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길
조회 : 1,670 추천 : 0 글자수 : 7,307 자 202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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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척 현실적이다.
귀신?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 되지 않는 허무맹랑한 망상은 손톱만큼도 관심 없다. 외계인? 그따위 허구의 무언가가 존재하느냐, 마느냐로 시간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사람들이 신기해. 돈도 안 되는데 그걸 왜 믿어?
다르게 말하자면, 돈만 준다면 귀신과 외계인, 천사나 악마, 초능력의 존재까지 얼마든지 믿어줄 수 있는 아주 속물적인 인간이라는 뜻!
22세, 백 민. 장래희망은 돈 많이 벌어서 가족들과 잘 먹고 잘살기입니다.
# 1화.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길.
백민은 능력을 인정받는 과외 선생님이었다.
명문대인 한국대 장학생이라는 스펙은 그녀가 과외를 쉽게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비록 수석으로 입학하지는 못했더라도 그녀가 가진 명석한 두뇌와 성실함은 전액 장학금을 받기 충분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돈 때문에 필수적으로 과외로 아르바이트할 수밖에 없었다. 명품 가방을 긁은 카드값이나 클럽에서 흥청망청 뿌려댈 돈이 아니라 ‘한 가정의 생활비’로 소비될 돈이었다.
홀아버지와 남동생 둘에게 들어가는 돈은 어찌어찌 감당해낼 수 있었다. 가족들의 씀씀이가 헤픈 것도 아니었고 동생들도 학원을 최소한으로 다니고 독서실에서 자율적으로 공부했으니까. 하지만 다달이 불어나는 은행이자는 그녀라도 허덕여야 할 만큼 벅찼다.
‘그나마 사채가 아니라는 거에 감사해야지.’
과외를 하면 그나마 원금을 조금씩 갚아나가면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빚을 청산하고 동생들을 돈 때문에 생기는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그래서 그녀는 버틸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황당하고 모욕적인 언사 앞에서도.
“이봐요, 선생님! 아니 이제 예의 차리고 말 것도 없겠네. 아가씨! 그럼 우리 애한테 꼬리 치지 않았다는 거야?”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전 그런 적 없습니다.”
백민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수능을 본 이후부터 백민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니 과외 3년 차. 그녀는 여러 유형의 학부모들을 만나왔다. 그중에서도 자식들 주위를 빙빙 돌며 참견하는 헬리콥터 맘은 여럿이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그만큼 유별났다.
재벌은 아니어도 준재벌에 속한다는 탄탄한 기업. 그 기업의 사장 사모님인데 이렇게 교양이 없을 수가! 재력이, 혹은 사회적 지위가 그 사람의 인격적인 품성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해도 해도 너무했다.
꽃뱀 취급이라니!
“내 눈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거야? 이렇게 버젓이 증거가 있는데! 뻔뻔하게!”
고등학교 3학년짜리 과외 학생의 학부모는 백민의 얼굴에 연한 노란색 봉투를 들이밀며 따졌다. 그 봉투는 누가 읽었는지 거칠게 뜯겨 있었다.
백민은 어이가 없다 못해 숨이 턱턱 막혀서 화도 제대로 안 나는 상태였다. 저 아줌마가 들이미는 편지봉투는 백민에게 과외를 받는 남학생이 쓴 편지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러브레터.
그렇지만 저 읽어보지도 못한 러브레터가 자신이 소년을 유혹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문제집 사이에 숨겨둔 편지를 들킨 남학생 준서는 새하얘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녀석은 백민의 시선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엄마 팔을 잡고 나가자고 애원하고 있었다.
“준서! 넌 아래층에 내려가 있어! 이 문제는 어른들끼리 해결할 테니까.”
“엄마! 선생님은 잘못한 거 없어! 내가 혼자……!”
“잔말 말고 내려가서 아줌마한테 간식이라도 달라고 해. 착하지? 우리 아들~.”
