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 운이 좋네.
조회 : 1,118 추천 : 0 글자수 : 5,459 자 2022-11-09
“넌, 네 얘기는 안 하네.”
상우가 여느 때와는 다르게 감정 없이 툭 한 마디를 던졌다.
“내가?”
아윤의 옅은 갈색 눈이 쥐고 있던 커피에서 상우로 향했다.
“일주일 동안 연락이 없어도 먼저 연락도 없고.”
“그건, 일이 바쁜가 싶어서.”
“넌, 혼자서도 참 잘 살 것 같아.”
손에 쥔 아메리카노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가 아윤의 귀를 때렸다.
흔들리는 아윤의 눈이 상우에게 고정되었다.
“헤어지자.”
일 년 반 동안의 연애는 짧은 한 마디로 끝이 났다.
상우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하니 컵을 쥐고 있던 아윤의 손에 핏기가 사라졌다.
언제나 같았다.
헤어짐의 끝이.
상우가 떠나고 한참 뒤에 조용히 일어난 아윤은 카페를 나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초가을이라 그런지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뭐야, 데이트 중 아니야? 일주일 만에 만난다며.”
익숙한 하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헤어졌어. 방금.”
건조한 아윤의 목소리에 어이가 없는 하온이 대답했다.
“저번 주까지 잘 지냈잖아.”
“그러게.”
“미안하다, 친구야. 내가 가줘야 되는데.”
“아냐. 괜찮아. 끊을게.”
괜찮지 않았지만 하온도 누군가 같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끝났다고 초치면 안 되지.
전화를 끊은 아윤의 발걸음이 익숙한 포장마차로 향했다.
“우동 한 그릇 주세요.”
주인 할머니가 아윤이 주문도 하지 않은 소주와 잔, 안주를 내려놓고 돌아갔다.
자연스레 아윤이 뚜껑을 돌려 잔에 술을 따랐다.
한 잔, 두 잔 하다 보니 벌써 세 병째였다.
“이거 까지만 마셔. 집에는 가야지.”
할머니의 말에 아윤이 맑게 웃었다.
“괜찮아요. 저 술 잘 마시거든요. 간이 튼튼한가 봐요.”
“오늘은 뭔 일이래. 멀쩡한 아가씨가 그러지 말고. 여기까지여.”
아윤은 그저 대답하지 않고는 다시 술잔에 술을 채웠다.
결국 세 병을 다 비운 아윤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어짐의 순간부터 머릿속에는 상우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흘러 다니고 있었다.
터덜터덜 걷는 아윤의 발걸음이 횡단보도로 향했다.
마침 초록 불이 들어오자 아윤이 망설임 없이 건너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늦은 시간이라 빠르게 달리던 차가 멈추지 못한 것은.
아윤의 흐린 갈색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불빛을 마주했다.
끼이이이이이익.
아윤을 발견한 운전자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반동으로 고개를 거의 핸들에 묻었던 청년이 조심스럽게 내려 주변을 둘러봤다.
이상하게 뭐가 부딪히는 느낌이 없었다.
피할 수 없는 거리에 분명 사람이 있었는데.
혹시나 해서 차를 옆으로 옮겨 보고 사람의 흔적을 찾았지만 아무데도 없었다.
귀신에 홀렸나?
무서워진 청년이 서둘러 차를 타고 사라졌다.
분명 환한 빛을 봤는데, 감았다 뜬 아윤의 눈에 보인 건 까만 셔츠였다.
남자가 밀어내듯 아윤을 세웠다.
“당신, 운이 좋네.”
남자의 목소리에서 낮에 보는 하얀 달 같은 서늘함이 느껴졌다.
아윤이 고개를 흔들고 남자를 바라봤다.
희고 아름다운 얼굴이 어쩐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의식의 흐름대로 아윤이 물었다.
“사람이에요?”
“그런 것까지 말해줘야 되나?”
“외계인인가?”
“뭐?”
황당한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아윤을 바라봤다.
“내가 정말 아린이 생각만 안 났어도.”
차갑게 중얼거린 남자가 다시 사라지려고 할 때 아윤이 그의 옷을 잡았다.
- 아린이 생각만 안 났어도.
그 때 그 남자도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당신, 용왕님이에요?”
