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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925 추천 : 0 글자수 : 5,990 자 2022-12-25
상헌은 모르는 번호로 온 안부 문자가 누구의 안부인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번호를 알려준 기억은 없으니, 창우 혹은 재민 중 자신의 번호를 넘긴 범인이 있을 것 같았다. 둘 중 누굴까.
“근데 둘 다 내 번호 모를 건데.”
하지만 의문점이 있었다. 재민에게도 창우에게도 번호를 알려준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면 같은 공씨를 가진 공민아는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을까? 상헌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기 위해서라도 민아의 안부 인사에 답해야 했다. 절대 민아에게 먼저 연락이 온 게 좋아서 답장을 하는 게 아니었다.
-여보세요?
상헌은 답 문자를 보내는 대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부담스러워서 안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신호음은 금방 끊겼다.
“나 공상헌인데 문자 왔길래. 나한테 보낸 거 맞아?”
옛날의 공상헌이었다면 다짜고짜 우리 지금 만날래?, 라고 했겠지만 지금 상헌은 어른이었다. 신사답게 메시지의 주인이 내가 맞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상헌은 영상통화도 아닌데 까치집이 된 머리를 정리했다.
-맞아요. 오빠 그날 과제 잘 했어요?
“응, 잘 했지. 근데 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 난 그날 번호 교환 안 했는데.”
-경영학과에 친구가 있어서 물어봤어요. 혹시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해요.
상헌은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과팅에서 잠깐 얼굴을 비췄을 뿐인데 이렇게 먼저 연락까지 오게 하는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역시 내가 잘생겨서일까? 머리를 정리하던 상헌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아니야, 괜찮아. 우리 과에 친구가 있었구나. 누구야?”
-지예요. 오빠랑 되게 친하다고 하던데 맞아요?
“아…, 지예? 응. 친하지.”
요즘 상헌 혼자 멀어지긴 했지만 친한 사이가 맞았다. 번호를 알려준 게 지예였구나. 상헌은 민아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선배의 연애를 위해 연락처까지 전달해준 지예의 호의가 반갑지 않았다. 굳이 왜 민아에게 번호를 알려줬을까? 민아와 만나면서 바름이에게서 떨어지라고? 상헌 스스로 생각해도 아침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가설이었다.
-다음에 지예랑 같이 밥 한번 먹어요.
“그래, 한번 놀러 와.”
-좋아요! 그때 카페에서 본 후배분이랑 지예랑 넷이 먹어요.
넷이? 그 대목에서 상헌은 단박에 지예의 속셈을 알 수 있었다. 넷이 밥을 먹자고 한다면 김바름은 뭐라고 할까. 상헌이 슬쩍 떠올려 보았다. 남들이랑 밥 먹는 게 불편하다고 했으니 거절할까? 지예가 껴있다고 하면 좋다고 하려나? 자신과 잠자리를 가진 뒤에도 곧장 지예의 전화를 받으러 갔을 정도니 좋다고 하겠지, 뭐.
“그래, 바름이한테 한 번 물어볼게.”
사실 절대 물어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상헌은 바름의 앞에서 절대 지예와의 밥 약속을 꺼내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네. 사실은 그때 많이 못 친해진 것 같아서 좀 아쉬웠어요,
“그거야 앞으로 친해지면 되지. 민아야, 나 지금 나가야 해서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상헌은 알겠다는 민아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통화종료를 눌렀다. 괜히 김지우 때문에 귀찮은 자리에 나갔다가 김바름 좋은 일만 시켜주게 생겨서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경영학과 자존심은 지킨 것 같아 뿌듯하긴 했다. 경영학과가 김바름과 오징어들은 아니라는 건 알렸으니 그게 어디야.
“누가 경영학과 인물 없대.”
공상헌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
죽일 거야! 하면 죽이러 가는 장면이 나오는 3분짜리 드라마도 아니고 이게 뭐야. 상헌은 지예와 팔짱을 끼고 수다를 떠는 민아를 보며 지예의 추진력에 감탄했다. 넷이 밥 한번 먹자더니 이주일도 일주일도 아닌 단 며칠 만에 민아를 데리고 나타난 게 보통 실천력은 아니었다.
“바름이 수업 끝나면 바로 올 거예요.”
“온대?”
“네.”
