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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863 추천 : 0 글자수 : 6,119 자 2022-12-29
“끊을게.”
상헌은 누구보다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받지 말지! 하고 성을 내는 지우가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눈 밖의 지우보다 중요한 게 눈앞의 바름이었다. 상헌은 바름이 한 말을 다시 듣고 싶었기 때문에 전화를 끊자마자 눈을 빛냈다. 사냥감을 눈앞에 둔 퓨마처럼.
“뭐? 방금 뭐라고 했어?”
“들었잖아.”
“너 나 좋아해? 왜? 언제부터?”
상헌의 모든 말끝이 하늘을 향했다. 궁금한 게 많았기 때문에 의문문이 많은 건 당연했다. 바름은 흥분한 상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목덜미를 살짝 잡았다. 엄마 강아지에게 목덜미를 물리면 얌전해지는 새끼강아지처럼 상헌이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청문회야?”
“그거 내가 했던 말이잖아. 따라 하지 마!”
멋진 말은 알아가지고. 상헌은 내심 뿌듯했다. 말로는 따라 하지 말라고 했지만 누군가 자신의 어록을 따라 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상헌은 좋은 기분으로 바름의 대답을 가늠해보았다. 김바름이 나를 왜 좋아할까? 잘생겨서? 아니면 내가 ‘그걸’ 너무 잘해서?
“그냥 좋아.”
“너 왜 자꾸 내가 한 말 똑같이 따라 해? 앵무새도 아니고. 내 어디가 좋냐고!”
“이유가 많아서…. 그냥 복합적으로 좋아.”
남들이 하는 말이었다면 오글거린다고 손발을 오므렸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상헌은 턱이 아릴 정도로 입꼬리를 바짝 올렸다. 마음이 설레서 웃음이 안 날 수 없었다. 상헌은 이런 말을 들어본 게 처음이라 활짝 펴진 표정을 관리하는 방법을 몰랐다.
“내가 잘 생겨서?”
“아니.”
“아니면 내가 너무 잘해서?”
“뭘?”
알면서! 상헌이 바름의 귀로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입으로 하는 거.” 귓속말을 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을 만큼 창피한 말이었다. 상헌의 귓속말을 들은 바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바름은 상헌의 펠X 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바름이 상헌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귀여워서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아니야.”
“그럼 뭔데? 학식에서 내가 후배한테 라면 사달라고 조르는 게 막 부성애를 자극했어?”
“…….”
“그래서 첫눈에 반한 거야? 나만 보면 부성애가 느껴져서 밥 사주고 싶고, 뭐 그런 거.”
바름은 이번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게 부성애를 자극당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식탁에 턱을 괴고 라면 하나만 사달라고 입을 오물오물하던 게 귀여웠다. 왜 수중에 돈이 없는지 설명하는 모습도 순수해 보였다. 정기 후원금이 나가는 바람에 통장에 천원도 없다는 게 하찮으면서도 사람 좋게 보였다.
“비슷한 거 같아.”
“뭐야. 그럼 내가 거지 같아서 좋은 거야?”
순간 상헌의 미간에 얇은 주름이 잡혔다. ‘거지 같아서’ 의 어감이 좋지 못해 바름은 그게 아니라고 ‘순수해 보여서’ 좋았다는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짧은 시간 고민했다. 공상헌은 달래주기 쉬운 만큼 토라지기도 쉬워서 항상 주의해야 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여기저기 얻어먹고 다닐걸. 더 거지 같아 보이게.”
하지만 상헌의 미간에 얇게 주름이 잡힌 건 토라져서가 아니라 아쉬워서였다. 자신의 그런 모습이 누군가에게 수요가 있을 줄 알았으면 좀 더 어필해볼걸, 하는 아쉬움. 그래서 바름은 굳이 거지 같은 게 아니라 순수해 보였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공상헌은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더 말해 봐. 누가 나한테 이렇게 말해준 적 처음이란 말이야.”
“음….”
“그게 고민할 일이야? 난 너 좋은 이유 백 가지도 말할 수 있는데.”
사실 백 가지는 무리지만. 상헌은 혹시나 바름이 백 가지 이유를 말해보라고 할까 봐 조금 긴장했다.
“너 말 많은 게 좋아. 병아리 같아서 귀여워.”
“무슨 소리야. 나 완전 과묵한 남잔데.”
