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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628 추천 : 0 글자수 : 6,775 자 2022-12-08
남자는 저를 위협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말을 하고 나서도 눈매가 가늘게 접히는 게 어쩐지 가증스러워 지호는 결연한 얼굴로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남자의 말은 거짓말일 확률이 높았다.
목숨을 끊으려 했던 노력이 보기 좋게 빗나갔을 때, 병원 천장을 올려다보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느꼈을 때, 그저 사무적으로 일 처리를 하는 의사를 만났을 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은 너무나도 편안하고 즐거워 보이면서도 날이 흐를수록 저를 찾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는 건 처음 맛보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제게도 가족이 있었다면, 친구가 있었다면, 애인이 있었다면, 외롭지 않았을 텐데.
퇴원을 할 때까지, 저를 찾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같은 병실 아주머니는 그런 저가 안쓰러워 음료수와 귤을 손에 꼭 쥐여주기도 했다.
정말로 제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애인이 맞다면, 왜... 저를 혼자 뒀을까. 걱정되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보고 싶지도 않았을까.
온갖 생각이 다 들수록, 입맛이 쓰고 가슴이 답답했다. 이런 씁쓸한 감정은 사치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호는 남자의 몸을 거칠게 밀쳐내며 사납게 노려봤다.
“다시는 여기 오지 마세요. 개소리도 적당히 하고.”
잊고 있었던 애인을 운명처럼 만난다는 동화 속의 이야기 그저 누군가가 지어낸 픽션에 불과했다. 전혀 현실성이 없다는 말이다.
“... 좆 같은 국화꽃도 그만 놓고 가.”
남자는 거짓말쟁이였다. 저를 병신으로 보지 않으면 그런 뻔한 거짓말을 당당하게 내뱉을 리가 없었다. 날 선 분위기로 경고를 하자, 남자의 입술 사이로 그 어떤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침묵은 뭘 의미하는 걸까.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반증하는 걸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남자를 매정하게 지나칠 때까지 침묵은 꺼지지 않았다. 지호가 걸음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서늘하던 남자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다음에 보자’
*
있는 집 자제들은 약혼식도 평범하게 하지 않았다. 에메랄드빛 바다 한가운데, 커다란 크루즈 안에서 화려한 드레스와 정장을 빼입고 호화롭게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야 했으니까.
격식에 맞게 검은 정장을 입은 지호는 배 안으로 가득 차는 사람들을 확인하며 무전기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건장한 체격 덕에 경호 일을 하게 되었지만, 크루즈에 타는 건 처음이었다.
“와~ 돈 지랄도 정성껏 하네.”
지호의 옆에 선 현우가 비아냥거렸다.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의 자제들답게 선상에서 약혼식을 한다며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지호는 애써 현우의 말을 모른 척하며 곧 출항하는 크루즈 배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보니 HG 그룹의 윤재하가 모 기업의 차녀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기사로 접한 적이 있었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의도치 않게 현장에 놓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도 부럽긴 하네. 나도 돈이 있었으면 수진이에게 이렇게 해줬을 텐데.”
“윤재하라고 했나, 이번에 약혼하는 사람.”
윤재하에 관한 정보는 그 기사가 끝이었다. 국적이나 거주지도 알 수 없고, 심지어 나도는 사진 한 장 없는 비밀스러운 남자. 그런 그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꽤 좋은 경험이 될 듯했다.
“이제 한국에 자리 잡을 때가 됐지. 힘들겠네, 미국 양반이.”
“미국인이야?”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미국이거든.”
생긴 것만 한국인이지, 속 알맹이는 미국인이나 다름없어. 아마 한국말도 제대로 못 할걸.
현우가 피식 웃으며 VIP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식당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문 앞에 선 현우는 뒷짐을 졌다. 수많은 사람들 한가운데, 딱 봐도 눈에 띄는 한 남자가 길쭉한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지호는 본능적으로 저 남자가 윤재하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일을 하면서 별 이상한 소문은 다 듣는데, 윤재하는 진짜 또라이야.”
