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겸 1화
조회 : 1,297 추천 : 1 글자수 : 4,612 자 2022-07-12
머릿속이 어지럽다. 속이 메스껍다. 온몸의 균형조차 잡을 수 없다. 독한 술을 연거푸 퍼부은 것마냥 비틀거린다. 차츰 정신이 몽롱해진다.
[실...경... 임무... 차원... 부탁.....]
문득 머릿속에 말들이 드문드문 스쳐 지나간다.
'나는 무엇을 하려고 여기, 아니 그것보다 대체 여기는 어디...?'
온몸이 계속 나른해진다. 나는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끝없이 흘러갈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메세지창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메인 서버 '지구'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 접속이 거부되었습니다.
- 고유 스킬 '동화'가 활성화되었습니다.
- 메인 서버 '지구'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 접속을 성공하였습니다.
- 기존 사용자 '여우영'님의 정보를 로드합니다.
- 145027시간 만에 다시 '지구'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흐릿하던 시야가 갑자기 선명해진다. 메세지창에 떠오른 글귀들을 몽롱한 머리에 억지로 때려 넣었다.
'지구?'
'다시...?'
'여...우영..?'
몇 번이고 계속 확인해 보았지만 한글로 또박또박 쓰인 글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른하던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몽롱하던 정신도 점차 또렷해졌다.
'돌아온 거야! 드디어!'
생각이 났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지.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얼마나 울었을까, 짜디짠 눈물에 갑작스레 빛이 번진다. 저 멀리 아득하게 거대한 빛의 구멍이 보였다.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든다. 문득 크게 고함을 내지르고 싶어져 냅다 외쳐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빛이 소리까지 잡아 먹어버린 것일까, 이윽고 그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는지 나 역시 단숨에 꿀꺽 잡아먹혀 버리고 말았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공간은 적막하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악-----!!!!"
산새들만 간혹 지저귀던 조용한 산자락에 별안간 요란한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데없이 나타난 고함소리는 검은 형체와 함께 공중에서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윽!"
땅에 떨어지면서 가볍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지 검은 형체는 신음을 흘렸다. 비틀대며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다시 쓰러지기를 수 차례, 결국 포기했는지 털썩 드러누워 버렸다. 방금 전까지는 느끼지 못 했던 시원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차원을 넘은 후유증이 남은 걸까.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네...'
"상태창."
나지막한 목소리 뒤로 그의 눈앞에 네모난 창이 떠올랐다.
- 성명 : 여우영, ?(업데이트 필요)
- 서버 : 지구
- 칭호 : E급 헌터, ?(업데이트 필요)
- 레벨 : 1(업데이트 필요)
- 근력 : 20(업데이트 필요)
- 체력 : 20(업데이트 필요)
- 순발력 : 20(업데이트 필요)
- 정신력 : 20(업데이트 필요)
- 마력 : 20(업데이트 필요)
- 고유 스킬 : 동화
'응? 이게 뭐야?'
어쩐지 상태창이 이상하다. 우영은 너무도 초라해진 자신의 상태창을 몇 번이나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업데이트는 또 뭐야.'
우영은 지금까지의 일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차원을 넘어오던 중 '지구'로 로그인했다는 메세지와 이윽고 자신을 집어삼킨 거대한 빛, 그리고 지금 자신의 어깨를 찌르고 있는 통증까지. 이 모든 것은 현실임이 분명했다.
'정말로 돌아온 거야!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으로, 가족들이 기다리는 세상으로, 이족보행하는 소 돼지들이나 날개 달린 사자 따위는 없는 평화로운 세계...응?'
갑자기 멀리서 익숙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지겹도록 들었던 이족보행 돼지들의 뀌익-거리는 소리 말이다. 우영은 본능적으로 다급히 몸을 굴려 수풀 속으로 숨어 들었다. 온몸이 아직도 비명을 질렀지만 오랜 시간 다져진 습관이 고통을 억눌렀다.
'아니 여기 진짜 지구가 맞나? 던전도 아닌데 밖에 왜 저 돼지 새X들이 있는 거지?'
상태창을 다시 확인해 보았지만 지구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내 우영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내었다. 예상이 맞다면 얼른 빨리 몸을 회복해야 했다. 이렇게 몸만 숨긴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기 때문에. 두 발 돼지 주제에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아선... 아니나 다를까, 우영이 숨어 있는 곳으로 뀌익-뀌익-소리가 점점 더 크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한다... 평소 같았으면 오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몸이 정상이 아닌데...'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현재 우영의 스탯은 E급 헌터에 불과한 상태였다. 오크 두 어 마리면 모를까 오크 무리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추락의 후유증으로 부상까지 입은 지금으로선 달아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치겠네. 진짜.. 아무리 봐도 오크 순찰대 같은데 그럼 최소 다섯 놈 이상 일테고... 기습을 하려 해도 워낙 개 코 놈들이라 쉽지 않고...'
