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행복해질 자격 (14)
조회 : 878 추천 : 0 글자수 : 5,584 자 2023-07-30
"......"
이스티나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베르세크는 한동안 침묵했다. 참담한 표정을 짓는 베르세크를 보니 이스티나의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하긴, 신경이 쓰이겠지.'
에멜리타가 애칭을 허락할 정도로 친한 사이인데.
베르세크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찻물이 들어가자, 몸 안에서 온기가 퍼져나가며 마음이 진정되었다.
"에멜이 많이 괴로워했겠군요."
이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비아가 떠나고 나서 나한테 물어보더군."
"뭐라고 말입니까?"
베르세크의 물음에 이스티나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분명 에멜리타를 향한 말임에도 자신의 가슴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괴로웠다.
자신 역시 손가락질을 당할 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있었다. 분명 부모가 원하지 않았던 아이일 거라는.
정말로 자신의 부모도 자신을 낳을 때 후회했을까. 하지만 부모가 누구인지, 행방조차 몰라 알 길이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친부모가 자식에게 저런 말을 하면 그 누구든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스승님이나 친구, 그리고 그 외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해도 말이다.
'로엔...'
친우인, 아니 친우였던 이의 순수한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 사람이니, 분명 아이에게도 사랑을 듬뿍 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았을 때 조금이나마 사랑이 없었던 걸까. 처음부터 로엔에게 있어 아이는 복수의 도구였던 걸까.
그것조차 알 방도가 없었다. 죗값을 치르기도 전에 죽었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죽음이 그녀에게 죗값이었을지도 모른다.
친구로서 이런 생각을 갖는 건 미안했지만, 로엔은 그녀가 지은 죄에 비해 너무 편하게 갔다.
"자신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냐고."
"......"
"자기 때문에 엄마가 죽은 게 맞냐고. 그렇게 묻더군."
"그게 무슨...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잖습니까!"
"베르세크."
이스티나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베르세크를 불렀다. 그러고는 검지를 입에 갖다 대었다.
베르세크도 그제서야 아차 하며 입을 가렸다. 기껏 편히 잠든 에멜리타를 깨울 순 없었기 때문이다.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괜찮네. 부디 신경쓰지 말게."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베르세크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에멜리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자리가 불편한 건지, 에멜리타는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몸을 떠는 걸 보니 추운 것도 같았다.
"수호자 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마음 편히 행동하게. 난 괜찮으니."
"감사합니다."
이스티나를 향해 미소를 지은 베르세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스티나를 지나쳐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에멜리타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옷장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안에 똑같이 생긴 옷이 여러 벌 걸려 있었다. 족히 몇십 벌은 되는 것 같았다.
베르세크는 더 깊숙히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었다. 투명한 상자에 담긴 그것은 활짝 핀 꽃 모양으로 조각된 보라색 양초였다.
수사단에 들어온 지 3년이 되던 해에 붉은 여우 수사단장이 생일선물로 준 양초였다. 불면증에 좋다나 뭐라나.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거의 없기 때문에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이렇게 쓰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도 에멜리타가 편히 잘 수 있다면.'
베르세크는 바지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었다. 성냥 하나를 꺼내어 옆면을 두어번 긁자, 불꽃이 화악- 피어올랐다.
그 사이, 이스티나 역시 에멜리타가 걱정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에멜리타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이스티나는 지팡이를 휘두르자, 무지갯빛 가루와 함께 테시엘에게 선물받았던 유니콘 인형이 나타났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흐트러진 실땀 하나없이 깔끔했다. 인형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누르자, 폭신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게다가 인형에 넬렌의 가루가 뿌려져 있다고 하니, 기대해 볼 만 했다.
이스티나는 살며시 에멜리타의 팔을 올리고는 그 사이에 유니콘 인형을 넣었다. 그러자 에멜리타가 인형을 품에 안더니 배시시 웃었다.
향을 피운 건지 좋은 냄새가 방 안에 퍼져나갔다. 긴장이 풀린 건지 에멜리타도 더 이상 떨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이스티나는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구나.'
"수호자 님, 에멜은 어떻습니까? 추워하는 것 같아서 향초를 좀 켰습니다만."
향을 피운 게 아니라 향초를 킨 것이었나. 어쩐지 뭔가 다르다 싶었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익숙한 향이었다.
'라벤더 향이라...'
분명 옛날에 스승님도 자신이 악몽을 꿨을 때, 라벤더 향이 나는 향초를 켜주었다. 게다가 늘 쓰는 이불에서 나는 향도 라벤더였다.
