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조회 : 1,220 추천 : 1 글자수 : 4,600 자 2022-07-12
'흔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들처럼. 평범했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난 잡초들처럼.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2025년, 헌터로 각성한 그 순간조차.'
“네, 여..우영님. E급이시네요.”
미소를 띄우며 사무원 아가씨가 우영에게 몇 장의 종이를 건넸다. 조심스레 받아든 종이의 첫 장 한편에 크게 인쇄된 E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떨떠름했다. 최악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혹시나 했던 기대감이 무너져내렸다. 꿈은 클수록 좋다지 않은가. TV에 나오는 유명한 이들처럼 자신도 S급 판정이 나오는 건 아닐까 하고 정말 살짝 아주 살짝 기대해봤었건만. 현실은 역시나 냉정했다.
“하아...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저쪽 창구로 가시면 헌터 카드 수령받으실 수 있으세요.”
"아 그리고 아까 설명 들으셨겠지만 고유 스킬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스스로 발현하는 것이라 아직은 우영님의 스킬을 알 수 없다는 것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러니까 E급이라 하더라도 스킬만 잘 나온다면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니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자신의 실망한 표정이 그렇게 티가 났던 걸까. 친절한 사무원의 이야기에 우영은 멋쩍은 미소를 지어주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E급 헌터가 어디냐. 이정도만 해도 보조금도 나올 거고 먹고 살만은 할테니까.’
소박하지만 찬란한 자신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우영은 카드 발급 창구를 찾았다. 수령한 헌터 카드엔 확인 사살하는 것마냥 E급이란 글자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 옆에 있는 '여우영'이라는 이름도 같이.
이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도 너무하시지. 우영이 뭔가 우영이가. 아니 이름은 괜찮다. 성이랑 붙여놨을 때가 문제지. 문득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냐고 투정부리는 자신의 말에 삐치셨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 옆에서 배를 잡고 깔깔거리시던 어머니도.
'잘들 지내시려나...'
문득 창밖을 보니 곧 비가 내릴 것처럼 날이 흐렸다. 잠깐 추억에 빠져들 뻔 했지만 잠시 더 지체했다간 옷이 다 젖을 것 같았기에 우영은 허겁지겁 등록소를 빠져나왔다. 아니나다를까 버스를 타자마자 시원하게 비가 쏟아져 내린다. 내심 또 틀린 일기예보를 욕하며 손에 쥔 헌터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딱딱했다. 음각된 우둘투둘한 카드의 글자를 어루만지며 마음을 다잡아본다.
'일단 집에 가면 헌터 구인 사이트에 지원부터 해야겠다. 우선 F급 던전으로 가서 경험을 쌓는게 좋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했다. 차츰 긴장이 풀린 탓인가 어쩐지 졸음이 쏟아졌다. 우영은 스르륵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버스는 묵묵히 빗길을 미끄러지듯 달렸다.
"이봐요 학생. 학생?"
누군가 우영의 몸을 흔든다.
"학생 일어나봐. 이제 종점이여."
종점이란 말에 눈이 확 떠졌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이미 사방은 어둑했고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다. 인상 가득한 아저씨도 한분 보인다.
"학생. 이제 청소해야 하니까 얼른 내려."
"아.. 기사님 혹시 버스 다 끊겼나요? 안 되는데..."
"아이구...지금 시간이 몇 신데 있겠어? 그냥 택시타고 가."
버스기사는 퉁명스레 말하곤 좌석들을 정리했고, 청소 아주머니도 들어와서 걸레질을 시작했다. 그 요란스러움과 눈치에 떠밀려 우영은 조용히 버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밤하늘은 속도 없이 맑다.
"아~망했네. 여기서 집까지 언제 걸어가..."
괜히 지갑을 꺼내본다.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계좌가 텅 빈 체크카드 한 장. 현금은 당연히 천원 짜리 몇 장뿐. 월급날까지 버스비로 써야 하기에 건들 수가 없었다.
"하씨....결국 집까지 뚜벅이로 걸어가야겠네.. 죽겠다 진짜."
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왜 잠이 들었을까. 우영은 계속 자책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자. 걸으면서 앞으로 계획도 확실히 세워보고 말이야. 근데 과연 내 스킬은 뭘까? 검술이나 마력 같이 전투에 도움이 되는 스킬이면 좋겠는데...'
