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조회 : 791 추천 : 0 글자수 : 6,458 자 2022-12-16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가언이 무릎을 꿇고 미주와 중민 앞에 앉아 있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가언의 얼굴은 앳되었지만 그 나이또래답지 않게 진중했다.
“편하게 앉으래도. 말도 안 듣고. 가언이 고집이 보통이 아니네.”
허탈하게 나오는 한숨은 포기의 의미였다. 서글서글하고 능청스러운 가언이었지만 이런 면에서는 중년의 아저씨인 중민보다 고지식했다.
중민의 마음을 짐작하고 미주가 가볍게 웃었다. 결혼생활 19년 차의 아줌마였지만 중민이 처음만나 반했던 미소만큼은 여전히 청초했다.
“가언아. 아줌마가 가언이한테 할 말이 있어.”
“하세요. 무슨 말씀이든지 기꺼이 따를게요.”
무슨 말을 하든 넙죽 받아들일 것 같은 열린 자세였다. 중민이 그것을 지적했다.
“어험, 그러면 안 되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증서줄 녀석이네.”
“아저씨라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보증 서 드릴게요. 제가 어려서 얼마 안 될 거 같긴 한데 능력이 닫는 한에서 최대한…….”
“이가언! 그런 생각 다신 하지 마라!”
중민이 진심으로 호통을 쳤다. 가언은 푸스스 웃었다.
“아저씨, 농담하신 거 알아요. 전 진담이었지만요.”
“너 그런 식으로……!”
흥분하는 중민은 미주가 만류했다.
“여보, 그런 말 하려고 부른 거 아니잖아요.”
“흠흠, 이 이야기는 이따 다시 하자.”
힐끔 아내 눈치를 보고는 나중을 기약했다. 꼭 지금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아도 된다. 시간은 많으니까.
가언이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행복한 가정에서 지낼 수 있는 건 모두 둘의 호의 덕분이었다.
미주가 다시 분위기를 잡고 가언의 이름을 불렀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쉽게 꺼낼만한 이야기가 아님은 분명했다. 대부분 유쾌하게 지내는 두 분이었기 때문이다. 가언도 진지하게 네. 하고 대답했다.
미주는 그 후에도 한참 말을 고르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아줌마가 많이 생각해봤는데, 가언이가 은수 오빠가 되어주면 어떨까?”
“지금도 은수 오빠잖아요, 저.”
벌써 은수의 집에서 산지 대략 1년이 지났다.
은수에게 가언은 가족 같은 존재였다. 은수는 친구와 다퉜을 때도, 마음에 드는 그림이 그려졌을 때도, 심심할 때에도 가언을 먼저 찾았다. 은수와 있으면 자신이 꼭 필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기뻤다.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가언도 은수가 없어서는 안 됐다. 사무치는 외로움에 거리를 방황하다가도 은수와의 약속을 떠올리고 집에 들어왔다. 담배를 들다가도 은수가 싫어할 거라고 다시 내려놨다. 무의미한 일상에서 은수만이 그에게 의미를 가졌다.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입양되면 어떨까하고 묻는 거다.”
입양?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입양이요? 양자가 되라는 말씀이세요?”
“생각해 본 적 없겠지만 우리는 지금도 너를 아들이라고 생각해.”
그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두 분만큼 고마운 분들이 없었다. 어릴 때 돌아가신 어머니,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아버지. 친척들은 아버지의 유산만을 탐냈다. 자신은 어딜 가도 천덕꾸러기였을 것이다.
“저도 그래요. 아줌마……. 저요. 아줌마랑 아저씨 정말 존경해요. 단지, 옆집에 살면서 친해졌다는 이유로 저한테 필요한 돈 전부 내주시는 데다 살 곳까지 내어주신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 아니까요. 은수를 돌봐주는 대가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돌볼 사람이 필요할 정도로 은수가 말썽을 피우는 것도 아니니까요. 벌써 12살인데 그 정도면 자기 할 일은 할 수 있는 나이잖아요. 저는 그냥 은수랑 노는 것뿐이에요.”
“은수가 외롭지 않게 해주는 거, 그거 하나만으로 대단한 일이야. 가언아.”
“아니요. 그런 얘기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제가 아저씨랑 아줌마를 존경하고 있다는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새삼스럽고 쑥스럽기도 해서 제대로 말씀드린 적이 없었다. 존경한다고. 아저씨, 아줌마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사실 입양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한 가지만 빼면요.”
