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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927 추천 : 0 글자수 : 5,068 자 2022-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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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몰아치던 날, 미리 챙겨온 우산 하나로 거센 비바람을 뚫으며 버스에서 내린 지호는 다급한 걸음으로 오르막길을 올랐다. 서둘러 집에 도착해 비에 젖은 옷을 벗고 얼음장처럼 굳은 몸을 따듯한 물로 적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지호의 바람과는 다르게 허름한 대문 앞에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들은 담배를 꼬나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다가, 지호를 발견하고는 화색이 된 표정으로 손짓했다.
“혹시 이지호 씨 되십니까?”
그리고는 신분증을 보이며 우직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경찰입니다. 조금 전 이종호 씨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이종호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끊겨버린 기억 사이로 실종이 된, 얼굴을 보지 않은 지 꽤 된 유일한 혈육. 지호는 멍청하게 형사 두 명을 응시하며 떨떠름하게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사실,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른아른했다. 그리고, 애초에 그렇게 좋은 부모도 아니었기에 아버지의 시신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다.
아버지를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막장인생. 그것 뿐이었다. 나가지 말라며 바짓가랑이 붙잡은 어린 아들을 발로 차고 기어이 도박을 하러 뛰쳐나간 사람이 뭐가 좋을까. 도박에 중독되면 손목을 잘라도 소용 없다는데, 아버지는 그것보다 더 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도박을 하기 위해 강원도로 올라가서 전재산을 탕진한 뒤 사채까지 끌어다 썼으니까.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버지의 시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혈육이란 게 그렇게 끈끈하지도 않았으니까. 아버지를 향한 사랑보다 증오가 더 크니까.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지호는 머릿속은 여러 가지 계산들로 가득했다.
지금 자신이 시신 인수를 포기한다면, 아버지는 무연고자로 처리될 것이다. 지호는 장례를 치루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과 제 통장에 찍힌 숫자의 개수를 떠올렸다. 아르바이트로 빠듯하지만, 장례를 치루고 뼛가루가 든 유골함을 봉안당에 안치하기 위해 필요한 돈은 충분히 있었다.
여기서 저가 아버지를 거부한다면, 그리고 이게 아버지에게 복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면.
결국 지호는 선심 쓰듯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를 자신이 거두고, 마음껏 원망하며 아버지의 미련한 삶을 한심해 할 기회를 놓칠 수야 없었다. 형사는 차 뒷좌석 문을 열고 지호를 태운 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빗길을 헤쳤다.
형사를 따라 영안실에 다다르자 스테인리스 탁자 위에 누운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한 지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마 남아있는 아버지의 생전 모습과 확연하게 변해 있었다. 숨김 없이 말하자면, 너무 부패한 나머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의 썩은 살가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형사는 아버지의 시신을 무감정한 눈으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도박으로 인한 사채빚이 있다고, 강원도 야산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는데, 그곳이 자살 명소로 아주 유명하다고. 평소 빚으로 인해 비관적인 말을 했다며 아버지의 사망 원인을 자살이라고 말했다.
지호는 그 어떠한 의심 없이 형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수긍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일말의 감정도 요동치지 않았다. 정말 제 아버지가 맞는 걸까. 하지만 경찰들의 덤덤한 태도가 이 시신이 이종호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장례가 잘 끝이 나고 항아리는 봉안당 안치단에 놓이게 되었다. 꽃이나 사진으로 장식된 다른 사람들의 공간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공간은 깨나 썰렁했다.
지호의 손끝이 안치단의 유리를 매만지다가, 툭.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죽어서까지 외로운 운명은 아무래도 유전인 듯싶었다. 흉측한 시신을 보고서도 일렁거리지 않던 동정심이 지금 이 순간 파도처럼 철썩거리며 밀려오니 말이다.
삼 년 전, 죽기 위해 한강으로 몸을 날린 이후로 열일곱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분명, 그때 아버지와 엮인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이토록 미워했던 건데.