놀란 남자의 눈빛이 아윤을 향했을 때 아윤이 그대로 쓰러졌다.
반사적으로 아윤을 받아 안은 이안의 눈이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이 여자 뭐야?”
놀라 기절한 건가하고 가만히 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숨소리가 규칙적이었다.
“잠들었어? 이래서 안 하던 짓은 하는 게 아니라고 했지.”
작게 짜증을 낸 이안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집으로 바로 이동했다.
그리고 아윤을 가끔 지호가 쓰곤 하는 침대에 대충 던져 놓고 방에서 나왔다.
잠에서 깨면, 기억을 지워서 보내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음날, 아직은 밖이 어스름한 새벽의 시간이었다.
커다란 침대 위 포근한 하얀 이불을 돌돌 감은 아윤이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문득 이상함을 느낀 아윤이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벌떡 일어나 앉은 아윤이 주변을 둘러봤다.
낯선 곳에 당황해 입고 있는 옷을 확인하자 다행히 얇은 재킷까지 그대로 입고 있었다.
“와, 정말 미쳤네.”
다행히 몸으로 하는 실수는 하지 않은 듯했다.
무거운 머리를 흔들며 아윤이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나왔다.
누군가의 집인 것 같았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불이 켜져 있어 밝은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두려움에 크게 움직이는 심장을 부여잡고 아윤이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몰래 나갈 수 있을까?
그 때.
“왜, 몰래 나가기라도 하게?”
싸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적어도 감사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낯선 목소리에 그대로 굳었던 아윤이 다시 움직였다.
이왕 들킨 거 빨리 나가야겠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 거실을 지나친 아윤이 현관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남자가 어느 새 아윤의 앞에 서있었다.
심해처럼 어두운 눈동자가 아윤을 노려보고 말했다.
“내 집을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네?”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본 아윤의 머릿속에 어젯밤의 기억이 지나갔다.
횡단보도와, 눈이 부시던 빛과, 까만 셔츠, 그리고.
“용왕님?”
“아냐. 근데 어제부터 왜 자꾸 용왕님이냐고 묻는 거지?”
사실 그게 마음에 걸려 주워오긴 했다.
“외계인이나 도깨비나 구미호나 많은데, 왜 하필?”
재차 묻는 질문에 아윤이 조용히 남자를 바라봤다.
훤칠하고 비율 좋은 몸에 남들보다 새하얗고 잘생긴 얼굴, 짙고 까만 머리와 옅은 분홍빛의 입술.
아주 오래 전 조상님이 만났다던 용왕님의 외모와 똑 닮았다.
눈 색깔만 빼고는.
거의 잊고 있던 어릴 때 바다에서 자신을 구해줬던 남자와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어릴 때 바다에 빠진 적이 있었어요. 누가 구해줬는데 얼굴은 잘 모르겠고, 딱 하나 기억에 남는 게 있었거든요. 그 말이요. 아린이 생각만 안 났어도.”
“아린이?”
작게 중얼거린 이안이 기억 저편에서 희고 작던 여자애 하나를 떠올렸다.
이안의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갔다.
“어른들이 다들 용왕님이 구해준 거라고 그랬었거든요.”
“진짜 운도 억세게 좋은 인간이었군.”
“근데 어제도 같은 말을 들어서요.”
살짝 흔들리던 옅은 갈색 눈이 이제는 곧게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운 느낌이 사라지니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술기운에 잘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어제 날 구해줬던 사람이었다.
굳이 살려주고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근데 아린이가 누구에요?”
“소중한 내 동생.”
계속 차갑던 남자의 목소리에 순간 온기가 담겼다.
“저랑 닮은 거예요?”
“그럴 리가.”
문득 던진 말에 아윤은 다시 싸늘함을 온몸으로 느껴야했지만.
무안해진 아윤이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저 가도 될까요?”
이 남자는 아무래도 용왕님은 아닌 것 같았다.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 속 용왕님은 세상 다정한 남자였는데.
지금은 이 남자가 뭐든 빨리 집에나 돌아가고 싶었다.
다시 문고리를 잡은 아윤의 머리 위로 이안이 손을 얹었다.
“미안한데, 기억을 지워야 해서. 다른 애들과는 다르게 우린 조용히 섞여 사는 걸 지향하거든.”
