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행복해질 자격 (13)
조회 : 1,112 추천 : 0 글자수 : 5,228 자 2023-07-26
이스티나를 바라보는 올리비아의 눈빛이 광기와 분노로 흉흉했다.
방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싸해지고,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목을 조르는 느낌이 들었다.
테시엘은 침을 꿀꺽 삼키며 몰래 손을 검에 갖다 대었다. 이스티나도 한 손으로 에멜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지팡이를 꽈악- 쥐었다.
에멜리타는 벌벌 떨며 이스티나의 목을 동앗줄이라도 된 것처럼 더 힘껏 끌어안았다.
"지금...저더러 그 마녀의 아이를 도우라는 겁니까? 누구 좋으라고."
"올리비아. 일단 진정을..."
"우리 마녀 일족이!"
쾅-
올리비아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 미친 여자 때문에 무슨 수모를 당했는지, 수호자께서는 죽어도 모를 겁니다."
감정이 격해지면서 애써 잠궈놨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인간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 죽은 플로라, 사랑하는 연인에게 잔혹하게 버림받은 제니스, 학교에서 따돌림받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코델리아, 그리고 학회에서 쫓겨난 자신.
모두 그 여자가 벌인 4년 전 사건 이후, 마녀 일족에게 생긴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진심으로 억울했다. 그네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길래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외쳐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말이지 절망스러웠다.
주먹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올리비아..."
이스티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올리비아에게 건네었다.
그러나,
탁-
동정조차 받기 싫다는 듯, 올리비아는 이스티나의 손을 쳐냈다. 이스티나의 손을 떠난 손수건은 형편없는 모양으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걸 본 테시엘과 에멜리타는 경악했다.
"티나, 너 괜찮아?"
"...괜찮다. 신경쓰지 마라."
"거짓말 하지마. 너 손이 빨갛잖아!"
테시엘의 말에 이스티나는 자신을 손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테시엘의 말대로 손에 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몸에 상처가 생기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테니까.
하지만 가슴이 비수를 꽂은 것처럼 아팠다. 거절당한 게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 사이, 싸늘한 시선이 에멜리타를 향했다. 올리비아와 시선을 마주한 에멜리타는 움찔했다. 금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올리비아의 한 마디에 셋 모두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에멜리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 눈물에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하건만, 올리비아는 오히려 경멸의 눈빛을 보내기만 하였다.
"이 저주받은 것! 두 번 다시 마녀 일족에 얼굴을 들이밀지도 마라. 꼴도 보기 싫으니!"
지금의 올리비아에게 있어서 에멜리타는 그저 로엔과 같은 끔찍한 원수일 뿐이었다.
"흡, 으아아앙!"
울먹거리던 에멜리타는 이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이스티나는 베일을 걷어 에멜리타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저렇게까지 발작하니 지금은 에멜리타를 숨겨야 했다. 그것이 양쪽에게 있어 최선이었다.
에멜리타의 모습이 올리비아를 미치게 했다. 진짜로 울고 싶은 건 자신인데.
"왜 우는 거지. 네가 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뭐가 어째! 이 무례한..."
"테스."
이스티나는 올리비아에게 따지려는 테시엘을 한 손으로 저지하였다. 그러고는 에멜리타를 안은 채 올리비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올리비아, 로엔을 미워하는 자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라네."
"하! 뭐라고요? 대체 뭘 안다고요. 당신은 로엔의 친우잖습니까!"
"진정하게. 나는 로엔의 편을 들려는 것이 아닐세. 이 아이도 로엔의 피해자이니, 아이한테까지 화내지 말게."
이스티나의 말에 올리비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애 따위, 저희는 모릅니다."
"올리비아..."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이스티나를 보니 더욱 더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마치 천 위에 떨어진 물감 한 방울처럼, 로엔을 향한 증오가 점점 몸집을 키워갔다.
한 사람을 향한 미움은 그 주변인에게로도 퍼져나갔다. 올리비아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그 여자만 아니었다면...'
학회장이 되어 권력을 누리고, 일족의 이름을 더 빛나게 할 수 있었는데.
그 모든 노력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최고가 아닌 건 그녀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흥분할 대로 흥분한 올리비아는 이내 선을 넘고 말았다. 평소 품격을 유지하던 그녀답지 못한 모습이었다.
"하긴, 그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더러운 핏줄들끼리 잘 어울리는군요."
"올리비아 루미너스!"
