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상남자
조회 : 1,417 추천 : 0 글자수 : 5,447 자 2022-12-14
42. 상남자
“대박 추카추카! 졸업도 취직도 완전 축하해.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난 박진수가 해낼 줄 알았어. 짝짝짝. 넌 박수 받아 마땅해. 너니까 사 년이나 잘 버티고 견뎌낸 거야. 훌륭해. 앞으로 박진수 인생엔 플라워 로드만 펼쳐질 거야. 건배하자.”
“우리 러브샷 해요.”
“그래, 우리 오늘은 마시다 죽어 보자. 호호호.”
진영이를 재워놓고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난 할 수 있는 한 최대치로 오버하며 내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것만이 내가 진수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그거라도 넉넉히 해주고 싶었다.
사 년 동안 그는 많은 걸 해내었다. 고깃집에서 일을 하며 진영이를 돌보는 것만도 녹록치 않았을 텐데 복학해서 학업을 끝냈고 대형 출판사에 취직까지 했다.
물론 원하던 작가는 아직 못되었지만 그는 말했다. 출판사에 들어가서 더 많은 경험을 쌓은 후에 여러 문학 공모전에도 도전해 보겠노라고. 그라면 앞으로 충분히 작가로서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마워요. 모두 누나 덕이에요. 누나 없었으면 어림없었을 거예요. 항상 내 옆에 있어줘서, 잘할 수 있다고 믿어주고 응원해줘서 고마워요.”
그는 활짝 웃으며 내 마음에 부응하듯 답을 했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네가 열심히 한 거잖아. 너무 장해. 완전 기특하고. 내가 남자 보는 눈은 있나봐. 호호. 울 애인 쓰담쓰담 해줄게. 호호.”
난 손을 뻗어 진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불현듯 그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여태 보지 못했던 얼굴로 제법 상남자답게 소리쳤다. 마치 예전의 재호처럼.
“내가 애기도 아닌데 머리 쓰다듬는 건 좀 오버다.”
“왜, 이쁘다고 그러는 건데 싫어?”
“이쁘긴, 내가 뭐 여잔가?”
“연인끼리 애정 표현인데 까칠하게 굴긴. 치!”
의외의 그의 반응에 난 공연히 무안해져서 짐짓 삐친 척 했다. 그랬더니 그가 내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울 자기 삐쳤어요?”
“어. 디따 삐쳤어.”
“하하하. 울 자기 삐치니까 더 귀엽네.”
“귀엽긴? 내가 뭐 애기야? 나 너보다 연상이거든?”
“와, 바로 복수하네? 하하하.”
“당근이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가 다시 내 볼을 어루만지더니 진지하게 입을 떼었다.
“내 생각은 그래요. 여잔 나이 먹어도 귀여울 수 있어요.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그래도 여잔 여자니까. 남자 보다 약하잖아요. 강한 자가 약자 보호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고요. 하지만 남잔 남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잔 여자도 아이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거든요. 난 누날 책임지고 보호하는 남자이고 싶어요. 그래서 애 취급하는 거 아주 별로에요. 누나 종종 툭하면 날 애 취급하잖아요. 앞으론 절대 사절이에요. 알았죠?”
“어. 알겠어.”
부드럽게 웃으면서 조곤조곤 말하지만 나름 단호한 그의 말투에 난 대번에 강아지마냥 ‘깨갱’하며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날 보호하겠다는 그의 말이 벅차오르게 감동스러워 어떤 말도 나오지를 않았다. 누군가에게, 아니 사랑하는 남자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든든했다. 그 누구도 날 해치지 못할 거라는 믿음까지 생기게 만들었다.
“글치만 누날 쪽팔리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니까 삐치지 마요.”
혀에 닿는다면 순식간에 녹아버릴 솜사탕 같은 목소리로 그가 내 귀에 속닥거렸다. 그래서인가, 나 역시 금방이라도 오금이 녹아내릴 듯 온몸에 힘이 빠지며 나른했다. 문득 그에게 안기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자꾸만 그를 안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이런 내 마음을 그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타인에게만 나라는 존재가 안 보일뿐 그와 난 예전 꿈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소통이 가능했다. 물론 스킨십도 자유로웠고. 삼 년 전, 가스 불 사건 이후로 그렇게 되었다.
“뭐 생각해요?”
