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조회 : 801 추천 : 0 글자수 : 3,942 자 2022-12-14
14년 전. 서울중앙지방법원 앞 계단.
검은 정장을 입은 검사인지 변호사인지 모를 사람들이 정문 앞 계단을 바삐 오르내렸다.
중민은 후배인 무건을 만나러 법원에 들른 참이었다.
기계공학 박사인 중민에게 무건이 자문을 요청했고 그는 흔쾌히 응한 참이었다. 마침 중민에게 시간 여유가 생겨서 무건이 있는 법원에서 만나 식사를 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중민의 옆에는 아내 미주도 함께였다. 셋은 같은 대학교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친하게 지내서 이런 자리가 어색하지 않았다.
중민과 무건, 미주가 법원에서 빠져나오며 점심은 뭘 먹을지 상의했다.
미주는 저 멀리 계단 한구석에 혼자 앉아있는 자그마한 인영을 찾아내고 걸음을 늦췄다.
걷는 속도가 느려지니 자세히 보였다. 그 인영의 주인은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였다. 아이는 다리를 감싸 안고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어째서 여기 어린 아이가?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보호자가 보이지 않았다. 의아했다. 뒤처진 미주를 찾아 돌아온 중민과 무건에게 물었다.
“저기 저 아이 보여요? 저기 계단에.”
“아, 저 아이 말입니까?”
무건이 아는 아이인지 감탄사를 냈다.
다른 사람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었을 터다. 하지만 그녀는 차가운 돌계단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가 눈에 밟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미주는 아이에 대한 정이 각별했다. 아이가 간절했지만 가질 수 없는 만큼 반작용으로 애틋해졌는지도 모른다.
“사건 피해자입니다. 보호시설에 가기 전에 잠시 검사가 데려온 모양입니다.”
“그럼 보호자가 없다는 뜻이에요? 무건 씨?”
딱딱한 계단 구석에서 몸을 말고 숨어있는 작은 아이가 보호자까지 없단다.
“아마 그럴 겁니다. 형수님. 사건이 일어난 지 꽤 됐는데 아직 법적 보호자가 없어서 보호시설로 가는 걸 보면 말입니다. 우 검사는 도대체 애를 혼자 버려두고 어딜 간 건지…….”
미주는 그 아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다가간 건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이 아이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사람의 손을 타지 못했는지 긴 머리카락이 엉성하게 묶여 군데군데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아이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
미주는 탄성을 내면서 입을 막았다.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미주를 따라 아이에게 다가온 중민이 그 모습을 보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거울처럼 상대를 비추는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중민을 응시했다.
중민은 순식간에 아내의 마음을 이해했다. 눈시울이 붉어져왔지만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당신, 나랑 같은 생각 하고 있지?”
조금만 긴장을 놓았다간 눈물이 후두둑 쏟아질 것 같았다.
“여, 여보. 나요. 사랑에 빠졌나 봐요.”
가녀린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만큼의 격정이 그녀를 덮쳤음을 안다.
중민은 울컥하는 속을 숨기며 일부러 장난스럽게 물었다.
“남편을 옆에 두고 대놓고 바람을 피겠다는 거야?”
남편을 두고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는 아내였지만 나무랄 수 없었다.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런데. 너무 예뻐서 당신을 탓할 수도 없겠다.”
“나는, 어쩌면 이 아이를 만날 운명이었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아이를 못 가지는 몸이 된 거였나 봐요.”
미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주야…….”
미주가 아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민도 사랑하는 아내가 우선이었지만 아이가 있다면 하고 한번쯤 상상해보기도 했다.
결혼하고 5년. 중민은 자신들에게 선물이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건은 둘을 따라오다 멈춰서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선배 부부의 사정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이를 그렇게도 좋아하는 형수님이었다. 그녀가 자식 얘기만 나오면 안색이 어두워지고 움츠러드는 모습만 보아도 대강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뒤늦게 우 검사가 아이를 찾아 헐레벌떡 뛰어왔다. 우 검사는 아이에게 달려가는 우 검사를 멈춰 세워 대화를 나눴다.
