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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998 추천 : 0 글자수 : 6,131 자 2022-12-27
상헌의 주머니는 숙취해소제로 가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름을 따라 집에 가야 했다고 상헌은 지난 결정을 후회했다. 편의점에서 지예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지예는 술자리에 재민과 창우가 왔다고 했다. 어쩌다 보니 우연히 합석했다는 믿기 힘든 소리에 상헌은 어쩔 수 없이 재민과 창우의 몫까지 숙취해소제를 사야 했다.
“갑자기 왜 와…? 불편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상헌의 마음이 불편했다. 숨 막히게 어색할 것 같았다. 김바름은 어떻게 이 불청객들이 오기 전에 딱 떠났을까? 운도 좋은 놈이었다. 앞으로 넘어져도 코 안 깨질 놈.
“오빠 여기 앉아요.”
상헌은 적당히 빠지려는 생각으로 지예와 민아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아까 상헌과 바름이 앉아있던 자리는 이미 불청객에게 빼앗긴 후였다. 민아가 다른 테이블에서 의자 하나를 끌어와 상헌에게 손짓했다.
“근데 너희 어떻게 알고 왔냐.”
“근처에서 술 마시다가 지예 SNS 보고 왔죠.”
이래서 SNS는 인생의 낭비였다. 상헌은 재민의 앞에 놓인 자신의 잔을 가져와 휴지로 닦았다.
“근데 형 진짜 김바름이랑 샤워 같이했어요?”
“뭐?”
“지예가 그러던데 형이 바름이랑 같이 샤워했다고.”
재민의 무례한 말에 상헌이 시선이 지예에게로 꽂혔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대체 이 테이블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길래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상헌과 눈이 마주친 지예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 얘네가 자꾸 바름이 헐렁한 옷만 입는 게 백프로 몸에 하자 있어서라고 그러잖아요.”
“하자?”
“젖꼭지가 세 개거나 배에 붙은 거 아니냐고 자꾸…. 오빠는 봤으니까 알잖아요, 아닌 거.”
지예의 표정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변명을 들은 상헌은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했다. 지예가 굳이 바름이 없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꺼냈을 리 없었다. 재민은 PC 방에서도 바름을 욕하더니 술자리에서까지 뒷얘기를 하는 게 바름에 대한 열등감이 꽤 심각한 모양이었다.
“너희는 술자리에서 동기 몸 평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냐?”
상헌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평가받은 당사자도 아닌데 술집의 시끄러운 대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화가 났다. 상헌이 정색을 하자 아까까지 신나게 바름을 욕했을 재민와 창우가 시선을 피했다.
“저희는 그냥 장난으로…, 애들이랑 샤워도 안 하고, 옷도 맨날 그렇게 입으니까 그냥 농담으로 그런 거예요.”
“장난이 재밌어야 장난이지.”
장난? 창우의 변명에 상헌이 주먹을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쌍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눈치만 살피는 민아에게 미안해서라도 험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근데 형은 바름이랑 친하지도 않다면서 왜 그렇게 화를 내요?”
“뭐?”
“야, 이재민 미쳤냐? 하지 마.”
눈알을 굴리며 변명하는 창우와 달리 재민은 미안함이라곤 없는 얼굴로 뻔뻔하게 물었다. 상헌은 혈압이 오른다는 느낌이 이런거구나를 느꼈다. 얼굴로 열이 확 오르면서 뒷목이 빳빳해졌다. 그건 지예도 마찬가지인지 눈썹을 잔뜩 치켜뜨고 재민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렇잖아요. 없는 자리에선 나랏님도 욕한다는데.”
그럼에도 재민은 자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는 얼굴을 했다. 상헌은 한때 재민이 게임을 잘한다는 이유로 뽀뽀라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자신을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없는 자리에서 욕한 건데 왜 이렇게 난리냐, 이거야?”
“저희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애들 다 그렇게 생각해요.”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나. 평소 좋은 게 좋은 거지 생각하며 살아온 상헌이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다른 애들도 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 불난 집에 휘발유를 부은 것처럼 상헌의 화를 더욱 키웠다. 바름의 눈에 띄는 외모가 얼마나 많은 뒷말들을 불러왔을지 안 봐도 훤했다.
“형이 김바름 친형도 아니고 이렇게 화낼 일도 아니잖아요.”
“이재민 너 그냥 가. 창우야 재민이 데리고 가.”
