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저도 싫어해요, 그런 거.
조회 : 937 추천 : 0 글자수 : 5,580 자 2022-12-20
건율은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강대리의 시선을 느꼈다.
요새 자꾸 자신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건 이렇게나 가까운데 닿을 수는 없는 강대리였다.
낮에 보는 건 물론이고 꿈에서까지 나오니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그래서 다시 묻지 말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입에서 꺼내고 말았다.
정말 지금 혼자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의 물음에 대한 강대리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네.”
“역시. 대리님이 남자친구가 없는 게 이상하죠. 왜 김과장님은 그러시는 걸까요.”
건율이 최대한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애인이 있다면 티가 나면 안 되는 거였다.
자신의 생각이 강대리에게로 자꾸 흘러가 버린다는 것도,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김과장님 이론에 따르면 제가 건율씨를 만나고 있는 거고, 그러러면 없어야 되니까 그렇겠죠. 눈치가 빠른 분이신데 가끔 틀릴 때가 있어요.”
강대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순간 그 엷게 휘어진 눈가와 맑은 눈동자가 건율의 눈에 가득 찼다.
이러면 곤란한데.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강대리가 말했다.
“음. 난 이제 생물팀 쪽에 가보려고요. 같이 다닐래요? 모르는 분들 많을텐데.”
이런 상황에도 챙겨주려는 강대리가 고마웠지만 건율은 그러지 않기로했다.
이렇게 가까이 있다가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몰랐다.
“저는 총무팀 쪽에 인사 좀 하고요. 오늘 그래도 일일 총무팀이었어서요.”
“그렇게 해요.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싱긋 웃은 아윤이 일어서자 뒤따라 건율도 자리를 옮겼다.
이리저리 섞여 마시고 웃고 떠들다보니 시간이 늦었다.
아윤은 슬슬 들어갈까 고민하고 있었다.
화학팀 오과장님과 수빈씨와 셋이 있는데 아무래도 수빈씨가 취한 것 같았다.
잠들어버리면 데려가기 힘든데.
“수빈씨, 이제 들어갈까요?”
“좀 더 놀고 싶은데. 언니 피곤하세요?”
수빈이 살짝 풀린 눈으로 아윤을 바라봤다.
“전 괜찮은데, 수빈 씨 많이 마신 것 같아서요.”
“저 안 취했어요.”
그 애교섞인 눈웃음에 아윤도 작게 웃었다.
보통 저러다 갑자기 잠이 들었고 자면 정말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게 수빈씨였다.
오늘은 내가 업어주기도 힘든데.
어쩌지 생각하던 중 얼큰하게 취한 김과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과장.”
김과장님의 얼굴을 보니 척 봐도 주량 이상 먹은 게 티가 났다.
설마 또 아까 얘길 꺼내시진 않겠지?
아윤은 내심 불안해졌다.
취하기 전이라면 괜찮은데 취한 김과장님은 말이 달랐다.
거기에 친한 오과장님까지 있다면.
“김과장,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왔어. 앉아, 앉아.”
“강대리랑 수빈씨도 여기 있었네. 건율씨도 곧 올거야. 좀 전에 유부장님 방에 모셔다 드리고 온다고 했거든.”
“그래? 건율씨 아까 게임할 때 보니까 사람이 귀엽드만.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나봐. 오면 물어봐야지.”
“그런 것 같지? 나 아까 괜히 오해했잖아. 강대리랑 건율씨. 강대리, 미안해. 진짜 난 그런 줄 알았거든.”
결국 김과장님 입에서 자연스레 그 얘기가 나왔다.
아윤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과장이 아윤에게 궁금한 눈빛을 보냈다.
“김과장이 또 실수했구만. 뭔데 그래?”
“오늘 저 산에서 미끄러졌다고 건율씨가 많이 챙겨줬거든요. 그거 보고 오해하셔서요. 이제 그럴 일 없을테니 그런 생각 접어두셔도 돼요, 과장님.”
“아니. 건율씨가 자꾸 우리 강대리 보는 눈빛이 예전에 그 박부장님이 몰래 사내연애 하실 때 그 눈빛 같았어서 그랬지. 내가 미안해, 정말.”
