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행복해질 자격 (10)
조회 : 950 추천 : 0 글자수 : 5,275 자 2023-07-20
다행히 에멜리타는 아무 상처 없이 이스티나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언젠가 또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그래서 이스티나는 에멜리타를 안은 채, 원래 목적지인 도서관 대신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스승님, 저희 더 구경 안해요?"
에멜리타의 물음에 이스티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위험한 일을 겪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냐?"
"하지만...아직 구경 못한 게 많은 걸요."
"에멜, 너의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하지만 너의 안전이 내겐 최우선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구나."
"......"
"무엇보다도."
이스티나는 말을 하다 말고 에멜리타의 뒤통수를 조금 더 당겼다. 보라색 머리칼에 듬성듬성 가려진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강한 힘에 에멜리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베일에 가려져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지만, 이스티나가 슬퍼하고 있다는 걸 에멜리타는 알 수 있었다.
"난, 두 번 다시 아까처럼 널 잃고 싶지 않단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도, 저도 스승님이랑 떨어지기 싫어요. 죄송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에멜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을 찾느라 슬퍼했을 스승님의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제 알았으면 됐다. 그리고 어차피 우린 수도에 오래 머물 예정이니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단다."
"정말요?"
에멜리타는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에 이스티나는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만날 사람도 있고 말이다."
"만날 사람이요?"
"어이~ 이스티나!"
뒤쪽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스티나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분홍빛 머리칼에 초록색 눈동자. 그리고 제복 뒤로 펼쳐진 무지갯빛 나비날개.
틀림없다. 며칠 전에 남쪽을 방문했던 테시엘이었다.
"테스."
"하아- 하아- 야, 깜짝 놀랐잖아. 수도에 왔으면 미리 연락하지, 내가 그걸 기사들을 통해서 들어야 하냐?"
테시엘은 숨을 고르며 이스티나를 타박했다.
"미안하다. 경황이 없어서 깜빡했다. "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스티나는 대답 대신 힐긋힐긋- 곁눈질로 주변을 둘려보았다. 테시엘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 탓에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테시엘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알고 있었지만, 얘기를 나누기엔 좋지 않았다.
장소도, 분위기도.
"일단 장소를 옮기지."
"어? 아, 그래. 이 근처에 분위기 좋은 카페테리아가 있는데, 거기로 가자. 내가 낼게."
"그러지."
이스티나와 인사를 나눈 테시엘은 이스티나의 품에 안긴 에멜리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안녕, 에멜리타! 오랜만이야."
테시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에멜리타는 화들짝- 놀랐다. 이스티나가 괜찮다는 듯 등을 토닥여주자, 얼굴을 붉히며 인사하였다.
"아, 안녕하세요. 저도 반가워요, 테시엘 이모."
"그래그래. 우리 악수할까?"
테시엘이 손을 내밀자, 에멜리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손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와~ 손 진짜 작다! 거의 내 손바닥만한데?"
"아이니까 당연한 일이지. 조금 더 크면 너와 비슷해질거다."
"그렇게 말하니까 기대되네. 자라면 얼마나 더 예뻐질려나~"
이스티나는 피식- 웃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거다. 아이가 성장하는 건 생각보다 빠르니까."
이스티나의 말에 테시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길어봤자지. 우리에게 시간은 무의미하다는 걸 알잖아, 티나."
"네? 그게 무슨 말이예요, 스승님?"
에멜리타가 어리둥절하며 이스티나에게 물었다. 이스티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테시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테시엘은 그저 자신을 보며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이스티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에멜리타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네가 학교를 다니게 될 때 알려주마."
애매모호한 대답에 에멜리타는 오리처럼 입을 비쭉 내밀었다.
"피이. 스승님은 다 알려주지 않고. 너무해요!"
"미안하구나. 하지만 지금의 너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어리니 말이다."
"그래도...제가 스승님처럼 크면 모든 걸 알 수 있을까요?"
에멜리타의 말에 이스티나는 멈칫했다. 아무래도 에멜리타는 어른이 되는 것을 만능 트로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스티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조차 나이를 먹을만큼 먹고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다. 현자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그저 오랜 세월동안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하거나 행동할 뿐, 자신은 결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었다.
물론 어른이 되면 아이였을때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겠지만, 그만큼 짊어질 책임도 늘어날 것이다.
언젠가 에멜리타도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될 것이다. 그건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에멜리타가 천천히 자랐으면 한다. 어릴 때 누린 사랑이 어른이 될 에멜리타의 든든한 마음의 기반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 지금은 에멜리타가 그렇게 믿게 놔두는 것이 좋겠지.