등급은 이미 틀렸지만 스킬만 잘 뽑는다면 아직 가능성이 있다. 사무원 아가씨의 조언을 상기하며 다시 희망고문의 굴레에 빠져드는 우영이었다.
'월세와 식비 따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장밋빛 미래, 방 3개 화장실 2개가 딸린 42평형 넓은 아파트를 가진다는 빅 드림..!'
"나는 할 수 있드아아아악--!!!"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다 우영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 우영의 포효에 돌아오는 것은
"아 이런! 어떤 씨앙 놈이 한밤중에 소리 지르고 난리야!"
"술 취했으면 조용히 집에 들어가 이 닦고 발 닦고 잠이나 자! 새꺄!!!"
동네 주민들의 성난 원성 뿐이었다. 묘하게 친절한 사람도 하나 있는 것 같았지만. 혹시나 눈에 띌까 우영은 마침 보이는 외진 골목길 안쪽으로 잽싸게 숨었다. 조용히 숨 죽인 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거리는 적막하다. 그제야 우영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돌아나왔다.
"에휴, 진짜 오늘 왜 이러냐. 어째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어?"
골목길을 빠져 나오던 중 문득 눈앞에 아주 선명한 보랏빛으로 물든 구체가 보였다. 그것은 아주 동그랬다. 그 어느 누가 봐도 이것은 완벽한 원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 구체는 우영의 시선을 한순간에 앗아갔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보랏빛의 완벽한 구체. 우영은 저도 모르게 구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순간.
"어? 어어어어----?!"
구체를 향해 뻗은 손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몸 안의 뼈 따윈 녹아 없어져 버린 듯 연체동물 마냥 있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 일렁거림은 점차 몸 전체로 퍼져갔고, 그와 동시에 우영의 몸도 보랏빛으로 덮였다. 서서히 구체와 하나가 되기 시작한 우영은 흐려져가는 시야 속에 떠오른 메세지 창들을 미처 볼 수 없었다.
- 메인 서버 '아판타시아'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 접속이 거부되었습니다.
- 고유 스킬 '동화'를 활성화합니다.
- 메인 서버 '아판타시아'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 접속을 성공하였습니다.
- 신규 사용자입니다. 이름과 지역을 설정해주십시오.
- 사용자의 의사가 인식되지 않습니다.
- 랜덤으로 지역을 설정합니다.
-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 상상하지 못 하는 세계, 아판타시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으아악!"
좁은 네모난 방안에 외마디 비명이 가득찼다. 하지만 이내 시끄러운 비명소리는 어딘가로 떠나버리고 삑삑거리는 기계음과 누군가의 거친 호흡 소리만 남았다. 이윽고 갈라지고 탁해 목이 쉰 듯한 목소리도 흘러 나온다.
"헉...허억..대체...여기는..어디지? 분명 오크들한테 쫓기다 죽는 꿈을 꿨었는데.."
차츰 거친 호흡 소리가 진정되어 갈 무렵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쇳소리와 함께 간호사 복장의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이제 정신 차리셨네요. 몸은 좀 어떠신가요. 어지럽거나 메스껍고 그러진 않으신가요?"
뭔가 많이 급하다. 상대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건만 그녀는 손에 든 차트를 보면서 재차 질문을 이어갔다.
"그리고 음..성함이 여..우영님 맞으신가요?"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우영은 고개를 끄덕하며 말했다.
"그래. 맞도다. 내가 대공의 제 1기사 실버... 아니 잠깐 뭐라고? 여..여우영?!"
잠시 어쩐지 안타까운 눈으로 우영을 바라보던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맞아요. 여우영님. 06년생 울산 출신, 아버님 존함은 여동철님, 어머님 존함이 김영숙님이시구요. 외동 맞으시죠?"
멍하니 그녀의 말을 듣던 우영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렇다...아니 맞습니다. 내..제가 여우영입니다. 대체 여기는 어디냐? 정말로 지구가 맞는 건가!?"
"음..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질 듯한데 우선 잠시만 쉬고 계시겠어요? 담당자분을 모셔 오겠습니다. 그편이 아무래도 훨씬 상세하게 아실 수 있으실 거에요."
그녀의 말에 우영은 속이 탔지만 일단 알겠다고 말하곤, 담당자를 기다리면서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그때 오크랑 싸우다 죽을 뻔했던 것이 꿈이 아니었던건가? 정말 차원을 넘어 지구로 돌아온 게 맞는 거였어?'