우영은 입술을 질겅였다. 생각에 몰두할 때면 으레 나오는 버릇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좋지 못 했다.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 때쯤 오크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칼 든 놈 둘에 창 둘, 활이 하나인가...그나마 숲에 떨어져서 다행이었네. 그렇게 쉽게 나를 찾지는 못 할 테니...'
점차 놈들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오크들은 코를 벌름거리며 인근의 수풀을 헤치고 있었다. 근처에 자신들이 찾아 헤매던 먹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리라. 차츰 가까워지는 우영과 오크들의 거리. 우영은 각오를 굳혔다.
호흡을 멈추고 꺼내두었던 검을 강하게 말아쥐었다. 세 걸음, 두 걸음, 한 걸음. 오크 무리 중 한 놈이 우영이 숨어 있던 수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뀌익-거리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부터 떨어져 몸을 무겁게 짓누른다. 오크는 수풀을 헤치며 다가오기 시작했고, 우영은 풀잎들이 오크의 눈을 가린 틈을 놓치지 않았다.
"뀌- 커 컥!"
짧은 순간이었다. 오크 한 마리의 생명이 꺼진 것은. 우영은 오크의 목을 꿰뚫은 검을 재빨리 뽑아내고는 조금 떨어진 채 다가오던 활을 든 오크를 향해 내달렸다.
근처의 수풀을 수색하던 다른 오크들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우영의 뒤를 쫓아보았지만, 이미 우영은 활을 든 오크의 지척에 다다른 상태였다. 오크가 당황하며 허둥지둥 시위에 화살을 거는 순간 우영의 검이 시위를 잘라버리고는 그대로 오크의 목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끄르륵"
오크는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피거품을 물며 무너져 내렸다. 단숨에 오크의 목숨을 거둔 우영은 그대로 달려 옆의 수풀로 다시 숨어 들었다.
그런 우영을 경계했는지 남은 오크들은 섣불리 수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뀌익거리며 갈팡질팡 했다. 덕분에 우영은 숨을 고를 시간을 얻을 수 있었고 말이다.
'남은 놈들은 셋, 칼 하나 창 둘. 운 좋게 궁수까지 처리하긴 했는데 이젠 어떡한...윽!'
그 순간 갑자기 왼쪽 어깨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우영을 덮쳤다. 이를 악물었다. 하마터면 신음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추락 때 입은 부상이 방금의 검격으로 더 악화된 것일까.
'제기랄. 이젠 나이 들어서 뼈도 잘 안 붙는데 말이지...'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는지 한결 가벼운 얼굴로 투덜대던 우영은 파스락거리며 수풀을 헤치는 소리에 표정을 굳혔다.
소리가 꽤 요란스러운 걸로 미루어봐선 아무래도 세 마리가 같이 무리 지어 오는 모양이다. 도망을 치자니 후각이 예민한 녀석들이라 뿌리치기도 쉽지 않았고, 차라리 체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해치우는 게 좋을 터다.
"뀌익- 뀍- 뀍뀍-."
"뀍뀌익-."
다가오던 오크들이 갑자기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창을 이곳저곳 찔러보기 시작했다. 냄새로 위치는 특정했고 기습을 당하지 않기 위해 나름 머리를 쓴 것 같았다. 현재의 우영에겐 치명적인 한 수였다.
'하....X 됐네. 저러면 답이 없는데.'
기습의 이점을 살려 두 마리를 처리하긴 했지만 셋을 정면으로 맞닥뜨린다면 가망이 없었다. 그만큼 우영의 상태는 좋지 못 했다. 더구나 왼쪽 어깨를 쿡쿡 쑤셔대는 통증은 덤이다.
차츰 오크들이 찔러대는 창이 가까워진다. 등 안쪽으로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 내리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우영이 숨어 있는 바로 앞으로 창이 무성의하게 찔러 들어왔고, 그는 눈을 부릅뜨고 창을 지켜본 채 숨을 멈추었다. 그리곤 자신의 앞에 내찔러진 창이 회수되는 순간에 맞추어 우영은 오크들에게 달려들었다.
"뀍-! 뀌익!!"
