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조회 : 740 추천 : 0 글자수 : 4,666 자 2022-07-13
"경에게 부탁이 있네."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린다. 목소리를 조심스레 따라가 본다. 그 목소리의 끝에는 밝게 웃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훤칠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목례하며 예를 표하는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도 알다시피 휘께서 천명하셨네. 이차원...흠 그래. 다른 세계로 진출하고 싶어 하시지. 그러나 귀쟁이 놈들과 도마뱀 녀석들이 손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게 여간 귀찮지가 않아. 때문에 당장 다른 세계로 대규모 병력을 파병할 순 없는 실정이지. 어차피 그곳의 정보도 필요하고, 그렇기에 우선은 능력이 출중한 사람을 보내어 정찰을 부탁하려 하네. 그대라면 내 말뜻을 이해하겠지?"
그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더없이 공손한 몸짓이었지만 어쩐지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다.
"저 말고 다른 녀석들로 부탁드립니다. 대공전하."
일국의 왕과 다름없는 이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 그럼에도 대공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이미 익숙해진 탓일까.
"어허, 경도 알지 않나. 내가 믿고 맡길만한 사람이 경 밖에 없다는 것을."
"아, 정말. 베네딕트 경이나 안델슨 경도 있지 않습니까. 왜 하필 맨날 접니까. 왜요?"
문밖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두 사람의 언쟁을 들으며 생각했다. 또 시작이라고.
"그들은 뼛속부터 기사들이라 다양한 상황에 유연히 대처하지 못해. 다른 세계에서 어떤 일들이 생길 줄 모르니 임기응변에 능한 경이 가는 것이 아무래도 좋지 않겠는가."
"아 걔들이 애들도 아니고 이제 알아서 어련히 잘하겠지요. 저 이제 좀 쉬면 안 되겠습니까? 제발 대공전하."
계속 이어지는 치열한 공방. 하지만 결국 늘 그랬듯 대공의 승리였다. 대공은 시무룩해져 있는 기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경 덕분에 내 마음이 아주 든든하다네. 대신 이번 임무만 끝마치고 오면 정말 한동안 푹 쉬게 해줄테니 걱정 말게. 그리고 두둑한 포상금도 내려줄 테고 말이야. 내 아카이 가문의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아..저..저..전하으...!"
기사는 눈시울을 붉히며 대공의 손을 마주 잡았다. 대공은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문밖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생각했다. 또 당했다고.
잠시 회상에 잠긴 우영을 미심쩍은 듯 바라보던 김남인은 다시금 우영의 이름을 부르며 채근했다.
"여우영씨. 괜찮으십니까? 혹시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있습니까?"
김남인의 말에 우영을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아...네. 제가 사실 기억이 분명하지 않아서 계속 어쩐지 멍합니다."
"기...억이요?"
우영은 김남인이 한층 더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내디딘 걸음. 더욱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네 맞아요. 기억이 안 납니다.. 제가 그 이상한 구체에 빨려 들어간 이후부터 기억이 나질 않아요."
"구체요? 무슨 구체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무슨 말을 하고 있냐는 듯 쳐다보는 김남인의 시선에 우영은 조금의 진실을 풀어주었다.
"아마 보랏빛의 구체였을 텐데.. 못 보셨나요? 제가 그걸 만지고 그..정신을 잃어서..
우영의 말을 들은 김남인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태블릿을 꺼내들며 어떤 사진을 보여주었다.
"우영씨. 저희는 구체를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영씨가 실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구 곳곳에 이런 기둥들이 나타났습니다. 혹시 이런 것은 보신 적 없습니까?"
김남인이 보여준 사진에는 작은 건물 만한 기둥이 찍혀 있었다. 표면에는 각각 다양한 그림과 문자로 추정되는 것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아판타시아 문자인데..? 이게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생각에 잠겨있던 우영은 자신을 계속 지켜보는 김남인의 시선을 느꼈다.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김남인에게 태블릿을 돌려주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기둥은 못 봤던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흠..아닙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다음 일정이 있어 먼저 좀 일어나보겠습니다. 우선 안정을 취하시고 기억이 돌아온다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그리고 구체에 관련된 사항은 차후 다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남인은 명함을 꺼내어 우영에게 건네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의외로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지 않자 우영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조리 잘 하시고, 사회 복지 담당자를 불러드리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 헌터 협회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응? 네? 제가 협회를요? 아니 저기요?!"
