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이모션컨트롤의 효과
조회 : 786 추천 : 0 글자수 : 5,842 자 2022-12-31
# 33화. 이모션컨트롤의 효과
친구들과 바에 가보기는 했지만, 칵테일 이름이나 언뜻 들어봤을 뿐 실제로 마셔보지는 못했다. 백민은 술을 딱 보고 도수까지 가늠할 정도의 전문가는 아니었다.
“아직은 쌩쌩합니다. 조심하고 있어서 저번같이 필름 끊기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걱정 마세요. 저 술버릇 얌전하다고 했습니다.”
얌전하다니. 어디서 거짓말을! 그게 진실이 아님은 누구보다도 도은강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코웃음을 치려다가 물었다.
“출처가 누구지? 누가…….”
“진이가 그러던데요.”
사실, 막내 백영은 백민의 신입 환영회 날의 정황을 곧이곧대로 알리려 했다. 그러나 누나를 부르며 말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형 백진이 손바닥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백진은 그녀의 낯부끄러운 술버릇을 숨겨두자고 동생을 설득했다. 누나가 그렇게 고주망태가 될 일은 앞으로 없을 거라 믿으며.
도은강은 알만하다는 듯이 픽 웃었다. 오늘은 봐줄까 싶었다. 기분이 구름처럼 둥둥 뜬 백민을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술을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가상했고.
“조금씩 맛만 보도록.”
“……네에.”
백민은 주인에게 ‘기다려.’ 소리를 들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졌다. 그녀의 조영자의 감정제어에 걸려 들떠 있던 터라 기분 변화도 솔직하게 드러났다.
그녀와 도은강은 상사와 부하. 그 외엔 아무 사이도 아니다. 이런 행동까지 간섭받는다는 건 웃겼다. 하지만 어쩐지 거역하기가 힘들었다. 백민은 미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는 그 위화감을 파고드는 대신에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나섰다.
“에이, 그럼 춤이나 추러 가야겠네요.”
간에 기별도 안 갈 정도로 홀짝거려 입맛만 버리느니, 차라리 다른 무리에 끼어 노는 쪽을 택한 것이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차라리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팀원들과 수다나 조금 떨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용기백배한 백민은 무작정 스테이지로 향했다. 어쩐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겉으로 예의 바르고 자기 역할에 충실한 백민은 현실적이고 까칠한 성격이었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은 부정적인 쪽에 가까웠다. 그런 그녀가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빡빡한 스케줄 안에서 이런 즐거움을 경험할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 때문에 감정 컨트롤의 효과가 극대화되었다.
“사권일 선배님에게 무대를 맡겨둘 순 없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사실은 무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뿐!
백민은 무대로 돌진했다.
그녀는 과하지도, 어색하지도 않게 음악을 즐겼다. 바다를 수영하듯 허우적대는 사권일을 밀어내고 무대 중앙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어안이 벙벙해 입을 떡 벌렸던 사권일은 이내 백민이 만들어낸 흐름에 몸을 맡겼다. 춤추는 동지가 하나 늘어나자 그만큼 더 신났다. 그는 눈 내리는 날의 강아지처럼 방방 뛰었다. 조명 아래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혹은 스텝을 밟으며 리듬을 탔다.
몇몇 사람들은 백민의 낯선 얼굴을 보며 수런거렸다.
“저 여자는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마당발인 네가 모른다면 이능반에 들어왔다던 걔밖에 더 있어? 아 왜, 그 연금술사랑 같은 이능을 가졌다던!”
“아하, 그 환상구현능력자! 델타 팀 팀장이 아주 애지중지한다던데?”
“그 소린 또 어디서 얻어들었어? 그 지독한 일벌레가 사람을 아껴?”
“그만큼 이능이 대단하단 뜻 아니겠어?”
알리우스 주식회사에 소속된 능력자들이 도은강을 모를 수가 없었다. 수년을 일해 온 직원들은 그와 어떤 식으로든 얽혀서 죽도록 고생해봤으니까. 상대적으로 짧은 경력을 가진 직원들도 그에 관한 악평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다. 그가 얼마나 완벽을 추구하는지, 얼마나 일에 미쳐있는지.
‘더러워서 피하냐, 피곤해서 알아서 피한다.’가 도은강에 대한 평이었으니, 그가 얼마나 심각한 일 중독자인지 알만했다.
