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내 앞에는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몸매가 드러나는 까만 민소매 원피스, 그리고 새침하고 도도해 보이는 얼굴.
실제로 본 사람 중에서 제일 예뻤다. 이걸 실제로 봤다고 하는 게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들뜨는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아무렇지 않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오랜만이네. 회장님은 잘 지내시지?”
“여전하네, 오빠는. 재미없게.”
다행히 잘 넘어갔다. 비슷한 대사가 떠올라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여긴 웬일이야? 우리 오빠도 없는데.”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누구? 아, 뭐 뻔하지. 오빠 머릿속엔 일밖에 없으니까.”
김민혁이 그런 캐릭터이긴 하다. 부와 성공, 그리고 머릿속에 그것 말고는 없는 인물.
“맞아. 일 때문이야.”
하지만 김민혁은 그 부와 성공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채 결국 파멸하게 된다.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가 있거든.”
그리고 그 파멸로 이끄는 단초가 이 여자다.
“난 그런 거 잘 모르니까 말도 꺼내지 마. 머리 아파.”
금세 흥미를 잃어버린 듯 차가워진 표정. 그런데도 예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했다. 여배우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한지우.”
그런 이름이었다. 시청률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떠오르는 샛별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인 여배우의 이름은.
“응? 누구?”
그리고 한지우의 얼굴을 한, 민서연은 그러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 보였다.
그래, 예상했던 일이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확인해야 했다.
그녀가 여배우 한지우가 아니라, 대성그룹 막내딸 민서연인게 맞는지.
내가 있는 이곳이 드라마 <1%의 세상> 속이 맞는지. 그리고
“나 먼저 가봐도 될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여자를 막아서야 하는 게 맞는지.
*
드라마 <1%의 세상>.
스토리 자체는 매우 흔했다.
가난하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과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는 재벌 2세 남자 주인공, 그들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사랑으로 이겨나가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이 스토리에 온갖 조미료가 투입되었다.
불륜, 복수, 살인, 출생의 비밀, 기억 상실, 재벌가의 갑질….
온갖 자극적인 소재들이 연달아 빠르게 전개되면서 휘몰아쳤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수요일, 목요일마다 시청률을 갱신했다는 소식과 충격적인 반전, 배우들의 열연에 관한 기사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시청자들은 매운맛을 넘어서 마라맛이라고 열광했다.
“저게 그렇게 재밌어요?”
단골집 아주머니가 공기밥을 가져오다 말고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미안해 총각.”
그제야 내 앞에 공기밥을 놓였다.
TV 화면에서는 자동차가 요란하게 폭발하고 있었다.
진짜 재밌나 보네. 좀 신기했다. 평소에는 여기 아주머니한테서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저거나 한번 봐볼까?
그렇게 정주행을 하기 시작했다.
1화는 기대했던 것만큼 재밌진 않았다. 여주인공에게 온갖 역경과 고난이 이어졌다. 가업이었던 호빵 공장이 망하고, 집에는 가압류 딱지가 붙어서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아버지는 한강에서 뚜껑을 열지 않은 소주병만 남기고 실종된다. 집에서 기르던 개마저 사라져버린다. 청순하고 예쁜 여주인공은 내내 울고, 또 운다.
그러다가 2화에 그녀가 등장한다.
대성그룹 막내딸 민서연.
신인 여배우 한지우.
내가 봤을 땐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유명 여배우보다도 훨씬 더 예뻤다. 다소 아담하고 순둥순둥한 인상의 여주인공에 비해서, 살짝 차가우면서도 이목구비의 조화가 완벽한, 그런 인형 같은 얼굴이었다. 또 길쭉길쭉하면서 몸매도 좋았다.
결국 <1%의 세상>을 중간에 하차하지 않고 보게 된 이유는 한지우 때문이었다. 보면서 막 설렘이 느껴졌으니까.
그러면서 점점 민서연의 이야기에도 빠져들게 되었다.
늘 원하던 것은 손에 넣어왔던, 철없는 재벌가 막내딸이 본인이 원하는 남자를 손에 넣지 못하자 여주인공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악역들의 꼬득임에 넘어가서 결국 선을 넘으면서 서로 파국으로 치닫는다.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마지막 회에서 죄를 뉘우치고 수녀원으로 들어가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죽인 귀신들한테 고통받고 결국 사망 처리된다.
주위에 바른 길로 인도해줄 사람이 있었다면, 그녀의 운명은 아마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의 세상> 속에서는 그런 캐릭터 자체가 매우 드물다. 심지어 나중에는 여주인공마저 독해져버리니까.
하지만 그렇게 드물고 드문 선역이 내가 빙의한 김민혁 근처에 있었다.
갸름한 턱선 위로 똑 떨어지는 단발머리, 깔끔하게 다림질된 흰 블라우스와 베이지색 정장 바지. 단화를 신었음에도 여자치곤 꽤 키가 커보였다. 비율이 좋아서 그런가.
그리고 오른쪽 눈 밑에 점 하나.
세화 그룹 유일의 여성 팀장, 신예지였다.
“신 팀장님, 저랑 일 하나만 합시다.”
“네? 갑자기 무슨...”
“피차 손해는 되지 않을 겁니다. 난 믿을 수 있는 내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내 정치라면 저보다 다른데서 찾아보시는게...”
“아니요. 대성그룹.”
신예지의 눈빛 순간 날카로워졌다가 이내 다시 가면이 덧씌워졌다.
“대성그룹이라니 모두지 저는...”
“저를 도와주신다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 가면은 내 앞에선 소용없다. 나는 신예지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까.
마지막 화가 되기 직전에서야 밝혀지는 비밀.
신예지는 민서연의 죽은 친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