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조회 : 1,112 추천 : 1 글자수 : 5,803 자 2022-10-15
사방이 마물로 포위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런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손 엔 검. 한손 엔 방패.
내 뒤엔 듬직한 남자 동료가 있고.
내 옆엔 앙칼진 여자 동료들이 있다.
무엇이 두렵겠는가.
나는 나의 검을 들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으로 직접 마물을 도륙하며 포위망을 뚫는다!
“나를 따르라아아아아!!!”
***
“똬르으으으롸아아아아…음냐…음냐….”
“따르긴 뭘 따라!”
서류 뭉치가 얼굴을 친다.
꿈이었나….
너무 또렷한 꿈이었다.
“테일러! 이 자식아! 일어나서 이거 가져가 어서!”
테일러는 잠에서 완전히 깼다.
휴식 시간인데 휴게실까지 들어와 괴롭히는 파트장.
파트장은 테일러를 일으켜 세우더니 귓방망이를 한번 올려 붙인다.
짜악!! 짜악!! 쫘아아아악!!
아니 세 번 올려 붙인다.
언제나 있었던 일이지만 화가 난다.
언제나 있지만 사지가 떨리게 화가 난다.
테일러는 기회만 되면 저 자식을 죽이고 싶다.
그래서 그만.
“뒤에서 맨날 욕먹는 거 알아?” 라고 말할 뻔 했다.
하지만 테일러는 그 말을 삼키고 대답한다.
웃는 얼굴로.
“예! 갑니다! 가요!”
테일러는 꿈에서 와는 달리 검을 손에 쥐어 본 적도 없다.
테일러는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 모험가 길드에서 사무 보조일을 맡고 있다.
말이 좋아 사무 보조지 온갖 허드랫 일을 다 하고 있다.
파트장집 화장실 청소부터 파트장 이삿짐 나르기, 파트장 빨래 등등 안 하는 게 없다.
물론 다른 높으신 분들이 떠넘기는 일은 덤이다.
“테일러? 요즘 영 굼떠지고 마음에 안 들어?”
시비 거는 꼴을 보아하니 또 여자 접수원들에게 찝쩍거리다가 잘 안됐나 보다.
“아…예….”
뭔가 한마디 해주려고 하다가 그냥 입을 닫고 말았다.
모험가 길드는 조합장, 파트장, 사무장, 접수원 순으로 직급이 있는데,
테일러 본인은 거기에 속하지 않는 사무 보조라는 사실상 노예 신분이다.
진짜 노예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려 해보지만.
‘내가 노예랑 차이점이 뭐지?’
테일러는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차이를 알 수 없다.
“아? 예? 대답이야? 뭐야?”
시비를 더 걸어대는 파트장의 말을 등지고 문을 세게 닫고 나가버렸다.
쾅!!!
“저! 저저! 저러니까! 안 되는 거야! 응? 안 그래?”
다른 사람들에게 동조를 구하는 멍청한 목소리.
문을 뚫고 나오는 더러운 목소리에 치가 떨린다.
일은 더럽게 안하는 파트장은 일어서는 것도 하기 싫은지 따라 나오지도 않는다.
테일러는 왁자지껄한 모험가 길드 접수실로 들어섰다.
활기찬 표정의 모험가들이 가득하다.
“여어! 테일러! 나 좋은 의뢰 좀 줘~! 부탁한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마주치는 직원은 테일러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모험가들은 테일러에게 호의적이다.
“자~ 자~ 모험가 여러분들! 좋은 의뢰는 많아요~ 모여봐요!”
모험가들이 삼삼오오 동료끼리 몇마디 교환한 후 모여들었다.
그들은 테일러가 펼쳐 놓은 의뢰서들을 붙잡고 서로 의논하기 시작했다.
“테일러! 어느 의뢰가 쉬워? 힌트 좀 줘~! 저번에 추천 받은 거 아주 편하고 쉬웠어!”
테일러의 주머니에 은화를 찔러 넣으며 익숙한 모험가가 수작을 건다.
“어허! 안됩니다! 이러시면 안 되요!”
모험가에게 은화를 한사코 돌려주려 기를 쓴다.
그런 수작들말고도 여러가지 필요로 테일러를 잡으려한다.
“아이고 본인은 말단 사무보조입니다. 접수원들을 통해주세요!!”
테일러의 소매를 붙잡는 모험가들을 뚫고 겨우겨우 나왔다.
하지만 완고하고 굵은 손가락이 뻗어나와 그를 잡는다.
드워프 영감님이다.
이 근방에서 보기드문 이종족이다.
