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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1,092 추천 : 0 글자수 : 6,454 자 2022-12-28
상헌은 하루아침에 과 내 유명인사가 되었다. 원래도 귀엽게 생겼다거나, 밥을 잘 사준다거나, 착하다는 평가를 두루 받는 상헌이었지만 이번에는 사뭇 달랐다. 공상헌이 이재민을 피떡이 되도록 때렸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경영학과 학우들 입이 깃털인 건 알고 있었지만 잘못된 사실이 과 전체에 퍼지는데 삼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상한 소문 났더라. 누가 너 사칭하고 애들 패고 다니나 봐.”
역시나 그 소문을 못 들었을 리 없는 지우가 아침부터 상헌을 찾아왔다. 지우는 소문을 물어온 후배에게 공상헌은 절대 사람을 때릴 놈이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공상헌은 피떡이 되도록 맞았으면 맞았지 누군가를 피떡이 되도록 때릴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신체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나 이제 아니 땐 굴뚝엔 연기 안 난다는 말 안 믿으려고. 나더라, 연기.”
“그치? 너 아니지? 나 진짜 혹시나 했어.”
어처구니없는 감정이 잔뜩 묻은 상헌의 말에 지우가 안도했다. 지우는 상헌이 재민을 때렸을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술자리라는 게 워낙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우후죽순 일어나는 곳이니까.
“내가 뭐 재민이를 피떡이 되게 팼다는 건 말이 안 되고. 그냥 살짝 경고만….”
상헌은 단박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 지우 때문에 괜히 상상의 여지를 열여주었다. 사람을 때렸다는 오해를 받는 것도 기분 나빴지만 대놓고 평화주의자 취급을 받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상헌은 가끔은 야성적인 남자 취급도 받고 싶었다.
“경고? 말로?”
“말로만 한 건 아니고.”
상헌은 역시나 깔끔하게 답해주지 않았다. 소문이 정확히 어떻게 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재민도 자존심이 있으니 곧 바로잡아 주겠지, 생각했다. 술자리에서 선배에게 얻어맞았다는 오해는 누구라도 풀고 싶은 오해일 테니까.
“제대로 말 해봐. 뭐 때문에 싸웠냐, 그 어린애랑?”
“걔도 다 큰 성인인데 어린애는 무슨.”
“그럼 뭐 때문에 싸웠냐? 그 다 큰 애랑.”
상헌은 호기심에 가득 차 자신에게 집중하는 지우를 위해 어떻게 스토리텔링을 해줄까 고민했다.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상헌이 손으로 제 턱을 쥐었다.
“음…, 어디서부터 말하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 봐.”
“처음부터? 처음에는 나랑 민아랑 지예랑 바름이랑 넷이 밥을…, 아! 민아는 과팅에서 만난 애야.”
정말 처음부터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상헌이 설명을 덧붙였다. 지우가 알아들었다는 증거로 고개를 끄덕였다. 집중할수록 얼굴을 가까이 붙이는 게 정말 궁금해 보였다. 긴긴 이야기를 위해 목을 한번 가다듬은 상헌이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순간 시끄러운 진동 소리가 상헌의 주머니에서 울렸다.
“전화 왔다, 잠깐만. 바름이야.”
“그런 건 안 궁금해.”
화면 가득 떠오른 바름의 이름까지 굳이 보여준 상헌이 지우의 핀잔을 뒤로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학교야?
“학원은 아니야.”
-…….
그러니까 학교라는 뜻이었는데 바름은 답이 없었다. 상헌의 재미없는 농담에 당사자도 아닌 지우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응, 학교야. 너는?”
-나도 학교. 어디야? 그쪽으로 갈게.
“지금? 나 지우랑 있는데.”
-그럼 보내.
보내라고? 대수롭지 않은 바름의 말에 상헌이 지우의 눈치를 살폈다. 지우는 지금 바름이 어떤 건방진 말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겠지. 상헌은 괜히 비밀 연애를 하는 과CC가 된 기분이 들어 살짝 설렜다.
