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조회 : 1,020 추천 : 0 글자수 : 6,744 자 2022-12-20
은수는 차근차근 머릿속을 정리했다. 과거에 대해 알고 싶었다. 오늘 집에 오기 전에는 친오빠인 산호에게 물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방향을 달리해야 했다.
“아빠. 엄마.”
결심이 어린 목소리에 중민과 미주가 진지하게 은수와 눈을 마주쳤다. 두 분에게 꼭 말해야할 결심이 하나 있었다.
“과거 사건에 대해서 조사해 봐야겠어요. 친부모님 사건이라면 조사해야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니라 저일 테니까요.”
일리 있는 발언이었다. 중민과 미주, 그리고 가언마저 납득했다. 자신의 친 가족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구와 친 아버지의 누명을 밝히고 싶은 충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엄마, 아빠는 제가 하는 일을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친 부모님의 일을 해결해달라는 건 너무 염치없는 일이잖아요.”
“그게 어째서 염치없는 일이냐. 은수, 네가 위험한데 아빠랑 엄마가 개입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중민이 못마땅하게 말했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일이고 하루아침에 끝날 일이 아니란 거 아시잖아요. 편지는 수상쩍어서 제대로 믿기 힘들고, 시간이 많이 지나서 조사하기 힘들 거예요. 그리고 만약 제 친아빠가 진짜 범인이라면, 너무 부끄러울 테니까…….”
만약,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내려지면 얼굴을 들 수 있을까. 얼굴도 모르는 그래도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였다. 솔직히, 혼자 조사하고 싶다.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그렇다면 적어도 부모님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기를 바랐다.
“절대 위험한 일은 절대, 절대로 하지 않을게요. 허락해주세요.”
노파심에 몇 번이고 은수를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가라앉은 얼굴을 한 중민이 은수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마지못해 허락했다.
“내키지 않는다만……. 은수 네 뜻을 존중하마. 우리는 한발 떨어져서 지켜볼 테니 마음껏 조사해도 좋디. 네가 위험해진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거 알아둬라.”
“가언아. 우리 대신 은수 도와 줄 수 있지?”
미주의 말에 가언이 알겠다고, 걱정 마시라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중민과 미주는 서운했지만 자신들이 은수의 부모이기 때문에 불편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
중민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수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걸을 알았다. 그러나 그 안에 존재하는 은수는 항상 처음 만났을 때의 어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걱정투성이 아빠가 되어버리는 것도 당연했다.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가언이 은수의 각오를 시험했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 그래도 네가 선택해야 해. 이 상황이 추리소설 속 한 장면이라면 주인공은 너니까. 네 의지가 가장 중요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조사할 수 있겠어? 진실에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겠어?”
“과거 사건의 진범이 친아빠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머리에 새겨두고 있어. 그렇지만 나를 해치려는 누군가가 있는 건 확실하잖아. 내 작업실에 들어와 그림을 가져가고, 나를 미행하고, 납치하려고까지 하고. 그 사건들이 우연히 일어났을까? 절대 아닐 거야.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나를 노리는 범인이 과거 사건의 진범과 동일인물이라면 더더욱 그래. 사건을 파헤쳐야 내게 닥친 위험을 없앨 수 있어. 덤으로 내 친아빠에게 씌워진 누명도 벗길 수 있고.”
“그래, 해보자.”
가언의 대답에 은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결과가 나오든 후회하지 않을게.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넘기 어려운 장애물이 생기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도 않을 거야.
은수는 다시 다짐하며 가슴 속에 새겨 넣었다.
*
평일 늦은 저녁. 법원 복도는 생각보다 분주했다. 은수는 가언을 따라 복도를 걸으며 두리번거렸다. 변호사나 검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잠깐씩 보였다가 각자의 일에 바빠 재빨리 사라지곤 했다.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거의 다 왔어. 우리는 조력자를 만나러 가는 중이야.”
“조력자?”
“너도 아는 분이야.”
“아는 분이라면…….”
한 검사 사무실 앞에 멈춰 가언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에 ‘정무건’이라고 쓰인 명패가 달려있다.
미리 약속이 돼 있었기 때문에 이때쯤 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무건이 바로 둘을 맞이했다. 수사관과 실무관은 퇴근한 건지 검사 사무실 안에는 무건 혼자 남아있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어, 다시 뵙네요. 안녕하셨어요.”
은수가 아는 검사라곤 한 명이었지만 진짜 무건을 보게 되니 얼떨떨했다. 문득 그를 까칠하게 대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미행당한 직후라고 해도 그렇게 날카롭게 구는 게 아닌데.
팔꿈치까지 접어 올린 흰 셔츠, 여미지 않은 셔츠 안에 비치는 화려한 프린트 티. 무릎이 다 나온 구제 청바지를 접어 올려서 훤히 드러난 발목. 하얀 스니커즈.
