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놀라려나?"
잘하는 꽃집을 들러 꽃다발을 들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민경이는 유별나게 꽃을 좋아한다.
화나는 일 있어도 꽃다발이면 금새 풀어지곤 했으니까.
서로 싸운건 아니지만 왠지 죄 지은 기분이라 빈손으로 갈 수가 없었다.
'먼저 가서 밥이라도 좀 차려 놓을까.'
'요즘 많이 바쁜거 같으니까... 보양식이라도?'
자취 생활이 길어지면서 갈고 닦은 요리실력 .
대부분 대충 먹고 떼우긴 했지만 가끔은 집밥 같이 만들어 먹지 않으면 괜히 쓸쓸해서 한번씩 해먹다 보니 왠만한 요리쯤은 거뜬하다.
"전복, 전복을 사자."
소화 잘되는 죽도 좋고, 내장으로 소스만든 찜도 좋고.
전복 파스타? 전복찜? 둘다 하자.
큼지막한 전복 3마리가 든 팩을 2개나 샀다.
일인 3전복은 해줘야지.
민경이가 사는 원룸에서 가까운 마트에서 장을 본 후 어떤 요리를 할지 고민하며 걷던 중.
눈앞에 익숙한 뒷태가 보인다.
이상하다.
분명히 일하고 있을 시간인데...
'비슷한 사람...'
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전화기에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응 여보세요?
"어... 민경아..."
-오늘 별로 안바쁜가봐? 일할 시간에 전화를 주고?
"어... 잠시... 쉬는 시간... 너는?"
-나는 일하고 있지, 지금 좀 바쁘거든? 마치고 전화할께.
"... 그럴래?"
-응 연락할게.
끊어진 전화기를 귀에서 떼질 못했다.
눈앞에서 전화기를 끊고 옆에 있는 남자에게 팔짱을 끼는 사람을 보곤.
왜...
마른침을 삼키며 조용히 따라 걸었다.
뻔한 상황인걸 알았지만... 달려들 용기도 없었다.
싸워봐야 어디가서 쥐어터지기나 하고 남한테 싫은 소리 따위도 못하는 거지같은 성격.
'착해서 좋다고 했잖아...'
천천히 걷고 있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굳이 확인까지 했어야 됐을까?
민경이가 집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문가에 귀를 대고 서 있었다.
꺄르륵 웃어대는 소리와 장난치는 말투.
잠시 얘기를 나누는 듯 하더니 조용해졌다.
-하악.
-읍... 흐흡...
곧이어 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귀를 땠다.
머리속에 상상되는 둘의 모습에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웃긴게
이때도 나는 왜 하필 오늘 연차를 썼을까?
민경이는 왜 하필 오늘 연차를 썼을까?
몰랐으면 좋았을 걸 이라고 먼저 생각하다니.
등신도 이런 등신이 도대체!
떨리는 손에 들린 전복과 꽃다발을 문앞에 조용히 내려놓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빠져나왔다.
도망가듯이 나오면서도 나는 나를 원망했다.
내가 능력이 있었으면...
민경이를 혼자 두지 않았으면...
아니지 x발, 바람핀건 걔가 잘못한거잖아...
아니야... 그래도 나랑 헤어지진 않았잖아.
잠시 외로워서... 외로우면? 외로우면 그래도 돼?
하...
오만 잡생각이 머리를 훑고 지나간다.
발길이 떨어지질 않아 그 자리를 한번, 두번, 세번.
생각에 지친 나는 원룸 입구가 보이는 곳에 쭈그려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
해가 지고 어두워 지고 나서야 드디어...
전화가 왔다.
-오빠, 나 이제 마치구 집에왔어.
"....."
-오빠?
"....."
-여보세요? 오빠?
뚝.
같이... 사는 거였나?
그래서 나, 오지 말라고 한거였어?
억울했다.
내가 뭘 잘못한거야?
내가 싫으면 그냥 헤어지고 걔랑 만나면 되잖아!
왜 나한테 이러는건데... 도대체... 왜!!
퍽!
퍽퍽!
퍽퍽퍽!
애꿎은 벽에다 화풀이를 해보지만 다치는 건 내 주먹뿐이다.
질질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펑펑 울어대며 하염없이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칼이라도 들고 가서 찔러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다.
평소처럼... 그냥 모른척.
아무 일도 없는 척.
모른척하면... 혹시 나한테 돌아 올거야?
*
쭈욱.
"크...."
"이모, 여기 소주 한 병더..."
탁.
까라락.
둥둥둥둥, 쪼르륵.
"하...."
쭈욱.
"....."
쪼르륵.
"하...."
"어?"
스윽.
"혹시... 건우?"
"?"
"너, 건우 아냐? 미동 초등학교 강건우!"
"누구...세요?"
"나! 나 주현이! 이게 얼마만이야? 진짜 반갑다."
"주현이?"
"주현... 주현... 옥주현!?"
"푸하하핫, 이제 기억하네. 너 섭섭하다?"
"여름방학때 편지 써준거 나 밖에 없을텐데."
"아...!"
기억났다.
그녀의 말은 진짜다.
여름방학때 집으로 온 엽서 한통.
그건 눈앞의 주현이가 쓴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