최고를 가질 수 없다면, 자기보다 낮은 것을 밟기라도 해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모욕에 테시엘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검을 뽑으려 했다. 이스티나는 자신의 친구인 걸 떠나서, 왕국에서 인정한 수호자였다.
그런 고귀한 존재가 이런 모욕을 들을 이유따윈 하나도 없었다.
그때, 이스티나가 자신의 손을 테시엘의 손 위에 얹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이 손등으로 스며들었다.
테시엘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스티나를 쳐다보았다.
"티나, 저 여자가 널 모욕하게 그냥 둘 거야? 이건 왕국을 향해 도전장 던지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아카데미 다니던 시절, 자신의 친구가 핏줄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티나의 이런 행동이 답답하고 울분이 터졌다.
하지만 이스티나는 평정심을 유지한 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테시엘을 달랬다.
"테스, 네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럼!"
"하지만 이 자는 마녀 일족의 수장이다. 섣불리 건드리면 왕국이 피해를 입게 돼."
"......"
테시엘은 심호흡을 하며 검에서 손을 뗐다. 분하지만 이스티나의 말이 백번 옳았다.
마녀 일족은 왕국 소속이 아니었다. 그저 왕국과 동맹을 맺은 이종족 중 하나일뿐.
그들이 가진 마법 관련 지식과 기술은 다른 종족도 탐낼 정도로 훌륭했다. 그것이 마녀 일족과 왕국이 동맹을 맺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 어떤 이유든 마녀 일족의 수장을 건드린다면, 동맹에 큰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물론 왕국을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소중한 친구가 곤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하지만 위기를 막아주었음에도 올리비아는 감사의 인사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제가 경고 하나 드리죠, 수호자 님."
"무엇을 말인가?"
이스티나의 물음에 올리비아는 손가락 끝으로 에멜리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당장이라도 저 손끝에서 마법이 나와 에멜리타에게 해를 가할 것 같아 이스티나는 침조차 삼키지 않았다.
"저 아이는 언젠가 수호자 님을 파멸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
"제 어미가 일족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처럼."
말도 안되는 억지였다. 부모가 더럽다고 그 자식까지 더럽다는 건 대체 어디서 나온 논리인 걸까.
이스티나와 테시엘이 멍하니 있는 사이, 올리비아는 손을 내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한번만 더 저 아이가 제 눈에 띤다면."
"......"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 것이니 그렇게 아십시오."
"...약속하겠네."
"그럼 전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소매로 눈물을 대충 닦은 올리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쳐 지나가려던 중, 올리비아는 이스티나 옆에 멈춰섰다.
에멜리타의 얼굴이 베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미세한 떨림과 흐느끼는 소리로 보아하니 아직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일족의 수치 같으니."
올리비아는 에멜리타를 벌레 보듯이 내려다보고는 이내 먼저 자리를 떠났다.
"뭐 저런 미친 여자가 다 있어?!"
"테스, 진정해라. 에멜이 울고 있다."
"아! 미, 미안."
테시엘은 바닥에 떨어진 이스티나의 손수건을 주워들었다. 먼지가 잔뜩 묻은 모습이 어쩐지 볼품없어 보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티나, 이제 에멜의 눈물을 닦아줘야 하지 않아?"
"그렇긴 하구나. 손수건은 못 쓸테니, 세수를 시키는 게 좋겠지."
"아냐, 잠깐만. 내 거 줄테니까 이걸 써."
테시엘은 품에서 초록색 손수건을 꺼내어 이스티나에게 건네주었다. 검술 대회에 나갈 때, 자신을 존경하는 한 남작가 영애가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 증거로 손수건 끄트머리에 테시엘의 이니셜이 분홍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나비 모양과 함께.
"정말로 써도 되겠느냐?"
이스티나의 물음에 테시엘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아니면 먼지투성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을 거야?"
"흠, 알았다. 손수건은 잘 쓰마. 쓰고 빨아서..."
"거 참! 친구 사이에 따지는 게 왜 이렇게 많아. 그냥 줘."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테시엘이 투덜거렸다. 더 말하다가는 테시엘이 난리를 칠 것 같아 이스티나는 조용히 손수건으로 에멜리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미안하구나."
"응? 뭐가 미안한데?"
"얘기를 나누기로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구나."
