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내가 보여?
조회 : 1,111 추천 : 0 글자수 : 5,479 자 2022-12-13
41. 내가 보여?
진수는 하루에 열 시간을 무한리필 고깃집에서 일했다. 그의 하루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했다.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서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여덟 시에 진영이 깨워서 밥 먹여 어린이집 보낸 후, 자신도 출근해서 주방과 홀 청소를 시작한다. 눈코 뜰 사이 없이 열한 시부터 두 시까지 점심 장사 홀 서빙을 하고 난 후에야 겨우 점심밥을 먹고 곧이어 저녁 장사 준비를 시작한다.
저녁 장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될 즈음엔 사장의 배려로 한 시간 정도 일찍 퇴근해서 종일반에 맡겨진 진영이를 데리고 오면 거의 밤 아홉시가 다 되어갔다. 진영이를 먹이고 씻겨서 재우고 나면 열한 시가 넘어서고 이것저것 잡다한 집안일을 하다보면 어느새 열두 시가 넘는 건 다반사였다.
그리고 피곤에 절어 잠들면 또다시 그 다음날의 일과가 반복되고······.
그는 꼬박 일 년이 넘게 그런 패턴의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 도무지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빡빡한 삶이었다. 저렇게 무리를 하다가 그가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늘 걱정이었다.
난 항시 그의 곁을 맴돌며 살폈다. 고단해서 실신한 듯 자는 그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꿈속에 찾아가는 것도 가급적 자제했다. 그럴 때면 그는 내가 자신의 옆에 있는 걸 느끼고 속닥거렸다.
“누나, 나 정말 괜찮으니까 오늘밤엔 꼭 와요. 난 젊잖아요. 하하.”
하지만 잠든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애잔해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잠이라도 곤히 자게 그냥 두고 싶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게 전부라 속상했다.
“진수야, 힘들지?”
난 그가 듣지 못하는 말을 내뱉으며 종일 그의 옆에 있었다. 혹여 그에게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 염려스러워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물셋이 짊어지기엔 너무도 버거운 인생의 무게였다.
물론 진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어린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첨부터 어렵게 산 사람들은 그래도 거기에 어느 정도 길들여진 터라 적어도 진수보다는 덜 힘들 거라고 생각된다. 아예 고통을 모르고 살았던 그와는 모든 면에서 천양지차일 테니.
하지만 그는 불평 한 번 없이 묵묵히 견뎌냈다. 아슬아슬하게 생각한 건 그야말로 나의 기우였다. 박수의 말대로 진수는 강건했다. 전생의 재호가 그랬듯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안심도 되었다.
모든 건 다 지나간다고 했다. 진수의 긴 인생에서 이 시기 또한 바람처럼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순하게 부는 미풍처럼.
****
“진수야! 진수야, 일어나! 진수야, 일어나!”
난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진수는 들을 수 없었다. 꿈속이 아닌 현실에선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나를 볼 수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난 애간장이 녹아내릴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다. 목소리는 안 들릴지언정 나의 간절함이라도 전달되길 바라며.
“진수야! 진수야! 위험해, 일어나!”
그는 가스레인지에 국을 올려놓은 채 졸고 있었다. 더구나 감기약을 먹은 터라 인사불성 상태였다. 누적된 과로 탓에 감기 몸살이 왔고 진영에게 옮길세라 약을 먹은 후였다. 그런 딱한 사정과는 상관없이 국물은 점점 졸아붙었고 급기야 냄비에선 시커먼 그을음과 함께 탄내가 나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난, 재차 그를 부르고 또 불렀다.
“진수야! 진수야!”
냄새와 연기가 진동을 하는데도 모른 채 그는 하염없이 졸았다. 비록 내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어도, 그는 지 곁에 내가 있고 없는지를 단박에 알아챘다.
그렇기에 그의 신통방통한 재주를 믿고 싶었다. 난 그가 날 느끼도록 몸부림을 쳐대며 옆에 찰싹 붙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었다. 약에 취한 탓인지 그는 내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떡해! 진수야! 제발 일어나!”