“지예야 김바름 좋아하니까 그렇다 쳐도 형은 왜요?”
지예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말리지 않으면 재민의 뺨이라도 때릴 기세였다. 이 상황에 가만히 두고만 보는 건 선배로도, 남자로도 폼이나지 않기 때문에 상헌은 재민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이렇게 멱살을 잡아 올린 뒤 멋지게 한마디 하고 주먹질을 하던데.
“취했으면 집에 가서 잠이나 자. 헛소리하지 말고.”
상헌도 재민의 멱살을 쥐고 한마디를 했다. 멱살을 쥐고 얼굴을 붙이자 술에 취한 재민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살짝 풀린 눈이 맨정신이 아닌 건 확실했다.
“야, 너 따라 나와.”
고등학생이나 할 법한 말이었지만 식당 내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상헌은 누군가를 멋있게 때리는 방법을 몰랐다. 학창시절 서로 머리채를 잡고 마구잡이로 주먹을 내지르는 개싸움은 한 적 있지만 후배들 앞에서 보여 줄 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오빠 하지 마요. 얘 취해서 제정신 아니에요.”
한 손으로 여전히 재민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가려는 상헌을 지예가 말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물먹은 눈으로 눈치만 살피는 민아에겐 미안했지만 상헌은 지예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갈 테니까 놔요.”
재민이 자신의 멱살을 야무지게 잡고 있는 상헌의 손을 잡아 내렸다. 재민의 건방진 행동에 상헌이 아랫입술을 이로 물었다. 술기운에 뜨거워진 재민의 손에 의해 끌어내려진 주먹이 꽤 아팠기 때문이었다. 비실비실해 보이는 몸과 달리 의외로 악력이 좋았다. 이러다 내가 먼지 나게 맞는 거 아니야? 그럼 김바름이 복수해주겠지? 상헌은 재민과 밖으로 나가는 짧은 시간 동안 재민에게 맞는 상상을 했다.
“…….”
얌전히 상헌을 따라 나온 재민이 말없이 상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 말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모습이었다. 버려진 담배꽁초만 가득한 술집 옆 골목에서 상헌은 위협적으로 인상을 쓰고 재민의 어깨를 잡았다.
“다시는 술자리에 남의 몸 가지고 품평하지 마.”
“형들도 술 마시면서 애들 평가하잖아요. 누가 예쁘더라, 누가 잘생겼더라 하잖아요.”
상헌의 경고에도 재민은 지지 않고 말대꾸를 했다. 상헌은 며칠 전에도 술을 마시며 후배들을 평가하던 동기들이 떠올랐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래서 넌 잘못한 게 없다고?”
“잘못한 건 맞는데 이렇게 화낼 일은 아니잖아요.”
으슥한 뒷골목에 일대일로 데려와 겁을 줘도 무서워하기는커녕 할 말은 곧 죽어도 하는 후배를 보며 상헌은 요즘 애들 무섭다는 말을 실감했다.
“야, 이재민.”
나도 지예처럼 바름이 좋아하니까 화낼 일 맞거든? 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육성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대신 상헌은 낮게 깐 목소리로 재민의 이름을 부르며 재민의 어깨를 손끝으로 툭 쳤다. 일진이 학생들의 돈을 뺏을 때 어깨를 치는 것처럼 툭툭.
“재민아!”
어깨를 툭툭 치는 행위는 상대방의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행위였지 뺨에 주먹을 꽂아 넣는 것처럼 상대방을 넘어트리기 위한 행위는 아니었다. 하지만 상헌이 재민의 어깨를 두어번 밀었을 때 재민의 몸은 거짓말처럼 나자빠졌다. 그건 상헌이 어깨를 쳐서 넘어졌다기보단 술기운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고 보는 게 맞았다. 어찌 됐든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힌 재민 때문에 놀란 상헌이 재민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하, 씨.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더러운 바닥에 고꾸라진 재민이 고개를 들어 상헌을 노려보았다. 넘어지며 부딪힌 엉덩이가 아픈지 노려보는 눈에 눈물이 얇게 올라있었다. 아니 네가 넘어진 게 내 탓이야? 상헌은 억울한 마음 반 당황스러운 마음 반으로 넘어진 재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바닥 더러우니까 빨리 일어나.”