“테일러 우리 파티에 결원이 생겼다. 파티매칭북을 부탁한다.”
테일러는 이 드워프 영감을 참 좋아했다.
그는 진중했고 늘 테일러를 진심으로 존중해 주었다.
“아이고! 여깄습니다! 이미 추천인도 뽑아 뒀습니다. 여길 보시죠.”
드워프 영감이 표시가 된 페이지까지 넘긴다.
뭔가 성에 안차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다.
“시시해! 시시해!”
파티 매칭북은 함께 다닐 동료를 구할때 정보를 얻는 책이다.
파티 매칭북에는 보통 성인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전사의 프로필이 나와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거대한 투핸드 소드.
누가봐도 번듯해 보였고 경력도 화려했다.
테일러는 물었다.
“어르신, 이 자가 성에 안 차십니까?”
추천을 했는데 받지 않으면 어딘가 찝찝하다.
“저번에 한번 봤는데 눈빛이 시시한 자라 뽑기 싫다.”
테일러는 턱을 쓰다듬었다.
조금 아리송한 표현이다.
눈빛이라니.
“눈빛이요? 눈빛 같은 걸로 사람을 어떻게 알아요?”
테일러는 화려해 보이는 경력을 다시 한번 살펴본다.
화려한 경력들이 눈을 어지럽힌다.
테일러에게 드워프 영감이 질문을 던진다.
“그거 알고 있나?”
“뭐를 요?”
“겉보기에 번듯해 보여도 시시한 자와 함께라면 목숨이 위험해진다네.”
테일러는 모험가 길드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모험을 떠나본적은 없다.
따라서 그 말의 진의를 결코 알 수 없었다.
테일러는 일하느라 지저분해진 자신을 옷을 바라보았다.
‘나는 얼마나 시시한 사람이지?’
울컥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테일러는 따지는 듯이 물었다.
“저 같이 시시한 사람은 평생 시시합니까?”
드워프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책상을 쿵! 쿵! 치며 말했다.
“아니! 절대!”
“그럼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시시하지 않게 삽니까?”
드워프는 허공에 손을 들어 흔들었다.
넘실넘실대는 그의 팔과 손을 테일러는 홀린듯이 바라보았다.
“파도를 넘어야지.”
“파도요?”
드워프는 수염을 한번 천천히 쓰다듬고는 이어 말했다.
“아무리 시시한 자라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파도를 타게 된다면 영웅이 되는 법이지.”
테일러가 반문했다.
“파도가 너무 크면 어떻게 해요?”
“죽으면 되는 것이다.”
“예?”
테일러는 술주정인가? 하고 드워프의 얼굴과 손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취기가 없었고 드워프 특제 맥주도 없었다.
“그런 걱정부터 하는 녀석은 파도를 타다 죽게 되니 걱정하지 말게.”
졸지에 죽으면 되는 놈이 된 테일러가 화를 냈다.
“아 그럼 나는 죽는다는 말이잖아요!!”
“상상과 현실은 다르네.”
드워프의 얼굴은 언제부턴가 인자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보게 될 수도 있으니 미리 걱정하지 말게.”
드워프는 수염을 다시 천천히 쓰다듬었다.
“파도를 어떻게든 넘었는데 여전히 시시하면 어쩌죠?”
여전히 걱정만 많은 죽을 놈. 테일러는 또 다른 걱정을 보태본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큰 파도는 사람을 바꿔 놓는다.”
드워프는 수염을 더듬다가 갑자기 다른 생각이 난듯 밖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아! 중요한 손님이 오는데 이거 참!”
테일러는 그가 떠난자리에서 잠시 서있었다.
알 수 없는 여운이 남는 대화였다.
테일러는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져 드워프 영감님을 따라나갔다.
드워프 영감님은 짧은 다리로 얼마나 열심히 뛰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테일러는 무심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파트장이 방해한 자신의 쉬는 시간을 마저 누리고 싶었다.
테일러가 잠시 그렇게 걸었다.
“아이….아이고오….”
테일러가 고통에 찬 소리가 들리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그 소리를 따라갔다.
“히이이익!”
그는 떨어질 뻔 했다.
평소에 못 봤던 절벽이 있었다.
“스님 살려! 스님! 심성이 고운 스님이 매달려 있어요!!”
이색적인 구조신호에 테일러는 절벽 아래를 살펴 보았다.
“아니! 스님! 어쩌다 거기 걸려 있습니까?”
스님은 절벽 바위끝에 옷이 걸려서 겨우 매달려 있었다.