“그냥 내가 그쪽으로 갈게. 너 어디야?”
-도서관.
“거기로 갈게.”
-뒷문 쪽 구석으로 와.
“응. 지금 갈게.”
전화를 끊은 상헌이 지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들었지?”라는 뜻이었다.
“말하다가 어디가? 나야, 김바름이야. 선택해.”
“조별과제 때문에 가는 거야. 넌 나야, 조별과제야. 선택해.”
“당연히 조별과제지.”
“그치? 간다.”
조별과제는 참 유용한 핑계거리였다. 없던 조별과제를 만들어준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로.
“아, 나 민아랑 둘이 밥 먹기로 했어. 그 얘기도 나중에 해줄게.”
그냥 가면 미안하니까 상헌은 지우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도 하나 흘렸다. 둘이서 밥을 먹자는 민아의 제안을 분명히 거절했지만 결론적으로 밥 약속을 잡게 된 슬픈 이야기였다.
*
김바름은 도서관 뒷문 구석 벤치에 앉아 상헌을 기다리고 있었다. 워낙 구석에 박혀있어 학생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특히 이런 이른 아침에는 더더욱. 상헌은 바름을 발견하자마자 반갑게 달려가는 대신 멀리서 바름을 잠깐 지켜보았다. 무료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는 바름이 화보 속 모델 같아서 지켜보는 맛이 있었다.
“뭐해.”
금방 바름에게 들켜버렸지만. 내 눈빛이 너무 따가웠나? 상헌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자신을 발견한 바름에게로 냉큼 달려갔다.
“왜 보자고 했어?”
“멀쩡하네?”
상헌이 바름의 옆에 앉자 바름이 양손으로 상헌의 뺨을 잡아 요리조리 살폈다.
“뭔 소리야 갑자기.”
뺨을 잡히는 바람에 오리입이 된 상태로 말을 하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불편함에 상헌이 고개를 틀기도 전에 바름이 얼굴을 놓아주었다.
“어제 이재민이랑 싸웠다며.”
“내가 재민이 때렸다고 소문난 거 아니야? 왜 나보고 멀쩡하냐고 물어봐?”
“그냥 이재민이 맞았으면 넌 더 맞았을 거 같아서.”
대놓고 무시하는 말에 상헌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내가 더 맞았을 거 같다고? 물론 재민에게 얻어맞고 바름에게 복수를 부탁하는 상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이건 좀 억울했다. 분명 재민이 피떡이 되게 맞았다고 소문이 났을 텐데.
“걔만 다쳤거든? 난 멀쩡해.”
“왜 싸웠는데.”
“근데 어떻게 이렇게 바로 소문이 나냐. 우리 과 애들 입 가벼운 건 알았지만 심하네.”
“왜 싸웠냐고.”
“오늘 재민이 학교에서 봤어?”
바름과 상헌의 집단적 독백이 이어졌다. 바름이 상헌의 머리통을 잡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전까지.
“말해 봐.”
“음….”
“이재민이 내 욕해서?”
상헌이 고민하자 바름이 웃으며 물었다. 실실 웃는 게 다 알면서 묻는 여우 짓이 틀림없었다. 1학년들은 겹치는 수업이 많을 거고 이미 지예에게 전후 상황을 다 들었을 텐데 모를 수가 없었다. 이 악물고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면.
“다 알면서 왜 물어보냐.”
“고맙네. 내 욕한다고 사람도 패주고.”
“…….”
“근데 앞으로는 술자리에서 누가 남 욕한다고 나서지 마. 남들 다 그러는데 그때마다 나서다가 잘못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바름의 다정한 충고에 상헌은 고양이처럼 바름의 품에 머리를 부비고 싶어졌다. 김바름은 상헌의 마음을 몰랐다. 상헌이 나선 건 재민이 남 욕을 해서가 아니었다. ‘바름’을 욕해서였다. 게다가 처음도 아니고 두 번이나.
“누가 남 욕한다고 나선 게 아니라, 걔가 너 욕해서 나선 거야.”
