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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1,027 추천 : 0 글자수 : 5,722 자 2022-12-31
상헌은 민아에게 뭐라고 답을 해야 좋을지 고민하며 그날을 떠올려 보았다. 얼떨결에 민아에게 밥을 사주게 된 그 날을. 어차피 지우에게 민아와 단둘이 밥을 먹게 된 사연을 풀어주기로 했으니 정리를 해 볼 필요도 있었다.
“지갑을 왜 안 챙겨서….”
상헌이 양손으로 머리를 쥐었다. 재민이 자기 혼자 바닥에 뒹구는 바람에 민아와 편의점에 약을 사러 간 것까지는 좋았다. 후배를 위해 연고를 사는 남자? 꽤 멋있고 젠틀했다. 문제는 지갑이 든 겉옷을 재민에게 벗어주고 온 거였다. 계산대 앞에서 지갑이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계산은 자연스럽게 옆에 있던 민아에게로 돌아갔다.
“그때 바로 계좌이체를 했어야지!”
머리를 쥔 상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쉬는 시간이라 강의실이 한산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기 딱 좋았다. 상헌은 강의실 한가운데서 머리를 쥐어뜯을 만큼 과거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즘 같은 최첨단 시대에 핸드폰으로 곧장 약값을 이체할 수 있었지만 과거의 상헌은 그러지 않았다. 상헌은 약값을 이체해주는 대신 밥을 사겠다는 공수표를 날렸다.
“…….”
상헌은 자판을 꾹꾹 눌러 ‘이번 주 주말에 먹자’ 하는 문장을 찍어냈다. 미안한데 그냥 약값 줄 테니 밥은 없었던 일로 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한입으로 두말하는 남자는 본새가 안 사니까. 그냥 빨리 사주고 끝내야지. 그게 상헌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갑자기…?”
주말에 먹자는 메시지가 전송되기 무섭게 상대방이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가 떠올랐다. 그리고 화면이 어두워지며 민아의 번호가 떠올랐다. 메시지를 보자마자 답장보다는 전화를 하는 성질머리가 상헌과 비슷했다, 민아는.
“응, 민아야.”
-이번 주 주말이면 토요일에 봐요. 저 일요일엔 약속 있어서요.
“좋아! 어디서 볼래? 저번엔 네가 우리 학교 쪽 왔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갈게.”
상헌은 선심 쓰는 척 말했지만 사실 민아를 위한 선심은 아니었다. 이 근처에서 민아와 둘이 밥을 먹다 바름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바름이 민아의 학교 근처에까지 출몰할 일은 없을 거니까.
-오빠 학교 근처에서 보면 애인한테 들킬까 봐요?
“응.”
민아는 정말 당돌한 아이였다. 상헌의 말문이 턱 막힐 만큼. 허를 찌르는 말에 상헌은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상헌의 솔직한 대답에 수화기 너머로 민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지 않아요? 지갑 없을 때 도와준 동생한테 밥 사주기로 했다고.
“그 성격에 가만 안 있을 텐데….”
상헌은 속으로 해야 하는 말이 육성으로 튀어나와 당황했다. 하지만 김바름 성격에 과팅에서 만난 민아와 단둘이 밥을 먹는다고 하면 곱게 보내 줄 것 같지 않았다. 진심으로.
-오빠 애인한테 잡혀 살아요?
“아니? 내가 꽉 잡고 사는데?”
사나이 자존심에 이건 사실대로 고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말해도 믿을 것 같진 않지만 상헌은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어? 여기 뭐 볼 것도 별로 없는데…, 일단 나 쉬는 시간 끝나서 나중에 전화할게.”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며 앞문으로 걸어들어오는 교수님을 보며 상헌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민아의 학교 근처나 먼 시내에서 보자고 싹을 잘랐어야 했는데! 얼떨결에 다시 전화를 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도 실수였다.
“PPT 23페이지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자장가보다 지루한 교수님의 PPT 낭독이 다시 시작되었다. 불면증 치료제로 딱이었다. 나른한 교수님의 목소리와 높낮이 없이 PPT 내용을 줄줄 읊기만 하는 강의 내용은. 상헌은 미리 뽑아온 유인물을 스크린 화면에 맞춰 넘기며 하품을 했다. 하품과 사랑 그리고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던데. 그 말이 사실인 듯 졸린 와중에도 김바름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났다.
“공부하겠지.”
지금쯤 내가 없는 도서관에서 복습이나 예습을 하고 있겠지? 아침부터 밤까지 학교에서 공부하던 고등학생 습관이 남아있는 새내기를 떠올리니 입꼬리가 광대에 붙어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란 게 참 신기했다. 별거 아닌데도 내 ‘애인’이 한다고 생각하면 다 좋게만 느껴졌다. 이러니 연예인들이 로맨스물을 찍고 나면 왕왕 사귀는구나, 싶었다.
