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연애 중이신 거 맞죠?
조회 : 924 추천 : 0 글자수 : 5,662 자 2022-12-19
아윤은 다른 부서원들과 함께 산을 내려와 점심을 먹고 숙소에 도착했다.
내려 오는 내내 들었던 김과장님의 잔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방에 도착한 아윤이 흙 묻은 옷을 벗어버리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온몸 여기저기가 화끈거리고 욱신거리는데 따뜻한 물이 닿으니 좀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씻고 나와 머리를 털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같은 방을 쓰기로 한 수빈 씨는 내가 씻기 직전에야 산에서 내려왔다고 했는데.
점심 안 먹고 그냥 왔나?
수빈이라고 짐작한 아윤이 문을 벌컥 열었다.
“수빈 씨?”
“어. 강대리님.”
당연히 수빈 씨일줄 알았는데 문 앞엔 건율 씨가 서 있었다.
“건율 씨?”
“어, 저. 그게. 여기 의무실이 있더라고요. 그 근육통이나 타박상에 바르면 좀 낫다고 해서요.”
건율이 말을 더듬으며 시선을 피하더니 바르는 파스와 작은 알약 하나를 내밀었다.
“혹시 몰라서 진통제도 하나 챙겨왔어요.”
“아. 고마워요.”
평소와는 다르게 어색한 표정으로 건율이 아윤의 손에 약을 건넸다.
“그럼 이따가 뵐게요.”
짧게 인사를 건네고 건율이 가버리자 아윤은 다시 문을 닫았다.
정상에서 다시 만났을 때부터 건율의 행동이 이상했다.
나를 자꾸 챙기는 것 같았다.
혹시 나 혼자 먼저 가서 내가 미끄러졌다고 생각하나?
죄책감 그런거?
고개를 갸웃한 아윤은 손에 약을 묻혀 허벅지와 엉덩이에 발랐다.
어쨌든 고맙긴 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냄새는 좀 나는데 시원한 게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약을 바르고 손을 씻은 아윤이 침대에 누웠다.
이제야 핸드폰을 보니 이안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 괜찮아?
이안을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연인이라는 건 참 이상했다.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가 생판 남 같더니 지금은 다시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어있었다.
- 난 이제 숙소예요. 당신은 뭐해요?
아윤의 문자에 기다렸다는 듯 이안이 바로 답장을 했다.
- 일해. 서지호가 불만이 좀 쌓였거든. 내가 이틀만에 나타나서. 몸은 어때?
- 괜찮아지겠죠. 그럼 일 끝나고 연락해요.
- 많이 힘들면 데리러갈게.
- 혹 하는 제안이지만 이것도 나름 일이라서요.
- 그럼 언제 끝나는데?
- 내일 아침 조식 먹고 10시쯤 출발하면 아마 점심 쯤엔 도착할거에요.
- 데리러 갈까?
- 바쁘면 안 그래도 돼요.
- 괜찮을거야.
- 좋아요. 그럼 내일 봐요.
- 응. 근데 보고 싶다.
마지막 이안의 메시지에 아윤은 손을 멈췄다.
짧은 문장이 간지러우면서도 설렜다.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
그냥 데리러 오라고 할 뻔 했다.
내가 이렇게 쉬운 여자 였나.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아윤이 답장을 보냈다.
- 나도요.
똑똑똑.
“언니, 저 수빈이에요.”
수빈의 목소리에 아윤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문을 열자 지친 얼굴의 수빈이 곧장 들어오며 소리쳤다.
“으악. 대체 누가 단합 대회로 등산같은 걸 생각해 내는 걸까요?”
가방을 내려놓으며 등산에 대해 한참 푸념을 하던 수빈의 시선이 아윤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방 안에서 화한 향기가 났다.
“미끄러졌다고 소문이 쫙 났던데요. 괜찮아요, 언니?”
“소문까지 났어요? 좀 욱신거리는 정도예요. 다행히 데굴데굴 구르진 않았거든요.”
“정말 다행이에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니. 언니가 다칠 줄은 몰랐어요.”
수빈의 말에 아윤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요. 조심했어야 하는데.”
“4시에 강당 맞죠? 언니는 힘들면 저녁이나 먹으러 가요. 그 정도는 다들 이해해 줄텐데.”