이러다간 대형 사고가 날 것만 같아 내 속은 냄비보다도 더 까맣게 타들어갔다. 남의 집에 살면서 부주의로 사고를 냈다간 그 책임은 전부 진수가 지게 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힘든데 그 짐을 가중시킬 수는 없었다. 거기다가 자칫 잘못하여 다치기라도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질 만큼 끔찍했다. 더구나 진영은 아직 어린데다 지난번 사고로 몸에 화상 흉터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사고를 또 겪게 된다면 아이에겐 실로 악몽 같은 일이 될 터였다. 막아야만 했다.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난 간절함에 절박함을 보태어 소리쳤다. 저승길에서 그를 붙잡아 왔을 때처럼 아주 절실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진수야! 진수야! 제발 일어나! 진수야! 제발! 진수야!”
내 입에선 오열이 터져 나오며 울부짖었다. 부디 내 목소리가 그에게 들리는 기적을 바라며 불러댔다.
“진수야! 진수야!”
그때였다. 그가 부스스 눈을 뜨며 비몽사몽인 채로 나를 보았다.
“누나······!”
“진, 진수야! 얼른, 얼른 불 꺼! 정신 차리고 얼른 불부터 꺼!”
“무, 무슨 불이요?”
허둥지둥 급박한 나를 보며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되물었다.
“냄새 안나? 연기 안보여? 가스레인지.”
그는 그제야 주방 쪽을 보더니 황급히 달려가서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현관문을 활짝 열고 방에서 자고 있는 진영에게로 뛰어가서 안아들었다.
“진영아! 괜찮아? 진영아!”
진영은 말짱하게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난 그에게 다가가서 안심을 시켰다.
“진영이 괜찮아. 넌 어때? 괜찮아?”
“나야 뭐······. 누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네요. 고마워요, 누나!”
“아냐. 앞으론 아무리 피곤해도 불 켜놓고 졸지 마. 뭔 일 날까봐 심장이 쪼그라드는 줄 알았어.”
“그럴게요. 내가 미쳤나 봐. 조는지도 모르고 잤어요.”
“감기약 땜에 그랬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영이 어쩔 뻔 했어요. 정말 고마워요, 누나.”
그는 그 와중에도 오로지 진영이 걱정이 먼저였다. 위험 상황에서 동생부터 챙기는 걸 보니 괜스레 마음이 짠했다. 난 평상심을 찾으며 그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진수야, 많이 피곤하지?”
“괜찮아요.”
동시에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진영을 다시 바닥에 누이고 이내 내게로 다가와서는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나 또한 팔을 뻗어 그의 등을 감쌌다. 그러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그가 무사한 게 피부로 느껴지면서 내 입에선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후우우.”
“미안해요. 많이 놀랬죠?”
“어.”
“누나 마음이 보여요. 얼마나 날 걱정했을지 느껴져. 미안해요, 걱정시켜서.”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뭘. 근데 니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서······.”
바로 그때였다. 얼싸안고 있던 그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팔을 풀며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너······. 지금······. 내가······. 보여? 내 목소리 들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누나 보는 거 맞죠?”
“어, 그런 거 같아.”
“이거 꿈 아니고 현실이죠?”
“응.”
“오 마이 가쉬!! 그럼 이제 누나 반 혼령 졸업한 거예요? 온전하게 사람으로 컴백한 거냐고요?”
그가 잔뜩 흥분해서 물었지만 난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몰라, 아직은. 넌 어떤데?”
“뭐가요?”
“혹시······. 기억 나? 전생 기억······.”
“아직은······. 아, 맞다. 내 기억이 돌아와야만 누나가 깨어난다고 했지. 미안해요. 근데 나 지금 누나 확실하게 보이는데. 이건 뭐죠?”
“그러게.”
그도 나도 서로 경황이 없어 꿈속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못하고 말을 주고받았던 거였다. 그런데 이건 명백히 현실이었다. 이 세상에서 박수 외엔 그 누구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목소리도 듣지 못했고.
그런데 반 혼령이 되고 이십 육년 만에 박수가 아닌 날 알아보는 사람이 또 한 명 생겼다. 그게 바로 나의 연인 진수였다. 그는 분명 날 알아보고 내 목소리를 들었으며 품에 안기까지 했다. 그의 말대로 내가 반 혼령 신세를 면한건가 싶은 기대도 있었지만 그건 아닌 듯싶었다. 그의 전생 기억이 돌아와야만 나 또한 긴 잠에서 깨어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더구나 좀 전 잠에서 깬 진영이가 확인시켜 주었다. 내가 아직은 반 혼령이라는 사실을.