상헌의 손을 잡고 겨우 일어난 재민이 벽을 짚고 숨을 골랐다. 상헌이 흙탕물에 엉망이 된 재민의 바지를 털어 주었다. 넘어지며 바닥에 쓸린 재민의 손바닥에 피가 줄줄 흘렀다. 한눈에도 더럽게 아파 보였다. 상헌은 자신의 손바닥이 아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고랑 밴드 사 올 테니까 일단 들어가 있어.”
“다른 애들도 다 그러는데 왜 저한테만 그래요!”
“알았어, 알았어.”
아직도 제 잘못은 모르고 남들도 다 그런다며 염불을 외는 재민에게 겉옷까지 벗어 준 상헌이 재민을 살살 달랬다.
“이재민! 상헌이 오빠! 어디 있어요?”
“여기, 여기!”
일단 들어가라는 말에도 버티고 선 재민과 힘 씨름을 하던 상헌은 자신들을 찾는 익숙한 목소리에 열심히 위치를 알렸다. 상헌이 손까지 들어가며 위치를 알린 덕분에 쉽게 찾아온 지예가 엉망이 된 재민을 보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오빠! 재민이 때렸어요?”
방금까지 바닥에 뒹군 재민의 꼴을 보면 누구나 그런 오해를 할법했다. 아니라고, 재민이 혼자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진 거라고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단은 약을 사오는 게 먼저였다.
“지예야 얘 좀 봐줘. 약 사오게.”
“진짜 때린 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지예는 지금 상황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어 자꾸만 되물었다. 지예는 속으로 상헌과 재민이 싸우면 상헌이 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 광경이 더 생경하게 느껴졌다. 상헌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재민을 지예에게로 떠밀었다.
“괜찮아요?”
골목을 빠져나오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아가 물었다. 아예 술자리를 파하고 나온 건지 창우의 손에 재민의 겉옷과 가방이 들려있었다.
“응, 괜찮아. 창우야 가서 지예 좀 도와줘.”
“네. 형 어디 가세요?”
“나 편의점에. 약 좀 사려고.”
상헌이 창우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가까운 편의점을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창우와 상헌을 번갈아 보던 민아가 종종걸음으로 상헌을 따라왔다.
“저도 같이 가요.”
“아니야, 나 혼자 가도 괜찮은데….”
“둘이 싸웠어요?”
상헌이 끝말을 흐렸다. 혼자 가도 되지만 굳이 같이 가준다면 싫을 건 없었으니까. 민아가 목소리를 죽여 소곤소곤 물었다.
“아니야, 안 싸웠어.”
명백히 말하면 싸운 건 아니었다. 싸우려고 했는데 상대방이 먼저 쓰러져서 부전승을 했달까? 하지만 동생 앞에서는 멋있어 보이고 싶은 게 연상의 본능이기 때문에 굳이 사실 그대로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올 때부터 술 많이 마신 것 같더라고요.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괜히 너한테 미안하네. 시간 내서 우리 학교까지 왔는데.”
“아니에요. 다음에는 둘이서 밥 한번 먹어요.”
민아는 당찬 아이였다. 상헌은 훅 들어온 민아의 말에 관자놀이를 긁었다. 둘이서만 밥을 먹자는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만일 민아를 한 달만 더 일찍 만났다면 상헌은 당장 우리 그냥 사귀자, 라는 폭탄 발언을 했을지도 몰랐다.
“미안. 둘이서만 만나기는 좀 그렇네.”
“사실 저 오빠 여자친구 있다는 얘기 들었어요. 과팅도 대타로 나온 거라고.”
“응, 맞아.”
그 얘기를 들었으면서 둘이서 밥을 먹자고 했다고? 당차다고는 생각했지만 민아는 상헌의 생각보다 더 당찬 친구였다.
“알면서 밥 먹자고 한 거야?”
“네. 그래도 그냥 말해볼 수는 있잖아요.”
“…….”
“그새 마음이 바뀌어서 헤어졌을 수도 있고.”
민아가 민망한 듯 뺨을 붉히며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에게 밥을 먹자고 말한 건 민망한 듯했다. 하지만 상헌은 민아의 말에 동의했다. 정말로 그새 마음이 바뀌어서 헤어졌을 수도 있지. 비록 상헌은 마음이 바뀌어 헤어질 여자친구가 없었지만.
“안녕하세요.”
아까도 들었던 아르바이트생의 친절한 인사를 들으며 편의점에 들어선 상헌이 곧장 상비약 코너로 향했다. 유명한 연고 하나와 밴드를 집어 든 상헌이 카운터 위로 제품을 올렸다. 그리고 계산을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아니, 꺼내려고 했다.