“그래?”
“응. 너 욕하는 거 싫어서. 이재민이 너 젖꼭지 세 개 아니냐고 해서 진짜 짜증 났어. 알지도 못하는 게.”
방금 상헌이 한 말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짜증이 나는지 상헌이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했다. 그 모습에 좌우를 살핀 바름이 근처에 학생이 없는 걸 확인하고 상헌의 주먹을 잡았다. 딱 붙어 앉아 이렇게 예쁜 짓을 하는데 잡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래, 고마워.”
“사실 나 너 좋아해.”
사람들은 이런걸 ‘급발진’이라고 불렀다. 상대방이 고마워요, 하면 천만에요, 라고 답하는 게 K-예절이었지만 상헌은 냅다 고백 공격을 했다. 상헌은 자신이 말을 하고도 놀라 입을 막고 싶었지만 바름에게 주먹이 잡혀있어 그것마저 불가능한 상태였다.
“왜?”
여전히 상헌의 주먹을 손아귀에 넣고 바름이 물었다. 상헌은 자신의 고백이 뜬금없다는 것도, 고백의 타이밍이 이상하다는 것도 인정했지만 왜냐는 바름의 질문에는 빈정이 상했다. 기껏 좋아한다고 말해줬더니 왜냐고?
“그냥.”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해? 상헌이 새침하게 대답했다. 상헌은 자신이 민아의 말에 크게 감명받았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둘이 밥을 먹자던 민아의 당참과 그새 마음이 바뀌어 헤어졌을 수도 있지 않냐는 그 뻔뻔함이 상헌의 심장을 울렸다.
김바름이 지예를 좋아하건 말건 나도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있잖아? 그새 마음이 바뀌어서 이제 김지예가 아니라 공상헌이 좋을 수도 있는 거고.
“언제부터?”
“지금 여기가 청문회야…?”
산 넘어 산이었다. 자신이 왜 좋냐는 질문에 답을 했더니 이제는 언제부터냐는 물음이 떨어졌다. 상헌은 이제 서러울 지경이었다. 사귀자고 하면 아주 사람 패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정색을 하고 청문회 수준으로 사람을 몰아붙일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이상하잖아. 며칠 전까지 섹X 타령에 서로 여자친구 사귀는 건 이해해주자고 하더니.”
“… 하나도 안 이상한데.”
“과팅도 나갔잖아. 근데 갑자기 내가 좋다고?”
오목조목 조여오는 바름의 수사망에 상헌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몸을 움츠렸다. 전부 상헌이 한 말은 맞지만 그런 말을 한데에는 다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설명하자면 입이 아플 만큼 긴 이야기라 굳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과팅은 그냥 지우 대타로 나간 거라고 했잖아!”
“그래 과팅은 대타라고 치고. 내가 좋으면 왜 섹X만 하자고 했는데?”
도무지 끝나지 않은 청문회에 상헌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차라리 고백하지 말걸. 상헌의 작은 머리가 후회로 가득 찼다는 걸 바름도 모르지 않았다. 공상헌의 삐죽이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바름도 신중해야 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돌직구 고백도 두드려보고 답해야 했다.
“너 지예 좋아했잖아. 그래서 내가 너 좋다고 하면 다시는 나 안 만나줄 거 같아서 그런 건데.”
너 지예 좋아하잖아, 대신 좋아했잖아. 라고 말을 한 건 상헌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말끝을 흐리지 않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한 상헌이 습관적으로 바름의 눈치를 살폈다. 바름은 전혀 예상 못 한 이름에 실수로라도 지예를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나 김지예 좋아한 적 없는데. 1초도.”
“저번에 길거리에서 엄청 다정하게 걸어갔잖아, 둘이서만.”
“내가? 기억 안 나는데.”
“나랑 자고 나서도 지예 전화 받으러 갔잖아. 나 사실 그날 조금 울었어. 넌 모르겠지만.”