"일단 카페테리아에 가자꾸나."
"그래, 네가 좋아하는 딸기 슈도 거기서 팔더라. 이모가 사줄 테니까 마음껏 먹어."
"정말요?"
다행히 테시엘이 자신의 장단에 맞춰준 덕분에 에멜리타의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테시엘과 시선을 마주하자, 테시엘은 싱긋 웃으며 윙크했다.
"자, 얼른 가자."
* * *
같은 시각, <클레어의 찻잔>.
"감사합니다."
베이지색 피부를 가지고, 머리에 빨간색 리본을 단 생쥐가 종이상자를 내밀었다. 분홍머리의 여자는 아무말없이 상자를 받았다.
뻘쭘할 법도 하건만, 쥐 점원은 익숙한 듯 고개를 숙였다. 분홍머리의 여자는 쥐 점원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은채 몸을 돌렸다.
딸랑-
카페테리아에서 나오자, 보라색 후드를 쓴 누군가가 다가왔다.
"매번 여기를 찾으시네요, 수장님."
후드를 벗자, 금실같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저녁노을 같은 주홍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분홍머리의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않니, 여기서 파는 디저트는 왕국에서 가장 좋은 것이니까."
"하기야 수장님은 늘 최고만을 원하셨죠."
"......"
"그래서 자기 딸도 쫓아내신 거잖아요. 안 그래요?"
키득- 금발의 여자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비웃었다. 분홍머리의 여자는 짧게 혀를 찼다.
"그 모지리 얘기는 꺼내지도 마렴, 카멜리아. 정말이지, 내가 어쩌다 그런 걸 낳아가지고..."
"하하하! 그러게요. 마녀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웠죠."
금발의 여자, 카멜리아는 그 아이가 마녀 일족에서 쫓겨났던 날을 떠올렸다.
제 어미에게 사랑받고 싶어 발버둥쳤던 불쌍한 마녀, 스텔라 루미너스.
아무리 최고의 것을 얻어도 그녀의 어미는 단 한번도 그녀를 인정한 적 없었다.
오히려 그 마녀를 더 몰아세우고, 더 쥐어짜기만 할 뿐.
참다못해 그 마녀가 수장에게 대들었을 땐 진짜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수장의 딸이란 이유로 누려온 혜택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최고로 갚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죄송하다고 고개 숙이고 싹싹 빌 것이지. 고집 피우기는.'
카멜리아는 스텔라의 얼굴을 떠올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마법상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얼핏 듣긴 했지만, 믿지 않았다. 그건 다른 마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장의 뒷받침없이, 그게 얼마나 가겠는가.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다. 직접 손쓸 필요는 더더욱 없다. 망하면 알아서 기어들어올테니.
'돌아오면 두고두고 분풀이로 써야지.'
마침 직접 개발한 마법이 있다. 그 건방진 것을 새로운 마법의 실험용 쥐로 쓰면 얼마나 짜릿할까.
머릿속으로 행복회로를 돌리던 그때였다.
"여기 커피가 그렇게 맛있대. 티나 너도 마셔보면 아마 좋아할거야."
"그런가. 네가 그렇게 말하니 기대되는구나."
"스승님, 저도 커피 마시면 안되나요?"
"안돼. 이건 어른만 마시는 거야."
"히잉..."
카페테리아에 들어가는 새로운 손님인가 싶어 카멜리아는 호기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카페테리아 앞에 있는 이를 본 순간, 카멜리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머리에 달린 푸른 뿔과 무지갯빛 진주가 달린 베일. 틀림없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남쪽 수호자였다.
"수장님, 저 분 남쪽 수호자 맞죠?"
카멜리아의 말에 올리비아도 고개를 돌렸다.
"그래, 틀림없구나. 남쪽 수호자가 맞아."
"어라? 왠 아이를 들고 있네요. 이상하다...수호자는 분명 미혼일텐데."
아이 쪽으로 시선을 옮긴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카멜리아의 말대로 남쪽 수호자가 결혼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다. 게다가 수호자는 분명 부모도 친척도 없는 고아였다.
'그보다 저 아이...'
아이의 생김새가 어딘가 익숙해보였다. 보라색 머리에 금빛 눈동자. 게다가 섞인 기운에서 느껴지는 마녀의 기운.
'잠깐. 금빛 눈동자라고?'
올리비아는 아이를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금빛 눈동자를 가진 마녀들만 골라 아이의 얼굴과 겹쳐보았다.
한참 찾아도 안나오던 찰나, 아이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얼굴을 담은 연두색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쳤다.
