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외전 1-마녀와 뱀의 독기어린 증오 (2)
조회 : 962 추천 : 0 글자수 : 5,225 자 2023-09-28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했던 밤이 지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양이 떠올랐다.
창문을 뚫고 햇빛이 파스칼의 얼굴을 비쳤다. 파스칼이 살짝 고개를 움직이자, 목덜미의 보라색 비늘이 드러났다. 햇빛은 그걸 놓치지 않고 하얀 손으로 비늘을 쓰다듬었다.
눈을 찌르는 듯한 느낌에 파스칼은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그러고는 누운 채로 붕대를 대충 감아놓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
거울의 잔조각들이 박혀있고, 피가 덕지덕지 묻은 그 꼴은 누가봐도 흉했다. 마치 상처로 가득한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 파스칼은 입술을 꾹 깨물며 주먹을 쥐었다.
유리조각이 파스칼의 살을 더 깊이 뚫었지만, 파스칼은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채운 건 어제 본 그 어린 마녀뿐이었다.
이름이 로엔 리시드였나.
어깨까지 물결처럼 내려오는 푸른 머리카락, 둥글둥글한 얼굴, 이마에 그려진 문양, 그리고 호박같은 금빛 눈동자...
'잠깐, 금빛 눈동자?'
거기까지 생각하니 뭔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워낙 오래전 기억이라 안개가 낀 듯 머릿속이 희뿌옇게 변했다.
잘못 생각한 거라고 하기엔 너무나 강렬한 기억이었다.
'대체 어디서 본 거지? 대체...'
"파스칼, 내려와서 밥 먹자구나!"
그때, 아래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외침이 파스칼을 상념에서 깨웠다. 머리를 세게 때리는 낭랑한 목소리에 하마터면 어제 있었던 일을 잊을 뻔했다.
빠드득-
어제 자신의 뺨을 쳐놓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하는 게 정말이지 가증스러웠다.
파스칼은 손등으로 자신의 뺨을 쓸었다. 어제 일을 떠올리자, 뺨이 아직도 따가웠다.
이 고아원의 원장이자 초록색 피부가 특징인 위프 족의 족장, 라이톤 헤이미쉬(Ryton Heimish).
길쭉한 귀와 매부리코를 가진 무서운 외양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푸근해서 고아원의 모두가 좋아한다.
하지만 파스칼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지독한 이기주의자라는 걸.
부모도 집도 없는 아이들을 모아 보여주기식으로 보살펴, 자신이 무슨 성인(聖人)이라도 된 것 마냥 어깨펴고 다니는 게 꼴도 보기 싫었다.
뒤에서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면서 말이다.
특히나 자신은 '악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뱀 일족의 일원이었다. 루세니아 교의 신실한 신자인 그의 입장에서 자신은 거슬리는 존재인 건 당연한 일.
하지만 '떠돌이 양들을 거두는 자애로운 인도자'라는 타이틀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나보다. 그게 아니었으면 진작에 쫓겨났을 테니까.
파스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존재인가.
"파스칼, 어서 내려오렴!"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오자, 파스칼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옷장에서 초록색 겉옷을 꺼내 대충 걸쳐 입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파스칼은 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오늘 아침식사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기를.
* * *
"늦었구나, 파스칼."
어제의 그 싸늘한 표정은 착각이라는 듯 라이톤은 인자하게 웃으며 파스칼을 맞이하였다.
심장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표정을 드러낼 수 없어 대신 계단 손잡이를 꽉- 잡았다.
손잡이에 작은 금이 생겼지만, 다행히 라이톤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아, 안녕하세요."
식기를 놓던 로엔도 뒤늦게 파스칼을 발견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파스칼은 말 대신 고개를 까딱였다.
마녀가 싫긴 하지만, 굳이 라이톤의 심기를 건드리면서까지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인사를 주고받는 건 예의라고 배웠다. 딱히 저 마녀가 불쌍한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딱 이정도면 괜찮겠지.'
