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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1,018 추천 : 0 글자수 : 6,389 자 2022-12-26
민아와 지예가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 바름은 상헌에게 그만 집에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그 신호는 기분 좋게 달아오른 상헌에게는 닿지 않았다. 바름은 병뚜껑 꼬리를 빙글빙글 돌리는 상헌의 손에서 찌그러진 병뚜껑을 빼앗았다.
“왜 가져가? 줘!”
과자 뺏긴 꼬마처럼 상헌의 손이 바름의 손을 따라왔다. 재밌게 잘 놀고 있는데, 왜 난리야!
“집에 가.”
술자리 내내 병아리처럼 떠드는 세 사람과 달리 말없이 술만 마시던 바름이 드디어 입을 열어서 하는 말이 저거여서 상헌은 어이가 없었다. 집에 가자, 도 아니고 집에 가? 나 혼자 집에 가라는 말인가?
“나보고 가라고?”
“가자고.”
바름이 제 핸드폰 화면을 상헌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바름의 길쭉한 손가락이 화면 가득 떠 있는 시간을 짚었다. 새나라의 어린이에게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새파란 대학생에게는 한창인 시간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상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나 가.”
“과팅 나간 김에 진짜 여자친구라도 사귀려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민아가 일부러 나 보겠다고 우리 학교까지 왔는데 예의가 있지.”
민아가 상헌을 보기 위해 왔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상헌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내가 너무 반짝이는 별이라서, 나를 갖고 싶다는데 어떡해. 오랜만에 자신감이 주유된 상헌은 객기를 부렸다. 애초에 상헌도 지예의 부름에 바름이 쪼르르 나오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다.
“내놔.”
상헌이 낮은 숨을 쉬는 바름의 손에서 병뚜껑을 빼앗아 꼬리를 돌돌 말았다. 이걸 손가락으로 튕겨 날리는 게 또 재미였다.
“손 베여서 피 나고 싶어?”
“그냥 위험하다고 하면 되지 꼭 그렇게 재수 없게 말해야 해?”
“위험하니까 줘.”
바름이 상헌의 눈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김바름이 싸가지가없긴 해도 지적하면 곧잘 고치긴 했다. 바로 지금처럼. 상헌은 내밀어진 바름의 손 위에 제 손을 얹는 애교를 부려볼까 하다가 생각을 접고 병뚜껑을 상납했다. 강아지처럼 손을 내밀었다간 지금도 강아지 취급을 하는 바름이 저를 더 개 취급할 것 같아서 그랬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응?”
“오빠 광대 터질 것 같아요.”
화장실에서 돌아온 지예가 상헌의 볼을 찌르며 웃었다. 물기가 살짝 남아있는 지예의 손가락 때문에 상헌의 뺨에 물방울이 맺혔다. 지예의 말에 상헌이 급하게 표정관리를 했다. 딱히 웃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자신의 지적에 맞게 위험하다고 말을 바꾼 바름 때문에 좋아진 기분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상헌이 형 집에 간대.”
바름이 상헌의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며 말했다. 분명 상헌의 거취에 대한 말인데 상헌의 의견 따위 들어가지 않은 말이었다. 바름의 뜬금없는 발언에 민아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오빠 벌써 갈 거예요?”
민아가 알사탕 같은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상헌은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원래도 갈 생각이 없었는데 더더욱 떠날 수가 없어졌다. 김바름이 상헌을 살살 달래서 같이 가자고 말해주지 않는 이상 더 놀고 싶었다.
“아니. 지금 말고 나중에 갈 거야. 바름이 넌?”
“전 지금 갈 건데요.”
“… 왜?”
나를 버리고? 나를 여기 두고 혼자 가겠다고? 왜? ‘왜’냐고 묻는 상헌의 목소리에 음 이탈이 났다. 바름의 폭탄 발언에 상헌은 급격하게 집에 가고 싶어졌다. 술기운에 감정이 고조되어 기분이 제멋대로였다.