재하를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자, 흐릿한 시야가 바로 잡혔다. 비록 옆모습 뿐이지만, 높은 콧대와 고고하게 아래로 내리깐 눈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는 약혼녀를 맞은편에 두고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웬만하면 눈도 마주치지 마. 혹시라도 엮이면 곤란하니까.”
현우가 주의를 줬지만 지호의 시선은 여전히 재하를 향했다. 길쭉한 손가락으로 와인잔을 우아하게 들고는 입을 축이는 모습은 괴팍한 소문과는 다르게 고상했다. 윤재하. 어딘가 익숙한 듯하면서 낯선, 아버지를 찾아오는 유일한 인물. 그리고, 모두가 잊어버린 제 과거와 단단히 얽힌 기억의 잔상.
윤재하는 어떤 사람일까. 왜 아버지의 묘를 찾아온 걸까. 마치 미리 짜인 각본처럼 지호는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재하를 두 눈으로 담았다.
재하의 유리 같은 손톱과 긴 손가락, 새하얀 가죽,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길게 뻗은 목과 갸름한 턱선, 피가 내비치는 입술과 인형처럼 긴 속눈썹에 가려진 무쌍의 길쭉한 눈매. 잔을 흔들 때마다 넘실거리는 붉은 와인을 쳐다보는 그 눈매가 아주 느릿하게 올라가더니 저를 관찰하는 지호를 향했다.
약혼녀가 아니라 애먼 사내새끼를 쳐다보는 재하의 행동에 지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제게 박힌 윤재하의 관심에 진득한 쾌감을 느꼈다. 평생 엮일 리 없을 부류의 남자가 제 애인 따위 제쳐두고 저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 크루즈의 주인공이, 발에 치여도 모를 엑스트라를 인식했다는 사실에 짜릿함이 전신을 타고 퍼져나갔다.
질 낮은 방법으로 자존감을 채우는 것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지호는 재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약혼식이 시작하고 재하가 약혼녀의 손을 잡고 단상 위로 오를 때까지.
lie 1.
챙! 들고 있던 식칼을 떨어뜨린 지호는 겁에 질린 듯 창백한 낯으로 경련하듯이 몸을 떨었다. 바닥도, 벽도, 제 두 손바닥도 모두 다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칼에 찔린 채로 쓰러진 중년의 남자가 보이자 심장이 크게 널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이 칼을 쥐고 저 남자의 배를 찔렀다고. 지호는 좌우를 둘러보며 서둘러 입고 있던 피 묻은 셔츠를 벗어 던진 뒤 욕실로 뛰어가 손을 닦고 또 닦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사람을 죽였다는 걸 들킨다면 어떻게 될까. 아니, 왜 들킬 생각부터 하는 거야? 이 상황을 수습부터 해야 하잖아.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수습해?
욕실을 나와 다시 거실에 도착한 지호는 멍하니 시체를 내려다 봤다.
... 죽은 게 맞겠지.
차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엄지손톱만 물어뜯던 와중에,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의 시체를 토막내고, 그걸 가방에 넣은 뒤에 땅에 묻자.
잔인했지만 제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지호는 축 늘어진 남자의 두 다리를 잡고 욕실로 질질질 끌었다. 남자가 끌려간 자리마다 핏자국이 길게 묻어났다.
“... 다 아저씨가 잘못 한 거니까. 죗값을 받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남자를 욕실에 늘어뜨린 지호가 싸늘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난 잘못 없어요. 다, 다 아저씨가 못된 사람이라서, 날 괴롭혀서, 나는 그냥 살기 위해 몸부림친 것뿐이에요.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이 상황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었다.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는 몸으로 지호는 방금 전 자신이 소파 아래로 떨어뜨린 식칼을 들고 다시 욕실로 들어가 쿵. 문을 닫았다.
토막내기에는 남자의 몸은 너무나도 크고, 그 뼈는 단단하고, 근육은 질겼다. 제가 쥐고 있는 식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돼지나 소도 도축해본 적 없는 애송이가 사람을 손쉽게 토막 낸다니, 그게 정말 가능할까. 칼이 두꺼운 가죽을 뚫으면 솟아오르는 피는, 튀어나오는 내장은, 그것들은 다 어떡하게.