그런 그가 애지중지한다면, ‘업무 능력이 뛰어나서’라는 이유여야만 이해가 된다. 도은강은 발로 그린 그림 실력을 가진 백민에게 적응 기간을 주려고 협조 요청을 마다했으나, 그들은 델타 팀 내부 사정을 알 순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본의 아니게 백민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버렸다.
요란한 클럽 음악이 다른 곡으로 바뀌면서 리듬이 느려졌다. 여전히 신나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과 대화할 때 언성을 덜 높여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백민은 마음 내키는 대로 박자에 맞춰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노래가 빨라지면 빨라지는 대로, 몸을 맘껏 흔들었다. 클럽과 친하지 않아서 어설픈 그 춤사위가 시선을 끌었다. 그 시선의 주인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그녀는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잠재되어 있던 뻔뻔함까지 전부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모든 것은 조영자 팀장의 이능, 이모션컨트롤 탓이었다. 그렇게 변명거리가 주어지니 멋대로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듯 마음까지 편했다.
그렇게 저도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를 밑바닥까지 긁어 발산하기를 한참. 그녀를 유심히 보던 남자 하나가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 안녕하세요. 백민 씨.”
곱슬기 있는 단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30대 초반에서 중반.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길러 일본 배우 같았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회사 안에서 언젠가는 마주치게 될 사람이기도 했다. 백민은 리듬에 올라탄 채 인사를 받았다. 평소라면 꿈도 못 꿀 시건방진 태도였지만, 백민은 자각하지 못했다.
“네. 안녕하세요.”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난 연구반 소속 기파랑이라고 합니다.”
드문 기 씨 성이라서 일부러 이름을 파랑으로 지었을까. 이름 때문에 놀림 좀 받았을 것 같았다. 찬기파랑가라는 신라 시대 향가가 바로 떠 오르는 걸 보면.
백민은 살짝 커진 눈 그대로 가볍게 웃었다. 놀람을 내색하지 않을 이성은 남아있었다.
“아. 저는 이능반 델타 팀 백민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소개를 하자, 그는 잠깐 스테이지에서 벗어나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백민은 흔쾌히 그와 함께 디저트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나왔다.
“제가 방해한 것 같네요. 그렇지만 이때가 아니면 보면서 제안하긴 어려울 것 같아서 말이죠.”
“무슨 뜻이신지…….”
기파랑은 의문이 담긴 백민의 표정을 보고 아, 하고 납득했다.
그는 이능반 델타 팀에 협조 요청을 여러 번 넣었다. 그렇지만 본인이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팀장 도은강이 중간에서 차단하는 건지 답변은 깜깜무소식. 이제야 어떻게 된 사연인지 이해가 됐다.
“그냥 우리가 만날 시간이 지금밖에 없었다고 아시면 됩니다.”
빙그레 웃으며, 남자는 부드러운 어조로 얼버무렸다. 수염을 기르면 야성적으로 보일 만도 한데, 무표정이어도 웃는 상이다 보니 자상해 보였다. 향이 좋은 커피를 한 잔 들고 광고를 찍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말을 고르던 기파랑은 백민이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 보이자 본론부터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우리 연구반에 백민 씨를 초청하고 싶습니다. 초청이라는 거창한 단어보다는 초대가 낫겠네요. 한 마디로 우리 연구반에 놀러 오세요, 하고 권하고 싶어서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아! 물론이죠. 저도 연구반에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초대해주신다면 기꺼이 가야죠!”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그런데 그, 기파랑 씨에게 초대를 받긴 했지만 제가 막 들어가도 되나요? 다른 분들 연구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소와 귓가에 울리는 다정다감한 어조. 슬금슬금 나오던 불안도 쏙 들어가게 하는 평온한 목소리였다. 백민은 걱정 말라는 이유를 물어봐야겠단 생각도 못 했건만, 다른 이가 뒤에서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건 우리 파랑 씨가 연구반을 이끌 차기 팀장이기 때문이지.”
송별회의 주인공인 조영자 팀장이 어디선가 나타나 덧붙여 말했다. 백민이 돌아보니 그녀는 푸근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자애로운 표정으로.
“파랑 씨는 연구반의 실질적인 리더야. 팀장 외에 다른 직책은 없어도, 연구반 모두의 의견을 모아야 할 때 찾게 되는 사람? 그렇게 보면 돼요.”
