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조회 : 939 추천 : 0 글자수 : 4,890 자 2022-12-17
담벼락을 따라 심어져있는 이팝나무. 달콤하고 은은한 향을 내는 연보랏빛 라일락. 진다홍색 소담한 꽃을 피운 명자나무. 5월의 화려한 장미. 아기자기하고 파릇파릇한 허브들.
플로리스트인 미주는 정원 꾸미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평소엔 키 작은 생화를 많이 쓰는 터라 정원은 키 큰 나무들도 꽤 많았다.
꽃향기가 만발한 전원주택의 대문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젊은 청년이 쓴다기엔 어울리지 않는 중후한 외제차였다.
운전석에서 나온 사람은 중민이었다. 중민의 차는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차체가 높은 관계로 움직임이 불편한 가언을 태우고 내리기엔 알맞지 않았다. 때문에 가언의 차를 빌려 대신 운전하게 된 것이다.
은수가 운전하겠다고 나섰지만 가언이 극구 막았다. 운전면허를 딴 뒤로 제대로 운전해본 적도 없었거니와 은수가 운전하다가 가벼운 접촉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못 견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가언이었다.
차가 멈추자마자 뒷좌석에서 튀어나온 은수가 조수석 문을 열고 가언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사랑하는 사이가 된 이후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그의 얼굴에는 어색함이 그려져 있었다.
은수는 그 떨떠름한 표정에도 굴하지 않고 가언을 부축하며 현관으로 향했다. 뒤에서 중민이 따라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으윽. 은수야. 살살.”
“자업자득이야. 의사선생님이 말렸는데도 굳이 퇴원하겠다고 그러니까 아프지. 가언 형, 병원에 다시 돌아갈까?”
“됐어. 그냥 조금 욱신거리는 정도야. 별거 아냐. 그리고 병원에 묶여있어서 너무 답답했어. 너 그렇게 뛰쳐나갔을 때, 내가 얼마나 답답하고 초조했는지 알아?”
가언은 혼자서 아파할 은수를 떠올리면 불안해서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자는 중민의 말에도 좀처럼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다음날 은수가 퉁퉁 부은 눈으로 병실로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당장 퇴원 수속을 밟았을 것이다.
“그래, 나 자아성찰의 시간 좀 가졌다. 성인 여성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겠다는데 웬 걱정? 고작 하루 가지고 엄살은.”
“나는 네가 손톱깎이만 들어도 걱정되는 사람이야.”
평소엔 능청스럽고 여유자작하면서 은수와 관련되기만 하면 벌벌 떨었다.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습관처럼 몸에 배어서 굳어 버렸다.
“하여간, 형은.”
못 말린다고 피식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앉지도 못한 채 서성이고 있는 엄마, 미주가 보였다.
미주는 은수를 발견하자마자 서둘러 나오다가 멈칫거렸다. 병원에서 뛰쳐나온 이후 처음 보는 딸이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부 잊어버리고 처음 만났던 그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어서 와. 은수야…….”
건강하게 돌아와 줘서 그저 고마웠다. 남들은 보면 미주는 특별한 잘못을 하지 않았겠지만, 다고, 그러니 아무 걱정 말라고 조언하겠지만, 오늘이 오기 전까지 그녀는 괴롭기만 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이성으로 결정지어지지 않았다. 관계가 틀어지는 게 한순간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잘 왔어. 정말 잘 왔어.”
계속해서 잘 왔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다 눈물을 참지 못하고 야윈 손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은수는 자신보다 더 마음고생이 많았을 엄마를 껴안았다.
“엄마, 미안해요. 그냥 아빠, 엄마랑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게 서운했나 봐요. 생물학적인 증명이 중요한 게 아닌데……. 엄마는 유전자 대신에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물려주셨는데요.”
철없는 딸이었다.
“아니야. 엄마가 미안해. 네가 충격 받지 않게 차근차근 알려줬어야 하는데……. 되도록이면 끝까지 모르게 하고 싶었어. 네가 이성적으로 받아들일만한 나이가 되었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어. 하지만 너는 내 안에서 엄마라고 부르던 작은 아기라서, 아직 어린 아가라서…….”
돌멩이를 던져 넣은 호수의 흔들림처럼 목소리의 떨림이 점점 커졌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어도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은수에게 전해졌다.
“가볍게 입에 담을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입양문제도 그렇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겠어요. 내 예전 가족이 누군가에게 끔찍하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은수가 아빠나, 엄마, 가언의 입장이었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은수가 미주에게서 떨어지며 중민을 바라봤다. 중민은 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미주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아 소파에 앉혔다. 그녀는 온 몸에 힘이 빠졌는지 맥없이 소파에 앉았다.
“은수도 앉아라. 가언이 너도.”
중민의 말에 순순히 소파에 앉자 중민도 미주 옆에 자리 잡았다. 동그랗게 둘러앉고 나니 이제야 가족들이 되돌아온 것 같았다.
빨개진 눈가를 진정시키는 미주 곁에서 중민이 어깨를 감쌌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완전히 달라졌다. 여태까지처럼 부모님의 반응이 눈에 선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에 어떤 태도를 보이실지 알 수 없었다.