“네. 생각해 볼게요.”
아윤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 뒤로 수빈이 씻으러 가는 걸 보고 아윤은 다시 누웠다.
확실히 몸이 정상은 아니긴 했다.
고민하던 아윤은 일단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비슷한 시각에 지호는 저게 이안이 맞는 걸까 고민중이었다.
저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걸까?
원래 연애하면 저런 데 안 해서 몰랐을까?
“우리 국장님 맞아? 누가 변신해서 그런 척 하고 있는 거 아니고?”
지호의 물음에도 이안의 손가락은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안은 이틀 만에 나타나서 쌓여있던 일들을 보고 받던 중이었다.
그런데 아마도 강아윤씨에게 문자가 온 뒤로 저 상태였다.
옅게 짓고있는 미소마저 당황스러웠다.
무표정의 대명사이던 이안 형인데.
“내가 맞냐고 묻는 거라면 맞을걸. 왜 보고 하다 말아.”
“갑자기 너무 소홀해 진 거 아니야? 듣긴 들었어?”
정말 낯선 모습이었다.
이안 형이 일하다 딴 짓 하는 모습을 내가 죽기 전에 볼 줄이야.
“당연히 들었지.”
차분히 대답한 이안은 조금 더 화면을 바라보더니 시선을 뗐다.
이제야 끝난 것 같았다.
“걱정마. 겸이한테 넘겨주기 전까지 일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게 질투 때문에 이틀이나 사라졌던 형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오해야. 생각난 게 있어서 겸사 겸사 자릴 좀 비웠던 거지.”
담백한 이안의 목소리에 지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틀 전 이안이 고상우 일을 떠넘길 때가 아직 생생한데 참 천연덕스러웠다.
“그렇다고 치자.”
“참석해야 할 장례식이 두 건, 소멸 예정인 해인이 한 명이잖아. 좀 다녀올게.”
“듣고는 있었어서 다행이네. 주말에 결혼식도 두 건 있어. 결혼계약팀 고팀장이 찾더라.”
“연락해 볼게.”
“아직 할 얘기 남았어. 일 끝나면 다시 이 쪽으로 와.”
“그래.”
이안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사라졌다.
혼자 남은 지호가 고개를 저었다.
화사하게 웃는 이안의 모습이 정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윤이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이미 오후 4시였다.
리조트 안의 강당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강 대리, 이따 밥이나 먹으러 오지. 괜찮은 거야?”
조금 늦게 아윤이 자리를 잡자 김과장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요. 아까 건율씨가 약도 챙겨다줘서 발랐더니 한결 나아졌어요.”
“건율씨가? 세심하네.”
“그러게요.”
열감이나 욱신거림이 남아있었지만 티를 내지 않으며 아윤이 대답했다.
“자, 여기 집중해 주세요. 준비된 선물이 정말 많습니다. 상품 받으신 분이 재참가는 안 됩니다. 각자 자신 있는 게임에 나와주세요.”
어느덧 무대 위에 선 신과장이 능숙히 진행을 시작했다.
아윤은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빵빵한 상품에 다들 열의가 넘쳤다.
옆에 앉은 김과장의 손에도 어느새 백화점 상품권이 들려 있었다.
“강 대리도 뭐 하나 나가봐.”
“저 틈에서 이길 자신이 없네요. 다들 정말 대단해요.”
“난 이것 때문에 단합대회 참석율이 높다고 봐. 최소 10만원 이상의 상품을 거저 얻는데. 몇 명 빼고는 다 받아갈 걸.”
웃으며 김과장이 대답했다.
아마 그 몇 명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윤이 미소지었다.
“어? 건율씨도 나가나보네.”
김과장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무대 위에 건율이 서 있었다.
오늘 하루 일일 총무팀으로 바쁘게 일 시키더니 게임은 참가하게 해줬나보다.
“자, 이번에도 쉬운 게임입니다. 주제에 맞게 글자수를 늘려 대답하면 됩니다. 한 글자부터 시작합니다. 이 순간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과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 있는 순서대로 사람들이 빠르게 대답했다.
“나.”
“언니.”
그리고 세 글자는 건율의 차례였다.
그 쉬운 문제에 건율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눈이 흔들렸다.
