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도은강 너 수상하다?
조회 : 868 추천 : 0 글자수 : 5,336 자 2022-12-21
# 32화. 도은강 너 수상하다?
“아차,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텐데 설명을 깜빡했네요. 송별회의 주인공이 된 선물로 제 이능을 사용할 테니 대비하세요.”
따뜻하기만 했던 조명이 주인공에게만 향하는 스포트라이트로 바뀌었다. 그렇게 시선을 집중시킨 사이, 조영자 팀장은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큐!”
큐 사인과 함께 사이키델릭한 클럽 조명이 중앙을 비췄다. 잔잔하게 흐르던 클래식 음악도 쿵쾅거리는 클럽 음악으로 바뀌었다. 왜 중앙이 텅 비어있고 좌석 배치가 가장자리 쪽으로 극단적으로 밀려있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 변화 폭이 작은 백민에겐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심장이 울렁거리는 것도 같고 자신감이 솟구쳤다. 시야 안에 잡히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기특하게 보였다.
당황해하는 백민을 보더니 홍미지가 팔짱을 끼면서 귀띔해주었다.
“조영자 팀장님의 능력이 이모션컨트롤이야. 감정을 제멋대로 조종하는 능력이지. 범위가 넓을 뿐만 아니라 그 변화도 신속하고 다룰 수 있는 감정을 종류도 대단히 많아.”
“아…….”
백민은 그제야 짧은 송별사에 담겨있는 별명들의 의미를 알게 됐다. ‘절망의 야차’는 테러리스트들에게 절망적인 감정을 심어주면서 얻은 별명일 것이다. 수긍의 끄덕거림을 보이면서도 백민은 저도 모르게 실실 웃고 있었다.
“근데 우리 큰 언니 대단하시네. 전에는 감정이 급격히 변할 때 그 위화감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
“그러셨습니까?”
자신은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에 의아한 일이었다. 홍미지는 그에 대한 의문을 바로 풀어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위화감까지도 없앤 모양이야. 실력이 더 느셨어. 저 나이에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야. 연구직이 천성이신 것 같아. 현장에서 활동하실 때도 엄청나셨다고 듣긴 했지만.”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 긴 시간을 알리우스 협회에서 일한 것 자체도, 그러면서도 한 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 우리도 가볼까? 오늘은 사고 치기 쉬우니까 정신 바짝 차려. 물론 내가 바짝 차리라고 한다고 해도 들뜬 지금 기분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야.”
“조심하겠습니다. 아하하.”
가슴속이 웃음으로 가득 차서 뱉어내지 않으면 답답했다. 즐거움은 백민을 충동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얘 봐. 오늘 흑역사 몇 개 세울 기세네. 난 경고했다?”
“네. 똑똑히 들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아.”
그렇게 말하는 백민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항상 딱딱한 그녀의 말투였기 때문에 그 변화는 극적으로 다가왔다.
홍미지는 다갈색으로 염색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픽 웃었다. 보호자라고 할 만한 팀원들도 곁에 있으니 큰 사고는 벌어지지 않으리라. 그리고 무슨 엉뚱한 짓을 하든, 별걱정 없었다. 소수만 존재하는 아웃사이더인 능력자들이 같은 능력자에게 보이는 이해심은 하해와 같이 넓었다.
“역시나. 이런 자리에 사권일이 빠지면 섭섭하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홍미지의 시선을 따라가니 사권일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연회장 중앙 스테이지로 향하고 있었다.
‘저 무대는 언제 생겼지? 술이랑 음식은 언제 서빙된 거지?’
연구반 직원들은 신비로웠다. 큰 프로젝트의 연구 성과는 대외로 공개되므로 알 수 있지만, 그 외에는 연구반 내의 비밀로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사소한 발명품, 연구 도중인 주제는 알 방법이 없었다. 백민은 ‘연구반의 사소한 결과물을 이용했겠지.’하고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백민은 끼어들만한 자리를 찾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도은강은 멀찌감치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토론을 시작하다가 백민과 눈이 딱 마주쳤다. 팀장급 인사들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으로 보였다. 그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입 모양으로 뭐라고 반복했다. 집중해서 보니 알아서 놀라는 뜻 같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능반은 진짜 자유 방임주의 성향이 강해. 나야 편하지만.’