마치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눈빛의 파동을 퍼지고 퍼져 머리와 심장에 닿았다.
그리고 올리비아의 머릿속에서 한 인물의 얼굴이 그려졌다.
존재조차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운 자. 마녀 일족의 수치 중 수치.
'로엔 리시드.'
까드득- 이름을 떠올린 올리비아는 이를 갈았다. 주먹을 쥔 손이 떨고 있었다.
그 마녀 때문에 4년동안 무슨 수모를 당해왔는지,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인간을 포함해 다른 종족들에게 뭇매를 맞고, 멸시와 조롱을 받고, 더 심하면 아예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증오와 분노가 심장을 불태웠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올리비아는 불꽃을 끄지 않았다.
상처를 흘려보내기엔 그 시간동안 괴로워했던 자신과 다른 마녀들이 가여웠기에.
그녀가 허무하게 죽어버려 복수하지 못한 건 유감이었다. 하지만 혈육이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일단 직접 알아보자. 그런 다음에 복수해도 늦지 않으니.'
의심과 확신을 동시에 안은 채, 올리비아는 이스티나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래서 이스티나는 에멜리타를 안은 채, 원래 목적지인 도서관 대신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스승님, 저희 더 구경 안해요?"
에멜리타의 물음에 이스티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위험한 일을 겪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냐?"
"하지만...아직 구경 못한 게 많은 걸요."
"에멜, 너의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하지만 너의 안전이 내겐 최우선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구나."
"......"
"무엇보다도."
이스티나는 말을 하다 말고 에멜리타의 뒤통수를 조금 더 당겼다. 보라색 머리칼에 듬성듬성 가려진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강한 힘에 에멜리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베일에 가려져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지만, 이스티나가 슬퍼하고 있다는 걸 에멜리타는 알 수 있었다.
"난, 두 번 다시 아까처럼 널 잃고 싶지 않단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도, 저도 스승님이랑 떨어지기 싫어요. 죄송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에멜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을 찾느라 슬퍼했을 스승님의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제 알았으면 됐다. 그리고 어차피 우린 수도에 오래 머물 예정이니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단다."
"정말요?"
에멜리타는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에 이스티나는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만날 사람도 있고 말이다."
"만날 사람이요?"
"어이~ 이스티나!"
뒤쪽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스티나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분홍빛 머리칼에 초록색 눈동자. 그리고 제복 뒤로 펼쳐진 무지갯빛 나비날개.
틀림없다. 며칠 전에 남쪽을 방문했던 테시엘이었다.
"테스."
"하아- 하아- 야, 깜짝 놀랐잖아. 수도에 왔으면 미리 연락하지, 내가 그걸 기사들을 통해서 들어야 하냐?"
테시엘은 숨을 고르며 이스티나를 타박했다.
"미안하다. 경황이 없어서 깜빡했다. "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스티나는 대답 대신 힐긋힐긋- 곁눈질로 주변을 둘려보았다. 테시엘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 탓에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테시엘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알고 있었지만, 얘기를 나누기엔 좋지 않았다.
장소도, 분위기도.
"일단 장소를 옮기지."
"어? 아, 그래. 이 근처에 분위기 좋은 카페테리아가 있는데, 거기로 가자. 내가 낼게."
"그러지."
이스티나와 인사를 나눈 테시엘은 이스티나의 품에 안긴 에멜리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안녕, 에멜리타! 오랜만이야."
테시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에멜리타는 화들짝- 놀랐다. 이스티나가 괜찮다는 듯 등을 토닥여주자, 얼굴을 붉히며 인사하였다.
"아, 안녕하세요. 저도 반가워요, 테시엘 이모."
"그래그래. 우리 악수할까?"
테시엘이 손을 내밀자, 에멜리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손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와~ 손 진짜 작다! 거의 내 손바닥만한데?"
"아이니까 당연한 일이지. 조금 더 크면 너와 비슷해질거다."
"그렇게 말하니까 기대되네. 자라면 얼마나 더 예뻐질려나~"
이스티나는 피식- 웃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거다. 아이가 성장하는 건 생각보다 빠르니까."
이스티나의 말에 테시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길어봤자지. 우리에게 시간은 무의미하다는 걸 알잖아, 티나."
"네? 그게 무슨 말이예요, 스승님?"
에멜리타가 어리둥절하며 이스티나에게 물었다. 이스티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테시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테시엘은 그저 자신을 보며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이스티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에멜리타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네가 학교를 다니게 될 때 알려주마."
