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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983 추천 : 0 글자수 : 6,188 자 2022-12-23
나도 커피 사러 왔어, 같은 간결한 대답이었다. 바름은 지금 제 앞에서 과팅을 하러 왔다며 당당하게 말하는 상헌의 의도를 떠올려 보았다. 아무도 없는 학교 화장실까지 따라와 엄한 말을 하며 뒷목을 붉히더니 이제는 과팅을 하러 왔다고? 심지어 굳이 나를 불러 확인사살을 해?
“그래서 축하라도 해줘?”
“아니, 난 그냥 반가워서….”
상헌이 어물쩍 뒷말을 삼켰다. 바름이 눈썹 뼈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갑자기 골치가 아팠다.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다더니 그 말이 진심이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섹X파트너를 하되, 여자친구 사귀는 건 봐주자던 상헌의 말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귀 좀 대봐.”
눈치 없는 상헌은 지금 바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바름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 좀 데리고 나가달라는 귓속말을 하고 싶은데 키 차이 때문에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싫어.”
바름이 딱 잘라 거절했다. 뭐 예쁘다고 귀를 대줘, 하는 마음이었다. 결국 상헌이 까치발을 들었다. 상헌은 고목 나무에 매달린 매미가 된 기분을 느꼈다.
“지금 나랑 조별과제 하러 가야 한다고 연기 좀 해줘. 집에 가게.”
“…….”
“이리 와봐.”
상헌이 아직 주문도 하지 못한 바름을 끌고 얘기가 한창인 테이블로 다가갔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바름이 다가오자 수 쌍의 눈이 바름에게로 향했다. 바름을 싫어하는 재민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인상을 찌푸리면 뭐 어쩔 건데, 상헌이 속으로 비웃었다.
“그…, 난 이제 가볼게. 아까 말한 조별과제 같이하는 후밴데 시간 없다고 바로 가야 한다네. 그치?”
“아니요. 전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야, 굳이 안 그래도 돼. 아까는 시간 없다며.”
상헌의 부탁에도 바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당황한 상헌이 이를 악물고 바름을 째려보았다. 마음 같아선 깨끗한 바름의 신발이라도 밟고 싶었다.
“형은 재밌게 노세요. 과제는 저희끼리 할 테니까.”
심드렁하게 훅을 날린 바름이 다시 한번 어퍼컷을 날리고 몸을 돌렸다. 아무렇지 않게 상헌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어놓고 여유롭게 커피를 주문하러 가는 바름의 뒷모습을 보면서 상헌은 주먹을 쥐었다.
아오, 저 쥐콩 만한 게!
“내가 모임 빠지고 여기 와서 화가 많이 났나 봐. 다들 재밌게 놀아!”
상헌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말했다. 내버려 둔 겉옷을 급하게 챙겨입은 상헌이 옷 매무새를 가다듬지도 않고 쫓기는 사람처럼 카페를 벗어났다. 통유리로 된 카페 내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도록 카페를 완전히 지나친 상헌이 걸음을 멈춰 잠복을 시작했다. 바름이 커피를 사서 나오면 왜 도와주지 않았냐고 따끔하게 한마디 할 생각이었다.
“근데 안에서 마시는 거면 어떡하지.”
범인을 기다리는 형사처럼 서서 카페를 째려보던 상헌이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바름이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는 게 아니라 카페 안에서 마시는 거라면? 커피를 시켜놓고 공부라도 한다면?
“세 시간은 기다려야겠네.”
상헌이 중얼거렸다. 그냥 집에 갈래. 마음을 굳힌 상헌이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커피를 한 손에 든 바름이 카페를 빠져나왔다. 상헌은 순간 연예인의 파파라치가 된 기분을 느꼈다.
“김바름! 너 왜 나 이상한 사람 만들어!”
상헌이 서 있는 곳과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바름을 향해 달려간 상헌이 바름의 등을 때렸다. 바름은 씩씩거리는 상헌의 꼴이 귀여워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꿋꿋하게 참았다. 바름의 입장에서는 상헌을 이상한 사람 만든 게 아니라, 상헌이 원래 이상한 사람이었다. 침대 위에서 좋다고 울 땐 언제고 이제는 여자친구를 사귀기 위해 과팅을 한다고? 그게 더 이상한 사람이었다.
“내가 언제.”
“내가 언제? 방금 그랬잖아.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난 말 맞춰준다고 한 적 없어.”