은수는 감정을 추스르며 심호흡을 했다. 그 호흡에 미처 가리지 못한 두려움이 섞여있었다.
본론부터 꺼내기는 무서웠다. 은수는 한 가지 궁금증 먼저 풀기로 했다.
편지에는 박진주라는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다. 자신의 이름처럼 느껴지지는 않지만 과거의 이름이었을, 진주.
‘진주’ 하면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은수는 고개를 들어 중민을 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빠, 내 아호 말이에요……. 내 예전 이름이 진주였기 때문에 일부러 해원으로 지어주신 거죠?”
은수의 아호는 바다 해(海), 구슬 원(瑗) 자를 써서 ‘해원’이었다. 예전에는 내가 바다구슬처럼 예뻐서 그리 지었다 말씀하셨지만…….
“이름을 은수로 바꾸고 나니 마음에 걸리더구나. 네게서 가족들의 흔적을 하나도 남김 없이 빼앗은 것 같아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기억도 이름도 잃어버렸으니까. 그래서 네 그림 안에서라도 남을 수 있게 해원이라고 지었다. 혹여 기억을 떠올리게 할까 진주라는 이름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고.”
아빠, 하고 터져 나온 목소리와 함께 은수가 아빠에게 안기며 든든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런 마음도 모르고서……. 내가 한심스러워요.”
“지금까지의, 그리고 앞으로 너의 행복에 필요하다면 몰라도 좋다. 알아주길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는 피도 이어지지 않은 타인일 텐데. 얼마나 사랑해야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보고 있던 부모님의 애정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해줄 수가 있어요? 잘 모르겠어요.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는 사람인지.”
아무 대가 없이 이 거대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질문에 답한 사람은 엄마였다.
“말했잖니. 가족이란 숙명처럼 사랑하게 되는 사람들이라고. 부모가 되어보니 알겠더라. 애를 낳으면 부모로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었어. 사랑으로 빚어지는 존재였던 거야. 은수야. 너는 사랑받을만한 소중하고 예쁜 아이야.”
우리 엄마는, 전혀 모르는 아이를 입양해서 이때까지 친딸처럼 키운 세월이 이해가 갈만큼 천사 같은 분이셨다. 알고 있었음에도 새삼스레 그 사실을 실감했다.
“받은 사랑만큼 전부 돌려드릴 수 있다면 좋겠어요, 엄마.”
내 말에 엄마가 기쁘게 웃었다. 아빠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면 됐다.
“지금도 은수 너는 예쁘고 착한 딸이지만, 엄마를 더 사랑해준다면 기쁠 거야. 아빠도, 가언이도 그렇겠지.”
“많이 놀랐고 슬프기도 했지만 절망하지는 않았어요. 그건 그동안 제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겠죠. 방황하지 않을게요. 전부 잘 소화해서 받아들일게요. 조금 아프더라도 제게 양분이 될 일이라는 거 알아요.”
아빠가 이목구비를 전부 이용해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누군가 본다면 딸 바보라고 할 만한 웃음이었다. 어린 시절엔 매일같이 본 표정인데 오늘은 아빠의 눈꼬리에 습기가 차있었다.
“여보. 딸 하나는 잘 키웠지? 당신은 두말할 거 없이 최고의 엄마라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럼요. 당연하죠. 나는 자칭 타칭 좋은 엄마거든요.”
엄마가 힘내서 한 농담에 다들 가볍게 웃었다. 다함께 웃으면서도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있었다. 서로가 너무 안쓰러워서 온전한 웃음을 지을 수 없었던 탓이다.
가슴의 쓰라림도 점점 무뎌질 날이 올 것이다.
시간만이 아물게 해줄 수 있는 고통이니까.
거실에는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 무겁지 않은 잠깐의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연 것은 가언이었다.
“편지는 제대로 읽었어?”
편지……. 끝까지 읽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응. 그런데 편지를 보낸 박산호가 우리 오빠 맞지? 오빠는 어디 있어?”
가언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은수는 친 오빠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섣부른 기대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려줘야 충격을 덜 받을까.
박산호, 은수의 친 오빠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편지 내용만 본다면 당연히 편지를 적은 박산호가 살아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은수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주려고 했다. 그대로 뛰쳐나가지만 않았다면.
“은수야. 박산호 씨는, 죽었어.”
“……죽었, 다고? 그럼 어떻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데? 분명히 보낸 사람에 박산호라고 쓰여 있었잖아!”
“그래. 그래서 편지를 받고 바로 아버지, 어머니께 알려드리지 못했어. 죽은 사람 이름으로 온 편지를 믿을 수 없었으니까. 악질적인 장난이길 바랐으니까.”
은수는 망연자실 했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친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오빠는 살아있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니. 잠시나마 오빠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빠져 허우적댄 자신이 우스웠다.
“어째서. 어째서 오빠의 이름을 사칭해서…….”
“그 이름으로 온 편지라서 무시하려고 했지만 가볍게 넘기기에는 너무 수상했어. 받는 사람이 나였다는 점이나 너의 바뀌기 전 이름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점이. 아는 사람이 정말 적다고 들었거든. 진주라는 이름.”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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