“오늘 집 청소하는 날이라서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변명이었다. 그거 내가 자주 하는 변명인데. 상헌은 무슨 그런 핑계를 대냐며 비웃는 지예 때문에 괜히 마음이 뜨끔했다.
“핑계 아니고 진짠데. 나 먼저 갈게. 형 저 먼저 갈게요.”
바름의 마지막 통보였다. 상헌은 바름의 말이 끝난 약 3초 동안 수많은 생각을 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다며 바름과 함께 나가야 할지, 아니면 민아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 꿋꿋이 남아있어야 할지. 결단을 못 내리는 상헌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선택지였다.
“그럼 형이 데려다줄까?”
“됐어요. 재밌게 노세요, 셋이.”
그래서 내린 결론은 그 중간이었다. 지금 당장은 바름과 함께 이 자리를 떠나겠지만 나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중간. 하지만 바름은 콧방귀를 뀌며 거절했다. 바름은 끝끝내 과팅에서 만난 사람 때문에 술자리에 남겠다는 상헌 때문에 속이 끓었다. 마음 같아서는 상헌을 반으로 접어들고 나가고 싶었다.
“진짜 가?”
겉옷을 챙겨입는 바름을 향해 상헌이 새삼스럽게 물었다. 그럼 가짜로 가? 제 옷 끝을 잡는 상헌에게 바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바름은 옷을 잡아당겨 상헌의 손에 잡힌 옷 끝부분을 빼냈다. 그 매정한 행동에 상헌은 속으로 큰 데미지를 받았다. 미주알고주알 긴긴 메시지를 보냈더니 답장으로 이응 두 개가 온 것 같은 서운함이었다.
“지예야, 민아랑 얘기하고 있어. 나 바름이 큰길까지만 데려다줄게.”
“저 어차피 편의점 가야 해서 제가 바름이 데려다줄게요. 오빠가 민아랑 있어요.”
어? 이건 내 시나리오에 없던 일인데. 상헌이 습관적으로 마른 코를 훌쩍였다. 상헌이 티나게 당황하자 바름이 됐다며 손사래를 쳤다. 바름의 입장에서도 상헌을 민아와 단둘이 남겨두고 지예의 배웅을 받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이 와중에도 술자리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헌이 얄미울 뿐이었다.
“왜? 데려다줄게. 나 어차피 편의점 가야 해.”
“넌 편의점 가. 난 집 갈 테니까.”
상헌은 몰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며칠 전 지예와 발을 맞춰 걷던 바름의 뒷모습이 분명 꿀이 뚝뚝 흐를 만큼 다정해 보였는데 오늘은 냉기만 뚝뚝 흘렀다. 마지막으로 상헌을 바라본 바름이 미련도 없이 카운터로 향했다. 편의점에 가겠다던 지예는 바름의 매몰찬 반응에 기분이 상한 듯 서 있기만 했다.
“말하는 싸가지 봐. 쟤 왜 저래?”
“바름이 원래 저러잖아요.”
상헌이 지예 대신 바름을 험담했다. 지예는 익숙한 듯 대답했지만 두 눈은 여전히 바름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상헌은 지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야 바름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착각해서 맞장구를 쳐주려다 이렇게 된 거지만 지예는 굳이 왜?
“편의점에서 뭐 필요한데?”
“그냥 숙취해소제 좀 살까 해서요. 근데 그냥 안 갈래요.”
“그럼 내가 사다 줄게.”
상헌은 이때다 싶어 급하게 겉옷을 챙겨입었다. 지예의 입에서 그러라는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상헌은 바름을 뒤따라갈 채비를 마쳤다. 계산이라도 한 모양인지 바름이 카운터에 꽤 오래 있었기 때문에 지금 뒤따라 나가도 바름의 꼬리를 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괜찮은…,”
“잠시만 놀고 있어!”
지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헌은 꿰입은 겉옷 주머니에 지갑이 있는지 확인하고 곧장 바름의 뒤를 밟았다. 사람의 온기로 가득 찼던 술집을 벗어나기 무섭게 차가운 바람이 상헌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벌써 어디까지 간 거야!”