아윤은 정말 김과장의 입을 막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저 정도로 취한 상태면 내일 분명 기억도 못 할 거였다.
근데 저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
마치 건율씨가 날 좋아하는 것처럼.
그 때 거의 졸고 있던 수빈이 끼어들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에요? 아윤 언니랑 건율씨요? 에이, 말도 안 돼요. 아윤 언니도 남자친구 있고 건율씨도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거든요.”
그 말에 두 과장님의 눈이 수빈에게로 향했다.
“그래? 누군데?”
“그건 모르죠. 회사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요. 건율씨 잘생겼잖아요. 성격도 좋고. 에휴, 저를 좋아하면 좋을텐데. 왜 제가 아닐까요. 매력이 없나.”
건율의 얘기를 하던 수빈이 갑자기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화제가 바뀐 건 좋은데 저런 말을 해도 괜찮은 건가 걱정이 된 아윤이 말을 막았다.
“수빈씨 많이 취했나봐요. 이제 그만 들어가요.”
“안 취했어요. 어차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걸요.”
수빈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수빈을 달래듯 오과장이 웃으며 말했다.
“아냐. 우리 수빈씨가 귀엽고 솔직하고 얼마나 매력 있는데.”
“그럼. 수빈씨 소개팅 할래? 세 살 오빠인데. 어때?”
김과장님이 동조하며 수빈에게도 소개팅을 권유했다.
“괜찮아요. 아직은 포기 안 했거든요.”
아윤은 반쯤 감긴 눈으로도 말하고 있는 수빈의 모습이 어이없으면서도 귀여웠다.
사내 연애를 하겠다고 저렇게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는 솔직함이라니.
“그래, 그래. 응원할게.”
그 모습이 웃긴지 오과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에. 감사합니다.”
수빈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하더니 테이블에 얼굴을 묻었다.
“수빈 씨?”
쎄한 느낌에 아윤이 몸을 흔들었지만 수빈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수빈 씨 또 잠들었나보네.”
“그러게요.”
“아윤씨랑 같은 방 쓰지? 부탁해. 건율씨 오면 도와주라고 할게.”
오과장의 말에 아윤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보다는 몸이 불편한 게 나을 것 같았다.
또 어딘가에서 그런 오해를 할지도 모르니까.
“제가 업을 수 있어요. 수빈 씨 가벼우니까요.”
아윤이 수빈을 업으려고 일어났다.
그러자 오과장이 덩달아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으이구. 됐어. 또 김과장 같은 사람 있을까봐 그래? 오늘 대차게 미끄러졌다며. 차라리 내가 할게, 내가. 김과장은 애들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는.”
오과장의 힐난하는 말에 김과장의 둥근 몸이 움찔했다.
“아니, 그게.”
“됐어. 담부터 그러지 마.”
“무슨 일이세요?”
묘하게 냉기가 흐르는 분위기에 다가온 건율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건율씨 왔어? 아니 수빈씨가 잠들었는데 강대리가 업는대서. 오과장이 업고 간대.”
김과장의 말에 건율의 눈이 아윤을 보고 수빈을 지나 오과장에게 향했다.
“아닙니다. 제가 업을게요.”
그리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걸어간 건율은 수빈을 등에 업었다.
“방에 데려다 드리면 되죠? 바로 다시 나오겠습니다.”
싱그럽게 건율이 웃자 오과장이 멋쩍게 대답했다.
“내가 해도 되는데. 미안, 강대리.”
“아니에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윤이 고마운 마음에 살짝 미소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부탁해.”
“네.”
건율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윤도 따라서 객실 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엘레베이터를 탄 건율이 아윤에게 물었다.
“아. 별 거 아니에요. 아까 김과장님이 오해하신 얘기를 다시 하셔서요. 오과장님이 좀 뭐라고 하셨어요.”
“아.”
“건율씨는 괜찮아요? 여기 저기서 많이 마시는 것 같던데.”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아윤과 짧은 대화를 주고 받으며 건율은 엘레베이터 문을 보고 있었다.
사실 건율은 괜찮지 않았다.
자꾸 강대리에게로 가려는 눈을 막느라 바쁘고 심장이 쿵쿵 울려 와서 힘이 들었다.
알코올 때문인지 오늘은 더 그랬다.