캠퍼스에 놓인 상처 많은 벤치에 앉아서 꽃잎 하나에도 까르륵거리는 친구사이를 보는 건 상당히 지겨운 일이었다. 상헌은 나오려는 하품을 속으로 삼켰다. 눈 끝으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김바름 자기 동기들이랑 잘 안 놀던데 너랑은 친한가 봐?”
“바름이가 저한테 부탁하는 게 많아서 그래요.”
상헌이 지예를 슬쩍 떠봤다. 동기들이 불러내는 자리에 쉽게 등장하지 않는 최종 보스같은 김바름이 왜 지예의 부름에는 재깍재깍 나오는지 궁금했다. 부탁하는 게 많아서? 상헌은 지예의 대답에도 바름이 무언가를 부탁하는 모습이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제발 내 마음을 받아줘, 라는 부탁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무슨 부탁? 걔가 부탁도 해?”
“네. 제가 애들 생일선물로 자주 주는 손 소독제가 있는데 그것도 구해달라고 하고, 또 뭐 있더라?”
“손 소독제? 김바름 집에 있는 그거?”
“바름이 집 안 가봐서 모르는데 아마 맞을 거예요. 민아 너한테도 줬잖아. 그거 알지?”
지예의 질문에 민아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그걸로 손을 씻었다며 제 손을 지예의 코에 가져다 댄 민아가 킁킁거리는 지예의 코를 손등으로 밀었다. 놀란 지예가 짜증을 내자 또 한바탕 까르륵거리는 민아를 보면서 상헌은 차라리 둘이 사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했다.
“아, 며칠 전엔 마케팅 과제 조도 바꿔 달라고 했어요.”
“근데 안 바꿔 준거야? 나 바름이랑 아직 같은 조라서.”
“갑자기 안 바꾼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어차피 교수님도 안 된다고 하셨거든요.”
몰랐던 사실에 상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를 바꿀 생각이었구나. 교수님께 조를 바꿔 달라고 조르고 싶었던 건 상헌도 마찬가지였으니 그건 이해해주기로 했다. 너도 내가 불편했다 이거지? 1학년 주제에 조를 바꾸고 싶을 만큼. 하지만 울컥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수업이 늦게 끝나서, 미안.”
바름이 조를 바꾸려고 했다는 사실에 서운함을 느끼던 상헌은 뒤에서 들리는 바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지예에게 부탁하는 게 많다더니 이렇게 늦었다고 사과까지 하는 게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10분이나 기다렸잖아. 배고파 죽겠는데.”
사실 6분이었지만 상헌은 올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올림 처리를 했다. 그래야 김바름이 더 미안해할 것 같아서.
“밥 먹자며, 가자.”
“어디 갈래?”
“그냥 아무 데나 가.”
바름은 짜증을 부리는 상헌을 보고도 대꾸하지 않았다. 밥을 먹자고 불러낸 지예에게 시선을 고정한 바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예에게는 다정한 남자인 줄 알았더니 김바름은 그냥 김바름이었다. 이럴 거면 왜 나왔대? 상헌은 그게 궁금했다. 지예는 바름의 뾰족한 말에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듯 학교 근처 밥집 이름을 줄줄 외웠다.
“아니면 우리 집 갈래? 넷은 좀 좁을 거 같긴 한데 오빠는 어때요?”
서너곳이 넘는 음식점 이름이 나올 때까지 아무도 말이 없자 결국 지예가 자신의 집에 가자며 말을 꺼냈다.
“너희 집 가면 누구 한 명은 사람 위에 앉아야 할 것 같은데.”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가봤어요?”
체구가 작은 넷도 아니고. 지예의 집에서 편하게 앉으려면 누구 하나는 김바름의 무릎에 앉아야 할 수준이었다. 농담을 곁들인 상헌의 말에 바름이 곧바로 물었다. 지예의 집에 가봤냐는 물음이 그렇게 이상한 질문도 아닌데 상헌은 괜히 뜨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저번에 애들이랑 가봤지. 그때도 좁아서 거의 서 있었어.”
그래서 괜히 다른 사람과 함께 갔다는 변명을 했다. 지예의 집에 혼자 놀러 간 적도 많았지만 사회적인 시선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변명했다고 상헌은 자기 자신에게도 변명했다.
