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악의 대부
조회 : 1,357 추천 : 0 글자수 : 5,921 자 2022-12-18
46. 악의 대부
“참! 지독하더라. 어떻게 된 게 끝까지 반성은커녕 죄책감도 없어. 타고나길 그런 종자가 있나봐, 악의 씨. 소리 지르고 진수한테 저주 퍼붓고 하는데 섬뜩하더라니까. 웬만한 악귀보다 난 걔가 더 무섭더라. 더구나 말간 얼굴로 그러니까 더 끔찍해. 으흐흐.”
박수는 악몽이라도 꾼 듯 진저리를 쳐댔다. 재판을 다녀온 박수와 진수는 기진맥진한 얼굴로 내 앞에 앉아있었다. 남들 눈엔 안보여도 나 역시 그곳을 함께 다녀온 터라 기력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흡사 팔열지옥에라도 다녀온 것 같았다.
악마도 그런 악마가 없었다. 이경한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가 맞았다.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와 현철과 진수 등의 증인이 있는데도 놈은 끝까지 난동을 피우며 죄를 부인했다. 결국 죄질도 나쁜데다 반성조차 없다는 이유로 놈은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다. 진수의 말대로 그는 살아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됐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가볍지가 않았다. 분명 악의 씨가 퇴치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찜찜했다. 혹여 놈이 술수를 부려 형집행정지라도 받아 나올까봐 그런 걸까. 혼자 진단해 봐도 그런 이유만은 아닌 듯했다.
실은 정답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 땜에 그런 것이리라. 난 거기서 이정문을 보았다. 악의 대부, 이정문. 아들의 재판을 보러 온 그 놈을 보았다. 놈은 번들번들한 얼굴과 살기가 등등한 눈으로 진수를 노려봤다.
몇 십 년 세월이 흐른 탓인지 놈은 진수의 얼굴을 보고도 재호를 떠올리지 못하는 거 같았다. 아니 제발 부디 그래주길 바랐다. 놈이 진수를 보고 재호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길 바라고 바랐다. 이것으로 정말 끝이면 좋겠는데 또 악벤저스와 엮일 일이 있을까봐 내심 초조하고 불안했다.
“반씨! 표정이 왜 그래? 속이 후련하지 않아?”
“······.”
“어? 진짜 왜 그래?”
“아냐, 힘들어서 그래.”
재차 묻는 박수의 물음에도 난 솔직하게 답하지 않았다. 이경한의 말로를 지켜보고 온 터라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또 다른 고민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반 혼령도 힘들어? 나야 늙어서 힘들지만 반씨는 ‘영’하잖아? 무려 서른넷 연하랑 연애도 하고. 킬킬.”
박수의 농담에 나도 진수도 그제야 피식 웃었다.
“부러우면 박수도 늙지 않는 반 혼령 하든지.”
“와, 그 말 오랜만에 들어보네. 킬킬. 우리 악당도 물리쳤는데 걱정은 메리나 인형한테 맡기고 파티라도 할까? 하하하.”
내가 맞받아치고 나서야 박수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분위기가 가라앉아있으니 아마도 그걸 띄우기 위해 객쩍은 소리를 하는 듯 보였다. 그걸 알기에 나도 응수를 해준 거였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박수는 한결같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의 진심이 박수에게 닿길 바라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 박수! 오랜 세월 내 뒤치다꺼리 하느라 고생 많았어.”
“저도요. 고맙습니다, 아저씨!”
“왜들 그러실까? 사람 무섭게.”
덩달아 진수까지 인사를 하자 박수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말헀다.
“참! 병원 한 번 다녀와야겠어.”
“무슨 병원?”
내가 되묻자 박수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말을 계속 했다.
“반씨 육체가 누워있는 병원 말이야.”
“갑자기 왜?”
“가본지 좀 됐고 왠지 가봐야 할 거 같아서.”
“그니까 왜?”
나의 다그침에 박수는 실토하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오버하는 걸 수도 있는데······.”
“뜸들이지 말고 빨랑 말해.”
“아니 나 땜에 괜한 걱정들 할까봐.”
“그니까 그게 뭐냐고?”