그래도 강대리가 업고 가는 건 힘들 테니까.
그 상황에 오과장님이 업게 두는 것도 이상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같이 있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쪽이에요.”
어느덧 엘레베이터가 멈추고 강대리가 한 객실을 찾아 키를 꽂았다.
침대 위에 수빈을 조심히 내려놓자 강대리가 꼼꼼히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말했다.
“고생했어요, 건율씨. 그럼 내일 봐요.”
돌아선 강대리의 눈이 투명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객실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 서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오똑한 코와 작고 부드러워보이는 입술에 저도 모르게 눈이 갔다.
어느 날의 꿈에서인가 품안에 쏙 들어오던 강아윤 대리가 떠올랐다.
“건율씨? 왜 그래요?”
건율이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자 부담스러웠던 아윤이 물었다.
바로 대답이 없던 건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강대리님.”
“네?”
“제가 정말 그런 거 싫어하거든요.”
“뭐를요?”
“다른 사람 걸 탐내는 거요.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요. 그런데요. 자꾸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면 어떻게 하죠.”
건율은 질문은 정말 뜬금없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건율의 얼굴이 어쩐지 어두워서 아윤은 멈칫했다.
“내 생각을 묻는 거에요?”
아윤의 말에 건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를 알 수 없어 차분히 건율을 보던 아윤이 이내 곧게 눈을 마주쳤다.
“저도 싫어해요. 그런 거.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 생각이 그렇다고요. 건율씨 사생활까지 참견할 생각은 없어요.”
담담한 아윤의 대답이 건율의 심장을 쑤셨다.
아예 건율에게 관심조차 없다는 말이었으니까.
건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쩐지 상처받은 듯한 그 눈빛이 아윤은 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차가워도 어쩔 수 없었다.
오늘 건율은 확실히 이상했다.
오해일지라도 좀 전의 질문은 정말 날 좋아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주 만약 그렇다면 선을 확실히 그어 두는 게 나았다.
착각이길 바랐지만.
고요한 침묵이 지나자 건율이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그렇죠? 그럼 쉬세요.”
“네.”
짧은 대답에 건율이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아윤은 간단히 씻고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미끄러졌어도 이안을 봐서 좋았는데.
마무리가 영 찝찝했다.
심란한 마음으로 아윤은 눈을 감았다.
몇 가지 일들을 마무리 지은 이안은 다시 지호에게로 돌아왔다.
이제야 좀 차분해진건지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안이 소파에 자리 잡자 지호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용궁사람인 것 같아. 범인.”
“왜?”
“물론 고상우를 내보냈던 관리팀과 출입팀 해인이 일주일 내로 지상에 나왔던 기록이 있긴 해. 근데 용궁 내부의 사람이라면 어느 때든 가능했을 거야.”
“굳이 내부의 사람이 아니어도 그럴 수는 있지.”
“그렇지. 근데 왜 고상우를 내보낸 걸까? 무슨 목적으로?”
지호의 질문에 이안은 머릿속에 그 날을 떠올렸다.
차분하게 강아윤에게 사과를 하고 자신에게 대꾸를 하던 고상우의 모습이.
조종을 당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냥 고상우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걸 보고 난 화를 냈고.
가라앉은 검은 눈이 지호에게 향했다.
“난 그게 형 때문인 것 같아. 고상우를 이용해서 형을 자극하려고.”
“내가 언제 어디로 강아윤을 보러 갈 줄 알고?”
이안의 차분한 반문에 지호가 대답했다.
“그래서 생각했어. 형을 꽤 잘 알고, 우리의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닐까.”
“내가 우연히 본 걸 수도 있잖아.”
“그렇지.”
“근데 왜 나를 화나게 만들지?”
“그걸 모르겠어. 지금까지와 패턴이 다르니까. 다른 일을 벌이려고 그러는 걸까? 지금은 일단 우리가 막고 있기는 하니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네.”
“나도.”
이안이 잠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지난 이틀 간, 서지호는 정말 내가 미쳐 있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제로 바쁘게 일하긴 했다.
단지 평소의 일과는 다른 일이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두에게 비밀로 했을 뿐.
지금 이렇게 기다리는 중에도 느긋하지는 않았다.
걸려들어야 하는데.