김남인은 다음 주에 협회에서 보자는 의미심장한 말만 남기고 재빨리 나가버렸고, 우영의 머릿속은 괜히 복잡해지고 말았다.
김남인이 병실의 문을 닫고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던 부하직원 전찬성이 다가왔다. 16년 만에 귀환한 최초의 실종자가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100명이 넘게 실종되었음에도 지금껏 어느 누구도 찾아내지 못 했다. 우영이 최초의 사례인 셈이다.
"반장님. 어떻습니까? 뭣 좀 건진 게 있습니까?"
"하! 기억을 잃었다고 하는군."
김남인의 말에 전찬성은 오른쪽 눈썹을 치켜떴다. 의문스럽거나 이상한 얘기를 들었을 때 으레 나타나는 그의 습관이었다.
"뭐 쌍팔년도 드라마도 아니고 기억상실이라니. 거 말인지 방군지 참."
"그래. 씨알도 안 먹힐 소리지. 분명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은 확실해."
"제가 한번 붙어볼까요?"
전찬성의 말에 김남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행과 잠복은 전찬성의 특기 분야다.
"그래. 드디어 나타난 실마리인데 어떻게든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야지. 철저하게 감시해."
"예써~."
전찬성은 휘파람을 불며 대합실로 걸어갔다. 혹여 의심 받지 않도록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 셈인 듯했다. 김남인은 병원을 빠져나와 주차해둔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자마자 요란한 음악이 김남인의 귀에 꽂힌다. 16년이 넘도록 들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시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언젠가 사라져버린 동생이 즐겨 듣던 밴드의 음악,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마음속 헝클어진 음표들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우영씨. 무엇을 숨기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마음대로는 안될 겁니다...'
"음~ 생각보다 좋은 걸요 우영씨? 다행히 몸은 건강해 보이는군요. 우영씨를 구해준 헌터들 말로는 꽤나 위험한 상태였다던데 회복력이 좋으신가 봐요."
김남인이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을 사회복지사라 소개하며 들어온 여자는, 연신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와 우영의 얼굴을 대조하듯 번갈아 가며 보았다.
"정말 신기하네요. 우영씨가 06년 생이니까 음...지금이 36? 37? 거의 제 또래인데 어떻게 얼굴이 실종된 당시랑 똑같죠? 이거 정말 너무 부럽잖아요..."
그녀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다지 귀여워 보이진 않았지만. 이내 우영은 기사로서 실례되는 생각을 했다고 내심 자책하며 말했다.
"제가 얼굴이 그때랑 똑같다구요..? 그럴 리가 없는데..."
처음 차원을 넘어갔을 때 이런저런 모진 고초를 겪으며, 비리비리하고 나약했던 E급의 육체는 우람하고 강인한 강철의 육체로 탈바꿈했다. 어떻게 가꾼 몸뚱어린데 그게 없어졌다니? 우영은 다급하게 그녀가 건네준 손거울을 보았다.
정말이다. 대공의 그림자 기사라 불리며 대륙을 질타했던 37세 남 독신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한 스무 살 햇병아리 적의 얼굴만 남아 있었다.
"아니...대체 이게...이게 무슨 일이야!"
온몸에 아로새긴 흉터들을 보면서 동료 기사들과 이것이 진정한 남자의 훈장이라고 낄낄대던 것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다. 어쩐지 오크 몇 마리 따위 상대하는데 몸이 망가진 것부터 이상하다 생각했었어야 했는데.
"우영씨. 괜찮으세요? 뭣 때문에 그렇게 놀라신 거예요?"
"아..그게..아닙니다. 16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제가 좀 잘 생겼구나 싶어서요. 아하하하하.."