“내 지갑.”
하지만 꺼낼 수가 없었다. 상헌의 지갑은 재민에게 덮어준 겉옷 주머니에 있었으니까.
“갑자기 왜 와…? 불편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상헌의 마음이 불편했다. 숨 막히게 어색할 것 같았다. 김바름은 어떻게 이 불청객들이 오기 전에 딱 떠났을까? 운도 좋은 놈이었다. 앞으로 넘어져도 코 안 깨질 놈.
“오빠 여기 앉아요.”
상헌은 적당히 빠지려는 생각으로 지예와 민아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아까 상헌과 바름이 앉아있던 자리는 이미 불청객에게 빼앗긴 후였다. 민아가 다른 테이블에서 의자 하나를 끌어와 상헌에게 손짓했다.
“근데 너희 어떻게 알고 왔냐.”
“근처에서 술 마시다가 지예 SNS 보고 왔죠.”
이래서 SNS는 인생의 낭비였다. 상헌은 재민의 앞에 놓인 자신의 잔을 가져와 휴지로 닦았다.
“근데 형 진짜 김바름이랑 샤워 같이했어요?”
“뭐?”
“지예가 그러던데 형이 바름이랑 같이 샤워했다고.”
재민의 무례한 말에 상헌이 시선이 지예에게로 꽂혔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대체 이 테이블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길래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상헌과 눈이 마주친 지예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 얘네가 자꾸 바름이 헐렁한 옷만 입는 게 백프로 몸에 하자 있어서라고 그러잖아요.”
“하자?”
“젖꼭지가 세 개거나 배에 붙은 거 아니냐고 자꾸…. 오빠는 봤으니까 알잖아요, 아닌 거.”
지예의 표정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변명을 들은 상헌은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했다. 지예가 굳이 바름이 없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꺼냈을 리 없었다. 재민은 PC 방에서도 바름을 욕하더니 술자리에서까지 뒷얘기를 하는 게 바름에 대한 열등감이 꽤 심각한 모양이었다.
“너희는 술자리에서 동기 몸 평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냐?”
상헌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평가받은 당사자도 아닌데 술집의 시끄러운 대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화가 났다. 상헌이 정색을 하자 아까까지 신나게 바름을 욕했을 재민와 창우가 시선을 피했다.
“저희는 그냥 장난으로…, 애들이랑 샤워도 안 하고, 옷도 맨날 그렇게 입으니까 그냥 농담으로 그런 거예요.”
“장난이 재밌어야 장난이지.”
장난? 창우의 변명에 상헌이 주먹을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쌍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눈치만 살피는 민아에게 미안해서라도 험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근데 형은 바름이랑 친하지도 않다면서 왜 그렇게 화를 내요?”
“뭐?”
“야, 이재민 미쳤냐? 하지 마.”
눈알을 굴리며 변명하는 창우와 달리 재민은 미안함이라곤 없는 얼굴로 뻔뻔하게 물었다. 상헌은 혈압이 오른다는 느낌이 이런거구나를 느꼈다. 얼굴로 열이 확 오르면서 뒷목이 빳빳해졌다. 그건 지예도 마찬가지인지 눈썹을 잔뜩 치켜뜨고 재민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렇잖아요. 없는 자리에선 나랏님도 욕한다는데.”
그럼에도 재민은 자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는 얼굴을 했다. 상헌은 한때 재민이 게임을 잘한다는 이유로 뽀뽀라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자신을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없는 자리에서 욕한 건데 왜 이렇게 난리냐, 이거야?”
“저희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애들 다 그렇게 생각해요.”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나. 평소 좋은 게 좋은 거지 생각하며 살아온 상헌이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다른 애들도 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 불난 집에 휘발유를 부은 것처럼 상헌의 화를 더욱 키웠다. 바름의 눈에 띄는 외모가 얼마나 많은 뒷말들을 불러왔을지 안 봐도 훤했다.
“형이 김바름 친형도 아니고 이렇게 화낼 일도 아니잖아요.”
“이재민 너 그냥 가. 창우야 재민이 데리고 가.”
“지예야 김바름 좋아하니까 그렇다 쳐도 형은 왜요?”
지예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말리지 않으면 재민의 뺨이라도 때릴 기세였다. 이 상황에 가만히 두고만 보는 건 선배로도, 남자로도 폼이나지 않기 때문에 상헌은 재민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이렇게 멱살을 잡아 올린 뒤 멋지게 한마디 하고 주먹질을 하던데.