“걸리는 게 있구나.”
미주의 말에 말해야할지 말아야할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결국은 말하는 쪽을 택했다. 말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그들을 원망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있어요. 은수, 요.”
“은수는 자기 가족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기뻐할 거다. 동생을 만들어달라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가언이 은수의 반대를 걱정한다고 생각했는지, 중민이 몇 마디를 추가했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제가 은수의 호적상 오빠가 되면요.”
머릿속에 수많은 망설임이 스쳐지나갔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도 말하지 말까, 머뭇거렸다. 가언답지 않게 우물쭈물하자 중민과 미주가 궁금증을 키우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 이런 말씀 드리기 부끄러운데요. 제가, 하아…….”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여. 밥 다 태우겠다.”
“제가요. 제가, 은수를 좋아한다고 가정하면요……. 그리고 나중에 은수도 저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고…….”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어디 굴이라도 뚫어서 땅속으로 파고들 기세였다.
“그런데 제가 양자가 되면, 결혼 못 하잖아요…….”
작아지는 소리에 귀 기울이던 중민이 순식간에 이해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아! 그런 문제? 으하하.”
미주도 손으로 입가를 가렸지만 미처 웃음을 다 감추지는 못했다. 중민은 한참을 웃어재끼다가 진정하고는 엄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그런데 열두 살짜리 우리 딸을 노리는 거냐? 이거 안 되겠네.”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중민을 보고 가언은 쩔쩔맸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
“노리다뇨! 은수 아직 꼬만데요! 지금 당장 여자로 느낀다는 게 아니라! 앞으로 제가 은수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 달까. 운명이랄까. 어쨌든 나중에 가족이 되고 싶은 것뿐이라고요! 어떻게 해보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지켜주기만 할 거에요. 저도 열두 살짜리 애를 가지고 뭘 해보겠다는 불순한 생각 안 해요. 제가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해가 저물 때까지 이어질 것 같은 기나긴 변명이었다. 중민이 얼른 가언의 말을 가로챘다.
“뭘 그렇게 변명이 구구절절해. 네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그냥 우리 딸을 신붓감으로 찍어놨다니 괘씸해서 그렇지.”
“여보, 그만 놀려요. 애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미주의 입가에도 숨기지 못한 웃음이 묻어있었다. 가언은 그제야 장난임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가언아. 내가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중민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꺼냈다. 가언이 말씀하시라고 듣고 있다고 답하자 진중한 얼굴을 했다.
“우리 은수를 지켜다오. 모든 위험으로부터 은수를 보호해다오.”
“그럴게요. 은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동생이기도 한데 당연하죠. 근데, 은수 보호자인 아저씨, 아줌마가 든든히 버티고 계신데 제가 할 일이 남아있을까요.”
가언이 보기에 은수의 부모인 미주와 중민은 은수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약간 과보호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학교나 학원을 오갈 때 데려오고 데려다주는 건 물론이고, 어디 소풍이라도 가면 선생님 연락처부터 대절하는 버스 기사 연락처까지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그것도 은수 몰래.
“알다시피 나는 고아라서 혈육이 아무도 없고 우리 아저씨도 따로 친하게 지내는 친척이 없잖니. 만일의 경우, 가언이가 보호자가 되어주었으면 했어. 아직은 미성년이니까 나중에 말이야. 양자가 되어달라는 이유에는 너와 우리를 위해서기도 했지만 은수를 위하는 마음도 있었어.”
미주의 말에는 전제 하나 깔려있었다. 은수가 위험하다는 전제.
가언이 그에 대해 묻자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가언은 침묵에 짓눌려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은수가 위험하다니. 오해겠지?
중민의 손 위에 미주가 자신의 손을 겹쳤다. 중민이 고개를 돌리자 은은한 미소를 걸고 자신을 쳐다보는 아내를 볼 수 있었다. 눈빛에는 신뢰가 가득했다.
“은수는 말이다. 우리가 입양한 아이다.”
“……네?”
믿을 수 없었다.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은수가 입양아라니. 입양한 아이에게 그토록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걸까.
“아줌마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어. 그리고 은수를 만났고 입양하게 됐지. 그 때가 은수가 일곱 살일 때였단다.”
일곱 살이라면 사리 분별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런데 은수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어째서?