그녀의 말에 번쩍 정신을 차린 우영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는 그런 우영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향후의 일들에 대해 한참 대화를 나누다 문득 그녀가 자세를 바로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참, 그리고 우영씨 부모님께 연락드려 놨어요. 바로 연락을 드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우영씨가 확실히 정신을 차린 후에 만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부러 조금 늦게 연락을 드렸어요. 죄송해요.."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 우영은 차마 뭐라 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16년 만에 만나는 자식이 정신도 못 차리고 누워 있는 것을 보신다면 부모님께서 얼마나 속이 타시겠는가.
"괜찮습니다. 복지사님. 복지사님 생각이 저도 옳은 것 같아요. 건강한 모습으로 부모님을 만나야 그래도 덜 슬퍼하시겠죠."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다행이에요. 이해해주셔서 감..."
쾅-!
그녀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병실 문을 확 열어 젖히고 달려들어 오는 사람이 있었다. 희끗희끗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 햇볕에 너무 그을려 거멓게 익어버린 피부, 조글조글 주름이 가득 잡힌 얼굴. 그 얼굴이 낯익다. 아니 너무도 낯설다. 16년이라는 세월이 아버지를 모질게도 몰아세웠다.
병실로 달려들었던 격한 모습과는 다르게 아버지는 우영을 그저 바라만 보고 서 있었다. 변하지 않은 그때 그 당시 아들의 모습에 충격이 컸던 것일까. 이윽고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시는 아버지. 우영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아...아버..지? 아빠 .. 맞아요?"
"영아....영..아...우리 우영이---!!"
우영의 목소리가 포문이 된 것일까. 눈물을 참으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아버지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셨다. 아버지는 흐느낌과 함께 우영을 껴안았다. 16년을 쌓아두었던 그리움이다. 단숨에 허물어진 그리움은 그만큼의 눈물이 되어 거세게 쏟아졌다. 우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한 채 그저 아버지의 등만 쓸어 내릴 뿐이었다.
어쩐지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이 어색하다. 굽어있다. 왜소하다. 지쳐 보이는 등이다. 세상 누구보다 듬직했던 아버지의 등을 우영은 아직 기억하고 있건만. 서로 부둥켜 안은 채 우영은 다짐했다. 이번엔 자신이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린다. 목소리를 조심스레 따라가 본다. 그 목소리의 끝에는 밝게 웃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훤칠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목례하며 예를 표하는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도 알다시피 휘께서 천명하셨네. 이차원...흠 그래. 다른 세계로 진출하고 싶어 하시지. 그러나 귀쟁이 놈들과 도마뱀 녀석들이 손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게 여간 귀찮지가 않아. 때문에 당장 다른 세계로 대규모 병력을 파병할 순 없는 실정이지. 어차피 그곳의 정보도 필요하고, 그렇기에 우선은 능력이 출중한 사람을 보내어 정찰을 부탁하려 하네. 그대라면 내 말뜻을 이해하겠지?"
그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더없이 공손한 몸짓이었지만 어쩐지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다.
"저 말고 다른 녀석들로 부탁드립니다. 대공전하."
일국의 왕과 다름없는 이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 그럼에도 대공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이미 익숙해진 탓일까.
"어허, 경도 알지 않나. 내가 믿고 맡길만한 사람이 경 밖에 없다는 것을."
"아, 정말. 베네딕트 경이나 안델슨 경도 있지 않습니까. 왜 하필 맨날 접니까. 왜요?"
문밖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두 사람의 언쟁을 들으며 생각했다. 또 시작이라고.
"그들은 뼛속부터 기사들이라 다양한 상황에 유연히 대처하지 못해. 다른 세계에서 어떤 일들이 생길 줄 모르니 임기응변에 능한 경이 가는 것이 아무래도 좋지 않겠는가."
"아 걔들이 애들도 아니고 이제 알아서 어련히 잘하겠지요. 저 이제 좀 쉬면 안 되겠습니까? 제발 대공전하."
계속 이어지는 치열한 공방. 하지만 결국 늘 그랬듯 대공의 승리였다. 대공은 시무룩해져 있는 기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경 덕분에 내 마음이 아주 든든하다네. 대신 이번 임무만 끝마치고 오면 정말 한동안 푹 쉬게 해줄테니 걱정 말게. 그리고 두둑한 포상금도 내려줄 테고 말이야. 내 아카이 가문의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아..저..저..전하으...!"