“아까 거기서 이정문이 계속 진수를 노려보는 걸 봤어. 첨엔 지 아들놈한테 불리한 증언을 해서 그런가했는데 현철인 한 번 보는가 싶더니 유독 진수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더라고. 세월이 많이 지나서 재호의 얼굴을 잊은 줄 알았는데 진수를 계속 쳐다본다는 건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잖아. 더구나 나중에 보니까 옆에 앉은 비서인지 누군지는 몰겠지만 남자한테 진수를 슬쩍 가리키면서 뭔 지시까지 하는 거 같더라고. 난 직감적으로 진수 뒤를 캐라는 뜻으로 생각했어.”
“······.”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사람 느낌은 다 비슷한데 박수도 느꼈구나 싶으니까 우려가 사실화 되는 거 같아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진수도 말을 보탰다.
“실은······. 저도요. 아저씨만 느끼신 게 아니라 저도 느꼈어요. 경한이 아버지가 계속 저 쳐다보는 거요. 그것도 의미심장한 눈으로요.”
“그랬어? 반씨는 못 느꼈어? 누구 보다 반씨가 젤 먼저 알아챘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기분이 다운되어 있나 했는데. 아냐?”
“······.”
내가 대답이 없자 박수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더이상 묻지 않았다. 열 마디 대답보다 내 표정에서 그 답을 읽은 듯했다.
“그럼 뭐야? 우리 셋 다 모두 느끼고도 서로 말 안한 거야? 괜히 걱정들 할까봐? 배려들 끝내 주네. 우리가 피는 안 섞였어도 가족 맞네. 가족 맞아.”
박수는 다시 한 번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이번엔 웃음은커녕 어떤 대거리도 할 수가 없었다. 또 그 빌어먹을 나쁜 촉이 내 몸을 휘감으며 어질하게 만들었다. 이경한을 퇴치하고 온 날인데 그 애비 이정문으로 인해 난 다시 멘탈이 붕괴되어 갔다.
****
“누구야, 너?”
이정문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진수를 향해 소리쳤다.
“박진수요. 아시잖아요, 경한이 동창생.”
그는 담담하고 태연하게 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나보다 그가 훨씬 나았다. 놈의 눈엔 보이지 않지만 난 그의 손을 잡고 떨고 있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죽음을 겁내지 않는 반 혼령이 되었어도 이정문 놈은 두려웠다.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트라우마인 듯했다. 놈에게 당했던 많은 기억들이 아직도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어 그런 듯싶었다.
“거짓말 마! 너 진짜 누구야? 쟤는 또 누구고? 니들 대체 뭐야?”
놈은 병상에 누워있는 나를 가리키며 격앙된 음성으로 소리쳤다. 어찌 보면 나만 떨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정문 또한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우리의 예감대로 놈은 진수를 보고 재호를 떠올렸던 게 맞았다. 그렇기에 박수의 말처럼 사람을 시켜 그의 뒤를 밟았고 내가 있는 병원까지 알아냈던 거였다. 그리고 병원에 오랜 세월 늙지도 않은 채 미이라처럼 누워있는 날 보고 경악했다.
거기다 진수까지 병원에서 마주치자 놈은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 보였다. 곧 혈압상승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나보다도 한 살이 많으니 놈 또한 이젠 적지 않은 나이가 됐다. 그런데도 놈의 얼굴은 여전히 악마와 닮아있었다. 이경한이나 이정문이나 부전자전이었다.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저런 악귀들과 피가 섞였다는 게 치욕스러웠다. 가능하다면 피를 다 갈아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민재호잖아? 아니, 아니. 살아있다면 안 늙은 게 말이 돼? 맞아, 민재호는 아냐. 너 그럼 민재호 아들이지?”
놈은 눈앞의 상황에 정신이라도 빠진 듯 횡설수설해대며 중언부언했다.
“아니요. 전 박진수에요. 저희 부모님은 당신 아들 땜에 돌아가신 거 재판에서 들었잖아요?”
“아냐, 아니라고! 아들이 아니고선 어떻게 똑같이 생겨? 죽은 놈이 살아온 것도 아니고. 민재호는 사고로 죽었다고 했어. 너 정말 누구야?”
박수의 걱정대로 놈이 의사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누워있는 내게 해코지라도 할까봐 진수는 자주 병원을 들렀다. 물론 항상 나와 함께. 그러다가 이정문과 마주치게 된 거였고.
하지만 그는 예상이라도 한 듯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했다. 놈은 누워있는 나와 진수를 번갈아 쳐다보며 미친 듯이 흥분했다.