그러려면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게 하는 게 나았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이전에 날 만났던 걸 잊어.”
이안의 낮은 목소리가 주문처럼 아윤의 귀를 파고들었다.
아윤이 뒤를 돌아 이안을 향해 말했다.
“이제 됐어요?”
“어.”
무심코 대답한 이안이 놀란 얼굴로 아윤을 봤다.
“너 어떻게 말하는 거지?”
보통 기억이 지워진 인간은 잠시 동안 멍해진다.
그 동안에 어제 그 공원 어딘가에 데려다 놓고 오면 깔끔히 마무리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윤의 투명한 갈색 눈은 또렷했다.
“근데, 기억이 그대로인 것 같은데요? 지워진 건가?”
아윤은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뭐지, 다 기억나는 것 같은데?
“왜 그대로야? 그럴 리가 없는데.”
당황한 이안이 다시 아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와 관련된 모든 걸 잊어.”
그리고 아윤의 얼굴을 보니 그대로다.
“대체 너 뭐야?”
“뭐가요?”
이안이 아주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왜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거지?”
아윤이 이안을 보고 있자니 뭔가 일이 잘 안되는 게 틀림없었다.
못 지우나 보다, 내 기억.
“안돼요? 걱정 마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해요. 누가 믿겠어요?”
웃으며 아윤이 말했다.
사실 아무나 이런 경험을 하는 것도 아닌데, 지워지면 아깝긴 했다.
어이없다는 듯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좀 서늘해도 잘생기고 신비한 사람이었다.
“정말 안한다니까요. 이제 집에 좀 보내주세요.”
이안은 고민했다.
언제까지 이 여자를 여기 잡아둘 수는 없었다.
인간의 말만 믿고 그냥 보내 주기에는 또 찝찝했고.
고민하던 이안의 서늘한 손이 아윤의 팔에 닿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둘은 아기자기한 카페 안에 있었다.
“서지호. 잠깐 나와 봐.”
“여기는 또 어디에요?”
이안의 말 뒤로 아윤의 맑은 목소리가 빈 공간을 울렸다.
목소리를 들었는지 카페 안쪽에서 키가 크고 단정한 옷차림의 남자가 나왔다.
옆에 있는 남자보다도 더 컸다.
“이안 형? 이 여자 분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둘을 바라봤다.
새벽 댓바람부터 형이 여긴 어쩐 일이지?
거기다 인간 여자랑 같이?
“기억이 안 지워져.”
“뭐라고?”
“그 종이 있잖아. 너희 쓰는 거. 그것 좀 줘봐.”
심기가 불편한 이안을 본 지호가 손을 공중에 넣었다 빼니 종이 한 장이 나왔다.
하얀 종이에는 알 수 없는 언어가 적혀 있었다.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잘만 지우더니.”
지호가 종이를 내밀자 이안이 아윤에게 말했다.
“여기다 손바닥 찍어. 집에 보내 줄 테니까.”
순간 아윤이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이게 뭔데요?”
계약서는 항상 신중하게 작성되고 도장을 찍어야 하는 거였다.
“임시방편.”
“네?”
“왠지 모르겠지만 너만 안 지워져. 그러니까 계약이라도 걸어두는 거지.”
“거기 뭐라고 적혀 있는 건데요?”
경계심 가득한 아윤의 태도에 둘을 가만히 보던 지호가 말했다.
“여기 적힌 말은 우리에 대해서 보거나 들은 걸 누구에게 말하거나 적지 못하게 되는 일종의 계약이에요. 손바닥을 대면 계약이 이뤄지고요. 다른 말은 없어요.”
이안이 손을 휘젓자 계약서의 말들이 한글로 바뀌었고, 가만히 읽어 본 아윤이 손바닥을 찍었다.
정말 그게 다였다.
진작 한글로 바꿔주지.
“이제 됐어요? 집에 가도 돼요?”
아윤이 고개를 들어 이안을 봤다.
뭔가 마뜩찮은 얼굴이었지만 마지못해 이안이 손을 뻗었고, 다음 순간 아윤은 어제 그 공원의 구석진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나중에 다시 찾아오지.”
그리고 바로 이안이 사라졌다.
침착한 척 행동하던 아윤이 나무 옆의 벤치에 주저앉듯 앉았다.