이렇게 보니 괜스레 스승님이 그리워졌다. 지금의 자신을 보면 스승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
"수호자 님?"
베르세크가 한 번 더 자신을 부르자, 이스티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안심하게. 편히 자고 있으니."
"다행이군요."
"에멜이 걱정되는 겐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있습니까. 에멜은 제...소중한 친구인 걸요."
"그렇군."
향초에 붙은 불이 일렁이며 두 사람의 그림자가 그려졌다.
주홍빛 정적 속에서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베르세크였다.
"수호자 님, 제가 수사단 일을 하면서 보기 힘들었던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베르세크, 자네 지금 불안해 보이네. 괴로우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네."
이스티나의 말에 베르세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전 괜찮으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말처럼 괜찮아 보이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스티나는 추궁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베르세크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범죄자의 가족이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는 것입니다."
"......"
"그저, 범죄자와 가깝다는 이유로."
고통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
베르세크는 양손으로 깍지를 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을 감은 베르세크는 과거 한 사건을 떠올렸다.
16년 전, 한 남자가 결혼식장에 난입해 신랑과 신부는 물론 하객들까지 전부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빠른 신고 덕분에 남은 생존자를 보호할 수 있었지만, 범인을 체포할 수 없었다. 수사단이 온 걸 눈치채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범인이 없어졌기 때문에 유족들의 원망과 분노는 고스란히 범인의 가족들에게로 옮겨졌다.
어머니와 아이였는데 그들은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데다, 한 명은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유족들에게 아무 상관도 없어보였다.
유족들은 매일같이 범인의 집에 찾아가 그 가족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심할 때는 오물이나 썩은 계란을 문에 던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와 아이는 그들에게 죄송하다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자주 한 건지 여자는 목을 쉽게 펴지 못했다.
가족들 역시 처형해야 한다며 무기를 들고 왔을 때는 정말 소름이 끼쳤다. 만약 그 자리에 자신이 없었다면 둘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장님, 단장님도 저들과 한 패인가요?!
-비켜요! 당신이 호위기사라도 되는 거예요, 뭐예요!
그들을 저지하자, 원망의 화살이 자신에게도 쏟아졌다. 마치 자신이 그들을 배신한 것처럼, 그들 스스로가 절대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구는 모습이 그렇게 가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한번은 어머니 쪽이 자신들을 내버려두라고 한 적 있었다.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면서.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럴 마음도 없었다.
비록 모자가 신변보호를 요청하지 않았지만, 이대로 두고볼 수만은 없었다. 개인적으로 모자가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아무리 사연이 이해된다고 해도 저들의 행동은 선을 넘었다.
원래는 수사단에서 몇 명 뽑아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면서 순찰을 돌게 할 생각이었지만, 지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들 중 유일하게 찬성한 로드윅과 둘이서 번갈아가며 모자를 지켰다. 이걸로 모자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당시엔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그건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건 어느날, 모자의 집에서 싸늘하게 식은 여자를 발견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
범인도 여자도 친척이 없으니, 아이에게 남은 선택지는 성전 뿐이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때 보았던 아이의 등은 작고 연약해보였다. 저 아이가 이 험한 세상 속에서 잘 살아낼 수 있을까.
하다못해 잘 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어깨를 토닥여주려고 뻗었던 손은 망설임에 갈 곳을 잃고 결국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아이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어머니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원망하지 않을까.
늘 빛나던 은빛늑대 문장이 그날따라 초라하게 보였다. 베르세크는 씁쓸하게 웃었다.
"참 모순적인 일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 주변 사람이 죗값을 치뤄야한다니요."
베르세크의 말에 이스티나는 울부짖던 올리비아를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마녀 일족도 나름 고된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
로엔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는 점에서 에멜리타와 마녀 일족은 비슷한 처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동지애가 생기는 게 아니였다.
'내가 잘못 판단하다니, 현자라는 이름이 울겠구나.'
어쩌면 현자라는 칭호는 자신에게 과분한 걸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자신을 따르고 칭송하던 이들에겐 미안한 생각이지만.
보통 인간이라면 괴리를 인정 못하고 스스로를 다그칠 것이다. 하지만 이스티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건 실수지만, 동시에 세상을 향해 좀 더 눈과 귀를 열어볼 기회였다.
"베르세크, 자네는 수사단장으로서 유능하네. 그걸 빼도 난 자네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네."
"수호자 님?"