“취했으면 집에 가서 잠이나 자. 헛소리하지 말고.”
상헌도 재민의 멱살을 쥐고 한마디를 했다. 멱살을 쥐고 얼굴을 붙이자 술에 취한 재민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살짝 풀린 눈이 맨정신이 아닌 건 확실했다.
“야, 너 따라 나와.”
고등학생이나 할 법한 말이었지만 식당 내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상헌은 누군가를 멋있게 때리는 방법을 몰랐다. 학창시절 서로 머리채를 잡고 마구잡이로 주먹을 내지르는 개싸움은 한 적 있지만 후배들 앞에서 보여 줄 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오빠 하지 마요. 얘 취해서 제정신 아니에요.”
한 손으로 여전히 재민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가려는 상헌을 지예가 말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물먹은 눈으로 눈치만 살피는 민아에겐 미안했지만 상헌은 지예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갈 테니까 놔요.”
재민이 자신의 멱살을 야무지게 잡고 있는 상헌의 손을 잡아 내렸다. 재민의 건방진 행동에 상헌이 아랫입술을 이로 물었다. 술기운에 뜨거워진 재민의 손에 의해 끌어내려진 주먹이 꽤 아팠기 때문이었다. 비실비실해 보이는 몸과 달리 의외로 악력이 좋았다. 이러다 내가 먼지 나게 맞는 거 아니야? 그럼 김바름이 복수해주겠지? 상헌은 재민과 밖으로 나가는 짧은 시간 동안 재민에게 맞는 상상을 했다.
“…….”
얌전히 상헌을 따라 나온 재민이 말없이 상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 말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모습이었다. 버려진 담배꽁초만 가득한 술집 옆 골목에서 상헌은 위협적으로 인상을 쓰고 재민의 어깨를 잡았다.
“다시는 술자리에 남의 몸 가지고 품평하지 마.”
“형들도 술 마시면서 애들 평가하잖아요. 누가 예쁘더라, 누가 잘생겼더라 하잖아요.”
상헌의 경고에도 재민은 지지 않고 말대꾸를 했다. 상헌은 며칠 전에도 술을 마시며 후배들을 평가하던 동기들이 떠올랐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래서 넌 잘못한 게 없다고?”
“잘못한 건 맞는데 이렇게 화낼 일은 아니잖아요.”
으슥한 뒷골목에 일대일로 데려와 겁을 줘도 무서워하기는커녕 할 말은 곧 죽어도 하는 후배를 보며 상헌은 요즘 애들 무섭다는 말을 실감했다.
“야, 이재민.”
나도 지예처럼 바름이 좋아하니까 화낼 일 맞거든? 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육성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대신 상헌은 낮게 깐 목소리로 재민의 이름을 부르며 재민의 어깨를 손끝으로 툭 쳤다. 일진이 학생들의 돈을 뺏을 때 어깨를 치는 것처럼 툭툭.
“재민아!”
어깨를 툭툭 치는 행위는 상대방의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행위였지 뺨에 주먹을 꽂아 넣는 것처럼 상대방을 넘어트리기 위한 행위는 아니었다. 하지만 상헌이 재민의 어깨를 두어번 밀었을 때 재민의 몸은 거짓말처럼 나자빠졌다. 그건 상헌이 어깨를 쳐서 넘어졌다기보단 술기운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고 보는 게 맞았다. 어찌 됐든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힌 재민 때문에 놀란 상헌이 재민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하, 씨.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더러운 바닥에 고꾸라진 재민이 고개를 들어 상헌을 노려보았다. 넘어지며 부딪힌 엉덩이가 아픈지 노려보는 눈에 눈물이 얇게 올라있었다. 아니 네가 넘어진 게 내 탓이야? 상헌은 억울한 마음 반 당황스러운 마음 반으로 넘어진 재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바닥 더러우니까 빨리 일어나.”
상헌의 손을 잡고 겨우 일어난 재민이 벽을 짚고 숨을 골랐다. 상헌이 흙탕물에 엉망이 된 재민의 바지를 털어 주었다. 넘어지며 바닥에 쓸린 재민의 손바닥에 피가 줄줄 흘렀다. 한눈에도 더럽게 아파 보였다. 상헌은 자신의 손바닥이 아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고랑 밴드 사 올 테니까 일단 들어가 있어.”