그가 위치한 곳이 제법 아래쪽으로 내려가있기에 섣불리 구조할 수 없었다.
“스님 제가 줄을 가져 오겠습니다!”
스님은 화를 냈다.
“야이! 멍청한 녀석아! 지금 떨어져 죽게 생겼는데 무슨 줄이냐!”
멍청한 녀석이된 테일러는 화를 내려다가 스님의 급박함을 이해하기로 했다.
테일러가 물었다.
“지금 구하려다가 저도 죽을거 같은데 어찌합니까?”
“죽으면 되는 것이다.”
“예?”
테일러는 왠지 들어본거 같은 말에 황당했다.
“죽으면 된다니요! 그게 할 소리 입니까?”
“너 이 녀석! 요즘 화가 많지?”
테일러는 그 말을 들으니 그런거 같았다.
오늘 파트장일만 해도 엄청나게 화가 났다.
돌아가면 크게 싸울지도 모른다.
“나를 구해주면 화낼일이 적게 해주마! 너는 보통이 아닌 녀석이야!”
무슨 말인가?
“보답을 꼭 해주마! 너의 것을 너에게 돌려주마! 약속하마!”
무엇을 준다는 것인가?
‘지금은 생각보다 스님을 구하는게 우선이다.”
테일러는 생각을 멈추고 목숨을 걸기로 했다.
그가 절벽을 기어 내려간다.
굵은 모레가 미끌어지며 그의 명줄을 위협했다.
그럼에도 테일러는 팔과 다리를 긁히며 그의 몸을 끌어 붙였다.
팔이 쓸리고 옷이 찢어지며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그래! 너 이녀석! 너는 대단한 녀석이다!”
스님의 응원인지 아부인지 외침에 왠지 기운이 난다.
테일러는 스님이 있는곳에 도착하고 그를 끌어 당겼다.
“끄으으으응으응차!!!!”
죽을 힘을 다해 스님을 끌어 올린다.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은 온몸이 흐물거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린다.’
이빨이 터질것 같이 깨물었다.
테일러는 그렇게 스님을 절벽위로 올렸다.
겨우겨우 스님을 절벽위로 끌어올리고 자신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이름이 뭐라고?”
갑작스런 질문.
테일러가 대답했다.
“테일러요.”
스님은 손뼉을 치며 손의 먼지를 털어냈다.
“보답을 해주마. 화날 일이 적게 해주겠다.”
스님은 자신의 옷을 단정히 했다.
“너의 것을 너에게 주겠다.”
절벽을 기어 올라가던 테일러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떻게 내 것을 나에게 줍니까?”
“죽으면 되는 것이다.”
“예?”
스님이 냅다 테일러에게 발길질 했다.
“으아아아아아!!!!!”
테일러는 낭떨어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리는 스님의 목소리
“요즘 꿈이 또렸하지? 그거 꿈 아냐! 전생이야!”
테일러는 그 목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
떨어지며 귓가를 스치는 엄청난 바람소리.
그런 바람소리를 뚫고 들어오는 스님의 목소리.
테일러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정신차리고 너를 다시 찾아라!”
테일러의 머리속에 새로운 기억들이 떠올랐다.
스님이 다시 물었다.
“다시 너의 이름이 뭐지?”
“나는 드레이크!”
테일러는 자신의 전생이름을 외쳤다.
전생의 기억들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드레이크.
그는 칼잡이였다.
인간 백정이었다.
검사. 전사. 장군이었다.
피를 뿌리던 수 많은 기억들이 그의 몸 곳곳으로 퍼진다.
그의 발이 절로 움직여 발길질 한다.
쾅!
허공을 차는데 폭발음이 난다.
그 순간 그의 몸이 회전했다.
한번 더 그가 발길질을 하자 절벽쪽으로 몸이 붙는다.
손가락 끝에 집중하고 절벽에 찔러넣었다.
쿠과과가과과광!!!
“내 이름은 테일러 그리고 드레이크! 다시는 시시하게 살지 않겠다!!”
절벽위에 스님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그리고 질문했다.
“살아 올라가면 가장 하고 싶은게 뭔가?”
그 말을 들으며 손가락 끝을 더욱 절벽 안으로 찔러 넣었다.
콰각!
쿠과과과광!!!
이젠 팔이 거의 전부 들어갔다.
그가 천천히 절벽에 멈추기 시작했다.
“뭐가 하고 싶냐고? 파트장 새끼 귓방망이 후리는 거지!”
테일러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마치 악귀같은 안광이 쏟아져 나온다.
스님은 무슨 소린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이내 천천히 끄덕였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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