다른 곳을 보니, 여성 능력자에게 둘러싸여서 고통 받는 이수철이 보였다. 슬쩍 가서 들어보니 그녀들의 주 관심사는 동물. 정확히는 그녀들의 애완견, 애완묘에 대해 상담을 하고 있었다.
“언제 우리 핑크랑 상담해주세요. 요즘 사춘긴지 너무 까칠해요. 슬프게.”
“저도요! 저도 잠깐 우리 딸기 데려와도 될까요? 밥투정을 너무 해서요. 취향 좀 물어봐 주시면 제가 나중에 제 이능으로 수철 씨 아이들 미용시켜줄게요! 어때요?”
백민은 그곳에서 멀어져서 다른 팀원들을 찾았다. 홍미지는 어깨춤을 추며 칵테일을 홀짝거리고 있었고, 사권일은 물 만난 고기처럼 춤을 춰대고 있었다.
전체적인 스타일로만 보면 클럽에서 알아주는 춤꾼일 것 같던 사권일. 그는 몸치였다!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비보잉을 보여주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자신의 세계에 빠져 말 그대로 무대를 휘젓고 있었다. 덩실덩실 탈춤을 추면서!
충격 반전이었다.
예술 쪽으로는 꽝인 백민도 춤을 잘 추는지 못 추는지 구별할 정도의 눈은 가지고 있었다.
“……단지 흥 많은 클러버였구나.”
백민은 바다를 부유하는 돛단배처럼 연회장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아래로 묶은 양 갈래머리를 하고 모자를 푹 뒤집어쓴 고운비를 찾아냈다. ‘월리를 찾아라!’급의 숨은그림찾기였다.
고운비는 테이블에 머리를 빼꼼히 내민 채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카나페를 쏙쏙 집어가고 있었다. 옆에 있는 트레이가 빈 것으로 보아, 무시무시한 속도로 쟁반 하나는 벌써 해치운 모양이었다.
“고운비 선배님 저랑 같이 테이블에 앉아서 먹어요.”
뒤쪽으로 접근해서 슬며시 귓속말하니 고운비가 파득거리며 소스라쳤다. 아마 귀가 예민한 부위인가보다.
백민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직장 상사에게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감은 한도 없이 부풀고 겁이 없어지는, 한 마디로 간덩이가 부은 상태였다.
“깜짝이야! 아. 민이 언니였네. 보아하니 언니도 영자 아줌마 계획에 걸려들었구나?”
고운비는 아예 접시를 의자에 올려두고 테이블보를 엄폐물로 이용했다.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 가려다가 백민이 있어서 자제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적이 없었는데 계략이면 어때요.”
그녀는 이제 ‘될 대로 돼라.’하는 무책임한 반응을 보였다. 내일의 뒷감당은 내일의 백민이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일의 백민이 느낄 낭패감을 계산하지 못하고.
“민이 언니! 그게 바로 영자 아줌마의 술수야. 그 이능에 걸리지 않은 입장에서 보면 재밌는 구경거리라고!”
뭣 모르고 만만하게 걸려든 백민과 달리 베테랑 고운비는 감정 통제 이능을 막는 요령도 알고 있었다. 목소리가 매개체가 되므로, 귀를 막으면 이능의 상당 부분을 억누를 수 있었다.
“큰 사고만 치지 마.”
“설마요.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장담하지 않는 게 좋을걸?”
그렇게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중얼거린 고운비는 접시 하나를 두 손으로 잡고 들이마시듯 해치워버렸다.
‘그래도 뭐 악의 섞인 장난은 아니니까. 적당히 즐기고 적절한 수준에서 풀어주시겠지.’
눈을 데룩데룩 굴리던 고운비는 모자를 고쳐 썼다.
“그럼 난 가볼게.”
그리곤 송별회의 주인공인 조영자 팀장에게 다가갔다. 아주 미적지근한 속도였다. 가기 싫은 마음을 참으며 억지로 발을 옮기는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 것처럼, 이능반 8년이면 기본적인 사회생활 요령도 늘기는 늘어나나 보다.
고운비는 조그만 몸으로 인파들 틈을 헤치고 조영자 팀장에게 도달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친 후 고개를 꾸벅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잡기도 전에 쪼르르 사람들 틈으로 숨어들어서 연회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래도 참석한 게 장했다.
시간이 흐르자, 백민은 구름 위에 올라서서 지상을 굽어보는 기분이 되었다. 통쾌했으며 속이 시원하게 뻥 뚫린 것 같았다. 혼자서도 잘 노는 백민이지만, 이럴 때까지 혼자 놀긴 싫었다. 그리고 술 한 잔이 더 들어가면 지금의 기분이 업그레이드될 것 같았다.