우물쭈물하던 준서는 비 맞은 강아지보다 처량할 꼴로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자기 방인데도 쫓겨나는 듯한 모양새였다. 녀석에게 엄마는 거역하기 힘든 지배자 같은 존재나 다름없었다. 자식에게 강압적인 부모는 의외로 흔했다.
게다가 햇빛을 자주 못 봐서 창백하게 흰 피부를 가진 준서는 짐승이나 다름없는 또래에 비교하면 순하고 숫기가 없는 녀석이었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우유부단하다고 할까.
정신을 차린 백민은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다.
‘아. 준서가 나를 좋아했구나.’
준서는 은근히 백민을 잘 따랐고 숙제 한 번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해왔다. 백민이 지나가면서 던진 충고도 흘려듣지 않았다. 선생님들의 편애를 받아야 마땅할 만점짜리 학생이었다. 따라서 억지로 도발해 경쟁심을 자극할 일도, 냉소적으로 빈정댈 일도,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낼 일도 없었다.
그게 문제였던 걸까?
‘성적도, 외모도, 집안도 평균 이상인데 어쩐지 주눅 들어있다 했지. 다 이유가 있었네. 이렇게 극성스러운 부모가 있었다면…….’
안쓰럽기까지 했다. 녀석의 성격으로 봤을 때, 그 마음은 한때의 풋사랑으로 끝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준서가 몰래 숨겨둔 편지를 굳이 찾아내서 억지로 마음을 까발리다니. 얼마나 민망하고 비참할까. 이 사건은 두고두고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까.
이런 소란까지 벌어진 마당에 과외는 잘렸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과외 시작한 지 세 달도 되지 않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착실한 학생이고 보수도 세서 마음에 들었건만.
“준서 어머님.”
과외야 다시 구하면 된다. 하지만 다른 과외를 계속하려면 까다로운 미션을 완료해야 한다. 이 아줌마를 열 받지 않게 구슬리고,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지 않게 싹도 자르는 미션을! 자식 사랑이 지극한 엄마들의 입소문은 그 무엇보다도 무서우니까. 아이들을 잘 휘어잡는다고 소문난 백민이라도 그런 소문엔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백민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려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래서 돈 버는 일은 어려웠다. 이런 더럽고 치사한 일도 참아 넘겨야 하니까.
“할 말 있으면 해봐요. 어떤 그럴듯한 변명이 나오나 내가 똑똑히 들어볼 거야!”
머리를 드라이해서 우아하게 틀어 올린 아줌마가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쳤다. 머리 맵시만 우아하면 뭐하나. 그 심성이 ‘우아’하고는 백억 광년은 떨어져 있는데.
“어머님. 주변에서 또래 여학생을 만나기 어려운 준서가 잠깐 착각했던 거겠죠. 잠깐의 동경이나 가벼운 호감, 그 정도였을 겁니다.”
“우리 아들이 얼마나 눈이 높은데! 그것도 레벨이 맞아야지! 아무 여자한테 눈 돌릴 그런 아이가 아니지, 그럼!”
사실, 백민은 이해가 되긴 했다. 미성년자이긴 해도 1년이면 성인이 될 테고 나이 차이도 기껏해야 세 살. 게다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이니만큼 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 뭐 특별한 조건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길거리에서 지나치다가도 반하고, 젓가락 잡는 손이 예쁘다고도 반할 수 있는 게 사람이 아니던가.
백민은 준서를 이해하면서도 쉬운 길을 택했다. 준서의 마음을 한때의 흥미나 착오로 단정 짓는 쉬운 길.
그런 속사정도 모른 채 아줌마는 아들을 치켜세우며 뿌듯해하는 모습이었다. 자식에게서 대리만족을 얻는 타입의 부모인 것 같았다. 백민은 그 이기적인 속내를 헤아리는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백민을 추궁하던 태도를 잊고 콧대를 세우던 아줌마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근데 호감 쪼가리를 갖고 편지를 썼다는 게 문제지! 편지르을! 우리 귀한 3대 독자가 괜히 그랬겠어? 행실을 똑바로 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냐!”