그렇다면 백민이 연구반에 불쑥 찾아가도 트집은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뒤에서 쑥덕거릴 순 있어도.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그렇답니다. 언제든 방문해주세요.”
기파랑은 베이지색 얇은 니트 위에 입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이름과 핸드폰 번호, 이메일만 적힌 개인용 명함. 회사 이름이나 주소도 없었다. 능력자들이 모인 회사가 일반인에게 드러날 단서는 애초에 차단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아무튼, 백민은 조만간 연구반에 가보기로 계획했다. 연구반의 연구실은 발명왕의 보물창고처럼 신기하고 놀라울 것 같았다. 그리고 드리머(Dreamer) 김선위가 잘 지내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파트너 도은강과의 일정이 빠듯하긴 했지만, 시간을 내자면 못 낼 것도 없었다. 도은강은 맡은 업무를 깔끔하게 처리한 후 남은 시간에는 간섭하지 않으니까.
“파랑 씨, 음흉하네. 델타 팀 아가 이능이 연구해보고 싶은 거면서~”
조영자 팀장이 기파랑의 팔을 장난식으로 살짝 때렸다. 여전히 싱글거리는 얼굴 탓에 백민은 위기감도 느끼지 못했다. 연구반에 가면 무슨 상황에 부닥칠지도 모르면서.
“그걸 말씀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백민 씨가 우리 팀에 오기 무서워지지 않습니까.”
본심이 드러났는데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 굳이 말할 생각까진 없지만 숨길 생각도 없었던 것 같았다. 난감한 기색이 묻어나긴 했으나 그게 전부.
스스로 당당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특유의 분위기가 그에게서 느껴졌다. 자기 확신이 강해서 타인의 시선이나 반응에 휘둘리지 않았다. 외양은 부드럽고 내면은 강한 외유내강형 인간이었다.
“괜찮습니다. 권해주지 않으셨어도 언제고 한번은 가봤을 거예요. 그런데 이능 연구는 어떤 식으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르모트가 되어 생체실험을 당하는 건 아니라 여겼으나 찜찜했다.
“겁먹진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이었다. 해가 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집요하고 끈질긴 질문과 검사에 진저리를 칠 순 있지만.
“네에…….”
“자세히 설명하는 것보단 한번 오시는 편이 빠를 겁니다. 한가한 시간에 방문해주십시오. 팀원들이 백민 씨 이능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고 있거든요.”
아직 수습 기간도 끝나지 않은 백민은 모르지만, 연구반은 괴짜 중의 괴짜들이 모인 곳. 그녀가 실체를 안다면, 무서워하지는 않아도 발길을 쉽게 옮기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기파랑은 산뜻한 태도로 나중을 기약하면서 자리를 떴다. 얼굴도 비추고 용건도 해결했으니 할 만큼 했다면서.
그는 천생 연구자 유형이었다. 조영자 팀장에게 듣기로 그는 지도력 있는 남자지만 이능 연구에 푹 빠져있어서 팀장 자리도 달가워하지 않았단다.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던 송별회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 부르자 손을 흔들며 그쪽으로 가버렸다.
혼자 남은 백민은 재차 스테이지로 갈까 하다가 물 한잔을 마시며 숨을 골랐다. 송별회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주위를 둘러보다 다들 기분 좋은 얼굴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델타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춤추다가 지쳤는지 DJ 옆에 붙어서 디제잉에 관심을 보이는 사권일. 친분이 있는 직원들과 샴페인 한 잔을 하며 사담을 나누는 홍미지. 세인트버나드 헤이즐넛을 꼭 껴안고서 동물 애호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수철. 그리고 스테이지를 구경하면서 달라붙는 여자를 성가셔하는 도은강.
‘……여자?’
그녀는 역시나 낯선 사람이었으나 예쁘장한 외모와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알리우스사의 직원일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애교 있게 말을 걸고 있었다. 발그레한 볼은 블러셔로 만들어진 색이 아니었다. 거리가 있어서 대화 내용까지 들리진 않았지만, 도은강을 남자로 보고 치근덕거리는 게 분명했다.
그를 일하는 로봇쯤으로 여기던 백민에게는 생소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들 주위에 있는 직원들은 둘에게 곁눈질하더니 각자 제 할 일을 했다. 얼마나 빈번하게 벌어지면 그럴까!