모르긴 누가 몰라. 그날 공상헌이 울었다는 건 바름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지예의 전화를 받은 이유는 바름도 상헌에게 알려주고 싶은 일이었다. 물어보지도 않는데 굳이 설명하기가 민망해 지금까지 말을 못 했을 뿐이었다.
“그때 내가 김지예한테 조 바꿔 달라고 부탁해 놓은 상태라 어쩔 수 없었어.”
“조? 조별과제 조?”
“응. 네가 나랑 같은 조 하는 거 불편해 보여서 친한 김지예랑 하라고 부탁했는데 하필 그때 전화 와서 어쩔 수 없이 받은 거야.”
바름은 속으로 몇 번이고 했던 변명을 드디어 입 밖으로 뱉어내 속이 후련했다. 상대방을 침대에 눕혀놓고 다른 사람의 전화를 받으러 가는 매너없는 짓을 한 게 바름도 내내 걸렸다. 목구멍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그럼 그렇게 말을 하지.”
상헌의 입꼬리가 거리낌 없이 하늘로 솟았다. 나도 네가 좋다는 대답을 받은 것도 아닌데 몰래 쌓아뒀던 서운함이 반 이상 녹았다.
“하려고 했는데 네가 이상한 말 해서 못했잖아.”
“그럼 지예를 좋아하는 게 아니면 나를 좋아하는 거야?”
“너 혹시 흑백논리라고 알아?”
알지. 모든 문제를 백 아니면 흑이라고 생각하는 극단주의. 상헌도 기본 상식이 있는 어른이라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왜 김바름이 ‘흑백논리’를 운운하는지도. 상헌은 당연히 안다고 으름장을 놓으려다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잡힌 주먹을 드디어 빼냈다.
“잠깐만, 지우 전화 왔다. 나 흑백논리 아니까, 딱 기다려.”
“김지우한테 말해줘.”
흑백논리를? 지우한테? 왜? 재미도, 감동도 없는 바름의 요구에 상헌이 입 모양으로 ‘싫어’라고 표현한 뒤 전화를 받았다.
“김지우한테 우리 사귄다고 말해줘.”
“사귀세요?”
-여보세요? 뭔 소리야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그건 상헌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여보세요?’ 가 ‘사귀세요?’로 나온 건 다 바름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묻고 싶은 바름의 말 때문이었다.
“이상한 소문 났더라. 누가 너 사칭하고 애들 패고 다니나 봐.”
역시나 그 소문을 못 들었을 리 없는 지우가 아침부터 상헌을 찾아왔다. 지우는 소문을 물어온 후배에게 공상헌은 절대 사람을 때릴 놈이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공상헌은 피떡이 되도록 맞았으면 맞았지 누군가를 피떡이 되도록 때릴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신체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나 이제 아니 땐 굴뚝엔 연기 안 난다는 말 안 믿으려고. 나더라, 연기.”
“그치? 너 아니지? 나 진짜 혹시나 했어.”
어처구니없는 감정이 잔뜩 묻은 상헌의 말에 지우가 안도했다. 지우는 상헌이 재민을 때렸을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술자리라는 게 워낙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우후죽순 일어나는 곳이니까.
“내가 뭐 재민이를 피떡이 되게 팼다는 건 말이 안 되고. 그냥 살짝 경고만….”
상헌은 단박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 지우 때문에 괜히 상상의 여지를 열여주었다. 사람을 때렸다는 오해를 받는 것도 기분 나빴지만 대놓고 평화주의자 취급을 받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상헌은 가끔은 야성적인 남자 취급도 받고 싶었다.
“경고? 말로?”
“말로만 한 건 아니고.”
상헌은 역시나 깔끔하게 답해주지 않았다. 소문이 정확히 어떻게 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재민도 자존심이 있으니 곧 바로잡아 주겠지, 생각했다. 술자리에서 선배에게 얻어맞았다는 오해는 누구라도 풀고 싶은 오해일 테니까.
“제대로 말 해봐. 뭐 때문에 싸웠냐, 그 어린애랑?”