우선은 열대 바다의 푸른빛을 닮은 칵테일을 홀짝이는 홍미지 옆으로 갔다. 그녀는 백민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다시 대화상대에게 집중했다.
백민은 물과 비슷한 투명한 칵테일을 한 잔 집어 들었다. 도수가 약해 보이는 술이었기 때문이다. 그 잔을 입술에 가져가는 순간,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는 사람이 있었다. 언제 왔는지 모를 도은강 팀장이었다.
“언제 오셨어요? 심각한 대화 나누시는 것 같았는데.”
“언제 왔는지,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니고. 빨리 잔 내려놔.”
백민은 얇은 줄기 같은 칵테일 잔의 스템(stem)을 손으로 감싸 쥐고 놓지 않았다. 도은강이 그녀의 손을 테이블 쪽으로 끌어당기려 하자 힘을 주고 버텼다.
“왜 갑자기 와서 방해하세요. 놔주세요.”
매번 순순히 순응하던 백민이라서 이런 태도는 낯설었다. 도은강은 낯설어하면서도 끝내 백민의 손가락을 펴 칵테일 잔을 옆에 치워뒀다.
“상태를 보아하니 약한 술도 위험하겠는데. 이거 먹고 무슨 사고를 치려고.”
도은강은 신입생 환영회 날 있었던 피치 못할 사고를 떠올렸다. 백민의 동생들에게 원망을 받게 했던 그 목 뽀뽀 사건 말이다.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게 둘 순 없었다.
이 자리에서 멀쩡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델타 팀 일원은 도은강뿐이었다.
홍미지도 술이 알딸딸하게 들어갔고, 믿었던 이수철마저 맥주에 손을 대 버렸다. 여자 직원들의 질문 공세를 견디느라 술을 마시지 않고는 힘들었으리란 추측이 들었다. 이수철은 난감하고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의를 다해 질문에 대답해주고 있었다. 사권일은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클럽 분위기가 될 때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수 센 거였어요?”
“그것도 모르고 집었어? 진토닉이잖아. 아마 조 팀장님 취향에 맞춰서 제조한 칵테일이라 일반 바에서 마시는 것보다 도수가 더 높을 거다.”
“아. 그래요? 그럼 다른 거 마시면 되죠. 팀장님, 요거는 어때요?”
약한 술도 위험하다는 소리는 귓등으로 흘려보냈는지, 백민은 이제 겁도 없이 도은강에게 칵테일 도수를 확인받고 있었다. 게다가 백민이 검지로 가리킨 칵테일은 블랙 러시안. 화려한 색감의 무알코올에 가까운 칵테일들이 많은데 블랙 러시안이라니.
“왜 하필…….”
옆에서 백민과 도은강의 실랑이를 구경하던 홍미지가 버건디색 입술을 늘이며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도은강이 우스웠다. 그가 저 멀리서 급하게 와서 자신을 벽에 걸린 그림 취급하고 하는 일이 술 단속이라니.
여자 친구 관리하는 걱정 많은 남자도 아니면서.
‘도은강, 너 수상하다?’
홍미지는 도은강과 백민의 미묘한 공기에 흥미를 느꼈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있는 도은강이 연애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했다. 그녀는 둘을 몰래 관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칵테일 잔을 기울였다.
“아차,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텐데 설명을 깜빡했네요. 송별회의 주인공이 된 선물로 제 이능을 사용할 테니 대비하세요.”
따뜻하기만 했던 조명이 주인공에게만 향하는 스포트라이트로 바뀌었다. 그렇게 시선을 집중시킨 사이, 조영자 팀장은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큐!”
큐 사인과 함께 사이키델릭한 클럽 조명이 중앙을 비췄다. 잔잔하게 흐르던 클래식 음악도 쿵쾅거리는 클럽 음악으로 바뀌었다. 왜 중앙이 텅 비어있고 좌석 배치가 가장자리 쪽으로 극단적으로 밀려있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 변화 폭이 작은 백민에겐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심장이 울렁거리는 것도 같고 자신감이 솟구쳤다. 시야 안에 잡히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기특하게 보였다.
당황해하는 백민을 보더니 홍미지가 팔짱을 끼면서 귀띔해주었다.