문을 나서면 바름의 뒷모습이 작게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상헌은 바름이 다리가 길어서 걸음도 빠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도깨비도 아니고 이렇게 빨리 사라진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정도면 태릉이 놓친 인재 아니야?
“뛰어간 거야, 뭐야?”
“안 간다며.”
혹시나 다른 방향으로 간 건가 싶어 좌우로 고개를 돌리던 상헌이 뒷목을 잡는 손에 놀라 뻣뻣하게 굳었다. 익숙한 샴푸 향기나 나른한 듯 퉁명스러운 목소리 덕분에 누구의 손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지만 새가슴 상헌에겐 놀랄만한 손길이었다.
“놀랬잖아! 왜 뒤에서 나와?”
“앞에서 통화 좀 한다고. 난 너 나가는 거 봤는데.”
급하게 튀어나온 덕에 문 앞에 서 있던 바름을 못 봤구나! 깨달음을 얻은 상헌이 여전히 잡힌 뒷목이 답답해 바름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실눈을 뜨며 바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통화’를 했다고? 담배 핀 거 아니고? 술집에서 나와 곧바로 가지 않고 멈춰서 있는 이유는 대부분 담배였다. 통화가 아니라.
“통화? 너 요 앞에서 담배 핀 거 아니야?”
“갑자기 무슨 담배야.”
“그런 거 피지 마. 몸에 안 좋아. 젊을 때 건강관리 해야지.”
상헌의 걱정은 진심이었다. 상헌은 바름이 건강하길 바라는 어른으로서 충고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름이 담배를 피는 장면을 목격한 건 아니었지만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일단 바름의 관상부터가 비흡연자 관상은 아니었다.
“뜬금없이 갑자기 무슨 담배 타령이야. 그리고 네가 내 애인이야? 무슨 상관인데.”
“꼭 애인만 충고할 수 있어? 저번엔 에이쁠 아니라고 안 듣더니. 그런 편협한 시선을 좀 버려.”
상헌이 볼멘소리를 냈다. 애인이 아니면 담배 피지 말라고 조언도 못 해? 그럼 공익광고협의회 사람들은 전 국민의 애인이냐?
“취했네. 그러니까 집에 가자고 했잖아.”
“너 손 줘봐.”
줘봐, 라는 말과 동시에 상헌은 직접 바름의 손을 잡아당겨 냄새를 맡았다. 보통 담배를 피고나면 손가락에 니코틴 냄새가 나기 마련이었다. 바름의 커다란 손을 코에 대고 숨을 들이쉬자 좋은 냄새가 났다. 상헌이 마약 탐지견처럼 냄새로 결론을 내렸다. 김바름은 무죄였다.
“손잡으려고 별 핑계를 다 대네.”
바름이 상헌의 손가락을 잡았다. 바름은 상헌이 제 손을 잡으려고 억지 핑계를 만든다고 결론을 내렸다. 눈치 없이 늦게까지 술자리에 남겠다, 고집을 부리더니 그새 마음을 바꿔 달려 나온 게 기특했다. 키우는 반려견이 다른 가족이 아닌 자신을 선택한 뿌듯함을 느끼며 바름이 잡은 상헌의 손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진심으로 그런 거 아니거든.”
“오래 있겠다더니 왜 나왔어? 그게 예의라며.”
그게 싫지 않았지만 바름은 네가 나와줘서 고맙다는 말 대신 상헌을 떠봤다. 여자친구를 만들겠다고 과팅까지 나가고 운 좋게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는 상대방까지 생겼는데 굳이 그 기회를 버리고 나온 이유가 뭐야. 바름은 아닌 척 상헌의 입술을 힐끗거렸다.
“너 큰길까지 데려다주려고. 편의점도 가고.”
“편의점?”
“응. 내가 너 데려다주고 싶어서 지예한테 대신 사다 준다고 했어.”
“그래서 다시 가서 놀겠다고?”
