는 짓이냐고 야단을 쳤지만 그녀의 교육열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이제 시험도 끝났을 거 아냐? 내가 말할 테니까 걱정 마."
"아 진짜, 나만 중간에서 눈치만 보이고..."
"뭐가 눈치 보여? 친척인데."
"난 몰라. 당신이 잘 말해."
"알았어."
----------------------------------------------------
그 주 일요일 오후.
희정은 사촌 동생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더 잘해주려고 애썼다.
친동생보다도 더 잘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결국 동정심이라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필승아. 우리 이제 티비 그만 보고 게임이나 할까?"
이제 외삼촌 내외가 돌아올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오늘은 하루종일 티비만 보다 가는 것 같아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든다.
"필승아, 너 무슨 게임 좋아해? 누나랑 보드게임 할까? 니 방에 있는 거 있잖아."
"난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응."
"아 정말? 그럼 누나랑 가위바위보 게임할까?"
"응."
"음. 그럼 지는 사람이 이긴 사람한테 간식 먹여주기. 어때? 재밌겠지?"
희정은 외숙모가 간식을 준비해 놓았다는 것을 깨닫고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안의 케익과 과일을 꺼내 왔다.
"지금부터 누나랑 가위바위보 해서..."
"......"
"진 사람이 이긴 사람한테 포크로 먹여주기. 오케이?"
"......"
"자, 한다. 안내면 지는 거. 가위바위보!"
[필승 - 가위, 희정 - 보]
"와, 필승이 이겼네. 누나가 케익 줄게. 자, '아' 해."
필승은 케익을 받아먹으며 박수를 두 번 쳤다.
"자, 그럼 한 번 더. 가위바위보!"
[필승 - 보, 희정 - 바위]
"어? 또 필승이 이겼네. 이번엔 누나가 딸기 줄게. 자, '아' 해."
필승은 딸기가 입안으로 들어오자 다시 박수를 쳤다.
"자, 다시 한번. 가위바위보!"
[필승 - 보, 희정 - 바위]
"와, 필승이 너무 잘하는데? 누나도 간식 먹고 싶은데. 어엉. 그래도 게임은 게임이니까. 자 '아'해."
필승은 두 번째 케익을 받아먹고 박수를 쳤다.
"자, 또 한다. 가위바위보!"
[필승 - 바위, 희정 -가위]
"와, 대박! 필승이 또 이겼네."
"나 가위바위보 1등 했다."
"1등? 언제?"
"어린이집에서 가위바위보 1등 했다."
"그래? 어쩐지 너무 잘하더라. 그럼 다시 한번...가위바위보!"
[필승 -가위, 희정 -보]
----------------------------------------------------
30분 후.
희정은 30분 동안 한 번도 못 이기자 스스로가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며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제 곧 외삼촌과 외숙모가 돌아올 시간이다.
그래도 몇 판은 이기고 가야 한다.
"필승이 배 안 불러? 이번에는 누나가 진짜 이길 거야. 자, 안내면 진다. 가위바위보!"
[필승 - 가위, 희정-보]
----------------------------------------------------
10분 후.
희정은 수십차례의 가위바위보에서 한번도 못 이기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심지어 비기지도 못한다.
어떻게 운이 없어도 이렇게까지 없을까.
이건 말이 안 된다.
그때 현관에서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와, 우리 아들. 누나랑 잘 놀았어?"
용진이 얼른 신발을 벗고 다가와 필승이를 두 팔로 번쩍 들어 올리자 혜린은 용진의 점퍼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희정아, 얼른 가자. 오늘은 숙모가 태워줄게. 배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어서 짐 챙겨."
용진은 필승이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입가에 잔뜩 묻어 있는 생크림을 꼼꼼히 닦았다
"희정아 오늘 고생했어. 삼촌이 나중에..."
"......"
"어? 왜 그래?"
"......"
"희정아,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필승아, 엄마 오셨다."
"엄마?"
선생님이 필승을 안으며 혜린을 가리키자 필승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오늘 필승이가 가위바위보 대회에서 1등 했어요."
"와, 정말요? 우리 필승이 1등 했어?"
"나 가위바위보 잘한다."
"그래? 나중에 엄마랑도 해보자."
필승이 혜린의 품 안에서 가위바위보 하는 시늉을 하자 혜린은 아들을 내리며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선생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혜린이 선생님께 인사를 하자 필승도 허리를 90도로 굽혀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필승이, 잘 가요. 우리 내일 또 봐요. 안녕!"