아버지를 생각하면 저를 괴롭히는 기억 한조각이 떠오르려 했지만, 지호는 걸림돌에 가로막힌 듯 어느 한 지점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아버지 만큼이나 저를 뒤흔들었던 존재는 먼지보다 작은 족적만을 남기고 모든 기억과 함께 잊혀졌다.
마치 처음부터 만난 적 없다는 것처럼. 집요하게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알싸한 통증이 머리 전체를 제 멋대로 쥐고 주물렀다. 그 존재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다. 이마를 짚은 지호의 손이 서서히 그러쥐더니 힘없이 툭 떨어졌다.
사고와 함께 겨우 지워버린 기억을... 굳이 되찾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래, 어찌됐든 아버지는 다행으로 알아야 했다.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면, 시신을 인수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 생각을 끝으로 지호는 등을 돌리고 봉안당을 빠져나갔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지 벌써 며칠이나 지나 있었다. 비가 쏟아지던 그 날과는 다르게 오늘의 날씨는 굉장히 맑았다. 손차양으로 햇빛을 가리고는 더위에 티셔츠를 펄럭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앞으로 자주 올 장소니까 눈에 익어야 했다. 시선 끝에는 시원한 에어컨이 돌아가는 카페가 있었다. 지호의 걸음이 망설임 없이 카페로 향했다. 그 후로 지호는 일주일마다 빼먹지 않고 봉안당으로 향했다. 물론, 챙겨오는 건 없었다. 멍하니 서서 아버지의 유골함을 보다가 돌아가는 게 일이었다.
“야, 거기 너! 왜 이렇게 느려 터졌어 씨발!”
컨베이어벨트에 끊임없이 택배들이 내려오고, 지호는 재빨리 주소에 맞는 택배를 찾아내 택배차 안으로 집어넣기를 몇 시간 째 반복했다. 순발력과 체력이 필요한 일이라 계속되는 노동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어느덧 상의까지 벗어 던진 채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바닥난 힘에 움직임이 굼뜨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야! 너는 또 뭐하는 거야, 멀뚱히 서서!”
그걸 알아챈 아저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지호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늘상 듣는 익숙한 고함 소리였다. 이곳에서 단련된 아저씨들은 바쁘게 돌아가는 현장 상황으로 사람들을 이름 대신 거기, 너, 씨발이라고 불렀고,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어쩌면 이름이 불린다는 건 사치일지도 몰랐다. 한 타임 쉬고 나면 아르바이트생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으니까. 택배를 들고 가득 찬 트럭 바로 앞에 내려놓자, 순간 시야가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기도 전에 등 뒤에서 아저씨가 또다시 저를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아무래도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끝나는 삶일지도 몰랐다. 지호는 굽은 허리를 가까스로 펴고 다시 컨베이어벨트 앞으로 뛰어갔다. 요즘 들어 자주 앞이 흐려지고 식은땀이 났지만, 굳이 직접 병원으로 가지 않았다. 굳이 죽어서는 안 될 이유란 없으니까.
주말이 되자마자 지호는 지하철을 타고 봉안당으로 향했다. 늘 걷는 거리를 걷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유골함이 안치된 안치단 앞에 섰다. 그러자 유골함 앞에 새하얀 국화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
지호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국화를 한참동안 바라봤다. 일주일에 한 번, 일 년 동안 이곳으로 꾸준히 왔지만 그동안 아버지를 찾은 사람은 없었다. 인맥이라고는 같은 도박꾼밖에 없는 주제에, 국화꽃 마저도 과분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봤지만 역시나 국화를 놓고 간 사람의 흔적은 발견하지도 못했다.
“아버지도 꽃이란 걸 다 받아보네요.”
아버지 같은 사람이 이걸 받다니, 죽고 나서야 이런 간지러운 선물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꽃을 아니꼽게 쳐다보던 지호는 후드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누군지 몰라도, 꽃을 놓고 간 사람을 찾아야 했다. 미친놈이 분명하니까.
범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 봉안당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후 두 시. 하지만 오늘은 한 시에 도착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허전한 봉안당 내부에서, 저번에 국화 꽃을 놓고 간 의문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안치단 앞에 선 지호는 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가벼운 기도와 함께 눈꺼풀을 뜨자, 옆자리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핏에 맞는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석고처럼 창백한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 머리카락과 흑요석 같은 눈동자. 보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미남의 손에는 국화가 들려 있었다.