트집을 잡기 위한 발언이었다. 백민은 떳떳했다. 저런 모욕을 받아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꼬리 쳤다’라는 말을 들을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다. 양심을 걸고 확언할 수 있었다.
“저는 절대로 준서를 학생 이상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수업 외에 딴짓을 한 적도 없고요. 오해할만한 말도, 친밀한 스킨십도 한 적 없습니다. 그건 준서 어머님도 잘 아실 겁니다. 과외수업할 때마다 방문을 열어두셨으니.”
아줌마는 순간 어버버 소리를 냈다. 낯빛이 붉어지는 게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그만큼 준서의 방은 이성 간의 화학반응이 일어나기 몹시 어려운 공간이었다. 그 방에서 수업만 받은 준서가 어떻게 자신을 좋아하게 됐는지 그 점은 미스터리로 남으리라.
자신이 준서를 꼬시지 않았다는 근거는 하나 더 있었다. 그녀에겐 아주 확고한 이상형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준서는 제 이상형과 거리가 한참 멀어요.”
“우리 아들이 어디가 어때서 맘에 안 들어! 우리 아들이 관심을 주면 영광이라고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지! 제까짓 게!”
아줌마가 ‘우리 애가 어디가 어때서욧! 빽!’ 스킬을 시전했다. 준서 꼬여냈다고 난리 피우는 상황 아니었나? 지금 자기 아들이 내 취향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신경질 내는 건가? 설마!
“그게 아니라 제 이상형은 바퀴벌레급 생활력을 가진 남자거든요.”
“……뭐어?”
아줌마가 그녀를 떨떠름하게 쳐다봤다. 눈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게 이상한 인간으로 낙점된 듯했다. 최소 철면피 최대 미친년쯤으로.
백민이 남자를 볼 때 키라던가 몸매, 얼굴 같은 외형적 요소는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두뇌가 섹시하다거나 취미가 맞는 것도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백민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경제적 능력’.
집안의 재력으로만 따지면 준서도 상위권이겠지만, 여기서 경제적 능력이란 돈을 벌어올 수 있는 생활력을 뜻한다. 재벌급 부자라면 또 모를까, 백민은 부자도 망하는 건 한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빚더미만을 남겼지만, 그녀의 아버지도 한때는 잘나가는 벤처를 운영하던 사장님이었다. 그녀는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했다.
남자는 생활력이라고!
“집안이 쫄딱 망하더라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먹고 살 궁리를 하는, 억척스럽기까지 한 생활력을 가진 남자가 좋아서요. 준서는 날 때부터 금수저라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죠. 뭐, 앞길이 창창한 준서에게 그런 생활력은 필요가 없겠지만요.”
아마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 장담하진 않았다.
“돈 잘 벌어오는 사람이 좋다는 소리잖아. 어머머.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그게 왜 부끄러운 소린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다고 보는데요, 저는.”
대놓고 물어볼 순 없지만, 이 아줌마도 결혼할 때 분명 경제력을 고려했을 거다. 아니면 아줌마의 부모님이 경제력을 고려했거나. 사랑만으로 결혼하는 사람이 거의 멸종위기인 현실을 보면 당연했다.
백민의 이상형은 요즘같이 힘든 시대에 적합했다. 다만 사람들이 그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백민은 당당하게 밝히고 다닌다는 점이 달랐다.
돈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는 게 왜 껄끄러운 건지 백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돈 싫어하는 사람 없으면서 어째서 다들 가식적인 가면을 쓰고 있는지.
“어디서 그런 속물적인 소릴 당당하게 하는지!”
왜 속물적이라고 욕먹을 일인지 모르겠다. 내숭 떨어봤자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어쨌거나 그래서 준서를 유혹할 이유도 없었고, 혹여나 준서가 고백했더라도 거절했을 거예요.”