“의외지? 대부분 아주 어린 아기를 입양하는데 그런 경우가 아닌 것도, 그런데도 은수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은수는 말이야, 어떤 사건의 피해자였단다.”
그녀의 음성에 쓰라림이 묻어있었다.
“은수의 친 아버지가, 어머니와 오빠를 죽이고 은수마저도 죽이려 시도한 후, 자살한 사건이었어.”
가언은 숨을 들이켰다. 대충 상상만 해도 끔찍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자문을 해주러 친한 검사를 만나러 갔다가 은수를 만나게 됐단다.”
“은수는…… 전혀 기억을 못해요? 일곱 살이면…….”
“그 때, 시체와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는구나. 그래서인지 그 사건도, 가족에 대한 기억도 잃고……. 우리를 부모라고 생각하더구나. 우리는 은수가 그때의 기억을 찾지 못하기를 기도한다.”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 참혹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행복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은수에게 더 각별하게 신경 쓰는 거다. 은수가 기억을 못 찾도록.”
은수를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언은 속으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들을 세어봤지만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이토록 위험한 상황인데 가언은 그것도 모르고 너무 희망적인 생각만 했다고 자책했다. 내 주제에 결혼 못할 일을 걱정하다니. 낙천적인 은수에게 물이 들기라도 한 걸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은수 오빠가 되어 줄까요?”
미주가 그 마음을 짐작하겠다는 듯 기특해하며 살짝 웃었다. 자신의 마음보다 은수를 위하는 아이를 응원하지 않으면 누굴 응원한단 말인가.
“아니, 우리 가언이만큼 괜찮은 아이도 없지. 제안은 취소야. 가언아, 우리 사윗감이 되어주지 않을래?”
가언은 얼굴이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귓가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림이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사위도 아니고 사윗감이 되어달라고 하는 건, 말이 조금 이상할까요?”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이 녀석은 좋아하잖아. 얼굴 빨개진 거 봐.”
아줌마가 요상한 프로포즈를 하고 되짚어보자 아내 말이라면 신의 계시처럼 여기는 애처가가 아니라고 하며 가언을 놀렸다.
“아저씨!”
가언이 크게 중민을 불렀지만 홍조를 수습하지 못한 애송이가 무서울 리 없었다. 중민은 재밌어서 큭큭대며 웃었다.
“이제 예비사위가 된 김에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어떠니. 장인어른 대신에.”
“좋은 생각이에요. 아들 있었음 했는데. 이 기회에 아들 생긴 기분이나 내 볼까요?”
미주가 남편의 말에 동의했다.
낯선 집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언이 적응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말 한 마디 꺼낸 적 없었지만, 전부터 가언을 아들처럼 여기고 있었다.
가언은 자신을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네 개의 눈동자를 보고는 피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쑥스럽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두 분이 아버지와 어머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으니.
“아, 아, 아버지.”
아버지란 말은 쉽지 않았다. 친한 친구의 부모님께 쓰이기도 하는 걸 아는데도.
“나도, 나도 불러줘. 가언아.”
어머니는 더 어려웠다.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으니 ‘아버지’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언이 아주 어릴 때 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라고 부른 게 언제인지, 불러보기는 한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머니…….”
떨리는 목소리에서 한이 묻어났는지도 미주가 눈시울을 적셨다. 가언도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가언아. 은수의 뜻을 존중해줘. 좋아하는 마음을 강요하지 말아줘.”
네. 단호한 결심이 담겨 나왔다. 아줌마, 아니 어머니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은수를 소중히 여긴다면 아주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반은 허락 받았다고 해도, 은수의 마음을 얻어도, 성년이 되기 전에 건드리면 안 된다.”
중민이 심각해지는 분위기를 전환하며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가언이 급하게 부정했다.
“그럴 리 없잖아요! 은수는 아버지, 어머니 딸인데요! 그리고 은수가 성인이 되기 전에 저를 좋아해줄 지도 모르겠고요. 은수는 저를 옆집 살았던 동네오빠로만 생각할 텐데…….”
과장스럽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짝. 커다란 손이 축 쳐진 가언의 등을 내려쳤다.
“이렇게 자신이 없어서야. 남자는 자신감이다. 임마.”
“당신도 매일 나한테 져주잖아요. 부전자전이네요.”
미주가 타박을 하자 중민이 찔끔했다. 그리고 평안한 가정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둥, 자기 여자는 공주님으로 대해야 한다는 둥 변명을 해댔다.