“다른 애들도 다 그러는데 왜 저한테만 그래요!”
“알았어, 알았어.”
아직도 제 잘못은 모르고 남들도 다 그런다며 염불을 외는 재민에게 겉옷까지 벗어 준 상헌이 재민을 살살 달랬다.
“이재민! 상헌이 오빠! 어디 있어요?”
“여기, 여기!”
일단 들어가라는 말에도 버티고 선 재민과 힘 씨름을 하던 상헌은 자신들을 찾는 익숙한 목소리에 열심히 위치를 알렸다. 상헌이 손까지 들어가며 위치를 알린 덕분에 쉽게 찾아온 지예가 엉망이 된 재민을 보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오빠! 재민이 때렸어요?”
방금까지 바닥에 뒹군 재민의 꼴을 보면 누구나 그런 오해를 할법했다. 아니라고, 재민이 혼자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진 거라고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단은 약을 사오는 게 먼저였다.
“지예야 얘 좀 봐줘. 약 사오게.”
“진짜 때린 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지예는 지금 상황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어 자꾸만 되물었다. 지예는 속으로 상헌과 재민이 싸우면 상헌이 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 광경이 더 생경하게 느껴졌다. 상헌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재민을 지예에게로 떠밀었다.
“괜찮아요?”
골목을 빠져나오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아가 물었다. 아예 술자리를 파하고 나온 건지 창우의 손에 재민의 겉옷과 가방이 들려있었다.
“응, 괜찮아. 창우야 가서 지예 좀 도와줘.”
“네. 형 어디 가세요?”
“나 편의점에. 약 좀 사려고.”
상헌이 창우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가까운 편의점을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창우와 상헌을 번갈아 보던 민아가 종종걸음으로 상헌을 따라왔다.
“저도 같이 가요.”
“아니야, 나 혼자 가도 괜찮은데….”
“둘이 싸웠어요?”
상헌이 끝말을 흐렸다. 혼자 가도 되지만 굳이 같이 가준다면 싫을 건 없었으니까. 민아가 목소리를 죽여 소곤소곤 물었다.
“아니야, 안 싸웠어.”
명백히 말하면 싸운 건 아니었다. 싸우려고 했는데 상대방이 먼저 쓰러져서 부전승을 했달까? 하지만 동생 앞에서는 멋있어 보이고 싶은 게 연상의 본능이기 때문에 굳이 사실 그대로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올 때부터 술 많이 마신 것 같더라고요.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괜히 너한테 미안하네. 시간 내서 우리 학교까지 왔는데.”
“아니에요. 다음에는 둘이서 밥 한번 먹어요.”
민아는 당찬 아이였다. 상헌은 훅 들어온 민아의 말에 관자놀이를 긁었다. 둘이서만 밥을 먹자는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만일 민아를 한 달만 더 일찍 만났다면 상헌은 당장 우리 그냥 사귀자, 라는 폭탄 발언을 했을지도 몰랐다.
“미안. 둘이서만 만나기는 좀 그렇네.”
“사실 저 오빠 여자친구 있다는 얘기 들었어요. 과팅도 대타로 나온 거라고.”
“응, 맞아.”
그 얘기를 들었으면서 둘이서 밥을 먹자고 했다고? 당차다고는 생각했지만 민아는 상헌의 생각보다 더 당찬 친구였다.
“알면서 밥 먹자고 한 거야?”
“네. 그래도 그냥 말해볼 수는 있잖아요.”
“…….”
“그새 마음이 바뀌어서 헤어졌을 수도 있고.”
민아가 민망한 듯 뺨을 붉히며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에게 밥을 먹자고 말한 건 민망한 듯했다. 하지만 상헌은 민아의 말에 동의했다. 정말로 그새 마음이 바뀌어서 헤어졌을 수도 있지. 비록 상헌은 마음이 바뀌어 헤어질 여자친구가 없었지만.
“안녕하세요.”
아까도 들었던 아르바이트생의 친절한 인사를 들으며 편의점에 들어선 상헌이 곧장 상비약 코너로 향했다. 유명한 연고 하나와 밴드를 집어 든 상헌이 카운터 위로 제품을 올렸다. 그리고 계산을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아니, 꺼내려고 했다.
“내 지갑.”
하지만 꺼낼 수가 없었다. 상헌의 지갑은 재민에게 덮어준 겉옷 주머니에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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