"난 오랫동안 남쪽에 있어서 왕국의 사정을 잘 모른다네. 안다고 해도 거의 낡은 지식 뿐이니, 수도에 있는 동안 자네가 날 가르쳐줬으면 하네."
정보를 더 확보해야 했다. 그래야 루비아 때와 같은 돌발상황도 방지하고, 에멜리타가 올바르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데 도움이 될테니까.
베르세크는 깜짝 놀랐다. 왕국에서 고귀한 이가 한낮 기사인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다니.
이제까지 봐왔던 높으신 분들은 자존심을 내세우기 바빠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쪽 수호자는 자신을 낮추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과연 현자라는 칭호에 걸맞는 분이셨다.
베르세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라도 수호자 님께 도움이 된다면 영광입니다."
"영광이라고 할 것까진 없네. 에멜의 행복을 바라는 건 자네나 나나 마찬가지이니."
"그래도, 정말 기쁩니다. 수호자 님과 한 배를 타게 되다니."
초를 밝혔음에도 싸늘했던 방이 진정으로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스티나와 베르세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에멜리타가 자는 동안, 둘은 차를 마시고 다과를 즐기며 한참동안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스티나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베르세크는 한동안 침묵했다. 참담한 표정을 짓는 베르세크를 보니 이스티나의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하긴, 신경이 쓰이겠지.'
에멜리타가 애칭을 허락할 정도로 친한 사이인데.
베르세크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찻물이 들어가자, 몸 안에서 온기가 퍼져나가며 마음이 진정되었다.
"에멜이 많이 괴로워했겠군요."
이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비아가 떠나고 나서 나한테 물어보더군."
"뭐라고 말입니까?"
베르세크의 물음에 이스티나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분명 에멜리타를 향한 말임에도 자신의 가슴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괴로웠다.
자신 역시 손가락질을 당할 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있었다. 분명 부모가 원하지 않았던 아이일 거라는.
정말로 자신의 부모도 자신을 낳을 때 후회했을까. 하지만 부모가 누구인지, 행방조차 몰라 알 길이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친부모가 자식에게 저런 말을 하면 그 누구든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스승님이나 친구, 그리고 그 외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해도 말이다.
'로엔...'
친우인, 아니 친우였던 이의 순수한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 사람이니, 분명 아이에게도 사랑을 듬뿍 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았을 때 조금이나마 사랑이 없었던 걸까. 처음부터 로엔에게 있어 아이는 복수의 도구였던 걸까.
그것조차 알 방도가 없었다. 죗값을 치르기도 전에 죽었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죽음이 그녀에게 죗값이었을지도 모른다.
친구로서 이런 생각을 갖는 건 미안했지만, 로엔은 그녀가 지은 죄에 비해 너무 편하게 갔다.
"자신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냐고."
"......"
"자기 때문에 엄마가 죽은 게 맞냐고. 그렇게 묻더군."
"그게 무슨...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잖습니까!"
"베르세크."
이스티나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베르세크를 불렀다. 그러고는 검지를 입에 갖다 대었다.
베르세크도 그제서야 아차 하며 입을 가렸다. 기껏 편히 잠든 에멜리타를 깨울 순 없었기 때문이다.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괜찮네. 부디 신경쓰지 말게."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베르세크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에멜리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자리가 불편한 건지, 에멜리타는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몸을 떠는 걸 보니 추운 것도 같았다.
"수호자 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마음 편히 행동하게. 난 괜찮으니."
"감사합니다."
이스티나를 향해 미소를 지은 베르세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스티나를 지나쳐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에멜리타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옷장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안에 똑같이 생긴 옷이 여러 벌 걸려 있었다. 족히 몇십 벌은 되는 것 같았다.
베르세크는 더 깊숙히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었다. 투명한 상자에 담긴 그것은 활짝 핀 꽃 모양으로 조각된 보라색 양초였다.
수사단에 들어온 지 3년이 되던 해에 붉은 여우 수사단장이 생일선물로 준 양초였다. 불면증에 좋다나 뭐라나.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거의 없기 때문에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이렇게 쓰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도 에멜리타가 편히 잘 수 있다면.'
베르세크는 바지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었다. 성냥 하나를 꺼내어 옆면을 두어번 긁자, 불꽃이 화악- 피어올랐다.
그 사이, 이스티나 역시 에멜리타가 걱정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에멜리타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이스티나는 지팡이를 휘두르자, 무지갯빛 가루와 함께 테시엘에게 선물받았던 유니콘 인형이 나타났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흐트러진 실땀 하나없이 깔끔했다. 인형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누르자, 폭신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게다가 인형에 넬렌의 가루가 뿌려져 있다고 하니, 기대해 볼 만 했다.