내가 하고 있는 잡다한 생각을 끊어내려는 듯 그가 물어왔다. 괜스레 멋쩍어져서 나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아무것도.”
“근데 왜 얼굴까지 빨개졌어요?”
“내, 내가 언제?”
“지금. 거울 한 번 볼래요?”
“시, 싫어.”
“말까지 더듬는 거 보니 혹시 야한 생각 한 거 아니에요? 하하하.”
“아냐, 그런 거 절대 아냐.”
“와!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데 맞나 보네? 하하하. 울 자기 은근 엉큼한데? 한 번 안아줘요? 크크크.”
“그런 거 아니래도!”
내가 발끈해 보이자 그는 재밌다는 듯이 더 놀리며 대꾸했다.
“아니면 말고요. 근데 언제든 신호만 보내요. 이참에 우리 암호 또 정할까? 둘 중 아무라도 하고 싶으면 ‘딸꾹’ 할까? 아, 이거 좋다. 딸꾹. 하하하.”
“나 놀리는데 재미 들었지?”
“당근이죠. 리액션이 빨라서 얼마나 잼나는데. 열일곱부터 누날 봤으니까 구 년째 인가? 근데도 누난 늘 새로워요. 그게 울 자기의 매력이지만. 하하하.”
난 엉큼한 속내를 들킨 게 창피해서 괜히 눈까지 흘기며 반응을 크게 했다. 그러면서 얼른 화제를 돌리기 위해 시비를 걸었다.
“너야말로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마.”
“내가 뭐?”
“존댓말 했다가 반말 했다, 누나랬다 자기랬다. 하나만 해.”
“아, 그랬나? 나야 늘 반말하고 싶지. 이름도 부르고. 단지 누나가, 아니 울 자기가 싫어할까봐 조심스러웠던 거지. 미친놈이 아닌 이상 자기 여자한테 누나라고 부르고 싶은 남자가 어디 있겠어? 안 그래, 영미야?”
생전 재호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와 재호가 오버랩되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달려들어 그를 안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의 자존심상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엉큼한 속내를 들킨 이상 쉽게 행동하면 안 되었다.
비록 반 혼령이어도 나 또한 여자는 여자였다. 더구나 내가 서른에 성장이 멈춰버린 상태라 할지라도 난 박수와 동갑인 구세대 정서를 가진 여자였다. 그렇기에 죽을힘을 다해 참아가며 퉁명을 떨었다.
“그렇다고 바로 말을 까냐?”
“자기가 하래놓고?”
“내가 언제? 헷갈리니까 하나로 통일하라는 거였지.”
“그 말에 속뜻은 반말 해달라는 거잖아? 아냐?”
“아니래도!”
난 거짓말을 하며 그의 눈을 피했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팔을 뻗어 나를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대번에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뭐야? 왜 그래?”
“미치겠네. 내가 더 못 기다릴 거 같아서. 딸꾹! 했다? 언제까지 내숭떠나 보려고 했는데 더는 못하겠네. 대답해봐. 자기도 딸꾹이지?”
그제야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후, 그는 나를 리드하며 우리만의 몸의 언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달큰하고 너무 달콤해서 대화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와의 대화는 밤을 새워 해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역시 그다웠다. 그는 상남자였다.
****
“그래서?”
“······.”
격앙된 내 목소리에 진수는 대답을 못한 채 나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어떻게 했냐고?”
“화내지 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
“야! 박진수! 너 바보니? 천하 멍청이야? 그새 다 까먹었어? 난 그때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려. 근데 뭐야, 넌? 착한 사람 콤플렉스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니?”
“아프잖아? 도와달라는데 어떻게 그래?”
“널 죽이려고 했던 인간이야. 그땐 현철이 땜에 넘어갔다고 치자. 이번엔 왜? 니가 그냥 왔다고 해서 너 욕할 사람 아무도 없어. 그 속사정 알면 아무도 욕 못해! 근데 왜?”
내가 벽력같이 화를 내자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말까지 더듬거렸다.
“나, 나도 지나치려고 했어. 근데 도저히 그렇게 못하겠더라고.”
“모르겠다. 나야말로 내 상식선에선 도무지 니가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그가 내 팔을 잡으며 물었다.
“어디 가?”
“이거 놔. 지금 너랑 같이 있다간 돌아버릴 거 같아서 그래. 박수한테 가 있을게.”