수많은 세 글자 이름들이 많은데 다른 이름이 하나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아까 봤던 강 대리의 얼굴이 머릿속을 채웠다.
건율이 머뭇거리는 사이 신과장이 웃으며 땡을 외쳤다.
“건율씨한테는 밝힐 수 없는 누군가가 제일 예쁜가 봅니다?”
장난스런 신과장의 말에 좌중이 소란스러워졌다.
개중에는 안 된다며 소리지르는 목소리도 들렸다.
“이 쉬운걸. 한지민, 전지현 세 글자가 얼마나 많은데.”
안타깝다는 듯 김과장이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의외로 게임을 잘 못하나?
게임 울렁증이라도 있나보네.
아윤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건율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건율의 눈이 잠시 아윤을 스쳤지만 무대에 집중하던 아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소란스런 선물 파티가 끝나자 모두는 바베큐장으로 이동했다.
각 테이블 위에는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기본 고기 말고도 한우가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난 우리 사장님이 정말 좋더라. 먹는 거에 진심이시잖아.”
김과장이 즐겁게 포장지를 뜯었다.
“제가 굽겠습니다.”
이제서야 제 부서로 돌아온 건율이 집게를 손에 쥐었다.
“아냐. 이런 고기는 내가 구워야 맛있거든.”
자부심을 뽐내며 김과장이 집게를 빼앗았다.
“술은 가져와야 되는 건가?”
유부장의 말에 아윤이 일어섰다.
“제가 가져올게요.”
“강 대리님은 앉아 계세요. 제가 가는 게 빨라요.”
“보기 좋구만. 건율씨가 다녀와.”
부장님의 말에 아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괜찮은 친구가 들어와서 좋아. 싹싹하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고기를 굽던 김과장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묘한 시선으로 아윤을 바라봤다.
그 사이에 건율이 두 손 가득 술을 들고 돌아왔다.
“자, 다들 한 잔 하지.”
유부장의 말에 사람들이 잔을 들었다.
“고생했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잔을 부딪힌 뒤로 적당히 배를 채우자 유부장이 먼저 다른 테이블로 이동했다.
친한 사람들끼리 마시기도 하고 새로 친해지기도 하면서 부서의 구분 없이 사람들이 섞였다.
“과장님은 안 가세요?”
아윤이 김과장에게 물었다.
이미 오과장님은 떠나신지 오래인데 오늘따라 김과장님이 계속 앉아있었다.
다른 부서와도 두루두루 친해서 보통 부장님과 동시에 일어나시는 분인데.
“가야지. 뭐 하나만 물어보고.”
김과장의 말에 남아있던 아윤과 건율이 김과장을 바라봤다.
“뭔데요?”
“혹시 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지?”
목소리를 낮춘 김과장의 말에 영문을 모른채로 아윤이 되물었다.
“무슨 사이요?”
“아니, 왜. 강 대리는 남자친구가 있다면서 사진도 안 보여주고, 건율씨는 오늘 하루 종일 강 대리 챙기느라 바쁘고. 아까 그런 쉬운 질문에 대답도 못하고.”
김과장의 말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아윤의 황당한 목소리와 건율의 딱 자르는 듯한 대답이 동시에 나왔다.
“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아닙니다. 전혀요.”
“진짜 아니야?”
“네.”
“근데 왜 사진 안 보여줘. 상우 씨는 보여줬었잖아. 남자친구 있는 건 맞아? 그냥 소개팅 하기 싫었던 거 아니고?”
“있어요. 정말로.”
여전히 의심스런 김과장의 눈초리에 아윤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자 김과장이 화살을 건율에게로 돌렸다.
“그럼 건율씨는 왜 그렇게 강대리를 신경 쓴 거야?”
잠시 당황했던 건율이 평소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오해하실 줄은 몰랐네요. 아까 저랑 같이 올라가시다가 강대리님만 혼자 가시게 뒀거든요. 괜히 다치신 게 저 때문인 거 같아서요. ”
둘의 부인에도 김과장은 한참을 의심쩍다는 듯 보았다.
“아니면 됐어. 부서 내 사내연애는 아무래도 불편해서.”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되는데요.”