“오빠! 귀신 놀이 해? 아무도 없는데 누구랑 말해?”
진영의 눈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박수와 그의 눈에만 내가 보이는 거였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날 볼 수 있게 된 걸까. 좋으면서도 왠지 불안했다.
‘뭐지?’
그때 그가 날 자신의 앞으로 돌려세우더니 답을 주었다.
“불안해하지 마요. 난 알 거 같아요. 죽었던 나를 다시 끌고 이승으로 데려온 게 누나잖아요. 누나의 간절함이 또 통했나 보네요. 이게 누나의 능력인가 봐요. 고마워요, 사랑해줘서. 정말 소중해요, 한영미씨!”
그는 불안에 떠는 내 입술에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입술의 촉감을 느끼며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안도가 되었다. 그러면서 새삼스레 염라대왕이 인정한 내 능력치를 나 스스로도 높이 사게 되었다. 그건 바로 사랑의 힘이었다.
****
진수의 눈에 내가 보인다는 게 이렇게 편하고 좋은지 몰랐다. 이젠 굳이 그의 꿈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고 박수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특히 박수의 몸을 빌려 쓰지 않아도 돼서 천만다행이었다. 자꾸 늙어가는 박수에게 부담을 주는 게 걱정이었는데 한 번에 해결이 되어 너무 좋았다.
그런데 오히려 박수는 심드렁하며 좋아하지 않았다.
“왜 그래? 그동안 나땜에 귀찮았을 게 아냐?”
“몰라, 반씨에겐 좋은 일인데 난 좀 그러네. 이젠 내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것만 같아서. 가뜩이나 진수 옆에 있느라 난 찬밥 신세였는데 나한테 도움 받을 일도 없으니 앞으로 더하겠지. 이러다 나 혼자 고독사해도 반씨는 모를게 아냐.”
난 박수의 입에서 나온 고독사 라는 말에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박수, 진짜 왜 그래? 내가 그리 왕 싸가지야? 내가 설마 박수 혼자 외롭게 만들겠어?”
“어, 이미 충분히 외로워.”
“그니까 결혼을 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여자면 후딱 해. 그 나이에 뭘 가려? 요즘 육십에도 예쁜 아줌마들 많으니까 대충 짝 맞추라고. 그래야 덜 외롭지.”
“우씨! 싫어. 내가 개돼지야? 짝 맞추게?”
“지금 박수 사는 게 개돼지랑 뭐가 다르냐?”
“뭐라고? 말 다했어? 지는 반 혼령 주제에 어린놈이랑 연애하면서 왜 난 할머니랑 결혼하래?”
“할머니? 푸 하하하.”
씩씩거리는 박수를 보며 실로 오랜만에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가 아직 전생 기억을 떠올리지도 않았고 내가 반 혼령 신세를 면한 것도 아닌데도 그저 좋았다. 현실에서 그와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선물을 받은 듯 기뻤다. 내가 좋아하던 롤러코스터를 타는 거처럼 설레었다.
진수는 하루에 열 시간을 무한리필 고깃집에서 일했다. 그의 하루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했다.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서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여덟 시에 진영이 깨워서 밥 먹여 어린이집 보낸 후, 자신도 출근해서 주방과 홀 청소를 시작한다. 눈코 뜰 사이 없이 열한 시부터 두 시까지 점심 장사 홀 서빙을 하고 난 후에야 겨우 점심밥을 먹고 곧이어 저녁 장사 준비를 시작한다.
저녁 장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될 즈음엔 사장의 배려로 한 시간 정도 일찍 퇴근해서 종일반에 맡겨진 진영이를 데리고 오면 거의 밤 아홉시가 다 되어갔다. 진영이를 먹이고 씻겨서 재우고 나면 열한 시가 넘어서고 이것저것 잡다한 집안일을 하다보면 어느새 열두 시가 넘는 건 다반사였다.
그리고 피곤에 절어 잠들면 또다시 그 다음날의 일과가 반복되고······.
그는 꼬박 일 년이 넘게 그런 패턴의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 도무지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빡빡한 삶이었다. 저렇게 무리를 하다가 그가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늘 걱정이었다.
