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외전 1-마녀와 뱀의 독기어린 증오 (1)
조회 : 1,002 추천 : 0 글자수 : 5,137 자 2023-08-11
금지된 동굴 안, 파스칼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어둠을 응시하였다.
퐁- 퐁- 퐁-
종유석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물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밑에 웅덩이가 있는 건지 소리가 가볍게 울려퍼졌다.
우우우- 우우우-
바람인지 울음인지도 모르는 소리가 동굴 안에서 울려퍼졌다.
그 잔잔함을 가르고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파스칼은 눈동자에 힘주었다.
"여전히 버티는 중인건가요?"
"...에이든 이바네센트."
4년 전 '그 사건' 이후, 이 금지된 동굴로 자신을 찾아온 이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주겠다며 아이들을 납치해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울부짖어도, 자신이 거부해도 아무 소용 없었다.
이젠 피가 입에 닿을 때마다 아이들의 우는 얼굴이 떠올라 괴로웠다. 저도 모르게 그 아이들 중 자신의 아이가 있을 거라 생각하니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쯤되면 저주를 푸는 게 아니라 자신이 몸부림치는 걸 즐기러 온 것 같았다. 치가 떨렸다.
칠흑같은 시선과 에메랄드같은 초록빛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자신의 몸이 자유로워진다면, 당장이라도 저 놈의 목에 송곳니를 박아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고통스러워 했던 딱 그 정도의 독을 주입시켜서 말이다.
냉랭한 분위기에도 에이든은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되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좋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한번 지켜보죠."
"...니들 뜻대로 되진 않을거다."
한 글자 한 글자 씹듯이 대답하는 파스칼의 모습에 에이든은 폭소를 터뜨렸다.
"당신은 우리 카오스톰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요."
"너야말로 그 오만함이 치명적인 실수가 될 것이다."
"이런, 남쪽의 수호자가 뒤에 있다고 자신만만 한 건가요? 제가 당신을 너무 풀어줬군요."
말을 마친 에이든은 눈깜짝할새에 파스칼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파스칼의 턱을 잡아 들어올렸다.
그의 눈동자를 본 파스칼은 깜짝 놀랐다. 어둠을 녹인 듯한 눈동자가 어느새 피와 같은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는 게 마치 광기에 휩싸인 것 같아 파스칼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제 그만 포기하시죠, 파스칼 유포리아."
"......"
"당신도 당신의 아이도, 결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어."
에이든의 몸에서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거대한 공포 앞에서 파스칼은 서서히 목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두운 기운이 파스칼의 몸에 스며들려던 그때,
"로드."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기운이 다시 에이든의 몸 속으로 스며들고, 에이든의 눈동자도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에이든은 시선을 파스칼에게 고정한 채 뒤에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세실?"
"그 분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이런...그 분도 참. 마음이 급하신가 보군요."
가볍게 웃은 에이든은 파스칼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어쨌든 괜한 반항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누구도 당신을 구하지 못할 테니."
말을 마친 에이든은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상체를 살짝 숙였다.
"모든 것은 왕의 뜻대로."
파스칼이 반응하기도 전에 에이든은 몸을 돌려 부하들과 함께 동굴을 나갔다. 하지만 동굴에 남아있는 어두운 기운과 떨리는 몸이 그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다.
도대체 저들이 말하는 '왕'은 누구일까. 설마 이 일도 왕이라는 자가 꾸민 걸까.
'로엔...'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당신이 증오에 미쳐서 무슨 짓거리를 벌였는지!
에이든처럼 눈이 붉게 변한 채, 그 날 자신의 아내가 울부짖었다.
결혼하고 적당한 때에 털어놓으려고 했다. 헌데 목격자도 없었던 그 사건을 아는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파스칼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와서 그걸 따진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겠는가. 결국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를 그렇게 망가뜨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하기야, 가족이 전부 죽었는데 그 누가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로엔이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아도 할 말 없었다.
그러나 로엔은 자신을 죽이는 대신 더 끔찍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복수했다.
"......"
순간의 감정으로 아내의 인생을 망치고, 소중한 딸까지 위험에 빠뜨렸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쓰라렸다.
그 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까.
파스칼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기억의 흐름을 거슬러 로엔을 처음 만났던 그 날로 향하였다.
* * *
"오늘부터 우리와 같이 살게 되었단다. 자, 아이야. 이름을 알려주렴."
