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내 생각 자주 하더라.
조회 : 1,008 추천 : 0 글자수 : 5,355 자 2022-12-25
초조한 이안의 심정과는 달리 아윤의 목소리는 여유롭고 느릿했다.
“집이에요. 이제 자려고요.”
술향이 감도는 나른한 목소리가 이안의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제야 이안은 안도감에 작게 숨을 내쉬었다.
밖은 아니고, 당장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건 다행인데.
이 만취한 상태는 뭘까.
“술 마신거야? 무슨 일 있었어?”
“음. 약간이요? 이젠 다 괜찮아졌어요. 오빠랑 오랜만에 한 잔 하면서 수다떨었더니 괜찮아요.”
가만히 아윤의 얘기를 듣던 이안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이건 한 잔 마신 목소리가 아니었다.
동네북이라던 단어도 이상한 남자도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강아윤을 보고 와야 마음이 놓일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은건지 괜찮은 척 하는 건지.
늘 괜찮다고 하니 알 수가 없었다.
움직이려는 발을 붙잡고 전화를 했던 건 가면 바로 돌아오기 싫을 것 같아서였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닌데.
결국 망설이던 이안의 입술이 제 멋대로 움직였다.
“가도 돼?”
“지금이요? 나 집에 있어요. 오빠랑 가족들도 있는데요? 그래도 올래요? 근데 나도 보고 싶어요. 방문 잠그면 괜찮을까? 작게 얘기하면 괜찮을까요? 정말 올래요?”
이안의 질문 뒤로 아윤이 중얼대듯 쉼없이 말했다.
멍하니 듣던 이안은 낯선 아윤의 행동에 피식 웃었다.
정말 많이 취한 것 같았다.
평소의 강아윤이라면 일은 끝났는지, 괜찮은지 그런거나 물어보면서 간대도 오지 말랬을거 같은데.
강아윤의 모든 물음으로 끝나는 대답들이 다 나를 보고 싶다는 것 같았다.
아이처럼 조르는 듯한 강아윤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려왔다.
상황상 애써 누르고 있던 마음이 불쑥 튀어 나왔다.
“지금 갈게.”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이안은 다시 지호의 집으로 들어갔다.
해인들을 찾아내느라 지호는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지호에게 미안함 비슷한 걸 느끼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뭐든 나오면 연락줘.”
그 말에 지호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답했다.
이 시간에 이안이 어딜 가는건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그래, 그래. 부르면 바로 오기나 해. 지금 형이 할 일도 없는데 뭐.”
어쩐지 상하관계가 뒤바뀐 느낌이었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래.”
그저 작게 대답한 이안은 바로 그곳에서 사라졌다.
말했던 대로 아윤은 방문을 잠갔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이 밤에 이안이 갑자기 여기 나타나는 건 들키면 안 되는 거라고 아윤은 생각했다.
누가 문을 열 일은 없지만 혹시 모르는거니까.
그리고 몸을 돌렸을 때 이안이 서있었다.
아윤의 반쯤 감긴 흐릿한 눈에 이안이 담겼다.
까만 머리카락과 살짝 좁아진 미간마저 사랑스러운 남자가.
“왜 이렇게 많이 마신거야.”
살짝 불만이 어린 이안의 낮은 음성조차 아윤은 좋았다.
금세 맑게 풀어진 작은 얼굴이 환하게 웃었다.
아까 누가 손목을 잡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안의 얼굴이었다.
예전같았으면 혼자 해결해보려고 했었을텐데.
“그냥 이런 저런 얘기 하다보니까요.”
누가 들을까 작게 속삭이며 아윤이 다가와서는 이안을 꼭 안았다.
품속을 파고드는 보드라운 감촉에 이안의 팔도 자연스레 아윤의 몸을 감쌌다.
“좋다.”
눈을 감으며 아윤이 중얼거렸다.
이안을 안고 있으면 상쾌한 향이 났다.
푸른 물빛처럼 투명하고 기분 좋은 냄새.
포근하고 안전한 느낌.
그렇게 아윤이 이안의 향기에 휩싸여 있는데 차분한 목소리가 물었다.
“무슨 일이었는데 그래?”