그리고 남자를 잘 잡아서 팔자를 고친다면, 엄마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마마보이보다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이혼남이 차라리 나았다. 백민의 개인적인 입장에선.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아줌마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 봤자 결론은 난 것 같은데 어쩌나.
“준서 어머님도 억지라는 거 알고 계시죠? 말씀하기 부끄러우실 수 있죠.”
“……뭐?”
아줌마는 새된 소리를 뱉으면서도 아니라고 변명하지는 않았다. 자기도 알고 있지만, 잘못을 인정하기가 창피했던 거다.
“그럼 오해는 풀렸다고 알아듣겠습니다.”
“이익……!”
아줌마는 뭐라고 꼬투리를 잡아 힐난하고 싶었으나 이미 기세에서 눌려버린 후였다.
“유감이네요. 이런 불미스러운 상황까지 오게 되어서요. 과외는 여기서 그만둬야 할 것 같네요. 준서 어머님도 동의하시죠? 과외비는 날짜대로 계산해서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는 알아서 상상해도 좋으리라. 백민은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한 대가는 뜯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니까.
백민은 들고 왔던 묵직한 백 팩을 다시 메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솔직히 말하면 인사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책잡힐 경우, 벌어질 후폭풍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동네에서 하는 과외가 가장 짭짤한 수입을 가져다주니까 말이다.
준서의 방에 덩그러니 아줌마를 남겨둔 채 내려왔다. 아줌마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듯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아래층에는 초조한 모습으로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맴도는 준서가 있었다.
층계를 밟는 발소리에 고개를 든 준서와 백민의 시선이 마주쳤다. 긴장하고 있던 소년의 얼굴은 곧 침울하게 변했다. 하얗던 피부가 더 표백되어 보였다.
“……정말 죄송해요. 선생님.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저 때문에, 제가 그런 편지를 써서…….”
“괜찮아. 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설레는 맘에 편지를 적은 게 큰 잘못은 아니었다. 보통은 이런 황당한 사건으로 번질 일도 아니다. 극성스러운 부모를 가진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소년은 조심성이 조금 부족하긴 했어도 특별히 꼬집을만한 잘못을 하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근데 어차피 고백했어도 거절당했을 거라는 거 알지? 오늘 일은 담아두지 말고 잊어버려.”
“……네. 죄송합니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미안하고…….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인 눈물. 언젠가 다시 만나면 사춘기 시절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에나 나올만한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지, 하고.
“준서야. 미안해. 아무래도 과외는 오늘까지 해야겠다. 잘 지내. 공부 열심히 하고.”
짧은 인사를 남긴 백민은 단호하게 뒤돌아서 3층짜리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높디높은 담벼락 때문인지 그 저택은 침범할 수 없는 철옹성처럼 느껴졌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만…….’
뒤늦게 화가 올라왔다. 하지만 화는 갈 곳이 없었다. 잘근잘근 씹어 삼켜 소화하는 수밖에.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으로 만드는 수밖에.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로 단련된 뻔뻔한 백민에게도 가끔은 큰 고비가 닥쳤다. 오늘처럼.
앞으로는 과외 구할 때 학부모님 성격도 유심히 봐야 하나 싶었다. 소시민의 삶이란 고단했다. 화가 나도 제대로 화낼 수도 없었고, 모욕적인 처사에도 뒷일을 계산하지 않고 뒤집어엎을 수도 없었다. 저지르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 뒷감당은 고스란히 제 몫이었다.
화난다고 휴대폰을 던진 다음 한참 남은 약정을 걱정하듯.
“하아. 그러고 보면 솔직하게 산다는 거 진짜 힘든 일이네.”
백민은 어지간하면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인형 눈알이라도 하나 더 꿰고, 영어 한 단어라도 더 외울 사람이었다. 아니면 마트 세일 전단지라도 한 부 더 읽던지.
그렇지만 몸이 아니라 마음이 힘든 오늘 같은 날은 백민도 약해지곤 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도 못하고 겉으로 티를 내지도 않았지만, 막연히 바랐다.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길.