"아, 안녕하세요. 저는 로엔 리시드예요."
파란머리에 금안을 가진 소녀, 로엔이 수줍게 인사하였다.
"파스칼."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남자의 채근에 소년은 마지못해 로엔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로엔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찾아보자, 소년은 고개를 홱- 돌렸다.
자신을 무시한 거라 생각했는지 로엔은 울먹였다. 그걸 본 남자는 인자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로엔의 어깨를 토닥였다.
"로엔, 미안하지만 방에 먼저 들어가 있으렴. 난 저 아이와 할 얘기가 있어서."
"아, 네!"
남자는 주머니에서 열쇠고리를 꺼내어 로엔에게 건네었다. 열쇠고리를 본 로엔은 눈을 반짝였고, 남자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 네 방 열쇠란다.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렴."
물방울 모양의 푸른 보석 안에 금빛 꽃이 들어있었다. 보석이 자신의 색과 같아서인지, 보석 안에 든 꽃이 신기한 건지 로엔의 눈이 반짝였다.
로엔은 두 손으로 공손히 열쇠를 받고 계단으로 달려갔다.
탁- 탁- 탁-
로엔이 완전히 안보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남자는 파스칼에게 말을 걸었다.
"파스칼, 손님에게 그러면 안되지."
보라색 머리의 소년, 파스칼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시선에도 남자는 고요한 눈으로 파스칼을 쳐다보았다.
"최소한 저한테 언질을 주셨어야죠."
항상 이런 식이었다. 말도 없이 아이를 데려오고, 자신에게 알리는 게 그 다음인 건.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결코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도대체 몇번째인지.
자신이 잘못한 걸 아는 건지 남자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그건...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미안하면 당장 저 애 쫓아내요. 여기는 성전이 아니잖아요."
파스칼의 말에 남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머뭇거리는 걸 보니 들어줄 수 없는 요구인 듯 했다.
"어차피 집도 넓은데, 친구 한두명 더 데려와도 문제 없잖니. 너도 심심하지 않아서 좋을테고."
하지만 파스칼에게 있어 뻔하고 역겨운 변명일 뿐이었다. 자신은 한번도 친구를 바라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쯤되면 사과도 진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하는 도망이 아닐까 싶었다.
남자의 말이 기가 막힌다는 듯 파스칼은 콧방귀를 뀌었다.
"왜요? 마녀 일족한테서 뇌물이라도 받은 거예요?"
"그만하렴, 파스칼. 더 이상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좋게좋게 말하는 남자가 만만해 보였는지, 파스칼은 더 흥분하여 결국 선을 넘고 말았다.
"아니면, 마녀랑 그렇고 그런 사이예요?"
겨우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고 말았다.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파스칼 유포리아."
짝-
파스칼의 풀네임을 부른 남자는 있는 힘껏 파스칼의 뺨을 때렸다. 어찌나 소리가 크던지 위층에 있던 로엔이 움찔했을 정도였다.
세게 친 탓에 파스칼의 고개가 돌아가 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파스칼이 제일 먼저 느낀 건 당황이었다.
1초, 2초, 3초...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을 파악되었다. 파스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머릿속만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널 많이 봐주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거라."
"......"
"지금 대답 안하면 여기에 남을 의지가 없다는 걸로 알고 있으마."
"......"
파스칼은 반항심에 대답하지 않았다. 항상 친절했던 남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결국 자기보다 그 아이가 더 중요한 걸까. 칼로 난도질하듯 심장이 아파왔다.
"아니면, 너희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정신을 차릴거니?"
은근한 압박에 파스칼은 결국 이를 갈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어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부모님이 부탁한 게 있었기 때문에 한 발 물러서야 했다.
"좋다. 이제 방으로 들어가거라."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파스칼은 몸을 돌려 계단으로 걸어갔다. 3층으로 올라가자, 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로엔이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과 똑같은 층에 있는 방을 저 아이에게 준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저 아이가 왜 3층에 있겠는가.
눈을 마주친 로엔은 허겁지겁 달려왔다. 자신의 앞에 서서 손을 뻗는데, 그 방향이 남자에게 맞은 뺨 쪽이었다.
짜증났다. 남자를 미워하기 시작하자, 모든 게 불쾌했다. 순수한 얼굴의 저 아이도 지금은 악마로 보일 뿐이었다.