“그냥, 여러가지 일이요?”
“나도 알면 안 되나? 알고 싶은데.”
“응. 안 돼요.”
아윤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윤은 빙글빙글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런 이야기엔 습관처럼 입을 닫았다.
아무래도 이상한 남자라는 말이 걸렸던 이안이 다시 한 번 물어볼까 고민하던 때였다.
이안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아윤이 빼꼼 얼굴을 들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눈꺼풀 사이로 옅은 갈색 눈이 빛났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보고 싶기만하면 나타나는 거예요?”
가늘어진 눈과 어눌한듯 귀여운 그 목소리와 보는 이를 애닳게 만드는 표정에 이안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미치겠네, 정말.
정말 강아윤 앞에 있으면 이성을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강아윤은 뭘 특별히 하지도 않았는데.
이안은 들떠오르는 몸을 가라앉히며 다시 한 번 여기가 어딘지를 떠올렸다.
“네가 불렀으니까.”
“언제요?”
되묻는 아윤을 이안도 의아한 듯 바라봤다.
설마, 강아윤이 몰랐던 건가?
사실 오늘은 좀 이상했다.
이전에는 늘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는데 아깐 그러지 않았었다.
몰랐다면 말이 되긴 하는데.
생각해보니 줄 때 너무 간단히 설명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목걸이 잡고 나한테 말했으니까. 들렸거든.”
“목걸이? 별이요?”
“그래. 그게 생각보다 특별한 물건이라서.”
이안의 잔잔한 음성에 아윤은 뭔가를 생각해보려다가 그만뒀다.
사실 깊이 뭘 생각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랬나보다고 대충 넘긴 아윤의 시선이 옅게 미소짓는 이안에게 닿았다.
“그렇구나. 좋네요. 그럼 앞으로도 보고 싶다고 하면 바로 올 거예요?”
“응.”
“정말요? 아무리 바빠도?”
“그래.”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이안의 목소리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고민도 없이 나오는 대답에 아윤은 살포시 웃다가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작게 타박했다.
“안돼요. 바쁠 땐 못 온다고 해야지. 당신은 그래야 하잖아요.”
“잠깐은 괜찮아. 부하직원들이 유능하거든.”
“그렇구나.”
옅게 흐려지는 듯한 그 목소리를 끝으로 아윤은 다시 이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쿵쿵 거세고 조금은 빠르게 느껴지는 규칙적인 심장소리가 아윤의 머릿속을 울렸다.
처음 들었을 때도 이랬었는데.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밀어내던 그 때도.
넓고 아늑한 그의 품속에서 음악같은 소리를 듣고 있자니 졸음이 솔솔 왔다.
그러는 사이에 길다란 이안의 손가락이 슬그머니 자신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가는 것도 느껴졌다.
이렇게 안고 있을때면 닿아오는 조심스러운 그 손짓이 기분 좋았다.
그게 그날 밤 아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늦은 아침 자신의 침대 위에서 아윤은 눈을 떴다.
분명 전날 술을 엄청 많이 마셨는데 머리가 맑았다.
마치, 그런 적 없다는 듯.
누운 채로 눈을 깜박이던 아윤이 어제 일을 떠올렸다.
퇴근하던 오빠를 붙잡아 속상했던 얘기들을 늘어놨다.
호아의 일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네 하던 오빠는 손목남에 대해서는 놀라 화를 내다가 건율의 이야기엔 놀렸었다.
그냥 착한 앤데 너 혼자 착각하는 거 아니냐면서.
잔뜩 마시고 위로 아닌 위로를 받다보니 나름 괜찮아졌었는데.
그 뒤로 방에 이안이 왔던 게 기억이 났다.
그리고.
뭔가를 떠올린 아윤이 사색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목걸이.”
아윤의 손이 옷 아래에서 빛나던 푸른 별을 꺼냈다.
어제 분명 이안이 목걸이를 잡고 말해서 내가 한 말이 들렸다고 했었다.
“그럼 지금까지 다 들었다는 거잖아?”
놀란 아윤은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무슨 말을 했더라.
보통은 이안이 보고 싶을 때 만지고는 했었다.
자기 전에도 습관처럼 만지면서 잘자라고도 했던 것 같고.