“.... 끅, 윽,”
결국 지호는 자리에 주저앉아 입을 꾹 닫은 채로 흐느꼈다. 이 모든 게 거짓말이었으면 했다.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누군가 저를 구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구세주는 제 인생에서만큼은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개 같은 인생을 온전히 혼자서 버텨내야 했다.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오늘도... 오늘도 역시 다르지 않아. 이 위기만 이겨내면....
“...흐..!”
그때, 초인종이 크게 울렸다. 초인종 소리에 화들짝 놀란 지호는 숨을 죽인 뒤 불안한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딩-동 다시 한번 초인종이 울리자 이번에는 벌떡 일어나 세면대 앞으로 걸어가 거울을 봤다.
초인종 소리는 몇 분 동안 계속해서 집안 전체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지호는 무언가에 쫓기는 양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피 묻은 얼굴과 목을 물로 씻어냈다.
초인종을 눌렀음에도 문을 열어주지 않자, 이번에는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집의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지호는 욕실을 뛰쳐나가 현관 앞에 다다랐다.
끼이익- 문이 아주 천천히 열리고 사랑해 마지않는 윤재하의 얼굴이 드러났다. 재하는 상의를 탈의한 채로 핼쑥한 지호를 발견하고서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더워?”
“... 으, 응.. 더, 더워서.. 벗,었어...”
“... 병신, 한겨울인데 왜 더워.”
재하가 피식 웃으며 신발을 신은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지호는 피가 날 정도로 손톱을 물어 뜯으며 그 뒤를 졸졸 쫓았다. 재하가 그걸 보면 안 됐다. 그러면, 그러면... 더 이상 나 같은 건 취급해주지도 않을 텐데.
“재, 재하야... 나랑 밖으로 나가자. 바, 밖으로 나가서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고, 영화도 볼래?”
이제 몇 걸음만 떼면 거실이었다. 지호는 필사적으로 재하의 팔을 붙잡았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밖에서 놀자, 윽, 밖으로 나가자.. 응?
애처롭게 애원해도 재하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지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좌우로 연신 흔들었다. 갈색의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눈물이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리다가 바닥을 적셨다.
“가지 마, 가지 마 재하야, 내가, 읏, 끄윽 내가, 이렇게 부탁하잖아...”
그때, 그토록 바라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지호가 헐떡거리며 얼굴을 흠뻑 적신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재하가 제 말을 들어줬다는 희열과 함께, 바닥에 길게 번진 핏자국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지호야, 너 사람 죽였어?”
윤재하는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아이였다. 그래서, 고작 저 핏자국을 보고 사람을 죽였다는 걸 단번에 알아챈 거겠지. 지호는 창백해진 채로 그 어떠한 말도 하지 못 했다. 그저 오늘따라 더 넓어 보이는 재하의 뒷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지호가 대답하지 않자, 몸을 돌린 재하가 무감정한 표정으로 지호의 두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응? 사람 죽였냐고 묻잖아 지금!”
“... 주... 죽였어. 나... 나아, 사람... 죽였는데... 이제 어떡... 어떡하지.”
“어디 있는데?”
“.. 뭐, 뭘..?”
“시체 어디 있냐고.”
직설적인 물음에 지호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시체를, 그 흉한 걸 재하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보고 역겹다고 토하면 어떡하지? 아, 아니, 이제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미움받고 싶지 않은데...
필사적으로 숨기려 해도, 바보 같게도 지호의 눈은 굳게 닫힌 욕실 문으로 향했다. 그걸 눈치 챈 재하가 욕실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아, 안 돼, 가, 가지 마..! 가지 말라고!!”
세상 사람 다 저를 미워해도, 재하는 그러면 안 됐다. 재하만큼은 저를 좋아해야 했다. 지호는 소리를 지르며 그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재하의 단단한 몸을 꼭 껴안고 자리에 주저앉아 어깨까지 떨어가며 울었다.
“... 무서워 재하야. 나... 나 너무 무서워. 네가 날 싫어할까 봐 그게 윽, 너무 무서워..”