난 항시 그의 곁을 맴돌며 살폈다. 고단해서 실신한 듯 자는 그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꿈속에 찾아가는 것도 가급적 자제했다. 그럴 때면 그는 내가 자신의 옆에 있는 걸 느끼고 속닥거렸다.
“누나, 나 정말 괜찮으니까 오늘밤엔 꼭 와요. 난 젊잖아요. 하하.”
하지만 잠든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애잔해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잠이라도 곤히 자게 그냥 두고 싶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게 전부라 속상했다.
“진수야, 힘들지?”
난 그가 듣지 못하는 말을 내뱉으며 종일 그의 옆에 있었다. 혹여 그에게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 염려스러워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물셋이 짊어지기엔 너무도 버거운 인생의 무게였다.
물론 진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어린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첨부터 어렵게 산 사람들은 그래도 거기에 어느 정도 길들여진 터라 적어도 진수보다는 덜 힘들 거라고 생각된다. 아예 고통을 모르고 살았던 그와는 모든 면에서 천양지차일 테니.
하지만 그는 불평 한 번 없이 묵묵히 견뎌냈다. 아슬아슬하게 생각한 건 그야말로 나의 기우였다. 박수의 말대로 진수는 강건했다. 전생의 재호가 그랬듯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안심도 되었다.
모든 건 다 지나간다고 했다. 진수의 긴 인생에서 이 시기 또한 바람처럼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순하게 부는 미풍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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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야! 진수야, 일어나! 진수야, 일어나!”
난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진수는 들을 수 없었다. 꿈속이 아닌 현실에선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나를 볼 수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난 애간장이 녹아내릴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다. 목소리는 안 들릴지언정 나의 간절함이라도 전달되길 바라며.
“진수야! 진수야! 위험해, 일어나!”
그는 가스레인지에 국을 올려놓은 채 졸고 있었다. 더구나 감기약을 먹은 터라 인사불성 상태였다. 누적된 과로 탓에 감기 몸살이 왔고 진영에게 옮길세라 약을 먹은 후였다. 그런 딱한 사정과는 상관없이 국물은 점점 졸아붙었고 급기야 냄비에선 시커먼 그을음과 함께 탄내가 나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난, 재차 그를 부르고 또 불렀다.
“진수야! 진수야!”
냄새와 연기가 진동을 하는데도 모른 채 그는 하염없이 졸았다. 비록 내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어도, 그는 지 곁에 내가 있고 없는지를 단박에 알아챘다.
그렇기에 그의 신통방통한 재주를 믿고 싶었다. 난 그가 날 느끼도록 몸부림을 쳐대며 옆에 찰싹 붙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었다. 약에 취한 탓인지 그는 내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떡해! 진수야! 제발 일어나!”
이러다간 대형 사고가 날 것만 같아 내 속은 냄비보다도 더 까맣게 타들어갔다. 남의 집에 살면서 부주의로 사고를 냈다간 그 책임은 전부 진수가 지게 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힘든데 그 짐을 가중시킬 수는 없었다. 거기다가 자칫 잘못하여 다치기라도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질 만큼 끔찍했다. 더구나 진영은 아직 어린데다 지난번 사고로 몸에 화상 흉터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사고를 또 겪게 된다면 아이에겐 실로 악몽 같은 일이 될 터였다. 막아야만 했다.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난 간절함에 절박함을 보태어 소리쳤다. 저승길에서 그를 붙잡아 왔을 때처럼 아주 절실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진수야! 진수야! 제발 일어나! 진수야! 제발! 진수야!”
내 입에선 오열이 터져 나오며 울부짖었다. 부디 내 목소리가 그에게 들리는 기적을 바라며 불러댔다.
“진수야! 진수야!”
그때였다. 그가 부스스 눈을 뜨며 비몽사몽인 채로 나를 보았다.
“누나······!”
“진, 진수야! 얼른, 얼른 불 꺼! 정신 차리고 얼른 불부터 꺼!”
“무, 무슨 불이요?”
허둥지둥 급박한 나를 보며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되물었다.
“냄새 안나? 연기 안보여? 가스레인지.”
그는 그제야 주방 쪽을 보더니 황급히 달려가서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현관문을 활짝 열고 방에서 자고 있는 진영에게로 뛰어가서 안아들었다.
“진영아! 괜찮아? 진영아!”
진영은 말짱하게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난 그에게 다가가서 안심을 시켰다.