가끔은 보고싶다고도 했고.
별로 특별한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다행이긴 한데.
이안이 목걸이를 주면서 했던 말은 위험할 때 잡고 부르라던 말이 다였다.
그래서 그런 줄만 알았지 이걸 잡기만 하면 내가 하는 말이 다 들린다고는 안했잖아.
거기까지 생각한 아윤은 약간 화가 났다.
긴가민가한 심정으로 아윤의 손이 목걸이를 잡았다.
- 이거 위험할 때만 당신 부를 수 있는 거 아니었어요? 지금도 내 말, 들리는 거예요?
그리고 말이 끝나자마자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그래. 들려. 사실 어제 네가 물어보기 전까진 너도 아는 줄 알았고.”
차분한 이안의 반응에 아윤이 반발하듯 대꾸했다.
“그런 얘긴 없었잖아요.”
“잠깐 볼까?”
“그래요.”
“지금 갈게.”
전화를 끊고 나니 이안이 바로 나타났다.
항의를 하려던 아윤보다 한발 먼저 이안의 옅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더니 툭 하고 말을 꺼냈다.
“어젠 좋다고 했으면서.”
“네?”
반문하던 아윤의 머릿속에 어제의 기억이 스쳤다.
좋다고 말했던 술취한 자신의 목소리와 뒤를 이었던 대화가 떠오르자 아윤은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왜 그랬지.
그런 아윤에게 이안이 다가왔다.
까맣고 곧은 눈동자가 가까워져 오더니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미안해. 네가 늘 나한테 말을 걸어와서 몰랐어.”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표정은 이상하게 뭔가 서운해보였다.
“이젠 못 듣겠네.”
“뭘요?”
“보고싶다는 말. 문득 네 목소리가 머리에 울리는 거 좋았거든. 자기 전에 잘자라던 목소리도. 이젠 안 그럴 거 같아서.”
아윤의 눈동자에 이안이 가득 찼다.
그 아쉬워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아윤은 화낼 일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줬어야 하는 건 맞지만, 거기에 말을 걸었던 건 내 맘대로 했던 일이긴 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안이 슬쩍 당겨 끌어 안았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래도 가끔은 해주면 안 돼?”
속삭이는 이안의 목소리가 유혹하는 듯 달달했다.
“치사해요.”
“뭐가?”
“그렇게 말하면 싫다고 못할 거 아는거죠?”
아윤의 말에 이안이 해사한 웃음을 지었다.
“아닌데. 그냥 좋았거든. 네가 내 생각 하는 거. 생각보다 내 생각 자주 하더라, 강아윤이.”
몸을 슬쩍 떼어 내 이안을 보자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대체 왜 이렇게 사랑스럽게 웃는거야.
“생각해 볼게요.”
처음 화났던 마음은 어디가고 아윤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뭔가 말린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도저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아윤을 다시 이안이 꼭 안은 채로 말을 건넸다.
기분이 풀렸으니 이제는 의문을 풀 차례였다.
“자, 그럼 이제 왜 강아윤이 동네북이었는지 먼저 얘기해볼까.”
갑작스런 이안의 말에 아윤의 몸이 티나게 뻣뻣해졌다.
정말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건 이안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면 호아의 일도, 뭔가 의심스러운 건율의 태도도 설명해야 되는데.
잠시 고민하다 아윤은 얼굴을 숨긴 채로 대답했다.
“내가 그랬어요? 술 취해서 헛소리를 했나 봐요.”
나름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거짓말은 익숙하지 않았다.
자신이 들어도 어색한 목소리에 아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품속에 고개를 묻어버린 아윤을 내려다보며 이안이 담담히 말했다.
“나 거짓말 싫어하는데.”
조용하던 아윤이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이안의 눈을 보다 아윤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미안해요. 나도 싫어하는데.”
하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말해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이안이 그런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는데.
그런 눈빛을 읽었는지 이안이 작게 미소지었다.
“알겠어. 그럼 너도 나중에 말해줘. 그럴 수 있을 때.”
“알겠어요.”
“그럼 그건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이상한 남자는 뭐였는지 그건 들어야겠어.”