“아니, 건율씨도 좋고 강 대리도 좋은데 연애라도 하면 곤란할 것 같았거든. 미안. 내가 오해했나봐. 자, 짠이나 하자.”
대충 얼버무리는 김과장의 말에 애매한 표정으로 건율과 아윤이 잔을 부딪혔다.
“그럼 난 가볼게.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잔과 젓가락을 든 김과장이 웃으며 자리를 떴다.
이상한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김과장님은 정말 왜 그런 생각을.
속으로 혀를 차며 아윤이 말했다.
“내가 잘못해서 미끄러진거에요. 딴 생각하다가요. 어쨌든 오늘 고마웠어요.”
그런 아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건율이 조용히 물었다.
김과장 말대로 그냥 있는 척 하는 거라면 어떨까.
아주 얇은 지푸라기였지만 건율은 잡아보고 싶었다.
“강대리님. 연애 중이신 거 맞죠?”
내려 오는 내내 들었던 김과장님의 잔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방에 도착한 아윤이 흙 묻은 옷을 벗어버리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온몸 여기저기가 화끈거리고 욱신거리는데 따뜻한 물이 닿으니 좀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씻고 나와 머리를 털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같은 방을 쓰기로 한 수빈 씨는 내가 씻기 직전에야 산에서 내려왔다고 했는데.
점심 안 먹고 그냥 왔나?
수빈이라고 짐작한 아윤이 문을 벌컥 열었다.
“수빈 씨?”
“어. 강대리님.”
당연히 수빈 씨일줄 알았는데 문 앞엔 건율 씨가 서 있었다.
“건율 씨?”
“어, 저. 그게. 여기 의무실이 있더라고요. 그 근육통이나 타박상에 바르면 좀 낫다고 해서요.”
건율이 말을 더듬으며 시선을 피하더니 바르는 파스와 작은 알약 하나를 내밀었다.
“혹시 몰라서 진통제도 하나 챙겨왔어요.”
“아. 고마워요.”
평소와는 다르게 어색한 표정으로 건율이 아윤의 손에 약을 건넸다.
“그럼 이따가 뵐게요.”
짧게 인사를 건네고 건율이 가버리자 아윤은 다시 문을 닫았다.
정상에서 다시 만났을 때부터 건율의 행동이 이상했다.
나를 자꾸 챙기는 것 같았다.
혹시 나 혼자 먼저 가서 내가 미끄러졌다고 생각하나?
죄책감 그런거?
고개를 갸웃한 아윤은 손에 약을 묻혀 허벅지와 엉덩이에 발랐다.
어쨌든 고맙긴 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냄새는 좀 나는데 시원한 게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약을 바르고 손을 씻은 아윤이 침대에 누웠다.
이제야 핸드폰을 보니 이안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 괜찮아?
이안을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연인이라는 건 참 이상했다.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가 생판 남 같더니 지금은 다시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어있었다.
- 난 이제 숙소예요. 당신은 뭐해요?
아윤의 문자에 기다렸다는 듯 이안이 바로 답장을 했다.
- 일해. 서지호가 불만이 좀 쌓였거든. 내가 이틀만에 나타나서. 몸은 어때?
- 괜찮아지겠죠. 그럼 일 끝나고 연락해요.
- 많이 힘들면 데리러갈게.
- 혹 하는 제안이지만 이것도 나름 일이라서요.
- 그럼 언제 끝나는데?
- 내일 아침 조식 먹고 10시쯤 출발하면 아마 점심 쯤엔 도착할거에요.
- 데리러 갈까?
- 바쁘면 안 그래도 돼요.
- 괜찮을거야.
- 좋아요. 그럼 내일 봐요.
- 응. 근데 보고 싶다.
마지막 이안의 메시지에 아윤은 손을 멈췄다.
짧은 문장이 간지러우면서도 설렜다.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
그냥 데리러 오라고 할 뻔 했다.
내가 이렇게 쉬운 여자 였나.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아윤이 답장을 보냈다.
- 나도요.
똑똑똑.
“언니, 저 수빈이에요.”
수빈의 목소리에 아윤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문을 열자 지친 얼굴의 수빈이 곧장 들어오며 소리쳤다.
“으악. 대체 누가 단합 대회로 등산같은 걸 생각해 내는 걸까요?”