이런 상황에서도 오로지 한 사람의 애정만을 갈구하는 꼴이 정말로 우습게 느껴졌다. 재하는 망설이지도 않고 제 옷을 적시는 지호의 머리통을 옆으로 슬쩍 밀었다. 낡고 허름한, 방 두 개짜리 빌라는 거실에서 화장실로 가는 거리가 굉장히 짧았다. 몇 걸음만으로 단숨에 도착한 재하는 이윽고 겁도 없이 욕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재하는 시체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예상과는 다르게 그 어떠한 혐오표현도 내비치지 않고 시체 앞으로 다가가 검지와 중지로 목덜미를 짚으며 맥을 확인했다.
“칼 가져와.”
“... 응?”
“칼.”
“... 왜, 왜?”
그리고는 지호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지호는 핏기 하나 없는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더듬었다. 그 멍청한 모양새에 내내 무표정을 유지했던 재하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안 죽었잖아.”
재하의 말은 적잖은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그의 미소가, 마냥 사랑스러웠던 보조개가 일순간 일그러져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괴이한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윤재하는 아름다운 껍데기 속에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숨긴 아이였다. 감정을 느끼지 않는 괴물. 지호는 저 괴물에게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했다. 영원히 저를 찾을 수 없는, 죽음과도 같은 곳으로.
“......”
방을 환하게 밝히는 눈 부신 햇살에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뜨니 벌써 아침이었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을 끈 지호가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켰다. 꿈인지, 아니면 이미 지나간 과거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했다.
어째서 그런 꿈을 꾼 걸까. 윤재하의 존재가 그 정도로 강렬했던 건가. 뻐근한 눈을 문지르며 이미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는 재하의 웃음을 떠올렸다. 위로 올라간 입꼬리와 여우처럼 가늘어진 눈.
평소에는 꿈이란 건 잘 꾸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윤재하의 존재가 강렬하게 인상에 남은 듯했다. 지호는 이마를 짚으며 끔찍하기만 한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나려 애썼다. 잠기운이 몽롱하게 정신을 흐트러뜨렸지만, 잠들면 또다시 악몽을 꿀 것 같았다.
목숨을 끊으려 했던 노력이 보기 좋게 빗나갔을 때, 병원 천장을 올려다보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느꼈을 때, 그저 사무적으로 일 처리를 하는 의사를 만났을 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은 너무나도 편안하고 즐거워 보이면서도 날이 흐를수록 저를 찾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는 건 처음 맛보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제게도 가족이 있었다면, 친구가 있었다면, 애인이 있었다면, 외롭지 않았을 텐데.
퇴원을 할 때까지, 저를 찾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같은 병실 아주머니는 그런 저가 안쓰러워 음료수와 귤을 손에 꼭 쥐여주기도 했다.
정말로 제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애인이 맞다면, 왜... 저를 혼자 뒀을까. 걱정되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보고 싶지도 않았을까.
온갖 생각이 다 들수록, 입맛이 쓰고 가슴이 답답했다. 이런 씁쓸한 감정은 사치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호는 남자의 몸을 거칠게 밀쳐내며 사납게 노려봤다.
“다시는 여기 오지 마세요. 개소리도 적당히 하고.”
잊고 있었던 애인을 운명처럼 만난다는 동화 속의 이야기 그저 누군가가 지어낸 픽션에 불과했다. 전혀 현실성이 없다는 말이다.
“... 좆 같은 국화꽃도 그만 놓고 가.”
남자는 거짓말쟁이였다. 저를 병신으로 보지 않으면 그런 뻔한 거짓말을 당당하게 내뱉을 리가 없었다. 날 선 분위기로 경고를 하자, 남자의 입술 사이로 그 어떤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침묵은 뭘 의미하는 걸까.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반증하는 걸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남자를 매정하게 지나칠 때까지 침묵은 꺼지지 않았다. 지호가 걸음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서늘하던 남자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다음에 보자’
*
있는 집 자제들은 약혼식도 평범하게 하지 않았다. 에메랄드빛 바다 한가운데, 커다란 크루즈 안에서 화려한 드레스와 정장을 빼입고 호화롭게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야 했으니까.