우영은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 서버 : 지구
확실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오랜 시간 그토록 찾아 헤맸던 고향. 결국엔 지쳐 포기하고 현실에 순응해야만 했었는데 이렇게 돌아오게 될 줄이야. 우영의 눈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이젠 떠오르지도 않는 부모님의 얼굴. 애써 기억을 되살려 그려보려 했지만 텅빈 얼굴을 보며 쓴웃음 짓던 게 몇 번인가.
"아빠...엄마를 이젠 정말...정말로 볼 수 있는 건가.."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리고는 다시금 철컥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우영을 향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헌터협회 수사과 반장 김남인이라고 합니다. 여우영님 맞으십니까?"
악수를 청한 손을 맞잡으며 우영이 물었다.
"네 제가 여우영입니다. 지금 정신이 없어서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잠시 우영을 빤히 바라보던 김남인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저희도 묻고 싶은게 많지만 우선 우영씨의 궁금증을 풀어드리는게 순서인 것 같군요. 이곳은 지금 서기 2041년 대한민국 서울입니다. 그리고 우영씨는 16년 넘게 실종된 상태였었습니다."
"그렇군요.. 16년이나 지났습니까..?"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기에 우영은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런 우영의 담담한 모습이 퍽 의뭉스러웠는지 김남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어쩐지 알고 계셨다는 느낌이군요. 제가 궁금한 것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우영씨는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셨는지입니다. 그 당시 시대에서는 이렇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는 없으니까요. 우영씨 말고도 실종된 사람이 전세계적으로 백 명이 넘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아니 당신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
우영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도 정말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 난 나 외에 지구 사람들을 본 적이 없는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그리고 그것보다 내가 여기에 넘어온 진짜 목적을 말할 수는 없잖아..?!'
아직 이들에게 모든 것을 밝힐 순 없다. 최소한 현 시대와 상황에 따른 정보를 파악해둔 뒤라면 모를까. 자신의 뒤에는 너무도 거대한 세력이 있었기에 앞뒤 없이 행동했다가는 모든 것을 그르칠 수 있었다. 자신을 쏘아보듯 쳐다보는 김남인의 시선을 애써 회피하며 우영은 생각했다.
'아 진짜 이걸 어떻게 말하냐고..! 내가 지구로 온 게 사실은 지구정복을 하러온 거라는걸!!'
“네, 여..우영님. E급이시네요.”
미소를 띄우며 사무원 아가씨가 우영에게 몇 장의 종이를 건넸다. 조심스레 받아든 종이의 첫 장 한편에 크게 인쇄된 E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떨떠름했다. 최악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혹시나 했던 기대감이 무너져내렸다. 꿈은 클수록 좋다지 않은가. TV에 나오는 유명한 이들처럼 자신도 S급 판정이 나오는 건 아닐까 하고 정말 살짝 아주 살짝 기대해봤었건만. 현실은 역시나 냉정했다.
“하아...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저쪽 창구로 가시면 헌터 카드 수령받으실 수 있으세요.”
"아 그리고 아까 설명 들으셨겠지만 고유 스킬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스스로 발현하는 것이라 아직은 우영님의 스킬을 알 수 없다는 것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러니까 E급이라 하더라도 스킬만 잘 나온다면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니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자신의 실망한 표정이 그렇게 티가 났던 걸까. 친절한 사무원의 이야기에 우영은 멋쩍은 미소를 지어주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E급 헌터가 어디냐. 이정도만 해도 보조금도 나올 거고 먹고 살만은 할테니까.’
소박하지만 찬란한 자신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우영은 카드 발급 창구를 찾았다. 수령한 헌터 카드엔 확인 사살하는 것마냥 E급이란 글자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 옆에 있는 '여우영'이라는 이름도 같이.
이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도 너무하시지. 우영이 뭔가 우영이가. 아니 이름은 괜찮다. 성이랑 붙여놨을 때가 문제지. 문득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냐고 투정부리는 자신의 말에 삐치셨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 옆에서 배를 잡고 깔깔거리시던 어머니도.
'잘들 지내시려나...'
문득 창밖을 보니 곧 비가 내릴 것처럼 날이 흐렸다. 잠깐 추억에 빠져들 뻔 했지만 잠시 더 지체했다간 옷이 다 젖을 것 같았기에 우영은 허겁지겁 등록소를 빠져나왔다. 아니나다를까 버스를 타자마자 시원하게 비가 쏟아져 내린다. 내심 또 틀린 일기예보를 욕하며 손에 쥔 헌터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딱딱했다. 음각된 우둘투둘한 카드의 글자를 어루만지며 마음을 다잡아본다.