‘귀여운 놈.’
상헌은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노동요 취급하며 유인물 위로 귀여운 뱀 그림을 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바름을 토끼로 그려주기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상헌은 그림에 영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손바닥 반만 한 그림을 그리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다음 주부터는 새 챕터 들어가니 자료실에 올려둔 자료 다 뽑아와야 합니다.”
어느정도냐면 그림이 완성되기 전 교수님이 강의 마무리 멘트를 칠 정도였다. 상헌은 강의를 갈무리하는 교수님을 보며 급하게 뱀 꼬리 수정을 마치고 그림이 그려진 유인물 귀퉁이를 북 찢었다.
“김바름 보여줘야지.”
상헌은 바름에게 ‘내가 수업시간 내내 너를 생각하며 너를 닮은 뱀 그림까지 그렸어!’ 하고 생색을 낼 생각이었다. 김바름이라면 수업이나 제대로 들으라며 한심하게 볼 것 같았지만.
“나 수업 끝났어.”
앞다투어 나가는 학생들의 흐름에 몸을 맡긴 상헌이 곧장 바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학생 파도에 몸을 맡기면 해면 위를 떠도는 해파리처럼 수월하게 강의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갈게.
“갈게.”라는 말이 이렇게 사람을 기대하게 만드는 단어였던가? 이건 다 김바름의 목소리가 좋은 탓이었다. 상헌은 곱게 접은 유인물 끄트머리를 꾹 쥐었다. 부끄러움에 주먹이 쥐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그 자판기로 와.”
-알겠어.
인기 없는 자판기. 김바름이 현금이 없는 상헌을 위해 동전을 넣어주었던 둘만의 추억이 담긴 자판기였다. 남들에게는 그게 무슨 둘만의 추억이냐, 생각하겠지만 상헌에게는 핑크빛 가득한 추억이었다. 원래 우연도 자기 일이 되면 운명인 법이었다.
“빨리 와, 알겠지?”
-도서관에서 상경대까지 거리가 있는데 지금 출발해도…,
“됐어. 그냥 빨리 오지 마.”
“자기야, 빨리 와.” “알겠어, 금방 갈게!”라는 대화가 어울리는 게 연인 아니야? 상헌은 열 마디도 주고받지 못하는 티기타카에 바름의 말을 댕강 잘랐다. 상헌이 바름보다 더 먹은 학식이 몇 그릇인데 도서관과 상경대 사이의 거리와 예상 시간도 모를까.
-뛰어갈게.
수화기 너머로 바름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뛰어가겠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듯 통화가 끊겼다. 상헌도 바쁜 걸음으로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외모를 점검했다. 아침 일찍부터 여기저기 움직였더니 붓기가 쪽 빠져 매끈한 계란 같았다.
“와 진짜 꼴 보기 싫은데.”
상헌은 거울을 보며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김바름을 반하게 만들었던 라면 하나만 사달라는 비굴한 표정. 눈썹 끝을 내리고 눈을 울먹울먹 뜨며, 입을 삐죽 내밀자 거울에 비친 모습이 이번에는 뭉게진 계란 같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떻게 호감을 가질 수가 있지? 바름의 취향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주 내일 오지 그랬어.”
상헌은 바름보다 한발 빨리 자판기 앞에 도착했기 때문에 2등으로 도착한 바름을 꾸짖을 수 있었다. 양반이라도 되는 양 축구경기에서도 뛰지 않던 바름이 가쁜 숨을 고르며 상헌 앞에 섰을 때 상헌은 예전에 바름이 제게 했던 말을 바름에게 돌려주었다. 그 언제 씨리얼을 빌려왔던 상헌에게 바름이 저런 말을 했었다. 아주 냉정하게.
“점심 먹어야지.”
바름은 상헌의 질책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지만. 대신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상헌의 손을 잡았다.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구석진 자판기였지만 수업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놀란 상헌이 좌우를 살피며 손을 놓았다.
“야, 학교에서 손잡지 마. 과CC는 원래 몰래 하는 거야.”
“손에 그건 뭐야.”
바름이 상헌의 주먹 쥔 손을 건드렸다. 상헌의 손을 잡았을 때 느껴진 흰색 종이가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귀엽지? 완전 잘 그렸지?”
주먹 속에서 여러 갈래로 구겨진 그림을 쫙 편 상헌이 바름에게 자랑했다. 초등학생이 그린 수준의 뱀 그림이었다. 하지만 바름은 상헌이 뭘 표현하고 싶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걸 잘 그렸다고 해야 할지, 못 그렸다고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림만 놓고 보면 형편없었지만 의미 전달은 훌륭했다.