“조영자 팀장님의 능력이 이모션컨트롤이야. 감정을 제멋대로 조종하는 능력이지. 범위가 넓을 뿐만 아니라 그 변화도 신속하고 다룰 수 있는 감정을 종류도 대단히 많아.”
“아…….”
백민은 그제야 짧은 송별사에 담겨있는 별명들의 의미를 알게 됐다. ‘절망의 야차’는 테러리스트들에게 절망적인 감정을 심어주면서 얻은 별명일 것이다. 수긍의 끄덕거림을 보이면서도 백민은 저도 모르게 실실 웃고 있었다.
“근데 우리 큰 언니 대단하시네. 전에는 감정이 급격히 변할 때 그 위화감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
“그러셨습니까?”
자신은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에 의아한 일이었다. 홍미지는 그에 대한 의문을 바로 풀어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위화감까지도 없앤 모양이야. 실력이 더 느셨어. 저 나이에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야. 연구직이 천성이신 것 같아. 현장에서 활동하실 때도 엄청나셨다고 듣긴 했지만.”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 긴 시간을 알리우스 협회에서 일한 것 자체도, 그러면서도 한 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 우리도 가볼까? 오늘은 사고 치기 쉬우니까 정신 바짝 차려. 물론 내가 바짝 차리라고 한다고 해도 들뜬 지금 기분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야.”
“조심하겠습니다. 아하하.”
가슴속이 웃음으로 가득 차서 뱉어내지 않으면 답답했다. 즐거움은 백민을 충동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얘 봐. 오늘 흑역사 몇 개 세울 기세네. 난 경고했다?”
“네. 똑똑히 들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아.”
그렇게 말하는 백민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항상 딱딱한 그녀의 말투였기 때문에 그 변화는 극적으로 다가왔다.
홍미지는 다갈색으로 염색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픽 웃었다. 보호자라고 할 만한 팀원들도 곁에 있으니 큰 사고는 벌어지지 않으리라. 그리고 무슨 엉뚱한 짓을 하든, 별걱정 없었다. 소수만 존재하는 아웃사이더인 능력자들이 같은 능력자에게 보이는 이해심은 하해와 같이 넓었다.
“역시나. 이런 자리에 사권일이 빠지면 섭섭하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홍미지의 시선을 따라가니 사권일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연회장 중앙 스테이지로 향하고 있었다.
‘저 무대는 언제 생겼지? 술이랑 음식은 언제 서빙된 거지?’
연구반 직원들은 신비로웠다. 큰 프로젝트의 연구 성과는 대외로 공개되므로 알 수 있지만, 그 외에는 연구반 내의 비밀로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사소한 발명품, 연구 도중인 주제는 알 방법이 없었다. 백민은 ‘연구반의 사소한 결과물을 이용했겠지.’하고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백민은 끼어들만한 자리를 찾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도은강은 멀찌감치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토론을 시작하다가 백민과 눈이 딱 마주쳤다. 팀장급 인사들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으로 보였다. 그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입 모양으로 뭐라고 반복했다. 집중해서 보니 알아서 놀라는 뜻 같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능반은 진짜 자유 방임주의 성향이 강해. 나야 편하지만.’
다른 곳을 보니, 여성 능력자에게 둘러싸여서 고통 받는 이수철이 보였다. 슬쩍 가서 들어보니 그녀들의 주 관심사는 동물. 정확히는 그녀들의 애완견, 애완묘에 대해 상담을 하고 있었다.
“언제 우리 핑크랑 상담해주세요. 요즘 사춘긴지 너무 까칠해요. 슬프게.”
“저도요! 저도 잠깐 우리 딸기 데려와도 될까요? 밥투정을 너무 해서요. 취향 좀 물어봐 주시면 제가 나중에 제 이능으로 수철 씨 아이들 미용시켜줄게요! 어때요?”
백민은 그곳에서 멀어져서 다른 팀원들을 찾았다. 홍미지는 어깨춤을 추며 칵테일을 홀짝거리고 있었고, 사권일은 물 만난 고기처럼 춤을 춰대고 있었다.
전체적인 스타일로만 보면 클럽에서 알아주는 춤꾼일 것 같던 사권일. 그는 몸치였다!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비보잉을 보여주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자신의 세계에 빠져 말 그대로 무대를 휘젓고 있었다. 덩실덩실 탈춤을 추면서!
충격 반전이었다.