단호한 이안의 표정을 보며 아윤도 이건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개를 끄덕인 아윤이 천천히 어제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집이에요. 이제 자려고요.”
술향이 감도는 나른한 목소리가 이안의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제야 이안은 안도감에 작게 숨을 내쉬었다.
밖은 아니고, 당장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건 다행인데.
이 만취한 상태는 뭘까.
“술 마신거야? 무슨 일 있었어?”
“음. 약간이요? 이젠 다 괜찮아졌어요. 오빠랑 오랜만에 한 잔 하면서 수다떨었더니 괜찮아요.”
가만히 아윤의 얘기를 듣던 이안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이건 한 잔 마신 목소리가 아니었다.
동네북이라던 단어도 이상한 남자도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강아윤을 보고 와야 마음이 놓일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은건지 괜찮은 척 하는 건지.
늘 괜찮다고 하니 알 수가 없었다.
움직이려는 발을 붙잡고 전화를 했던 건 가면 바로 돌아오기 싫을 것 같아서였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닌데.
결국 망설이던 이안의 입술이 제 멋대로 움직였다.
“가도 돼?”
“지금이요? 나 집에 있어요. 오빠랑 가족들도 있는데요? 그래도 올래요? 근데 나도 보고 싶어요. 방문 잠그면 괜찮을까? 작게 얘기하면 괜찮을까요? 정말 올래요?”
이안의 질문 뒤로 아윤이 중얼대듯 쉼없이 말했다.
멍하니 듣던 이안은 낯선 아윤의 행동에 피식 웃었다.
정말 많이 취한 것 같았다.
평소의 강아윤이라면 일은 끝났는지, 괜찮은지 그런거나 물어보면서 간대도 오지 말랬을거 같은데.
강아윤의 모든 물음으로 끝나는 대답들이 다 나를 보고 싶다는 것 같았다.
아이처럼 조르는 듯한 강아윤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려왔다.
상황상 애써 누르고 있던 마음이 불쑥 튀어 나왔다.
“지금 갈게.”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이안은 다시 지호의 집으로 들어갔다.
해인들을 찾아내느라 지호는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지호에게 미안함 비슷한 걸 느끼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뭐든 나오면 연락줘.”
그 말에 지호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답했다.
이 시간에 이안이 어딜 가는건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그래, 그래. 부르면 바로 오기나 해. 지금 형이 할 일도 없는데 뭐.”
어쩐지 상하관계가 뒤바뀐 느낌이었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래.”
그저 작게 대답한 이안은 바로 그곳에서 사라졌다.
말했던 대로 아윤은 방문을 잠갔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이 밤에 이안이 갑자기 여기 나타나는 건 들키면 안 되는 거라고 아윤은 생각했다.
누가 문을 열 일은 없지만 혹시 모르는거니까.
그리고 몸을 돌렸을 때 이안이 서있었다.
아윤의 반쯤 감긴 흐릿한 눈에 이안이 담겼다.
까만 머리카락과 살짝 좁아진 미간마저 사랑스러운 남자가.
“왜 이렇게 많이 마신거야.”
살짝 불만이 어린 이안의 낮은 음성조차 아윤은 좋았다.
금세 맑게 풀어진 작은 얼굴이 환하게 웃었다.
아까 누가 손목을 잡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안의 얼굴이었다.
예전같았으면 혼자 해결해보려고 했었을텐데.
“그냥 이런 저런 얘기 하다보니까요.”
누가 들을까 작게 속삭이며 아윤이 다가와서는 이안을 꼭 안았다.
품속을 파고드는 보드라운 감촉에 이안의 팔도 자연스레 아윤의 몸을 감쌌다.
“좋다.”
눈을 감으며 아윤이 중얼거렸다.
이안을 안고 있으면 상쾌한 향이 났다.
푸른 물빛처럼 투명하고 기분 좋은 냄새.
포근하고 안전한 느낌.
그렇게 아윤이 이안의 향기에 휩싸여 있는데 차분한 목소리가 물었다.
“무슨 일이었는데 그래?”
“그냥, 여러가지 일이요?”
“나도 알면 안 되나? 알고 싶은데.”
“응. 안 돼요.”