“알아봤어, 다 알아봤다고! 니들 사고로 죽었다고 했어, 분명! 근데 네 놈도 저 년도 죽지 않고 늙지도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게 말이 돼? 넌 그 년놈의 자식이라고 쳐도 저기 자빠져있는 저 년은 뭐냐고? 쟤 한영미 맞잖아? 몇 십 년씩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살아있다는 게 말이 되냐고? 이 병원에 학회 보고감이라고 소문이 파다한데 이건 뭐라고 설명할래? 너 저 년이랑 무슨 사이야? 니 엄마야?”
그는 기가 막힌 듯 피식 웃더니 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마도 내게 들은 놈의 악행을 떠올리는 듯 했다.
“궁금하네요. 이경한 아버지가 왜 나와 한영미에 대해 이렇게 날을 세우고 있는지? 우리가 살아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우리한테 못할 짓을 많이 했나?”
“우, 우리? 너, 너······. 민, 민재호 맞지? 니, 니들······. 귀, 귀신이야 뭐야?”
놈은 말까지 더듬거리며 사색이 되어 물었다.
“왜, 죄 짓는 건 안 무섭고 귀신은 무서워요? 귀신한테 당할까봐? 그럼 죄를 짓지 말았어야지.”
“내, 내가······. 뭘? 나 지은 죄 없어. 죄 지은 거 없다고! 다 니들 잘못이야. 다 니들 탓이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놈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쳤다. 그대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기도드렸다. 아니 그렇게 믿어버렸다. 진수는 반쯤 얼이 빠져있는 내 손을 꼭 잡으며 오빠처럼, 마치 예전의 재호처럼 말했다.
“영미야! 걱정 마. 니 옆엔 내가 있어.”
****
내 착각이었다. 엮이고 싶지 않은 바램이 큰 탓에 내 맘대로 결론지었다. 귀신을 본 듯 도망을 갔으니 절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일주일 후, 그 생각은 무참히 날 배신했다. 애당초 이정문은 그렇게 끝낼 인간이 아니었다. 당시는 도망을 쳤을지언정 악마의 직성대로 어떻게든 끝장을 보고 말 놈이었다. 재호로 믿고 있는 진수와 날 본 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였다.
우리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는 게 놈에겐 충분히 위협으로 느껴질 게 뻔했다. 복수라도 당할까봐 떨고 있을 테니까.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황당해도 그리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놈은 공격을 당하기 전에 먼저 칠 계획을 도모했던 거였다. 놈은 또 다시 병원으로 찾아왔고 진수와 맞닥뜨렸다. 물론 다른 사람들 눈엔 안 보여도 나 또한 같이 있었다. 놈은 그를 보더니 입술을 씰룩거리며 비아냥거렸다.
“니들이 뭔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나한텐 안 통해. 나 의사야. 귀신? 내가 그딴 걸 믿을 거 같아? 넌 박진수라며? 그럼 저 년이랑은 아무 상관없잖아? 난 저 년 오빠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당장 명줄을 끊어 놓을 수 있다고! 몇 십 년씩 저러고 있는데도 보호자가 없어서 어쩌지 못했지만 이젠 내가 알았으니 처리하면 돼.”
“당신이 무슨 권리로? 오빠? 당신 또한 영미랑은 법적으로 남남이잖아?”
“푸하하.”
그의 대거리에 놈은 과장되게 웃어젖혔다.
“니가 모르는 게 있는데 유전자 검사하면 저 년이랑 난 남매라는 게 입증되거든? 낄낄. 그럼 저 년을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놈은 큰 소리를 치며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갔다.
“당신 맘대로는 안 될거야.”
진수 또한 질세라 놈의 뒤통수에 대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난 당장이라도 놈에 의해 내 육체가 훼손될까봐 무서웠다. 놈의 주장대로라면 그 말이 맞았다. 진수의 전생이 재호인 건 맞지만 현재 그와 난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그의 전생 기억이 돌아와서 내가 깨어난다면 또 모를까, 현재로선 그랬다.
그런데 아직 내 몸이 긴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놈이 날 안락사라도 시킨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말했다.
“걱정 마, 저 놈은 널 어쩌지 못해. 박수 아저씨한테 들었어. 넌 염라대왕의 허락이 없는 한 절대 죽지못한다고. 맞지?”
맞았다. 그 누구도 날 죽일 수는 없었다. 난 천 년 동안 저승에 갈 수 없으니까. 다시 말해 저승에 갈 수 없다는 건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때에야 비로소 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놈이 겁나지 않았다.
“고마워, 그걸 잊고 있었네.”