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정말 오늘 일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상우가 여느 때와는 다르게 감정 없이 툭 한 마디를 던졌다.
“내가?”
아윤의 옅은 갈색 눈이 쥐고 있던 커피에서 상우로 향했다.
“일주일 동안 연락이 없어도 먼저 연락도 없고.”
“그건, 일이 바쁜가 싶어서.”
“넌, 혼자서도 참 잘 살 것 같아.”
손에 쥔 아메리카노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가 아윤의 귀를 때렸다.
흔들리는 아윤의 눈이 상우에게 고정되었다.
“헤어지자.”
일 년 반 동안의 연애는 짧은 한 마디로 끝이 났다.
상우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하니 컵을 쥐고 있던 아윤의 손에 핏기가 사라졌다.
언제나 같았다.
헤어짐의 끝이.
상우가 떠나고 한참 뒤에 조용히 일어난 아윤은 카페를 나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초가을이라 그런지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뭐야, 데이트 중 아니야? 일주일 만에 만난다며.”
익숙한 하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헤어졌어. 방금.”
건조한 아윤의 목소리에 어이가 없는 하온이 대답했다.
“저번 주까지 잘 지냈잖아.”
“그러게.”
“미안하다, 친구야. 내가 가줘야 되는데.”
“아냐. 괜찮아. 끊을게.”
괜찮지 않았지만 하온도 누군가 같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끝났다고 초치면 안 되지.
전화를 끊은 아윤의 발걸음이 익숙한 포장마차로 향했다.
“우동 한 그릇 주세요.”
주인 할머니가 아윤이 주문도 하지 않은 소주와 잔, 안주를 내려놓고 돌아갔다.
자연스레 아윤이 뚜껑을 돌려 잔에 술을 따랐다.
한 잔, 두 잔 하다 보니 벌써 세 병째였다.
“이거 까지만 마셔. 집에는 가야지.”
할머니의 말에 아윤이 맑게 웃었다.
“괜찮아요. 저 술 잘 마시거든요. 간이 튼튼한가 봐요.”
“오늘은 뭔 일이래. 멀쩡한 아가씨가 그러지 말고. 여기까지여.”
아윤은 그저 대답하지 않고는 다시 술잔에 술을 채웠다.
결국 세 병을 다 비운 아윤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어짐의 순간부터 머릿속에는 상우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흘러 다니고 있었다.
터덜터덜 걷는 아윤의 발걸음이 횡단보도로 향했다.
마침 초록 불이 들어오자 아윤이 망설임 없이 건너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늦은 시간이라 빠르게 달리던 차가 멈추지 못한 것은.
아윤의 흐린 갈색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불빛을 마주했다.
끼이이이이이익.
아윤을 발견한 운전자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반동으로 고개를 거의 핸들에 묻었던 청년이 조심스럽게 내려 주변을 둘러봤다.
이상하게 뭐가 부딪히는 느낌이 없었다.
피할 수 없는 거리에 분명 사람이 있었는데.
혹시나 해서 차를 옆으로 옮겨 보고 사람의 흔적을 찾았지만 아무데도 없었다.
귀신에 홀렸나?
무서워진 청년이 서둘러 차를 타고 사라졌다.
분명 환한 빛을 봤는데, 감았다 뜬 아윤의 눈에 보인 건 까만 셔츠였다.
남자가 밀어내듯 아윤을 세웠다.
“당신, 운이 좋네.”
남자의 목소리에서 낮에 보는 하얀 달 같은 서늘함이 느껴졌다.
아윤이 고개를 흔들고 남자를 바라봤다.
희고 아름다운 얼굴이 어쩐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의식의 흐름대로 아윤이 물었다.
“사람이에요?”
“그런 것까지 말해줘야 되나?”
“외계인인가?”
“뭐?”
황당한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아윤을 바라봤다.
“내가 정말 아린이 생각만 안 났어도.”
차갑게 중얼거린 남자가 다시 사라지려고 할 때 아윤이 그의 옷을 잡았다.
- 아린이 생각만 안 났어도.
그 때 그 남자도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당신, 용왕님이에요?”
놀란 남자의 눈빛이 아윤을 향했을 때 아윤이 그대로 쓰러졌다.