“진주를 입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우 검사님. 어차피 저 아이, 이대로 보호시설에 잠시 갔다가 결국은 고아원에 보내지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되겠죠. 아버지 쪽은 고아였고 어머니 쪽은 집안과 연을 끊다시피 해서요. 지정후견인은 없고 현재 법정 후견인은 외할아버지인데, 외가 쪽은 아예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아이는 사건으로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그런지 말도 안 하더라고요. 실어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어증은 아닌 것 같네요.”
우 검사는 무건의 눈이 향하는 곳을 따라서 쳐다봤다. 처음 만난 이래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아서 실어증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그만한 사건을 겪었으니 실어증이 생기는 것도 무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저 장면은 뭐란 말인가.
다정하게 보듬는 남녀 앞에서 아이가 입을 열고 재잘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일곱 개 펴는 모양이 나이를 알려주기라도 하는 모양.
“아가, 아줌마 딸이 되지 않을래?”
“진주가 너무 예뻐서 아저씨가 딸 삼고 싶은데.”
미주가 설렘으로 터져버릴 것 같은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묻자, 중민이 옆에서 말을 덧붙였다.
“……건강하게 잘 키워 줄 건가요? 좋아하는 초콜릿도 사 줄 거예요? 아프게 하지도 않을 건가요? 정말, 진짜 딸처럼 사랑해줄 거예요?”
아이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또박또박 질문했다. 7살이라는 어린 나이 치고는 똑똑한 듯했다.
“그럼! 당연하지!”
중민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리 높여 대답했다.
“약속해요. 좋은 부모님이 되어 준다고.”
조그만 새끼손가락이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중민은 그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미주는 치밀어 오르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아이를 꼭 껴안았다.
“약속 꼭 지키마.”
“꼭 지켜야 해요. 약속 안 지키면 오빠가 혼내주러 올 테니까.”
“오빠?”
미주가 의아해하며 품 안에서 아이를 떼어냈다. 아이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왼쪽 가슴을 문질렀다. 그리고 힘이 빠져버린 듯 스르륵 옆으로 쓰러졌다.
중민과 미주가 깜짝 놀라 아이를 살폈다. 멀리서 지켜보던 검사 둘이 황급히 달려왔다.
“진주야! 진주야! 정신 차려 봐!”
이마를 매만져보니 열도 없었고, 맥박도 정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무언가 이상이 있었을 것이다.
“여보! 구급차요! 얼른요!”
무건이 구급차를 부르려고 뛰어가는데 미주의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잠깐만요! 눈 떴어요!”
아이는 깊은 잠을 자고 개운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눈을 반짝 떴다. 그리고 쓰러진 자세 그대로 깜빡거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눈빛이었다.
“괜찮니?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정 검! 이 아이 병원부터 데려가야…….”
“안 되겠다. 아무래도 업어야겠어요.”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부산을 떠는데 어린 은수는 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엄마…….”
미주와 중민은 물론 금방 옆에 도착한 두 검사까지 목이 메었다. 엄마라니……. 아이가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엄마겠지만 엄마는 이 세상에 없는데…….
“……엄마?”
믿기지 않는 심정으로 미주가 되물었다. 아이는 자신을 보면서 엄마라고 불렀다.
“엄마, 왜 이제 왔어!”
아이는 서러워하며 가까이 앉아있던 미주를 작은 주먹으로 토닥거렸다. 원망스러움에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 힘이 약해 안마라도 해주는 모양새였지만.
두 검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미주는 아이의 주먹을 고스란히 받아주며 중민과 마주봤다. 눈이 마주친 찰나, 둘 사이에 오갔던 수많은 대화는 그들만이 알 수 있었다. 중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미주는 커다란 환희에 휩싸였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해일에 입가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는 은수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엄마가 미안해. 너무 늦었지?”
아이가 자신을 엄마로 생각한다면 진짜 엄마가 되어주겠다. 그녀는 그렇게 맹세하며 눈물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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