그렇게 자기합리화하며 파스칼은 힐끗-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파란 줄무늬 식탁보 위에 평소와 같이 건포도 빵에 새하얀 요거트, 오렌지 주스가 차려져 있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잘 구운 고기 꼬치가 접시에 산처럼 쌓여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라이톤이 그렇게 쓰기 싫어했던 향신료가 듬뿍 뿌려진 채.
고기 꼬치 쪽으로 시선을 돌린 파스칼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다시 라이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니? 혹시 배 안 고프니?"
"...아뇨. 아무것도 아니예요."
파스칼은 어금니로 입술을 누르며 실소가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루셀의 서] 교리에 어긋난다고 향신료는 손톱만큼도 안쓰던 양반인데.
대체 마녀 일족, 아니 저 마녀와 무슨 사이이길래 이렇게 각별하게 대하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마녀 일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진 않을텐데.
오랜 시간 봐온 경험으로 비추어보건대, 저 자는 결코 순수한 의도로 아이를 데려올 작자가 아니었다. 차라리 저 마녀를 이용해 뱀 일족을 견제한다면 모를까.
그러면 납득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럴 가치가 있다면 최소한 수장의 혈육 정도는 되어야 한다.
"파스칼, 밥 안 먹을거니?"
라이톤의 목소리에 파스칼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로엔도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먹어요. 지금 내려갈게요."
"좋다. 천천히 오거라."
궁금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일단 배고프니 밥부터 먹고 천천히 방법을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파스칼은 로엔의 건너편에 앉았다.
"자, 그럼. 오늘도 밥 먹기 전에 루세니아 님께 기도를 드리자꾸나."
"그러죠."
대답하는 파스칼과 달리, 로엔은 어리둥절했다.
"기도요?"
"아! 로엔은 모를 수도 있겠구나. 잠시만 기다려보렴."
라이톤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향하였다.
잠시후 돌아온 그의 손에 낡아빠진 파란 표지의 책이 들려 있었다. 금빛 양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걸 보니 <루셀의 서>가 틀림없었다.
배고픔에 인내심이 바닥난 파스칼이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라이톤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파스칼은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뭐든 좋으니 빨리 밥 먹고 싶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손님 앞에서 뱀으로 변할 것 같았다.
이런 파스칼의 속도 모르고, 라이톤은 <루셀의 서>를 펼치고는 책을 촤르르- 넘겼다. 이윽고 그는 한 페이지를 로엔에게 보여주었다.
"자, 로엔. 이 문장을 한번 읽어보겠니?"
초록색 손가락이 책의 한 구절을 가리켰다. 눈을 가늘게 뜬 로엔은 에오니안 어를 배운지 얼마 안된 건지 띄엄띄엄 읽었다.
"나의 야, 양들아. 원하는 것이 이, 있거든 내게 가, 간..."
"간구하라."
"간구하라. 나는 언제 어디든 너희의 모, 목소리를 듣나니."
"그렇지! 잘했구나, 로엔. 파스칼은 이걸 아예 읽지도 못하던데."
기운 넘치는 칭찬에 로엔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라이톤은 미소를 지으며 로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파스칼은 똑똑히 봤다. 라이톤의 경멸어린 시선이 잠깐이나마 자신을 향하고 있었던 것을.
조금은 억울했다. 에오니안 어는 애초에 에온 왕국에 사는 '인간' 종족들의 언어인데. 쓰던 걸 버리고 새로운 걸 쓰라고 하면 그게 쉽게 되겠는가.
여기서 살던 호랑이 수인인 기아트도 에오니안 어에 익숙해지는데 5년이나 걸렸다. 자신도-비록 단어 몇 개를 겨우 외울 정도였지만-쓸 수 있음에도 라이톤은 그를 깔보았다.
'내가 물어볼 때는 알아서 찾아보라고 했으면서.'
역시 라이톤과 마녀 일족 사이에 뭔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건 루세니아 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란다. 그러니 우리는 그 분께 항상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해."