격식에 맞게 검은 정장을 입은 지호는 배 안으로 가득 차는 사람들을 확인하며 무전기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건장한 체격 덕에 경호 일을 하게 되었지만, 크루즈에 타는 건 처음이었다.
“와~ 돈 지랄도 정성껏 하네.”
지호의 옆에 선 현우가 비아냥거렸다.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의 자제들답게 선상에서 약혼식을 한다며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지호는 애써 현우의 말을 모른 척하며 곧 출항하는 크루즈 배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보니 HG 그룹의 윤재하가 모 기업의 차녀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기사로 접한 적이 있었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의도치 않게 현장에 놓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도 부럽긴 하네. 나도 돈이 있었으면 수진이에게 이렇게 해줬을 텐데.”
“윤재하라고 했나, 이번에 약혼하는 사람.”
윤재하에 관한 정보는 그 기사가 끝이었다. 국적이나 거주지도 알 수 없고, 심지어 나도는 사진 한 장 없는 비밀스러운 남자. 그런 그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꽤 좋은 경험이 될 듯했다.
“이제 한국에 자리 잡을 때가 됐지. 힘들겠네, 미국 양반이.”
“미국인이야?”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미국이거든.”
생긴 것만 한국인이지, 속 알맹이는 미국인이나 다름없어. 아마 한국말도 제대로 못 할걸.
현우가 피식 웃으며 VIP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식당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문 앞에 선 현우는 뒷짐을 졌다. 수많은 사람들 한가운데, 딱 봐도 눈에 띄는 한 남자가 길쭉한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지호는 본능적으로 저 남자가 윤재하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일을 하면서 별 이상한 소문은 다 듣는데, 윤재하는 진짜 또라이야.”
재하를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자, 흐릿한 시야가 바로 잡혔다. 비록 옆모습 뿐이지만, 높은 콧대와 고고하게 아래로 내리깐 눈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는 약혼녀를 맞은편에 두고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웬만하면 눈도 마주치지 마. 혹시라도 엮이면 곤란하니까.”
현우가 주의를 줬지만 지호의 시선은 여전히 재하를 향했다. 길쭉한 손가락으로 와인잔을 우아하게 들고는 입을 축이는 모습은 괴팍한 소문과는 다르게 고상했다. 윤재하. 어딘가 익숙한 듯하면서 낯선, 아버지를 찾아오는 유일한 인물. 그리고, 모두가 잊어버린 제 과거와 단단히 얽힌 기억의 잔상.
윤재하는 어떤 사람일까. 왜 아버지의 묘를 찾아온 걸까. 마치 미리 짜인 각본처럼 지호는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재하를 두 눈으로 담았다.
재하의 유리 같은 손톱과 긴 손가락, 새하얀 가죽,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길게 뻗은 목과 갸름한 턱선, 피가 내비치는 입술과 인형처럼 긴 속눈썹에 가려진 무쌍의 길쭉한 눈매. 잔을 흔들 때마다 넘실거리는 붉은 와인을 쳐다보는 그 눈매가 아주 느릿하게 올라가더니 저를 관찰하는 지호를 향했다.
약혼녀가 아니라 애먼 사내새끼를 쳐다보는 재하의 행동에 지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제게 박힌 윤재하의 관심에 진득한 쾌감을 느꼈다. 평생 엮일 리 없을 부류의 남자가 제 애인 따위 제쳐두고 저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 크루즈의 주인공이, 발에 치여도 모를 엑스트라를 인식했다는 사실에 짜릿함이 전신을 타고 퍼져나갔다.
질 낮은 방법으로 자존감을 채우는 것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지호는 재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약혼식이 시작하고 재하가 약혼녀의 손을 잡고 단상 위로 오를 때까지.
lie 1.