애매모호한 대답에 에멜리타는 오리처럼 입을 비쭉 내밀었다.
"피이. 스승님은 다 알려주지 않고. 너무해요!"
"미안하구나. 하지만 지금의 너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어리니 말이다."
"그래도...제가 스승님처럼 크면 모든 걸 알 수 있을까요?"
에멜리타의 말에 이스티나는 멈칫했다. 아무래도 에멜리타는 어른이 되는 것을 만능 트로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스티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조차 나이를 먹을만큼 먹고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다. 현자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그저 오랜 세월동안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하거나 행동할 뿐, 자신은 결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었다.
물론 어른이 되면 아이였을때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겠지만, 그만큼 짊어질 책임도 늘어날 것이다.
언젠가 에멜리타도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될 것이다. 그건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에멜리타가 천천히 자랐으면 한다. 어릴 때 누린 사랑이 어른이 될 에멜리타의 든든한 마음의 기반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 지금은 에멜리타가 그렇게 믿게 놔두는 것이 좋겠지.
"일단 카페테리아에 가자꾸나."
"그래, 네가 좋아하는 딸기 슈도 거기서 팔더라. 이모가 사줄 테니까 마음껏 먹어."
"정말요?"
다행히 테시엘이 자신의 장단에 맞춰준 덕분에 에멜리타의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테시엘과 시선을 마주하자, 테시엘은 싱긋 웃으며 윙크했다.
"자, 얼른 가자."
* * *
같은 시각, <클레어의 찻잔>.
"감사합니다."
베이지색 피부를 가지고, 머리에 빨간색 리본을 단 생쥐가 종이상자를 내밀었다. 분홍머리의 여자는 아무말없이 상자를 받았다.
뻘쭘할 법도 하건만, 쥐 점원은 익숙한 듯 고개를 숙였다. 분홍머리의 여자는 쥐 점원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은채 몸을 돌렸다.
딸랑-
카페테리아에서 나오자, 보라색 후드를 쓴 누군가가 다가왔다.
"매번 여기를 찾으시네요, 수장님."
후드를 벗자, 금실같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저녁노을 같은 주홍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분홍머리의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않니, 여기서 파는 디저트는 왕국에서 가장 좋은 것이니까."
"하기야 수장님은 늘 최고만을 원하셨죠."
"......"
"그래서 자기 딸도 쫓아내신 거잖아요. 안 그래요?"
키득- 금발의 여자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비웃었다. 분홍머리의 여자는 짧게 혀를 찼다.
"그 모지리 얘기는 꺼내지도 마렴, 카멜리아. 정말이지, 내가 어쩌다 그런 걸 낳아가지고..."
"하하하! 그러게요. 마녀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웠죠."
금발의 여자, 카멜리아는 그 아이가 마녀 일족에서 쫓겨났던 날을 떠올렸다.
제 어미에게 사랑받고 싶어 발버둥쳤던 불쌍한 마녀, 스텔라 루미너스.
아무리 최고의 것을 얻어도 그녀의 어미는 단 한번도 그녀를 인정한 적 없었다.
오히려 그 마녀를 더 몰아세우고, 더 쥐어짜기만 할 뿐.
참다못해 그 마녀가 수장에게 대들었을 땐 진짜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수장의 딸이란 이유로 누려온 혜택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최고로 갚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죄송하다고 고개 숙이고 싹싹 빌 것이지. 고집 피우기는.'
카멜리아는 스텔라의 얼굴을 떠올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마법상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얼핏 듣긴 했지만, 믿지 않았다. 그건 다른 마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장의 뒷받침없이, 그게 얼마나 가겠는가.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다. 직접 손쓸 필요는 더더욱 없다. 망하면 알아서 기어들어올테니.
'돌아오면 두고두고 분풀이로 써야지.'
마침 직접 개발한 마법이 있다. 그 건방진 것을 새로운 마법의 실험용 쥐로 쓰면 얼마나 짜릿할까.
머릿속으로 행복회로를 돌리던 그때였다.
"여기 커피가 그렇게 맛있대. 티나 너도 마셔보면 아마 좋아할거야."
"그런가. 네가 그렇게 말하니 기대되는구나."
"스승님, 저도 커피 마시면 안되나요?"
"안돼. 이건 어른만 마시는 거야."
"히잉..."
카페테리아에 들어가는 새로운 손님인가 싶어 카멜리아는 호기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카페테리아 앞에 있는 이를 본 순간, 카멜리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머리에 달린 푸른 뿔과 무지갯빛 진주가 달린 베일. 틀림없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남쪽 수호자였다.