“진영이 괜찮아. 넌 어때? 괜찮아?”
“나야 뭐······. 누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네요. 고마워요, 누나!”
“아냐. 앞으론 아무리 피곤해도 불 켜놓고 졸지 마. 뭔 일 날까봐 심장이 쪼그라드는 줄 알았어.”
“그럴게요. 내가 미쳤나 봐. 조는지도 모르고 잤어요.”
“감기약 땜에 그랬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영이 어쩔 뻔 했어요. 정말 고마워요, 누나.”
그는 그 와중에도 오로지 진영이 걱정이 먼저였다. 위험 상황에서 동생부터 챙기는 걸 보니 괜스레 마음이 짠했다. 난 평상심을 찾으며 그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진수야, 많이 피곤하지?”
“괜찮아요.”
동시에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진영을 다시 바닥에 누이고 이내 내게로 다가와서는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나 또한 팔을 뻗어 그의 등을 감쌌다. 그러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그가 무사한 게 피부로 느껴지면서 내 입에선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후우우.”
“미안해요. 많이 놀랬죠?”
“어.”
“누나 마음이 보여요. 얼마나 날 걱정했을지 느껴져. 미안해요, 걱정시켜서.”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뭘. 근데 니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서······.”
바로 그때였다. 얼싸안고 있던 그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팔을 풀며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너······. 지금······. 내가······. 보여? 내 목소리 들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누나 보는 거 맞죠?”
“어, 그런 거 같아.”
“이거 꿈 아니고 현실이죠?”
“응.”
“오 마이 가쉬!! 그럼 이제 누나 반 혼령 졸업한 거예요? 온전하게 사람으로 컴백한 거냐고요?”
그가 잔뜩 흥분해서 물었지만 난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몰라, 아직은. 넌 어떤데?”
“뭐가요?”
“혹시······. 기억 나? 전생 기억······.”
“아직은······. 아, 맞다. 내 기억이 돌아와야만 누나가 깨어난다고 했지. 미안해요. 근데 나 지금 누나 확실하게 보이는데. 이건 뭐죠?”
“그러게.”
그도 나도 서로 경황이 없어 꿈속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못하고 말을 주고받았던 거였다. 그런데 이건 명백히 현실이었다. 이 세상에서 박수 외엔 그 누구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목소리도 듣지 못했고.
그런데 반 혼령이 되고 이십 육년 만에 박수가 아닌 날 알아보는 사람이 또 한 명 생겼다. 그게 바로 나의 연인 진수였다. 그는 분명 날 알아보고 내 목소리를 들었으며 품에 안기까지 했다. 그의 말대로 내가 반 혼령 신세를 면한건가 싶은 기대도 있었지만 그건 아닌 듯싶었다. 그의 전생 기억이 돌아와야만 나 또한 긴 잠에서 깨어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더구나 좀 전 잠에서 깬 진영이가 확인시켜 주었다. 내가 아직은 반 혼령이라는 사실을.
“오빠! 귀신 놀이 해? 아무도 없는데 누구랑 말해?”
진영의 눈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박수와 그의 눈에만 내가 보이는 거였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날 볼 수 있게 된 걸까. 좋으면서도 왠지 불안했다.
‘뭐지?’
그때 그가 날 자신의 앞으로 돌려세우더니 답을 주었다.
“불안해하지 마요. 난 알 거 같아요. 죽었던 나를 다시 끌고 이승으로 데려온 게 누나잖아요. 누나의 간절함이 또 통했나 보네요. 이게 누나의 능력인가 봐요. 고마워요, 사랑해줘서. 정말 소중해요, 한영미씨!”
그는 불안에 떠는 내 입술에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입술의 촉감을 느끼며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안도가 되었다. 그러면서 새삼스레 염라대왕이 인정한 내 능력치를 나 스스로도 높이 사게 되었다. 그건 바로 사랑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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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의 눈에 내가 보인다는 게 이렇게 편하고 좋은지 몰랐다. 이젠 굳이 그의 꿈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고 박수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특히 박수의 몸을 빌려 쓰지 않아도 돼서 천만다행이었다. 자꾸 늙어가는 박수에게 부담을 주는 게 걱정이었는데 한 번에 해결이 되어 너무 좋았다.
그런데 오히려 박수는 심드렁하며 좋아하지 않았다.