“그럼 그냥 요 앞에 가요. 오빠가 바름이 위에 앉을 순 없잖아요.”
상헌의 지적에 지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상헌은 순간 놀라 기침을 했다. 바름의 ‘위에 앉는다’는 말에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건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 아랫배 가득 바름의 것을 담고 바름의 다리 위에 앉았던 게 여전히 생생했으니까.
“몸 안 좋으면 오늘 빨리 들어가요.”
그런 기침이 아닌데 바름이 상헌의 옷을 여며주며 걱정했다. 상헌은 감기에 걸릴까 걱정해주는 바름이 고마웠지만 “빨리 들어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다. 나를 먼저 보내고 자기들끼리 재밌게 놀고 싶다는 뜻인가? 남들이 본다면 배배꼬인 아이스크림을 떠올릴 만큼 꼬이디 꼬인 생각이 상헌을 파고들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나 오늘 늦게 들어갈 거야.”
“맞아요, 오늘 오래 놀아요.”
상헌은 일부러 ‘늦게’를 강조했다. 그러자 지예도 손뼉을 치며 상헌의 말에 동의했다. 바름은 말없이 상헌의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상헌을 빨리 집에 보낼지 생각했다. 처음 지예에게 같이 밥을 먹겠냐는 연락을 받았을 때 바름은 물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 빠르게 거절했다.
“아니. 내가 왜?”라는 바름의 대답에 지예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친구가 과팅에서 본 상헌을 마음에 들어해서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은데 셋이 보기는 어색하다고.
“김바름 너도 늦게까지 있을 거지?”
“보고.”
바름의 대답은 ‘공상헌 하는 거 보고.’라는 의미였지만 상헌은 실눈을 뜨고 입을 삐죽였다. 자신에게는 일찍 들어가라더니 늦게까지 있을 거냐는 지예의 말에는 여지를 주는 게 살짝 싫었다.
“이모, 안녕하세요.”
여지를 주는 바름 때문에 살짝 토라진 상헌은 음식점에 도착하고야 처음 입을 열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인사한 상헌이 일행을 따라 의자에 앉았다. 자신의 옆에 앉으라고 의자를 빼주는 바름 때문에 상헌은 등받이가 있는 소파가 아닌 딱딱한 의자에 앉아야 했다.
“나 소파 쪽에 앉고 싶은데.”
“오빠 그럼 저랑 바꿀래요? 민아 옆에 앉아요.”
“그럴까?”
지예의 말에 화색을 띤 상헌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순간 바름이 상헌의 팔을 잡았다. 상헌이 맹한 얼굴로 잡힌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바름의 속마음 따위 이미 상헌의 손바닥 위였다.
“너도 소파에 앉고 싶어?”
“…….”
“음…, 그냥 너희가 소파에 앉아. 나랑 바름이랑 여기 앉을게.”
잠깐 고민하던 상헌이 마음을 정했다. 바름과 자신이 소파에 앉고 지예와 민아를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체면이 안 섰다. 대신 상헌은 바름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번에만 이렇게 앉자고. 둘이 밥 먹을 땐 너를 소파에 앉게 해주겠다고.
“난 코어 힘이 좋아서 등받이 없어도 괜찮아.”
“그래요? 그날 욕실에서 보니까 코어 힘없는 거 같던데.”
“욕실?”
“그때 운동하고 같이 씻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자리를 못 바꿔 준 지예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길래 부담 갖지 말라고 농담 한 건데. 상헌은 굳이 진실을 말하는 바름의 손등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욕실’과 ‘같이 씻었다’는 묘한 상상을 일으키는 말을 굳이, 나한테 호감 있는 민아 앞에서, 해야 해?
“와 오빠 바름이랑 같이 샤워했어요? 동기 남자애들 바름이랑 샤워하려고 난리던데.”
“왜?”
“얘가 하도 비싸게 구니까요.”
상헌은 지예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박에 알 것 같았다. 바름이 다른 사람과 샤워할 수 없는 몸이라는 걸 자신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괜히 바름의 아픈 점만 찌르는 것 같아 상헌은 손을 높이 들었다. 주문도 안 하고 수다만 떨고 있던 테이블로 주인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계속 시험 기간이었어요. 이모 밥 먹다가 학식 먹으니까 진짜 맛없는 거 있죠.”