'일단 집에 가면 헌터 구인 사이트에 지원부터 해야겠다. 우선 F급 던전으로 가서 경험을 쌓는게 좋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했다. 차츰 긴장이 풀린 탓인가 어쩐지 졸음이 쏟아졌다. 우영은 스르륵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버스는 묵묵히 빗길을 미끄러지듯 달렸다.
"이봐요 학생. 학생?"
누군가 우영의 몸을 흔든다.
"학생 일어나봐. 이제 종점이여."
종점이란 말에 눈이 확 떠졌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이미 사방은 어둑했고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다. 인상 가득한 아저씨도 한분 보인다.
"학생. 이제 청소해야 하니까 얼른 내려."
"아.. 기사님 혹시 버스 다 끊겼나요? 안 되는데..."
"아이구...지금 시간이 몇 신데 있겠어? 그냥 택시타고 가."
버스기사는 퉁명스레 말하곤 좌석들을 정리했고, 청소 아주머니도 들어와서 걸레질을 시작했다. 그 요란스러움과 눈치에 떠밀려 우영은 조용히 버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밤하늘은 속도 없이 맑다.
"아~망했네. 여기서 집까지 언제 걸어가..."
괜히 지갑을 꺼내본다.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계좌가 텅 빈 체크카드 한 장. 현금은 당연히 천원 짜리 몇 장뿐. 월급날까지 버스비로 써야 하기에 건들 수가 없었다.
"하씨....결국 집까지 뚜벅이로 걸어가야겠네.. 죽겠다 진짜."
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왜 잠이 들었을까. 우영은 계속 자책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자. 걸으면서 앞으로 계획도 확실히 세워보고 말이야. 근데 과연 내 스킬은 뭘까? 검술이나 마력 같이 전투에 도움이 되는 스킬이면 좋겠는데...'
등급은 이미 틀렸지만 스킬만 잘 뽑는다면 아직 가능성이 있다. 사무원 아가씨의 조언을 상기하며 다시 희망고문의 굴레에 빠져드는 우영이었다.
'월세와 식비 따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장밋빛 미래, 방 3개 화장실 2개가 딸린 42평형 넓은 아파트를 가진다는 빅 드림..!'
"나는 할 수 있드아아아악--!!!"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다 우영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 우영의 포효에 돌아오는 것은
"아 이런! 어떤 씨앙 놈이 한밤중에 소리 지르고 난리야!"
"술 취했으면 조용히 집에 들어가 이 닦고 발 닦고 잠이나 자! 새꺄!!!"
동네 주민들의 성난 원성 뿐이었다. 묘하게 친절한 사람도 하나 있는 것 같았지만. 혹시나 눈에 띌까 우영은 마침 보이는 외진 골목길 안쪽으로 잽싸게 숨었다. 조용히 숨 죽인 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거리는 적막하다. 그제야 우영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돌아나왔다.
"에휴, 진짜 오늘 왜 이러냐. 어째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어?"
골목길을 빠져 나오던 중 문득 눈앞에 아주 선명한 보랏빛으로 물든 구체가 보였다. 그것은 아주 동그랬다. 그 어느 누가 봐도 이것은 완벽한 원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 구체는 우영의 시선을 한순간에 앗아갔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보랏빛의 완벽한 구체. 우영은 저도 모르게 구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순간.
"어? 어어어어----?!"
구체를 향해 뻗은 손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몸 안의 뼈 따윈 녹아 없어져 버린 듯 연체동물 마냥 있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 일렁거림은 점차 몸 전체로 퍼져갔고, 그와 동시에 우영의 몸도 보랏빛으로 덮였다. 서서히 구체와 하나가 되기 시작한 우영은 흐려져가는 시야 속에 떠오른 메세지 창들을 미처 볼 수 없었다.
- 메인 서버 '아판타시아'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 접속이 거부되었습니다.
- 고유 스킬 '동화'를 활성화합니다.
- 메인 서버 '아판타시아'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 접속을 성공하였습니다.
- 신규 사용자입니다. 이름과 지역을 설정해주십시오.
- 사용자의 의사가 인식되지 않습니다.
- 랜덤으로 지역을 설정합니다.
-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 상상하지 못 하는 세계, 아판타시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으아악!"