이스티나는 살며시 에멜리타의 팔을 올리고는 그 사이에 유니콘 인형을 넣었다. 그러자 에멜리타가 인형을 품에 안더니 배시시 웃었다.
향을 피운 건지 좋은 냄새가 방 안에 퍼져나갔다. 긴장이 풀린 건지 에멜리타도 더 이상 떨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이스티나는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구나.'
"수호자 님, 에멜은 어떻습니까? 추워하는 것 같아서 향초를 좀 켰습니다만."
향을 피운 게 아니라 향초를 킨 것이었나. 어쩐지 뭔가 다르다 싶었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익숙한 향이었다.
'라벤더 향이라...'
분명 옛날에 스승님도 자신이 악몽을 꿨을 때, 라벤더 향이 나는 향초를 켜주었다. 게다가 늘 쓰는 이불에서 나는 향도 라벤더였다.
이렇게 보니 괜스레 스승님이 그리워졌다. 지금의 자신을 보면 스승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
"수호자 님?"
베르세크가 한 번 더 자신을 부르자, 이스티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안심하게. 편히 자고 있으니."
"다행이군요."
"에멜이 걱정되는 겐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있습니까. 에멜은 제...소중한 친구인 걸요."
"그렇군."
향초에 붙은 불이 일렁이며 두 사람의 그림자가 그려졌다.
주홍빛 정적 속에서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베르세크였다.
"수호자 님, 제가 수사단 일을 하면서 보기 힘들었던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베르세크, 자네 지금 불안해 보이네. 괴로우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네."
이스티나의 말에 베르세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전 괜찮으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말처럼 괜찮아 보이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스티나는 추궁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베르세크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범죄자의 가족이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는 것입니다."
"......"
"그저, 범죄자와 가깝다는 이유로."
고통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
베르세크는 양손으로 깍지를 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을 감은 베르세크는 과거 한 사건을 떠올렸다.
16년 전, 한 남자가 결혼식장에 난입해 신랑과 신부는 물론 하객들까지 전부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빠른 신고 덕분에 남은 생존자를 보호할 수 있었지만, 범인을 체포할 수 없었다. 수사단이 온 걸 눈치채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범인이 없어졌기 때문에 유족들의 원망과 분노는 고스란히 범인의 가족들에게로 옮겨졌다.
어머니와 아이였는데 그들은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데다, 한 명은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유족들에게 아무 상관도 없어보였다.
유족들은 매일같이 범인의 집에 찾아가 그 가족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심할 때는 오물이나 썩은 계란을 문에 던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와 아이는 그들에게 죄송하다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자주 한 건지 여자는 목을 쉽게 펴지 못했다.
가족들 역시 처형해야 한다며 무기를 들고 왔을 때는 정말 소름이 끼쳤다. 만약 그 자리에 자신이 없었다면 둘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장님, 단장님도 저들과 한 패인가요?!
-비켜요! 당신이 호위기사라도 되는 거예요, 뭐예요!
그들을 저지하자, 원망의 화살이 자신에게도 쏟아졌다. 마치 자신이 그들을 배신한 것처럼, 그들 스스로가 절대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구는 모습이 그렇게 가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한번은 어머니 쪽이 자신들을 내버려두라고 한 적 있었다.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면서.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럴 마음도 없었다.
비록 모자가 신변보호를 요청하지 않았지만, 이대로 두고볼 수만은 없었다. 개인적으로 모자가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아무리 사연이 이해된다고 해도 저들의 행동은 선을 넘었다.
원래는 수사단에서 몇 명 뽑아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면서 순찰을 돌게 할 생각이었지만, 지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들 중 유일하게 찬성한 로드윅과 둘이서 번갈아가며 모자를 지켰다. 이걸로 모자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당시엔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그건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건 어느날, 모자의 집에서 싸늘하게 식은 여자를 발견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
범인도 여자도 친척이 없으니, 아이에게 남은 선택지는 성전 뿐이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때 보았던 아이의 등은 작고 연약해보였다. 저 아이가 이 험한 세상 속에서 잘 살아낼 수 있을까.
하다못해 잘 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어깨를 토닥여주려고 뻗었던 손은 망설임에 갈 곳을 잃고 결국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아이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어머니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원망하지 않을까.
늘 빛나던 은빛늑대 문장이 그날따라 초라하게 보였다. 베르세크는 씁쓸하게 웃었다.