예상대로 칼을 든 오크가 옆에서 호위를 서고 있었다.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는지 우영이 나타나자마자 칼을 휘둘렀다.
깡-!
우영은 거칠게 내려쳐 오는 칼을 옆으로 빗겨 쳐 내고는 검을 비틀어잡고 오크의 목을 향해 찌르려 했다. 하지만 이내 다급히 옆으로 몸을 굴렸다.
쐐액-!
좀 전까지 우영이 서 있던 공간에 창이 찔러 들어온다. 연이어 다른 창과 칼이 우영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스탯 제한에 걸린 몸뚱어리가 야속하기만 했다. 물 밖으로 꺼내어진 물고기처럼 숨쉬기조차 버거운 느낌이다. 겨우겨우 창칼을 피하고 쳐 내며 버티고는 있지만 이제 거의 한계가 온 것 같았다.
'하하하...이젠 정말 끝인가. 씨X.. 어떻게 돌아왔는데..! 이대로 죽을 순.. 없는데...'
눈앞이 핑그르르 돈다. 시야가 혼탁해지고 어쩐지 점점 바닥이 가까워진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턱 끝을 따라 떨어지는 땀방울, 심장을 노리고 쏘아지는 창 끝의 푸르스름함, 너무나 뜨거워진 공기, 눈앞에 떠오른 작은 태양.
콰-앙!!
거센 폭발음이 몰아친다. 갑자기 몰아닥친 불이 오크들을 덮쳤다. 불은 오크들을 직격했지만, 그 충격으로 주저앉아 있던 우영 또한 뒤로 퉁겨져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잠시 후 쓰러져 있는 우영의 머리 위로 한 그림자가 비쳤다.
"현승아! 돼지 새X들 마무리하고 가영이 넌 빨리 이리로 와봐."
"응? 왜 그래?"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혼미해져가는 우영의 귓가에 점점이 메아리쳤다.
"아니...여기 왜 사람이 있어?"
"나도 모르지 그건. 아무튼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니까 얼른 치료부터 좀 해줘."
"네에, 알겠습니다요."
잠시 후 작은 빛무리가 우영의 몸을 감쌌다. 어쩐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아니면 빛이 너무 따스한 탓일까. 우영은 점점 눈이 감겨 왔다. 모든 것이 꿈처럼 여겨졌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시 또 늘 반복되는 그곳에서의 일상이겠지...'
우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처음 그곳을 방문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실...경... 임무... 차원... 부탁.....]
문득 머릿속에 말들이 드문드문 스쳐 지나간다.
'나는 무엇을 하려고 여기, 아니 그것보다 대체 여기는 어디...?'
온몸이 계속 나른해진다. 나는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끝없이 흘러갈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메세지창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메인 서버 '지구'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 접속이 거부되었습니다.
- 고유 스킬 '동화'가 활성화되었습니다.
- 메인 서버 '지구'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 접속을 성공하였습니다.
- 기존 사용자 '여우영'님의 정보를 로드합니다.
- 145027시간 만에 다시 '지구'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흐릿하던 시야가 갑자기 선명해진다. 메세지창에 떠오른 글귀들을 몽롱한 머리에 억지로 때려 넣었다.
'지구?'
'다시...?'
'여...우영..?'
몇 번이고 계속 확인해 보았지만 한글로 또박또박 쓰인 글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른하던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몽롱하던 정신도 점차 또렷해졌다.
'돌아온 거야! 드디어!'
생각이 났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지.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얼마나 울었을까, 짜디짠 눈물에 갑작스레 빛이 번진다. 저 멀리 아득하게 거대한 빛의 구멍이 보였다.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든다. 문득 크게 고함을 내지르고 싶어져 냅다 외쳐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빛이 소리까지 잡아 먹어버린 것일까, 이윽고 그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는지 나 역시 단숨에 꿀꺽 잡아먹혀 버리고 말았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공간은 적막하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악-----!!!!"
산새들만 간혹 지저귀던 조용한 산자락에 별안간 요란한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데없이 나타난 고함소리는 검은 형체와 함께 공중에서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윽!"
땅에 떨어지면서 가볍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지 검은 형체는 신음을 흘렸다. 비틀대며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다시 쓰러지기를 수 차례, 결국 포기했는지 털썩 드러누워 버렸다. 방금 전까지는 느끼지 못 했던 시원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차원을 넘은 후유증이 남은 걸까.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네...'
"상태창."
나지막한 목소리 뒤로 그의 눈앞에 네모난 창이 떠올랐다.