“걔도 다 큰 성인인데 어린애는 무슨.”
“그럼 뭐 때문에 싸웠냐? 그 다 큰 애랑.”
상헌은 호기심에 가득 차 자신에게 집중하는 지우를 위해 어떻게 스토리텔링을 해줄까 고민했다.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상헌이 손으로 제 턱을 쥐었다.
“음…, 어디서부터 말하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 봐.”
“처음부터? 처음에는 나랑 민아랑 지예랑 바름이랑 넷이 밥을…, 아! 민아는 과팅에서 만난 애야.”
정말 처음부터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상헌이 설명을 덧붙였다. 지우가 알아들었다는 증거로 고개를 끄덕였다. 집중할수록 얼굴을 가까이 붙이는 게 정말 궁금해 보였다. 긴긴 이야기를 위해 목을 한번 가다듬은 상헌이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순간 시끄러운 진동 소리가 상헌의 주머니에서 울렸다.
“전화 왔다, 잠깐만. 바름이야.”
“그런 건 안 궁금해.”
화면 가득 떠오른 바름의 이름까지 굳이 보여준 상헌이 지우의 핀잔을 뒤로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학교야?
“학원은 아니야.”
-…….
그러니까 학교라는 뜻이었는데 바름은 답이 없었다. 상헌의 재미없는 농담에 당사자도 아닌 지우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응, 학교야. 너는?”
-나도 학교. 어디야? 그쪽으로 갈게.
“지금? 나 지우랑 있는데.”
-그럼 보내.
보내라고? 대수롭지 않은 바름의 말에 상헌이 지우의 눈치를 살폈다. 지우는 지금 바름이 어떤 건방진 말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겠지. 상헌은 괜히 비밀 연애를 하는 과CC가 된 기분이 들어 살짝 설렜다.
“그냥 내가 그쪽으로 갈게. 너 어디야?”
-도서관.
“거기로 갈게.”
-뒷문 쪽 구석으로 와.
“응. 지금 갈게.”
전화를 끊은 상헌이 지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들었지?”라는 뜻이었다.
“말하다가 어디가? 나야, 김바름이야. 선택해.”
“조별과제 때문에 가는 거야. 넌 나야, 조별과제야. 선택해.”
“당연히 조별과제지.”
“그치? 간다.”
조별과제는 참 유용한 핑계거리였다. 없던 조별과제를 만들어준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로.
“아, 나 민아랑 둘이 밥 먹기로 했어. 그 얘기도 나중에 해줄게.”
그냥 가면 미안하니까 상헌은 지우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도 하나 흘렸다. 둘이서 밥을 먹자는 민아의 제안을 분명히 거절했지만 결론적으로 밥 약속을 잡게 된 슬픈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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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바름은 도서관 뒷문 구석 벤치에 앉아 상헌을 기다리고 있었다. 워낙 구석에 박혀있어 학생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특히 이런 이른 아침에는 더더욱. 상헌은 바름을 발견하자마자 반갑게 달려가는 대신 멀리서 바름을 잠깐 지켜보았다. 무료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는 바름이 화보 속 모델 같아서 지켜보는 맛이 있었다.
“뭐해.”
금방 바름에게 들켜버렸지만. 내 눈빛이 너무 따가웠나? 상헌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자신을 발견한 바름에게로 냉큼 달려갔다.
“왜 보자고 했어?”
“멀쩡하네?”
상헌이 바름의 옆에 앉자 바름이 양손으로 상헌의 뺨을 잡아 요리조리 살폈다.
“뭔 소리야 갑자기.”
뺨을 잡히는 바람에 오리입이 된 상태로 말을 하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불편함에 상헌이 고개를 틀기도 전에 바름이 얼굴을 놓아주었다.
“어제 이재민이랑 싸웠다며.”
“내가 재민이 때렸다고 소문난 거 아니야? 왜 나보고 멀쩡하냐고 물어봐?”
“그냥 이재민이 맞았으면 넌 더 맞았을 거 같아서.”