오늘 무건이 입은 옷은 ‘검사’ 하면 떠오르는 차림새와는 거리가 멀었다.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나이를 고려하면 쉽게 시도하기 어려운 스타일이었다.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 스타일이랄까?
나랑 만났던 날은 특별히 신경 써서 입고 왔던 걸까?
흘끔 무건의 명패가 놓인 자리를 살피니 검은색 정장 재킷이 보였다. 그나마 격식 차려야할 자리에 갈 때는 재킷을 입는 모양이다.
“다시 보게 됐네요. 강은수 씨. 이제는 말 편히 해도 되려나?”
인사를 하고 무건이 허락을 구하 듯 가언을 슬쩍 쳐다봤다. 그는 가언이 은수의 보호자나 다름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본인에게 직접 물으시죠.”
가언의 말투는 딱딱했다. 가언 형은 다시 보지 않을 사이라 해도 예의 있게 구는 편인데……?
무건이 가언의 말을 듣더니 오른쪽 눈썹 들썩거렸다.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그 반응을 보고 은수가 얼른 끼어들었다.
“괜찮아요. 말 편히 하세요.”
“그러면 사양 않고.
“그보다 전에 무례하게 대한 거 사과드릴게요. 죄송해요.”
“이해한다. 네 기억이 돌아왔는지 떠보려면 어쩔 수 없었지만 내가 너무 수상쩍기도 했고.”
아, 가언 형이 맞나 보구나. 그림 도난, 내 정체에 대해 말한 정보원은.
“그런데 이가언. 너, 나한테만 매정한 거지? 은수를 대하는 태도랑 나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다르네. 분명히 선배님이 분명히 남자답고 싹싹하다고 했는데. 왜 나는 그 싹싹함을 모르겠냔 말이다.”
무건이 투덜대자 가언이 가차 없이 대답했다.
“검사님께 잘 보일 일 없으니까요.”
“형, 검사님한테 왜 이렇게 무례해.”
가언의 행동을 지적한 후에야 왜 그러는지 감이 왔다. 이런 행동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무건은 시험당하고 있는 것이다. 가언의 테두리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닌지. 은수는 마음 안쪽으로 들여놓을지 고만할 만큼 무건을 믿는다는 뜻이겠지.
무건의 눈치를 살피니 진심으로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은수는 말을 돌렸다.
“검사님. 혹시 그 선배가 저희 아빠세요?”
“그래. 은수 너도 예전에 본 적이 있었지.”
“저는 전혀 기억이…….”
“벌써 14년 전이니 기억 못하는 게 당연하지.”
꽤나 오래된 인연이였다. 그보다 14년이라는 구체적인 햇수가 귀에 맴돌았다. 14년 전이라고 하면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제가 입양될 때네요.”
“그 일도 털어놓은 한 모양이구나. 하긴. 일이 묘하게 돌아가니 하루빨리 당사자도 위험을 인지하고 있어야 덜 위험해질 수 있겠지. 하여튼 그때에 네가 선배부부에게 입양될 수 있게 법적으로 조언을 해준 사람이 나다. 그 뒤로는 볼 수 없었다만. 그러고 보면 선배님도 참 철저한 분이야.”
철저하다니. 우리 아빠가? 에이 설마.
“우리 아빠가 얼마나 허술한데요. 수업자료 빼놓고 가셔서 저한테 가져다달라고 부탁하신 게 몇 번인데요. 오늘도 출근하는 길에 엄마한테 아침 뽀뽀했는지 안했는지 헷갈리셔서 저한테 물어보셨는데요.”
“여태까지 네게 말실수 한마디 없이 완벽하게 숨긴 사람이? 입양 사실을 숨긴다고 직장도, 집도 옮기고 지인들과 연락을 끊어버린 사람이? 그런 사람이 허술하다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검사님! 가언이 황급히 무건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이미 전부 들은 뒤였다.
“아차, 이 얘기는 하지 않았나?”
“아마 아버지는 끝까지 얘기하고 싶지 않으셨을 겁니다.”
무건이 말실수를 깨닫고 중민에게 제대로 사과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죄송하다고 말한들 돌이킬 수 없었다. 무건은 냉정하게 관계를 끊었던 중민을 이해했다.
이런 실수가 벌어지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은수는 멍하니 있다가 눈물이 비집고 나올 것 같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 하나 때문에 직장도 옮기고 이사까지 했다고? 지인들과 연락을 끊었다고?
어릴 때 고모들과 아빠가 왜 다퉜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입양 사실을 숨기기 위함이었겠지. 입양되었다는 걸 알았다면 친부모님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건 당시의 기억도 연달아 떠올리기 쉬웠겠지. 그랬다면 지금처럼 행복하고 안온하게 살아올 수 있었을까.
부모님이, 가언이 숨겨왔던 사실을 알면 알수록 그 마음이 버거웠다.