들떴던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왜지? 왜? 왜?’
명백하게 기분 나빠지고 있는데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친구들과 바에 가보기는 했지만, 칵테일 이름이나 언뜻 들어봤을 뿐 실제로 마셔보지는 못했다. 백민은 술을 딱 보고 도수까지 가늠할 정도의 전문가는 아니었다.
“아직은 쌩쌩합니다. 조심하고 있어서 저번같이 필름 끊기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걱정 마세요. 저 술버릇 얌전하다고 했습니다.”
얌전하다니. 어디서 거짓말을! 그게 진실이 아님은 누구보다도 도은강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코웃음을 치려다가 물었다.
“출처가 누구지? 누가…….”
“진이가 그러던데요.”
사실, 막내 백영은 백민의 신입 환영회 날의 정황을 곧이곧대로 알리려 했다. 그러나 누나를 부르며 말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형 백진이 손바닥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백진은 그녀의 낯부끄러운 술버릇을 숨겨두자고 동생을 설득했다. 누나가 그렇게 고주망태가 될 일은 앞으로 없을 거라 믿으며.
도은강은 알만하다는 듯이 픽 웃었다. 오늘은 봐줄까 싶었다. 기분이 구름처럼 둥둥 뜬 백민을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술을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가상했고.
“조금씩 맛만 보도록.”
“……네에.”
백민은 주인에게 ‘기다려.’ 소리를 들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졌다. 그녀의 조영자의 감정제어에 걸려 들떠 있던 터라 기분 변화도 솔직하게 드러났다.
그녀와 도은강은 상사와 부하. 그 외엔 아무 사이도 아니다. 이런 행동까지 간섭받는다는 건 웃겼다. 하지만 어쩐지 거역하기가 힘들었다. 백민은 미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는 그 위화감을 파고드는 대신에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나섰다.
“에이, 그럼 춤이나 추러 가야겠네요.”
간에 기별도 안 갈 정도로 홀짝거려 입맛만 버리느니, 차라리 다른 무리에 끼어 노는 쪽을 택한 것이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차라리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팀원들과 수다나 조금 떨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용기백배한 백민은 무작정 스테이지로 향했다. 어쩐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겉으로 예의 바르고 자기 역할에 충실한 백민은 현실적이고 까칠한 성격이었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은 부정적인 쪽에 가까웠다. 그런 그녀가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빡빡한 스케줄 안에서 이런 즐거움을 경험할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 때문에 감정 컨트롤의 효과가 극대화되었다.
“사권일 선배님에게 무대를 맡겨둘 순 없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사실은 무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뿐!
백민은 무대로 돌진했다.
그녀는 과하지도, 어색하지도 않게 음악을 즐겼다. 바다를 수영하듯 허우적대는 사권일을 밀어내고 무대 중앙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어안이 벙벙해 입을 떡 벌렸던 사권일은 이내 백민이 만들어낸 흐름에 몸을 맡겼다. 춤추는 동지가 하나 늘어나자 그만큼 더 신났다. 그는 눈 내리는 날의 강아지처럼 방방 뛰었다. 조명 아래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혹은 스텝을 밟으며 리듬을 탔다.
몇몇 사람들은 백민의 낯선 얼굴을 보며 수런거렸다.
“저 여자는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마당발인 네가 모른다면 이능반에 들어왔다던 걔밖에 더 있어? 아 왜, 그 연금술사랑 같은 이능을 가졌다던!”
“아하, 그 환상구현능력자! 델타 팀 팀장이 아주 애지중지한다던데?”
“그 소린 또 어디서 얻어들었어? 그 지독한 일벌레가 사람을 아껴?”
“그만큼 이능이 대단하단 뜻 아니겠어?”
알리우스 주식회사에 소속된 능력자들이 도은강을 모를 수가 없었다. 수년을 일해 온 직원들은 그와 어떤 식으로든 얽혀서 죽도록 고생해봤으니까. 상대적으로 짧은 경력을 가진 직원들도 그에 관한 악평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다. 그가 얼마나 완벽을 추구하는지, 얼마나 일에 미쳐있는지.
‘더러워서 피하냐, 피곤해서 알아서 피한다.’가 도은강에 대한 평이었으니, 그가 얼마나 심각한 일 중독자인지 알만했다.