- 성명 : 여우영, ?(업데이트 필요)
- 서버 : 지구
- 칭호 : E급 헌터, ?(업데이트 필요)
- 레벨 : 1(업데이트 필요)
- 근력 : 20(업데이트 필요)
- 체력 : 20(업데이트 필요)
- 순발력 : 20(업데이트 필요)
- 정신력 : 20(업데이트 필요)
- 마력 : 20(업데이트 필요)
- 고유 스킬 : 동화
'응? 이게 뭐야?'
어쩐지 상태창이 이상하다. 우영은 너무도 초라해진 자신의 상태창을 몇 번이나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업데이트는 또 뭐야.'
우영은 지금까지의 일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차원을 넘어오던 중 '지구'로 로그인했다는 메세지와 이윽고 자신을 집어삼킨 거대한 빛, 그리고 지금 자신의 어깨를 찌르고 있는 통증까지. 이 모든 것은 현실임이 분명했다.
'정말로 돌아온 거야!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으로, 가족들이 기다리는 세상으로, 이족보행하는 소 돼지들이나 날개 달린 사자 따위는 없는 평화로운 세계...응?'
갑자기 멀리서 익숙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지겹도록 들었던 이족보행 돼지들의 뀌익-거리는 소리 말이다. 우영은 본능적으로 다급히 몸을 굴려 수풀 속으로 숨어 들었다. 온몸이 아직도 비명을 질렀지만 오랜 시간 다져진 습관이 고통을 억눌렀다.
'아니 여기 진짜 지구가 맞나? 던전도 아닌데 밖에 왜 저 돼지 새X들이 있는 거지?'
상태창을 다시 확인해 보았지만 지구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내 우영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내었다. 예상이 맞다면 얼른 빨리 몸을 회복해야 했다. 이렇게 몸만 숨긴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기 때문에. 두 발 돼지 주제에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아선... 아니나 다를까, 우영이 숨어 있는 곳으로 뀌익-뀌익-소리가 점점 더 크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한다... 평소 같았으면 오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몸이 정상이 아닌데...'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현재 우영의 스탯은 E급 헌터에 불과한 상태였다. 오크 두 어 마리면 모를까 오크 무리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추락의 후유증으로 부상까지 입은 지금으로선 달아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치겠네. 진짜.. 아무리 봐도 오크 순찰대 같은데 그럼 최소 다섯 놈 이상 일테고... 기습을 하려 해도 워낙 개 코 놈들이라 쉽지 않고...'
우영은 입술을 질겅였다. 생각에 몰두할 때면 으레 나오는 버릇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좋지 못 했다.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 때쯤 오크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칼 든 놈 둘에 창 둘, 활이 하나인가...그나마 숲에 떨어져서 다행이었네. 그렇게 쉽게 나를 찾지는 못 할 테니...'
점차 놈들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오크들은 코를 벌름거리며 인근의 수풀을 헤치고 있었다. 근처에 자신들이 찾아 헤매던 먹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리라. 차츰 가까워지는 우영과 오크들의 거리. 우영은 각오를 굳혔다.
호흡을 멈추고 꺼내두었던 검을 강하게 말아쥐었다. 세 걸음, 두 걸음, 한 걸음. 오크 무리 중 한 놈이 우영이 숨어 있던 수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뀌익-거리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부터 떨어져 몸을 무겁게 짓누른다. 오크는 수풀을 헤치며 다가오기 시작했고, 우영은 풀잎들이 오크의 눈을 가린 틈을 놓치지 않았다.
"뀌- 커 컥!"
짧은 순간이었다. 오크 한 마리의 생명이 꺼진 것은. 우영은 오크의 목을 꿰뚫은 검을 재빨리 뽑아내고는 조금 떨어진 채 다가오던 활을 든 오크를 향해 내달렸다.
근처의 수풀을 수색하던 다른 오크들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우영의 뒤를 쫓아보았지만, 이미 우영은 활을 든 오크의 지척에 다다른 상태였다. 오크가 당황하며 허둥지둥 시위에 화살을 거는 순간 우영의 검이 시위를 잘라버리고는 그대로 오크의 목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끄르륵"
오크는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피거품을 물며 무너져 내렸다. 단숨에 오크의 목숨을 거둔 우영은 그대로 달려 옆의 수풀로 다시 숨어 들었다.
그런 우영을 경계했는지 남은 오크들은 섣불리 수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뀌익거리며 갈팡질팡 했다. 덕분에 우영은 숨을 고를 시간을 얻을 수 있었고 말이다.