아윤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윤은 빙글빙글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런 이야기엔 습관처럼 입을 닫았다.
아무래도 이상한 남자라는 말이 걸렸던 이안이 다시 한 번 물어볼까 고민하던 때였다.
이안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아윤이 빼꼼 얼굴을 들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눈꺼풀 사이로 옅은 갈색 눈이 빛났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보고 싶기만하면 나타나는 거예요?”
가늘어진 눈과 어눌한듯 귀여운 그 목소리와 보는 이를 애닳게 만드는 표정에 이안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미치겠네, 정말.
정말 강아윤 앞에 있으면 이성을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강아윤은 뭘 특별히 하지도 않았는데.
이안은 들떠오르는 몸을 가라앉히며 다시 한 번 여기가 어딘지를 떠올렸다.
“네가 불렀으니까.”
“언제요?”
되묻는 아윤을 이안도 의아한 듯 바라봤다.
설마, 강아윤이 몰랐던 건가?
사실 오늘은 좀 이상했다.
이전에는 늘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는데 아깐 그러지 않았었다.
몰랐다면 말이 되긴 하는데.
생각해보니 줄 때 너무 간단히 설명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목걸이 잡고 나한테 말했으니까. 들렸거든.”
“목걸이? 별이요?”
“그래. 그게 생각보다 특별한 물건이라서.”
이안의 잔잔한 음성에 아윤은 뭔가를 생각해보려다가 그만뒀다.
사실 깊이 뭘 생각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랬나보다고 대충 넘긴 아윤의 시선이 옅게 미소짓는 이안에게 닿았다.
“그렇구나. 좋네요. 그럼 앞으로도 보고 싶다고 하면 바로 올 거예요?”
“응.”
“정말요? 아무리 바빠도?”
“그래.”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이안의 목소리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고민도 없이 나오는 대답에 아윤은 살포시 웃다가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작게 타박했다.
“안돼요. 바쁠 땐 못 온다고 해야지. 당신은 그래야 하잖아요.”
“잠깐은 괜찮아. 부하직원들이 유능하거든.”
“그렇구나.”
옅게 흐려지는 듯한 그 목소리를 끝으로 아윤은 다시 이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쿵쿵 거세고 조금은 빠르게 느껴지는 규칙적인 심장소리가 아윤의 머릿속을 울렸다.
처음 들었을 때도 이랬었는데.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밀어내던 그 때도.
넓고 아늑한 그의 품속에서 음악같은 소리를 듣고 있자니 졸음이 솔솔 왔다.
그러는 사이에 길다란 이안의 손가락이 슬그머니 자신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가는 것도 느껴졌다.
이렇게 안고 있을때면 닿아오는 조심스러운 그 손짓이 기분 좋았다.
그게 그날 밤 아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늦은 아침 자신의 침대 위에서 아윤은 눈을 떴다.
분명 전날 술을 엄청 많이 마셨는데 머리가 맑았다.
마치, 그런 적 없다는 듯.
누운 채로 눈을 깜박이던 아윤이 어제 일을 떠올렸다.
퇴근하던 오빠를 붙잡아 속상했던 얘기들을 늘어놨다.
호아의 일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네 하던 오빠는 손목남에 대해서는 놀라 화를 내다가 건율의 이야기엔 놀렸었다.
그냥 착한 앤데 너 혼자 착각하는 거 아니냐면서.
잔뜩 마시고 위로 아닌 위로를 받다보니 나름 괜찮아졌었는데.
그 뒤로 방에 이안이 왔던 게 기억이 났다.
그리고.
뭔가를 떠올린 아윤이 사색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목걸이.”
아윤의 손이 옷 아래에서 빛나던 푸른 별을 꺼냈다.
어제 분명 이안이 목걸이를 잡고 말해서 내가 한 말이 들렸다고 했었다.
“그럼 지금까지 다 들었다는 거잖아?”
놀란 아윤은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무슨 말을 했더라.
보통은 이안이 보고 싶을 때 만지고는 했었다.
자기 전에도 습관처럼 만지면서 잘자라고도 했던 것 같고.
가끔은 보고싶다고도 했고.
별로 특별한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다행이긴 한데.
