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한 발 내디딘 후에
조회 : 773 추천 : 0 글자수 : 5,293 자 2022-12-16
# 30화. 한 발 내디딘 후에
그림구현능력을 정식으로 활용해 본 첫 의뢰.
백민에게 그 의뢰는 의미가 깊었다. 다른 임무들을 했을 때보다 어려워서 신경을 쏟아야 했다는 점도 그렇지만, 의뢰인과 자주 만나며 정신적인 유대를 쌓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직접적인 대화는 별로 많지 않았어도 감정을 드러낼 일이 잦았던 만큼 그 깊이가 남달랐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생기는 ‘라포르’ 같은 감정이랄까.
백민은 가끔 김선위가 어떻게 지내는지 슬쩍 확인하곤 했다. 개인적으로 유오연 팀장에게 연락을 취한다거나 고운비에게 부탁해 정보를 알아내는 식으로 말이다.
겉으론 냉정한 성격으로 보이는 그녀였지만 한번 정을 주면 잘 챙겨주는 큰 누나 스타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소년의 동태에 관심을 기울이던 백민의 귀에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다.
바로 김선위가 알리우스사(社)에 입사했다는 소식!
가족들을 얼굴을 보며 제대로 이별 인사를 한 뒤, 소년은 다시 조사를 받고 혐의를 벗어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싶다며 집으로 돌아간 소년을 회사로 불러들인 사람은 연구반 직원 중 하나. 소년의 이능을 눈여겨보던 그는 그 이능이 담긴 물품을 개발하고 싶어졌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좋은 꿈을 선사하는 이능이 인기 있겠다고 생각했다. 꿈은 하루의 몸 상태와 기분까지 좌우하는 효과가 있으니까.
특히 원치 않는 이능을 가진 능력자들이나 이능피해를 입은 이들의 재활에 큰 도움이 터였다. 이건 현장에서 능력자들의 복지를 책임지는 유오연 팀장의 견해여서 신뢰가 대폭 상승했다.
그뿐만 아니라 능력자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일반인에게도 효과적인 회유책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능 물품을 지녀 행복한 꿈을 꾸더라도 누가 그 이능 물품 덕에 그 꿈을 꿨다고 생각할까. 일반인이 이능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다는 점은 이능 물품의 활용도를 넓혔다.
연구를 시작하는 단계라 결과를 얻으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래도 그 시도는 바람직했고 성공 가능성이 컸다. 만족할만한 성과가 나온다면 백민도 하나 가지고 싶은 물품이었으니까.
김선위가 입사를 결정했다는 건 김선위에게도 목표가 생겼다는 뜻이고, 주변 사람들과 섞여 인연을 쌓아갈 시간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긍정적인 신호였다.
“어쩐지 뿌듯하네.”
백민은 빙그레 웃으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몸만이 아니라 정신도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팀장 도은강도 마찬가지 심정일 거라고 짐작했다.
골칫덩이였던 이능 증폭, 이능 복사 능력자 문제도 원만하게 해결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현재, 알파 팀에게 체포된 그들은 감옥에 갇혀서 이능억제 수갑을 찬 채, 조사받는 중이란다. 나중에 교화시킨 후에 초능력자 협회의 일원으로 활약할 수도 있다는데, 확정된 사항은 아니었다.
아무 사고 없이 일이 마무리되어서 다행이었다. 이제 깨끗하게 걱정을 씻어버려도 괜찮았다.
김선위와 같은 팸에 있던 이능 증폭, 복사 능력자들이 잡혔다는 건, 도은강도 알파 팀과의 협력을 무사히 마쳤다는 뜻. 그 덕분에 백민은 도은강과 델타 팀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잘 있었나?”
“저는 잘 있었습니다. 팀장님은 조금 더 쉬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도은강은 사건이 일단락되자마자 사무실에 출근해서 그동안 미뤄뒀던 업무를 처리했다. 밤을 새우기도 했고 잠복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텐데, 그는 일이 끝나자마자 집이 아니라 회사로 돌아왔다.
과연, 중증 일 중독자다운 행동이었다.
“쉬어야 할 만큼 내가 약하진 않거든.”
어떤 면에선 대단하기까지 했다. 백민은 속으로 걱정과 감탄을 함께 했다. 무릇 사람이라면 일한 후에는 쉬어줘야 하건만, 도은강은 그에 해당하지 않았다. 기름칠한 기계부품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 얘긴 그만. 알아서 할 테니까.”