반사적으로 아윤을 받아 안은 이안의 눈이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이 여자 뭐야?”
놀라 기절한 건가하고 가만히 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숨소리가 규칙적이었다.
“잠들었어? 이래서 안 하던 짓은 하는 게 아니라고 했지.”
작게 짜증을 낸 이안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집으로 바로 이동했다.
그리고 아윤을 가끔 지호가 쓰곤 하는 침대에 대충 던져 놓고 방에서 나왔다.
잠에서 깨면, 기억을 지워서 보내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음날, 아직은 밖이 어스름한 새벽의 시간이었다.
커다란 침대 위 포근한 하얀 이불을 돌돌 감은 아윤이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문득 이상함을 느낀 아윤이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벌떡 일어나 앉은 아윤이 주변을 둘러봤다.
낯선 곳에 당황해 입고 있는 옷을 확인하자 다행히 얇은 재킷까지 그대로 입고 있었다.
“와, 정말 미쳤네.”
다행히 몸으로 하는 실수는 하지 않은 듯했다.
무거운 머리를 흔들며 아윤이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나왔다.
누군가의 집인 것 같았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불이 켜져 있어 밝은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두려움에 크게 움직이는 심장을 부여잡고 아윤이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몰래 나갈 수 있을까?
그 때.
“왜, 몰래 나가기라도 하게?”
싸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적어도 감사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낯선 목소리에 그대로 굳었던 아윤이 다시 움직였다.
이왕 들킨 거 빨리 나가야겠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 거실을 지나친 아윤이 현관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남자가 어느 새 아윤의 앞에 서있었다.
심해처럼 어두운 눈동자가 아윤을 노려보고 말했다.
“내 집을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네?”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본 아윤의 머릿속에 어젯밤의 기억이 지나갔다.
횡단보도와, 눈이 부시던 빛과, 까만 셔츠, 그리고.
“용왕님?”
“아냐. 근데 어제부터 왜 자꾸 용왕님이냐고 묻는 거지?”
사실 그게 마음에 걸려 주워오긴 했다.
“외계인이나 도깨비나 구미호나 많은데, 왜 하필?”
재차 묻는 질문에 아윤이 조용히 남자를 바라봤다.
훤칠하고 비율 좋은 몸에 남들보다 새하얗고 잘생긴 얼굴, 짙고 까만 머리와 옅은 분홍빛의 입술.
아주 오래 전 조상님이 만났다던 용왕님의 외모와 똑 닮았다.
눈 색깔만 빼고는.
거의 잊고 있던 어릴 때 바다에서 자신을 구해줬던 남자와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어릴 때 바다에 빠진 적이 있었어요. 누가 구해줬는데 얼굴은 잘 모르겠고, 딱 하나 기억에 남는 게 있었거든요. 그 말이요. 아린이 생각만 안 났어도.”
“아린이?”
작게 중얼거린 이안이 기억 저편에서 희고 작던 여자애 하나를 떠올렸다.
이안의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갔다.
“어른들이 다들 용왕님이 구해준 거라고 그랬었거든요.”
“진짜 운도 억세게 좋은 인간이었군.”
“근데 어제도 같은 말을 들어서요.”
살짝 흔들리던 옅은 갈색 눈이 이제는 곧게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운 느낌이 사라지니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술기운에 잘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어제 날 구해줬던 사람이었다.
굳이 살려주고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근데 아린이가 누구에요?”
“소중한 내 동생.”
계속 차갑던 남자의 목소리에 순간 온기가 담겼다.
“저랑 닮은 거예요?”
“그럴 리가.”
문득 던진 말에 아윤은 다시 싸늘함을 온몸으로 느껴야했지만.
무안해진 아윤이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저 가도 될까요?”
이 남자는 아무래도 용왕님은 아닌 것 같았다.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 속 용왕님은 세상 다정한 남자였는데.
지금은 이 남자가 뭐든 빨리 집에나 돌아가고 싶었다.
다시 문고리를 잡은 아윤의 머리 위로 이안이 손을 얹었다.
“미안한데, 기억을 지워야 해서. 다른 애들과는 다르게 우린 조용히 섞여 사는 걸 지향하거든.”
그러려면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게 하는 게 나았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이전에 날 만났던 걸 잊어.”