"그럼 그 분은 어디 계신가요? 인사하려면 얼굴 보고 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
로엔의 말에 파스칼은 물을 마시다 말고 로엔을 쳐다보았다.
마녀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오만한 존재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녀 일족에 대한 증오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하하, 기특하구나. 하지만 루세니아 님은 저기 하늘에 계셔서 그 분이 내려오실 수도 없고, 우리가 감히 그 분을 뵐 수 없단다."
"아...그렇군요."
라이톤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로엔의 눈썹이 실망한 듯 축- 늘어졌다.
"그럼 내려와서 먹을 수 없는 루세니아를 대신해서 우리가 배불리 먹지, 뭐."
"파스칼! 그런 무례한 말을 하면 어떡하니."
라이톤이 경악했지만, 파스칼은 눈곱만큼도 신경쓰지 않았다.
솔직히 맛있는 음식을 눈 앞에 두고 잘 참을 수 있는 존재가 몇이나 되겠는가.
식사 끝나면 따로 불려가 혼나겠지만, 로엔과 라이톤의 대화가 끝나는 걸 기다리기엔 이성의 끈이 버틸 수 없었다.
파스칼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로엔은 금빛 눈을 반짝이며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어서 먹어요! 다 맛있어보여서 당장 먹고 싶어요."
"...그래,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안 먹는 건 예의가 아니지."
로엔이 말하고나서야 겨우 라이톤한테서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라이톤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씰룩거리는 입꼬리에서 느껴지는 분노를 파스칼은 놓치지 않았다.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라이톤은 로엔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는 사실을.
파스칼은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늘 라이톤에게 지기만 했는데. 드디어 약점 하나를 잡았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저 위선자에게 크게 한 방 날릴 것이다.
파스칼은 보란듯이 양손 가득 꼬기 꼬치를 쥐었다. 고개를 들진 않았지만, 불타고 있을 라이톤의 속을 떠올리니 쾌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왼손으로 잡은 고기 꼬치를 로엔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이로써 접시에는 꼬치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우리 '가족'이 된 걸 환영해. 자, 여기 고기 꼬치야."
"앗, 네! 가, 감사해요."
로엔은 얼굴을 붉히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스칼은 크게 입을 벌려 꼬치에 꽂힌 고기들을 한번에 다 먹었다.
전에는 맛없는 부위나 싱거운 고기만 먹어서 입맛을 버렸는데. 향신료를 뿌린 고기는 그야말로 맛의 신세계였다.
게다가 육즙이 풍부해서 씹는 재미도 있었다. 이걸 이제야 안 게 후회가 되었다.
슬쩍- 라이톤을 바라보니, 그의 주먹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든 참으려는 모습이 정말 같잖았다.
고개를 살짝 든 파스칼은 초록빛 눈동자에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는 로엔의 모습을 조용히 담았다.
내 '복수'를 위해 널 이용하겠어.
로엔 리시드.
창문을 뚫고 햇빛이 파스칼의 얼굴을 비쳤다. 파스칼이 살짝 고개를 움직이자, 목덜미의 보라색 비늘이 드러났다. 햇빛은 그걸 놓치지 않고 하얀 손으로 비늘을 쓰다듬었다.
눈을 찌르는 듯한 느낌에 파스칼은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그러고는 누운 채로 붕대를 대충 감아놓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
거울의 잔조각들이 박혀있고, 피가 덕지덕지 묻은 그 꼴은 누가봐도 흉했다. 마치 상처로 가득한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 파스칼은 입술을 꾹 깨물며 주먹을 쥐었다.
유리조각이 파스칼의 살을 더 깊이 뚫었지만, 파스칼은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채운 건 어제 본 그 어린 마녀뿐이었다.
이름이 로엔 리시드였나.
어깨까지 물결처럼 내려오는 푸른 머리카락, 둥글둥글한 얼굴, 이마에 그려진 문양, 그리고 호박같은 금빛 눈동자...
'잠깐, 금빛 눈동자?'