그 ‘알아서 한다.’라는 말은 매우 못 미더웠다. 하지만 일개 신입직원이 참견하고 지적할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였다. 동생이라면 한 대 쥐어박고 나서 침대에 억지로 눕혀버릴 작태였지만.
“그나저나. 백민, 유 팀장님이 칭찬하시던데? 이능제어 향상 속도도 빠르고, 이번 의뢰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도 전부 네 덕이라고 말이야.”
“유오연 팀장님이 그러셨어요?”
볼이 화끈거렸다. 자꾸 입이 귀에 걸리려고 해서 애써 입가에 힘을 줬다. 직설적인 칭찬은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쌓인 피곤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잃었던 자신감마저 모조리 되돌려주었다.
백민은 어디서도 손끝이 야무지고 일 처리가 빠르다고 칭찬받았었다. 그러나 이능반에 들어오면서 그 흉악한 손재주 탓에 알게 모르게 의기소침해진 상태였다. 그러니 유오연 팀장의 평가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백민은 발그레 달아올라서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도은강은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반성했다. 얼마나 칭찬에 굶주렸으면 매사에 무덤덤한 편인 백민이 기쁨을 감추질 못할까.
“훌륭했다. 백민. 어엿한 델타 팀 일원이라고 봐도 되겠는데?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군.”
백민은 낯이 간지러워졌다. 하지만 그 달콤한 말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 칭찬을 받아들였다.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겸양 섞인 태도였지만, 그녀의 달아오른 귓불에서 솔직한 마음이 탄로 나버렸다. 도은강은 뻣뻣한 척하는 이 아가씨가 귀여워서 속으로 웃었다.
“오늘 일정에 대해 들었나?”
흐뭇하게 웃던 도은강은 업무로 화제를 돌렸다. 백민이 스케줄을 다시 살펴보며 대답했다.
“의뢰 5건을 제외하면 못 들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팀원들한테 못 들었다면 모를 만도 하지. 공식적인 업무로 잡히지 않은 행사니까.”
“무슨 일이……?”
“저녁에 송별회가 있다. 연구반에서 이번에 퇴임하는 분이 계시거든.”
긴 세월을 알리우스에서 일하다가 정식으로 퇴임하는 직원은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었다. 물론 알리우스 주식회사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았고, 예기치 않은 사고가 생겨 어쩔 수 없이 은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원인은 능력자 대부분에게 ‘알리우스’라는 회사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 초능력자 협회는 스카우트로만 채용하므로 입사가 매우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업무 강도가 높고 위험한 직장이었다.
게다가 자유분방한 능력자들에겐 진득하게 직장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 때문에 돈에 얽매이지 않는 금수저 능력자들은 금세 그만두고 떠나곤 했다.
“아, 그럼 퇴임식은 따로 하지 않나요?”
“회사 차원에서 하진 않고 연구반 내에선 할 거야. 다만 그분께 신세 지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송별회는 다 같이 하는 거지. 백민, 7시까지 준비 마치고 대기해.”
여전히 기분 좋은 상태인 백민은 힘차게 대답했다. 도은강은 픽 웃고는 데스크에 앉아 밀린 일을 처리했다. 그는 ‘일하면서 쉬는’ 못 말릴 워커홀릭이었다. 이 모습은 일상으로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려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의 역린을 없애기 전까지는.
#
초능력자 협회에 이능 조절이 서툰 능력자는 없다. 하지만, 송별회에서는 무슨 실수가 벌어질지 모르는 법. 그런 이유로 장소는 회사빌딩 안에 마련되었다. 백민이 가보지 않은 위층엔 연회장도 있었는데, 그곳이 송별회 장소로 당첨되었다.
송별회가 생소한 백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도중에 사권일에게 물었다.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개성적인 특징이 있지는 않은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지던 사권일이 고개를 돌렸다. 애쉬그레이로 염색된 머리카락이 젤로 고정되어 삐죽삐죽 솟아있었다.
“별거 없어. 먹고 죽자 하고 주야장천 술만 마시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일까? 이번 송별회의 주인공은 술고래시거든.”
“아, 선배님도 그분에 대해 아시겠네요.”