기사는 눈시울을 붉히며 대공의 손을 마주 잡았다. 대공은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문밖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생각했다. 또 당했다고.
잠시 회상에 잠긴 우영을 미심쩍은 듯 바라보던 김남인은 다시금 우영의 이름을 부르며 채근했다.
"여우영씨. 괜찮으십니까? 혹시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있습니까?"
김남인의 말에 우영을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아...네. 제가 사실 기억이 분명하지 않아서 계속 어쩐지 멍합니다."
"기...억이요?"
우영은 김남인이 한층 더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내디딘 걸음. 더욱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네 맞아요. 기억이 안 납니다.. 제가 그 이상한 구체에 빨려 들어간 이후부터 기억이 나질 않아요."
"구체요? 무슨 구체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무슨 말을 하고 있냐는 듯 쳐다보는 김남인의 시선에 우영은 조금의 진실을 풀어주었다.
"아마 보랏빛의 구체였을 텐데.. 못 보셨나요? 제가 그걸 만지고 그..정신을 잃어서..
우영의 말을 들은 김남인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태블릿을 꺼내들며 어떤 사진을 보여주었다.
"우영씨. 저희는 구체를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영씨가 실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구 곳곳에 이런 기둥들이 나타났습니다. 혹시 이런 것은 보신 적 없습니까?"
김남인이 보여준 사진에는 작은 건물 만한 기둥이 찍혀 있었다. 표면에는 각각 다양한 그림과 문자로 추정되는 것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우영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아판타시아 문자인데..? 이게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생각에 잠겨있던 우영은 자신을 계속 지켜보는 김남인의 시선을 느꼈다.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김남인에게 태블릿을 돌려주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기둥은 못 봤던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흠..아닙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다음 일정이 있어 먼저 좀 일어나보겠습니다. 우선 안정을 취하시고 기억이 돌아온다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그리고 구체에 관련된 사항은 차후 다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남인은 명함을 꺼내어 우영에게 건네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의외로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지 않자 우영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조리 잘 하시고, 사회 복지 담당자를 불러드리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 헌터 협회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응? 네? 제가 협회를요? 아니 저기요?!"
김남인은 다음 주에 협회에서 보자는 의미심장한 말만 남기고 재빨리 나가버렸고, 우영의 머릿속은 괜히 복잡해지고 말았다.
김남인이 병실의 문을 닫고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던 부하직원 전찬성이 다가왔다. 16년 만에 귀환한 최초의 실종자가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100명이 넘게 실종되었음에도 지금껏 어느 누구도 찾아내지 못 했다. 우영이 최초의 사례인 셈이다.
"반장님. 어떻습니까? 뭣 좀 건진 게 있습니까?"
"하! 기억을 잃었다고 하는군."
김남인의 말에 전찬성은 오른쪽 눈썹을 치켜떴다. 의문스럽거나 이상한 얘기를 들었을 때 으레 나타나는 그의 습관이었다.
"뭐 쌍팔년도 드라마도 아니고 기억상실이라니. 거 말인지 방군지 참."
"그래. 씨알도 안 먹힐 소리지. 분명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은 확실해."
"제가 한번 붙어볼까요?"
전찬성의 말에 김남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행과 잠복은 전찬성의 특기 분야다.
"그래. 드디어 나타난 실마리인데 어떻게든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야지. 철저하게 감시해."
"예써~."
전찬성은 휘파람을 불며 대합실로 걸어갔다. 혹여 의심 받지 않도록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 셈인 듯했다. 김남인은 병원을 빠져나와 주차해둔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자마자 요란한 음악이 김남인의 귀에 꽂힌다. 16년이 넘도록 들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시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언젠가 사라져버린 동생이 즐겨 듣던 밴드의 음악,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마음속 헝클어진 음표들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우영씨. 무엇을 숨기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마음대로는 안될 겁니다...'