응. 상헌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상헌은 바름의 주머니 속에 담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큰맘 먹고 부끄러운 얘기를 한 터라 조금 민망했다. 지예 대신 ‘내가 데려다주고 싶어서’ 나왔다는 말을 한다는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다. 비록 바름에게는 “나 어차피 다시 갈 건데?”라는 말로 해석되긴 했지만.
“그럼 편의점이나 가.”
“왜! 큰길까지 같이 가자.”
“나 딴 데 갈 곳 있어.”
“어디?”
“있어. 알아서 뭐하게?”
상헌은 갑자기 딱딱해진 바름의 말에 주머니에 들어있던 손을 빼냈다. 한 일주일간은 김바름과 말도 섞고 싶지 않을 만큼 서운했다. 큰맘 먹고 감정을 조금 티 냈더니 이렇게 바로 벽을 친다고? 바름과 잠자리를 가진 뒤 ‘나 너 좀 좋아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고백하면 멱살 잡힐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
“그래, 가라 가. 혼자 가다가 못된 사람들 만나서 돈이나 뺏겨라.”
일종의 저주였다. 현재 김바름은 상헌의 마음속에서 저주를 당해도 싼 놈이었다. 상헌은 나쁜 말을 하고도 섭섭함이 풀리지 않아 곧장 몸을 돌렸다. 대학가 주변은 편의점 천국이었다. 아무 방향으로 걸어도 결국 편의점 하나는 나오기 마련이었다.
“기껏 신경 써줬더니.”
이런 배은망덕한 후배 같으니라고. 상헌은 고개를 돌리면 바름이 자신을 보고 있을 것 같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미련 없이 널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
좁은 보폭으로 부지런히 걷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바름은 이미 보이지 않았지만. 상헌은 게임에서 진 것 같은 분함을 느끼며 가까운 편의점으로 향했다. 상헌은 친절한 아르바이트생의 인사를 들으면서도 화가 난 선배를 붙잡지 않는 후배의 건방짐에 분노했다.
“여보세요? 지예야 나 편의점인데.”
편의점 입구부터 진열된 여러 종류의 숙취해소제를 보며 상헌이 지예에게 전화를 걸었다. 특별히 선호하는 브랜드가 있는지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상헌은 자신의 세심함에 감탄하며 자신은 김바름에게 너무 아까운 남자라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왜 가져가? 줘!”
과자 뺏긴 꼬마처럼 상헌의 손이 바름의 손을 따라왔다. 재밌게 잘 놀고 있는데, 왜 난리야!
“집에 가.”
술자리 내내 병아리처럼 떠드는 세 사람과 달리 말없이 술만 마시던 바름이 드디어 입을 열어서 하는 말이 저거여서 상헌은 어이가 없었다. 집에 가자, 도 아니고 집에 가? 나 혼자 집에 가라는 말인가?
“나보고 가라고?”
“가자고.”
바름이 제 핸드폰 화면을 상헌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바름의 길쭉한 손가락이 화면 가득 떠 있는 시간을 짚었다. 새나라의 어린이에게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새파란 대학생에게는 한창인 시간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상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나 가.”
“과팅 나간 김에 진짜 여자친구라도 사귀려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민아가 일부러 나 보겠다고 우리 학교까지 왔는데 예의가 있지.”
민아가 상헌을 보기 위해 왔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상헌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내가 너무 반짝이는 별이라서, 나를 갖고 싶다는데 어떡해. 오랜만에 자신감이 주유된 상헌은 객기를 부렸다. 애초에 상헌도 지예의 부름에 바름이 쪼르르 나오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다.
“내놔.”
상헌이 낮은 숨을 쉬는 바름의 손에서 병뚜껑을 빼앗아 꼬리를 돌돌 말았다. 이걸 손가락으로 튕겨 날리는 게 또 재미였다.
“손 베여서 피 나고 싶어?”
“그냥 위험하다고 하면 되지 꼭 그렇게 재수 없게 말해야 해?”
“위험하니까 줘.”