선생님이 손을 흔들자 필승은 승용차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머니."
"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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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승용차 안.
"우리 아들, 오늘도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냈지?"
"나 가위바위보 잘한다."
"오늘 1등 했어?"
"......"
"오늘 점심은 뭐 먹었어?"
"차조밥, 달래된장국, 미트볼케찹조림, 김자반, 김치, 현미밥, 소고기미역국, 새우살콩나물찜, 멸치볶음 ,김치, 보리밥, 도토리묵국, 오리훈제, 양파부추무침, 깍두기..."
"우와, 맛있었어요?"
"현미찰밥, 돼지고기 김치찌개, 감자치즈구이, 명엽채볶음, 깍두기, 잡곡밥, 소고기무국, 낙지떡볶음, 콩나물무침, 배추김치..."
혜린은 아들이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필승이 아스퍼거 장애 진단을 받은 건 1년 전.
※ 아스퍼거 장애 (Asperger障礙) - (의학) 사회적 상호 작용을 하는 데 장애가 있어서 사회적ㆍ직업적 기능에 문제를 일으키는 병. 행동이나 관심 분야가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전반적 발달 장애.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유난히 단어 습득 능력이 좋아 처음에는 자신의 아들이 신동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이집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상담을 요청하면서 필승의 행동과 언어습관에 관해 말해주었는데 요점은 필승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혜린은 선생님에게 크게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며칠 후 큰 대학병원에서 MRI 검사 결과가 나오고 담당 의사가 최종적으로 진단을 내렸을 때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 부부는 며칠간의 긴 대화와 깊은 고민 끝에 서울을 떠나 조용한 곳으로 이사를 해서 아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해 주자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 시청 공무원이었던 용진은 같은 대학 선배 상사의 도움으로 울릉군청의 과장직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는데 직급으로 따지면 영전이다.
그들은 결국 서울을 떠나 울릉군으로 이사를 오게되는데 울릉도는 그들에게 특이한 사연과 추억이 있는 곳이다.
5년전 여름휴가철을 맞은 이들 부부는 울릉도로 크루즈 여행을 오게 되었는데 약 30분간 머무를 수 있는 독도에서 혜린에게 갑작스런 진통이 찾아왔었다.
당시 임신 28주차 였던 혜린은 그곳에서 조산을 하게 되었는데 독도 주민들의 도움으로 극적인 자연분만을 했다.
필승의 고향은 독도가 된 셈이다.
이러한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자 당시 지역 신문에 보도가 되는 등 한동안 큰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세 식구는 이사 온 첫날 다시 독도를 찾아 '이곳에서 태어난 아들이 앞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소망을 빌었고 혜린은 에메랄드빛 바다를 바라보며 이제 더이상 자식을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
울릉도의 유일한 어린이집인 '꿈나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필승은 원장님과 담당 선생님의 도움으로 현재까지 아무 탈 없이 어린이집 생활을 하고 있다.
혜린이 필승의 손을 잡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 순간 용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나 지금 엘리베이터 타. 좀 있다 할게."
그때 머리가 희끗한 노부부가 아파트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로 다가오자 필승은 열림 버튼을 꾹 누르면서 그들을 기다려줬다.
"어이구, 필승이 착하네. 필승이가 할머니, 할아버지 기다려 준 거야?"
할머니가 필승의 머리를 곱게 쓰다듬어 주자 그는 그제서야 7층 버튼을 눌렀다.
"이제부터 우리 집으로 높이 올라갑니다."
이들 노부부는 7층 옆 호에 사는 이웃이다.
그들은 필승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항상 그를 귀여워 해 주었는데 혜린은 그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7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필승은 다시 열림 버튼을 꾹 누르면서 노부부가 완전히 내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혜린이 딱 한 번 교육시킨 것을 필승은 한 번도 잊지 않고 주민들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배운 대로 행동하고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해야지."
"필승이, 나중에 또 보자."
노부부가 집으로 들어가자 혜린은 스마트폰의 통화 버튼 누르며 필승이가 현관 도어락 번호를 누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비밀번호는 네자리 숫자이지만 필승은 숫자들을 마구잡이로 마구 계속 누르다가 마지막에 네 개의 번호를 누르고 우물정(井)을 눌렀다.
앞에 누른 숫자는 차례대로 아빠의 전화번호와 엄마의 전화번호, 그리고 자신이 집까지 타고 온 SUV 차량 번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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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안 돼. 필승이는 어떡해?"
"희정이 불러서 좀 봐달라고 하면 되잖아."