난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의 집을 나왔다. 생각만으로도 화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아무리 마음이 태평양 같이 넓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럴 수는 없을 거 같았다.
사건 당시 경찰서에서 보았던 씨씨티브이 속 사고 영상이 떠오르며 진저리가 쳐졌다. 악마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었다. 단 일초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경한 같은 놈을 그가 도와주고 왔다는 말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어떤 이유로든 그 놈이나 그 애비 이정문과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죽어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을 도와주고 왔단다. 그가 한 얘기를 종합하자면 이랬다.
퇴근 길 지하철역에서 나오려는데 길에 누군가 엎어져 있더란다. 외진 길이었지만 몇몇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단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 그 누구도 쓰러진 사람을 돌아보지 않았단다. 멀끔히 차려입은 옷으로 보아 술에 취한 듯 보였기에 그런 것 같았단다. 그도 첨엔 술 냄새가 진동을 해서 그런 줄 알았단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단다.
그런데 갑자기 엎어졌던 남자가 그의 바지를 붙잡으며 애원을 해왔단다.
“살려주세요. 가슴이······. 가슴이 넘 아파서 숨 쉬기가······.”
남자의 하소연에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고 남자를 보았는데 그게 바로 이경한이었단다. 그 또한 한순간 망설였단다. 그때의 악몽이 떠올라서 엮이고 싶지 않은 게 먼저라 외면하고 싶었단다. 그래서 돌아서려는데 다시 이경한이 매달렸단다.
“제······. 제발 119에 전화만 해주세요.”
이경한은 고통 때문인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단다. 그래서 더 도망치고 싶었단다. 그런데 이경한이 하는 말에 도저히 그냥 올 수가 없었단다.
“사, 살려달다고 했는데······. 아무도 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이번에도 그냥 가시면 저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살, 살려주세요.”
그래서 도움을 주었단다. 만약 이경한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진짜 살인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거 같아서 그랬단다. 그러면서 스스로 세뇌했단다.
‘이 사람은 이경한이 아니다. 이경한이 아니다. 그저 길에 쓰러진 불쌍한 사람이다.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러고 나니까 도움을 주는데 한결 마음이 가벼웠단다. 119에 신고를 하고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이경한 곁에 있어주다가 집에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털어놓은 거란다.
그의 말이 머리로는 전부 이해가 갔다. 하지만 마음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물에 빠진 인간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생떼 쓰는 인간들이 있다는데 아마도 이경한 부자가 그런 부류의 인간들과 진배없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무조건 엮이지 말아야했다.
그런데 그는 발을 담그고 말았다. 이상하게 또 불안했다. 첨으로 그가 비겁하게 살길 바랬다. 불의를 보면 등한시하고 자기 잇속을 밝히는 속물이어도 좋으니 부디 이경한 같은 인간들에게 상남자 코스프레는 하지 않길 간절히 빌었다. 이경한은 그가 보호해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기피 대상이었다.
그가 다시 한 번 깨닫길, 아무 일 없길 소망하며 박수에게로 향했다. 박수가 해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괜찮다, 괜찮다······.
“대박 추카추카! 졸업도 취직도 완전 축하해.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난 박진수가 해낼 줄 알았어. 짝짝짝. 넌 박수 받아 마땅해. 너니까 사 년이나 잘 버티고 견뎌낸 거야. 훌륭해. 앞으로 박진수 인생엔 플라워 로드만 펼쳐질 거야. 건배하자.”
“우리 러브샷 해요.”
“그래, 우리 오늘은 마시다 죽어 보자. 호호호.”
진영이를 재워놓고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난 할 수 있는 한 최대치로 오버하며 내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것만이 내가 진수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그거라도 넉넉히 해주고 싶었다.
사 년 동안 그는 많은 걸 해내었다. 고깃집에서 일을 하며 진영이를 돌보는 것만도 녹록치 않았을 텐데 복학해서 학업을 끝냈고 대형 출판사에 취직까지 했다.
물론 원하던 작가는 아직 못되었지만 그는 말했다. 출판사에 들어가서 더 많은 경험을 쌓은 후에 여러 문학 공모전에도 도전해 보겠노라고. 그라면 앞으로 충분히 작가로서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마워요. 모두 누나 덕이에요. 누나 없었으면 어림없었을 거예요. 항상 내 옆에 있어줘서, 잘할 수 있다고 믿어주고 응원해줘서 고마워요.”