상헌이 급하게 입을 딱 다물었다. 병아리처럼 귀여운 남자는 상헌이 원하는 이상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김바름이 병아리 인형을 보고 귀여워했다는 후배들의 소곤거림을 들은 기억이 있으니까. 바름아 너 병아리 정말 좋아하는구나. 상헌은 속으로 그런 바름을 귀여워했다.
“그럼 일단 핸드폰부터 과묵하게 만들어봐.”
바름이 지적했다. 그도 그럴 게 아까부터 계속 지우에게 전화가 오고있었다. 이상한 소리를 하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마 받지 않는 상헌이 얄미워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전화를 걸고 있겠지.
“조별과제 한다고 했는데 왜 자꾸 전화하지.”
“김지우랑 왜 그렇게 친해?”
“나랑 친구라고 지우까지 네 친구야? 형이라고 해.”
사귄 첫날부터 친구 문제로 싸우고 싶진 않지만 지적할 건 해야 했다. 바름이 자신에게 공상헌이라고 부르는 건 상관없었지만 지우에게는 지우 선배가 아니면 지우형이라고 불러야 했다. 그게 상헌이 생각하는 K-대학교의 룰이었다.
“우리가 친구야?”
“이제 내가 네 남자친구잖아.”
상헌은 쑥스러움에 온몸을 비틀었다. 남자친구라는 말이 이렇게 낯부끄러운 말인 줄 몰랐는데. 에스프레소를 원샷 한 사람처럼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으악, 이제 이런 말 안 할래. 소름 돋아.”
“그래, 하지 마. 안 어울려.”
“왜 안 어울려! 내가 얼마나 로맨틱한 남잔데.”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는 걸 몰라? 상헌이 툴툴거렸다.
“넌 하루종일 바쁘겠다.”
“왜?”
“과묵한 남자, 로맨틱한 남자 다 하려면 바쁘잖아.”
바름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헌의 말을 지적한 거였지만 상헌은 바름의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상헌은 오늘 하루종일 바빴다.
“맞아. 나 바빠.”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상헌이 아침부터 학교에 온 이유는 하나였다. 수업이 있었으니까. 지금 뛰어가도 이미 지각이었다.
“나 오늘 1교신데 너 때문에 까먹었어.”
“그럼 지금이라도 빨리 가. 끝나고 연락하고.”
“너 내 수업 도강해라. 응?”
상헌이 바름의 멱살을 쥐고 귀엽게 물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팔을 잡고 귀엽게 애교를 부리고 싶었는데 눈앞에 보이는 게 하필 멱살이었다. 사귄 첫날이면 깨를 볶아도 한솥을 볶아야 하는 날인데 수업 때문에 생이별을 하는 게 싫었다.
“난 도강하면 들켜서 안 돼.”
“그건 맞지.”
바름의 말은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김바름의 존재감은 교수님도 단박에 눈치챌 존재감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하루만 눈 딱 감고 자체휴강을 할까? 하루만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것도 지겹지만 이런 날은 괜찮잖아? 상헌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계속해서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가기 싫어.”
“나도 너 가는 거 싫어.”
상헌은 산책 후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 강아지처럼 몸을 늘어트렸다가 다시 긴장을 찾았다. 싫어도 가라고 냉정하게 말할 줄 알았던 바름이 애인이나 할법한 말을 한 탓이었다. 이제 애인이 맞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게 당연했지만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 광활한 우주에 너랑 나는 먼지 같은 존재잖아.”
“…….”
장황하게 길어지는 상헌의 말을 들으며 바름은 어디 한번 끝까지 말해보라는 표정을 했다.
“생각해보면 우린 아무것도 아닌데 하물며 오늘 수업은 얼마나 더 먼지 같겠어. 거의 태양에서 본 개미의 눈물 정도 아닐까?”
“그렇게 수업 듣기가 싫어?”
“응.”
“너 그러다 씨쁠 받는다.”
바름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너 그러다 에프 받는다.”라는 말을 했다면 현실감이 없어 그러려니 했겠지만 씨쁠은 지나치게 가시적이어서 상헌의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럼 재수강해서 너랑 같이 들으면 되겠다.”
하지만 상헌은 내면에 감춰둔 사랑꾼 면모가 있었기 때문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뼉을 치며 미래를 떠올려 보았다. 어차피 바름도 곧 들어야 할 전공이었다. 지금도 재수강 때문에 새내기와 같은 수업을 듣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못했다.