"음~ 생각보다 좋은 걸요 우영씨? 다행히 몸은 건강해 보이는군요. 우영씨를 구해준 헌터들 말로는 꽤나 위험한 상태였다던데 회복력이 좋으신가 봐요."
김남인이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을 사회복지사라 소개하며 들어온 여자는, 연신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와 우영의 얼굴을 대조하듯 번갈아 가며 보았다.
"정말 신기하네요. 우영씨가 06년 생이니까 음...지금이 36? 37? 거의 제 또래인데 어떻게 얼굴이 실종된 당시랑 똑같죠? 이거 정말 너무 부럽잖아요..."
그녀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다지 귀여워 보이진 않았지만. 이내 우영은 기사로서 실례되는 생각을 했다고 내심 자책하며 말했다.
"제가 얼굴이 그때랑 똑같다구요..? 그럴 리가 없는데..."
처음 차원을 넘어갔을 때 이런저런 모진 고초를 겪으며, 비리비리하고 나약했던 E급의 육체는 우람하고 강인한 강철의 육체로 탈바꿈했다. 어떻게 가꾼 몸뚱어린데 그게 없어졌다니? 우영은 다급하게 그녀가 건네준 손거울을 보았다.
정말이다. 대공의 그림자 기사라 불리며 대륙을 질타했던 37세 남 독신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한 스무 살 햇병아리 적의 얼굴만 남아 있었다.
"아니...대체 이게...이게 무슨 일이야!"
온몸에 아로새긴 흉터들을 보면서 동료 기사들과 이것이 진정한 남자의 훈장이라고 낄낄대던 것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다. 어쩐지 오크 몇 마리 따위 상대하는데 몸이 망가진 것부터 이상하다 생각했었어야 했는데.
"우영씨. 괜찮으세요? 뭣 때문에 그렇게 놀라신 거예요?"
"아..그게..아닙니다. 16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제가 좀 잘 생겼구나 싶어서요. 아하하하하.."
그녀의 말에 번쩍 정신을 차린 우영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는 그런 우영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향후의 일들에 대해 한참 대화를 나누다 문득 그녀가 자세를 바로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참, 그리고 우영씨 부모님께 연락드려 놨어요. 바로 연락을 드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우영씨가 확실히 정신을 차린 후에 만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부러 조금 늦게 연락을 드렸어요. 죄송해요.."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 우영은 차마 뭐라 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16년 만에 만나는 자식이 정신도 못 차리고 누워 있는 것을 보신다면 부모님께서 얼마나 속이 타시겠는가.
"괜찮습니다. 복지사님. 복지사님 생각이 저도 옳은 것 같아요. 건강한 모습으로 부모님을 만나야 그래도 덜 슬퍼하시겠죠."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다행이에요. 이해해주셔서 감..."
쾅-!
그녀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병실 문을 확 열어 젖히고 달려들어 오는 사람이 있었다. 희끗희끗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 햇볕에 너무 그을려 거멓게 익어버린 피부, 조글조글 주름이 가득 잡힌 얼굴. 그 얼굴이 낯익다. 아니 너무도 낯설다. 16년이라는 세월이 아버지를 모질게도 몰아세웠다.
병실로 달려들었던 격한 모습과는 다르게 아버지는 우영을 그저 바라만 보고 서 있었다. 변하지 않은 그때 그 당시 아들의 모습에 충격이 컸던 것일까. 이윽고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시는 아버지. 우영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아...아버..지? 아빠 .. 맞아요?"
"영아....영..아...우리 우영이---!!"
우영의 목소리가 포문이 된 것일까. 눈물을 참으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아버지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셨다. 아버지는 흐느낌과 함께 우영을 껴안았다. 16년을 쌓아두었던 그리움이다. 단숨에 허물어진 그리움은 그만큼의 눈물이 되어 거세게 쏟아졌다. 우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한 채 그저 아버지의 등만 쓸어 내릴 뿐이었다.
어쩐지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이 어색하다. 굽어있다. 왜소하다. 지쳐 보이는 등이다. 세상 누구보다 듬직했던 아버지의 등을 우영은 아직 기억하고 있건만. 서로 부둥켜 안은 채 우영은 다짐했다. 이번엔 자신이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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