그는 활짝 웃으며 내 마음에 부응하듯 답을 했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네가 열심히 한 거잖아. 너무 장해. 완전 기특하고. 내가 남자 보는 눈은 있나봐. 호호. 울 애인 쓰담쓰담 해줄게. 호호.”
난 손을 뻗어 진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불현듯 그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여태 보지 못했던 얼굴로 제법 상남자답게 소리쳤다. 마치 예전의 재호처럼.
“내가 애기도 아닌데 머리 쓰다듬는 건 좀 오버다.”
“왜, 이쁘다고 그러는 건데 싫어?”
“이쁘긴, 내가 뭐 여잔가?”
“연인끼리 애정 표현인데 까칠하게 굴긴. 치!”
의외의 그의 반응에 난 공연히 무안해져서 짐짓 삐친 척 했다. 그랬더니 그가 내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울 자기 삐쳤어요?”
“어. 디따 삐쳤어.”
“하하하. 울 자기 삐치니까 더 귀엽네.”
“귀엽긴? 내가 뭐 애기야? 나 너보다 연상이거든?”
“와, 바로 복수하네? 하하하.”
“당근이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가 다시 내 볼을 어루만지더니 진지하게 입을 떼었다.
“내 생각은 그래요. 여잔 나이 먹어도 귀여울 수 있어요.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그래도 여잔 여자니까. 남자 보다 약하잖아요. 강한 자가 약자 보호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고요. 하지만 남잔 남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잔 여자도 아이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거든요. 난 누날 책임지고 보호하는 남자이고 싶어요. 그래서 애 취급하는 거 아주 별로에요. 누나 종종 툭하면 날 애 취급하잖아요. 앞으론 절대 사절이에요. 알았죠?”
“어. 알겠어.”
부드럽게 웃으면서 조곤조곤 말하지만 나름 단호한 그의 말투에 난 대번에 강아지마냥 ‘깨갱’하며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날 보호하겠다는 그의 말이 벅차오르게 감동스러워 어떤 말도 나오지를 않았다. 누군가에게, 아니 사랑하는 남자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든든했다. 그 누구도 날 해치지 못할 거라는 믿음까지 생기게 만들었다.
“글치만 누날 쪽팔리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니까 삐치지 마요.”
혀에 닿는다면 순식간에 녹아버릴 솜사탕 같은 목소리로 그가 내 귀에 속닥거렸다. 그래서인가, 나 역시 금방이라도 오금이 녹아내릴 듯 온몸에 힘이 빠지며 나른했다. 문득 그에게 안기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자꾸만 그를 안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이런 내 마음을 그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타인에게만 나라는 존재가 안 보일뿐 그와 난 예전 꿈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소통이 가능했다. 물론 스킨십도 자유로웠고. 삼 년 전, 가스 불 사건 이후로 그렇게 되었다.
“뭐 생각해요?”
내가 하고 있는 잡다한 생각을 끊어내려는 듯 그가 물어왔다. 괜스레 멋쩍어져서 나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아무것도.”
“근데 왜 얼굴까지 빨개졌어요?”
“내, 내가 언제?”
“지금. 거울 한 번 볼래요?”
“시, 싫어.”
“말까지 더듬는 거 보니 혹시 야한 생각 한 거 아니에요? 하하하.”
“아냐, 그런 거 절대 아냐.”
“와!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데 맞나 보네? 하하하. 울 자기 은근 엉큼한데? 한 번 안아줘요? 크크크.”
“그런 거 아니래도!”
내가 발끈해 보이자 그는 재밌다는 듯이 더 놀리며 대꾸했다.
“아니면 말고요. 근데 언제든 신호만 보내요. 이참에 우리 암호 또 정할까? 둘 중 아무라도 하고 싶으면 ‘딸꾹’ 할까? 아, 이거 좋다. 딸꾹. 하하하.”
“나 놀리는데 재미 들었지?”
“당근이죠. 리액션이 빨라서 얼마나 잼나는데. 열일곱부터 누날 봤으니까 구 년째 인가? 근데도 누난 늘 새로워요. 그게 울 자기의 매력이지만. 하하하.”
난 엉큼한 속내를 들킨 게 창피해서 괜히 눈까지 흘기며 반응을 크게 했다. 그러면서 얼른 화제를 돌리기 위해 시비를 걸었다.