“진심이야?”
“아직 80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남은 인생에서 학점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
“그래, 뭐. 별로 안 중요하지.”
바름이 상헌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바름이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뿐인데 상헌은 그냥 기분이 좋았다. 왜 세상 노래는 죄다 사랑 노래고, 세상 드라마는 죄다 사랑 얘기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왜 꼭 사귀는 사람이 있냐고 묻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랑은 좋은 거였다. 같은 풍경, 같은 사람, 같은 행동인데도 애인이 한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더 간질거렸다.
“학점이 뭐가 중요해.”
“그치?”
상헌은 “학점보다 중요한 게 바로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잖아.” 따위의 간지러운 말을 기다렸다.
“응. 남들 좋은 거 먹을 때 좀 안 좋은 거 먹고, 남들 좋은 차 탈 때 좀 안 좋은 차 타고, 남들 좋은 곳 갈 때 좀 안 좋은 곳 가면 되지.”
“…….”
“학점 별로 안 중요해.”
맥이 탁 풀린다는 게 이런 의미일까? 상헌은 여전히 로맨틱의 ‘로’자도 모르는 바름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다. 손바닥도 맞닿아야 짝 소리가 나는 법인데 손바닥 하나로 허공만 가르니 재미가 없었다. 게다가 바름이 하는 말 중 틀린 말은 없었다. 남들보다 못한 인생은 싫었다. 선명하게 그려지는 남들보다 못한 자신의 미래에 상헌이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업 끝나면 전화할게.”
“응. 전화해. 데리러 갈 테니까.”
토끼 같은 자식을 두고 출근하는 가장의 마음으로 상헌은 바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미련이 뚝뚝 묻은 안녕이었다.
*
교수님의 지루한 강의를 들으면서 상헌은 핸드폰만 확인했다. 분명 아까 시계를 확인하고 1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고작 1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중간고사 결과는 오늘 수업 끝나고 자료실에 올릴 거니까 다들 확인하세요.”
벌써? 소리가 절로 나오는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중간고사 끝나고 숨 좀 돌리려는데 벌써 성적 공개라니. 바름의 앞에서는 앓는 소리를 했지만 상헌은 원래 학점 욕심이 있는 남자였다. 극단적인 선택과 집중 때문에 재수강을 해야 하는 과목이 몇 개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피땀으로 일궈놓은 에이쁠 밭이었다.
“제발 1등, 제발.”
상헌이 조용히 소원을 빌었다. 1등이 아니라도 3등까지는 봐줄 의향이 있었다. 누가 누구를 봐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못해도 3등 안에는 들어야만 했다. 드디어 이말삼초의 저주에서 벗어났으니 기말고사를 준비할 시간이 줄어드는 건 인지상정이었다. 중간고사 때 최대한 성적을 땡겨 놔야 토끼 같은 김바름과 마음 편히 놀 수 있었다.
“자이언트 토끼.”
상헌이 필기 대신 토끼 그림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김바름이 토끼라면 자이언트 토끼였다. 그냥 토끼치고는 너무 크니까. 하지만 잠깐 고민하던 상헌은 애써 그린 토끼 그림에 줄을 좍좍 그었다. 생각해보니 바름이 토끼상도 아니었고 잠자리에서도 토끼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웩.”
자꾸 토끼, 토끼 하니까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오면서 토기가 밀려올 정도였다. 비록 토끼보다는 토끼를 잡아먹는 뱀과에 가까웠지만 바름은 뱀보다 예뻤다. 바름이 꼭 제 애인이어서 그런 건 아니고, 바름은 객관적으로 예뻤다. 상헌은 속으로 어딜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애인을 떠올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15분 쉬고 12시 20분에 다시 시작합시다.”
교수님의 말에 바짝 일어서있던 상헌의 몸이 젤리처럼 흘러내렸다. 수업을 듣는 동안 바름이 어떤 메시지를 보내놨을지 궁금해 가장 먼저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많은 연락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상헌은 자신의 인기에 새삼 감탄했다.
“아, 맞다. 밥.”
수많은 연락 중 가장 장문의 메시지는 민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밥은 언제 사줄 거냐는 귀여운 투정이었다. 민아에게 밥을 사기로 했을 땐 가짜 애인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진짜 애인이 생겨버려 퍽 난감한 상황이었다.