올리비아에게서 저주의 실마리를 얻으려던 계획이 무산된데다, 에멜리타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눈물을 많이 쏟아내서 그런지 에멜리타의 울음이 잦아들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길을 잃어서 무서웠을텐데.
"아, 난 또 뭐라고. 어차피 너 수도에 오래 머물 거라며?"
"그렇긴 하다만."
"그럼 됐네. 날이야 언제든 잡으면 돼지. 안 그래?"
테시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윙크했다. 그 모습에 이스티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카데미를 다닐 때나 지금이나, 테시엘은 여전히 자유분방하고 생기가 넘쳤다. 어쩌면 자신이 끌리는 것도 테시엘의 이런 면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실망할 필요도, 조급해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에멜리타의 마음이 걱정되었다. 이 일로 수도에 오는 걸 싫어하게 될까봐 걱정되었다.
오늘이 에멜리타에게 있어 슬픈 날이 될 줄 알았다면, 수도 구경을 먼저 할 걸.
아니, 애초에 올리비아를 만나지 말 걸 그랬다. 저주를 푸는데 집중한 나머지, 세세한 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하루를 망치고 말았다. 이스티나는 마음 속 깊이 후회했다.
방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싸해지고,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목을 조르는 느낌이 들었다.
테시엘은 침을 꿀꺽 삼키며 몰래 손을 검에 갖다 대었다. 이스티나도 한 손으로 에멜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지팡이를 꽈악- 쥐었다.
에멜리타는 벌벌 떨며 이스티나의 목을 동앗줄이라도 된 것처럼 더 힘껏 끌어안았다.
"지금...저더러 그 마녀의 아이를 도우라는 겁니까? 누구 좋으라고."
"올리비아. 일단 진정을..."
"우리 마녀 일족이!"
쾅-
올리비아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 미친 여자 때문에 무슨 수모를 당했는지, 수호자께서는 죽어도 모를 겁니다."
감정이 격해지면서 애써 잠궈놨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인간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 죽은 플로라, 사랑하는 연인에게 잔혹하게 버림받은 제니스, 학교에서 따돌림받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코델리아, 그리고 학회에서 쫓겨난 자신.
모두 그 여자가 벌인 4년 전 사건 이후, 마녀 일족에게 생긴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진심으로 억울했다. 그네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길래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외쳐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말이지 절망스러웠다.
주먹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올리비아..."
이스티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올리비아에게 건네었다.
그러나,
탁-
동정조차 받기 싫다는 듯, 올리비아는 이스티나의 손을 쳐냈다. 이스티나의 손을 떠난 손수건은 형편없는 모양으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걸 본 테시엘과 에멜리타는 경악했다.
"티나, 너 괜찮아?"
"...괜찮다. 신경쓰지 마라."
"거짓말 하지마. 너 손이 빨갛잖아!"
테시엘의 말에 이스티나는 자신을 손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테시엘의 말대로 손에 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몸에 상처가 생기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테니까.
하지만 가슴이 비수를 꽂은 것처럼 아팠다. 거절당한 게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 사이, 싸늘한 시선이 에멜리타를 향했다. 올리비아와 시선을 마주한 에멜리타는 움찔했다. 금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올리비아의 한 마디에 셋 모두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에멜리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 눈물에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하건만, 올리비아는 오히려 경멸의 눈빛을 보내기만 하였다.
"이 저주받은 것! 두 번 다시 마녀 일족에 얼굴을 들이밀지도 마라. 꼴도 보기 싫으니!"
지금의 올리비아에게 있어서 에멜리타는 그저 로엔과 같은 끔찍한 원수일 뿐이었다.
"흡, 으아아앙!"
울먹거리던 에멜리타는 이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이스티나는 베일을 걷어 에멜리타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저렇게까지 발작하니 지금은 에멜리타를 숨겨야 했다. 그것이 양쪽에게 있어 최선이었다.
에멜리타의 모습이 올리비아를 미치게 했다. 진짜로 울고 싶은 건 자신인데.
"왜 우는 거지. 네가 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뭐가 어째! 이 무례한..."
"테스."
이스티나는 올리비아에게 따지려는 테시엘을 한 손으로 저지하였다. 그러고는 에멜리타를 안은 채 올리비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올리비아, 로엔을 미워하는 자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라네."
"하! 뭐라고요? 대체 뭘 안다고요. 당신은 로엔의 친우잖습니까!"
"진정하게. 나는 로엔의 편을 들려는 것이 아닐세. 이 아이도 로엔의 피해자이니, 아이한테까지 화내지 말게."