거기까지 생각하니 뭔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워낙 오래전 기억이라 안개가 낀 듯 머릿속이 희뿌옇게 변했다.
잘못 생각한 거라고 하기엔 너무나 강렬한 기억이었다.
'대체 어디서 본 거지? 대체...'
"파스칼, 내려와서 밥 먹자구나!"
그때, 아래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외침이 파스칼을 상념에서 깨웠다. 머리를 세게 때리는 낭랑한 목소리에 하마터면 어제 있었던 일을 잊을 뻔했다.
빠드득-
어제 자신의 뺨을 쳐놓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하는 게 정말이지 가증스러웠다.
파스칼은 손등으로 자신의 뺨을 쓸었다. 어제 일을 떠올리자, 뺨이 아직도 따가웠다.
이 고아원의 원장이자 초록색 피부가 특징인 위프 족의 족장, 라이톤 헤이미쉬(Ryton Heimish).
길쭉한 귀와 매부리코를 가진 무서운 외양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푸근해서 고아원의 모두가 좋아한다.
하지만 파스칼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지독한 이기주의자라는 걸.
부모도 집도 없는 아이들을 모아 보여주기식으로 보살펴, 자신이 무슨 성인(聖人)이라도 된 것 마냥 어깨펴고 다니는 게 꼴도 보기 싫었다.
뒤에서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면서 말이다.
특히나 자신은 '악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뱀 일족의 일원이었다. 루세니아 교의 신실한 신자인 그의 입장에서 자신은 거슬리는 존재인 건 당연한 일.
하지만 '떠돌이 양들을 거두는 자애로운 인도자'라는 타이틀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나보다. 그게 아니었으면 진작에 쫓겨났을 테니까.
파스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존재인가.
"파스칼, 어서 내려오렴!"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오자, 파스칼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옷장에서 초록색 겉옷을 꺼내 대충 걸쳐 입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파스칼은 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오늘 아침식사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기를.
* * *
"늦었구나, 파스칼."
어제의 그 싸늘한 표정은 착각이라는 듯 라이톤은 인자하게 웃으며 파스칼을 맞이하였다.
심장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표정을 드러낼 수 없어 대신 계단 손잡이를 꽉- 잡았다.
손잡이에 작은 금이 생겼지만, 다행히 라이톤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아, 안녕하세요."
식기를 놓던 로엔도 뒤늦게 파스칼을 발견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파스칼은 말 대신 고개를 까딱였다.
마녀가 싫긴 하지만, 굳이 라이톤의 심기를 건드리면서까지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인사를 주고받는 건 예의라고 배웠다. 딱히 저 마녀가 불쌍한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딱 이정도면 괜찮겠지.'
그렇게 자기합리화하며 파스칼은 힐끗-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파란 줄무늬 식탁보 위에 평소와 같이 건포도 빵에 새하얀 요거트, 오렌지 주스가 차려져 있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잘 구운 고기 꼬치가 접시에 산처럼 쌓여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라이톤이 그렇게 쓰기 싫어했던 향신료가 듬뿍 뿌려진 채.
고기 꼬치 쪽으로 시선을 돌린 파스칼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다시 라이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니? 혹시 배 안 고프니?"
"...아뇨. 아무것도 아니예요."
파스칼은 어금니로 입술을 누르며 실소가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루셀의 서] 교리에 어긋난다고 향신료는 손톱만큼도 안쓰던 양반인데.
대체 마녀 일족, 아니 저 마녀와 무슨 사이이길래 이렇게 각별하게 대하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마녀 일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진 않을텐데.
오랜 시간 봐온 경험으로 비추어보건대, 저 자는 결코 순수한 의도로 아이를 데려올 작자가 아니었다. 차라리 저 마녀를 이용해 뱀 일족을 견제한다면 모를까.
그러면 납득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럴 가치가 있다면 최소한 수장의 혈육 정도는 되어야 한다.
"파스칼, 밥 안 먹을거니?"