사권일은 안다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구자에 대해 어떤 선입관이 있을지 아는데, 그거랑은 전혀 다를걸?”
“그래요?”
연구자? 백민은 아인슈타인 같은 허연 머리에 안경, 퀭한 눈 밑, 꼬질꼬질한 하얀 가운을 떠올렸다. 그동안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와 진짜 그분 보통 아님! 나 예전엔 엄청 시달렸었어.”
무언가 떠올린 것처럼 순간 사권일의 얼굴이 잔뜩 우그러졌다. 치를 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 모습으로 보아 예사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천천히 확인해봐. 내 생각에 넌 그분한테 엄청 귀염받을 타입이다. 각오 단단히 해둬. 아가씨.”
귀염받는 것도 각오를 해야 하는 문젠가? 백민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연회장으로 향하는 커다란 문을 열었다.
환한 조명이 눈앞을 눈부시게 가렸다. 백민은 잠시 후 연회장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백민에게 ‘송별회’란 고기 냄새 풀풀 나는 삼겹살집에서 죽어라 술을 퍼마시는 이미지였다. 회사 내 연회장에서 한다기에 ‘그런 분위기는 아니겠구나.’ 했는데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송별회라기보단 대기업 취임식 분위기에 가까웠다. 능력자의 고유 특성상 그렇게 격식 차리는 행사는 아니겠지만, 환했고 화려했다. 약속된 시간보다 일러선지 아직 어수선하긴 했지만.
“우리 너무 빨리 왔나 봅니다. 사권일 선배님.”
“으음. 그러네. 다들 그렇게 빠릿빠릿한 스타일은 아니야. 7시라고 했어도 8시는 되어야 시작할걸? 일종의 ‘에스퍼 타임’이랄까.”
아무리 회사원이 되었다고 해도 능력자들은 제멋대로인 경향이 있었다. 특히 이렇게 능력자들끼리 모이는 약속에서는 한층 심해졌다. 자유롭고 유연한 인간들이라고 좋게 포장할 수도 있지만, 방만하다고 볼 수도 있는 인간들이었다.
시간관념이 철저한 도은강과 함께 팀을 이뤘던 백민에겐 사권일의 설명이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평소라면 서둘러서 참석했을 도은강이 사무실에서 서류업무를 더 보다 오겠다는 이유가 납득이 됐다.
연회장 내에 사람은 몇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들마저도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주위를 돌아다녔다.
“우리도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내려서 이따 오자고 했겠는데, 우리 후배님은 도와주는 편이 낫겠다.”
백민이 의아해하자 사권일이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 있는 분들 본 적 없잖아. 일하다 보면 저절로 얼굴을 익히게 되겠지만, 부지런하고 싹싹하다는 첫인상을 주는 편이 좋지 않겠어?”
“그러네요! 조언 감사합니다. 선배님.”
백민은 꾸벅 인사한 후에 사람들이 모인 자리로 빠르게 멀어졌다. 사권일은 눈 깜짝할 새 사라져버린 막내 팀원을 보면서 얼이 빠졌다.
“야! 그렇게 서둘러 갈 필요는 없잖아…….”
백민은 맨날 팀장 도은강과 쉴 틈 없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모든 것은 전적으로 그 사실을 바로 떠올리지 못한 사권일 탓이었다. 혼자 남은 그는 귀찮아서 툴툴거리면서도 백민을 뒤따라갔다.
“일 복을 타고났어요. 내가……….”
그림구현능력을 정식으로 활용해 본 첫 의뢰.
백민에게 그 의뢰는 의미가 깊었다. 다른 임무들을 했을 때보다 어려워서 신경을 쏟아야 했다는 점도 그렇지만, 의뢰인과 자주 만나며 정신적인 유대를 쌓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직접적인 대화는 별로 많지 않았어도 감정을 드러낼 일이 잦았던 만큼 그 깊이가 남달랐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생기는 ‘라포르’ 같은 감정이랄까.
백민은 가끔 김선위가 어떻게 지내는지 슬쩍 확인하곤 했다. 개인적으로 유오연 팀장에게 연락을 취한다거나 고운비에게 부탁해 정보를 알아내는 식으로 말이다.
겉으론 냉정한 성격으로 보이는 그녀였지만 한번 정을 주면 잘 챙겨주는 큰 누나 스타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소년의 동태에 관심을 기울이던 백민의 귀에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다.