나는 무척 현실적이다.
귀신?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 되지 않는 허무맹랑한 망상은 손톱만큼도 관심 없다. 외계인? 그따위 허구의 무언가가 존재하느냐, 마느냐로 시간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사람들이 신기해. 돈도 안 되는데 그걸 왜 믿어?
다르게 말하자면, 돈만 준다면 귀신과 외계인, 천사나 악마, 초능력의 존재까지 얼마든지 믿어줄 수 있는 아주 속물적인 인간이라는 뜻!
22세, 백 민. 장래희망은 돈 많이 벌어서 가족들과 잘 먹고 잘살기입니다.
# 1화.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길.
백민은 능력을 인정받는 과외 선생님이었다.
명문대인 한국대 장학생이라는 스펙은 그녀가 과외를 쉽게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비록 수석으로 입학하지는 못했더라도 그녀가 가진 명석한 두뇌와 성실함은 전액 장학금을 받기 충분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돈 때문에 필수적으로 과외로 아르바이트할 수밖에 없었다. 명품 가방을 긁은 카드값이나 클럽에서 흥청망청 뿌려댈 돈이 아니라 ‘한 가정의 생활비’로 소비될 돈이었다.
홀아버지와 남동생 둘에게 들어가는 돈은 어찌어찌 감당해낼 수 있었다. 가족들의 씀씀이가 헤픈 것도 아니었고 동생들도 학원을 최소한으로 다니고 독서실에서 자율적으로 공부했으니까. 하지만 다달이 불어나는 은행이자는 그녀라도 허덕여야 할 만큼 벅찼다.
‘그나마 사채가 아니라는 거에 감사해야지.’
과외를 하면 그나마 원금을 조금씩 갚아나가면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빚을 청산하고 동생들을 돈 때문에 생기는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그래서 그녀는 버틸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황당하고 모욕적인 언사 앞에서도.
“이봐요, 선생님! 아니 이제 예의 차리고 말 것도 없겠네. 아가씨! 그럼 우리 애한테 꼬리 치지 않았다는 거야?”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전 그런 적 없습니다.”
백민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수능을 본 이후부터 백민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니 과외 3년 차. 그녀는 여러 유형의 학부모들을 만나왔다. 그중에서도 자식들 주위를 빙빙 돌며 참견하는 헬리콥터 맘은 여럿이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그만큼 유별났다.
재벌은 아니어도 준재벌에 속한다는 탄탄한 기업. 그 기업의 사장 사모님인데 이렇게 교양이 없을 수가! 재력이, 혹은 사회적 지위가 그 사람의 인격적인 품성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해도 해도 너무했다.
꽃뱀 취급이라니!
“내 눈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거야? 이렇게 버젓이 증거가 있는데! 뻔뻔하게!”
고등학교 3학년짜리 과외 학생의 학부모는 백민의 얼굴에 연한 노란색 봉투를 들이밀며 따졌다. 그 봉투는 누가 읽었는지 거칠게 뜯겨 있었다.
백민은 어이가 없다 못해 숨이 턱턱 막혀서 화도 제대로 안 나는 상태였다. 저 아줌마가 들이미는 편지봉투는 백민에게 과외를 받는 남학생이 쓴 편지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러브레터.
그렇지만 저 읽어보지도 못한 러브레터가 자신이 소년을 유혹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문제집 사이에 숨겨둔 편지를 들킨 남학생 준서는 새하얘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녀석은 백민의 시선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엄마 팔을 잡고 나가자고 애원하고 있었다.
“준서! 넌 아래층에 내려가 있어! 이 문제는 어른들끼리 해결할 테니까.”
“엄마! 선생님은 잘못한 거 없어! 내가 혼자……!”
“잔말 말고 내려가서 아줌마한테 간식이라도 달라고 해. 착하지? 우리 아들~.”