라이톤의 목소리에 파스칼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로엔도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먹어요. 지금 내려갈게요."
"좋다. 천천히 오거라."
궁금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일단 배고프니 밥부터 먹고 천천히 방법을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파스칼은 로엔의 건너편에 앉았다.
"자, 그럼. 오늘도 밥 먹기 전에 루세니아 님께 기도를 드리자꾸나."
"그러죠."
대답하는 파스칼과 달리, 로엔은 어리둥절했다.
"기도요?"
"아! 로엔은 모를 수도 있겠구나. 잠시만 기다려보렴."
라이톤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향하였다.
잠시후 돌아온 그의 손에 낡아빠진 파란 표지의 책이 들려 있었다. 금빛 양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걸 보니 <루셀의 서>가 틀림없었다.
배고픔에 인내심이 바닥난 파스칼이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라이톤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파스칼은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뭐든 좋으니 빨리 밥 먹고 싶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손님 앞에서 뱀으로 변할 것 같았다.
이런 파스칼의 속도 모르고, 라이톤은 <루셀의 서>를 펼치고는 책을 촤르르- 넘겼다. 이윽고 그는 한 페이지를 로엔에게 보여주었다.
"자, 로엔. 이 문장을 한번 읽어보겠니?"
초록색 손가락이 책의 한 구절을 가리켰다. 눈을 가늘게 뜬 로엔은 에오니안 어를 배운지 얼마 안된 건지 띄엄띄엄 읽었다.
"나의 야, 양들아. 원하는 것이 이, 있거든 내게 가, 간..."
"간구하라."
"간구하라. 나는 언제 어디든 너희의 모, 목소리를 듣나니."
"그렇지! 잘했구나, 로엔. 파스칼은 이걸 아예 읽지도 못하던데."
기운 넘치는 칭찬에 로엔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라이톤은 미소를 지으며 로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파스칼은 똑똑히 봤다. 라이톤의 경멸어린 시선이 잠깐이나마 자신을 향하고 있었던 것을.
조금은 억울했다. 에오니안 어는 애초에 에온 왕국에 사는 '인간' 종족들의 언어인데. 쓰던 걸 버리고 새로운 걸 쓰라고 하면 그게 쉽게 되겠는가.
여기서 살던 호랑이 수인인 기아트도 에오니안 어에 익숙해지는데 5년이나 걸렸다. 자신도-비록 단어 몇 개를 겨우 외울 정도였지만-쓸 수 있음에도 라이톤은 그를 깔보았다.
'내가 물어볼 때는 알아서 찾아보라고 했으면서.'
역시 라이톤과 마녀 일족 사이에 뭔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건 루세니아 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란다. 그러니 우리는 그 분께 항상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해."
"그럼 그 분은 어디 계신가요? 인사하려면 얼굴 보고 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
로엔의 말에 파스칼은 물을 마시다 말고 로엔을 쳐다보았다.
마녀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오만한 존재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녀 일족에 대한 증오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하하, 기특하구나. 하지만 루세니아 님은 저기 하늘에 계셔서 그 분이 내려오실 수도 없고, 우리가 감히 그 분을 뵐 수 없단다."
"아...그렇군요."
라이톤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로엔의 눈썹이 실망한 듯 축- 늘어졌다.
"그럼 내려와서 먹을 수 없는 루세니아를 대신해서 우리가 배불리 먹지, 뭐."
"파스칼! 그런 무례한 말을 하면 어떡하니."
라이톤이 경악했지만, 파스칼은 눈곱만큼도 신경쓰지 않았다.
솔직히 맛있는 음식을 눈 앞에 두고 잘 참을 수 있는 존재가 몇이나 되겠는가.
식사 끝나면 따로 불려가 혼나겠지만, 로엔과 라이톤의 대화가 끝나는 걸 기다리기엔 이성의 끈이 버틸 수 없었다.
파스칼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로엔은 금빛 눈을 반짝이며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어서 먹어요! 다 맛있어보여서 당장 먹고 싶어요."