맞잡은 손을 푸른 지호가 싸늘한 눈으로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쪽이에요?”
남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끼이익- 유리문을 열고 국화를 안에 넣은 다음 문을 닫았다. 그 행동에 지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아버지와 무슨 사이에요?”
“지호는 아직도 아버지를 미워하나 봐.”
“... 뭐?”
남자의 동굴같은 목소리에 지호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유골함에만 머물렀던 남자의 시선이, 빨려들어갈 듯 새카만 눈동자가 서서히 움직여 저를 향했다.
“신기하네. 기억을 잃어도, 감정은 남아있는 걸 보니.”
“... 무슨... 말을...”
“그럼 지호야, 나는 어때, 나를 보면 아직도 간지럽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지호를 향해 남자는 손을 뻗었다. 하얗고 길쭉한 검지가 지호의 쇄골에서부터 가슴 정중앙까지 뱀처럼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설레고... 떨려?”
남자는 나른하게 웃으며 지호의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의뭉스러운 행동에 지호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남자의 손목을 덥썩 움켜쥐었다.
“... 너, 나 알아?”
얄밉게도 지호의 추궁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 아냐고..!”
다시 한 번 되묻자, 남자가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그러자 양쪽 뺨에 보조개가 예쁘게도 생겼다.
“잘 알지. 나는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
“......”
알고지낸 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낯선, 익숙하지 않은 날것같았다. 삼킨다면 지나가는 자리마다 깊숙이 베일 게 분명했다. 지호는 본능적으로 이 남자가 위험하다는 걸 직감했다. 남자는 애초에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게 아니었다. 명확한 목표는 따로 있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뒷걸음질 치자, 남자가 피식 웃으며 역으로 지호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남자의 얼굴이 목덜미에 닿을락 말락 스치자, 지호는 입술을 꾹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뒤이어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고막을 애태웠다.
“섹스하던 사이였잖아, 우리.”
어두운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몰아치던 날, 미리 챙겨온 우산 하나로 거센 비바람을 뚫으며 버스에서 내린 지호는 다급한 걸음으로 오르막길을 올랐다. 서둘러 집에 도착해 비에 젖은 옷을 벗고 얼음장처럼 굳은 몸을 따듯한 물로 적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지호의 바람과는 다르게 허름한 대문 앞에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들은 담배를 꼬나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다가, 지호를 발견하고는 화색이 된 표정으로 손짓했다.
“혹시 이지호 씨 되십니까?”
그리고는 신분증을 보이며 우직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경찰입니다. 조금 전 이종호 씨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이종호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끊겨버린 기억 사이로 실종이 된, 얼굴을 보지 않은 지 꽤 된 유일한 혈육. 지호는 멍청하게 형사 두 명을 응시하며 떨떠름하게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사실,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른아른했다. 그리고, 애초에 그렇게 좋은 부모도 아니었기에 아버지의 시신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다.
아버지를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막장인생. 그것 뿐이었다. 나가지 말라며 바짓가랑이 붙잡은 어린 아들을 발로 차고 기어이 도박을 하러 뛰쳐나간 사람이 뭐가 좋을까. 도박에 중독되면 손목을 잘라도 소용 없다는데, 아버지는 그것보다 더 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도박을 하기 위해 강원도로 올라가서 전재산을 탕진한 뒤 사채까지 끌어다 썼으니까.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버지의 시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혈육이란 게 그렇게 끈끈하지도 않았으니까. 아버지를 향한 사랑보다 증오가 더 크니까.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지호는 머릿속은 여러 가지 계산들로 가득했다.
지금 자신이 시신 인수를 포기한다면, 아버지는 무연고자로 처리될 것이다. 지호는 장례를 치루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과 제 통장에 찍힌 숫자의 개수를 떠올렸다. 아르바이트로 빠듯하지만, 장례를 치루고 뼛가루가 든 유골함을 봉안당에 안치하기 위해 필요한 돈은 충분히 있었다.