이럴 시간에 좀 더 작업을 해두는 게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이안은 드디어 기다리던 반응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안의 몸이 사라졌다.
요새 자꾸 자신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건 이렇게나 가까운데 닿을 수는 없는 강대리였다.
낮에 보는 건 물론이고 꿈에서까지 나오니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그래서 다시 묻지 말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입에서 꺼내고 말았다.
정말 지금 혼자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의 물음에 대한 강대리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네.”
“역시. 대리님이 남자친구가 없는 게 이상하죠. 왜 김과장님은 그러시는 걸까요.”
건율이 최대한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애인이 있다면 티가 나면 안 되는 거였다.
자신의 생각이 강대리에게로 자꾸 흘러가 버린다는 것도,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김과장님 이론에 따르면 제가 건율씨를 만나고 있는 거고, 그러러면 없어야 되니까 그렇겠죠. 눈치가 빠른 분이신데 가끔 틀릴 때가 있어요.”
강대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순간 그 엷게 휘어진 눈가와 맑은 눈동자가 건율의 눈에 가득 찼다.
이러면 곤란한데.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강대리가 말했다.
“음. 난 이제 생물팀 쪽에 가보려고요. 같이 다닐래요? 모르는 분들 많을텐데.”
이런 상황에도 챙겨주려는 강대리가 고마웠지만 건율은 그러지 않기로했다.
이렇게 가까이 있다가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몰랐다.
“저는 총무팀 쪽에 인사 좀 하고요. 오늘 그래도 일일 총무팀이었어서요.”
“그렇게 해요.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싱긋 웃은 아윤이 일어서자 뒤따라 건율도 자리를 옮겼다.
이리저리 섞여 마시고 웃고 떠들다보니 시간이 늦었다.
아윤은 슬슬 들어갈까 고민하고 있었다.
화학팀 오과장님과 수빈씨와 셋이 있는데 아무래도 수빈씨가 취한 것 같았다.
잠들어버리면 데려가기 힘든데.
“수빈씨, 이제 들어갈까요?”
“좀 더 놀고 싶은데. 언니 피곤하세요?”
수빈이 살짝 풀린 눈으로 아윤을 바라봤다.
“전 괜찮은데, 수빈 씨 많이 마신 것 같아서요.”
“저 안 취했어요.”
그 애교섞인 눈웃음에 아윤도 작게 웃었다.
보통 저러다 갑자기 잠이 들었고 자면 정말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게 수빈씨였다.
오늘은 내가 업어주기도 힘든데.
어쩌지 생각하던 중 얼큰하게 취한 김과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과장.”
김과장님의 얼굴을 보니 척 봐도 주량 이상 먹은 게 티가 났다.
설마 또 아까 얘길 꺼내시진 않겠지?
아윤은 내심 불안해졌다.
취하기 전이라면 괜찮은데 취한 김과장님은 말이 달랐다.
거기에 친한 오과장님까지 있다면.
“김과장,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왔어. 앉아, 앉아.”
“강대리랑 수빈씨도 여기 있었네. 건율씨도 곧 올거야. 좀 전에 유부장님 방에 모셔다 드리고 온다고 했거든.”
“그래? 건율씨 아까 게임할 때 보니까 사람이 귀엽드만.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나봐. 오면 물어봐야지.”
“그런 것 같지? 나 아까 괜히 오해했잖아. 강대리랑 건율씨. 강대리, 미안해. 진짜 난 그런 줄 알았거든.”
결국 김과장님 입에서 자연스레 그 얘기가 나왔다.
아윤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과장이 아윤에게 궁금한 눈빛을 보냈다.
“김과장이 또 실수했구만. 뭔데 그래?”
“오늘 저 산에서 미끄러졌다고 건율씨가 많이 챙겨줬거든요. 그거 보고 오해하셔서요. 이제 그럴 일 없을테니 그런 생각 접어두셔도 돼요, 과장님.”
“아니. 건율씨가 자꾸 우리 강대리 보는 눈빛이 예전에 그 박부장님이 몰래 사내연애 하실 때 그 눈빛 같았어서 그랬지. 내가 미안해, 정말.”
아윤은 정말 김과장의 입을 막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저 정도로 취한 상태면 내일 분명 기억도 못 할 거였다.