예술 쪽으로는 꽝인 백민도 춤을 잘 추는지 못 추는지 구별할 정도의 눈은 가지고 있었다.
“……단지 흥 많은 클러버였구나.”
백민은 바다를 부유하는 돛단배처럼 연회장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아래로 묶은 양 갈래머리를 하고 모자를 푹 뒤집어쓴 고운비를 찾아냈다. ‘월리를 찾아라!’급의 숨은그림찾기였다.
고운비는 테이블에 머리를 빼꼼히 내민 채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카나페를 쏙쏙 집어가고 있었다. 옆에 있는 트레이가 빈 것으로 보아, 무시무시한 속도로 쟁반 하나는 벌써 해치운 모양이었다.
“고운비 선배님 저랑 같이 테이블에 앉아서 먹어요.”
뒤쪽으로 접근해서 슬며시 귓속말하니 고운비가 파득거리며 소스라쳤다. 아마 귀가 예민한 부위인가보다.
백민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직장 상사에게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감은 한도 없이 부풀고 겁이 없어지는, 한 마디로 간덩이가 부은 상태였다.
“깜짝이야! 아. 민이 언니였네. 보아하니 언니도 영자 아줌마 계획에 걸려들었구나?”
고운비는 아예 접시를 의자에 올려두고 테이블보를 엄폐물로 이용했다.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 가려다가 백민이 있어서 자제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적이 없었는데 계략이면 어때요.”
그녀는 이제 ‘될 대로 돼라.’하는 무책임한 반응을 보였다. 내일의 뒷감당은 내일의 백민이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일의 백민이 느낄 낭패감을 계산하지 못하고.
“민이 언니! 그게 바로 영자 아줌마의 술수야. 그 이능에 걸리지 않은 입장에서 보면 재밌는 구경거리라고!”
뭣 모르고 만만하게 걸려든 백민과 달리 베테랑 고운비는 감정 통제 이능을 막는 요령도 알고 있었다. 목소리가 매개체가 되므로, 귀를 막으면 이능의 상당 부분을 억누를 수 있었다.
“큰 사고만 치지 마.”
“설마요.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장담하지 않는 게 좋을걸?”
그렇게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중얼거린 고운비는 접시 하나를 두 손으로 잡고 들이마시듯 해치워버렸다.
‘그래도 뭐 악의 섞인 장난은 아니니까. 적당히 즐기고 적절한 수준에서 풀어주시겠지.’
눈을 데룩데룩 굴리던 고운비는 모자를 고쳐 썼다.
“그럼 난 가볼게.”
그리곤 송별회의 주인공인 조영자 팀장에게 다가갔다. 아주 미적지근한 속도였다. 가기 싫은 마음을 참으며 억지로 발을 옮기는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 것처럼, 이능반 8년이면 기본적인 사회생활 요령도 늘기는 늘어나나 보다.
고운비는 조그만 몸으로 인파들 틈을 헤치고 조영자 팀장에게 도달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친 후 고개를 꾸벅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잡기도 전에 쪼르르 사람들 틈으로 숨어들어서 연회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래도 참석한 게 장했다.
시간이 흐르자, 백민은 구름 위에 올라서서 지상을 굽어보는 기분이 되었다. 통쾌했으며 속이 시원하게 뻥 뚫린 것 같았다. 혼자서도 잘 노는 백민이지만, 이럴 때까지 혼자 놀긴 싫었다. 그리고 술 한 잔이 더 들어가면 지금의 기분이 업그레이드될 것 같았다.
우선은 열대 바다의 푸른빛을 닮은 칵테일을 홀짝이는 홍미지 옆으로 갔다. 그녀는 백민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다시 대화상대에게 집중했다.
백민은 물과 비슷한 투명한 칵테일을 한 잔 집어 들었다. 도수가 약해 보이는 술이었기 때문이다. 그 잔을 입술에 가져가는 순간,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는 사람이 있었다. 언제 왔는지 모를 도은강 팀장이었다.
“언제 오셨어요? 심각한 대화 나누시는 것 같았는데.”
“언제 왔는지,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니고. 빨리 잔 내려놔.”
백민은 얇은 줄기 같은 칵테일 잔의 스템(stem)을 손으로 감싸 쥐고 놓지 않았다. 도은강이 그녀의 손을 테이블 쪽으로 끌어당기려 하자 힘을 주고 버텼다.
“왜 갑자기 와서 방해하세요. 놔주세요.”