바름이 상헌의 눈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김바름이 싸가지가없긴 해도 지적하면 곧잘 고치긴 했다. 바로 지금처럼. 상헌은 내밀어진 바름의 손 위에 제 손을 얹는 애교를 부려볼까 하다가 생각을 접고 병뚜껑을 상납했다. 강아지처럼 손을 내밀었다간 지금도 강아지 취급을 하는 바름이 저를 더 개 취급할 것 같아서 그랬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응?”
“오빠 광대 터질 것 같아요.”
화장실에서 돌아온 지예가 상헌의 볼을 찌르며 웃었다. 물기가 살짝 남아있는 지예의 손가락 때문에 상헌의 뺨에 물방울이 맺혔다. 지예의 말에 상헌이 급하게 표정관리를 했다. 딱히 웃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자신의 지적에 맞게 위험하다고 말을 바꾼 바름 때문에 좋아진 기분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상헌이 형 집에 간대.”
바름이 상헌의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며 말했다. 분명 상헌의 거취에 대한 말인데 상헌의 의견 따위 들어가지 않은 말이었다. 바름의 뜬금없는 발언에 민아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오빠 벌써 갈 거예요?”
민아가 알사탕 같은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상헌은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원래도 갈 생각이 없었는데 더더욱 떠날 수가 없어졌다. 김바름이 상헌을 살살 달래서 같이 가자고 말해주지 않는 이상 더 놀고 싶었다.
“아니. 지금 말고 나중에 갈 거야. 바름이 넌?”
“전 지금 갈 건데요.”
“… 왜?”
나를 버리고? 나를 여기 두고 혼자 가겠다고? 왜? ‘왜’냐고 묻는 상헌의 목소리에 음 이탈이 났다. 바름의 폭탄 발언에 상헌은 급격하게 집에 가고 싶어졌다. 술기운에 감정이 고조되어 기분이 제멋대로였다.
“오늘 집 청소하는 날이라서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변명이었다. 그거 내가 자주 하는 변명인데. 상헌은 무슨 그런 핑계를 대냐며 비웃는 지예 때문에 괜히 마음이 뜨끔했다.
“핑계 아니고 진짠데. 나 먼저 갈게. 형 저 먼저 갈게요.”
바름의 마지막 통보였다. 상헌은 바름의 말이 끝난 약 3초 동안 수많은 생각을 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다며 바름과 함께 나가야 할지, 아니면 민아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 꿋꿋이 남아있어야 할지. 결단을 못 내리는 상헌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선택지였다.
“그럼 형이 데려다줄까?”
“됐어요. 재밌게 노세요, 셋이.”
그래서 내린 결론은 그 중간이었다. 지금 당장은 바름과 함께 이 자리를 떠나겠지만 나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중간. 하지만 바름은 콧방귀를 뀌며 거절했다. 바름은 끝끝내 과팅에서 만난 사람 때문에 술자리에 남겠다는 상헌 때문에 속이 끓었다. 마음 같아서는 상헌을 반으로 접어들고 나가고 싶었다.
“진짜 가?”
겉옷을 챙겨입는 바름을 향해 상헌이 새삼스럽게 물었다. 그럼 가짜로 가? 제 옷 끝을 잡는 상헌에게 바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바름은 옷을 잡아당겨 상헌의 손에 잡힌 옷 끝부분을 빼냈다. 그 매정한 행동에 상헌은 속으로 큰 데미지를 받았다. 미주알고주알 긴긴 메시지를 보냈더니 답장으로 이응 두 개가 온 것 같은 서운함이었다.
“지예야, 민아랑 얘기하고 있어. 나 바름이 큰길까지만 데려다줄게.”
“저 어차피 편의점 가야 해서 제가 바름이 데려다줄게요. 오빠가 민아랑 있어요.”
어? 이건 내 시나리오에 없던 일인데. 상헌이 습관적으로 마른 코를 훌쩍였다. 상헌이 티나게 당황하자 바름이 됐다며 손사래를 쳤다. 바름의 입장에서도 상헌을 민아와 단둘이 남겨두고 지예의 배웅을 받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이 와중에도 술자리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헌이 얄미울 뿐이었다.