근데 저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
마치 건율씨가 날 좋아하는 것처럼.
그 때 거의 졸고 있던 수빈이 끼어들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에요? 아윤 언니랑 건율씨요? 에이, 말도 안 돼요. 아윤 언니도 남자친구 있고 건율씨도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거든요.”
그 말에 두 과장님의 눈이 수빈에게로 향했다.
“그래? 누군데?”
“그건 모르죠. 회사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요. 건율씨 잘생겼잖아요. 성격도 좋고. 에휴, 저를 좋아하면 좋을텐데. 왜 제가 아닐까요. 매력이 없나.”
건율의 얘기를 하던 수빈이 갑자기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화제가 바뀐 건 좋은데 저런 말을 해도 괜찮은 건가 걱정이 된 아윤이 말을 막았다.
“수빈씨 많이 취했나봐요. 이제 그만 들어가요.”
“안 취했어요. 어차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걸요.”
수빈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수빈을 달래듯 오과장이 웃으며 말했다.
“아냐. 우리 수빈씨가 귀엽고 솔직하고 얼마나 매력 있는데.”
“그럼. 수빈씨 소개팅 할래? 세 살 오빠인데. 어때?”
김과장님이 동조하며 수빈에게도 소개팅을 권유했다.
“괜찮아요. 아직은 포기 안 했거든요.”
아윤은 반쯤 감긴 눈으로도 말하고 있는 수빈의 모습이 어이없으면서도 귀여웠다.
사내 연애를 하겠다고 저렇게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는 솔직함이라니.
“그래, 그래. 응원할게.”
그 모습이 웃긴지 오과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에. 감사합니다.”
수빈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하더니 테이블에 얼굴을 묻었다.
“수빈 씨?”
쎄한 느낌에 아윤이 몸을 흔들었지만 수빈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수빈 씨 또 잠들었나보네.”
“그러게요.”
“아윤씨랑 같은 방 쓰지? 부탁해. 건율씨 오면 도와주라고 할게.”
오과장의 말에 아윤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보다는 몸이 불편한 게 나을 것 같았다.
또 어딘가에서 그런 오해를 할지도 모르니까.
“제가 업을 수 있어요. 수빈 씨 가벼우니까요.”
아윤이 수빈을 업으려고 일어났다.
그러자 오과장이 덩달아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으이구. 됐어. 또 김과장 같은 사람 있을까봐 그래? 오늘 대차게 미끄러졌다며. 차라리 내가 할게, 내가. 김과장은 애들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는.”
오과장의 힐난하는 말에 김과장의 둥근 몸이 움찔했다.
“아니, 그게.”
“됐어. 담부터 그러지 마.”
“무슨 일이세요?”
묘하게 냉기가 흐르는 분위기에 다가온 건율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건율씨 왔어? 아니 수빈씨가 잠들었는데 강대리가 업는대서. 오과장이 업고 간대.”
김과장의 말에 건율의 눈이 아윤을 보고 수빈을 지나 오과장에게 향했다.
“아닙니다. 제가 업을게요.”
그리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걸어간 건율은 수빈을 등에 업었다.
“방에 데려다 드리면 되죠? 바로 다시 나오겠습니다.”
싱그럽게 건율이 웃자 오과장이 멋쩍게 대답했다.
“내가 해도 되는데. 미안, 강대리.”
“아니에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윤이 고마운 마음에 살짝 미소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부탁해.”
“네.”
건율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윤도 따라서 객실 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엘레베이터를 탄 건율이 아윤에게 물었다.
“아. 별 거 아니에요. 아까 김과장님이 오해하신 얘기를 다시 하셔서요. 오과장님이 좀 뭐라고 하셨어요.”
“아.”
“건율씨는 괜찮아요? 여기 저기서 많이 마시는 것 같던데.”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아윤과 짧은 대화를 주고 받으며 건율은 엘레베이터 문을 보고 있었다.
사실 건율은 괜찮지 않았다.
자꾸 강대리에게로 가려는 눈을 막느라 바쁘고 심장이 쿵쿵 울려 와서 힘이 들었다.
알코올 때문인지 오늘은 더 그랬다.
그래도 강대리가 업고 가는 건 힘들 테니까.