그 모습을 보고 가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이 없어진다면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광경이었다.
“편하게 앉으래도. 말도 안 듣고. 가언이 고집이 보통이 아니네.”
허탈하게 나오는 한숨은 포기의 의미였다. 서글서글하고 능청스러운 가언이었지만 이런 면에서는 중년의 아저씨인 중민보다 고지식했다.
중민의 마음을 짐작하고 미주가 가볍게 웃었다. 결혼생활 19년 차의 아줌마였지만 중민이 처음만나 반했던 미소만큼은 여전히 청초했다.
“가언아. 아줌마가 가언이한테 할 말이 있어.”
“하세요. 무슨 말씀이든지 기꺼이 따를게요.”
무슨 말을 하든 넙죽 받아들일 것 같은 열린 자세였다. 중민이 그것을 지적했다.
“어험, 그러면 안 되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증서줄 녀석이네.”
“아저씨라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보증 서 드릴게요. 제가 어려서 얼마 안 될 거 같긴 한데 능력이 닫는 한에서 최대한…….”
“이가언! 그런 생각 다신 하지 마라!”
중민이 진심으로 호통을 쳤다. 가언은 푸스스 웃었다.
“아저씨, 농담하신 거 알아요. 전 진담이었지만요.”
“너 그런 식으로……!”
흥분하는 중민은 미주가 만류했다.
“여보, 그런 말 하려고 부른 거 아니잖아요.”
“흠흠, 이 이야기는 이따 다시 하자.”
힐끔 아내 눈치를 보고는 나중을 기약했다. 꼭 지금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아도 된다. 시간은 많으니까.
가언이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행복한 가정에서 지낼 수 있는 건 모두 둘의 호의 덕분이었다.
미주가 다시 분위기를 잡고 가언의 이름을 불렀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쉽게 꺼낼만한 이야기가 아님은 분명했다. 대부분 유쾌하게 지내는 두 분이었기 때문이다. 가언도 진지하게 네. 하고 대답했다.
미주는 그 후에도 한참 말을 고르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아줌마가 많이 생각해봤는데, 가언이가 은수 오빠가 되어주면 어떨까?”
“지금도 은수 오빠잖아요, 저.”
벌써 은수의 집에서 산지 대략 1년이 지났다.
은수에게 가언은 가족 같은 존재였다. 은수는 친구와 다퉜을 때도, 마음에 드는 그림이 그려졌을 때도, 심심할 때에도 가언을 먼저 찾았다. 은수와 있으면 자신이 꼭 필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기뻤다.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가언도 은수가 없어서는 안 됐다. 사무치는 외로움에 거리를 방황하다가도 은수와의 약속을 떠올리고 집에 들어왔다. 담배를 들다가도 은수가 싫어할 거라고 다시 내려놨다. 무의미한 일상에서 은수만이 그에게 의미를 가졌다.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입양되면 어떨까하고 묻는 거다.”
입양?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입양이요? 양자가 되라는 말씀이세요?”
“생각해 본 적 없겠지만 우리는 지금도 너를 아들이라고 생각해.”
그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두 분만큼 고마운 분들이 없었다. 어릴 때 돌아가신 어머니,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아버지. 친척들은 아버지의 유산만을 탐냈다. 자신은 어딜 가도 천덕꾸러기였을 것이다.
“저도 그래요. 아줌마……. 저요. 아줌마랑 아저씨 정말 존경해요. 단지, 옆집에 살면서 친해졌다는 이유로 저한테 필요한 돈 전부 내주시는 데다 살 곳까지 내어주신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 아니까요. 은수를 돌봐주는 대가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돌볼 사람이 필요할 정도로 은수가 말썽을 피우는 것도 아니니까요. 벌써 12살인데 그 정도면 자기 할 일은 할 수 있는 나이잖아요. 저는 그냥 은수랑 노는 것뿐이에요.”
“은수가 외롭지 않게 해주는 거, 그거 하나만으로 대단한 일이야. 가언아.”
“아니요. 그런 얘기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제가 아저씨랑 아줌마를 존경하고 있다는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새삼스럽고 쑥스럽기도 해서 제대로 말씀드린 적이 없었다. 존경한다고. 아저씨, 아줌마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사실 입양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한 가지만 빼면요.”
“걸리는 게 있구나.”