탁-
결국 로엔의 손을 쳐냈다. 그 탓에 로엔이 뒤로 넘어졌지만, 자신이 신경쓸 일이 아니었다. 저 아이가 울든말든, 지금은 세상에서 자신이 더 불쌍했다.
주저앉은 로엔을 뒤로한 채, 파스칼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쾅-
거의 부서질 기세로 문을 닫은 파스칼은 나무 세숫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물을 떠 얼굴에 촤악- 뿌렸다.
없던 피로마저 도망갈 정도로 물은 차가웠다. 세수는 거칠어지고, 파스칼의 옷마저 젖어들었다.
그렇게 한참 세수를 한 파스칼은 물에 빠졌다 올라온 생쥐 꼴을 한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로엔, 리시드."
파스칼은 로엔의 이름을 읊조렸다. 거울 속에 로엔의 얼굴이 그려지자, 파스칼은 입술을 꺠물었다.
콰장창-
얼마나 세게 내리친 건지 거울조각의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갔다. 주먹 쥔 손은 파편에 베여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깨진 거울 속에 파스칼의 서슬 퍼런 눈빛이 비쳤다.
'증오스러워.'
그들의 만남은 그렇게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
퐁- 퐁- 퐁-
종유석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물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밑에 웅덩이가 있는 건지 소리가 가볍게 울려퍼졌다.
우우우- 우우우-
바람인지 울음인지도 모르는 소리가 동굴 안에서 울려퍼졌다.
그 잔잔함을 가르고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파스칼은 눈동자에 힘주었다.
"여전히 버티는 중인건가요?"
"...에이든 이바네센트."
4년 전 '그 사건' 이후, 이 금지된 동굴로 자신을 찾아온 이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주겠다며 아이들을 납치해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울부짖어도, 자신이 거부해도 아무 소용 없었다.
이젠 피가 입에 닿을 때마다 아이들의 우는 얼굴이 떠올라 괴로웠다. 저도 모르게 그 아이들 중 자신의 아이가 있을 거라 생각하니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쯤되면 저주를 푸는 게 아니라 자신이 몸부림치는 걸 즐기러 온 것 같았다. 치가 떨렸다.
칠흑같은 시선과 에메랄드같은 초록빛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자신의 몸이 자유로워진다면, 당장이라도 저 놈의 목에 송곳니를 박아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고통스러워 했던 딱 그 정도의 독을 주입시켜서 말이다.
냉랭한 분위기에도 에이든은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되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좋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한번 지켜보죠."
"...니들 뜻대로 되진 않을거다."
한 글자 한 글자 씹듯이 대답하는 파스칼의 모습에 에이든은 폭소를 터뜨렸다.
"당신은 우리 카오스톰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요."
"너야말로 그 오만함이 치명적인 실수가 될 것이다."
"이런, 남쪽의 수호자가 뒤에 있다고 자신만만 한 건가요? 제가 당신을 너무 풀어줬군요."
말을 마친 에이든은 눈깜짝할새에 파스칼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파스칼의 턱을 잡아 들어올렸다.
그의 눈동자를 본 파스칼은 깜짝 놀랐다. 어둠을 녹인 듯한 눈동자가 어느새 피와 같은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는 게 마치 광기에 휩싸인 것 같아 파스칼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제 그만 포기하시죠, 파스칼 유포리아."
"......"
"당신도 당신의 아이도, 결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어."
에이든의 몸에서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거대한 공포 앞에서 파스칼은 서서히 목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두운 기운이 파스칼의 몸에 스며들려던 그때,
"로드."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기운이 다시 에이든의 몸 속으로 스며들고, 에이든의 눈동자도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에이든은 시선을 파스칼에게 고정한 채 뒤에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세실?"
"그 분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이런...그 분도 참. 마음이 급하신가 보군요."
가볍게 웃은 에이든은 파스칼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어쨌든 괜한 반항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누구도 당신을 구하지 못할 테니."
말을 마친 에이든은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상체를 살짝 숙였다.
"모든 것은 왕의 뜻대로."
파스칼이 반응하기도 전에 에이든은 몸을 돌려 부하들과 함께 동굴을 나갔다. 하지만 동굴에 남아있는 어두운 기운과 떨리는 몸이 그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다.
도대체 저들이 말하는 '왕'은 누구일까. 설마 이 일도 왕이라는 자가 꾸민 걸까.
'로엔...'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당신이 증오에 미쳐서 무슨 짓거리를 벌였는지!