상헌은 누구보다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받지 말지! 하고 성을 내는 지우가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눈 밖의 지우보다 중요한 게 눈앞의 바름이었다. 상헌은 바름이 한 말을 다시 듣고 싶었기 때문에 전화를 끊자마자 눈을 빛냈다. 사냥감을 눈앞에 둔 퓨마처럼.
“뭐? 방금 뭐라고 했어?”
“들었잖아.”
“너 나 좋아해? 왜? 언제부터?”
상헌의 모든 말끝이 하늘을 향했다. 궁금한 게 많았기 때문에 의문문이 많은 건 당연했다. 바름은 흥분한 상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목덜미를 살짝 잡았다. 엄마 강아지에게 목덜미를 물리면 얌전해지는 새끼강아지처럼 상헌이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청문회야?”
“그거 내가 했던 말이잖아. 따라 하지 마!”
멋진 말은 알아가지고. 상헌은 내심 뿌듯했다. 말로는 따라 하지 말라고 했지만 누군가 자신의 어록을 따라 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상헌은 좋은 기분으로 바름의 대답을 가늠해보았다. 김바름이 나를 왜 좋아할까? 잘생겨서? 아니면 내가 ‘그걸’ 너무 잘해서?
“그냥 좋아.”
“너 왜 자꾸 내가 한 말 똑같이 따라 해? 앵무새도 아니고. 내 어디가 좋냐고!”
“이유가 많아서…. 그냥 복합적으로 좋아.”
남들이 하는 말이었다면 오글거린다고 손발을 오므렸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상헌은 턱이 아릴 정도로 입꼬리를 바짝 올렸다. 마음이 설레서 웃음이 안 날 수 없었다. 상헌은 이런 말을 들어본 게 처음이라 활짝 펴진 표정을 관리하는 방법을 몰랐다.
“내가 잘 생겨서?”
“아니.”
“아니면 내가 너무 잘해서?”
“뭘?”
알면서! 상헌이 바름의 귀로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입으로 하는 거.” 귓속말을 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을 만큼 창피한 말이었다. 상헌의 귓속말을 들은 바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바름은 상헌의 펠X 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바름이 상헌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귀여워서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아니야.”
“그럼 뭔데? 학식에서 내가 후배한테 라면 사달라고 조르는 게 막 부성애를 자극했어?”
“…….”
“그래서 첫눈에 반한 거야? 나만 보면 부성애가 느껴져서 밥 사주고 싶고, 뭐 그런 거.”
바름은 이번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게 부성애를 자극당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식탁에 턱을 괴고 라면 하나만 사달라고 입을 오물오물하던 게 귀여웠다. 왜 수중에 돈이 없는지 설명하는 모습도 순수해 보였다. 정기 후원금이 나가는 바람에 통장에 천원도 없다는 게 하찮으면서도 사람 좋게 보였다.
“비슷한 거 같아.”
“뭐야. 그럼 내가 거지 같아서 좋은 거야?”
순간 상헌의 미간에 얇은 주름이 잡혔다. ‘거지 같아서’ 의 어감이 좋지 못해 바름은 그게 아니라고 ‘순수해 보여서’ 좋았다는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짧은 시간 고민했다. 공상헌은 달래주기 쉬운 만큼 토라지기도 쉬워서 항상 주의해야 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여기저기 얻어먹고 다닐걸. 더 거지 같아 보이게.”
하지만 상헌의 미간에 얇게 주름이 잡힌 건 토라져서가 아니라 아쉬워서였다. 자신의 그런 모습이 누군가에게 수요가 있을 줄 알았으면 좀 더 어필해볼걸, 하는 아쉬움. 그래서 바름은 굳이 거지 같은 게 아니라 순수해 보였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공상헌은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더 말해 봐. 누가 나한테 이렇게 말해준 적 처음이란 말이야.”
“음….”
“그게 고민할 일이야? 난 너 좋은 이유 백 가지도 말할 수 있는데.”
사실 백 가지는 무리지만. 상헌은 혹시나 바름이 백 가지 이유를 말해보라고 할까 봐 조금 긴장했다.
“너 말 많은 게 좋아. 병아리 같아서 귀여워.”
“무슨 소리야. 나 완전 과묵한 남잔데.”