우물쭈물하던 준서는 비 맞은 강아지보다 처량할 꼴로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자기 방인데도 쫓겨나는 듯한 모양새였다. 녀석에게 엄마는 거역하기 힘든 지배자 같은 존재나 다름없었다. 자식에게 강압적인 부모는 의외로 흔했다.
게다가 햇빛을 자주 못 봐서 창백하게 흰 피부를 가진 준서는 짐승이나 다름없는 또래에 비교하면 순하고 숫기가 없는 녀석이었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우유부단하다고 할까.
정신을 차린 백민은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다.
‘아. 준서가 나를 좋아했구나.’
준서는 은근히 백민을 잘 따랐고 숙제 한 번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해왔다. 백민이 지나가면서 던진 충고도 흘려듣지 않았다. 선생님들의 편애를 받아야 마땅할 만점짜리 학생이었다. 따라서 억지로 도발해 경쟁심을 자극할 일도, 냉소적으로 빈정댈 일도,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낼 일도 없었다.
그게 문제였던 걸까?
‘성적도, 외모도, 집안도 평균 이상인데 어쩐지 주눅 들어있다 했지. 다 이유가 있었네. 이렇게 극성스러운 부모가 있었다면…….’
안쓰럽기까지 했다. 녀석의 성격으로 봤을 때, 그 마음은 한때의 풋사랑으로 끝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준서가 몰래 숨겨둔 편지를 굳이 찾아내서 억지로 마음을 까발리다니. 얼마나 민망하고 비참할까. 이 사건은 두고두고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까.
이런 소란까지 벌어진 마당에 과외는 잘렸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과외 시작한 지 세 달도 되지 않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착실한 학생이고 보수도 세서 마음에 들었건만.
“준서 어머님.”
과외야 다시 구하면 된다. 하지만 다른 과외를 계속하려면 까다로운 미션을 완료해야 한다. 이 아줌마를 열 받지 않게 구슬리고,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지 않게 싹도 자르는 미션을! 자식 사랑이 지극한 엄마들의 입소문은 그 무엇보다도 무서우니까. 아이들을 잘 휘어잡는다고 소문난 백민이라도 그런 소문엔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백민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려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래서 돈 버는 일은 어려웠다. 이런 더럽고 치사한 일도 참아 넘겨야 하니까.
“할 말 있으면 해봐요. 어떤 그럴듯한 변명이 나오나 내가 똑똑히 들어볼 거야!”
머리를 드라이해서 우아하게 틀어 올린 아줌마가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쳤다. 머리 맵시만 우아하면 뭐하나. 그 심성이 ‘우아’하고는 백억 광년은 떨어져 있는데.
“어머님. 주변에서 또래 여학생을 만나기 어려운 준서가 잠깐 착각했던 거겠죠. 잠깐의 동경이나 가벼운 호감, 그 정도였을 겁니다.”
“우리 아들이 얼마나 눈이 높은데! 그것도 레벨이 맞아야지! 아무 여자한테 눈 돌릴 그런 아이가 아니지, 그럼!”
사실, 백민은 이해가 되긴 했다. 미성년자이긴 해도 1년이면 성인이 될 테고 나이 차이도 기껏해야 세 살. 게다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이니만큼 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 뭐 특별한 조건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길거리에서 지나치다가도 반하고, 젓가락 잡는 손이 예쁘다고도 반할 수 있는 게 사람이 아니던가.
백민은 준서를 이해하면서도 쉬운 길을 택했다. 준서의 마음을 한때의 흥미나 착오로 단정 짓는 쉬운 길.
그런 속사정도 모른 채 아줌마는 아들을 치켜세우며 뿌듯해하는 모습이었다. 자식에게서 대리만족을 얻는 타입의 부모인 것 같았다. 백민은 그 이기적인 속내를 헤아리는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백민을 추궁하던 태도를 잊고 콧대를 세우던 아줌마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근데 호감 쪼가리를 갖고 편지를 썼다는 게 문제지! 편지르을! 우리 귀한 3대 독자가 괜히 그랬겠어? 행실을 똑바로 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냐!”