“모차르트가 환생한 것 같네.”
“그치? 마지막 수업 내내 그린 거야.”
바름의 칭찬 아닌 칭찬에 상헌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극찬을 받을 정도는 아닌데. 하긴 애인 눈에 뭐가 안 예뻐 보이겠어? 상헌은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바름은 그 모습을 보며 상헌이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업 중엔 수업을 들어야지.”
“나도 알아. 너 오후에 수업 있어? 아니다. 그냥 너 시간표 나한테 보내줘.”
“왜?”
“응?”
왜냐니? 커플끼리 시간표 공유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상헌은 바름의 단순한 질문에도 수많은 생각을 했다. 상헌은 그 찰나에 ‘내가 수업 없는 날 데이트하자고 할까 봐 피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까지 했다.
“다른 커플들 보면 시간표 다 공유하던데…, 넌 싫어?”
“아니. 그냥 장난친 거야.”
“뭐? 무슨 그런 재미없는 장난을.”
상헌이 이를 앙다물고 바름을 흘겼다. 상헌이 반 오십 가까이 살면서 들어본 장난 중 제일 재미없는 장난이었다.
“오후에 수업 없어. 가고 싶은 곳 있어?”
“너희 집 갈래.”
“우리 집? 우리 집에 먹을 거 없는데.”
왜 없어? 나 있잖아! 라는 농담을 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아 상헌은 준비한 농담을 꿀꺽 삼켰다.
“그럼 뭐 사서 가면 되잖아. 너희 집 소파에 누울래.”
“마음대로 해.”
바름의 긍정에 상헌이 손뼉을 쳤다. 바름의 집 소파는 상헌의 침대보다 질이 좋았다. 게다가 이제는 내 자리야, 내 소파야, 하며 유치하게 싸울 필요도 없었다. 상헌은 이미 바름의 것은 이제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대신 이건 너 줄게.”
여전히 상헌의 손에 잡혀있던 종이가 바름의 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상헌이 좋은 선물이라도 주는 양 거만한 표정으로 바름의 주머니에 종이를 집어넣었기 때문이었다.
“모차르트의 환생이 그린 그림이니 잘 보관해.”
“그래, 고마워.”
“잠깐만.”
모차르트? 쓰레기나 다름없는 종이조각을 줬음에도 고맙다고 실실 웃는 바름 때문에 의심하던 상헌이 입술을 달싹였다.
“모차르트는 음악가잖아!”
드디어 깨달은 상헌이 바름의 가슴을 향해 머리 박치기를 했다. 귀가 화끈거릴 만큼 창피했다. 나도 나름 교양있는 남잔데! 순간 모차르트와 피카소를 헷갈려 칭찬인 줄 알았던 제 모습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같은 예체능인데 그림도 잘 그리겠지.”
세계적인 음악가를 대충 예체능으로 퉁친 바름이 가슴 쪽으로 파고드는 상헌의 몸을 꽉 껴안았다. 바름은 이 상태 그대로 상헌을 품에 안고 집까지 갈 수도 있었지만 상헌은 아닌지 붙잡힌 몸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놔! 과 CC는 몰래 하는 게 맛이라고!”
“네가 먼저 안겼잖아.”
“안긴 게 아니라 공격한 거야.”
상헌이 억울함에 씩씩거렸다. 안기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수틀리면 친구 놈들에게도 가슴팍에 머리를 찧곤 했는데 그걸 안긴다고 표현하는 바름 때문에 상헌은 약이 바짝 올랐다. 사귄 첫날, 한창 깨 볶을 시기에 바름은 아주 깨가 담긴 봉투를 잠그다 못해 본드 칠을 하고 있었다.
“빨리 놔줘. 누구 오면 어떡해.”
“네 얼굴은 안 보여서 괜찮아.”
“그래도 싫어. 김바름이 어떤 애랑 안고 있었다고 소문나는 것도 싫다고.”
“알겠어. 거리두기 하고 가자.”
드디어 상헌을 품에서 놓아준 바름이 마트에서 줄서기를 하는 것처럼 상헌에게서 1m 거리를 뒀다. 상헌에게는 ‘거리두기’라는 말 자체가 코가 찡할 만큼 서운한 말이었지만 상헌도 지지 않고 바름에게서 살짝 거리를 뒀다.
“너 이 선 넘어오기만 해봐. 다 내 거야.”
상헌이 바름과 사이의 허공을 가리키며 경고했다. 초등학생 시절에 짝꿍에게나 하던 낡은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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