"참 모순적인 일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 주변 사람이 죗값을 치뤄야한다니요."
베르세크의 말에 이스티나는 울부짖던 올리비아를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마녀 일족도 나름 고된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
로엔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는 점에서 에멜리타와 마녀 일족은 비슷한 처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동지애가 생기는 게 아니였다.
'내가 잘못 판단하다니, 현자라는 이름이 울겠구나.'
어쩌면 현자라는 칭호는 자신에게 과분한 걸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자신을 따르고 칭송하던 이들에겐 미안한 생각이지만.
보통 인간이라면 괴리를 인정 못하고 스스로를 다그칠 것이다. 하지만 이스티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건 실수지만, 동시에 세상을 향해 좀 더 눈과 귀를 열어볼 기회였다.
"베르세크, 자네는 수사단장으로서 유능하네. 그걸 빼도 난 자네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네."
"수호자 님?"
"난 오랫동안 남쪽에 있어서 왕국의 사정을 잘 모른다네. 안다고 해도 거의 낡은 지식 뿐이니, 수도에 있는 동안 자네가 날 가르쳐줬으면 하네."
정보를 더 확보해야 했다. 그래야 루비아 때와 같은 돌발상황도 방지하고, 에멜리타가 올바르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데 도움이 될테니까.
베르세크는 깜짝 놀랐다. 왕국에서 고귀한 이가 한낮 기사인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다니.
이제까지 봐왔던 높으신 분들은 자존심을 내세우기 바빠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쪽 수호자는 자신을 낮추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과연 현자라는 칭호에 걸맞는 분이셨다.
베르세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라도 수호자 님께 도움이 된다면 영광입니다."
"영광이라고 할 것까진 없네. 에멜의 행복을 바라는 건 자네나 나나 마찬가지이니."
"그래도, 정말 기쁩니다. 수호자 님과 한 배를 타게 되다니."
초를 밝혔음에도 싸늘했던 방이 진정으로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스티나와 베르세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에멜리타가 자는 동안, 둘은 차를 마시고 다과를 즐기며 한참동안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작가의 말
이것으로 '행복해질 자격' 에피소드를 마치겠습니다. 다음화부터 '외전 스토리: 로엔과 파스칼 편'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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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5 외전 1-마녀와 뱀의 독기어린 증오 (2)조회 : 96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25 35.#34 외전 1-마녀와 뱀의 독기어린 증오 (1)조회 : 1,00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37 34.#33 행복해질 자격 (14)조회 : 88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84 33.#32 행복해질 자격 (13)조회 : 1,12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28 32.#31 행복해질 자격 (12)조회 : 1,14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27 31.#30 행복해질 자격 (11)조회 : 25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67 30.#29 행복해질 자격 (10)조회 : 9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5 29.#28 행복해질 자격 (9)조회 : 30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28 28.#27 행복해질 자격 (8)조회 : 14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01 27.#26 행복해질 자격 (7)조회 : 1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84 26.#25 행복해질 자격 (6)조회 : 17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11 25.#24 행복해질 자격 (5)조회 : 12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05 24.#23 행복해질 자격 (4)조회 : 17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15 23.#22 행복해질 자격 (3)조회 : 2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68 22.#21 행복해질 자격 (2)조회 : 10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37 21.#20 행복해질 자격 (1)조회 : 28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6 20.#19 카오스톰 (11)조회 : 41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75 19.#18 카오스톰 (10)조회 : 10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72 18.#17 카오스톰 (9)조회 : 13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74 17.#16 카오스톰 (8)조회 : 1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67 16.#15 카오스톰 (7)조회 : 1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593 15.#14 카오스톰 (6)조회 : 18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02 14.#13 카오스톰 (5)조회 : 1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28 13.#12 카오스톰 (4)조회 : 17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1 12.#11 카오스톰 (3)조회 : 1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09 11.#10 카오스톰 (2)조회 : 19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15 10.#9 카오스톰 (1)조회 : 22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99 9.#8 재회 (4)조회 : 21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5 8.#7 재회 (3)조회 : 31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66 7.#6 재회 (2)조회 : 25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52 6.#5 재회 (1)조회 : 26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40 5.#4 저주의 시작 (4)조회 : 2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60 4.#3 저주의 시작 (3)조회 : 2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26 3.#2 저주의 시작 (2)조회 : 339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164 2.#1 저주의 시작 (1)조회 : 410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318 1.프롤로그조회 : 1,488 추천 : 1 댓글 : 0 글자 : 2,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