좁은 네모난 방안에 외마디 비명이 가득찼다. 하지만 이내 시끄러운 비명소리는 어딘가로 떠나버리고 삑삑거리는 기계음과 누군가의 거친 호흡 소리만 남았다. 이윽고 갈라지고 탁해 목이 쉰 듯한 목소리도 흘러 나온다.
"헉...허억..대체...여기는..어디지? 분명 오크들한테 쫓기다 죽는 꿈을 꿨었는데.."
차츰 거친 호흡 소리가 진정되어 갈 무렵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쇳소리와 함께 간호사 복장의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이제 정신 차리셨네요. 몸은 좀 어떠신가요. 어지럽거나 메스껍고 그러진 않으신가요?"
뭔가 많이 급하다. 상대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건만 그녀는 손에 든 차트를 보면서 재차 질문을 이어갔다.
"그리고 음..성함이 여..우영님 맞으신가요?"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우영은 고개를 끄덕하며 말했다.
"그래. 맞도다. 내가 대공의 제 1기사 실버... 아니 잠깐 뭐라고? 여..여우영?!"
잠시 어쩐지 안타까운 눈으로 우영을 바라보던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맞아요. 여우영님. 06년생 울산 출신, 아버님 존함은 여동철님, 어머님 존함이 김영숙님이시구요. 외동 맞으시죠?"
멍하니 그녀의 말을 듣던 우영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렇다...아니 맞습니다. 내..제가 여우영입니다. 대체 여기는 어디냐? 정말로 지구가 맞는 건가!?"
"음..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질 듯한데 우선 잠시만 쉬고 계시겠어요? 담당자분을 모셔 오겠습니다. 그편이 아무래도 훨씬 상세하게 아실 수 있으실 거에요."
그녀의 말에 우영은 속이 탔지만 일단 알겠다고 말하곤, 담당자를 기다리면서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그때 오크랑 싸우다 죽을 뻔했던 것이 꿈이 아니었던건가? 정말 차원을 넘어 지구로 돌아온 게 맞는 거였어?'
우영은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 서버 : 지구
확실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오랜 시간 그토록 찾아 헤맸던 고향. 결국엔 지쳐 포기하고 현실에 순응해야만 했었는데 이렇게 돌아오게 될 줄이야. 우영의 눈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이젠 떠오르지도 않는 부모님의 얼굴. 애써 기억을 되살려 그려보려 했지만 텅빈 얼굴을 보며 쓴웃음 짓던 게 몇 번인가.
"아빠...엄마를 이젠 정말...정말로 볼 수 있는 건가.."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리고는 다시금 철컥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우영을 향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헌터협회 수사과 반장 김남인이라고 합니다. 여우영님 맞으십니까?"
악수를 청한 손을 맞잡으며 우영이 물었다.
"네 제가 여우영입니다. 지금 정신이 없어서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잠시 우영을 빤히 바라보던 김남인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저희도 묻고 싶은게 많지만 우선 우영씨의 궁금증을 풀어드리는게 순서인 것 같군요. 이곳은 지금 서기 2041년 대한민국 서울입니다. 그리고 우영씨는 16년 넘게 실종된 상태였었습니다."
"그렇군요.. 16년이나 지났습니까..?"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기에 우영은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런 우영의 담담한 모습이 퍽 의뭉스러웠는지 김남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어쩐지 알고 계셨다는 느낌이군요. 제가 궁금한 것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우영씨는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셨는지입니다. 그 당시 시대에서는 이렇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는 없으니까요. 우영씨 말고도 실종된 사람이 전세계적으로 백 명이 넘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아니 당신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
우영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도 정말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 난 나 외에 지구 사람들을 본 적이 없는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그리고 그것보다 내가 여기에 넘어온 진짜 목적을 말할 수는 없잖아..?!'
아직 이들에게 모든 것을 밝힐 순 없다. 최소한 현 시대와 상황에 따른 정보를 파악해둔 뒤라면 모를까. 자신의 뒤에는 너무도 거대한 세력이 있었기에 앞뒤 없이 행동했다가는 모든 것을 그르칠 수 있었다. 자신을 쏘아보듯 쳐다보는 김남인의 시선을 애써 회피하며 우영은 생각했다.
'아 진짜 이걸 어떻게 말하냐고..! 내가 지구로 온 게 사실은 지구정복을 하러온 거라는걸!!'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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