미주의 말에 말해야할지 말아야할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결국은 말하는 쪽을 택했다. 말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그들을 원망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있어요. 은수, 요.”
“은수는 자기 가족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기뻐할 거다. 동생을 만들어달라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가언이 은수의 반대를 걱정한다고 생각했는지, 중민이 몇 마디를 추가했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제가 은수의 호적상 오빠가 되면요.”
머릿속에 수많은 망설임이 스쳐지나갔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도 말하지 말까, 머뭇거렸다. 가언답지 않게 우물쭈물하자 중민과 미주가 궁금증을 키우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 이런 말씀 드리기 부끄러운데요. 제가, 하아…….”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여. 밥 다 태우겠다.”
“제가요. 제가, 은수를 좋아한다고 가정하면요……. 그리고 나중에 은수도 저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고…….”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어디 굴이라도 뚫어서 땅속으로 파고들 기세였다.
“그런데 제가 양자가 되면, 결혼 못 하잖아요…….”
작아지는 소리에 귀 기울이던 중민이 순식간에 이해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아! 그런 문제? 으하하.”
미주도 손으로 입가를 가렸지만 미처 웃음을 다 감추지는 못했다. 중민은 한참을 웃어재끼다가 진정하고는 엄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그런데 열두 살짜리 우리 딸을 노리는 거냐? 이거 안 되겠네.”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중민을 보고 가언은 쩔쩔맸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
“노리다뇨! 은수 아직 꼬만데요! 지금 당장 여자로 느낀다는 게 아니라! 앞으로 제가 은수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 달까. 운명이랄까. 어쨌든 나중에 가족이 되고 싶은 것뿐이라고요! 어떻게 해보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지켜주기만 할 거에요. 저도 열두 살짜리 애를 가지고 뭘 해보겠다는 불순한 생각 안 해요. 제가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해가 저물 때까지 이어질 것 같은 기나긴 변명이었다. 중민이 얼른 가언의 말을 가로챘다.
“뭘 그렇게 변명이 구구절절해. 네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그냥 우리 딸을 신붓감으로 찍어놨다니 괘씸해서 그렇지.”
“여보, 그만 놀려요. 애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미주의 입가에도 숨기지 못한 웃음이 묻어있었다. 가언은 그제야 장난임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가언아. 내가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중민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꺼냈다. 가언이 말씀하시라고 듣고 있다고 답하자 진중한 얼굴을 했다.
“우리 은수를 지켜다오. 모든 위험으로부터 은수를 보호해다오.”
“그럴게요. 은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동생이기도 한데 당연하죠. 근데, 은수 보호자인 아저씨, 아줌마가 든든히 버티고 계신데 제가 할 일이 남아있을까요.”
가언이 보기에 은수의 부모인 미주와 중민은 은수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약간 과보호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학교나 학원을 오갈 때 데려오고 데려다주는 건 물론이고, 어디 소풍이라도 가면 선생님 연락처부터 대절하는 버스 기사 연락처까지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그것도 은수 몰래.
“알다시피 나는 고아라서 혈육이 아무도 없고 우리 아저씨도 따로 친하게 지내는 친척이 없잖니. 만일의 경우, 가언이가 보호자가 되어주었으면 했어. 아직은 미성년이니까 나중에 말이야. 양자가 되어달라는 이유에는 너와 우리를 위해서기도 했지만 은수를 위하는 마음도 있었어.”
미주의 말에는 전제 하나 깔려있었다. 은수가 위험하다는 전제.
가언이 그에 대해 묻자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가언은 침묵에 짓눌려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은수가 위험하다니. 오해겠지?
중민의 손 위에 미주가 자신의 손을 겹쳤다. 중민이 고개를 돌리자 은은한 미소를 걸고 자신을 쳐다보는 아내를 볼 수 있었다. 눈빛에는 신뢰가 가득했다.
“은수는 말이다. 우리가 입양한 아이다.”
“……네?”
믿을 수 없었다.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은수가 입양아라니. 입양한 아이에게 그토록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걸까.
“아줌마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어. 그리고 은수를 만났고 입양하게 됐지. 그 때가 은수가 일곱 살일 때였단다.”
일곱 살이라면 사리 분별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런데 은수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어째서?
“의외지? 대부분 아주 어린 아기를 입양하는데 그런 경우가 아닌 것도, 그런데도 은수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은수는 말이야, 어떤 사건의 피해자였단다.”