단골답게 상헌을 알아본 아주머니가 주문서와 펜을 들고 물었다. 상헌이 넉살 좋게 대꾸하며 늘 먹는 메뉴와 술을 주문했다.
“근데 둘 다 내 번호 모를 건데.”
하지만 의문점이 있었다. 재민에게도 창우에게도 번호를 알려준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면 같은 공씨를 가진 공민아는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을까? 상헌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기 위해서라도 민아의 안부 인사에 답해야 했다. 절대 민아에게 먼저 연락이 온 게 좋아서 답장을 하는 게 아니었다.
-여보세요?
상헌은 답 문자를 보내는 대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부담스러워서 안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신호음은 금방 끊겼다.
“나 공상헌인데 문자 왔길래. 나한테 보낸 거 맞아?”
옛날의 공상헌이었다면 다짜고짜 우리 지금 만날래?, 라고 했겠지만 지금 상헌은 어른이었다. 신사답게 메시지의 주인이 내가 맞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상헌은 영상통화도 아닌데 까치집이 된 머리를 정리했다.
-맞아요. 오빠 그날 과제 잘 했어요?
“응, 잘 했지. 근데 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 난 그날 번호 교환 안 했는데.”
-경영학과에 친구가 있어서 물어봤어요. 혹시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해요.
상헌은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과팅에서 잠깐 얼굴을 비췄을 뿐인데 이렇게 먼저 연락까지 오게 하는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역시 내가 잘생겨서일까? 머리를 정리하던 상헌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아니야, 괜찮아. 우리 과에 친구가 있었구나. 누구야?”
-지예요. 오빠랑 되게 친하다고 하던데 맞아요?
“아…, 지예? 응. 친하지.”
요즘 상헌 혼자 멀어지긴 했지만 친한 사이가 맞았다. 번호를 알려준 게 지예였구나. 상헌은 민아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선배의 연애를 위해 연락처까지 전달해준 지예의 호의가 반갑지 않았다. 굳이 왜 민아에게 번호를 알려줬을까? 민아와 만나면서 바름이에게서 떨어지라고? 상헌 스스로 생각해도 아침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가설이었다.
-다음에 지예랑 같이 밥 한번 먹어요.
“그래, 한번 놀러 와.”
-좋아요! 그때 카페에서 본 후배분이랑 지예랑 넷이 먹어요.
넷이? 그 대목에서 상헌은 단박에 지예의 속셈을 알 수 있었다. 넷이 밥을 먹자고 한다면 김바름은 뭐라고 할까. 상헌이 슬쩍 떠올려 보았다. 남들이랑 밥 먹는 게 불편하다고 했으니 거절할까? 지예가 껴있다고 하면 좋다고 하려나? 자신과 잠자리를 가진 뒤에도 곧장 지예의 전화를 받으러 갔을 정도니 좋다고 하겠지, 뭐.
“그래, 바름이한테 한 번 물어볼게.”
사실 절대 물어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상헌은 바름의 앞에서 절대 지예와의 밥 약속을 꺼내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네. 사실은 그때 많이 못 친해진 것 같아서 좀 아쉬웠어요,
“그거야 앞으로 친해지면 되지. 민아야, 나 지금 나가야 해서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상헌은 알겠다는 민아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통화종료를 눌렀다. 괜히 김지우 때문에 귀찮은 자리에 나갔다가 김바름 좋은 일만 시켜주게 생겨서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경영학과 자존심은 지킨 것 같아 뿌듯하긴 했다. 경영학과가 김바름과 오징어들은 아니라는 건 알렸으니 그게 어디야.
“누가 경영학과 인물 없대.”
공상헌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
죽일 거야! 하면 죽이러 가는 장면이 나오는 3분짜리 드라마도 아니고 이게 뭐야. 상헌은 지예와 팔짱을 끼고 수다를 떠는 민아를 보며 지예의 추진력에 감탄했다. 넷이 밥 한번 먹자더니 이주일도 일주일도 아닌 단 며칠 만에 민아를 데리고 나타난 게 보통 실천력은 아니었다.
“바름이 수업 끝나면 바로 올 거예요.”
“온대?”
“네.”