"...그래,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안 먹는 건 예의가 아니지."
로엔이 말하고나서야 겨우 라이톤한테서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라이톤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씰룩거리는 입꼬리에서 느껴지는 분노를 파스칼은 놓치지 않았다.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라이톤은 로엔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는 사실을.
파스칼은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늘 라이톤에게 지기만 했는데. 드디어 약점 하나를 잡았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저 위선자에게 크게 한 방 날릴 것이다.
파스칼은 보란듯이 양손 가득 꼬기 꼬치를 쥐었다. 고개를 들진 않았지만, 불타고 있을 라이톤의 속을 떠올리니 쾌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왼손으로 잡은 고기 꼬치를 로엔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이로써 접시에는 꼬치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우리 '가족'이 된 걸 환영해. 자, 여기 고기 꼬치야."
"앗, 네! 가, 감사해요."
로엔은 얼굴을 붉히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스칼은 크게 입을 벌려 꼬치에 꽂힌 고기들을 한번에 다 먹었다.
전에는 맛없는 부위나 싱거운 고기만 먹어서 입맛을 버렸는데. 향신료를 뿌린 고기는 그야말로 맛의 신세계였다.
게다가 육즙이 풍부해서 씹는 재미도 있었다. 이걸 이제야 안 게 후회가 되었다.
슬쩍- 라이톤을 바라보니, 그의 주먹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든 참으려는 모습이 정말 같잖았다.
고개를 살짝 든 파스칼은 초록빛 눈동자에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는 로엔의 모습을 조용히 담았다.
내 '복수'를 위해 널 이용하겠어.
로엔 리시드.
작가의 말
늦어서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오늘부터 정상적으로 연재 진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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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5 외전 1-마녀와 뱀의 독기어린 증오 (2)조회 : 96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25 35.#34 외전 1-마녀와 뱀의 독기어린 증오 (1)조회 : 1,0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37 34.#33 행복해질 자격 (14)조회 : 8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84 33.#32 행복해질 자격 (13)조회 : 1,12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28 32.#31 행복해질 자격 (12)조회 : 1,14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27 31.#30 행복해질 자격 (11)조회 : 25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67 30.#29 행복해질 자격 (10)조회 : 95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5 29.#28 행복해질 자격 (9)조회 : 30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28 28.#27 행복해질 자격 (8)조회 : 14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01 27.#26 행복해질 자격 (7)조회 : 1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84 26.#25 행복해질 자격 (6)조회 : 17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11 25.#24 행복해질 자격 (5)조회 : 12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05 24.#23 행복해질 자격 (4)조회 : 17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15 23.#22 행복해질 자격 (3)조회 : 2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68 22.#21 행복해질 자격 (2)조회 : 10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37 21.#20 행복해질 자격 (1)조회 : 28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6 20.#19 카오스톰 (11)조회 : 41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75 19.#18 카오스톰 (10)조회 : 10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72 18.#17 카오스톰 (9)조회 : 13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74 17.#16 카오스톰 (8)조회 : 1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67 16.#15 카오스톰 (7)조회 : 1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593 15.#14 카오스톰 (6)조회 : 18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02 14.#13 카오스톰 (5)조회 : 1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28 13.#12 카오스톰 (4)조회 : 17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1 12.#11 카오스톰 (3)조회 : 1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09 11.#10 카오스톰 (2)조회 : 19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15 10.#9 카오스톰 (1)조회 : 22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99 9.#8 재회 (4)조회 : 21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5 8.#7 재회 (3)조회 : 31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66 7.#6 재회 (2)조회 : 25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52 6.#5 재회 (1)조회 : 26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40 5.#4 저주의 시작 (4)조회 : 2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60 4.#3 저주의 시작 (3)조회 : 2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26 3.#2 저주의 시작 (2)조회 : 339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164 2.#1 저주의 시작 (1)조회 : 410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318 1.프롤로그조회 : 1,481 추천 : 1 댓글 : 0 글자 : 2,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