가방을 내려놓으며 등산에 대해 한참 푸념을 하던 수빈의 시선이 아윤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방 안에서 화한 향기가 났다.
“미끄러졌다고 소문이 쫙 났던데요. 괜찮아요, 언니?”
“소문까지 났어요? 좀 욱신거리는 정도예요. 다행히 데굴데굴 구르진 않았거든요.”
“정말 다행이에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니. 언니가 다칠 줄은 몰랐어요.”
수빈의 말에 아윤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요. 조심했어야 하는데.”
“4시에 강당 맞죠? 언니는 힘들면 저녁이나 먹으러 가요. 그 정도는 다들 이해해 줄텐데.”
“네. 생각해 볼게요.”
아윤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 뒤로 수빈이 씻으러 가는 걸 보고 아윤은 다시 누웠다.
확실히 몸이 정상은 아니긴 했다.
고민하던 아윤은 일단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비슷한 시각에 지호는 저게 이안이 맞는 걸까 고민중이었다.
저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걸까?
원래 연애하면 저런 데 안 해서 몰랐을까?
“우리 국장님 맞아? 누가 변신해서 그런 척 하고 있는 거 아니고?”
지호의 물음에도 이안의 손가락은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안은 이틀 만에 나타나서 쌓여있던 일들을 보고 받던 중이었다.
그런데 아마도 강아윤씨에게 문자가 온 뒤로 저 상태였다.
옅게 짓고있는 미소마저 당황스러웠다.
무표정의 대명사이던 이안 형인데.
“내가 맞냐고 묻는 거라면 맞을걸. 왜 보고 하다 말아.”
“갑자기 너무 소홀해 진 거 아니야? 듣긴 들었어?”
정말 낯선 모습이었다.
이안 형이 일하다 딴 짓 하는 모습을 내가 죽기 전에 볼 줄이야.
“당연히 들었지.”
차분히 대답한 이안은 조금 더 화면을 바라보더니 시선을 뗐다.
이제야 끝난 것 같았다.
“걱정마. 겸이한테 넘겨주기 전까지 일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게 질투 때문에 이틀이나 사라졌던 형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오해야. 생각난 게 있어서 겸사 겸사 자릴 좀 비웠던 거지.”
담백한 이안의 목소리에 지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틀 전 이안이 고상우 일을 떠넘길 때가 아직 생생한데 참 천연덕스러웠다.
“그렇다고 치자.”
“참석해야 할 장례식이 두 건, 소멸 예정인 해인이 한 명이잖아. 좀 다녀올게.”
“듣고는 있었어서 다행이네. 주말에 결혼식도 두 건 있어. 결혼계약팀 고팀장이 찾더라.”
“연락해 볼게.”
“아직 할 얘기 남았어. 일 끝나면 다시 이 쪽으로 와.”
“그래.”
이안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사라졌다.
혼자 남은 지호가 고개를 저었다.
화사하게 웃는 이안의 모습이 정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윤이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이미 오후 4시였다.
리조트 안의 강당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강 대리, 이따 밥이나 먹으러 오지. 괜찮은 거야?”
조금 늦게 아윤이 자리를 잡자 김과장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요. 아까 건율씨가 약도 챙겨다줘서 발랐더니 한결 나아졌어요.”
“건율씨가? 세심하네.”
“그러게요.”
열감이나 욱신거림이 남아있었지만 티를 내지 않으며 아윤이 대답했다.
“자, 여기 집중해 주세요. 준비된 선물이 정말 많습니다. 상품 받으신 분이 재참가는 안 됩니다. 각자 자신 있는 게임에 나와주세요.”
어느덧 무대 위에 선 신과장이 능숙히 진행을 시작했다.
아윤은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빵빵한 상품에 다들 열의가 넘쳤다.
옆에 앉은 김과장의 손에도 어느새 백화점 상품권이 들려 있었다.
“강 대리도 뭐 하나 나가봐.”
“저 틈에서 이길 자신이 없네요. 다들 정말 대단해요.”
“난 이것 때문에 단합대회 참석율이 높다고 봐. 최소 10만원 이상의 상품을 거저 얻는데. 몇 명 빼고는 다 받아갈 걸.”
웃으며 김과장이 대답했다.