상헌이 급하게 입을 딱 다물었다. 병아리처럼 귀여운 남자는 상헌이 원하는 이상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김바름이 병아리 인형을 보고 귀여워했다는 후배들의 소곤거림을 들은 기억이 있으니까. 바름아 너 병아리 정말 좋아하는구나. 상헌은 속으로 그런 바름을 귀여워했다.
“그럼 일단 핸드폰부터 과묵하게 만들어봐.”
바름이 지적했다. 그도 그럴 게 아까부터 계속 지우에게 전화가 오고있었다. 이상한 소리를 하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마 받지 않는 상헌이 얄미워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전화를 걸고 있겠지.
“조별과제 한다고 했는데 왜 자꾸 전화하지.”
“김지우랑 왜 그렇게 친해?”
“나랑 친구라고 지우까지 네 친구야? 형이라고 해.”
사귄 첫날부터 친구 문제로 싸우고 싶진 않지만 지적할 건 해야 했다. 바름이 자신에게 공상헌이라고 부르는 건 상관없었지만 지우에게는 지우 선배가 아니면 지우형이라고 불러야 했다. 그게 상헌이 생각하는 K-대학교의 룰이었다.
“우리가 친구야?”
“이제 내가 네 남자친구잖아.”
상헌은 쑥스러움에 온몸을 비틀었다. 남자친구라는 말이 이렇게 낯부끄러운 말인 줄 몰랐는데. 에스프레소를 원샷 한 사람처럼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으악, 이제 이런 말 안 할래. 소름 돋아.”
“그래, 하지 마. 안 어울려.”
“왜 안 어울려! 내가 얼마나 로맨틱한 남잔데.”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는 걸 몰라? 상헌이 툴툴거렸다.
“넌 하루종일 바쁘겠다.”
“왜?”
“과묵한 남자, 로맨틱한 남자 다 하려면 바쁘잖아.”
바름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헌의 말을 지적한 거였지만 상헌은 바름의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상헌은 오늘 하루종일 바빴다.
“맞아. 나 바빠.”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상헌이 아침부터 학교에 온 이유는 하나였다. 수업이 있었으니까. 지금 뛰어가도 이미 지각이었다.
“나 오늘 1교신데 너 때문에 까먹었어.”
“그럼 지금이라도 빨리 가. 끝나고 연락하고.”
“너 내 수업 도강해라. 응?”
상헌이 바름의 멱살을 쥐고 귀엽게 물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팔을 잡고 귀엽게 애교를 부리고 싶었는데 눈앞에 보이는 게 하필 멱살이었다. 사귄 첫날이면 깨를 볶아도 한솥을 볶아야 하는 날인데 수업 때문에 생이별을 하는 게 싫었다.
“난 도강하면 들켜서 안 돼.”
“그건 맞지.”
바름의 말은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김바름의 존재감은 교수님도 단박에 눈치챌 존재감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하루만 눈 딱 감고 자체휴강을 할까? 하루만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것도 지겹지만 이런 날은 괜찮잖아? 상헌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계속해서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가기 싫어.”
“나도 너 가는 거 싫어.”
상헌은 산책 후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 강아지처럼 몸을 늘어트렸다가 다시 긴장을 찾았다. 싫어도 가라고 냉정하게 말할 줄 알았던 바름이 애인이나 할법한 말을 한 탓이었다. 이제 애인이 맞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게 당연했지만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 광활한 우주에 너랑 나는 먼지 같은 존재잖아.”
“…….”
장황하게 길어지는 상헌의 말을 들으며 바름은 어디 한번 끝까지 말해보라는 표정을 했다.
“생각해보면 우린 아무것도 아닌데 하물며 오늘 수업은 얼마나 더 먼지 같겠어. 거의 태양에서 본 개미의 눈물 정도 아닐까?”
“그렇게 수업 듣기가 싫어?”
“응.”
“너 그러다 씨쁠 받는다.”
바름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너 그러다 에프 받는다.”라는 말을 했다면 현실감이 없어 그러려니 했겠지만 씨쁠은 지나치게 가시적이어서 상헌의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럼 재수강해서 너랑 같이 들으면 되겠다.”
하지만 상헌은 내면에 감춰둔 사랑꾼 면모가 있었기 때문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뼉을 치며 미래를 떠올려 보았다. 어차피 바름도 곧 들어야 할 전공이었다. 지금도 재수강 때문에 새내기와 같은 수업을 듣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못했다.