이안의 낮은 목소리가 주문처럼 아윤의 귀를 파고들었다.
아윤이 뒤를 돌아 이안을 향해 말했다.
“이제 됐어요?”
“어.”
무심코 대답한 이안이 놀란 얼굴로 아윤을 봤다.
“너 어떻게 말하는 거지?”
보통 기억이 지워진 인간은 잠시 동안 멍해진다.
그 동안에 어제 그 공원 어딘가에 데려다 놓고 오면 깔끔히 마무리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윤의 투명한 갈색 눈은 또렷했다.
“근데, 기억이 그대로인 것 같은데요? 지워진 건가?”
아윤은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뭐지, 다 기억나는 것 같은데?
“왜 그대로야? 그럴 리가 없는데.”
당황한 이안이 다시 아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와 관련된 모든 걸 잊어.”
그리고 아윤의 얼굴을 보니 그대로다.
“대체 너 뭐야?”
“뭐가요?”
이안이 아주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왜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거지?”
아윤이 이안을 보고 있자니 뭔가 일이 잘 안되는 게 틀림없었다.
못 지우나 보다, 내 기억.
“안돼요? 걱정 마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해요. 누가 믿겠어요?”
웃으며 아윤이 말했다.
사실 아무나 이런 경험을 하는 것도 아닌데, 지워지면 아깝긴 했다.
어이없다는 듯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좀 서늘해도 잘생기고 신비한 사람이었다.
“정말 안한다니까요. 이제 집에 좀 보내주세요.”
이안은 고민했다.
언제까지 이 여자를 여기 잡아둘 수는 없었다.
인간의 말만 믿고 그냥 보내 주기에는 또 찝찝했고.
고민하던 이안의 서늘한 손이 아윤의 팔에 닿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둘은 아기자기한 카페 안에 있었다.
“서지호. 잠깐 나와 봐.”
“여기는 또 어디에요?”
이안의 말 뒤로 아윤의 맑은 목소리가 빈 공간을 울렸다.
목소리를 들었는지 카페 안쪽에서 키가 크고 단정한 옷차림의 남자가 나왔다.
옆에 있는 남자보다도 더 컸다.
“이안 형? 이 여자 분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둘을 바라봤다.
새벽 댓바람부터 형이 여긴 어쩐 일이지?
거기다 인간 여자랑 같이?
“기억이 안 지워져.”
“뭐라고?”
“그 종이 있잖아. 너희 쓰는 거. 그것 좀 줘봐.”
심기가 불편한 이안을 본 지호가 손을 공중에 넣었다 빼니 종이 한 장이 나왔다.
하얀 종이에는 알 수 없는 언어가 적혀 있었다.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잘만 지우더니.”
지호가 종이를 내밀자 이안이 아윤에게 말했다.
“여기다 손바닥 찍어. 집에 보내 줄 테니까.”
순간 아윤이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이게 뭔데요?”
계약서는 항상 신중하게 작성되고 도장을 찍어야 하는 거였다.
“임시방편.”
“네?”
“왠지 모르겠지만 너만 안 지워져. 그러니까 계약이라도 걸어두는 거지.”
“거기 뭐라고 적혀 있는 건데요?”
경계심 가득한 아윤의 태도에 둘을 가만히 보던 지호가 말했다.
“여기 적힌 말은 우리에 대해서 보거나 들은 걸 누구에게 말하거나 적지 못하게 되는 일종의 계약이에요. 손바닥을 대면 계약이 이뤄지고요. 다른 말은 없어요.”
이안이 손을 휘젓자 계약서의 말들이 한글로 바뀌었고, 가만히 읽어 본 아윤이 손바닥을 찍었다.
정말 그게 다였다.
진작 한글로 바꿔주지.
“이제 됐어요? 집에 가도 돼요?”
아윤이 고개를 들어 이안을 봤다.
뭔가 마뜩찮은 얼굴이었지만 마지못해 이안이 손을 뻗었고, 다음 순간 아윤은 어제 그 공원의 구석진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나중에 다시 찾아오지.”
그리고 바로 이안이 사라졌다.
침착한 척 행동하던 아윤이 나무 옆의 벤치에 주저앉듯 앉았다.
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정말 오늘 일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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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용왕의 아들과 사랑을 시작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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