이스티나의 말에 올리비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애 따위, 저희는 모릅니다."
"올리비아..."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이스티나를 보니 더욱 더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마치 천 위에 떨어진 물감 한 방울처럼, 로엔을 향한 증오가 점점 몸집을 키워갔다.
한 사람을 향한 미움은 그 주변인에게로도 퍼져나갔다. 올리비아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그 여자만 아니었다면...'
학회장이 되어 권력을 누리고, 일족의 이름을 더 빛나게 할 수 있었는데.
그 모든 노력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최고가 아닌 건 그녀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흥분할 대로 흥분한 올리비아는 이내 선을 넘고 말았다. 평소 품격을 유지하던 그녀답지 못한 모습이었다.
"하긴, 그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더러운 핏줄들끼리 잘 어울리는군요."
"올리비아 루미너스!"
최고를 가질 수 없다면, 자기보다 낮은 것을 밟기라도 해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모욕에 테시엘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검을 뽑으려 했다. 이스티나는 자신의 친구인 걸 떠나서, 왕국에서 인정한 수호자였다.
그런 고귀한 존재가 이런 모욕을 들을 이유따윈 하나도 없었다.
그때, 이스티나가 자신의 손을 테시엘의 손 위에 얹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이 손등으로 스며들었다.
테시엘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스티나를 쳐다보았다.
"티나, 저 여자가 널 모욕하게 그냥 둘 거야? 이건 왕국을 향해 도전장 던지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아카데미 다니던 시절, 자신의 친구가 핏줄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티나의 이런 행동이 답답하고 울분이 터졌다.
하지만 이스티나는 평정심을 유지한 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테시엘을 달랬다.
"테스, 네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럼!"
"하지만 이 자는 마녀 일족의 수장이다. 섣불리 건드리면 왕국이 피해를 입게 돼."
"......"
테시엘은 심호흡을 하며 검에서 손을 뗐다. 분하지만 이스티나의 말이 백번 옳았다.
마녀 일족은 왕국 소속이 아니었다. 그저 왕국과 동맹을 맺은 이종족 중 하나일뿐.
그들이 가진 마법 관련 지식과 기술은 다른 종족도 탐낼 정도로 훌륭했다. 그것이 마녀 일족과 왕국이 동맹을 맺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 어떤 이유든 마녀 일족의 수장을 건드린다면, 동맹에 큰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물론 왕국을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소중한 친구가 곤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하지만 위기를 막아주었음에도 올리비아는 감사의 인사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제가 경고 하나 드리죠, 수호자 님."
"무엇을 말인가?"
이스티나의 물음에 올리비아는 손가락 끝으로 에멜리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당장이라도 저 손끝에서 마법이 나와 에멜리타에게 해를 가할 것 같아 이스티나는 침조차 삼키지 않았다.
"저 아이는 언젠가 수호자 님을 파멸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
"제 어미가 일족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처럼."
말도 안되는 억지였다. 부모가 더럽다고 그 자식까지 더럽다는 건 대체 어디서 나온 논리인 걸까.
이스티나와 테시엘이 멍하니 있는 사이, 올리비아는 손을 내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한번만 더 저 아이가 제 눈에 띤다면."
"......"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 것이니 그렇게 아십시오."
"...약속하겠네."
"그럼 전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소매로 눈물을 대충 닦은 올리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쳐 지나가려던 중, 올리비아는 이스티나 옆에 멈춰섰다.
에멜리타의 얼굴이 베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미세한 떨림과 흐느끼는 소리로 보아하니 아직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일족의 수치 같으니."
올리비아는 에멜리타를 벌레 보듯이 내려다보고는 이내 먼저 자리를 떠났다.
"뭐 저런 미친 여자가 다 있어?!"
"테스, 진정해라. 에멜이 울고 있다."
"아! 미, 미안."
테시엘은 바닥에 떨어진 이스티나의 손수건을 주워들었다. 먼지가 잔뜩 묻은 모습이 어쩐지 볼품없어 보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티나, 이제 에멜의 눈물을 닦아줘야 하지 않아?"
"그렇긴 하구나. 손수건은 못 쓸테니, 세수를 시키는 게 좋겠지."
"아냐, 잠깐만. 내 거 줄테니까 이걸 써."