트집을 잡기 위한 발언이었다. 백민은 떳떳했다. 저런 모욕을 받아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꼬리 쳤다’라는 말을 들을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다. 양심을 걸고 확언할 수 있었다.
“저는 절대로 준서를 학생 이상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수업 외에 딴짓을 한 적도 없고요. 오해할만한 말도, 친밀한 스킨십도 한 적 없습니다. 그건 준서 어머님도 잘 아실 겁니다. 과외수업할 때마다 방문을 열어두셨으니.”
아줌마는 순간 어버버 소리를 냈다. 낯빛이 붉어지는 게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그만큼 준서의 방은 이성 간의 화학반응이 일어나기 몹시 어려운 공간이었다. 그 방에서 수업만 받은 준서가 어떻게 자신을 좋아하게 됐는지 그 점은 미스터리로 남으리라.
자신이 준서를 꼬시지 않았다는 근거는 하나 더 있었다. 그녀에겐 아주 확고한 이상형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준서는 제 이상형과 거리가 한참 멀어요.”
“우리 아들이 어디가 어때서 맘에 안 들어! 우리 아들이 관심을 주면 영광이라고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지! 제까짓 게!”
아줌마가 ‘우리 애가 어디가 어때서욧! 빽!’ 스킬을 시전했다. 준서 꼬여냈다고 난리 피우는 상황 아니었나? 지금 자기 아들이 내 취향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신경질 내는 건가? 설마!
“그게 아니라 제 이상형은 바퀴벌레급 생활력을 가진 남자거든요.”
“……뭐어?”
아줌마가 그녀를 떨떠름하게 쳐다봤다. 눈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게 이상한 인간으로 낙점된 듯했다. 최소 철면피 최대 미친년쯤으로.
백민이 남자를 볼 때 키라던가 몸매, 얼굴 같은 외형적 요소는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두뇌가 섹시하다거나 취미가 맞는 것도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백민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경제적 능력’.
집안의 재력으로만 따지면 준서도 상위권이겠지만, 여기서 경제적 능력이란 돈을 벌어올 수 있는 생활력을 뜻한다. 재벌급 부자라면 또 모를까, 백민은 부자도 망하는 건 한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빚더미만을 남겼지만, 그녀의 아버지도 한때는 잘나가는 벤처를 운영하던 사장님이었다. 그녀는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했다.
남자는 생활력이라고!
“집안이 쫄딱 망하더라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먹고 살 궁리를 하는, 억척스럽기까지 한 생활력을 가진 남자가 좋아서요. 준서는 날 때부터 금수저라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죠. 뭐, 앞길이 창창한 준서에게 그런 생활력은 필요가 없겠지만요.”
아마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 장담하진 않았다.
“돈 잘 벌어오는 사람이 좋다는 소리잖아. 어머머.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그게 왜 부끄러운 소린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다고 보는데요, 저는.”
대놓고 물어볼 순 없지만, 이 아줌마도 결혼할 때 분명 경제력을 고려했을 거다. 아니면 아줌마의 부모님이 경제력을 고려했거나. 사랑만으로 결혼하는 사람이 거의 멸종위기인 현실을 보면 당연했다.
백민의 이상형은 요즘같이 힘든 시대에 적합했다. 다만 사람들이 그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백민은 당당하게 밝히고 다닌다는 점이 달랐다.
돈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는 게 왜 껄끄러운 건지 백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돈 싫어하는 사람 없으면서 어째서 다들 가식적인 가면을 쓰고 있는지.
“어디서 그런 속물적인 소릴 당당하게 하는지!”
왜 속물적이라고 욕먹을 일인지 모르겠다. 내숭 떨어봤자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어쨌거나 그래서 준서를 유혹할 이유도 없었고, 혹여나 준서가 고백했더라도 거절했을 거예요.”