여기서 저가 아버지를 거부한다면, 그리고 이게 아버지에게 복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면.
결국 지호는 선심 쓰듯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를 자신이 거두고, 마음껏 원망하며 아버지의 미련한 삶을 한심해 할 기회를 놓칠 수야 없었다. 형사는 차 뒷좌석 문을 열고 지호를 태운 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빗길을 헤쳤다.
형사를 따라 영안실에 다다르자 스테인리스 탁자 위에 누운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한 지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마 남아있는 아버지의 생전 모습과 확연하게 변해 있었다. 숨김 없이 말하자면, 너무 부패한 나머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의 썩은 살가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형사는 아버지의 시신을 무감정한 눈으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도박으로 인한 사채빚이 있다고, 강원도 야산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는데, 그곳이 자살 명소로 아주 유명하다고. 평소 빚으로 인해 비관적인 말을 했다며 아버지의 사망 원인을 자살이라고 말했다.
지호는 그 어떠한 의심 없이 형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수긍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일말의 감정도 요동치지 않았다. 정말 제 아버지가 맞는 걸까. 하지만 경찰들의 덤덤한 태도가 이 시신이 이종호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장례가 잘 끝이 나고 항아리는 봉안당 안치단에 놓이게 되었다. 꽃이나 사진으로 장식된 다른 사람들의 공간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공간은 깨나 썰렁했다.
지호의 손끝이 안치단의 유리를 매만지다가, 툭.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죽어서까지 외로운 운명은 아무래도 유전인 듯싶었다. 흉측한 시신을 보고서도 일렁거리지 않던 동정심이 지금 이 순간 파도처럼 철썩거리며 밀려오니 말이다.
삼 년 전, 죽기 위해 한강으로 몸을 날린 이후로 열일곱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분명, 그때 아버지와 엮인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이토록 미워했던 건데.
아버지를 생각하면 저를 괴롭히는 기억 한조각이 떠오르려 했지만, 지호는 걸림돌에 가로막힌 듯 어느 한 지점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아버지 만큼이나 저를 뒤흔들었던 존재는 먼지보다 작은 족적만을 남기고 모든 기억과 함께 잊혀졌다.
마치 처음부터 만난 적 없다는 것처럼. 집요하게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알싸한 통증이 머리 전체를 제 멋대로 쥐고 주물렀다. 그 존재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다. 이마를 짚은 지호의 손이 서서히 그러쥐더니 힘없이 툭 떨어졌다.
사고와 함께 겨우 지워버린 기억을... 굳이 되찾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래, 어찌됐든 아버지는 다행으로 알아야 했다.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면, 시신을 인수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 생각을 끝으로 지호는 등을 돌리고 봉안당을 빠져나갔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지 벌써 며칠이나 지나 있었다. 비가 쏟아지던 그 날과는 다르게 오늘의 날씨는 굉장히 맑았다. 손차양으로 햇빛을 가리고는 더위에 티셔츠를 펄럭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앞으로 자주 올 장소니까 눈에 익어야 했다. 시선 끝에는 시원한 에어컨이 돌아가는 카페가 있었다. 지호의 걸음이 망설임 없이 카페로 향했다. 그 후로 지호는 일주일마다 빼먹지 않고 봉안당으로 향했다. 물론, 챙겨오는 건 없었다. 멍하니 서서 아버지의 유골함을 보다가 돌아가는 게 일이었다.
“야, 거기 너! 왜 이렇게 느려 터졌어 씨발!”
컨베이어벨트에 끊임없이 택배들이 내려오고, 지호는 재빨리 주소에 맞는 택배를 찾아내 택배차 안으로 집어넣기를 몇 시간 째 반복했다. 순발력과 체력이 필요한 일이라 계속되는 노동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어느덧 상의까지 벗어 던진 채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바닥난 힘에 움직임이 굼뜨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야! 너는 또 뭐하는 거야, 멀뚱히 서서!”