챙! 들고 있던 식칼을 떨어뜨린 지호는 겁에 질린 듯 창백한 낯으로 경련하듯이 몸을 떨었다. 바닥도, 벽도, 제 두 손바닥도 모두 다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칼에 찔린 채로 쓰러진 중년의 남자가 보이자 심장이 크게 널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이 칼을 쥐고 저 남자의 배를 찔렀다고. 지호는 좌우를 둘러보며 서둘러 입고 있던 피 묻은 셔츠를 벗어 던진 뒤 욕실로 뛰어가 손을 닦고 또 닦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사람을 죽였다는 걸 들킨다면 어떻게 될까. 아니, 왜 들킬 생각부터 하는 거야? 이 상황을 수습부터 해야 하잖아.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수습해?
욕실을 나와 다시 거실에 도착한 지호는 멍하니 시체를 내려다 봤다.
... 죽은 게 맞겠지.
차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엄지손톱만 물어뜯던 와중에,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의 시체를 토막내고, 그걸 가방에 넣은 뒤에 땅에 묻자.
잔인했지만 제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지호는 축 늘어진 남자의 두 다리를 잡고 욕실로 질질질 끌었다. 남자가 끌려간 자리마다 핏자국이 길게 묻어났다.
“... 다 아저씨가 잘못 한 거니까. 죗값을 받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남자를 욕실에 늘어뜨린 지호가 싸늘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난 잘못 없어요. 다, 다 아저씨가 못된 사람이라서, 날 괴롭혀서, 나는 그냥 살기 위해 몸부림친 것뿐이에요.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이 상황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었다.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는 몸으로 지호는 방금 전 자신이 소파 아래로 떨어뜨린 식칼을 들고 다시 욕실로 들어가 쿵. 문을 닫았다.
토막내기에는 남자의 몸은 너무나도 크고, 그 뼈는 단단하고, 근육은 질겼다. 제가 쥐고 있는 식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돼지나 소도 도축해본 적 없는 애송이가 사람을 손쉽게 토막 낸다니, 그게 정말 가능할까. 칼이 두꺼운 가죽을 뚫으면 솟아오르는 피는, 튀어나오는 내장은, 그것들은 다 어떡하게.
“.... 끅, 윽,”
결국 지호는 자리에 주저앉아 입을 꾹 닫은 채로 흐느꼈다. 이 모든 게 거짓말이었으면 했다.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누군가 저를 구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구세주는 제 인생에서만큼은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개 같은 인생을 온전히 혼자서 버텨내야 했다.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오늘도... 오늘도 역시 다르지 않아. 이 위기만 이겨내면....
“...흐..!”
그때, 초인종이 크게 울렸다. 초인종 소리에 화들짝 놀란 지호는 숨을 죽인 뒤 불안한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딩-동 다시 한번 초인종이 울리자 이번에는 벌떡 일어나 세면대 앞으로 걸어가 거울을 봤다.
초인종 소리는 몇 분 동안 계속해서 집안 전체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지호는 무언가에 쫓기는 양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피 묻은 얼굴과 목을 물로 씻어냈다.
초인종을 눌렀음에도 문을 열어주지 않자, 이번에는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집의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지호는 욕실을 뛰쳐나가 현관 앞에 다다랐다.
끼이익- 문이 아주 천천히 열리고 사랑해 마지않는 윤재하의 얼굴이 드러났다. 재하는 상의를 탈의한 채로 핼쑥한 지호를 발견하고서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더워?”
“... 으, 응.. 더, 더워서.. 벗,었어...”
“... 병신, 한겨울인데 왜 더워.”
재하가 피식 웃으며 신발을 신은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지호는 피가 날 정도로 손톱을 물어 뜯으며 그 뒤를 졸졸 쫓았다. 재하가 그걸 보면 안 됐다. 그러면, 그러면... 더 이상 나 같은 건 취급해주지도 않을 텐데.
“재, 재하야... 나랑 밖으로 나가자. 바, 밖으로 나가서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고, 영화도 볼래?”
이제 몇 걸음만 떼면 거실이었다. 지호는 필사적으로 재하의 팔을 붙잡았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밖에서 놀자, 윽, 밖으로 나가자.. 응?
애처롭게 애원해도 재하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지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좌우로 연신 흔들었다. 갈색의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눈물이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리다가 바닥을 적셨다.