“도대체 다들 무슨 마음으로…….”
“이거 내가 울려버렸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 어떤 일이든 못할까. 어떤 희생도 기꺼이 해버리게 만들어버리는 게 사랑이지. 이혼한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은수는 무건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사건을 재조사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온 것이다.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감상에 빠진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눈물은 나중에 혼자서 흘려도 괜찮았다.
가언은 은수가 눈물을 그치는 동안 옆을 묵묵히 지켰다. 감정을 쌓아두기보다 바로 해소하는 게 은수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닥친 재난. 그 재난을 이겨내는 건 스스로 해야 했다. 그 누구도 섣불리 도와줄 수 없었다.
“서론은 여기까지만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은수는 어디까지 아니.”
감정을 추스른 은수가 답했다. 먹먹한 목소리였지만 말투는 분명했다.
“전 과거의 사건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다고 보시면 돼요. 실제로도 그렇고요. 처음부터 설명해주세요.”
갑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됐으니 엄살 피울 만도 한데. 무건은 씩씩한 태도를 흡족하게 여겼다. 그러나 내심을 숨기고 일어나서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툭. 보드마카를 들고 뚜껑을 열었다.
“그래. 그럼 대강 요약해 설명하마. 우리는 사건 기록을 토대로 과거의 사건을 재조사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어서 성과가 썩 좋지는 않다.
“네.”
“삼척 일가족 살인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치정으로 인한 살인사건으로 종결되었다. 관계가 복잡하니 앞으로는 그냥 이름으로 칭할 거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사건의 전말은 은수의 아버지인 박준원 씨가 어느 날 은수의 모친 홍지희 씨의…….”
“잠깐만요. 홍지희 씨라고 하셨어요? 제가 알고 있는 그 홍지희 맞아요?”
“그래. 한국화를 그리던 비운의 천재, 지금은 한국화의 대가로 알려진 홍지희 화백.”
“아……. 계속 해주세요.”
파면 팔수록 끊임없이 뭔가 끌려 나온다. 내가 감당할 수 있긴 한 거야?
친 엄마가 홍지희 화백이었다니……. 대략적인 내용을 인정하는 데도 한참 걸렸는데 또 다른 충격이 밀려왔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도 심장에 좋지 않은 자극적인 정보들만 골라서.
은수는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머리로만 이해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앞으로도 갈 길이 한참 남았는데 이정도로 흔들려서는 안 돼. 한 발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보자.
“그럼 이어서 말하지. 박준원 씨가 홍지희 씨의 불륜을 알게 되면서 몸싸움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홍지희 씨를 살해. 그 뒤 아들을 죽이고 딸까지 죽이려하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음을 깨닫고 박준원 씨가 자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지.”
화이트보드에 네 명의 이름과 관계가 적히고 화살표가 그려진다. 가언이 일어나면서 다른 보드마카를 잡았다. 그리고 ‘편지’라고 적었다.
“편지 관련 부분은 더 자세히 아니까, 내가 설명할게. 홍지희 씨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편지 내용을 토대로 탐문조사를 했어. 검사님께 소속된 수사관님이 같이. 그 내용은 신빙성이 있었어. 네 친부모님은 그 근방에서 알아주는 잉꼬부부였대. 아들은 착하고 똑똑해서 부러움을 샀고 딸은 애교 많아서 동네 사람들에게도 귀여움을 받았다고 해. 당시 경찰들도 의구심을 느꼈는지 여러모로 수사를 했지만 다른 용의자를 찾기엔 증거가 부족했어.”
“그럼 왜 치정살인이라고 단정 짓게 된 거야?”
“사건 현장에는 사진이 흩뿌려져 있었어.”
가언이 사건자료를 넘겨 사진을 찾았다. 여러 장의 사진이었지만 장소는 같았다. 어느 외진 골목의 모텔 앞이었다. 두 남녀가 화기애애하게 서로를 바라보기도 했고 서로 껴안고 있기도 했다.
“홍지희 씨와 한 남자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이 찍힌 이 사진.”
그는 사진 한 장을 골라 자석으로 화이트보드에 고정시켰다. 불륜사진 치고는 스킨십의 농도가 옅었지만 배경이 모텔이다 보니 의심스러웠다.
“저 사진속의 남자는 누구죠?”
“기록에 따르면 박산호 군이 다녔던 학원의 선생님, 임경태다. 범행시간으로 추정되는 7시에서 7시 30분 사이 학원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알리바이가 워낙 확실했으니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임경태가 홍지희와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고 하는데다 모텔에 간 적은 절대 없다고 끝까지 부인했다는 점이다.”
“모텔에 간 적이 없는데 모텔사진은 찍혔다고요?”
은수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발뺌하긴 어려웠을 거다.”
“그렇겠네요…….”
친 엄마의 불륜상대라니. 친 엄마의 존재도 아직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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