에이든처럼 눈이 붉게 변한 채, 그 날 자신의 아내가 울부짖었다.
결혼하고 적당한 때에 털어놓으려고 했다. 헌데 목격자도 없었던 그 사건을 아는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파스칼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와서 그걸 따진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겠는가. 결국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를 그렇게 망가뜨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하기야, 가족이 전부 죽었는데 그 누가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로엔이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아도 할 말 없었다.
그러나 로엔은 자신을 죽이는 대신 더 끔찍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복수했다.
"......"
순간의 감정으로 아내의 인생을 망치고, 소중한 딸까지 위험에 빠뜨렸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쓰라렸다.
그 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까.
파스칼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기억의 흐름을 거슬러 로엔을 처음 만났던 그 날로 향하였다.
* * *
"오늘부터 우리와 같이 살게 되었단다. 자, 아이야. 이름을 알려주렴."
"아, 안녕하세요. 저는 로엔 리시드예요."
파란머리에 금안을 가진 소녀, 로엔이 수줍게 인사하였다.
"파스칼."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남자의 채근에 소년은 마지못해 로엔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로엔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찾아보자, 소년은 고개를 홱- 돌렸다.
자신을 무시한 거라 생각했는지 로엔은 울먹였다. 그걸 본 남자는 인자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로엔의 어깨를 토닥였다.
"로엔, 미안하지만 방에 먼저 들어가 있으렴. 난 저 아이와 할 얘기가 있어서."
"아, 네!"
남자는 주머니에서 열쇠고리를 꺼내어 로엔에게 건네었다. 열쇠고리를 본 로엔은 눈을 반짝였고, 남자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 네 방 열쇠란다.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렴."
물방울 모양의 푸른 보석 안에 금빛 꽃이 들어있었다. 보석이 자신의 색과 같아서인지, 보석 안에 든 꽃이 신기한 건지 로엔의 눈이 반짝였다.
로엔은 두 손으로 공손히 열쇠를 받고 계단으로 달려갔다.
탁- 탁- 탁-
로엔이 완전히 안보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남자는 파스칼에게 말을 걸었다.
"파스칼, 손님에게 그러면 안되지."
보라색 머리의 소년, 파스칼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시선에도 남자는 고요한 눈으로 파스칼을 쳐다보았다.
"최소한 저한테 언질을 주셨어야죠."
항상 이런 식이었다. 말도 없이 아이를 데려오고, 자신에게 알리는 게 그 다음인 건.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결코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도대체 몇번째인지.
자신이 잘못한 걸 아는 건지 남자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그건...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미안하면 당장 저 애 쫓아내요. 여기는 성전이 아니잖아요."
파스칼의 말에 남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머뭇거리는 걸 보니 들어줄 수 없는 요구인 듯 했다.
"어차피 집도 넓은데, 친구 한두명 더 데려와도 문제 없잖니. 너도 심심하지 않아서 좋을테고."
하지만 파스칼에게 있어 뻔하고 역겨운 변명일 뿐이었다. 자신은 한번도 친구를 바라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쯤되면 사과도 진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하는 도망이 아닐까 싶었다.
남자의 말이 기가 막힌다는 듯 파스칼은 콧방귀를 뀌었다.
"왜요? 마녀 일족한테서 뇌물이라도 받은 거예요?"
"그만하렴, 파스칼. 더 이상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좋게좋게 말하는 남자가 만만해 보였는지, 파스칼은 더 흥분하여 결국 선을 넘고 말았다.
"아니면, 마녀랑 그렇고 그런 사이예요?"
겨우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고 말았다.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파스칼 유포리아."
짝-
파스칼의 풀네임을 부른 남자는 있는 힘껏 파스칼의 뺨을 때렸다. 어찌나 소리가 크던지 위층에 있던 로엔이 움찔했을 정도였다.
세게 친 탓에 파스칼의 고개가 돌아가 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파스칼이 제일 먼저 느낀 건 당황이었다.
1초, 2초, 3초...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을 파악되었다. 파스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머릿속만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널 많이 봐주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거라."
"......"
"지금 대답 안하면 여기에 남을 의지가 없다는 걸로 알고 있으마."
"......"
파스칼은 반항심에 대답하지 않았다. 항상 친절했던 남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결국 자기보다 그 아이가 더 중요한 걸까. 칼로 난도질하듯 심장이 아파왔다.