그런 그가 애지중지한다면, ‘업무 능력이 뛰어나서’라는 이유여야만 이해가 된다. 도은강은 발로 그린 그림 실력을 가진 백민에게 적응 기간을 주려고 협조 요청을 마다했으나, 그들은 델타 팀 내부 사정을 알 순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본의 아니게 백민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버렸다.
요란한 클럽 음악이 다른 곡으로 바뀌면서 리듬이 느려졌다. 여전히 신나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과 대화할 때 언성을 덜 높여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백민은 마음 내키는 대로 박자에 맞춰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노래가 빨라지면 빨라지는 대로, 몸을 맘껏 흔들었다. 클럽과 친하지 않아서 어설픈 그 춤사위가 시선을 끌었다. 그 시선의 주인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그녀는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잠재되어 있던 뻔뻔함까지 전부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모든 것은 조영자 팀장의 이능, 이모션컨트롤 탓이었다. 그렇게 변명거리가 주어지니 멋대로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듯 마음까지 편했다.
그렇게 저도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를 밑바닥까지 긁어 발산하기를 한참. 그녀를 유심히 보던 남자 하나가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 안녕하세요. 백민 씨.”
곱슬기 있는 단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30대 초반에서 중반.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길러 일본 배우 같았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회사 안에서 언젠가는 마주치게 될 사람이기도 했다. 백민은 리듬에 올라탄 채 인사를 받았다. 평소라면 꿈도 못 꿀 시건방진 태도였지만, 백민은 자각하지 못했다.
“네. 안녕하세요.”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난 연구반 소속 기파랑이라고 합니다.”
드문 기 씨 성이라서 일부러 이름을 파랑으로 지었을까. 이름 때문에 놀림 좀 받았을 것 같았다. 찬기파랑가라는 신라 시대 향가가 바로 떠 오르는 걸 보면.
백민은 살짝 커진 눈 그대로 가볍게 웃었다. 놀람을 내색하지 않을 이성은 남아있었다.
“아. 저는 이능반 델타 팀 백민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소개를 하자, 그는 잠깐 스테이지에서 벗어나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백민은 흔쾌히 그와 함께 디저트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나왔다.
“제가 방해한 것 같네요. 그렇지만 이때가 아니면 보면서 제안하긴 어려울 것 같아서 말이죠.”
“무슨 뜻이신지…….”
기파랑은 의문이 담긴 백민의 표정을 보고 아, 하고 납득했다.
그는 이능반 델타 팀에 협조 요청을 여러 번 넣었다. 그렇지만 본인이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팀장 도은강이 중간에서 차단하는 건지 답변은 깜깜무소식. 이제야 어떻게 된 사연인지 이해가 됐다.
“그냥 우리가 만날 시간이 지금밖에 없었다고 아시면 됩니다.”
빙그레 웃으며, 남자는 부드러운 어조로 얼버무렸다. 수염을 기르면 야성적으로 보일 만도 한데, 무표정이어도 웃는 상이다 보니 자상해 보였다. 향이 좋은 커피를 한 잔 들고 광고를 찍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말을 고르던 기파랑은 백민이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 보이자 본론부터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우리 연구반에 백민 씨를 초청하고 싶습니다. 초청이라는 거창한 단어보다는 초대가 낫겠네요. 한 마디로 우리 연구반에 놀러 오세요, 하고 권하고 싶어서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아! 물론이죠. 저도 연구반에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초대해주신다면 기꺼이 가야죠!”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그런데 그, 기파랑 씨에게 초대를 받긴 했지만 제가 막 들어가도 되나요? 다른 분들 연구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소와 귓가에 울리는 다정다감한 어조. 슬금슬금 나오던 불안도 쏙 들어가게 하는 평온한 목소리였다. 백민은 걱정 말라는 이유를 물어봐야겠단 생각도 못 했건만, 다른 이가 뒤에서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건 우리 파랑 씨가 연구반을 이끌 차기 팀장이기 때문이지.”
송별회의 주인공인 조영자 팀장이 어디선가 나타나 덧붙여 말했다. 백민이 돌아보니 그녀는 푸근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자애로운 표정으로.
“파랑 씨는 연구반의 실질적인 리더야. 팀장 외에 다른 직책은 없어도, 연구반 모두의 의견을 모아야 할 때 찾게 되는 사람? 그렇게 보면 돼요.”