'남은 놈들은 셋, 칼 하나 창 둘. 운 좋게 궁수까지 처리하긴 했는데 이젠 어떡한...윽!'
그 순간 갑자기 왼쪽 어깨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우영을 덮쳤다. 이를 악물었다. 하마터면 신음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추락 때 입은 부상이 방금의 검격으로 더 악화된 것일까.
'제기랄. 이젠 나이 들어서 뼈도 잘 안 붙는데 말이지...'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는지 한결 가벼운 얼굴로 투덜대던 우영은 파스락거리며 수풀을 헤치는 소리에 표정을 굳혔다.
소리가 꽤 요란스러운 걸로 미루어봐선 아무래도 세 마리가 같이 무리 지어 오는 모양이다. 도망을 치자니 후각이 예민한 녀석들이라 뿌리치기도 쉽지 않았고, 차라리 체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해치우는 게 좋을 터다.
"뀌익- 뀍- 뀍뀍-."
"뀍뀌익-."
다가오던 오크들이 갑자기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창을 이곳저곳 찔러보기 시작했다. 냄새로 위치는 특정했고 기습을 당하지 않기 위해 나름 머리를 쓴 것 같았다. 현재의 우영에겐 치명적인 한 수였다.
'하....X 됐네. 저러면 답이 없는데.'
기습의 이점을 살려 두 마리를 처리하긴 했지만 셋을 정면으로 맞닥뜨린다면 가망이 없었다. 그만큼 우영의 상태는 좋지 못 했다. 더구나 왼쪽 어깨를 쿡쿡 쑤셔대는 통증은 덤이다.
차츰 오크들이 찔러대는 창이 가까워진다. 등 안쪽으로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 내리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우영이 숨어 있는 바로 앞으로 창이 무성의하게 찔러 들어왔고, 그는 눈을 부릅뜨고 창을 지켜본 채 숨을 멈추었다. 그리곤 자신의 앞에 내찔러진 창이 회수되는 순간에 맞추어 우영은 오크들에게 달려들었다.
"뀍-! 뀌익!!"
예상대로 칼을 든 오크가 옆에서 호위를 서고 있었다.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는지 우영이 나타나자마자 칼을 휘둘렀다.
깡-!
우영은 거칠게 내려쳐 오는 칼을 옆으로 빗겨 쳐 내고는 검을 비틀어잡고 오크의 목을 향해 찌르려 했다. 하지만 이내 다급히 옆으로 몸을 굴렸다.
쐐액-!
좀 전까지 우영이 서 있던 공간에 창이 찔러 들어온다. 연이어 다른 창과 칼이 우영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스탯 제한에 걸린 몸뚱어리가 야속하기만 했다. 물 밖으로 꺼내어진 물고기처럼 숨쉬기조차 버거운 느낌이다. 겨우겨우 창칼을 피하고 쳐 내며 버티고는 있지만 이제 거의 한계가 온 것 같았다.
'하하하...이젠 정말 끝인가. 씨X.. 어떻게 돌아왔는데..! 이대로 죽을 순.. 없는데...'
눈앞이 핑그르르 돈다. 시야가 혼탁해지고 어쩐지 점점 바닥이 가까워진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턱 끝을 따라 떨어지는 땀방울, 심장을 노리고 쏘아지는 창 끝의 푸르스름함, 너무나 뜨거워진 공기, 눈앞에 떠오른 작은 태양.
콰-앙!!
거센 폭발음이 몰아친다. 갑자기 몰아닥친 불이 오크들을 덮쳤다. 불은 오크들을 직격했지만, 그 충격으로 주저앉아 있던 우영 또한 뒤로 퉁겨져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잠시 후 쓰러져 있는 우영의 머리 위로 한 그림자가 비쳤다.
"현승아! 돼지 새X들 마무리하고 가영이 넌 빨리 이리로 와봐."
"응? 왜 그래?"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혼미해져가는 우영의 귓가에 점점이 메아리쳤다.
"아니...여기 왜 사람이 있어?"
"나도 모르지 그건. 아무튼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니까 얼른 치료부터 좀 해줘."
"네에, 알겠습니다요."
잠시 후 작은 빛무리가 우영의 몸을 감쌌다. 어쩐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아니면 빛이 너무 따스한 탓일까. 우영은 점점 눈이 감겨 왔다. 모든 것이 꿈처럼 여겨졌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시 또 늘 반복되는 그곳에서의 일상이겠지...'
우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처음 그곳을 방문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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