"아니면, 너희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정신을 차릴거니?"
은근한 압박에 파스칼은 결국 이를 갈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어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부모님이 부탁한 게 있었기 때문에 한 발 물러서야 했다.
"좋다. 이제 방으로 들어가거라."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파스칼은 몸을 돌려 계단으로 걸어갔다. 3층으로 올라가자, 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로엔이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과 똑같은 층에 있는 방을 저 아이에게 준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저 아이가 왜 3층에 있겠는가.
눈을 마주친 로엔은 허겁지겁 달려왔다. 자신의 앞에 서서 손을 뻗는데, 그 방향이 남자에게 맞은 뺨 쪽이었다.
짜증났다. 남자를 미워하기 시작하자, 모든 게 불쾌했다. 순수한 얼굴의 저 아이도 지금은 악마로 보일 뿐이었다.
탁-
결국 로엔의 손을 쳐냈다. 그 탓에 로엔이 뒤로 넘어졌지만, 자신이 신경쓸 일이 아니었다. 저 아이가 울든말든, 지금은 세상에서 자신이 더 불쌍했다.
주저앉은 로엔을 뒤로한 채, 파스칼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쾅-
거의 부서질 기세로 문을 닫은 파스칼은 나무 세숫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물을 떠 얼굴에 촤악- 뿌렸다.
없던 피로마저 도망갈 정도로 물은 차가웠다. 세수는 거칠어지고, 파스칼의 옷마저 젖어들었다.
그렇게 한참 세수를 한 파스칼은 물에 빠졌다 올라온 생쥐 꼴을 한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로엔, 리시드."
파스칼은 로엔의 이름을 읊조렸다. 거울 속에 로엔의 얼굴이 그려지자, 파스칼은 입술을 꺠물었다.
콰장창-
얼마나 세게 내리친 건지 거울조각의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갔다. 주먹 쥔 손은 파편에 베여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깨진 거울 속에 파스칼의 서슬 퍼런 눈빛이 비쳤다.
'증오스러워.'
그들의 만남은 그렇게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
작가의 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다음화는 늦어도 월요일까지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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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5 외전 1-마녀와 뱀의 독기어린 증오 (2)조회 : 96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25 35.#34 외전 1-마녀와 뱀의 독기어린 증오 (1)조회 : 1,00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37 34.#33 행복해질 자격 (14)조회 : 8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84 33.#32 행복해질 자격 (13)조회 : 1,12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28 32.#31 행복해질 자격 (12)조회 : 1,14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27 31.#30 행복해질 자격 (11)조회 : 25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67 30.#29 행복해질 자격 (10)조회 : 9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5 29.#28 행복해질 자격 (9)조회 : 30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28 28.#27 행복해질 자격 (8)조회 : 14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01 27.#26 행복해질 자격 (7)조회 : 1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84 26.#25 행복해질 자격 (6)조회 : 17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11 25.#24 행복해질 자격 (5)조회 : 12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05 24.#23 행복해질 자격 (4)조회 : 17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15 23.#22 행복해질 자격 (3)조회 : 2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68 22.#21 행복해질 자격 (2)조회 : 10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37 21.#20 행복해질 자격 (1)조회 : 28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6 20.#19 카오스톰 (11)조회 : 41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75 19.#18 카오스톰 (10)조회 : 10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72 18.#17 카오스톰 (9)조회 : 13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74 17.#16 카오스톰 (8)조회 : 1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67 16.#15 카오스톰 (7)조회 : 1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593 15.#14 카오스톰 (6)조회 : 18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02 14.#13 카오스톰 (5)조회 : 1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28 13.#12 카오스톰 (4)조회 : 17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1 12.#11 카오스톰 (3)조회 : 1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09 11.#10 카오스톰 (2)조회 : 19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15 10.#9 카오스톰 (1)조회 : 22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99 9.#8 재회 (4)조회 : 21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5 8.#7 재회 (3)조회 : 31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66 7.#6 재회 (2)조회 : 25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52 6.#5 재회 (1)조회 : 26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40 5.#4 저주의 시작 (4)조회 : 2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60 4.#3 저주의 시작 (3)조회 : 2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26 3.#2 저주의 시작 (2)조회 : 339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164 2.#1 저주의 시작 (1)조회 : 410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318 1.프롤로그조회 : 1,481 추천 : 1 댓글 : 0 글자 : 2,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