그렇다면 백민이 연구반에 불쑥 찾아가도 트집은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뒤에서 쑥덕거릴 순 있어도.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그렇답니다. 언제든 방문해주세요.”
기파랑은 베이지색 얇은 니트 위에 입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이름과 핸드폰 번호, 이메일만 적힌 개인용 명함. 회사 이름이나 주소도 없었다. 능력자들이 모인 회사가 일반인에게 드러날 단서는 애초에 차단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아무튼, 백민은 조만간 연구반에 가보기로 계획했다. 연구반의 연구실은 발명왕의 보물창고처럼 신기하고 놀라울 것 같았다. 그리고 드리머(Dreamer) 김선위가 잘 지내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파트너 도은강과의 일정이 빠듯하긴 했지만, 시간을 내자면 못 낼 것도 없었다. 도은강은 맡은 업무를 깔끔하게 처리한 후 남은 시간에는 간섭하지 않으니까.
“파랑 씨, 음흉하네. 델타 팀 아가 이능이 연구해보고 싶은 거면서~”
조영자 팀장이 기파랑의 팔을 장난식으로 살짝 때렸다. 여전히 싱글거리는 얼굴 탓에 백민은 위기감도 느끼지 못했다. 연구반에 가면 무슨 상황에 부닥칠지도 모르면서.
“그걸 말씀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백민 씨가 우리 팀에 오기 무서워지지 않습니까.”
본심이 드러났는데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 굳이 말할 생각까진 없지만 숨길 생각도 없었던 것 같았다. 난감한 기색이 묻어나긴 했으나 그게 전부.
스스로 당당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특유의 분위기가 그에게서 느껴졌다. 자기 확신이 강해서 타인의 시선이나 반응에 휘둘리지 않았다. 외양은 부드럽고 내면은 강한 외유내강형 인간이었다.
“괜찮습니다. 권해주지 않으셨어도 언제고 한번은 가봤을 거예요. 그런데 이능 연구는 어떤 식으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르모트가 되어 생체실험을 당하는 건 아니라 여겼으나 찜찜했다.
“겁먹진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이었다. 해가 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집요하고 끈질긴 질문과 검사에 진저리를 칠 순 있지만.
“네에…….”
“자세히 설명하는 것보단 한번 오시는 편이 빠를 겁니다. 한가한 시간에 방문해주십시오. 팀원들이 백민 씨 이능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고 있거든요.”
아직 수습 기간도 끝나지 않은 백민은 모르지만, 연구반은 괴짜 중의 괴짜들이 모인 곳. 그녀가 실체를 안다면, 무서워하지는 않아도 발길을 쉽게 옮기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기파랑은 산뜻한 태도로 나중을 기약하면서 자리를 떴다. 얼굴도 비추고 용건도 해결했으니 할 만큼 했다면서.
그는 천생 연구자 유형이었다. 조영자 팀장에게 듣기로 그는 지도력 있는 남자지만 이능 연구에 푹 빠져있어서 팀장 자리도 달가워하지 않았단다.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던 송별회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 부르자 손을 흔들며 그쪽으로 가버렸다.
혼자 남은 백민은 재차 스테이지로 갈까 하다가 물 한잔을 마시며 숨을 골랐다. 송별회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주위를 둘러보다 다들 기분 좋은 얼굴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델타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춤추다가 지쳤는지 DJ 옆에 붙어서 디제잉에 관심을 보이는 사권일. 친분이 있는 직원들과 샴페인 한 잔을 하며 사담을 나누는 홍미지. 세인트버나드 헤이즐넛을 꼭 껴안고서 동물 애호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수철. 그리고 스테이지를 구경하면서 달라붙는 여자를 성가셔하는 도은강.
‘……여자?’
그녀는 역시나 낯선 사람이었으나 예쁘장한 외모와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알리우스사의 직원일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애교 있게 말을 걸고 있었다. 발그레한 볼은 블러셔로 만들어진 색이 아니었다. 거리가 있어서 대화 내용까지 들리진 않았지만, 도은강을 남자로 보고 치근덕거리는 게 분명했다.
그를 일하는 로봇쯤으로 여기던 백민에게는 생소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들 주위에 있는 직원들은 둘에게 곁눈질하더니 각자 제 할 일을 했다. 얼마나 빈번하게 벌어지면 그럴까!
들떴던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왜지? 왜? 왜?’
명백하게 기분 나빠지고 있는데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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