"수장님, 저 분 남쪽 수호자 맞죠?"
카멜리아의 말에 올리비아도 고개를 돌렸다.
"그래, 틀림없구나. 남쪽 수호자가 맞아."
"어라? 왠 아이를 들고 있네요. 이상하다...수호자는 분명 미혼일텐데."
아이 쪽으로 시선을 옮긴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카멜리아의 말대로 남쪽 수호자가 결혼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다. 게다가 수호자는 분명 부모도 친척도 없는 고아였다.
'그보다 저 아이...'
아이의 생김새가 어딘가 익숙해보였다. 보라색 머리에 금빛 눈동자. 게다가 섞인 기운에서 느껴지는 마녀의 기운.
'잠깐. 금빛 눈동자라고?'
올리비아는 아이를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금빛 눈동자를 가진 마녀들만 골라 아이의 얼굴과 겹쳐보았다.
한참 찾아도 안나오던 찰나, 아이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얼굴을 담은 연두색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쳤다.
마치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눈빛의 파동을 퍼지고 퍼져 머리와 심장에 닿았다.
그리고 올리비아의 머릿속에서 한 인물의 얼굴이 그려졌다.
존재조차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운 자. 마녀 일족의 수치 중 수치.
'로엔 리시드.'
까드득- 이름을 떠올린 올리비아는 이를 갈았다. 주먹을 쥔 손이 떨고 있었다.
그 마녀 때문에 4년동안 무슨 수모를 당해왔는지,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인간을 포함해 다른 종족들에게 뭇매를 맞고, 멸시와 조롱을 받고, 더 심하면 아예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증오와 분노가 심장을 불태웠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올리비아는 불꽃을 끄지 않았다.
상처를 흘려보내기엔 그 시간동안 괴로워했던 자신과 다른 마녀들이 가여웠기에.
그녀가 허무하게 죽어버려 복수하지 못한 건 유감이었다. 하지만 혈육이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일단 직접 알아보자. 그런 다음에 복수해도 늦지 않으니.'
의심과 확신을 동시에 안은 채, 올리비아는 이스티나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작가의 말
이제 점점 이 에피소드의 끝이 다가오네요! 부디 이스티나와 에멜리타가 행복해지기를...
닫기이스티나-꿀 흐르는 나무와 새벽별
36.#35 외전 1-마녀와 뱀의 독기어린 증오 (2)조회 : 96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25 35.#34 외전 1-마녀와 뱀의 독기어린 증오 (1)조회 : 1,0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37 34.#33 행복해질 자격 (14)조회 : 8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84 33.#32 행복해질 자격 (13)조회 : 1,12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28 32.#31 행복해질 자격 (12)조회 : 1,14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27 31.#30 행복해질 자격 (11)조회 : 25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67 30.#29 행복해질 자격 (10)조회 : 9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5 29.#28 행복해질 자격 (9)조회 : 30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28 28.#27 행복해질 자격 (8)조회 : 14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01 27.#26 행복해질 자격 (7)조회 : 1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84 26.#25 행복해질 자격 (6)조회 : 17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11 25.#24 행복해질 자격 (5)조회 : 12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05 24.#23 행복해질 자격 (4)조회 : 17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15 23.#22 행복해질 자격 (3)조회 : 2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68 22.#21 행복해질 자격 (2)조회 : 10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37 21.#20 행복해질 자격 (1)조회 : 28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6 20.#19 카오스톰 (11)조회 : 41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75 19.#18 카오스톰 (10)조회 : 10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72 18.#17 카오스톰 (9)조회 : 13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74 17.#16 카오스톰 (8)조회 : 1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67 16.#15 카오스톰 (7)조회 : 1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593 15.#14 카오스톰 (6)조회 : 18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02 14.#13 카오스톰 (5)조회 : 1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28 13.#12 카오스톰 (4)조회 : 17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1 12.#11 카오스톰 (3)조회 : 1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09 11.#10 카오스톰 (2)조회 : 19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15 10.#9 카오스톰 (1)조회 : 22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99 9.#8 재회 (4)조회 : 21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5 8.#7 재회 (3)조회 : 31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66 7.#6 재회 (2)조회 : 25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52 6.#5 재회 (1)조회 : 26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40 5.#4 저주의 시작 (4)조회 : 2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60 4.#3 저주의 시작 (3)조회 : 2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26 3.#2 저주의 시작 (2)조회 : 339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164 2.#1 저주의 시작 (1)조회 : 410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318 1.프롤로그조회 : 1,481 추천 : 1 댓글 : 0 글자 : 2,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