“왜? 데려다줄게. 나 어차피 편의점 가야 해.”
“넌 편의점 가. 난 집 갈 테니까.”
상헌은 몰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며칠 전 지예와 발을 맞춰 걷던 바름의 뒷모습이 분명 꿀이 뚝뚝 흐를 만큼 다정해 보였는데 오늘은 냉기만 뚝뚝 흘렀다. 마지막으로 상헌을 바라본 바름이 미련도 없이 카운터로 향했다. 편의점에 가겠다던 지예는 바름의 매몰찬 반응에 기분이 상한 듯 서 있기만 했다.
“말하는 싸가지 봐. 쟤 왜 저래?”
“바름이 원래 저러잖아요.”
상헌이 지예 대신 바름을 험담했다. 지예는 익숙한 듯 대답했지만 두 눈은 여전히 바름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상헌은 지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야 바름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착각해서 맞장구를 쳐주려다 이렇게 된 거지만 지예는 굳이 왜?
“편의점에서 뭐 필요한데?”
“그냥 숙취해소제 좀 살까 해서요. 근데 그냥 안 갈래요.”
“그럼 내가 사다 줄게.”
상헌은 이때다 싶어 급하게 겉옷을 챙겨입었다. 지예의 입에서 그러라는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상헌은 바름을 뒤따라갈 채비를 마쳤다. 계산이라도 한 모양인지 바름이 카운터에 꽤 오래 있었기 때문에 지금 뒤따라 나가도 바름의 꼬리를 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괜찮은…,”
“잠시만 놀고 있어!”
지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헌은 꿰입은 겉옷 주머니에 지갑이 있는지 확인하고 곧장 바름의 뒤를 밟았다. 사람의 온기로 가득 찼던 술집을 벗어나기 무섭게 차가운 바람이 상헌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벌써 어디까지 간 거야!”
문을 나서면 바름의 뒷모습이 작게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상헌은 바름이 다리가 길어서 걸음도 빠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도깨비도 아니고 이렇게 빨리 사라진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정도면 태릉이 놓친 인재 아니야?
“뛰어간 거야, 뭐야?”
“안 간다며.”
혹시나 다른 방향으로 간 건가 싶어 좌우로 고개를 돌리던 상헌이 뒷목을 잡는 손에 놀라 뻣뻣하게 굳었다. 익숙한 샴푸 향기나 나른한 듯 퉁명스러운 목소리 덕분에 누구의 손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지만 새가슴 상헌에겐 놀랄만한 손길이었다.
“놀랬잖아! 왜 뒤에서 나와?”
“앞에서 통화 좀 한다고. 난 너 나가는 거 봤는데.”
급하게 튀어나온 덕에 문 앞에 서 있던 바름을 못 봤구나! 깨달음을 얻은 상헌이 여전히 잡힌 뒷목이 답답해 바름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실눈을 뜨며 바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통화’를 했다고? 담배 핀 거 아니고? 술집에서 나와 곧바로 가지 않고 멈춰서 있는 이유는 대부분 담배였다. 통화가 아니라.
“통화? 너 요 앞에서 담배 핀 거 아니야?”
“갑자기 무슨 담배야.”
“그런 거 피지 마. 몸에 안 좋아. 젊을 때 건강관리 해야지.”
상헌의 걱정은 진심이었다. 상헌은 바름이 건강하길 바라는 어른으로서 충고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름이 담배를 피는 장면을 목격한 건 아니었지만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일단 바름의 관상부터가 비흡연자 관상은 아니었다.
“뜬금없이 갑자기 무슨 담배 타령이야. 그리고 네가 내 애인이야? 무슨 상관인데.”
“꼭 애인만 충고할 수 있어? 저번엔 에이쁠 아니라고 안 듣더니. 그런 편협한 시선을 좀 버려.”
상헌이 볼멘소리를 냈다. 애인이 아니면 담배 피지 말라고 조언도 못 해? 그럼 공익광고협의회 사람들은 전 국민의 애인이냐?
“취했네. 그러니까 집에 가자고 했잖아.”