“거봐, 내가 있는 한 누구도 한영미 못 건드려.”
“참! 지독하더라. 어떻게 된 게 끝까지 반성은커녕 죄책감도 없어. 타고나길 그런 종자가 있나봐, 악의 씨. 소리 지르고 진수한테 저주 퍼붓고 하는데 섬뜩하더라니까. 웬만한 악귀보다 난 걔가 더 무섭더라. 더구나 말간 얼굴로 그러니까 더 끔찍해. 으흐흐.”
박수는 악몽이라도 꾼 듯 진저리를 쳐댔다. 재판을 다녀온 박수와 진수는 기진맥진한 얼굴로 내 앞에 앉아있었다. 남들 눈엔 안보여도 나 역시 그곳을 함께 다녀온 터라 기력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흡사 팔열지옥에라도 다녀온 것 같았다.
악마도 그런 악마가 없었다. 이경한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가 맞았다.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와 현철과 진수 등의 증인이 있는데도 놈은 끝까지 난동을 피우며 죄를 부인했다. 결국 죄질도 나쁜데다 반성조차 없다는 이유로 놈은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다. 진수의 말대로 그는 살아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됐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가볍지가 않았다. 분명 악의 씨가 퇴치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찜찜했다. 혹여 놈이 술수를 부려 형집행정지라도 받아 나올까봐 그런 걸까. 혼자 진단해 봐도 그런 이유만은 아닌 듯했다.
실은 정답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 땜에 그런 것이리라. 난 거기서 이정문을 보았다. 악의 대부, 이정문. 아들의 재판을 보러 온 그 놈을 보았다. 놈은 번들번들한 얼굴과 살기가 등등한 눈으로 진수를 노려봤다.
몇 십 년 세월이 흐른 탓인지 놈은 진수의 얼굴을 보고도 재호를 떠올리지 못하는 거 같았다. 아니 제발 부디 그래주길 바랐다. 놈이 진수를 보고 재호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길 바라고 바랐다. 이것으로 정말 끝이면 좋겠는데 또 악벤저스와 엮일 일이 있을까봐 내심 초조하고 불안했다.
“반씨! 표정이 왜 그래? 속이 후련하지 않아?”
“······.”
“어? 진짜 왜 그래?”
“아냐, 힘들어서 그래.”
재차 묻는 박수의 물음에도 난 솔직하게 답하지 않았다. 이경한의 말로를 지켜보고 온 터라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또 다른 고민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반 혼령도 힘들어? 나야 늙어서 힘들지만 반씨는 ‘영’하잖아? 무려 서른넷 연하랑 연애도 하고. 킬킬.”
박수의 농담에 나도 진수도 그제야 피식 웃었다.
“부러우면 박수도 늙지 않는 반 혼령 하든지.”
“와, 그 말 오랜만에 들어보네. 킬킬. 우리 악당도 물리쳤는데 걱정은 메리나 인형한테 맡기고 파티라도 할까? 하하하.”
내가 맞받아치고 나서야 박수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분위기가 가라앉아있으니 아마도 그걸 띄우기 위해 객쩍은 소리를 하는 듯 보였다. 그걸 알기에 나도 응수를 해준 거였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박수는 한결같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의 진심이 박수에게 닿길 바라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 박수! 오랜 세월 내 뒤치다꺼리 하느라 고생 많았어.”
“저도요. 고맙습니다, 아저씨!”
“왜들 그러실까? 사람 무섭게.”
덩달아 진수까지 인사를 하자 박수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말헀다.
“참! 병원 한 번 다녀와야겠어.”
“무슨 병원?”
내가 되묻자 박수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말을 계속 했다.
“반씨 육체가 누워있는 병원 말이야.”
“갑자기 왜?”
“가본지 좀 됐고 왠지 가봐야 할 거 같아서.”
“그니까 왜?”
나의 다그침에 박수는 실토하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오버하는 걸 수도 있는데······.”
“뜸들이지 말고 빨랑 말해.”
“아니 나 땜에 괜한 걱정들 할까봐.”
“그니까 그게 뭐냐고?”
“아까 거기서 이정문이 계속 진수를 노려보는 걸 봤어. 첨엔 지 아들놈한테 불리한 증언을 해서 그런가했는데 현철인 한 번 보는가 싶더니 유독 진수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더라고. 세월이 많이 지나서 재호의 얼굴을 잊은 줄 알았는데 진수를 계속 쳐다본다는 건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잖아. 더구나 나중에 보니까 옆에 앉은 비서인지 누군지는 몰겠지만 남자한테 진수를 슬쩍 가리키면서 뭔 지시까지 하는 거 같더라고. 난 직감적으로 진수 뒤를 캐라는 뜻으로 생각했어.”