그래, 그건 맞지만 그래도 공경에 빠진 선배를 버려두는 게 맞아? 상헌이 바름의 입장이었다면 한술 더 떠 연기를 해줬을 건데. 하지만 딱히 따질만한 말이 없어 따끔하게 한마디를 하려던 상헌의 계획은 여기 끝이 났다.
“근데 어떻게 딱 여기를 왔어? 신기하게.”
“나 여기 원래 자주와.”
바름이 자주 가는 카페도 있구나. 상헌이 새로운 정보 하나를 머리에 입력했다. 어색한 자리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가려던 상헌은 얼떨결에 바름과 발을 맞춰 바름을 따랐다. 김바름이 사람 서운하게 하는 재주는 있어도 같이 있으면 편했다. 가족한테도 안 보여주는 알몸까지 튼 사이니 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진짜 재미없어 죽는 줄 알았어. 어색하고.”
“왜. 마음에 드는 애가 없었어?”
“응. 난 저런 자리 싫어해. 숨 막혀서.”
“그럼 왜 나갔는데.”
상헌의 입이 쉴새 없이 움직였다. 하루종일 입을 닫고 있었더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원래 조잘조잘 끊임없이 떠드는 게 상헌의 특기였다. 김바름이 살갑게 리액션을 해주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과 ‘연애’를 목표로 노림수 가득한 말을 하는 것보다 나았다.
“김지우가 자꾸 자기 대신 나가야 한다고 그러잖아. 안 그러면 우리 과 망신이라고.”
“…….”
“내가 안 나가면 경영학과 인물 없다고 소문날 거래.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잘생겨야 하니까.”
“한 명 정도는 잘생겨야…?”
방금 상헌이 한 말은 상헌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제3자인 김지우가 객관적인 시선으로 해준 말이었다. 그런데 왜 말을 끝까지 안 해? 상헌은 바름이 자신에게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고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말끝을 흐리는 바름의 손을 잡아 제 가슴 위로 올렸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나 정도면 잘생긴 거 맞잖아.”
“그걸 왜 네 가슴에 얹어. 내 가슴에 얹어야지.”
넌 이 상황에 네 가슴, 내 가슴이 중요하니? 상헌이 바름의 불만 사항에 따라 제 가슴에 얹었던 손을 옮겨 바름의 가슴 위로 올렸다. 지금 누구 가슴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양심’에 손을 얹으란 뜻이었다.
“그래, 넌 코가 예뻐.”
“그게 다야?”
코가 예쁘다는 건 상헌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상헌이 성에 안 찬다는 듯 뻔뻔하게 물었다. 바름은 사실 조금 황당스러웠다. 상헌은 자존심 챙기겠다고 한 섹X 였겠지만 몸까지 섞은 자신을 두고 당당하게 과팅까지 해 놓고 잘생겼단 칭찬까지 해달라는 저 도둑놈 심보가.
“바름아 너 정말 잘생겼어.”
“알아.”
“봐, 난 해주잖아. 너도 해줘.”
그 어떤 엎드려 절받기보다도 궁색했지만 이제 그냥 오기였다. 거지한테 적선한다 생각하고 한 마디만 해주면 이 집착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바름도 그걸 알고 안 해주는 것 같지만.
“속눈썹이 제일 마음에 들어.”
“…….”
“길고 예뻐서.”
바름이 상헌의 뺨을 쥐고 들어 올렸다. 방금 바름의 말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있었기 때문에 상헌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갑자기 훅 들어온 칭찬에 민망한 것도 있었고, 그 예쁜 속눈썹 실컷 보라는 뜻도 있었다. 눈을 내리깔면 더 잘 보이니까.
“원래 공기가 나쁘면 속눈썹이 길대. 난 공기가 안 좋은 곳에서 태어났나 봐.”
“한국 공기가 다 거기서 거기지.”
상헌은 바름에게 로맨틱함이 뭔지 모른다고 타박했지만 정말 모르는 건 공상헌이었다. 바름은 말을 말자는 심정으로 잡은 얼굴을 놓아주었다.
“나 한국에서 안 태어났는데?”
“그럼 어디서 태어났는데?”
천국. 상헌이 준비한 대답은 ‘천국’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바름이 궁금함을 잔뜩 담아 물었기 때문에 쉽게 답해주고 싶지 않았다. 상헌은 토종 한국인이었다. 외국에 나가 본 건 수학여행으로 중국에 가본 게 다였다.
“맞춰봐.”
“미국?”
“왜? 왜 내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같아?”