“너 손 줘봐.”
줘봐, 라는 말과 동시에 상헌은 직접 바름의 손을 잡아당겨 냄새를 맡았다. 보통 담배를 피고나면 손가락에 니코틴 냄새가 나기 마련이었다. 바름의 커다란 손을 코에 대고 숨을 들이쉬자 좋은 냄새가 났다. 상헌이 마약 탐지견처럼 냄새로 결론을 내렸다. 김바름은 무죄였다.
“손잡으려고 별 핑계를 다 대네.”
바름이 상헌의 손가락을 잡았다. 바름은 상헌이 제 손을 잡으려고 억지 핑계를 만든다고 결론을 내렸다. 눈치 없이 늦게까지 술자리에 남겠다, 고집을 부리더니 그새 마음을 바꿔 달려 나온 게 기특했다. 키우는 반려견이 다른 가족이 아닌 자신을 선택한 뿌듯함을 느끼며 바름이 잡은 상헌의 손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진심으로 그런 거 아니거든.”
“오래 있겠다더니 왜 나왔어? 그게 예의라며.”
그게 싫지 않았지만 바름은 네가 나와줘서 고맙다는 말 대신 상헌을 떠봤다. 여자친구를 만들겠다고 과팅까지 나가고 운 좋게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는 상대방까지 생겼는데 굳이 그 기회를 버리고 나온 이유가 뭐야. 바름은 아닌 척 상헌의 입술을 힐끗거렸다.
“너 큰길까지 데려다주려고. 편의점도 가고.”
“편의점?”
“응. 내가 너 데려다주고 싶어서 지예한테 대신 사다 준다고 했어.”
“그래서 다시 가서 놀겠다고?”
응. 상헌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상헌은 바름의 주머니 속에 담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큰맘 먹고 부끄러운 얘기를 한 터라 조금 민망했다. 지예 대신 ‘내가 데려다주고 싶어서’ 나왔다는 말을 한다는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다. 비록 바름에게는 “나 어차피 다시 갈 건데?”라는 말로 해석되긴 했지만.
“그럼 편의점이나 가.”
“왜! 큰길까지 같이 가자.”
“나 딴 데 갈 곳 있어.”
“어디?”
“있어. 알아서 뭐하게?”
상헌은 갑자기 딱딱해진 바름의 말에 주머니에 들어있던 손을 빼냈다. 한 일주일간은 김바름과 말도 섞고 싶지 않을 만큼 서운했다. 큰맘 먹고 감정을 조금 티 냈더니 이렇게 바로 벽을 친다고? 바름과 잠자리를 가진 뒤 ‘나 너 좀 좋아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고백하면 멱살 잡힐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
“그래, 가라 가. 혼자 가다가 못된 사람들 만나서 돈이나 뺏겨라.”
일종의 저주였다. 현재 김바름은 상헌의 마음속에서 저주를 당해도 싼 놈이었다. 상헌은 나쁜 말을 하고도 섭섭함이 풀리지 않아 곧장 몸을 돌렸다. 대학가 주변은 편의점 천국이었다. 아무 방향으로 걸어도 결국 편의점 하나는 나오기 마련이었다.
“기껏 신경 써줬더니.”
이런 배은망덕한 후배 같으니라고. 상헌은 고개를 돌리면 바름이 자신을 보고 있을 것 같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미련 없이 널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
좁은 보폭으로 부지런히 걷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바름은 이미 보이지 않았지만. 상헌은 게임에서 진 것 같은 분함을 느끼며 가까운 편의점으로 향했다. 상헌은 친절한 아르바이트생의 인사를 들으면서도 화가 난 선배를 붙잡지 않는 후배의 건방짐에 분노했다.
“여보세요? 지예야 나 편의점인데.”
편의점 입구부터 진열된 여러 종류의 숙취해소제를 보며 상헌이 지예에게 전화를 걸었다. 특별히 선호하는 브랜드가 있는지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상헌은 자신의 세심함에 감탄하며 자신은 김바름에게 너무 아까운 남자라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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