“······.”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사람 느낌은 다 비슷한데 박수도 느꼈구나 싶으니까 우려가 사실화 되는 거 같아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진수도 말을 보탰다.
“실은······. 저도요. 아저씨만 느끼신 게 아니라 저도 느꼈어요. 경한이 아버지가 계속 저 쳐다보는 거요. 그것도 의미심장한 눈으로요.”
“그랬어? 반씨는 못 느꼈어? 누구 보다 반씨가 젤 먼저 알아챘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기분이 다운되어 있나 했는데. 아냐?”
“······.”
내가 대답이 없자 박수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더이상 묻지 않았다. 열 마디 대답보다 내 표정에서 그 답을 읽은 듯했다.
“그럼 뭐야? 우리 셋 다 모두 느끼고도 서로 말 안한 거야? 괜히 걱정들 할까봐? 배려들 끝내 주네. 우리가 피는 안 섞였어도 가족 맞네. 가족 맞아.”
박수는 다시 한 번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이번엔 웃음은커녕 어떤 대거리도 할 수가 없었다. 또 그 빌어먹을 나쁜 촉이 내 몸을 휘감으며 어질하게 만들었다. 이경한을 퇴치하고 온 날인데 그 애비 이정문으로 인해 난 다시 멘탈이 붕괴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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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야, 너?”
이정문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진수를 향해 소리쳤다.
“박진수요. 아시잖아요, 경한이 동창생.”
그는 담담하고 태연하게 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나보다 그가 훨씬 나았다. 놈의 눈엔 보이지 않지만 난 그의 손을 잡고 떨고 있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죽음을 겁내지 않는 반 혼령이 되었어도 이정문 놈은 두려웠다.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트라우마인 듯했다. 놈에게 당했던 많은 기억들이 아직도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어 그런 듯싶었다.
“거짓말 마! 너 진짜 누구야? 쟤는 또 누구고? 니들 대체 뭐야?”
놈은 병상에 누워있는 나를 가리키며 격앙된 음성으로 소리쳤다. 어찌 보면 나만 떨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정문 또한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우리의 예감대로 놈은 진수를 보고 재호를 떠올렸던 게 맞았다. 그렇기에 박수의 말처럼 사람을 시켜 그의 뒤를 밟았고 내가 있는 병원까지 알아냈던 거였다. 그리고 병원에 오랜 세월 늙지도 않은 채 미이라처럼 누워있는 날 보고 경악했다.
거기다 진수까지 병원에서 마주치자 놈은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 보였다. 곧 혈압상승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나보다도 한 살이 많으니 놈 또한 이젠 적지 않은 나이가 됐다. 그런데도 놈의 얼굴은 여전히 악마와 닮아있었다. 이경한이나 이정문이나 부전자전이었다.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저런 악귀들과 피가 섞였다는 게 치욕스러웠다. 가능하다면 피를 다 갈아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민재호잖아? 아니, 아니. 살아있다면 안 늙은 게 말이 돼? 맞아, 민재호는 아냐. 너 그럼 민재호 아들이지?”
놈은 눈앞의 상황에 정신이라도 빠진 듯 횡설수설해대며 중언부언했다.
“아니요. 전 박진수에요. 저희 부모님은 당신 아들 땜에 돌아가신 거 재판에서 들었잖아요?”
“아냐, 아니라고! 아들이 아니고선 어떻게 똑같이 생겨? 죽은 놈이 살아온 것도 아니고. 민재호는 사고로 죽었다고 했어. 너 정말 누구야?”
박수의 걱정대로 놈이 의사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누워있는 내게 해코지라도 할까봐 진수는 자주 병원을 들렀다. 물론 항상 나와 함께. 그러다가 이정문과 마주치게 된 거였고.
하지만 그는 예상이라도 한 듯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했다. 놈은 누워있는 나와 진수를 번갈아 쳐다보며 미친 듯이 흥분했다.