“너야말로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마.”
“내가 뭐?”
“존댓말 했다가 반말 했다, 누나랬다 자기랬다. 하나만 해.”
“아, 그랬나? 나야 늘 반말하고 싶지. 이름도 부르고. 단지 누나가, 아니 울 자기가 싫어할까봐 조심스러웠던 거지. 미친놈이 아닌 이상 자기 여자한테 누나라고 부르고 싶은 남자가 어디 있겠어? 안 그래, 영미야?”
생전 재호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와 재호가 오버랩되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달려들어 그를 안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의 자존심상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엉큼한 속내를 들킨 이상 쉽게 행동하면 안 되었다.
비록 반 혼령이어도 나 또한 여자는 여자였다. 더구나 내가 서른에 성장이 멈춰버린 상태라 할지라도 난 박수와 동갑인 구세대 정서를 가진 여자였다. 그렇기에 죽을힘을 다해 참아가며 퉁명을 떨었다.
“그렇다고 바로 말을 까냐?”
“자기가 하래놓고?”
“내가 언제? 헷갈리니까 하나로 통일하라는 거였지.”
“그 말에 속뜻은 반말 해달라는 거잖아? 아냐?”
“아니래도!”
난 거짓말을 하며 그의 눈을 피했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팔을 뻗어 나를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대번에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뭐야? 왜 그래?”
“미치겠네. 내가 더 못 기다릴 거 같아서. 딸꾹! 했다? 언제까지 내숭떠나 보려고 했는데 더는 못하겠네. 대답해봐. 자기도 딸꾹이지?”
그제야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후, 그는 나를 리드하며 우리만의 몸의 언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달큰하고 너무 달콤해서 대화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와의 대화는 밤을 새워 해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역시 그다웠다. 그는 상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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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
격앙된 내 목소리에 진수는 대답을 못한 채 나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어떻게 했냐고?”
“화내지 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
“야! 박진수! 너 바보니? 천하 멍청이야? 그새 다 까먹었어? 난 그때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려. 근데 뭐야, 넌? 착한 사람 콤플렉스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니?”
“아프잖아? 도와달라는데 어떻게 그래?”
“널 죽이려고 했던 인간이야. 그땐 현철이 땜에 넘어갔다고 치자. 이번엔 왜? 니가 그냥 왔다고 해서 너 욕할 사람 아무도 없어. 그 속사정 알면 아무도 욕 못해! 근데 왜?”
내가 벽력같이 화를 내자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말까지 더듬거렸다.
“나, 나도 지나치려고 했어. 근데 도저히 그렇게 못하겠더라고.”
“모르겠다. 나야말로 내 상식선에선 도무지 니가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그가 내 팔을 잡으며 물었다.
“어디 가?”
“이거 놔. 지금 너랑 같이 있다간 돌아버릴 거 같아서 그래. 박수한테 가 있을게.”
난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의 집을 나왔다. 생각만으로도 화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아무리 마음이 태평양 같이 넓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럴 수는 없을 거 같았다.
사건 당시 경찰서에서 보았던 씨씨티브이 속 사고 영상이 떠오르며 진저리가 쳐졌다. 악마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었다. 단 일초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경한 같은 놈을 그가 도와주고 왔다는 말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어떤 이유로든 그 놈이나 그 애비 이정문과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죽어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을 도와주고 왔단다. 그가 한 얘기를 종합하자면 이랬다.
퇴근 길 지하철역에서 나오려는데 길에 누군가 엎어져 있더란다. 외진 길이었지만 몇몇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단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 그 누구도 쓰러진 사람을 돌아보지 않았단다. 멀끔히 차려입은 옷으로 보아 술에 취한 듯 보였기에 그런 것 같았단다. 그도 첨엔 술 냄새가 진동을 해서 그런 줄 알았단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단다.
그런데 갑자기 엎어졌던 남자가 그의 바지를 붙잡으며 애원을 해왔단다.
“살려주세요. 가슴이······. 가슴이 넘 아파서 숨 쉬기가······.”
남자의 하소연에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고 남자를 보았는데 그게 바로 이경한이었단다. 그 또한 한순간 망설였단다. 그때의 악몽이 떠올라서 엮이고 싶지 않은 게 먼저라 외면하고 싶었단다. 그래서 돌아서려는데 다시 이경한이 매달렸단다.
