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조회 : 867 추천 : 0 글자수 : 3,851 자 2022-12-13
가언 씨, 안녕하세요. 처음 글로 만났으니 이 인사가 맞겠지요. 제 이름을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박산호라고 합니다. 그리고 박진주의 친 오빠입니다.
박진주?
박산호가 누군지는 몰라도 박진주의 친오빠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누구기에 가언 형에게 자필 편지를 보낸 걸까. 요즘 세상에 프린터로 인쇄한 편지도 아니고.
글씨체에 자신감이 있나 싶었다. 인쇄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단정한 글씨체이기는 했다. 은수는 마저 읽었다.
의구심이 솟았지만 편지를 모두 읽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가언 형이나 부모님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강은수라는 이름을 가지기 전, 제 동생의 이름이 박진주였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강, 은수? 내가, 강은수가 박진주라고? 왜 박진주에서 강은수가 됐는데? 누가 누구의 동생인데!
은수에게는 친오빠는 없었다. 오빠뿐만 아니라 언니도 동생도 없었다. 오빠라고 부를만한 존재는 가언밖에 없었지만 그마저도 친오빠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오빠나 동생이 있었으면 하고 부모님을 졸랐었다. 은수의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주시는 부모님이었으나 그토록 바랐음에도 딸 하나만 있으면 된다며 은수를 단념시켰었다.
이 편지의 내용이 옳다고 가정하면.
나는 ‘박진주’였고 ‘박산호’라는 오빠가 있는 누군가였다.
자연스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지금의 부모님과 피가 이어져있지 않다고. 법의 테두리에 둘러싸여있는 타인에 불과하다고.
은수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손을 떨며 중민과 미주, 가언의 얼굴을 돌아봤다. 거짓이라고 말해달라는 듯이 간절하게.
셋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마저 읽으라는 듯이 무언으로 재촉하고 있을 뿐이다.
“진짜, 구나? 그럼 내가, 아…….”
은수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충격을 받고 휘청거렸다. 가언이 부축해주려고 했지만 그 팔을 세게 뿌리쳤다.
가언도 믿을 수 없었다. 가언 형도 지금까지 나를 속였어.
은수는 다시 똑바로 섰다. 흔들리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오기가 차오른 얼굴로 입술을 꼭 다물어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켰다.
편지를 다시 읽어 나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 탓에 읽기가 쉽지 않았다.
저의 존재를 알고 계신다는 전제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진주, 아니 은수의 부모님에게 물어보면 금방 밝혀질 일이니까요.
도저히 편지를 이어서 읽을 자신이 없었다. 바스락. 손에 들린 편지를 구겨버렸다.
은수는 멍한 눈을 한 채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걱정되는 얼굴로 쳐다보는 세 사람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뭐야……. 가언 형도 알고 있었어? 전부, 나를 속였구나. 나만 몰랐던 거야?”
“은수야. 그게…….”
“지금까지 아빠랑, 엄마가, 가언 형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던 건 모두 나를 속이기 위해서인 거야. 그렇지?”
“그런 게 아니야. 엄마 말 좀 들어봐. 엄마는 은수가…….”
미주가 급하게 해명했다. 그러나 벙긋거리는 입모양만 보일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은수는 건조하게 말끝을 잘랐다.
“저 아무것도 안 들려요.”
충격이 커 보이는 은수를 진정시키려는 중민의 시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정말 은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사실은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안절부절 못하는 아빠도, 감당할 수 없는 아픔에 눈물짓는 엄마도,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뛰쳐나올 것 같은 가언도.
쓰디쓴 진실을 알려준 그 편지도.
“아빠, 나 아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이 일을, 받아들이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내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마세요.”
은수가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탁! 세게 닫힌 문이 그들과 은수와의 단절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
피 말리는 정적.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 만들어진 침묵이 병실을 가득 메웠다.
가언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을 느꼈다.
은수야, 강은수! 대답해줄 사람은 미움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다 사라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은수를 따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그를 방해했다. 고통을 참으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읏!”
강한 고통에 허리를 숙이며 침대를 짚고 멈춰서고 말았다. 마음은 벌써 은수 곁에 있지만 몸뚱이가 따라주지 않았다.
충격적인 사건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은수는 태연하게 받아줄 거라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조금 아파하며 우리 품으로 뛰어들 거라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는데…….
그녀는 언제나 긍정적이었고 큰 일이 일어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건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그리고 요번 일은 굳게 믿었던 가족들이 만든 일이라는 점에서 더욱 타격이 크겠지. 도망가서 몸을 숨길 가족들의 품을 기대할 수도 없으니까.
은수의 배신감 어린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그 눈빛이 가슴을 찌르고 헤집어 놓았다.
“가언아. 따라가려고 하지 마라. 아직 일어나긴 무리다. 그리고 은수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 테고.”
이 병실에서 가장 차분한 사람은 중민이었다. 마음이 여린 아내를 둔 그는 중심 잡는 일에 익숙했다. 속은 쓰라리고 아팠어도 표현하지 않을 만큼의 연륜도 가지고 있었다.
“윽, 그래도 혼자 두기 불안해요. 이런 일을 알게 되고 나서 혼자 두고 싶지 않아요.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봐요. 퇴원한 후에 집에서 차분하게 말하는 건데…….”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가언은 뼈저리게 후회했다. 은수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는 자만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충격이 은수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던 걸까. 은수는 가언이 예상한 범위를 벗어나는 반응을 보였다. 방금 전 은수는 가언이 모르는 남 같았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충동적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겁나기만 했다.
가언은 더듬더듬 침대 옆의 탁자를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초 후, 병실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은수가 좋아하는 뉴에이지 곡. Merry Christmas Mr.Lawrence.
“핸드폰도 놓고 갔네요. 가방도 놓고 갔고. 스마트워치는 차고 있겠지만 안 받겠죠…….”
냉장고 근처의 테이블에 올려 진 브라운색의 핸드백은 분명히 은수 것이었다. 중민이 당장이라도 은수를 찾아 뛰쳐나갈 태세의 가언을 말렸다.
“언제였든 은수가 받을 충격은 다르지 않았을 거다. 우리, 은수를 믿어보자.”
가언은 끙끙거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서야 믿음이 자리를 잡았다. 은수는 최악의 선택을 할 아이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바른 사고방식을 지닌 아이였다. 지금까지 은수가 받은 사랑은 차곡차곡 쌓여서 은수의 토대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그 지지대가 있는 한, 은수는 나쁜 일을 벌일 수 없었다.
미주는 초조함이 극에 달한 가언을 보고 오히려 흥분이 가라앉았다. 은수가 느낄 아픔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 했지만 자신은 어른이었다. 아이들이 의지할 사람이라곤 남편과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마음을 다잡고 밝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미처 내려놓지 못한 울음이 섞여들었다.
“우리 딸은 절대 나쁜 마음 가질 애 아니야. 누가 키웠는데?”
“당신이 키웠지. 누구보다 애지중지, 사랑을 다해서 키웠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중민이 받아쳤다. 중민은 애틋한 눈빛으로 미주를 바라봤다. 누구보다 여린 심성을 가진 미주였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플 텐데도 걱정한 것보다 잘 해내고 있었다. 그 작은 노력이 얼마나 수많은 고뇌를 거쳐 나왔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 좋은 엄마였죠? 그렇다고 해줘요. 여보.”
“당신은 두말할 거 없이 최고의 엄마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민이 미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은수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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