바로 김선위가 알리우스사(社)에 입사했다는 소식!
가족들을 얼굴을 보며 제대로 이별 인사를 한 뒤, 소년은 다시 조사를 받고 혐의를 벗어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싶다며 집으로 돌아간 소년을 회사로 불러들인 사람은 연구반 직원 중 하나. 소년의 이능을 눈여겨보던 그는 그 이능이 담긴 물품을 개발하고 싶어졌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좋은 꿈을 선사하는 이능이 인기 있겠다고 생각했다. 꿈은 하루의 몸 상태와 기분까지 좌우하는 효과가 있으니까.
특히 원치 않는 이능을 가진 능력자들이나 이능피해를 입은 이들의 재활에 큰 도움이 터였다. 이건 현장에서 능력자들의 복지를 책임지는 유오연 팀장의 견해여서 신뢰가 대폭 상승했다.
그뿐만 아니라 능력자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일반인에게도 효과적인 회유책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능 물품을 지녀 행복한 꿈을 꾸더라도 누가 그 이능 물품 덕에 그 꿈을 꿨다고 생각할까. 일반인이 이능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다는 점은 이능 물품의 활용도를 넓혔다.
연구를 시작하는 단계라 결과를 얻으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래도 그 시도는 바람직했고 성공 가능성이 컸다. 만족할만한 성과가 나온다면 백민도 하나 가지고 싶은 물품이었으니까.
김선위가 입사를 결정했다는 건 김선위에게도 목표가 생겼다는 뜻이고, 주변 사람들과 섞여 인연을 쌓아갈 시간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긍정적인 신호였다.
“어쩐지 뿌듯하네.”
백민은 빙그레 웃으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몸만이 아니라 정신도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팀장 도은강도 마찬가지 심정일 거라고 짐작했다.
골칫덩이였던 이능 증폭, 이능 복사 능력자 문제도 원만하게 해결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현재, 알파 팀에게 체포된 그들은 감옥에 갇혀서 이능억제 수갑을 찬 채, 조사받는 중이란다. 나중에 교화시킨 후에 초능력자 협회의 일원으로 활약할 수도 있다는데, 확정된 사항은 아니었다.
아무 사고 없이 일이 마무리되어서 다행이었다. 이제 깨끗하게 걱정을 씻어버려도 괜찮았다.
김선위와 같은 팸에 있던 이능 증폭, 복사 능력자들이 잡혔다는 건, 도은강도 알파 팀과의 협력을 무사히 마쳤다는 뜻. 그 덕분에 백민은 도은강과 델타 팀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잘 있었나?”
“저는 잘 있었습니다. 팀장님은 조금 더 쉬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도은강은 사건이 일단락되자마자 사무실에 출근해서 그동안 미뤄뒀던 업무를 처리했다. 밤을 새우기도 했고 잠복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텐데, 그는 일이 끝나자마자 집이 아니라 회사로 돌아왔다.
과연, 중증 일 중독자다운 행동이었다.
“쉬어야 할 만큼 내가 약하진 않거든.”
어떤 면에선 대단하기까지 했다. 백민은 속으로 걱정과 감탄을 함께 했다. 무릇 사람이라면 일한 후에는 쉬어줘야 하건만, 도은강은 그에 해당하지 않았다. 기름칠한 기계부품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 얘긴 그만. 알아서 할 테니까.”
그 ‘알아서 한다.’라는 말은 매우 못 미더웠다. 하지만 일개 신입직원이 참견하고 지적할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였다. 동생이라면 한 대 쥐어박고 나서 침대에 억지로 눕혀버릴 작태였지만.
“그나저나. 백민, 유 팀장님이 칭찬하시던데? 이능제어 향상 속도도 빠르고, 이번 의뢰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도 전부 네 덕이라고 말이야.”
“유오연 팀장님이 그러셨어요?”
볼이 화끈거렸다. 자꾸 입이 귀에 걸리려고 해서 애써 입가에 힘을 줬다. 직설적인 칭찬은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쌓인 피곤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잃었던 자신감마저 모조리 되돌려주었다.
백민은 어디서도 손끝이 야무지고 일 처리가 빠르다고 칭찬받았었다. 그러나 이능반에 들어오면서 그 흉악한 손재주 탓에 알게 모르게 의기소침해진 상태였다. 그러니 유오연 팀장의 평가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백민은 발그레 달아올라서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도은강은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반성했다. 얼마나 칭찬에 굶주렸으면 매사에 무덤덤한 편인 백민이 기쁨을 감추질 못할까.