“알아봤어, 다 알아봤다고! 니들 사고로 죽었다고 했어, 분명! 근데 네 놈도 저 년도 죽지 않고 늙지도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게 말이 돼? 넌 그 년놈의 자식이라고 쳐도 저기 자빠져있는 저 년은 뭐냐고? 쟤 한영미 맞잖아? 몇 십 년씩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살아있다는 게 말이 되냐고? 이 병원에 학회 보고감이라고 소문이 파다한데 이건 뭐라고 설명할래? 너 저 년이랑 무슨 사이야? 니 엄마야?”
그는 기가 막힌 듯 피식 웃더니 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마도 내게 들은 놈의 악행을 떠올리는 듯 했다.
“궁금하네요. 이경한 아버지가 왜 나와 한영미에 대해 이렇게 날을 세우고 있는지? 우리가 살아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우리한테 못할 짓을 많이 했나?”
“우, 우리? 너, 너······. 민, 민재호 맞지? 니, 니들······. 귀, 귀신이야 뭐야?”
놈은 말까지 더듬거리며 사색이 되어 물었다.
“왜, 죄 짓는 건 안 무섭고 귀신은 무서워요? 귀신한테 당할까봐? 그럼 죄를 짓지 말았어야지.”
“내, 내가······. 뭘? 나 지은 죄 없어. 죄 지은 거 없다고! 다 니들 잘못이야. 다 니들 탓이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놈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쳤다. 그대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기도드렸다. 아니 그렇게 믿어버렸다. 진수는 반쯤 얼이 빠져있는 내 손을 꼭 잡으며 오빠처럼, 마치 예전의 재호처럼 말했다.
“영미야! 걱정 마. 니 옆엔 내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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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착각이었다. 엮이고 싶지 않은 바램이 큰 탓에 내 맘대로 결론지었다. 귀신을 본 듯 도망을 갔으니 절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일주일 후, 그 생각은 무참히 날 배신했다. 애당초 이정문은 그렇게 끝낼 인간이 아니었다. 당시는 도망을 쳤을지언정 악마의 직성대로 어떻게든 끝장을 보고 말 놈이었다. 재호로 믿고 있는 진수와 날 본 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였다.
우리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는 게 놈에겐 충분히 위협으로 느껴질 게 뻔했다. 복수라도 당할까봐 떨고 있을 테니까.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황당해도 그리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놈은 공격을 당하기 전에 먼저 칠 계획을 도모했던 거였다. 놈은 또 다시 병원으로 찾아왔고 진수와 맞닥뜨렸다. 물론 다른 사람들 눈엔 안 보여도 나 또한 같이 있었다. 놈은 그를 보더니 입술을 씰룩거리며 비아냥거렸다.
“니들이 뭔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나한텐 안 통해. 나 의사야. 귀신? 내가 그딴 걸 믿을 거 같아? 넌 박진수라며? 그럼 저 년이랑은 아무 상관없잖아? 난 저 년 오빠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당장 명줄을 끊어 놓을 수 있다고! 몇 십 년씩 저러고 있는데도 보호자가 없어서 어쩌지 못했지만 이젠 내가 알았으니 처리하면 돼.”
“당신이 무슨 권리로? 오빠? 당신 또한 영미랑은 법적으로 남남이잖아?”
“푸하하.”
그의 대거리에 놈은 과장되게 웃어젖혔다.
“니가 모르는 게 있는데 유전자 검사하면 저 년이랑 난 남매라는 게 입증되거든? 낄낄. 그럼 저 년을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놈은 큰 소리를 치며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갔다.
“당신 맘대로는 안 될거야.”
진수 또한 질세라 놈의 뒤통수에 대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난 당장이라도 놈에 의해 내 육체가 훼손될까봐 무서웠다. 놈의 주장대로라면 그 말이 맞았다. 진수의 전생이 재호인 건 맞지만 현재 그와 난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그의 전생 기억이 돌아와서 내가 깨어난다면 또 모를까, 현재로선 그랬다.
그런데 아직 내 몸이 긴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놈이 날 안락사라도 시킨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말했다.
“걱정 마, 저 놈은 널 어쩌지 못해. 박수 아저씨한테 들었어. 넌 염라대왕의 허락이 없는 한 절대 죽지못한다고. 맞지?”
맞았다. 그 누구도 날 죽일 수는 없었다. 난 천 년 동안 저승에 갈 수 없으니까. 다시 말해 저승에 갈 수 없다는 건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때에야 비로소 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놈이 겁나지 않았다.
“고마워, 그걸 잊고 있었네.”
“거봐, 내가 있는 한 누구도 한영미 못 건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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