대놓고 무시하는 말에 상헌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내가 더 맞았을 거 같다고? 물론 재민에게 얻어맞고 바름에게 복수를 부탁하는 상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이건 좀 억울했다. 분명 재민이 피떡이 되게 맞았다고 소문이 났을 텐데.
“걔만 다쳤거든? 난 멀쩡해.”
“왜 싸웠는데.”
“근데 어떻게 이렇게 바로 소문이 나냐. 우리 과 애들 입 가벼운 건 알았지만 심하네.”
“왜 싸웠냐고.”
“오늘 재민이 학교에서 봤어?”
바름과 상헌의 집단적 독백이 이어졌다. 바름이 상헌의 머리통을 잡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전까지.
“말해 봐.”
“음….”
“이재민이 내 욕해서?”
상헌이 고민하자 바름이 웃으며 물었다. 실실 웃는 게 다 알면서 묻는 여우 짓이 틀림없었다. 1학년들은 겹치는 수업이 많을 거고 이미 지예에게 전후 상황을 다 들었을 텐데 모를 수가 없었다. 이 악물고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면.
“다 알면서 왜 물어보냐.”
“고맙네. 내 욕한다고 사람도 패주고.”
“…….”
“근데 앞으로는 술자리에서 누가 남 욕한다고 나서지 마. 남들 다 그러는데 그때마다 나서다가 잘못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바름의 다정한 충고에 상헌은 고양이처럼 바름의 품에 머리를 부비고 싶어졌다. 김바름은 상헌의 마음을 몰랐다. 상헌이 나선 건 재민이 남 욕을 해서가 아니었다. ‘바름’을 욕해서였다. 게다가 처음도 아니고 두 번이나.
“누가 남 욕한다고 나선 게 아니라, 걔가 너 욕해서 나선 거야.”
“그래?”
“응. 너 욕하는 거 싫어서. 이재민이 너 젖꼭지 세 개 아니냐고 해서 진짜 짜증 났어. 알지도 못하는 게.”
방금 상헌이 한 말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짜증이 나는지 상헌이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했다. 그 모습에 좌우를 살핀 바름이 근처에 학생이 없는 걸 확인하고 상헌의 주먹을 잡았다. 딱 붙어 앉아 이렇게 예쁜 짓을 하는데 잡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래, 고마워.”
“사실 나 너 좋아해.”
사람들은 이런걸 ‘급발진’이라고 불렀다. 상대방이 고마워요, 하면 천만에요, 라고 답하는 게 K-예절이었지만 상헌은 냅다 고백 공격을 했다. 상헌은 자신이 말을 하고도 놀라 입을 막고 싶었지만 바름에게 주먹이 잡혀있어 그것마저 불가능한 상태였다.
“왜?”
여전히 상헌의 주먹을 손아귀에 넣고 바름이 물었다. 상헌은 자신의 고백이 뜬금없다는 것도, 고백의 타이밍이 이상하다는 것도 인정했지만 왜냐는 바름의 질문에는 빈정이 상했다. 기껏 좋아한다고 말해줬더니 왜냐고?
“그냥.”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해? 상헌이 새침하게 대답했다. 상헌은 자신이 민아의 말에 크게 감명받았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둘이 밥을 먹자던 민아의 당참과 그새 마음이 바뀌어 헤어졌을 수도 있지 않냐는 그 뻔뻔함이 상헌의 심장을 울렸다.
김바름이 지예를 좋아하건 말건 나도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있잖아? 그새 마음이 바뀌어서 이제 김지예가 아니라 공상헌이 좋을 수도 있는 거고.
“언제부터?”
“지금 여기가 청문회야…?”
산 넘어 산이었다. 자신이 왜 좋냐는 질문에 답을 했더니 이제는 언제부터냐는 물음이 떨어졌다. 상헌은 이제 서러울 지경이었다. 사귀자고 하면 아주 사람 패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정색을 하고 청문회 수준으로 사람을 몰아붙일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이상하잖아. 며칠 전까지 섹X 타령에 서로 여자친구 사귀는 건 이해해주자고 하더니.”