그리고 남자를 잘 잡아서 팔자를 고친다면, 엄마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마마보이보다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이혼남이 차라리 나았다. 백민의 개인적인 입장에선.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아줌마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 봤자 결론은 난 것 같은데 어쩌나.
“준서 어머님도 억지라는 거 알고 계시죠? 말씀하기 부끄러우실 수 있죠.”
“……뭐?”
아줌마는 새된 소리를 뱉으면서도 아니라고 변명하지는 않았다. 자기도 알고 있지만, 잘못을 인정하기가 창피했던 거다.
“그럼 오해는 풀렸다고 알아듣겠습니다.”
“이익……!”
아줌마는 뭐라고 꼬투리를 잡아 힐난하고 싶었으나 이미 기세에서 눌려버린 후였다.
“유감이네요. 이런 불미스러운 상황까지 오게 되어서요. 과외는 여기서 그만둬야 할 것 같네요. 준서 어머님도 동의하시죠? 과외비는 날짜대로 계산해서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는 알아서 상상해도 좋으리라. 백민은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한 대가는 뜯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니까.
백민은 들고 왔던 묵직한 백 팩을 다시 메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솔직히 말하면 인사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책잡힐 경우, 벌어질 후폭풍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동네에서 하는 과외가 가장 짭짤한 수입을 가져다주니까 말이다.
준서의 방에 덩그러니 아줌마를 남겨둔 채 내려왔다. 아줌마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듯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아래층에는 초조한 모습으로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맴도는 준서가 있었다.
층계를 밟는 발소리에 고개를 든 준서와 백민의 시선이 마주쳤다. 긴장하고 있던 소년의 얼굴은 곧 침울하게 변했다. 하얗던 피부가 더 표백되어 보였다.
“……정말 죄송해요. 선생님.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저 때문에, 제가 그런 편지를 써서…….”
“괜찮아. 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설레는 맘에 편지를 적은 게 큰 잘못은 아니었다. 보통은 이런 황당한 사건으로 번질 일도 아니다. 극성스러운 부모를 가진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소년은 조심성이 조금 부족하긴 했어도 특별히 꼬집을만한 잘못을 하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근데 어차피 고백했어도 거절당했을 거라는 거 알지? 오늘 일은 담아두지 말고 잊어버려.”
“……네. 죄송합니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미안하고…….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인 눈물. 언젠가 다시 만나면 사춘기 시절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에나 나올만한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지, 하고.
“준서야. 미안해. 아무래도 과외는 오늘까지 해야겠다. 잘 지내. 공부 열심히 하고.”
짧은 인사를 남긴 백민은 단호하게 뒤돌아서 3층짜리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높디높은 담벼락 때문인지 그 저택은 침범할 수 없는 철옹성처럼 느껴졌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만…….’
뒤늦게 화가 올라왔다. 하지만 화는 갈 곳이 없었다. 잘근잘근 씹어 삼켜 소화하는 수밖에.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으로 만드는 수밖에.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로 단련된 뻔뻔한 백민에게도 가끔은 큰 고비가 닥쳤다. 오늘처럼.
앞으로는 과외 구할 때 학부모님 성격도 유심히 봐야 하나 싶었다. 소시민의 삶이란 고단했다. 화가 나도 제대로 화낼 수도 없었고, 모욕적인 처사에도 뒷일을 계산하지 않고 뒤집어엎을 수도 없었다. 저지르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 뒷감당은 고스란히 제 몫이었다.
화난다고 휴대폰을 던진 다음 한참 남은 약정을 걱정하듯.
“하아. 그러고 보면 솔직하게 산다는 거 진짜 힘든 일이네.”
백민은 어지간하면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인형 눈알이라도 하나 더 꿰고, 영어 한 단어라도 더 외울 사람이었다. 아니면 마트 세일 전단지라도 한 부 더 읽던지.
그렇지만 몸이 아니라 마음이 힘든 오늘 같은 날은 백민도 약해지곤 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도 못하고 겉으로 티를 내지도 않았지만, 막연히 바랐다.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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