“진심이야?”
“아직 80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남은 인생에서 학점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
“그래, 뭐. 별로 안 중요하지.”
바름이 상헌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바름이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뿐인데 상헌은 그냥 기분이 좋았다. 왜 세상 노래는 죄다 사랑 노래고, 세상 드라마는 죄다 사랑 얘기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왜 꼭 사귀는 사람이 있냐고 묻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랑은 좋은 거였다. 같은 풍경, 같은 사람, 같은 행동인데도 애인이 한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더 간질거렸다.
“학점이 뭐가 중요해.”
“그치?”
상헌은 “학점보다 중요한 게 바로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잖아.” 따위의 간지러운 말을 기다렸다.
“응. 남들 좋은 거 먹을 때 좀 안 좋은 거 먹고, 남들 좋은 차 탈 때 좀 안 좋은 차 타고, 남들 좋은 곳 갈 때 좀 안 좋은 곳 가면 되지.”
“…….”
“학점 별로 안 중요해.”
맥이 탁 풀린다는 게 이런 의미일까? 상헌은 여전히 로맨틱의 ‘로’자도 모르는 바름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다. 손바닥도 맞닿아야 짝 소리가 나는 법인데 손바닥 하나로 허공만 가르니 재미가 없었다. 게다가 바름이 하는 말 중 틀린 말은 없었다. 남들보다 못한 인생은 싫었다. 선명하게 그려지는 남들보다 못한 자신의 미래에 상헌이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업 끝나면 전화할게.”
“응. 전화해. 데리러 갈 테니까.”
토끼 같은 자식을 두고 출근하는 가장의 마음으로 상헌은 바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미련이 뚝뚝 묻은 안녕이었다.
*
교수님의 지루한 강의를 들으면서 상헌은 핸드폰만 확인했다. 분명 아까 시계를 확인하고 1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고작 1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중간고사 결과는 오늘 수업 끝나고 자료실에 올릴 거니까 다들 확인하세요.”
벌써? 소리가 절로 나오는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중간고사 끝나고 숨 좀 돌리려는데 벌써 성적 공개라니. 바름의 앞에서는 앓는 소리를 했지만 상헌은 원래 학점 욕심이 있는 남자였다. 극단적인 선택과 집중 때문에 재수강을 해야 하는 과목이 몇 개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피땀으로 일궈놓은 에이쁠 밭이었다.
“제발 1등, 제발.”
상헌이 조용히 소원을 빌었다. 1등이 아니라도 3등까지는 봐줄 의향이 있었다. 누가 누구를 봐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못해도 3등 안에는 들어야만 했다. 드디어 이말삼초의 저주에서 벗어났으니 기말고사를 준비할 시간이 줄어드는 건 인지상정이었다. 중간고사 때 최대한 성적을 땡겨 놔야 토끼 같은 김바름과 마음 편히 놀 수 있었다.
“자이언트 토끼.”
상헌이 필기 대신 토끼 그림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김바름이 토끼라면 자이언트 토끼였다. 그냥 토끼치고는 너무 크니까. 하지만 잠깐 고민하던 상헌은 애써 그린 토끼 그림에 줄을 좍좍 그었다. 생각해보니 바름이 토끼상도 아니었고 잠자리에서도 토끼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웩.”
자꾸 토끼, 토끼 하니까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오면서 토기가 밀려올 정도였다. 비록 토끼보다는 토끼를 잡아먹는 뱀과에 가까웠지만 바름은 뱀보다 예뻤다. 바름이 꼭 제 애인이어서 그런 건 아니고, 바름은 객관적으로 예뻤다. 상헌은 속으로 어딜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애인을 떠올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15분 쉬고 12시 20분에 다시 시작합시다.”
교수님의 말에 바짝 일어서있던 상헌의 몸이 젤리처럼 흘러내렸다. 수업을 듣는 동안 바름이 어떤 메시지를 보내놨을지 궁금해 가장 먼저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많은 연락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상헌은 자신의 인기에 새삼 감탄했다.
“아, 맞다. 밥.”
수많은 연락 중 가장 장문의 메시지는 민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밥은 언제 사줄 거냐는 귀여운 투정이었다. 민아에게 밥을 사기로 했을 땐 가짜 애인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진짜 애인이 생겨버려 퍽 난감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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