그녀의 음성에 쓰라림이 묻어있었다.
“은수의 친 아버지가, 어머니와 오빠를 죽이고 은수마저도 죽이려 시도한 후, 자살한 사건이었어.”
가언은 숨을 들이켰다. 대충 상상만 해도 끔찍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자문을 해주러 친한 검사를 만나러 갔다가 은수를 만나게 됐단다.”
“은수는…… 전혀 기억을 못해요? 일곱 살이면…….”
“그 때, 시체와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는구나. 그래서인지 그 사건도, 가족에 대한 기억도 잃고……. 우리를 부모라고 생각하더구나. 우리는 은수가 그때의 기억을 찾지 못하기를 기도한다.”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 참혹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행복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은수에게 더 각별하게 신경 쓰는 거다. 은수가 기억을 못 찾도록.”
은수를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언은 속으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들을 세어봤지만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이토록 위험한 상황인데 가언은 그것도 모르고 너무 희망적인 생각만 했다고 자책했다. 내 주제에 결혼 못할 일을 걱정하다니. 낙천적인 은수에게 물이 들기라도 한 걸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은수 오빠가 되어 줄까요?”
미주가 그 마음을 짐작하겠다는 듯 기특해하며 살짝 웃었다. 자신의 마음보다 은수를 위하는 아이를 응원하지 않으면 누굴 응원한단 말인가.
“아니, 우리 가언이만큼 괜찮은 아이도 없지. 제안은 취소야. 가언아, 우리 사윗감이 되어주지 않을래?”
가언은 얼굴이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귓가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림이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사위도 아니고 사윗감이 되어달라고 하는 건, 말이 조금 이상할까요?”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이 녀석은 좋아하잖아. 얼굴 빨개진 거 봐.”
아줌마가 요상한 프로포즈를 하고 되짚어보자 아내 말이라면 신의 계시처럼 여기는 애처가가 아니라고 하며 가언을 놀렸다.
“아저씨!”
가언이 크게 중민을 불렀지만 홍조를 수습하지 못한 애송이가 무서울 리 없었다. 중민은 재밌어서 큭큭대며 웃었다.
“이제 예비사위가 된 김에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어떠니. 장인어른 대신에.”
“좋은 생각이에요. 아들 있었음 했는데. 이 기회에 아들 생긴 기분이나 내 볼까요?”
미주가 남편의 말에 동의했다.
낯선 집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언이 적응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말 한 마디 꺼낸 적 없었지만, 전부터 가언을 아들처럼 여기고 있었다.
가언은 자신을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네 개의 눈동자를 보고는 피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쑥스럽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두 분이 아버지와 어머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으니.
“아, 아, 아버지.”
아버지란 말은 쉽지 않았다. 친한 친구의 부모님께 쓰이기도 하는 걸 아는데도.
“나도, 나도 불러줘. 가언아.”
어머니는 더 어려웠다.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으니 ‘아버지’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언이 아주 어릴 때 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라고 부른 게 언제인지, 불러보기는 한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머니…….”
떨리는 목소리에서 한이 묻어났는지도 미주가 눈시울을 적셨다. 가언도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가언아. 은수의 뜻을 존중해줘. 좋아하는 마음을 강요하지 말아줘.”
네. 단호한 결심이 담겨 나왔다. 아줌마, 아니 어머니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은수를 소중히 여긴다면 아주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반은 허락 받았다고 해도, 은수의 마음을 얻어도, 성년이 되기 전에 건드리면 안 된다.”
중민이 심각해지는 분위기를 전환하며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가언이 급하게 부정했다.
“그럴 리 없잖아요! 은수는 아버지, 어머니 딸인데요! 그리고 은수가 성인이 되기 전에 저를 좋아해줄 지도 모르겠고요. 은수는 저를 옆집 살았던 동네오빠로만 생각할 텐데…….”
과장스럽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짝. 커다란 손이 축 쳐진 가언의 등을 내려쳤다.
“이렇게 자신이 없어서야. 남자는 자신감이다. 임마.”
“당신도 매일 나한테 져주잖아요. 부전자전이네요.”
미주가 타박을 하자 중민이 찔끔했다. 그리고 평안한 가정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둥, 자기 여자는 공주님으로 대해야 한다는 둥 변명을 해댔다.
그 모습을 보고 가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이 없어진다면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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