“… 하나도 안 이상한데.”
“과팅도 나갔잖아. 근데 갑자기 내가 좋다고?”
오목조목 조여오는 바름의 수사망에 상헌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몸을 움츠렸다. 전부 상헌이 한 말은 맞지만 그런 말을 한데에는 다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설명하자면 입이 아플 만큼 긴 이야기라 굳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과팅은 그냥 지우 대타로 나간 거라고 했잖아!”
“그래 과팅은 대타라고 치고. 내가 좋으면 왜 섹X만 하자고 했는데?”
도무지 끝나지 않은 청문회에 상헌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차라리 고백하지 말걸. 상헌의 작은 머리가 후회로 가득 찼다는 걸 바름도 모르지 않았다. 공상헌의 삐죽이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바름도 신중해야 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돌직구 고백도 두드려보고 답해야 했다.
“너 지예 좋아했잖아. 그래서 내가 너 좋다고 하면 다시는 나 안 만나줄 거 같아서 그런 건데.”
너 지예 좋아하잖아, 대신 좋아했잖아. 라고 말을 한 건 상헌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말끝을 흐리지 않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한 상헌이 습관적으로 바름의 눈치를 살폈다. 바름은 전혀 예상 못 한 이름에 실수로라도 지예를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나 김지예 좋아한 적 없는데. 1초도.”
“저번에 길거리에서 엄청 다정하게 걸어갔잖아, 둘이서만.”
“내가? 기억 안 나는데.”
“나랑 자고 나서도 지예 전화 받으러 갔잖아. 나 사실 그날 조금 울었어. 넌 모르겠지만.”
모르긴 누가 몰라. 그날 공상헌이 울었다는 건 바름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지예의 전화를 받은 이유는 바름도 상헌에게 알려주고 싶은 일이었다. 물어보지도 않는데 굳이 설명하기가 민망해 지금까지 말을 못 했을 뿐이었다.
“그때 내가 김지예한테 조 바꿔 달라고 부탁해 놓은 상태라 어쩔 수 없었어.”
“조? 조별과제 조?”
“응. 네가 나랑 같은 조 하는 거 불편해 보여서 친한 김지예랑 하라고 부탁했는데 하필 그때 전화 와서 어쩔 수 없이 받은 거야.”
바름은 속으로 몇 번이고 했던 변명을 드디어 입 밖으로 뱉어내 속이 후련했다. 상대방을 침대에 눕혀놓고 다른 사람의 전화를 받으러 가는 매너없는 짓을 한 게 바름도 내내 걸렸다. 목구멍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그럼 그렇게 말을 하지.”
상헌의 입꼬리가 거리낌 없이 하늘로 솟았다. 나도 네가 좋다는 대답을 받은 것도 아닌데 몰래 쌓아뒀던 서운함이 반 이상 녹았다.
“하려고 했는데 네가 이상한 말 해서 못했잖아.”
“그럼 지예를 좋아하는 게 아니면 나를 좋아하는 거야?”
“너 혹시 흑백논리라고 알아?”
알지. 모든 문제를 백 아니면 흑이라고 생각하는 극단주의. 상헌도 기본 상식이 있는 어른이라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왜 김바름이 ‘흑백논리’를 운운하는지도. 상헌은 당연히 안다고 으름장을 놓으려다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잡힌 주먹을 드디어 빼냈다.
“잠깐만, 지우 전화 왔다. 나 흑백논리 아니까, 딱 기다려.”
“김지우한테 말해줘.”
흑백논리를? 지우한테? 왜? 재미도, 감동도 없는 바름의 요구에 상헌이 입 모양으로 ‘싫어’라고 표현한 뒤 전화를 받았다.
“김지우한테 우리 사귄다고 말해줘.”
“사귀세요?”
-여보세요? 뭔 소리야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그건 상헌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여보세요?’ 가 ‘사귀세요?’로 나온 건 다 바름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묻고 싶은 바름의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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