캠퍼스에 놓인 상처 많은 벤치에 앉아서 꽃잎 하나에도 까르륵거리는 친구사이를 보는 건 상당히 지겨운 일이었다. 상헌은 나오려는 하품을 속으로 삼켰다. 눈 끝으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김바름 자기 동기들이랑 잘 안 놀던데 너랑은 친한가 봐?”
“바름이가 저한테 부탁하는 게 많아서 그래요.”
상헌이 지예를 슬쩍 떠봤다. 동기들이 불러내는 자리에 쉽게 등장하지 않는 최종 보스같은 김바름이 왜 지예의 부름에는 재깍재깍 나오는지 궁금했다. 부탁하는 게 많아서? 상헌은 지예의 대답에도 바름이 무언가를 부탁하는 모습이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제발 내 마음을 받아줘, 라는 부탁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무슨 부탁? 걔가 부탁도 해?”
“네. 제가 애들 생일선물로 자주 주는 손 소독제가 있는데 그것도 구해달라고 하고, 또 뭐 있더라?”
“손 소독제? 김바름 집에 있는 그거?”
“바름이 집 안 가봐서 모르는데 아마 맞을 거예요. 민아 너한테도 줬잖아. 그거 알지?”
지예의 질문에 민아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그걸로 손을 씻었다며 제 손을 지예의 코에 가져다 댄 민아가 킁킁거리는 지예의 코를 손등으로 밀었다. 놀란 지예가 짜증을 내자 또 한바탕 까르륵거리는 민아를 보면서 상헌은 차라리 둘이 사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했다.
“아, 며칠 전엔 마케팅 과제 조도 바꿔 달라고 했어요.”
“근데 안 바꿔 준거야? 나 바름이랑 아직 같은 조라서.”
“갑자기 안 바꾼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어차피 교수님도 안 된다고 하셨거든요.”
몰랐던 사실에 상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를 바꿀 생각이었구나. 교수님께 조를 바꿔 달라고 조르고 싶었던 건 상헌도 마찬가지였으니 그건 이해해주기로 했다. 너도 내가 불편했다 이거지? 1학년 주제에 조를 바꾸고 싶을 만큼. 하지만 울컥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수업이 늦게 끝나서, 미안.”
바름이 조를 바꾸려고 했다는 사실에 서운함을 느끼던 상헌은 뒤에서 들리는 바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지예에게 부탁하는 게 많다더니 이렇게 늦었다고 사과까지 하는 게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10분이나 기다렸잖아. 배고파 죽겠는데.”
사실 6분이었지만 상헌은 올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올림 처리를 했다. 그래야 김바름이 더 미안해할 것 같아서.
“밥 먹자며, 가자.”
“어디 갈래?”
“그냥 아무 데나 가.”
바름은 짜증을 부리는 상헌을 보고도 대꾸하지 않았다. 밥을 먹자고 불러낸 지예에게 시선을 고정한 바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예에게는 다정한 남자인 줄 알았더니 김바름은 그냥 김바름이었다. 이럴 거면 왜 나왔대? 상헌은 그게 궁금했다. 지예는 바름의 뾰족한 말에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듯 학교 근처 밥집 이름을 줄줄 외웠다.
“아니면 우리 집 갈래? 넷은 좀 좁을 거 같긴 한데 오빠는 어때요?”
서너곳이 넘는 음식점 이름이 나올 때까지 아무도 말이 없자 결국 지예가 자신의 집에 가자며 말을 꺼냈다.
“너희 집 가면 누구 한 명은 사람 위에 앉아야 할 것 같은데.”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가봤어요?”
체구가 작은 넷도 아니고. 지예의 집에서 편하게 앉으려면 누구 하나는 김바름의 무릎에 앉아야 할 수준이었다. 농담을 곁들인 상헌의 말에 바름이 곧바로 물었다. 지예의 집에 가봤냐는 물음이 그렇게 이상한 질문도 아닌데 상헌은 괜히 뜨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저번에 애들이랑 가봤지. 그때도 좁아서 거의 서 있었어.”
그래서 괜히 다른 사람과 함께 갔다는 변명을 했다. 지예의 집에 혼자 놀러 간 적도 많았지만 사회적인 시선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변명했다고 상헌은 자기 자신에게도 변명했다.
“그럼 그냥 요 앞에 가요. 오빠가 바름이 위에 앉을 순 없잖아요.”