그 상황에 오과장님이 업게 두는 것도 이상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같이 있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쪽이에요.”
어느덧 엘레베이터가 멈추고 강대리가 한 객실을 찾아 키를 꽂았다.
침대 위에 수빈을 조심히 내려놓자 강대리가 꼼꼼히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말했다.
“고생했어요, 건율씨. 그럼 내일 봐요.”
돌아선 강대리의 눈이 투명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객실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 서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오똑한 코와 작고 부드러워보이는 입술에 저도 모르게 눈이 갔다.
어느 날의 꿈에서인가 품안에 쏙 들어오던 강아윤 대리가 떠올랐다.
“건율씨? 왜 그래요?”
건율이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자 부담스러웠던 아윤이 물었다.
바로 대답이 없던 건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강대리님.”
“네?”
“제가 정말 그런 거 싫어하거든요.”
“뭐를요?”
“다른 사람 걸 탐내는 거요.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요. 그런데요. 자꾸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면 어떻게 하죠.”
건율은 질문은 정말 뜬금없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건율의 얼굴이 어쩐지 어두워서 아윤은 멈칫했다.
“내 생각을 묻는 거에요?”
아윤의 말에 건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를 알 수 없어 차분히 건율을 보던 아윤이 이내 곧게 눈을 마주쳤다.
“저도 싫어해요. 그런 거.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 생각이 그렇다고요. 건율씨 사생활까지 참견할 생각은 없어요.”
담담한 아윤의 대답이 건율의 심장을 쑤셨다.
아예 건율에게 관심조차 없다는 말이었으니까.
건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쩐지 상처받은 듯한 그 눈빛이 아윤은 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차가워도 어쩔 수 없었다.
오늘 건율은 확실히 이상했다.
오해일지라도 좀 전의 질문은 정말 날 좋아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주 만약 그렇다면 선을 확실히 그어 두는 게 나았다.
착각이길 바랐지만.
고요한 침묵이 지나자 건율이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그렇죠? 그럼 쉬세요.”
“네.”
짧은 대답에 건율이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아윤은 간단히 씻고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미끄러졌어도 이안을 봐서 좋았는데.
마무리가 영 찝찝했다.
심란한 마음으로 아윤은 눈을 감았다.
몇 가지 일들을 마무리 지은 이안은 다시 지호에게로 돌아왔다.
이제야 좀 차분해진건지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안이 소파에 자리 잡자 지호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용궁사람인 것 같아. 범인.”
“왜?”
“물론 고상우를 내보냈던 관리팀과 출입팀 해인이 일주일 내로 지상에 나왔던 기록이 있긴 해. 근데 용궁 내부의 사람이라면 어느 때든 가능했을 거야.”
“굳이 내부의 사람이 아니어도 그럴 수는 있지.”
“그렇지. 근데 왜 고상우를 내보낸 걸까? 무슨 목적으로?”
지호의 질문에 이안은 머릿속에 그 날을 떠올렸다.
차분하게 강아윤에게 사과를 하고 자신에게 대꾸를 하던 고상우의 모습이.
조종을 당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냥 고상우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걸 보고 난 화를 냈고.
가라앉은 검은 눈이 지호에게 향했다.
“난 그게 형 때문인 것 같아. 고상우를 이용해서 형을 자극하려고.”
“내가 언제 어디로 강아윤을 보러 갈 줄 알고?”
이안의 차분한 반문에 지호가 대답했다.
“그래서 생각했어. 형을 꽤 잘 알고, 우리의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닐까.”
“내가 우연히 본 걸 수도 있잖아.”
“그렇지.”
“근데 왜 나를 화나게 만들지?”
“그걸 모르겠어. 지금까지와 패턴이 다르니까. 다른 일을 벌이려고 그러는 걸까? 지금은 일단 우리가 막고 있기는 하니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네.”
“나도.”
이안이 잠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지난 이틀 간, 서지호는 정말 내가 미쳐 있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제로 바쁘게 일하긴 했다.
단지 평소의 일과는 다른 일이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두에게 비밀로 했을 뿐.
지금 이렇게 기다리는 중에도 느긋하지는 않았다.
걸려들어야 하는데.
이럴 시간에 좀 더 작업을 해두는 게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이안은 드디어 기다리던 반응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안의 몸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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