매번 순순히 순응하던 백민이라서 이런 태도는 낯설었다. 도은강은 낯설어하면서도 끝내 백민의 손가락을 펴 칵테일 잔을 옆에 치워뒀다.
“상태를 보아하니 약한 술도 위험하겠는데. 이거 먹고 무슨 사고를 치려고.”
도은강은 신입생 환영회 날 있었던 피치 못할 사고를 떠올렸다. 백민의 동생들에게 원망을 받게 했던 그 목 뽀뽀 사건 말이다.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게 둘 순 없었다.
이 자리에서 멀쩡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델타 팀 일원은 도은강뿐이었다.
홍미지도 술이 알딸딸하게 들어갔고, 믿었던 이수철마저 맥주에 손을 대 버렸다. 여자 직원들의 질문 공세를 견디느라 술을 마시지 않고는 힘들었으리란 추측이 들었다. 이수철은 난감하고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의를 다해 질문에 대답해주고 있었다. 사권일은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클럽 분위기가 될 때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수 센 거였어요?”
“그것도 모르고 집었어? 진토닉이잖아. 아마 조 팀장님 취향에 맞춰서 제조한 칵테일이라 일반 바에서 마시는 것보다 도수가 더 높을 거다.”
“아. 그래요? 그럼 다른 거 마시면 되죠. 팀장님, 요거는 어때요?”
약한 술도 위험하다는 소리는 귓등으로 흘려보냈는지, 백민은 이제 겁도 없이 도은강에게 칵테일 도수를 확인받고 있었다. 게다가 백민이 검지로 가리킨 칵테일은 블랙 러시안. 화려한 색감의 무알코올에 가까운 칵테일들이 많은데 블랙 러시안이라니.
“왜 하필…….”
옆에서 백민과 도은강의 실랑이를 구경하던 홍미지가 버건디색 입술을 늘이며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도은강이 우스웠다. 그가 저 멀리서 급하게 와서 자신을 벽에 걸린 그림 취급하고 하는 일이 술 단속이라니.
여자 친구 관리하는 걱정 많은 남자도 아니면서.
‘도은강, 너 수상하다?’
홍미지는 도은강과 백민의 미묘한 공기에 흥미를 느꼈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있는 도은강이 연애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했다. 그녀는 둘을 몰래 관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칵테일 잔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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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3화. 이모션컨트롤의 효과조회 : 78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842 32.32화. 도은강 너 수상하다?조회 : 8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36 31.31화. 주식회사 알리우스의 송별회란?조회 : 99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99 30.30화. 한 발 내디딘 후에조회 : 78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93 29.29화. 다녀오세요조회 : 74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187 28.28화. 연약한 소년조회 : 90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528 27.27화. 눈이 짓무르도록조회 : 92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385 26.26화. 자백한다고 봐도 되겠어?조회 : 93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68 25.25화. 이젠 믿어지나요?조회 : 1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874 24.24화. 감마 팀과 협업조회 : 24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083 23.23화. 도은강이 자초한 일조회 : 33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909 22.22화.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는 원석조회 : 52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404 21.21화. 작전은 대성공조회 : 9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250 20.20화. 베타 팀을 위한 작전조회 : 11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40 19.19화. 완전범죄를 모의하다.조회 : 15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259 18.18화. 잠깐 쉬다 가도 되나요?조회 : 9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566 17.17화. 병문안에서 생긴 일조회 : 24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082 16.16화. 델타 팀의 심술이 불러온 결과조회 : 10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860 15.15화. 착각이겠지조회 : 15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209 14.14화. 운이 좋은 사람조회 : 23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873 13.13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 이수철조회 : 34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279 12.12화. 재밌는 녀석이란 말이야조회 : 18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304 11.11화. 누나는 못 줘!조회 : 13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816 10.10화. 신입을 위하여!조회 : 33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265 9.9화. 코드네임 결정전조회 : 2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384 8.8화. 해고를 고려해야겠다조회 : 20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358 7.7화. 잘리진 않겠지?조회 : 60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8,166 6.6화. 맘대로 해봐.조회 : 18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701 5.5화. 현장실습 먼저조회 : 28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618 4.4화. 잘 부탁드립니다조회 : 32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9,355 3.3화. 이능반 델타 팀에 온 걸 환영한다조회 : 26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8,907 2.2화. 꿈 아니라니까!조회 : 4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9,506 1.1화.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길조회 : 1,67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