“훌륭했다. 백민. 어엿한 델타 팀 일원이라고 봐도 되겠는데?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군.”
백민은 낯이 간지러워졌다. 하지만 그 달콤한 말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 칭찬을 받아들였다.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겸양 섞인 태도였지만, 그녀의 달아오른 귓불에서 솔직한 마음이 탄로 나버렸다. 도은강은 뻣뻣한 척하는 이 아가씨가 귀여워서 속으로 웃었다.
“오늘 일정에 대해 들었나?”
흐뭇하게 웃던 도은강은 업무로 화제를 돌렸다. 백민이 스케줄을 다시 살펴보며 대답했다.
“의뢰 5건을 제외하면 못 들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팀원들한테 못 들었다면 모를 만도 하지. 공식적인 업무로 잡히지 않은 행사니까.”
“무슨 일이……?”
“저녁에 송별회가 있다. 연구반에서 이번에 퇴임하는 분이 계시거든.”
긴 세월을 알리우스에서 일하다가 정식으로 퇴임하는 직원은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었다. 물론 알리우스 주식회사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았고, 예기치 않은 사고가 생겨 어쩔 수 없이 은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원인은 능력자 대부분에게 ‘알리우스’라는 회사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 초능력자 협회는 스카우트로만 채용하므로 입사가 매우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업무 강도가 높고 위험한 직장이었다.
게다가 자유분방한 능력자들에겐 진득하게 직장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 때문에 돈에 얽매이지 않는 금수저 능력자들은 금세 그만두고 떠나곤 했다.
“아, 그럼 퇴임식은 따로 하지 않나요?”
“회사 차원에서 하진 않고 연구반 내에선 할 거야. 다만 그분께 신세 지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송별회는 다 같이 하는 거지. 백민, 7시까지 준비 마치고 대기해.”
여전히 기분 좋은 상태인 백민은 힘차게 대답했다. 도은강은 픽 웃고는 데스크에 앉아 밀린 일을 처리했다. 그는 ‘일하면서 쉬는’ 못 말릴 워커홀릭이었다. 이 모습은 일상으로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려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의 역린을 없애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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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자 협회에 이능 조절이 서툰 능력자는 없다. 하지만, 송별회에서는 무슨 실수가 벌어질지 모르는 법. 그런 이유로 장소는 회사빌딩 안에 마련되었다. 백민이 가보지 않은 위층엔 연회장도 있었는데, 그곳이 송별회 장소로 당첨되었다.
송별회가 생소한 백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도중에 사권일에게 물었다.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개성적인 특징이 있지는 않은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지던 사권일이 고개를 돌렸다. 애쉬그레이로 염색된 머리카락이 젤로 고정되어 삐죽삐죽 솟아있었다.
“별거 없어. 먹고 죽자 하고 주야장천 술만 마시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일까? 이번 송별회의 주인공은 술고래시거든.”
“아, 선배님도 그분에 대해 아시겠네요.”
사권일은 안다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구자에 대해 어떤 선입관이 있을지 아는데, 그거랑은 전혀 다를걸?”
“그래요?”
연구자? 백민은 아인슈타인 같은 허연 머리에 안경, 퀭한 눈 밑, 꼬질꼬질한 하얀 가운을 떠올렸다. 그동안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와 진짜 그분 보통 아님! 나 예전엔 엄청 시달렸었어.”
무언가 떠올린 것처럼 순간 사권일의 얼굴이 잔뜩 우그러졌다. 치를 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 모습으로 보아 예사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천천히 확인해봐. 내 생각에 넌 그분한테 엄청 귀염받을 타입이다. 각오 단단히 해둬. 아가씨.”
귀염받는 것도 각오를 해야 하는 문젠가? 백민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연회장으로 향하는 커다란 문을 열었다.
환한 조명이 눈앞을 눈부시게 가렸다. 백민은 잠시 후 연회장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백민에게 ‘송별회’란 고기 냄새 풀풀 나는 삼겹살집에서 죽어라 술을 퍼마시는 이미지였다. 회사 내 연회장에서 한다기에 ‘그런 분위기는 아니겠구나.’ 했는데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송별회라기보단 대기업 취임식 분위기에 가까웠다. 능력자의 고유 특성상 그렇게 격식 차리는 행사는 아니겠지만, 환했고 화려했다. 약속된 시간보다 일러선지 아직 어수선하긴 했지만.