상헌은 바름이 미국이라고 대답한 그 이유가 궁금했다. 왜 내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같아? 피부가 하얘서? 아니면 내가 영어를 잘 해서? 나 영어 잘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상헌이 왜? 왜? 하며 바름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냥 확률적으로 미국 이중국적이 많으니까.”
“땡, 틀렸어. 그렇게 통계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그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데.”
“평소 내 모습을 생각해봐.”
상헌이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천사 같은 자신을 대놓고 보여줘도 김바름의 입에서 천국이라는 대답이 떨어질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잠깐 고민하던 바름이 상헌의 말에 힌트를 얻은 듯 입을 열었다.
“이탈리아. 로마?”
“왜?”
“거기서 소매치기 많이 당하잖아.”
예상외의 나라와 이유였다. 상헌은 소매치기를 많이 당하는 로마와 자신의 평소 모습이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굳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라를 말 할거라면 야성적인 느낌이 나는 러시아 또는 신사의 나라 영국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었다.
“그게 평소에 나랑 무슨 상관인데?”
“너 맨날 후배들한테 돈 뜯기잖아.”
“그게 무슨 뜯기는 거야! 선배로서 동생들이 예쁘니까 사주는 거지.”
바름 때문에 상헌은 순식간에 후배한테 삥이나 뜯기는 선배가 되어버렸다. 상헌은 한 번도 후배들한테 돈을 뜯긴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니, 딱 한 번밖에 없었다. 며칠 전 학교 카페에서 바름이 상헌을 대신해 제 동기들에게 커피를 샀던 날, 그날은 이상하게 후배들에게 뜯어먹히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럼 너 며칠 전에 나 대신 커피 산 것도 내가 돈 뜯기는 거 같아서 그랬어?”
“어. 너 삥뜯기는 거 보기 싫어서.”
상헌이 수업시간 내내 바름이 왜 그랬을까? 고민했던 문제가 쉽게 풀렸다. 이렇게 쉽게 알려줄 거면 진작 물어볼걸.
“왜 보기 싫었는데?”
내가 좋아서? 김지예보다 공상헌이 더 좋아서? 그렇게 말해. 상헌은 바름을 빤히 바라보며 눈으로 텔레파시를 강하게 보냈다. 그 텔레파시가 너무 강력해서 바름도 상헌이 무슨 대답을 기다리는지 뻔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쉬이 상헌이 원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여자친구를 사귀겠다며 과팅까지 하고 당당하게 “난 과팅하러 왔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너를 좋아해서, 네가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바름도 상헌 못지않게 자존심이 쎈 사람이었다.
“그냥. 돈 없어 보여서 도와준 건데.”
“돈 없는 건 맞는데 은근 기분 나쁘네. 나 그 정도로 없진 않거든?”
요즘 커피값이 비싸서 후배 서너 명에게만 커피를 사줘도 통장이 휘청하는 건 사실이었다. 선배라고 해봤자 직장 없는 학생인 건 마찬가지였으니. 딱히 몇 살 많다고 후배들에 비해 묵직한 주머니를 차고 있는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근데 너 어디까지 따라올 거야.”
참 빨리도 물어본다. 정신없이 바름을 따라 걷다 보니 익숙한 풍경이 상헌의 눈에 들어왔다. 바름의 집 근처 풍경이었다. 상헌은 자신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기사도 DNA를 원망했다. 이게 다 상헌이 누군가를 에스코트하는 데 도가 튼 탓이었다.
“따라가는 게 아니라 너 데려다주는 거야.”
“무슨. 그냥 생각 없이 따라온 거잖아.”
“사실 맞아. 알았으면 미리 좀 말하지, 우리 집 반대편인데!”
상헌이 괜히 바름을 탓했다. 곤경에 처한 선배를 돕지 않는 후배를 따끔하게 혼내주려다 여기까지 따라온 게 창피해서 변명을 했더니 그것마저 안 받아주는 나쁜 놈이었다, 김바름은.
“그냥 우리 집 가고 싶은 건가 해서.”
“내가 너희 집엘 왜 가. 가서 할 것도 없는데.”
“할 게 왜 없어. 많은데.”
그 많은 할 것 중엔 ‘그것’도 있겠지. 상헌도 알 거 다 아는 성인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뱉어낸 바름의 수작질을 단박에 캐치 할 수 있을 만큼. 은근슬쩍 자취방에 애인을 불러들이는 상상 따위 상헌도 이미 수십 번은 더 해본 것이었다. 슬프게도 실제로 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냥 여기까지만 데려다줄게. 잘 가고 이름처럼 바른 생각 좀 해.”