“제······. 제발 119에 전화만 해주세요.”
이경한은 고통 때문인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단다. 그래서 더 도망치고 싶었단다. 그런데 이경한이 하는 말에 도저히 그냥 올 수가 없었단다.
“사, 살려달다고 했는데······. 아무도 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이번에도 그냥 가시면 저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살, 살려주세요.”
그래서 도움을 주었단다. 만약 이경한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진짜 살인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거 같아서 그랬단다. 그러면서 스스로 세뇌했단다.
‘이 사람은 이경한이 아니다. 이경한이 아니다. 그저 길에 쓰러진 불쌍한 사람이다.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러고 나니까 도움을 주는데 한결 마음이 가벼웠단다. 119에 신고를 하고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이경한 곁에 있어주다가 집에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털어놓은 거란다.
그의 말이 머리로는 전부 이해가 갔다. 하지만 마음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물에 빠진 인간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생떼 쓰는 인간들이 있다는데 아마도 이경한 부자가 그런 부류의 인간들과 진배없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무조건 엮이지 말아야했다.
그런데 그는 발을 담그고 말았다. 이상하게 또 불안했다. 첨으로 그가 비겁하게 살길 바랬다. 불의를 보면 등한시하고 자기 잇속을 밝히는 속물이어도 좋으니 부디 이경한 같은 인간들에게 상남자 코스프레는 하지 않길 간절히 빌었다. 이경한은 그가 보호해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기피 대상이었다.
그가 다시 한 번 깨닫길, 아무 일 없길 소망하며 박수에게로 향했다. 박수가 해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괜찮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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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8. 에필로그조회 : 2,07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1,652 47.47. 해피엔딩조회 : 1,34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381 46.46. 악의 대부조회 : 1,36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21 45.45. 악마 퇴치2조회 : 1,12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724 44.44. 악마 퇴치조회 : 1,22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866 43.43. 빌어먹을 촉조회 : 1,20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52 42.42. 상남자조회 : 1,41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47 41.41. 내가 보여?조회 : 1,11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79 40.40. 고통의 강도2조회 : 29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21 39.39. 우리는 연인조회 : 29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55 38.38. 키스해도 될까요조회 : 3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90 37.37. 손등에 마음이 닿다조회 : 28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36 36.36. 화해?조회 : 3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14 35.35. 이해가 안 돼조회 : 3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065 34.34. 악마네 집조회 : 32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56 33.33. 또 너니조회 : 35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809 32.32. 살아줘서 고마워조회 : 36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16 31.31. 가지 마, 진수야조회 : 2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66 30.30. 폭풍 전야조회 : 32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45 29.29. 사랑도 우정도조회 : 47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53 28.28. 질투는 반 혼령의 힘조회 : 25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41 27.27. 거짓말조회 : 34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07 26.26. 데이트조회 : 37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16 25.25. 진수와 나, 그리고 박수조회 : 37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48 24.24. 협력하여 선을 이루다조회 : 38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22 23.23. 믿어줘조회 : 31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00 22.22. 말 걸다조회 : 3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06 21.21. 박수야, 고마워조회 : 3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072 20.20. 악마의 자식조회 : 41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804 19.19. 이경한, 알 수 없는 아이조회 : 31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56 18.18. 이경한조회 : 42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13 17.17. 다정한 진수씨조회 : 44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20 16.16. 꿈결의 대화조회 : 41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69 15.15. 꿈속의 여인조회 : 37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12 14.14. 환생조회 : 41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29 13.13. 염라대왕의 선처조회 : 38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41 12.12. 애인 놀이 and 부부 놀이조회 : 51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85 11.11. 이혼녀 되기 싫어조회 : 44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44 10.10. 불행 소나타조회 : 34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76 9.9. 여전사 한영미조회 : 53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97 8.8. 이정문 , 지옥에나 떨어져라조회 : 53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90 7.7. 너와 함께라면조회 : 34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75 6.6. 소중해조회 : 41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19 5.5. 연인조회 : 497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502 4.4. 고통의 강도조회 : 430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865 3.3. 내 편조회 : 403 추천 : 1 댓글 : 0 글자 : 6,986 2.2. 중국집 배달원조회 : 471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453 1.1. 반 혼령조회 : 1,972 추천 : 1 댓글 : 0 글자 : 7,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