아마 그 몇 명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윤이 미소지었다.
“어? 건율씨도 나가나보네.”
김과장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무대 위에 건율이 서 있었다.
오늘 하루 일일 총무팀으로 바쁘게 일 시키더니 게임은 참가하게 해줬나보다.
“자, 이번에도 쉬운 게임입니다. 주제에 맞게 글자수를 늘려 대답하면 됩니다. 한 글자부터 시작합니다. 이 순간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과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 있는 순서대로 사람들이 빠르게 대답했다.
“나.”
“언니.”
그리고 세 글자는 건율의 차례였다.
그 쉬운 문제에 건율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눈이 흔들렸다.
수많은 세 글자 이름들이 많은데 다른 이름이 하나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아까 봤던 강 대리의 얼굴이 머릿속을 채웠다.
건율이 머뭇거리는 사이 신과장이 웃으며 땡을 외쳤다.
“건율씨한테는 밝힐 수 없는 누군가가 제일 예쁜가 봅니다?”
장난스런 신과장의 말에 좌중이 소란스러워졌다.
개중에는 안 된다며 소리지르는 목소리도 들렸다.
“이 쉬운걸. 한지민, 전지현 세 글자가 얼마나 많은데.”
안타깝다는 듯 김과장이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의외로 게임을 잘 못하나?
게임 울렁증이라도 있나보네.
아윤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건율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건율의 눈이 잠시 아윤을 스쳤지만 무대에 집중하던 아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소란스런 선물 파티가 끝나자 모두는 바베큐장으로 이동했다.
각 테이블 위에는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기본 고기 말고도 한우가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난 우리 사장님이 정말 좋더라. 먹는 거에 진심이시잖아.”
김과장이 즐겁게 포장지를 뜯었다.
“제가 굽겠습니다.”
이제서야 제 부서로 돌아온 건율이 집게를 손에 쥐었다.
“아냐. 이런 고기는 내가 구워야 맛있거든.”
자부심을 뽐내며 김과장이 집게를 빼앗았다.
“술은 가져와야 되는 건가?”
유부장의 말에 아윤이 일어섰다.
“제가 가져올게요.”
“강 대리님은 앉아 계세요. 제가 가는 게 빨라요.”
“보기 좋구만. 건율씨가 다녀와.”
부장님의 말에 아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괜찮은 친구가 들어와서 좋아. 싹싹하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고기를 굽던 김과장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묘한 시선으로 아윤을 바라봤다.
그 사이에 건율이 두 손 가득 술을 들고 돌아왔다.
“자, 다들 한 잔 하지.”
유부장의 말에 사람들이 잔을 들었다.
“고생했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잔을 부딪힌 뒤로 적당히 배를 채우자 유부장이 먼저 다른 테이블로 이동했다.
친한 사람들끼리 마시기도 하고 새로 친해지기도 하면서 부서의 구분 없이 사람들이 섞였다.
“과장님은 안 가세요?”
아윤이 김과장에게 물었다.
이미 오과장님은 떠나신지 오래인데 오늘따라 김과장님이 계속 앉아있었다.
다른 부서와도 두루두루 친해서 보통 부장님과 동시에 일어나시는 분인데.
“가야지. 뭐 하나만 물어보고.”
김과장의 말에 남아있던 아윤과 건율이 김과장을 바라봤다.
“뭔데요?”
“혹시 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지?”
목소리를 낮춘 김과장의 말에 영문을 모른채로 아윤이 되물었다.
“무슨 사이요?”
“아니, 왜. 강 대리는 남자친구가 있다면서 사진도 안 보여주고, 건율씨는 오늘 하루 종일 강 대리 챙기느라 바쁘고. 아까 그런 쉬운 질문에 대답도 못하고.”
김과장의 말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아윤의 황당한 목소리와 건율의 딱 자르는 듯한 대답이 동시에 나왔다.
“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아닙니다. 전혀요.”
“진짜 아니야?”
“네.”
“근데 왜 사진 안 보여줘. 상우 씨는 보여줬었잖아. 남자친구 있는 건 맞아? 그냥 소개팅 하기 싫었던 거 아니고?”
“있어요. 정말로.”
여전히 의심스런 김과장의 눈초리에 아윤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자 김과장이 화살을 건율에게로 돌렸다.