이안이 목걸이를 주면서 했던 말은 위험할 때 잡고 부르라던 말이 다였다.
그래서 그런 줄만 알았지 이걸 잡기만 하면 내가 하는 말이 다 들린다고는 안했잖아.
거기까지 생각한 아윤은 약간 화가 났다.
긴가민가한 심정으로 아윤의 손이 목걸이를 잡았다.
- 이거 위험할 때만 당신 부를 수 있는 거 아니었어요? 지금도 내 말, 들리는 거예요?
그리고 말이 끝나자마자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그래. 들려. 사실 어제 네가 물어보기 전까진 너도 아는 줄 알았고.”
차분한 이안의 반응에 아윤이 반발하듯 대꾸했다.
“그런 얘긴 없었잖아요.”
“잠깐 볼까?”
“그래요.”
“지금 갈게.”
전화를 끊고 나니 이안이 바로 나타났다.
항의를 하려던 아윤보다 한발 먼저 이안의 옅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더니 툭 하고 말을 꺼냈다.
“어젠 좋다고 했으면서.”
“네?”
반문하던 아윤의 머릿속에 어제의 기억이 스쳤다.
좋다고 말했던 술취한 자신의 목소리와 뒤를 이었던 대화가 떠오르자 아윤은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왜 그랬지.
그런 아윤에게 이안이 다가왔다.
까맣고 곧은 눈동자가 가까워져 오더니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미안해. 네가 늘 나한테 말을 걸어와서 몰랐어.”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표정은 이상하게 뭔가 서운해보였다.
“이젠 못 듣겠네.”
“뭘요?”
“보고싶다는 말. 문득 네 목소리가 머리에 울리는 거 좋았거든. 자기 전에 잘자라던 목소리도. 이젠 안 그럴 거 같아서.”
아윤의 눈동자에 이안이 가득 찼다.
그 아쉬워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아윤은 화낼 일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줬어야 하는 건 맞지만, 거기에 말을 걸었던 건 내 맘대로 했던 일이긴 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안이 슬쩍 당겨 끌어 안았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래도 가끔은 해주면 안 돼?”
속삭이는 이안의 목소리가 유혹하는 듯 달달했다.
“치사해요.”
“뭐가?”
“그렇게 말하면 싫다고 못할 거 아는거죠?”
아윤의 말에 이안이 해사한 웃음을 지었다.
“아닌데. 그냥 좋았거든. 네가 내 생각 하는 거. 생각보다 내 생각 자주 하더라, 강아윤이.”
몸을 슬쩍 떼어 내 이안을 보자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대체 왜 이렇게 사랑스럽게 웃는거야.
“생각해 볼게요.”
처음 화났던 마음은 어디가고 아윤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뭔가 말린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도저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아윤을 다시 이안이 꼭 안은 채로 말을 건넸다.
기분이 풀렸으니 이제는 의문을 풀 차례였다.
“자, 그럼 이제 왜 강아윤이 동네북이었는지 먼저 얘기해볼까.”
갑작스런 이안의 말에 아윤의 몸이 티나게 뻣뻣해졌다.
정말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건 이안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면 호아의 일도, 뭔가 의심스러운 건율의 태도도 설명해야 되는데.
잠시 고민하다 아윤은 얼굴을 숨긴 채로 대답했다.
“내가 그랬어요? 술 취해서 헛소리를 했나 봐요.”
나름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거짓말은 익숙하지 않았다.
자신이 들어도 어색한 목소리에 아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품속에 고개를 묻어버린 아윤을 내려다보며 이안이 담담히 말했다.
“나 거짓말 싫어하는데.”
조용하던 아윤이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이안의 눈을 보다 아윤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미안해요. 나도 싫어하는데.”
하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말해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이안이 그런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는데.
그런 눈빛을 읽었는지 이안이 작게 미소지었다.
“알겠어. 그럼 너도 나중에 말해줘. 그럴 수 있을 때.”
“알겠어요.”
“그럼 그건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이상한 남자는 뭐였는지 그건 들어야겠어.”
단호한 이안의 표정을 보며 아윤도 이건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개를 끄덕인 아윤이 천천히 어제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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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용왕의 아들과 사랑을 시작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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