상헌이 바름을 향해 혀를 내밀어 메롱했다. 네 속셈 따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티 내기 위해서였다. 정작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바름은 쟤가 왜 저러나, 어리둥절 했지만.
“그래서 축하라도 해줘?”
“아니, 난 그냥 반가워서….”
상헌이 어물쩍 뒷말을 삼켰다. 바름이 눈썹 뼈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갑자기 골치가 아팠다.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다더니 그 말이 진심이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섹X파트너를 하되, 여자친구 사귀는 건 봐주자던 상헌의 말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귀 좀 대봐.”
눈치 없는 상헌은 지금 바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바름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 좀 데리고 나가달라는 귓속말을 하고 싶은데 키 차이 때문에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싫어.”
바름이 딱 잘라 거절했다. 뭐 예쁘다고 귀를 대줘, 하는 마음이었다. 결국 상헌이 까치발을 들었다. 상헌은 고목 나무에 매달린 매미가 된 기분을 느꼈다.
“지금 나랑 조별과제 하러 가야 한다고 연기 좀 해줘. 집에 가게.”
“…….”
“이리 와봐.”
상헌이 아직 주문도 하지 못한 바름을 끌고 얘기가 한창인 테이블로 다가갔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바름이 다가오자 수 쌍의 눈이 바름에게로 향했다. 바름을 싫어하는 재민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인상을 찌푸리면 뭐 어쩔 건데, 상헌이 속으로 비웃었다.
“그…, 난 이제 가볼게. 아까 말한 조별과제 같이하는 후밴데 시간 없다고 바로 가야 한다네. 그치?”
“아니요. 전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야, 굳이 안 그래도 돼. 아까는 시간 없다며.”
상헌의 부탁에도 바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당황한 상헌이 이를 악물고 바름을 째려보았다. 마음 같아선 깨끗한 바름의 신발이라도 밟고 싶었다.
“형은 재밌게 노세요. 과제는 저희끼리 할 테니까.”
심드렁하게 훅을 날린 바름이 다시 한번 어퍼컷을 날리고 몸을 돌렸다. 아무렇지 않게 상헌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어놓고 여유롭게 커피를 주문하러 가는 바름의 뒷모습을 보면서 상헌은 주먹을 쥐었다.
아오, 저 쥐콩 만한 게!
“내가 모임 빠지고 여기 와서 화가 많이 났나 봐. 다들 재밌게 놀아!”
상헌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말했다. 내버려 둔 겉옷을 급하게 챙겨입은 상헌이 옷 매무새를 가다듬지도 않고 쫓기는 사람처럼 카페를 벗어났다. 통유리로 된 카페 내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도록 카페를 완전히 지나친 상헌이 걸음을 멈춰 잠복을 시작했다. 바름이 커피를 사서 나오면 왜 도와주지 않았냐고 따끔하게 한마디 할 생각이었다.
“근데 안에서 마시는 거면 어떡하지.”
범인을 기다리는 형사처럼 서서 카페를 째려보던 상헌이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바름이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는 게 아니라 카페 안에서 마시는 거라면? 커피를 시켜놓고 공부라도 한다면?
“세 시간은 기다려야겠네.”
상헌이 중얼거렸다. 그냥 집에 갈래. 마음을 굳힌 상헌이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커피를 한 손에 든 바름이 카페를 빠져나왔다. 상헌은 순간 연예인의 파파라치가 된 기분을 느꼈다.
“김바름! 너 왜 나 이상한 사람 만들어!”
상헌이 서 있는 곳과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바름을 향해 달려간 상헌이 바름의 등을 때렸다. 바름은 씩씩거리는 상헌의 꼴이 귀여워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꿋꿋하게 참았다. 바름의 입장에서는 상헌을 이상한 사람 만든 게 아니라, 상헌이 원래 이상한 사람이었다. 침대 위에서 좋다고 울 땐 언제고 이제는 여자친구를 사귀기 위해 과팅을 한다고? 그게 더 이상한 사람이었다.
“내가 언제.”
“내가 언제? 방금 그랬잖아.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난 말 맞춰준다고 한 적 없어.”
그래, 그건 맞지만 그래도 공경에 빠진 선배를 버려두는 게 맞아? 상헌이 바름의 입장이었다면 한술 더 떠 연기를 해줬을 건데. 하지만 딱히 따질만한 말이 없어 따끔하게 한마디를 하려던 상헌의 계획은 여기 끝이 났다.