“가지 마, 가지 마 재하야, 내가, 읏, 끄윽 내가, 이렇게 부탁하잖아...”
그때, 그토록 바라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지호가 헐떡거리며 얼굴을 흠뻑 적신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재하가 제 말을 들어줬다는 희열과 함께, 바닥에 길게 번진 핏자국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지호야, 너 사람 죽였어?”
윤재하는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아이였다. 그래서, 고작 저 핏자국을 보고 사람을 죽였다는 걸 단번에 알아챈 거겠지. 지호는 창백해진 채로 그 어떠한 말도 하지 못 했다. 그저 오늘따라 더 넓어 보이는 재하의 뒷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지호가 대답하지 않자, 몸을 돌린 재하가 무감정한 표정으로 지호의 두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응? 사람 죽였냐고 묻잖아 지금!”
“... 주... 죽였어. 나... 나아, 사람... 죽였는데... 이제 어떡... 어떡하지.”
“어디 있는데?”
“.. 뭐, 뭘..?”
“시체 어디 있냐고.”
직설적인 물음에 지호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시체를, 그 흉한 걸 재하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보고 역겹다고 토하면 어떡하지? 아, 아니, 이제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미움받고 싶지 않은데...
필사적으로 숨기려 해도, 바보 같게도 지호의 눈은 굳게 닫힌 욕실 문으로 향했다. 그걸 눈치 챈 재하가 욕실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아, 안 돼, 가, 가지 마..! 가지 말라고!!”
세상 사람 다 저를 미워해도, 재하는 그러면 안 됐다. 재하만큼은 저를 좋아해야 했다. 지호는 소리를 지르며 그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재하의 단단한 몸을 꼭 껴안고 자리에 주저앉아 어깨까지 떨어가며 울었다.
“... 무서워 재하야. 나... 나 너무 무서워. 네가 날 싫어할까 봐 그게 윽, 너무 무서워..”
이런 상황에서도 오로지 한 사람의 애정만을 갈구하는 꼴이 정말로 우습게 느껴졌다. 재하는 망설이지도 않고 제 옷을 적시는 지호의 머리통을 옆으로 슬쩍 밀었다. 낡고 허름한, 방 두 개짜리 빌라는 거실에서 화장실로 가는 거리가 굉장히 짧았다. 몇 걸음만으로 단숨에 도착한 재하는 이윽고 겁도 없이 욕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재하는 시체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예상과는 다르게 그 어떠한 혐오표현도 내비치지 않고 시체 앞으로 다가가 검지와 중지로 목덜미를 짚으며 맥을 확인했다.
“칼 가져와.”
“... 응?”
“칼.”
“... 왜, 왜?”
그리고는 지호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지호는 핏기 하나 없는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더듬었다. 그 멍청한 모양새에 내내 무표정을 유지했던 재하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안 죽었잖아.”
재하의 말은 적잖은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그의 미소가, 마냥 사랑스러웠던 보조개가 일순간 일그러져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괴이한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윤재하는 아름다운 껍데기 속에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숨긴 아이였다. 감정을 느끼지 않는 괴물. 지호는 저 괴물에게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했다. 영원히 저를 찾을 수 없는, 죽음과도 같은 곳으로.
“......”
방을 환하게 밝히는 눈 부신 햇살에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뜨니 벌써 아침이었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을 끈 지호가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켰다. 꿈인지, 아니면 이미 지나간 과거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했다.
어째서 그런 꿈을 꾼 걸까. 윤재하의 존재가 그 정도로 강렬했던 건가. 뻐근한 눈을 문지르며 이미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는 재하의 웃음을 떠올렸다. 위로 올라간 입꼬리와 여우처럼 가늘어진 눈.
평소에는 꿈이란 건 잘 꾸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윤재하의 존재가 강렬하게 인상에 남은 듯했다. 지호는 이마를 짚으며 끔찍하기만 한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나려 애썼다. 잠기운이 몽롱하게 정신을 흐트러뜨렸지만, 잠들면 또다시 악몽을 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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