"또 부탁해?"
군청에서 이번 주 일요일에 부부 동반 성인봉 등반 일정이 잡혔다. 군수까지 참가한다니 도저히 빠질 수가 없다.
울진에 사는 여동생의 딸(조카)인 희정에게 아들을 좀 봐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다.
"괜찮아. 희정이도 여기 놀러 오는 거 좋아하잖아."
"고모가 추석 때 희정이한테 소리 지르는 거 안 봤어?"
얼마 전 추석을 맞아 시댁 식구들이 다 모였을 때 시누이는 시험이 며칠 안 남았다며 이제 중2인 희정을 다그치며 혼자 방에 가둬 공부를 시켰었다.
어른들이 추석 명절에 뭐 하는 짓이냐고 야단을 쳤지만 그녀의 교육열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이제 시험도 끝났을 거 아냐? 내가 말할 테니까 걱정 마."
"아 진짜, 나만 중간에서 눈치만 보이고..."
"뭐가 눈치 보여? 친척인데."
"난 몰라. 당신이 잘 말해."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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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 일요일 오후.
희정은 사촌 동생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더 잘해주려고 애썼다.
친동생보다도 더 잘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결국 동정심이라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필승아. 우리 이제 티비 그만 보고 게임이나 할까?"
이제 외삼촌 내외가 돌아올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오늘은 하루종일 티비만 보다 가는 것 같아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든다.
"필승아, 너 무슨 게임 좋아해? 누나랑 보드게임 할까? 니 방에 있는 거 있잖아."
"난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응."
"아 정말? 그럼 누나랑 가위바위보 게임할까?"
"응."
"음. 그럼 지는 사람이 이긴 사람한테 간식 먹여주기. 어때? 재밌겠지?"
희정은 외숙모가 간식을 준비해 놓았다는 것을 깨닫고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안의 케익과 과일을 꺼내 왔다.
"지금부터 누나랑 가위바위보 해서..."
"......"
"진 사람이 이긴 사람한테 포크로 먹여주기. 오케이?"
"......"
"자, 한다. 안내면 지는 거. 가위바위보!"
[필승 - 가위, 희정 - 보]
"와, 필승이 이겼네. 누나가 케익 줄게. 자, '아' 해."
필승은 케익을 받아먹으며 박수를 두 번 쳤다.
"자, 그럼 한 번 더. 가위바위보!"
[필승 - 보, 희정 - 바위]
"어? 또 필승이 이겼네. 이번엔 누나가 딸기 줄게. 자, '아' 해."
필승은 딸기가 입안으로 들어오자 다시 박수를 쳤다.
"자, 다시 한번. 가위바위보!"
[필승 - 보, 희정 - 바위]
"와, 필승이 너무 잘하는데? 누나도 간식 먹고 싶은데. 어엉. 그래도 게임은 게임이니까. 자 '아'해."
필승은 두 번째 케익을 받아먹고 박수를 쳤다.
"자, 또 한다. 가위바위보!"
[필승 - 바위, 희정 -가위]
"와, 대박! 필승이 또 이겼네."
"나 가위바위보 1등 했다."
"1등? 언제?"
"어린이집에서 가위바위보 1등 했다."
"그래? 어쩐지 너무 잘하더라. 그럼 다시 한번...가위바위보!"
[필승 -가위, 희정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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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후.
희정은 30분 동안 한 번도 못 이기자 스스로가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며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제 곧 외삼촌과 외숙모가 돌아올 시간이다.
그래도 몇 판은 이기고 가야 한다.
"필승이 배 안 불러? 이번에는 누나가 진짜 이길 거야. 자, 안내면 진다. 가위바위보!"
[필승 - 가위, 희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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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후.
희정은 수십차례의 가위바위보에서 한번도 못 이기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심지어 비기지도 못한다.
어떻게 운이 없어도 이렇게까지 없을까.
이건 말이 안 된다.
그때 현관에서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와, 우리 아들. 누나랑 잘 놀았어?"
용진이 얼른 신발을 벗고 다가와 필승이를 두 팔로 번쩍 들어 올리자 혜린은 용진의 점퍼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희정아, 얼른 가자. 오늘은 숙모가 태워줄게. 배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어서 짐 챙겨."
용진은 필승이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입가에 잔뜩 묻어 있는 생크림을 꼼꼼히 닦았다
"희정아 오늘 고생했어. 삼촌이 나중에..."
"......"
"어? 왜 그래?"
"......"
"희정아,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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