“왜 그래? 그동안 나땜에 귀찮았을 게 아냐?”
“몰라, 반씨에겐 좋은 일인데 난 좀 그러네. 이젠 내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것만 같아서. 가뜩이나 진수 옆에 있느라 난 찬밥 신세였는데 나한테 도움 받을 일도 없으니 앞으로 더하겠지. 이러다 나 혼자 고독사해도 반씨는 모를게 아냐.”
난 박수의 입에서 나온 고독사 라는 말에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박수, 진짜 왜 그래? 내가 그리 왕 싸가지야? 내가 설마 박수 혼자 외롭게 만들겠어?”
“어, 이미 충분히 외로워.”
“그니까 결혼을 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여자면 후딱 해. 그 나이에 뭘 가려? 요즘 육십에도 예쁜 아줌마들 많으니까 대충 짝 맞추라고. 그래야 덜 외롭지.”
“우씨! 싫어. 내가 개돼지야? 짝 맞추게?”
“지금 박수 사는 게 개돼지랑 뭐가 다르냐?”
“뭐라고? 말 다했어? 지는 반 혼령 주제에 어린놈이랑 연애하면서 왜 난 할머니랑 결혼하래?”
“할머니? 푸 하하하.”
씩씩거리는 박수를 보며 실로 오랜만에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가 아직 전생 기억을 떠올리지도 않았고 내가 반 혼령 신세를 면한 것도 아닌데도 그저 좋았다. 현실에서 그와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선물을 받은 듯 기뻤다. 내가 좋아하던 롤러코스터를 타는 거처럼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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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8. 에필로그조회 : 2,07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1,652 47.47. 해피엔딩조회 : 1,33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381 46.46. 악의 대부조회 : 1,36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21 45.45. 악마 퇴치2조회 : 1,12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724 44.44. 악마 퇴치조회 : 1,22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866 43.43. 빌어먹을 촉조회 : 1,20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52 42.42. 상남자조회 : 1,41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47 41.41. 내가 보여?조회 : 1,11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79 40.40. 고통의 강도2조회 : 29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21 39.39. 우리는 연인조회 : 29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55 38.38. 키스해도 될까요조회 : 3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90 37.37. 손등에 마음이 닿다조회 : 28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36 36.36. 화해?조회 : 3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14 35.35. 이해가 안 돼조회 : 3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065 34.34. 악마네 집조회 : 32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56 33.33. 또 너니조회 : 35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809 32.32. 살아줘서 고마워조회 : 36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16 31.31. 가지 마, 진수야조회 : 2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66 30.30. 폭풍 전야조회 : 32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45 29.29. 사랑도 우정도조회 : 47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53 28.28. 질투는 반 혼령의 힘조회 : 25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41 27.27. 거짓말조회 : 34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07 26.26. 데이트조회 : 37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16 25.25. 진수와 나, 그리고 박수조회 : 37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48 24.24. 협력하여 선을 이루다조회 : 38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22 23.23. 믿어줘조회 : 31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00 22.22. 말 걸다조회 : 3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06 21.21. 박수야, 고마워조회 : 3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072 20.20. 악마의 자식조회 : 41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804 19.19. 이경한, 알 수 없는 아이조회 : 31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56 18.18. 이경한조회 : 42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13 17.17. 다정한 진수씨조회 : 44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20 16.16. 꿈결의 대화조회 : 41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69 15.15. 꿈속의 여인조회 : 37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12 14.14. 환생조회 : 41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29 13.13. 염라대왕의 선처조회 : 38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41 12.12. 애인 놀이 and 부부 놀이조회 : 51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85 11.11. 이혼녀 되기 싫어조회 : 44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44 10.10. 불행 소나타조회 : 34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76 9.9. 여전사 한영미조회 : 53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97 8.8. 이정문 , 지옥에나 떨어져라조회 : 53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90 7.7. 너와 함께라면조회 : 34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75 6.6. 소중해조회 : 41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19 5.5. 연인조회 : 497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502 4.4. 고통의 강도조회 : 430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865 3.3. 내 편조회 : 403 추천 : 1 댓글 : 0 글자 : 6,986 2.2. 중국집 배달원조회 : 471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453 1.1. 반 혼령조회 : 1,972 추천 : 1 댓글 : 0 글자 : 7,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