상헌의 지적에 지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상헌은 순간 놀라 기침을 했다. 바름의 ‘위에 앉는다’는 말에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건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 아랫배 가득 바름의 것을 담고 바름의 다리 위에 앉았던 게 여전히 생생했으니까.
“몸 안 좋으면 오늘 빨리 들어가요.”
그런 기침이 아닌데 바름이 상헌의 옷을 여며주며 걱정했다. 상헌은 감기에 걸릴까 걱정해주는 바름이 고마웠지만 “빨리 들어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다. 나를 먼저 보내고 자기들끼리 재밌게 놀고 싶다는 뜻인가? 남들이 본다면 배배꼬인 아이스크림을 떠올릴 만큼 꼬이디 꼬인 생각이 상헌을 파고들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나 오늘 늦게 들어갈 거야.”
“맞아요, 오늘 오래 놀아요.”
상헌은 일부러 ‘늦게’를 강조했다. 그러자 지예도 손뼉을 치며 상헌의 말에 동의했다. 바름은 말없이 상헌의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상헌을 빨리 집에 보낼지 생각했다. 처음 지예에게 같이 밥을 먹겠냐는 연락을 받았을 때 바름은 물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 빠르게 거절했다.
“아니. 내가 왜?”라는 바름의 대답에 지예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친구가 과팅에서 본 상헌을 마음에 들어해서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은데 셋이 보기는 어색하다고.
“김바름 너도 늦게까지 있을 거지?”
“보고.”
바름의 대답은 ‘공상헌 하는 거 보고.’라는 의미였지만 상헌은 실눈을 뜨고 입을 삐죽였다. 자신에게는 일찍 들어가라더니 늦게까지 있을 거냐는 지예의 말에는 여지를 주는 게 살짝 싫었다.
“이모, 안녕하세요.”
여지를 주는 바름 때문에 살짝 토라진 상헌은 음식점에 도착하고야 처음 입을 열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인사한 상헌이 일행을 따라 의자에 앉았다. 자신의 옆에 앉으라고 의자를 빼주는 바름 때문에 상헌은 등받이가 있는 소파가 아닌 딱딱한 의자에 앉아야 했다.
“나 소파 쪽에 앉고 싶은데.”
“오빠 그럼 저랑 바꿀래요? 민아 옆에 앉아요.”
“그럴까?”
지예의 말에 화색을 띤 상헌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순간 바름이 상헌의 팔을 잡았다. 상헌이 맹한 얼굴로 잡힌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바름의 속마음 따위 이미 상헌의 손바닥 위였다.
“너도 소파에 앉고 싶어?”
“…….”
“음…, 그냥 너희가 소파에 앉아. 나랑 바름이랑 여기 앉을게.”
잠깐 고민하던 상헌이 마음을 정했다. 바름과 자신이 소파에 앉고 지예와 민아를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체면이 안 섰다. 대신 상헌은 바름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번에만 이렇게 앉자고. 둘이 밥 먹을 땐 너를 소파에 앉게 해주겠다고.
“난 코어 힘이 좋아서 등받이 없어도 괜찮아.”
“그래요? 그날 욕실에서 보니까 코어 힘없는 거 같던데.”
“욕실?”
“그때 운동하고 같이 씻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자리를 못 바꿔 준 지예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길래 부담 갖지 말라고 농담 한 건데. 상헌은 굳이 진실을 말하는 바름의 손등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욕실’과 ‘같이 씻었다’는 묘한 상상을 일으키는 말을 굳이, 나한테 호감 있는 민아 앞에서, 해야 해?
“와 오빠 바름이랑 같이 샤워했어요? 동기 남자애들 바름이랑 샤워하려고 난리던데.”
“왜?”
“얘가 하도 비싸게 구니까요.”
상헌은 지예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박에 알 것 같았다. 바름이 다른 사람과 샤워할 수 없는 몸이라는 걸 자신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괜히 바름의 아픈 점만 찌르는 것 같아 상헌은 손을 높이 들었다. 주문도 안 하고 수다만 떨고 있던 테이블로 주인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계속 시험 기간이었어요. 이모 밥 먹다가 학식 먹으니까 진짜 맛없는 거 있죠.”
단골답게 상헌을 알아본 아주머니가 주문서와 펜을 들고 물었다. 상헌이 넉살 좋게 대꾸하며 늘 먹는 메뉴와 술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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