그걸 알아챈 아저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지호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늘상 듣는 익숙한 고함 소리였다. 이곳에서 단련된 아저씨들은 바쁘게 돌아가는 현장 상황으로 사람들을 이름 대신 거기, 너, 씨발이라고 불렀고,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어쩌면 이름이 불린다는 건 사치일지도 몰랐다. 한 타임 쉬고 나면 아르바이트생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으니까. 택배를 들고 가득 찬 트럭 바로 앞에 내려놓자, 순간 시야가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기도 전에 등 뒤에서 아저씨가 또다시 저를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아무래도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끝나는 삶일지도 몰랐다. 지호는 굽은 허리를 가까스로 펴고 다시 컨베이어벨트 앞으로 뛰어갔다. 요즘 들어 자주 앞이 흐려지고 식은땀이 났지만, 굳이 직접 병원으로 가지 않았다. 굳이 죽어서는 안 될 이유란 없으니까.
주말이 되자마자 지호는 지하철을 타고 봉안당으로 향했다. 늘 걷는 거리를 걷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유골함이 안치된 안치단 앞에 섰다. 그러자 유골함 앞에 새하얀 국화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
지호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국화를 한참동안 바라봤다. 일주일에 한 번, 일 년 동안 이곳으로 꾸준히 왔지만 그동안 아버지를 찾은 사람은 없었다. 인맥이라고는 같은 도박꾼밖에 없는 주제에, 국화꽃 마저도 과분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봤지만 역시나 국화를 놓고 간 사람의 흔적은 발견하지도 못했다.
“아버지도 꽃이란 걸 다 받아보네요.”
아버지 같은 사람이 이걸 받다니, 죽고 나서야 이런 간지러운 선물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꽃을 아니꼽게 쳐다보던 지호는 후드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누군지 몰라도, 꽃을 놓고 간 사람을 찾아야 했다. 미친놈이 분명하니까.
범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 봉안당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후 두 시. 하지만 오늘은 한 시에 도착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허전한 봉안당 내부에서, 저번에 국화 꽃을 놓고 간 의문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안치단 앞에 선 지호는 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가벼운 기도와 함께 눈꺼풀을 뜨자, 옆자리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핏에 맞는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석고처럼 창백한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 머리카락과 흑요석 같은 눈동자. 보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미남의 손에는 국화가 들려 있었다.
맞잡은 손을 푸른 지호가 싸늘한 눈으로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쪽이에요?”
남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끼이익- 유리문을 열고 국화를 안에 넣은 다음 문을 닫았다. 그 행동에 지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아버지와 무슨 사이에요?”
“지호는 아직도 아버지를 미워하나 봐.”
“... 뭐?”
남자의 동굴같은 목소리에 지호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유골함에만 머물렀던 남자의 시선이, 빨려들어갈 듯 새카만 눈동자가 서서히 움직여 저를 향했다.
“신기하네. 기억을 잃어도, 감정은 남아있는 걸 보니.”
“... 무슨... 말을...”
“그럼 지호야, 나는 어때, 나를 보면 아직도 간지럽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지호를 향해 남자는 손을 뻗었다. 하얗고 길쭉한 검지가 지호의 쇄골에서부터 가슴 정중앙까지 뱀처럼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설레고... 떨려?”
남자는 나른하게 웃으며 지호의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의뭉스러운 행동에 지호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남자의 손목을 덥썩 움켜쥐었다.
“... 너, 나 알아?”
얄밉게도 지호의 추궁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 아냐고..!”
다시 한 번 되묻자, 남자가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그러자 양쪽 뺨에 보조개가 예쁘게도 생겼다.
“잘 알지. 나는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
“......”
알고지낸 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낯선, 익숙하지 않은 날것같았다. 삼킨다면 지나가는 자리마다 깊숙이 베일 게 분명했다. 지호는 본능적으로 이 남자가 위험하다는 걸 직감했다. 남자는 애초에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게 아니었다. 명확한 목표는 따로 있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뒷걸음질 치자, 남자가 피식 웃으며 역으로 지호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남자의 얼굴이 목덜미에 닿을락 말락 스치자, 지호는 입술을 꾹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뒤이어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고막을 애태웠다.
“섹스하던 사이였잖아,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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