“그럼 건율씨는 왜 그렇게 강대리를 신경 쓴 거야?”
잠시 당황했던 건율이 평소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오해하실 줄은 몰랐네요. 아까 저랑 같이 올라가시다가 강대리님만 혼자 가시게 뒀거든요. 괜히 다치신 게 저 때문인 거 같아서요. ”
둘의 부인에도 김과장은 한참을 의심쩍다는 듯 보았다.
“아니면 됐어. 부서 내 사내연애는 아무래도 불편해서.”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되는데요.”
“아니, 건율씨도 좋고 강 대리도 좋은데 연애라도 하면 곤란할 것 같았거든. 미안. 내가 오해했나봐. 자, 짠이나 하자.”
대충 얼버무리는 김과장의 말에 애매한 표정으로 건율과 아윤이 잔을 부딪혔다.
“그럼 난 가볼게.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잔과 젓가락을 든 김과장이 웃으며 자리를 떴다.
이상한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김과장님은 정말 왜 그런 생각을.
속으로 혀를 차며 아윤이 말했다.
“내가 잘못해서 미끄러진거에요. 딴 생각하다가요. 어쨌든 오늘 고마웠어요.”
그런 아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건율이 조용히 물었다.
김과장 말대로 그냥 있는 척 하는 거라면 어떨까.
아주 얇은 지푸라기였지만 건율은 잡아보고 싶었다.
“강대리님. 연애 중이신 거 맞죠?”
작가의 말
등록된 작가의 말이 없습니다.
닫기용왕의 아들과 사랑을 시작할 때
42.42. 내 생각 자주 하더라.조회 : 1,00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55 41.41. 사라진 구슬조회 : 90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00 40.40. 누구하나 쉽지 않네.조회 : 98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21 39.39. 이리와요.조회 : 94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16 38.38. 내가 좋았으면 됐죠.조회 : 91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01 37.37. 솔직하게 말한다며조회 : 78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69 36.36. 저도 싫어해요, 그런 거.조회 : 93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80 35.35화. 연애 중이신 거 맞죠?조회 : 92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62 34.34화. 미안해.조회 : 20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75 33.33화. 질투라는 감정조회 : 6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580 32.32화. 언제 이렇게 빠져버렸을까.조회 : 9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90 31.31. 내가 왜 싫어해요?조회 : 10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32 30.30. 힘내.조회 : 13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74 29.29. 위로는 많이 했으니까.조회 : 10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50 28.28. 왜 그랬어?조회 : 1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31 27.27. 서리나씨랑 친구였다며?조회 : 2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37 26.26. 여자친구 엄청 예뻐하네.조회 : 29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51 25.25. 형은 아니지?조회 : 9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41 24.24. 너무 귀엽잖아요.조회 : 11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36 23.23. 이안 형 어디가 좋아요?조회 : 12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09 22.22. 형수님이 궁금하네.조회 : 13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91 21.21. 싫은데. 가야돼?조회 : 9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44 20.20화. 보고싶어.조회 : 12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36 19.19화. 곁에 있어준다면 좋을텐데.조회 : 8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24 18.18화. 자꾸 이렇게 좋아지면 큰일인데.조회 : 22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57 17.17화. 혼란스러운 아침조회 : 9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05 16.16화. 욕심조회 : 18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48 15.15화.끌림의 이유조회 : 13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72 14.14화. 이유가 뭘까?조회 : 9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26 13.13화. 입맞춤조회 : 14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66 12.12화. 고백조회 : 32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605 11.11화. 놓아줄 수 있을까?조회 : 15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70 10.10. 마음을 깨달았을 때조회 : 22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69 9.9화. 왜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걸까?조회 : 20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07 8.8화. 영화관에서조회 : 18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80 7.7화. 이안과 아윤조회 : 22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786 6.6화. 그의 집에서조회 : 27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86 5.5화. 해인의 구슬이 깨졌을 때조회 : 19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86 4.4화. 각자의 묘한 기분조회 : 16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25 3.3화. 바닷가에서조회 : 22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21 2.2화. 정체가 뭔지 물어봐도 돼요?조회 : 37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91 1.1. 당신, 운이 좋네.조회 : 1,12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