“우리 너무 빨리 왔나 봅니다. 사권일 선배님.”
“으음. 그러네. 다들 그렇게 빠릿빠릿한 스타일은 아니야. 7시라고 했어도 8시는 되어야 시작할걸? 일종의 ‘에스퍼 타임’이랄까.”
아무리 회사원이 되었다고 해도 능력자들은 제멋대로인 경향이 있었다. 특히 이렇게 능력자들끼리 모이는 약속에서는 한층 심해졌다. 자유롭고 유연한 인간들이라고 좋게 포장할 수도 있지만, 방만하다고 볼 수도 있는 인간들이었다.
시간관념이 철저한 도은강과 함께 팀을 이뤘던 백민에겐 사권일의 설명이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평소라면 서둘러서 참석했을 도은강이 사무실에서 서류업무를 더 보다 오겠다는 이유가 납득이 됐다.
연회장 내에 사람은 몇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들마저도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주위를 돌아다녔다.
“우리도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내려서 이따 오자고 했겠는데, 우리 후배님은 도와주는 편이 낫겠다.”
백민이 의아해하자 사권일이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 있는 분들 본 적 없잖아. 일하다 보면 저절로 얼굴을 익히게 되겠지만, 부지런하고 싹싹하다는 첫인상을 주는 편이 좋지 않겠어?”
“그러네요! 조언 감사합니다. 선배님.”
백민은 꾸벅 인사한 후에 사람들이 모인 자리로 빠르게 멀어졌다. 사권일은 눈 깜짝할 새 사라져버린 막내 팀원을 보면서 얼이 빠졌다.
“야! 그렇게 서둘러 갈 필요는 없잖아…….”
백민은 맨날 팀장 도은강과 쉴 틈 없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모든 것은 전적으로 그 사실을 바로 떠올리지 못한 사권일 탓이었다. 혼자 남은 그는 귀찮아서 툴툴거리면서도 백민을 뒤따라갔다.
“일 복을 타고났어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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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3화. 이모션컨트롤의 효과조회 : 78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842 32.32화. 도은강 너 수상하다?조회 : 86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36 31.31화. 주식회사 알리우스의 송별회란?조회 : 99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99 30.30화. 한 발 내디딘 후에조회 : 78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93 29.29화. 다녀오세요조회 : 74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187 28.28화. 연약한 소년조회 : 90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528 27.27화. 눈이 짓무르도록조회 : 92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385 26.26화. 자백한다고 봐도 되겠어?조회 : 93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68 25.25화. 이젠 믿어지나요?조회 : 1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874 24.24화. 감마 팀과 협업조회 : 24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083 23.23화. 도은강이 자초한 일조회 : 33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909 22.22화.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는 원석조회 : 52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404 21.21화. 작전은 대성공조회 : 9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250 20.20화. 베타 팀을 위한 작전조회 : 11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40 19.19화. 완전범죄를 모의하다.조회 : 15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259 18.18화. 잠깐 쉬다 가도 되나요?조회 : 9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566 17.17화. 병문안에서 생긴 일조회 : 24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082 16.16화. 델타 팀의 심술이 불러온 결과조회 : 10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860 15.15화. 착각이겠지조회 : 15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209 14.14화. 운이 좋은 사람조회 : 23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873 13.13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 이수철조회 : 34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279 12.12화. 재밌는 녀석이란 말이야조회 : 18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304 11.11화. 누나는 못 줘!조회 : 13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816 10.10화. 신입을 위하여!조회 : 33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265 9.9화. 코드네임 결정전조회 : 2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384 8.8화. 해고를 고려해야겠다조회 : 20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358 7.7화. 잘리진 않겠지?조회 : 60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8,166 6.6화. 맘대로 해봐.조회 : 18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701 5.5화. 현장실습 먼저조회 : 28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618 4.4화. 잘 부탁드립니다조회 : 32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9,355 3.3화. 이능반 델타 팀에 온 걸 환영한다조회 : 26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8,907 2.2화. 꿈 아니라니까!조회 : 4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9,506 1.1화.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길조회 : 1,67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