“근데 어떻게 딱 여기를 왔어? 신기하게.”
“나 여기 원래 자주와.”
바름이 자주 가는 카페도 있구나. 상헌이 새로운 정보 하나를 머리에 입력했다. 어색한 자리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가려던 상헌은 얼떨결에 바름과 발을 맞춰 바름을 따랐다. 김바름이 사람 서운하게 하는 재주는 있어도 같이 있으면 편했다. 가족한테도 안 보여주는 알몸까지 튼 사이니 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진짜 재미없어 죽는 줄 알았어. 어색하고.”
“왜. 마음에 드는 애가 없었어?”
“응. 난 저런 자리 싫어해. 숨 막혀서.”
“그럼 왜 나갔는데.”
상헌의 입이 쉴새 없이 움직였다. 하루종일 입을 닫고 있었더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원래 조잘조잘 끊임없이 떠드는 게 상헌의 특기였다. 김바름이 살갑게 리액션을 해주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과 ‘연애’를 목표로 노림수 가득한 말을 하는 것보다 나았다.
“김지우가 자꾸 자기 대신 나가야 한다고 그러잖아. 안 그러면 우리 과 망신이라고.”
“…….”
“내가 안 나가면 경영학과 인물 없다고 소문날 거래.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잘생겨야 하니까.”
“한 명 정도는 잘생겨야…?”
방금 상헌이 한 말은 상헌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제3자인 김지우가 객관적인 시선으로 해준 말이었다. 그런데 왜 말을 끝까지 안 해? 상헌은 바름이 자신에게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고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말끝을 흐리는 바름의 손을 잡아 제 가슴 위로 올렸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나 정도면 잘생긴 거 맞잖아.”
“그걸 왜 네 가슴에 얹어. 내 가슴에 얹어야지.”
넌 이 상황에 네 가슴, 내 가슴이 중요하니? 상헌이 바름의 불만 사항에 따라 제 가슴에 얹었던 손을 옮겨 바름의 가슴 위로 올렸다. 지금 누구 가슴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양심’에 손을 얹으란 뜻이었다.
“그래, 넌 코가 예뻐.”
“그게 다야?”
코가 예쁘다는 건 상헌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상헌이 성에 안 찬다는 듯 뻔뻔하게 물었다. 바름은 사실 조금 황당스러웠다. 상헌은 자존심 챙기겠다고 한 섹X 였겠지만 몸까지 섞은 자신을 두고 당당하게 과팅까지 해 놓고 잘생겼단 칭찬까지 해달라는 저 도둑놈 심보가.
“바름아 너 정말 잘생겼어.”
“알아.”
“봐, 난 해주잖아. 너도 해줘.”
그 어떤 엎드려 절받기보다도 궁색했지만 이제 그냥 오기였다. 거지한테 적선한다 생각하고 한 마디만 해주면 이 집착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바름도 그걸 알고 안 해주는 것 같지만.
“속눈썹이 제일 마음에 들어.”
“…….”
“길고 예뻐서.”
바름이 상헌의 뺨을 쥐고 들어 올렸다. 방금 바름의 말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있었기 때문에 상헌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갑자기 훅 들어온 칭찬에 민망한 것도 있었고, 그 예쁜 속눈썹 실컷 보라는 뜻도 있었다. 눈을 내리깔면 더 잘 보이니까.
“원래 공기가 나쁘면 속눈썹이 길대. 난 공기가 안 좋은 곳에서 태어났나 봐.”
“한국 공기가 다 거기서 거기지.”
상헌은 바름에게 로맨틱함이 뭔지 모른다고 타박했지만 정말 모르는 건 공상헌이었다. 바름은 말을 말자는 심정으로 잡은 얼굴을 놓아주었다.
“나 한국에서 안 태어났는데?”
“그럼 어디서 태어났는데?”
천국. 상헌이 준비한 대답은 ‘천국’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바름이 궁금함을 잔뜩 담아 물었기 때문에 쉽게 답해주고 싶지 않았다. 상헌은 토종 한국인이었다. 외국에 나가 본 건 수학여행으로 중국에 가본 게 다였다.
“맞춰봐.”
“미국?”
“왜? 왜 내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같아?”
상헌은 바름이 미국이라고 대답한 그 이유가 궁금했다. 왜 내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같아? 피부가 하얘서? 아니면 내가 영어를 잘 해서? 나 영어 잘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상헌이 왜? 왜? 하며 바름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냥 확률적으로 미국 이중국적이 많으니까.”