테시엘은 품에서 초록색 손수건을 꺼내어 이스티나에게 건네주었다. 검술 대회에 나갈 때, 자신을 존경하는 한 남작가 영애가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 증거로 손수건 끄트머리에 테시엘의 이니셜이 분홍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나비 모양과 함께.
"정말로 써도 되겠느냐?"
이스티나의 물음에 테시엘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아니면 먼지투성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을 거야?"
"흠, 알았다. 손수건은 잘 쓰마. 쓰고 빨아서..."
"거 참! 친구 사이에 따지는 게 왜 이렇게 많아. 그냥 줘."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테시엘이 투덜거렸다. 더 말하다가는 테시엘이 난리를 칠 것 같아 이스티나는 조용히 손수건으로 에멜리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미안하구나."
"응? 뭐가 미안한데?"
"얘기를 나누기로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구나."
올리비아에게서 저주의 실마리를 얻으려던 계획이 무산된데다, 에멜리타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눈물을 많이 쏟아내서 그런지 에멜리타의 울음이 잦아들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길을 잃어서 무서웠을텐데.
"아, 난 또 뭐라고. 어차피 너 수도에 오래 머물 거라며?"
"그렇긴 하다만."
"그럼 됐네. 날이야 언제든 잡으면 돼지. 안 그래?"
테시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윙크했다. 그 모습에 이스티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카데미를 다닐 때나 지금이나, 테시엘은 여전히 자유분방하고 생기가 넘쳤다. 어쩌면 자신이 끌리는 것도 테시엘의 이런 면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실망할 필요도, 조급해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에멜리타의 마음이 걱정되었다. 이 일로 수도에 오는 걸 싫어하게 될까봐 걱정되었다.
오늘이 에멜리타에게 있어 슬픈 날이 될 줄 알았다면, 수도 구경을 먼저 할 걸.
아니, 애초에 올리비아를 만나지 말 걸 그랬다. 저주를 푸는데 집중한 나머지, 세세한 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하루를 망치고 말았다. 이스티나는 마음 속 깊이 후회했다.
작가의 말
부모가 죄인이라고 자식까지 죄인 취급을 당하는 건...현실도 마찬가지라 씁쓸하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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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5 외전 1-마녀와 뱀의 독기어린 증오 (2)조회 : 96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25 35.#34 외전 1-마녀와 뱀의 독기어린 증오 (1)조회 : 1,0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37 34.#33 행복해질 자격 (14)조회 : 8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84 33.#32 행복해질 자격 (13)조회 : 1,12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28 32.#31 행복해질 자격 (12)조회 : 1,14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27 31.#30 행복해질 자격 (11)조회 : 25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67 30.#29 행복해질 자격 (10)조회 : 95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5 29.#28 행복해질 자격 (9)조회 : 30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28 28.#27 행복해질 자격 (8)조회 : 14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01 27.#26 행복해질 자격 (7)조회 : 1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84 26.#25 행복해질 자격 (6)조회 : 17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11 25.#24 행복해질 자격 (5)조회 : 12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05 24.#23 행복해질 자격 (4)조회 : 17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15 23.#22 행복해질 자격 (3)조회 : 2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68 22.#21 행복해질 자격 (2)조회 : 10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37 21.#20 행복해질 자격 (1)조회 : 28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6 20.#19 카오스톰 (11)조회 : 41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75 19.#18 카오스톰 (10)조회 : 10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72 18.#17 카오스톰 (9)조회 : 13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74 17.#16 카오스톰 (8)조회 : 1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67 16.#15 카오스톰 (7)조회 : 1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593 15.#14 카오스톰 (6)조회 : 18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02 14.#13 카오스톰 (5)조회 : 1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28 13.#12 카오스톰 (4)조회 : 17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1 12.#11 카오스톰 (3)조회 : 1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09 11.#10 카오스톰 (2)조회 : 19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15 10.#9 카오스톰 (1)조회 : 22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99 9.#8 재회 (4)조회 : 21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5 8.#7 재회 (3)조회 : 31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66 7.#6 재회 (2)조회 : 25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52 6.#5 재회 (1)조회 : 26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40 5.#4 저주의 시작 (4)조회 : 2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60 4.#3 저주의 시작 (3)조회 : 2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26 3.#2 저주의 시작 (2)조회 : 339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164 2.#1 저주의 시작 (1)조회 : 410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318 1.프롤로그조회 : 1,481 추천 : 1 댓글 : 0 글자 : 2,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