“땡, 틀렸어. 그렇게 통계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그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데.”
“평소 내 모습을 생각해봐.”
상헌이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천사 같은 자신을 대놓고 보여줘도 김바름의 입에서 천국이라는 대답이 떨어질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잠깐 고민하던 바름이 상헌의 말에 힌트를 얻은 듯 입을 열었다.
“이탈리아. 로마?”
“왜?”
“거기서 소매치기 많이 당하잖아.”
예상외의 나라와 이유였다. 상헌은 소매치기를 많이 당하는 로마와 자신의 평소 모습이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굳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라를 말 할거라면 야성적인 느낌이 나는 러시아 또는 신사의 나라 영국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었다.
“그게 평소에 나랑 무슨 상관인데?”
“너 맨날 후배들한테 돈 뜯기잖아.”
“그게 무슨 뜯기는 거야! 선배로서 동생들이 예쁘니까 사주는 거지.”
바름 때문에 상헌은 순식간에 후배한테 삥이나 뜯기는 선배가 되어버렸다. 상헌은 한 번도 후배들한테 돈을 뜯긴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니, 딱 한 번밖에 없었다. 며칠 전 학교 카페에서 바름이 상헌을 대신해 제 동기들에게 커피를 샀던 날, 그날은 이상하게 후배들에게 뜯어먹히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럼 너 며칠 전에 나 대신 커피 산 것도 내가 돈 뜯기는 거 같아서 그랬어?”
“어. 너 삥뜯기는 거 보기 싫어서.”
상헌이 수업시간 내내 바름이 왜 그랬을까? 고민했던 문제가 쉽게 풀렸다. 이렇게 쉽게 알려줄 거면 진작 물어볼걸.
“왜 보기 싫었는데?”
내가 좋아서? 김지예보다 공상헌이 더 좋아서? 그렇게 말해. 상헌은 바름을 빤히 바라보며 눈으로 텔레파시를 강하게 보냈다. 그 텔레파시가 너무 강력해서 바름도 상헌이 무슨 대답을 기다리는지 뻔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쉬이 상헌이 원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여자친구를 사귀겠다며 과팅까지 하고 당당하게 “난 과팅하러 왔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너를 좋아해서, 네가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바름도 상헌 못지않게 자존심이 쎈 사람이었다.
“그냥. 돈 없어 보여서 도와준 건데.”
“돈 없는 건 맞는데 은근 기분 나쁘네. 나 그 정도로 없진 않거든?”
요즘 커피값이 비싸서 후배 서너 명에게만 커피를 사줘도 통장이 휘청하는 건 사실이었다. 선배라고 해봤자 직장 없는 학생인 건 마찬가지였으니. 딱히 몇 살 많다고 후배들에 비해 묵직한 주머니를 차고 있는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근데 너 어디까지 따라올 거야.”
참 빨리도 물어본다. 정신없이 바름을 따라 걷다 보니 익숙한 풍경이 상헌의 눈에 들어왔다. 바름의 집 근처 풍경이었다. 상헌은 자신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기사도 DNA를 원망했다. 이게 다 상헌이 누군가를 에스코트하는 데 도가 튼 탓이었다.
“따라가는 게 아니라 너 데려다주는 거야.”
“무슨. 그냥 생각 없이 따라온 거잖아.”
“사실 맞아. 알았으면 미리 좀 말하지, 우리 집 반대편인데!”
상헌이 괜히 바름을 탓했다. 곤경에 처한 선배를 돕지 않는 후배를 따끔하게 혼내주려다 여기까지 따라온 게 창피해서 변명을 했더니 그것마저 안 받아주는 나쁜 놈이었다, 김바름은.
“그냥 우리 집 가고 싶은 건가 해서.”
“내가 너희 집엘 왜 가. 가서 할 것도 없는데.”
“할 게 왜 없어. 많은데.”
그 많은 할 것 중엔 ‘그것’도 있겠지. 상헌도 알 거 다 아는 성인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뱉어낸 바름의 수작질을 단박에 캐치 할 수 있을 만큼. 은근슬쩍 자취방에 애인을 불러들이는 상상 따위 상헌도 이미 수십 번은 더 해본 것이었다. 슬프게도 실제로 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냥 여기까지만 데려다줄게. 잘 가고 이름처럼 바른 생각 좀 해.”
상헌이 바름을 향해 혀를 내밀어 메롱했다. 네 속셈 따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티 내기 위해서였다. 정작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바름은 쟤가 왜 저러나, 어리둥절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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